법화경 알기

『법화경』에 나타난 행함과 구원의 상관성 고찰

수선님 2020. 2. 23. 12:49

법화경에 나타난 행함과 구원의 상관성 고찰

차 차석/동국대 강사


• 목차 •

Ⅰ. 서론

Ⅱ. 불교적 구원인 열반의 개념

1. 근본불교의 열반관

2. 대승불교의 열반관

Ⅲ. 『법화경』의 행함과 열반의 관계

1. 『법화경』의 열반관

2. 『법화경』의 사회의식

3. 행함과 열반의 논리적 관계

Ⅳ. 결론


Ⅰ. 서론


사회적 실천과 그것을 통한 구원의 성취라는 문제는 70년대 이후 한국 종교계, 특히 기독교의 영향을 받아 불교계에서도 많은 관심을 기울여온 테마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괄목할만한 업적이 축적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종교의 사회적 존재의의나 기능이 무엇인가에 대한 내적인 성찰이 이러한 문제에 대한 폭넓은 관심을 이끌어내었으며, 이러한 사조는 시간이 흐를수록 보다 많은 호응을 받을 것으로 생각한다. 특히 문헌사학을 중심으로 연구되고 있는 한국불교학계에 새로운 연구의 지평을 열어줄 수 있는 것으로도 생각한다. 더하여 응용불교학의 필요성이 점증하고 있는 불교학계의 현실을 감안하면 졸론이 추구하고자 하는 주제는 현실성과 실용성을 겸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만큼 불교학계에서는 졸론의 주제가 생경하다는 표현이기도 하다.


행함과 구원의 관계에 관한 불교적 고찰은 매우 광범위하여, 그 범위를 대승불교의 대표적 경전 중의 하나인 ?법화경?으로 한정하고자 한다. 또한 행함의 학술적인 개념을 사회적 실천으로 규정하고자 하며, 불교적 구원을 열반으로 정의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불교적 구원을 일반적으로 깨침이나 열반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는데 깨침의 불교적 용어가 열반이기 때문이다. 행함이나 사회적 실천 혹은 종교의 세속화운동 등의 용어들은 불교학계 내부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것들이 아니다. 시대에 적응하기 위한 혹은 시대적 영향 내지 요청에 따른 새로운 시도이니 만큼 조심스러우며, 분명한 개념이 정립될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졸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법화경』에서 말하는 사회적 실천은 구원과 어떠한 논리적 정합성을 지니는지를 중심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Ⅱ. 불교적 구원인 열반의 개념


1. 근본불교의 열반관


불교의 궁극적 목표는 대중을 해탈로 인도하는 것, 즉 열반을 얻게 하는 것이라고 요약해서 말할 수 있다. 경전에선 이것을 “바닷물은 단 한가지 맛, 즉 짠맛만 지니고 있다. 그처럼 法과 律도 단 한가지의 맛 즉 해탈의 맛을 지니고 있다”라 말한다.


涅槃이란 용어는 nirvana라는 범어를 音譯한 것이며, 그것은 ‘불어서 끈다[吹消], (바람이) 불다’ 등의 의미에서 파생되어 소멸을 의미하는 용어로 정착되었다. 그렇다고 이 용어가 불교의 專用語는 아니며, 힌두교나 자이나교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인도에서 불교 이외의 다른 종교들은 니르바나 보다는 ‘moksa(해탈)’ 혹은 ‘mukti(해방)’이라는 용어를 더 좋아한다. 따라서 열반이란 용어는 거의 불교의 전문 술어로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물론 해탈 내지 해방이란 의미의 moksa 내지 mukti란 말도 불교에서 사용되고 있지만 그것은 주로 열반이란 의미와 거의 구별없이 사용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베다」에서 말하는 해탈이란 ‘夭折하지 않는 것’을 지칭한다. 그것은 지상에서 100년을 사는 것이다. 「브라흐마나」에서 말하는 해탈이란 ‘저승에서 다시 죽는 것으로부터의 해방’이었다. 바꾸어 표현한다면 신들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것은 제사를 지냄으로써 가능하다고 설명한다. 「우파니샤드」에서는 윤회이론의 출현과 함께 해탈의 의미도 변화를 맞게 된다. 그것은 ‘윤회의 굴레로부터 해방’ 혹은 ‘윤회의 악몽으로부터 인간존재의 해방’을 의미하는 용어로 탈바꿈한다. 그리고 「우파니샤드」는 해탈을 얻기 위해서는 제사를 지낼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그것은 해탈을 방해하는 요인이라 지적한다. 다만 개체적인 영혼인 아트만과 우주적 영혼인 브라흐만과의 결합(梵我一如)을 통해서만 해탈을 얻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 진정한 구원과 해방 즉 해탈은 범아일여에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이 불교의 열반관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던 것이다.


인도 전래의 사상적 풍토 속에서 불타는 두 가지 의미의 열반을 설파하고 있다. 그것은 有餘涅槃과 無餘涅槃이다. 그리고 열반이란 인도 전래의 용어를 불교에 수용하여 새롭게 개념을 규정한 불타의 목적은 종교적 實證主義者인 불타 자신과 마찬가지로 현재의 육신으로 영원한 열반을 스스로 체험하고 타인에게도 체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本願으로 삼았기 때문이라 본다. 여하튼 두 가지의 열반에 대한 개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유여열반: 現身解脫 즉 번뇌의 단멸을 말한다. 확대하면 上下의 十分結, 축소해서 말하면 貪瞋癡의 3毒, 보다 근본적으로 말하자면 無明과 渴愛가 사라진 當體를 유여열반이라 한다. 열반이란 용어의 의미가 ‘불어서 끈다’(吹滅)란 말에서 유래한 것을 상기해 본다면 불타 자신은 번뇌의 불길이 꺼진 當體라는 의미에서 이것을 열반이라 이름한 것이다. 이러한 열반의 개념은 매우 소극적이며,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성격이 강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존재하는 상태로서의 열반’이며, 이것을 불타는 ‘不死’, ‘상태’, ‘장소’의 의미로 설명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불타는 깨달음을 성취한 직후 녹야원에서 가진 첫 번째의 설법에서 다음과 같이 천명하고 있다.


(A) “귀를 열어라. 나는 不死에 이르렀다. 그래서 나는 道를 설한다. 만일 너희들이 이 길을 따른다면 대단히 빠르게 너희들 스스로 알게 될 것이고, ....너희들이 이 不死를 지니고 살게 될 것이다....”

(B)“내 자신이 태어나는 것에 복종하면서 태어나는 것에 싫증이 나서 不生, 최상의 안락, 열반을 추구했다. (그래서) 나는 불생, 열반을 얻었다”


이상 (A), (B)의 인용문은 涅槃과 不死를 동일한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는 경우이다. 이외에도 絶對安穩, 淸凉, 最高樂이라고도 하는데 이러한 개념들은 적극적인 실천적 힘이라고 볼 수도 있다. 요컨대 유여열반의 경계는 소극적으로 말하면 번뇌가 없는 상태이고, 적극적으로 말하면 영원불변하는 힘의 근거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이것은 체험자의 인격이나 행동을 통하여 표현되는 것들이다. 특히 불교에는 神, 梵, 神我와 같은 表徵的 원리가 없기 때문에 이것을 표현하는 방식이 소극적인 형태로 나타난 것이라 보아야 한다.


(2) 無餘涅槃: 이것은 일반적으로 消滅狀態로서의 열반으로 정리하고 있다. 즉 일체는 因緣所生이고 인연을 떠나서는 어떤 것도 있을 수 없다는 존재들이 이 인연의 굴레를 벗어난 當體, 즉 無明이 소멸하여 行이 소멸하고, 행이 소멸하여 識이 소멸하고 내지 生老死가 소멸한 당체를 지칭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을 논리적으로 추론하자면 虛無의 異名이라 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염세적 소극적 포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5온을 이탈한 ‘絶四句 超百非’의 경지로서 다만 ‘聖者만이 아는 것’이며, 경험상의 유무거래 등의 개념으로는 思量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철학적으로 표현하면 ‘法性의 당체에 歸一한 경계’로 이해할 수 있으며, 현상계의 연기법칙과 해탈의 법칙이 움직이지 않는 차원의 세계(不動位)에 의거한 당체와 합일하는 것이다. 경전에서는 이러한 내적 체험의 세계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이와같이 일체의 受를 지혜로운 자는 覺知할 수 있다. 여러 가지 수를 覺知한 사람은 現法에 서 모든 漏를 없애며, 지혜를 밝힌 자는 죽어서 사람의 부류[衆數]에 떨어지지 않는다. 사람의 성향[衆數]가 이미 멸하여서는 영원히 반열반의 세계에 머물게 된다”

『잡아함경』 권17 (대정장2, 119c). “如此一切受 慧者能覺知/ 覺知諸受者 現法盡諸漏/ 明智者命終 不墮於衆數/ 衆數旣已斷 永處般涅槃”.


그러나 이상의 인용문을 통해 표현되는 무여열반의 세계는 그 개념이 쉽게 우리들의 뇌리에 입력되지 않는다. 그런데 프레드릭 스트랭은 ‘그것은 존재의 한계로부터 벗어나는 자유뿐만이 아니라 모든 존재들과의 相依相關을 보여주기 위한, 즉 주객대립을 떠난 상호연기성을 실현하기 위한 자유’로 파악하고 있다. 이것은 아집을 완전히 끊은 자아의 空性을 일깨우는 것으로 정의되며, 大悲를 실천함으로써 구체화될 수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근본불교의 열반관에 대해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다. 이러한 열반을 성취하였을 경우에 대하여 『잡아함경』에서는


“저 欲과 無欲에서 일체의 고뇌를 벗어난다. 이와같이 고뇌에서 나오며, 이와같이 고뇌를 벗어난다”

대정장2, p.161a. 於彼欲無欲, 解脫一切苦, 如是於苦出, 如是苦解脫.


고 한다. 자신의 內外에서 일어나는 욕망과 애착을 벗어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한다. 또한 고뇌에서 벗어나 열반을 체득한 사람을 阿羅漢이라 부르며, 이 아라한의 경지에 들어간 사람은 “나의 생이 다하고, 청정한 행이 이미 섰으며, 할 일을 이미 마치고 後有를 받지 않는다”(我生已盡 梵行已立 所作已辨 不受後有).고 말한다. 이 인용문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後有를 받지 않는다는 구절이다. 즉 後有는 윤회를 의미하는 것이므로 윤회의 흐름 속에 다시는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약하자면 근본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의 특징은 윤회를 벗어나는 삶의 획득이라 말할 수 있다.

2. 대승불교의 열반관


체르바스키에 의하면 대승불교의 열반관의 특징은


“욕망 등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해탈의 보상으로 획득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절대적 원리와 같이 영원한 것도 아니다. 결코 사라질 수도 없고, 생겨날 수도 없는 것으로서 표현 불가능한 본질이다. 열반은 참으로 모든 다양성이 고요해졌음을 의미한다. 욕망이나 존재의 요소 등의 止滅은 우리의 상상에 의한 잘못된 생각의 구조일 뿐이다. 잘못된 우리의 생각의 구조를 없애는 것이 진정한 열반이다.” (테오도르 체르바스키저, 종서역, 「열반의 개념」, p.144 (경서원,1994)


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의 정의에 의거한다면 열반이란 의식의 전환이라 단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대승불교의 열반관을 지나치게 단순화시킨 일면이 있다. 대승불교의 대표적 논서의 하나인 「대지도론」은 열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五衆(인간구조의 總體)은 바로 일체 세속의 마음이 행한 바의 結縛處이고, 열반은 바로 寂滅相이다. 보살은 반야바라밀의 예리한 지혜의 힘을 지니고 있으므로 능히 五衆을 혁파하고 통달하여 空하게 만든다. 바로 이것이 열반적멸의 모습이다. 적멸로부터 나와서 六情 속에 머문다. (그러면서도) 다시 적멸의 모습을 생각하는 것이다”

대정장25, 643a. “五衆是一切世間心所行結縛處. 涅槃是寂滅相. 菩 薩 以般若波羅蜜利智慧力故. 能破五衆通達令空. 卽是涅槃寂滅相. 從寂滅出住六情中. 還念寂滅相


이상의 인용문에 따른다면 대승의 열반관은 근본불교의 열반관과 달리 단순한 욕망의 지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이고 내적인 체험을 통해 열반을 증득하고 다시 인간들의 욕망이 차고 넘치는 六情의 세계 속에 머물면서 적멸의 모습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반야지혜를 깨달아 空을 실천하는 것이며, 그렇다고 이 空의 실천이 삶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 것이 열반이라 정의하는 것이다. 이런 차원이라면 열반을 安養이라 번역하는데 깊은 사회적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며, 동시에 그것이 지나치게 세속화하여 본질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차원에서 六情 속에 있으되 寂滅을 잊지 않는 것이라 정의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것은 근본불교의 열반관을 계승하면서도 그 의미를 보다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사상적 外延을 확장하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것은 전술한 「대지도론」의 인용문에 이어지는 문장에서 ‘세간이 모두 공이요 虛誑하며 堅實하지 않음을 아는 것, 이것을 반야라 이름한다. 반야를 실천하는 것은 정해진 모습(定相)이 없기 때문에 얻을 수 없는 것이라 말한다’는 구절이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반야와 열반은 동일한 개념을 주체와 작용의 차원에서 분리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열반의 작용인 지혜는 정해진 형상이 없기에 불가득이라 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열반의 세계는 체험과 실천의 차원으로 파악할 수 있으며, 우리들의 삶 속에서 구체화될 수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대지도론」은 다시 다음과 같은 설명을 더하고 있다.


“열반은 바로 일체가 법 안에 있어서 궁극 無上의 법이다. ...老病死의 苦가 있을 수 없고, 邪見, 貪愛 등에 빠짐이 없으며,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는 괴로움이 없고 원망하고 미워하는 자와 만나는 고통이 없다. 또한 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괴로움이 없으며, 無常, 虛誑, 敗壞, 變異 등이 없다. 요약해서 말한다면 열반은 이와같은 일체의 고통이 다하여 畢竟常樂이다. 시방의 諸佛과 보살과 제자들이 끝내 돌아가야할 곳이다. 安穩하고 常樂하기는 이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다. 끝내 마왕, 魔人으로 인해 깨지는 일이 없다”

전게서, 449b. “涅槃是一切法中究竟無上法... 無有老病死苦. 無有邪 見貪恚等諸衰. 無有愛別離苦. 無怨憎會苦. 無所求不得. 苦無常虛誑 敗壞變異等一切皆無. 以要言之 涅槃是一切苦盡. 畢竟常樂. 十方諸 佛菩薩弟子衆所歸處.安穩常樂無過是者. 終不爲魔王魔人所破”.


이것 또한 현실을 떠난 열반은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대지도론」에서는 ‘幻夢涅槃不二不別’이라 표현하고 있다.


『대승열반경』에 의하면 열반의 異名을 17種(대정장12, 563c. 여기서 無生, 無出, 無作, 無爲, 歸依, 窟宅, 解脫, 光明, 燈明, 彼岸, 無畏, 無退, 安處, 寂靜, 無相, 無二, 一行, 淸凉, 無闇, 無礙, 無諍, 無濁, 廣大, 甘露, 吉祥) 등 근본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의 성격과 기타의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 열거하고 있다. 그것들은 근본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의 개념을 확충한 것으로서 보다 실천적인 성격을 강하게 표출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대승열반경의 성격을 보다 선명하게 밝혀주는 것이 열반이 지닌 8種의 기능이다. 즉 常, 恒, 安, 淸凉, 不老, 不死, 無垢, 快樂이다. 이들의 성격을 분석하면 대체적으로 실존적인 성향이 표출되고 있으며, 이것은 인간들이 가장 희구하는 요소들이란 점을 쉽게 알 수 있다. 바로 열반의 세계에 들어가면 인간들의 실존적 질곡을 해결할 수 있다는 논리가 성립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대승열반경은 열반의 실체에 대하여


“세간 사람들이 말한대로 허공은 無色 無礙하며 언제나 變易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세상에서는 허공의 법은 다섯 번째로 크다고 말한다. 선남자야 그러나 이 허공은 진실로 자성이 있을 수 없다. 광명 때문에 그래서 허공이라 이름한다. 진실로 허공은 없다. 마치 세속제는 그 자성이 없는데도 중생을 위하기 때문에 세속제가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선남자야, 열반의 실체도 역시 이와 같아서 머물 곳이 없느니라[無有住處]. 진실로 諸佛이 번뇌를 끊어버린 곳이기에 열반이라 이름하며, 열반은 바로 常樂我淨이니라”

전게서, 513b. “如世間人說言虛空無色無礙常不變異. 是故世稱虛空 之法爲第五大. 善男子. 而是虛空實無有性. 以光明故名虛空. 實無虛 空. 猶如世諦實無其性. 爲衆生故說有世諦. 善男子. 涅槃之體亦復如 是. 無有住處. 直是諸佛斷煩惱處故名涅槃. 涅槃卽是常樂我淨”.


라 말한다. 바로 『대승열반경』에서 말하는 열반의 특징은 無住處涅槃이라 하는 것이다. 머무는 곳이 없는 열반이란 바로 보살의 사회적 실천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용어라는 점에서 대승불교의 열반관은 매우 적극적이고 실천적이다.


「섭대승론」에서도 이러한 대승불교의 열반관을 ‘일체의 유정을 이롭고 즐겁게 하기 위하여 修行을 發願하고 大菩提를 증득한다. 필경 열반이란 도리에 상응하지 않는다’고 무주처열반을 표현하고 있으며, 이것은 제불 보살이 ‘해야만 할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라 본다. 또한 10-34頌에서 佛身의 열반에 대하여 ‘어떻게 아는가. 법신 가운데서 부처가 반드시 열반에 들어가지 않는지, 또한 열반에 들어가는지를’. 이어서 게송으로 대답하고 있는데, ‘일체의 장애를 벗어났기 때문에, 하는 바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부처는 반드시 열반하기도 하고 열반하지 않기도 한다’고 한다.


이것은 부처가 이 세상에서 해야할 일이 끝나버리면 열반할 것이지만 그렇지 않고 해야할 일이 끝나지 않았으면 열반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파악하고 중생의 존재가 무한하기 때문에 부처가 열반할 수 없다고 보는 무주처열반이 강조되는 것이라 본다. 모두가 보살의 사회적 실천과 결부되어 열반이 파악되고 있다는 점을 말한다. 그리고 이것이 대승열반관의 일반적 특징이다.


또한 무여열반 내지 무주처열반이 절대적인 法性에 歸一한 當體로 본다면 그것은 어떠한 작용을 하는 것인가. 물론 근본불교의 입장에선 영원한 寂靜, 절대적 休息의 상태라 말할 수 있다. 그것을 절대적 법성이라 지칭하던, 아니면 절대적 의지라 명명하던 그것은 當體 자체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현상계의 입장에선 隱沒不現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法性이며, 意志性으로서 動的인 작용력을 구비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불타의 本願이 중생구제에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현상을 비추어주는 구제의 길로 열어가려고 했던 것이 대승불교라고 말할 수 있다.


대승열반관의 또 다른 특징의 하나는 ‘願生菩薩思想’에서 찾을 수 있다. 즉 수행의 결과로 열반을 체득하면 苦樂이나 業報輪廻는 문제로 삼지 않고 스스로 자원하여 사바세계에 태어난다고 하는 사상이다.


“여러 보살마하살은 여러 有情들을 利樂하고자 하여 大地獄에 들어가고자 원한다. 들어가서는 세가지 示導를 일으킨다. ...神通示導, 記說示導, 敎誡示導이다”

대정장6, p.962c. 諸菩薩摩訶薩爲欲利樂諸有情類, 以故思願入大地獄 入已發起三種 示導... 一者神變示導 二者記說示導 三者敎誡示導.


이상은 『대반야경』에 나오는 것이다. 수행으로 얻어진 결과를 자신만이 아니라 일체의 중생을 위해 베푸는데 보다 큰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근본불교의 열반과 대승불교의 열반이 다른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Ⅲ. 『법화경』에 나타난 행함과 열반의 관계


주제에 충실하기 위하여 몇 부분으로 구분하여 고찰하기로 한다.

1. 『법화경』의 열반관


『법화경』의 열반관도 크게 대승불교의 열반관을 벗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들을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이 경전에서는 열반을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방편품, 비유품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究竟涅槃思想’이다. 이것은 생로병사를 능히 떠나게 하는 것, 행복한 곳, 생사의 고통을 없앤 곳, 一乘道 등으로 표현된다. 둘째는 여래수량품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方便涅槃思想’이다. 여기서의 열반은 消滅 내지 죽음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두 가지 관점에서 구체적인 열반의 개념을 정리하기로 한다.


첫째 구경열반사상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絶對法性 내지 意志性 자체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과 관련된 구절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내가 괴로움의 결박을 벗겨 열반에 이르게 한 자들에게 이르노니(「방편품」 17송)

- 부처님께서 하나 뿐인 해탈의 도리를 설하시고, 우리 또한 이 법을 얻어 열반에 이르나니 그러나 지금은 이 말씀의 취지를 알지 못하리로다(「방편품」 19송).

- 제법의 寂滅相은 말로 펼일 아니로되 방편으로 다섯비구 위하여 법을 설하니 이것이 곧 轉法輪이라. 이리하여 열반, 아라한, 法, 僧 따위의 이름이 생겼느니라. 久遠 이래 열반을 찬양하되 ‘생사의 고통이 영원히 다한다’고 내 항상 설했느니라(「방편품」 77송).

- 이 중생들 끝내 불도 아니 구하며, 내세의 악인들이 일승법 듣고는 믿지 않아 법을 깨뜨리고 惡道에 곧 떨어지리니, 참회하고 청정하여 뜻이 불도를 구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들을 위해 一乘道를 두루 찬탄할 지어다(「방편품」 81송).

- ‘나의 법은 생노병사를 능히 여의고 열반에 이르게 한다’(「비유품」 25송)

- 여래도 이와같아서 온갖 중생의 아버지가 되어 무량억천의 중생들이 부처의 가르침의 문을 통하여 3계의 괴로움, 공포의 험한 길을 무사히 벗어나서 열반의 즐거움을 얻는 것을 보면...(「비유품」 48송)

- ‘내게 무한한 지혜와 힘과 無畏 등 諸佛의 法藏이 있나니, 이 중생들은 모두가 나의 자식인 바라. 똑같이 大乘을 주어 사람이 저 홀로 멸도(깨달음)얻음 없게 하여 모두 다 여래의 滅度로써 滅度케 하리라’. 이들 중생으로서 三界에서 벗어난 자들에게는 모두 諸佛의 선정, 해탈 등 그들이 즐길 놀이개를 주리니 그것들은 모두 한 모습 한 종류라. 성인들이 찬탄하는 바이며 청정하고 으뜸가는 즐거움이 생기느니라(「비유품」 49송)

(인용하는 『법화경』의 한글 번역은 1990년 三中堂에서 간행한 이원섭역을 저본으로 한 것이며, 게송의 번호도 이 책에 따른 것이다.)


둘째, 방편열반이란 무엇인가. 근본불교에서 말하는 隱沒不現의 열반은 동적인 작용력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생제도라는 본원을 실현하지 않았다고 선언적으로 전제하고,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열반의 모습을 보이신 것은 중생들을 교화하여 열반의 세계로 인도하기 위한 방편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즉 열반은 중생을 제도할 때 참다운 의미가 있으므로 가치의 비중을 실천적인 작용의 측면에 두어야 한다는 논리이다. 이와 유관한 구절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지금의 부처님은 석가족의 궁전에서 가만히 나와 가야성의 멀쟎은 도량에 앉아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음이라’하나니, 그러나 선남자야 나는 진실로 성불한지가 무량무변백천만억나유타겁을 지났느니라(「여래수량품」 3송).

- 선남자들아 여래는 중생들이 소승법을 좋아하여 덕이 박하고 번뇌가 많음을 볼 때는 이를 위하여 설하시되 ‘내가 젊어서 출가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느니라’하였노라. 그러나 내가 실로 성불한 지 오래되었음이 이와같느니라. 다만 방편으로 중생을 교화하여 불도에 들어가게 하기 위해 이와같이 설하느니라(「여래수량품」 8송).

- 그러나 이제 참으로 멸도함이 아니면서도 곧 이르되 ‘장차 멸도를 취하리라’하노니 여래는 이러한 방편으로 중생을 교화함이라(「여래수량품」 12송).

- 만일 부처가 오래도록 세상에 머문다면 박덕한 사람들이 선근을 아니심어 가난하고 천해지며, 오욕에 집착하여 憶想妄見의 그물에 걸릴 것이며, 만일 여래의 영구불멸함을 보면 교만하고 태만해져 부처를 만나기 어렵다는 생각과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니라(「여래수량품」 13송)

- 중생들이 이같은 말을 들으면 반드시 만나기 어렵다는 생각을 일으켜 마음에 사모하여 부처를 갈망하여 선근을 심으리니, 그러기에 여래는 진실로 멸도함이 없건마는 멸도한다 이르나니라. 또한 선남자야, 온갖 여래의 가르침도 모두 이와같으시니, 중생을 제도하기 위함이라 모두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시니라(「여래수량품」 15송).


이상에서 설명한 두 가지 열반에 대한 개념은 열반의 본질과 그것의 작용이란 측면을 교묘하게 포용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법화경?의 열반관은 열반이란 열반의 본질에 계합하는 것 이상으로 열반이 지닌 종교적 의의가 무엇인가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나아가 그것은 수도의 궁극적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근원적인 성찰이 초래한 결과라 볼 수 있다.


2. 『법화경』의 사회의식


(1) 『법화경』의 현실인식

『법화경』에서 설정하고 있는 사회는 五濁惡世란 말로 표현할 수 있다. 오탁악세란 劫濁, 見濁, 煩惱濁, 衆生濁, 命濁이며, 이것은 사회적 혼란 내지 인간의 정신적 윤리적 타락이 극도에 달한 시대를 지칭하는 말이다. 이것을 보다 세세하게 설명하자면 오탁악세는 세 가지로 大別할 수 있다. 첫째는 味, 色, 혼합물, 樹液 등에 관한 것, 둘째는 개인의 번뇌에 관한 것, 셋째는 시대나 세간에 관한 것 등이다. 이상에서 두 번째와 세 번째가 오탁악세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즉 身口意 3業으로 표현되는 도덕적 윤리적 타락과 時空代의 타락을 말한다.


그런데 『법화경』은 현실을 오탁악세와 같다고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방편품」에 의하면


“부처님께서는 오탁악세에 출현하시나니.... 겁탁의 어지러운 시절에는 중생의 번뇌가 무거워 慳貪하고 嫉妬하여 여러 가지 不善의 뿌리를 키울 새(48송-49송)”


라 하여,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할 역사적 의의가 있다고 말한다.


「비유품」에 의하면 오탁악세를 火宅에 비유하고 있다.


“어느 나라 읍이나 마을 안에 큰 長者가 있었다. 그의 나이가 이미 늙되 재산이 끝없어서 田地, 저택, 하인들이 많았다. 그 집은 廣大하되 오직 문은 하나 뿐이었으며, 많은 사람들- 일백, 이백 내지는 오백명이 그 속에 살고 있었다. 집채는 썩어 낡으며, 담장과 벽 무너지며, 기둥 뿌리 썩으며, 대들보 동자기둥 기울었는데 주위에서 일시에 문득 불이나 이 집을 태웠다. 그때 아들들 열이나, 스물, 혹은 서른명이 이 집에 있었느니라(27송).

장자는 이 큰 불이 사방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고 크게 놀라 두려워하며 이같이 생각했다. ‘내 비록 불붙은 문을 편히 벗어나왔으나 애들은 불길 싸인 집안에 아직도 남아서 놀이에 미쳐 이것을 깨닫지도 알지도 못하며, 놀라와도 두려워도 하지 않아서 불이 와 몸에 닿아 고통이 다가오되 근심과 걱정을 아니하여 나오려는 뜻이 없었다(28송)”


이상의 비유에서 알 수 있듯이 불난 집에 있으면서도 놀이에 빠져 정신이 없는 어린아이들과 그들을 바라보면서 구해내려는 아버지의 관계는 일상 부처님과 중생들의 관계를 비유적으로 설명한 것으로 본다.


이런 중생들을 「여래수량품」에서는


“박덕한 사람들이 善根을 아니 심어 가난하고 천해지며, 五欲에 집착하여 憶想妄見의 그물에 걸리며, 만일 여래의 영구불멸함을 보면 교만하고 태만해져서 부처를 만나기 어렵다는 생각과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을 것(13송)”


이라 하거나 失性하거나 中毒이 심하여 병을 고치는 약을 주어도 먹지 않는다고 한탄하고 있다.


인간의 性情이 극도로 불안하고 비정상적인 상태로 규정하는 이러한 末世意識은 여타의 대승경전에도 언급되어 있는 것이며, 다른 경전에서는 後五百世로 別稱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인식은 현실을 극복하여 이상적인 불국정토를 실현하자고 획책하는 것으로 본다. 불안하고 부조리한 것이 현실이며, 그러한 현실을 극복하고 인간들이 꿈꾸는 세상, 부처가 꿈꾸는 세상을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2) 이상적인 세상의 모습

이상에서 『법화경』에 표현되어 있는 현실의식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법화경』은 어떠한 세상을 궁극적인 세상으로 묘사하고 있을까. 가장 이상적인 국토를 부처님의 국토란 의미에서 佛國土라 한다. 그렇다면 불국토가 어떠한 세상인가를 알아본다면 『법화경』이 꿈꾸는 세상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법화경』 「수기품」과 「오백제자수기품」에 묘사되어 있는 불국토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A) “그 국토는 청정하여 琉璃로 大地를 삼으며, 많은 보배 나무가 길 옆에 늘어서 있으며, 금으로된 새끼줄로 길의 경계를 삼으니 보는 사람마다 기뻐하니라. 항상 아름다운 향기를 발하고, 각종의 유명한 꽃을 흩뿌리며, 각종의 기묘한 것으로 장엄한다. 그 대지는 언덕과 구렁창이 없으며, 보살의 무리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으니라. 그들의 마음은 부드러우며, 大神通에 통했으며, 諸佛의 대승경전을 받들어 지닌다. 모든 성문들의 無漏後身과 法王의 아들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으니라”(7송, 8송)


(B) “七寶로 大地를 삼으니 그 대지의 평평함이 손바닥과 같아서 언덕과 계곡과 구렁창이 없느니라. 七寶로 만든 臺觀이 그 속에 충만하고 모든 하늘의 궁전이 가까운 허공에 있어서 사람과 하늘이 맞닿아 서로 볼 수 있느니라. 惡道가 없으며, 여인이 없어서 일체의 중생이 化生하기 때문에 음욕이 없느니라. 대신통을 얻어 몸에서는 光明을 발하며, 자유자재로 날아다니느니라. 뜻과 생각이 견고해서 항상 정진하고 지혜가 있느니라. 두루 모두가 금색이며, 32상으로 스스로 장엄하느니라. 그 국토의 중생은 항상 두가지로 음식을 삼되 첫째는 法喜食이며, 둘째는 禪悅食이니라. ... 大神通과 4無礙智를 얻으며, ...8해탈에 이르느니라”(8송, 9송)


이상의 인용문에서 (A)문장은 「수기품」에 나오는 것이며, (B)문장은 「오백제자수기품」에 나오는 것이다. 「수기품」에는 이상의 인용문 이외에도 “그 불국토는 청정하기 으뜸이라. 중생으로서 이를 보면 안 바라는 사람이 없으리니, 부처님께서는 그 속에서 무량한 중생을 구하리라. 그 부처님의 법 중에는 보살이 많되 모두 利根이라 不退輪을 굴리리니...”(15송)라 한다. 그러나 이상의 내용을 보다 간략하게 요약하면 첫째 의식주의 안정, 둘째 윤리의식의 정립과 惡道의 소멸, 셋째 남녀의 평등 내지 인권의 존중, 넷째 신과 인간의 互惠的 平等 등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이것은 인간이 가장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의 건설을 의미한다고 단적으로 표현할 수도 있다. 따라서 이러한 국토를 건설하기 위해 부처님(보살)께서는 “중생들의 가지가지 욕망과 성품과 깊은 마음으로 집착하는 바를 알고, 그 本性에 따라 가지가지의 因緣, 譬喩, 言辭, 方便力으로 설법한다”고 말한다.


이상에서 『법화경』이 꿈꾸는 세상, 즉 불국정토의 모습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까지는 비현실적인, 그러나 언젠가는 인간들이 이룩해야할 세상의 모습이라 말할 수 있다.


3. 행함과 열반의 논리적 관계


(1) 願生菩薩과 誓願

『법화경』에서 말하는 사회적 실천과 열반의 논리적 관계는 어떻게 정립되어 있을까. 우선 경전에서는 보살의 願生을 강조하고 있다.


“약왕아. 마땅히 알아라. 이 사람은 스스로 청정한 業報를 버리고 나의 입멸 이후에 중생을 불쌍하게 여기기 때문에 惡世에 태어나서 이 경전을 널리 설한다. 만약 이런 선남자 선여인이 내가 멸도한 이후에 몰래 한 사람을 위해 법화경 내지 경전의 한구절이라도 설해준다면 마땅히 이런 사람이 여래의 사도요 여래가 파견해서 여래의 일을 시행하는 줄 알아야 한다”(「법사품」 9송)


“능히 법화경을 수지하는 사람은 淸淨土를 버리고 중생을 어여삐 여겨 이곳에 태어난다. 이런 이는 뜻대로 태어날 수 있기에 이 악한 세상에서 더없는 법 설함이라.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러한 사람은 자유자재로 원하는 곳에 태어날 수 있으나 능히 이 악세에서 널리 위없는 법을 설하느니라”(「법사품」 14송)


이상의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보살은 열반적정의 세계인 淸淨土를 버리고 자원하여 사바세계에 태어났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물론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해서이다. 그것이 진정한 여래의 일이라 선언하고 있다.


어떻게 구원하는가. 그것은 중생들의 性品과 欲望에 따라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여 중생들이 열반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게 한다고 말한다. 어떻게 이러한 것이 가능한 것인가. 수행을 통해 얻어진 6神通으로 가능하게 된다고 본다. 또한 佛身論의 입장에서 이상의 주장에 대한 논리적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성유식론」에 의하면


“變化身은 成事智에 의해 무량한 중생류에 따라 變化身을 나타내어 淨穢土에 산다. 아직 地에 오르지 않은 보살들과 二乘의 다른 중생들을 위해 그들의 근기를 헤아려 설법하고 각각 모든 이익과 즐거움을 얻게 한다”

대정장31, p.58a. “變化身 謂諸如來由成事智 變現無量 隨類化身 居 淨穢土. 爲未登地諸菩薩衆二乘異生 稱彼機宜現通說法. 令各獲得諸 利樂事”.


고 말한다. 「섭대승론」에서는 일체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신념에서 발원과 수행을 전개해야하며, 만일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염원도 없이 오로지 열반만을 추구한다면 그것은 本願과 수행의 목적이 어긋났기 때문에 깨달음도 성취할 수 없을 뿐이라 말한 뒤에 화신의 功用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법신의 구체적 활동이 인격적으로 표현된 것이 化身이라 말한다. 중생들에 따라서 존재와 세계 속에 출현했으므로 無常의 법칙에 따라야 한다고 강조한다. 무주처열반이므로 생사와 열반의 차이가 없음을 강조하여 “지혜로 말미암아 윤회의 차원에 떨어지지 않고, 자비로 말미암아 열반에 머무르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상과 같은 주장에 따른다면 대승열반의 궁극적 목적은 중생들을 위해 봉사하고 그들을 편하게 하고자 하는데 있다. 그들을 위해 보살행을 실천하는 것이다. 만일 중생이 없다면 그들의 실천도 불필요할 것이요, 보살의 존재의의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법화경』에서는 이상과 같은 이유에서 보살이 중생들과 교감하기 위한 방편행의 형태를 인연, 비유, 언설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또한 다양한 보살들을 등장시켜 보살도의 실천이 무엇 보다 중요함을 示唆하고 있다.


또한 『법화경』에서 말하는 보살이 보다 구체적으로 실천자의 모습으로 구상화된 것이 법사이다. 법사는 현실 속에서 구체적으로 『법화경』의 이념을 실천하면서 불국정토를 건설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을 지칭한다. 그렇다고 법사가 되는 것이 어려운 것은 아니다. 『법화경』의 가르침을 듣고 그것을 受持하며, 그대로 실천하면서 살겠다는 마음을 다지는 순간부터 법사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누구나 보살이 될 수 있다는 대승불교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법사의 종류도 다섯 가지로 구분하여 그들의 역할을 높이 평가한다. 이것은 다양한 사회적 실천이 곧 열반의 길임을 말하고자 하기 때문이라 본다. 만일 수행의 결과 얻어진 涅槃寂靜의 세계에 들어가 安住한다면 그것은 곧 대승의 정신을 저버리는 것이요, 근본불교의 열반관과 조금도 차이가 없는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 出世本懷와 誓願

出世本懷란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出現하신 이유와 목적에 대한 근원적인 探索이다. 왜 이 세상에 부처님이 없으면 안되는 것인가. 이러한 문제의식에 대한 해답이 出世本懷라 할 수 있다. 「방편품」에 의하면 이것은 開示悟入으로 표현된다. 즉 부처님의 知見을 열어서 중생들에게 보여주고, 그것을 깨닫게 하여 그 속에 중생들이 들어갈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 핵심요지이다. 사상의 연원은 근본불교의 傳道宣言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으며, 「비유품」, 「약초유품」 등에서 유사한 내용을 살펴볼 수 있다. 만일 중생들을 開示悟入하고자 하는 목적이 없으면 부처는 세상에 출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중국 당나라 때의 규기스님은 이 부분에 대하여


“이 중요한 인연 때문에 그래서 세간에 출현하셨다. 스스로 德과 名號에 맞추어 널리 중생을 이롭게 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二乘의 入滅과 같다. 이 중요함 때문에 마땅함에 따라서 설법한다”


라 하고 있다. 또한 諸佛의 出世는 중생들로 하여금 所知障과 所發業과 所得果를 끊고, 일체가 모두 함께 消盡하여 원만하게 깨달음을 성취하고자 하여 知見相을 열어서 淸淨함을 얻게 한다. 장애가 소진하여 지혜가 원만함을 淸淨이라 이름하기 때문이다. 중생들로 하여금 煩惱障과 所發業과 所得果를 끊고, 일체가 함께 消盡하여 원만하게 열반을 증득하여 知見性을 열어서 淸淨함을 얻게 하고자 한다. 장애가 소진하여 理法이 드러남을 淸淨이라 이름하기 때문이다. 이 知見을 緣由하여 세간에 출현한다고 말한다. 중생들을 이익되게 하기 위해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셨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중생을 이롭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그를 따르는 수많은 제자들의 실천여부에 달려있다고 보아야 될 것이다.


(3) 授記의 실천적 성격

授記란 말은 豫言과 記說을 말하는 것이다. 바로 成佛에 대한 예언과 기설이다. ?법화경?에서 행하는 수기는 열 가지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이 열 가지를 크게 因記와 果記로 구분한다. 인기란 성불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씨앗을 뿌려야 하는가에 대한 수기이며, 과기는 성불하여 어떠한 이름의 부처가 되어 어느 정도의 중생들을 제도하는가에 대한 수기이다.


이상에서 졸론의 주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은 因記라 할 수 있다. 인기 중에서도 因行이 직접 연관되어 있다. 인행이란 성불의 원인이 되는 수행이란 의미이며, 그 내용은 수기를 받는 대상에 따라 약간의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공통적인 것은 “諸佛을 공경 존중하고, 항상 梵行을 닦으며, 보살도를 갖추어” 성불한다는 것이다. 부루나존자의 因行은 敎化饒益無量衆生이며, 마하가섭의 인행은 “諸佛의 한량없는 大法을 弘布하는 것”이다. 수보리의 인행은 “常修梵行 具菩薩道”이며, 마하가전연의 인행도 “供養是諸佛已 具菩薩道”이다.


이상에서 보살도를 갖춘다는 것은 물론 요익중생이다. 보살의 존재의의가 그렇기 때문이다. 위대한 믿음의 힘으로 어려움을 참고 보살도를 행하면 언젠가는 반드시 성불한다는 것이 要旨이다.

Ⅳ. 결론


이상에서 행함과 구원의 상관성에 관하여 조명했다. 불교적 구원을 의미하는 열반의 개념과 그 속에 함유되어 있는 사회적 실천과 유관한 성격들을 규명하고, 그것들이 실재적인 사회적 행함과는 어떠한 관계를 맺는가를 고찰하는 것이 졸론의 목적이었다. 그리고 대략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였다.


근본불교의 열반관은 두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첫째는 현실적이고 경험적이란 점이다. 주객의 대립을 떠난 상호연기성을 실현하기 위한 대자유의 획득이란 점에서는 지극히 현실적이며, 탐욕과 渴望, 저주와 분노를 벗어난 심리적 상태를 의미한다는 점에선 경험적이다. 둘째는 6根과 6境으로 표현되는 현상계에 대한 집착을 소멸하여 궁극적으로는 고통과 불만족으로 상징되는 현실세계와의 切離라는 점에선 매우 소극적이고 개인적인 성향이 강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근본불교의 열반관은 대승불교의 대두와 함께 변화하고 있다. 체르바스키는 대승불교의 열반을 다름 아닌 ‘의식의 전환’으로 정의했으며, 「대지도론」은 열반하더라도 六情의 세계에 머물며 적멸의 모습을 생각하는 것이라 규정하고 幻夢涅槃不二不別을 주장한다. 현실세계를 떠난 별도의 이상적인 세계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현실 속에 정토를 건설해야 한다는 이념에 대한 綱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사상은 『유마경』의 煩惱卽涅槃의 사상과 다른 바가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근본불교와 달리 대승불교도들의 열반관은 현실적이고 능동적이며, 사회적 성향을 강하게 표출하고 있다.


『법화경』의 열반관도 크게 대승불교의 범주 안에 속한다. 그러므로 상통점이 매우 크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특징적인 것을 말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첫째, 열반을 두 가지로 대별하고 있으며 그것은 구경열반사상과 방편열반사상이다. 구경열반의 세계로 일체의 중생들을 인도하기 위해 나타나게 된 사상이 바로 방편열반사상이다. 이것은 중생들의 이익과 안락을 위해 자신을 버린 보살도의 실천을 통해 완성된다고 본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가장 이상적인 사회상을 제시하여 불교도들이 이룩해야할 정토의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둘째, 사회적으로 행함과 열반의 상관성을 논리적으로 결합하기 위하여 보살의 願生이나 本願사상과 연관지어 설명한다. 즉 보살은 열반적정의 세계인 淸淨土를 버리고 자원하여 사바세계에 태어나 보살행을 실천한다는 것이 원생사상이라면 부처님께선 일체의 중생들을 부처님의 세계로 開示悟入시키기 위해 세상에 출현한다는 것이 本願사상이다.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보살행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부처나 보살의 존재의의는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법화경』은 사회적으로 적극적인 행함을 보일 때 열반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셋째, 『법화경』은 授記를 강조하고 있다. 수기란 성불을 예언하는 것인데 성불을 위한 전제 조건이 보살행의 실천이라 말한다. 그것을 因記라고 하는데 사회적 실천을 극대화시키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결국 역설적으로 표현하자면 현실 속에서 사회의 안녕 내지 人天의 이익과 安樂을 위한 구체적인 행함이 없을 때는 진정한 의미의 열반이란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행함을 통해서 열반을 획득할 수 있으며, 열반의 추구는 행함을 떠나 단독으로 존재할 수 없다. 진정한 열반의 의미는 불국정토의 건설이라는 이상을 실현하는 과정 속에서 획득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 『법화경』의 일관된 주장인 것이다.


 

 

 

 

 

 

 

실론섬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gikoship/15782455 에서 복사한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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