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 례 ▒
1. 아비달마 불교란 무엇인가?
2. 부파불교란 무엇인가?
3. 아비달마를 특징으로 하는 불교는 아비달마 불교라 불러야 한다
4. 아비달마 불교의 특징
5. 아비달마 불교가 주류불교(主流佛敎, Mainstream Buddhism)이다
6. 북방의 아비달마(Abhidharma)와 남방의 아비담마(Abhidhamma)
7. 아비담마(adhidhamma)란 무엇인가
8. 법(法, dhamma)이란 무엇인가
9. 초기불교에서 법(dhamma)은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10. 아비담마에서 법(dhamma)은 고유성질[自性]을 가진 것이다
11. 법(法, dhamma) 혹은 구경법은 해체(vibhajja)했을 때 드러난다
12. 이 세상에는 몇 개의 각각 다른 고유성질을 가진 법이 있는가
13. 이러한 법들은 여러 가지 영역으로 분류가 된다
14. 고유성질[自性]을 가진 법(dhamma)의 분류 - 4位 82法
15. 법은 찰나와 상속(相續, 흐름, santati)이다. 여기에 사무쳐야 한다
16. 법은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으로 파악해야한다
17. 제법은 철저한 상호의존에 의해서 존재한다
18. 아비담마는 위빳사나 수행의 이론적 토대이다
■ 아비담마에서 본 마음의 특징
■ 부록: 여러 가지 도표들
1. 아비달마 불교란 무엇인가?
아비달마(阿毘達磨, abhidharma, Pali: abhidhamma)를 교학체계로 하는 불교를 아비달마 불교라 한다. 아비달마는 부파불교의 교학체계이기도 하다. 부처님께서 반열반하신 뒤 100년쯤 뒤부터 나누어지기 시작하여 후에 18개 혹은 20개로 나누어진 부파불교는 아비달마라는 방법론을 토대로 한 불교이다. 그래서 부파불교를 교학체계를 바탕으로 하여 부를 때는 이를 아비달마 불교라 한다.
불교 2600년 역사는 초기불교 – 아비달마(아비담마) – 반야․중관 – 유식 – 여래장 – 정토 – 밀교 – 선불교로 전개되어 왔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여러 교단으로 나뉘어 갈라짐’을 뜻하는 ‘부파(部波)’라는 용어는 초기교단을 제외한 불교 2600년사에 존재했던 모든 불교교단에 적용되어야하는 술어이다. 그러므로 아비달마를 토대로 하는 불교교단만을 부파불교라고 불러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인도, 중국, 한국, 일본, 티베트 등의 북방불교와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 등의 남방불교에서 아주 많은 교파, 종파, 부파로 나누어진 것이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모든 불교의 교단적인 특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같은 대승불교의 흐름에 속하면서도 각 교파의 교학적인 특징을 따서 반야를 교학의 토대로 하는 불교를 반야중관 불교라 하고 식전변을 토대로 전개하는 불교를 유식 불교라 하며, 여래장과 불성을 근본 교의로하는 불교를 여래장 불교라 하고 정토에 왕생하는 것을 근본으로 하는 불교를 정토불교라 하며, 다라니(진언) 수지를 기본으로 하는 불교를 밀교(진언불교)라 하고 참선수행을 근간으로 하는 불교를 선불교라 부르는 것처럼 아비달마를 근본으로 하는 불교는 당연히 아비달마 불교라 불러야 마땅하다.
2. 부파불교란 무엇인가?
석가모니 부처님이 입멸하신 뒤에도 단일한 교단체계를 유지해 내려오던 불교교단이 부처님 입멸하신 후 100년쯤 뒤에 상좌부와 대중부로 나누어진 이후의 불교교단을 학자들 특히 일본의 불교학자들은 부파불교(剖波佛敎)라 부른다. 부파불교는 그 후 200~300년에 걸쳐 이들 두 교파로부터 다시 분파하여 20여 개의 교단(敎團)으로 나누어지게 된다. 이러한 불교를 통틀어서 부파불교(剖波佛敎)라 한다.
초기불교의 단일 교단이 상좌부(上座部, Theravāda, Sthavira)와 대중부(大衆部, Mahāsaṅgika)로 나누어진 것을 근본분열이라 한다. 북방불교의『이부종륜론』(異部宗輪論)에 의하면 다시 대중부에서 본말을 합하여 9부가 전개되고 상좌부에서 본말을 합하여 11부가 나누어져서 모두 20개 부파로 전개된다고 한다. 남방불교의『도사』(島史, Dīpavaṁsa)와『대사』(大史, Mahāvaṁsa)에 의하면 대중부 계열에는 6개의 부파가 전개가 되고 상좌부에서는 본말을 합하여 12부로 나누어져서 모두 18개 부파가 된다. 이처럼 두 교파에서 18개 내지 20개 부파로 나누어진 것을 지말분열이라 한다. 지말분열은 BC 2세기경이 절정기였다고 할 수 있는데 분열의 이유 등은 분명치 않다고 한다. 불교교단의 분파와 각 부파의 명칭에 대해서는『인도불교의 역사』136쪽 이하를 참조하기 바란다.
한편 이러한 부파불교의 전개양상을 잘 알 수 있는 자료로는 첫째, 남방 상좌부불교에서 전승되어오는『도사』와『대사』와『논사 주석서』를 들 수 있고, 둘째, 북방불교의 설일체유부에 속하는 세우(Vasumitra)가 지은『이부종륜론』이 있으며, 셋째 BC 2세기부터 AD 5세기에 만들어진 인도의 불교비문들을 들 수 있다. 첫 번째로 든『도사』나『대사』등에 의하면 모두 18부파가 존재하였고, 두 번째로 언급한『이부종륜론』에 의하면 20부파가 있었으며 세 번째로 든 인도 각지에서 발견된 비문에 나타나는 부파명을 근거로 앙드레 바로우(A. Bareau) 교수는 34개의 부파명을 들고 있다. 다양한 종족과 언어와 문화를 가진 광대한 인도에서 교통까지 불편하던 시대에 불교가 인도의 여러 지역으로 전파되어 가면서 이러한 부파가 나누어진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3. 아비달마를 특징으로 하는 불교는 아비달마 불교라 불러야 한다
의정스님의『남해기귀내법전』과『이부종륜론』등에 의하면 그 당시 교단을 니까야(Nikāya, 部, 모음, 집단, 교단, sect, school)라 불렀다.(『인도불교의 역사』131쪽) 이를 토대로 일본의 학자들이 이 시대의 불교를 부파불교로 부른 것으로 보인다.(CBETA로 검색해보면 한역 대장경에는 부파란 명칭이 검색되지 않는다.)
지금도 남방 상좌부 불교에서는 불교의 교파 혹은 종파(sect) 혹은 종단(order)을 니까야(Nikāya)라 부른다. 예를 들면 지금 스리랑카의 가장 큰 종파를 시암 니까야(Siam Nikāya)라 하는데 1753년에 서구 열강의 침략으로 계맥이 끊어진 스리랑카 불교가 태국(Siam)에서 계맥을 다시 전승하여 스리랑카 불교를 중흥시킨 교파이다. 그 외에 유력한 종파로는 1800년에 미얀마의 계맥을 다시 전승한 아마라뿌라 니까야(Amarapura Nikāya)와 1864년에 설립된 라만나 니까야(Ramanna Nikāya)가 있다. 현재 태국에는 마하 니까야(Mahā Nikāya)와 담마윳띠까 니까야(Dhammayuttika Nikāya)가 대표적인 종단으로 자리하고 있고 미얀마에는 투담마 니까야(Thudhamma Nikāya)와 쉐긴 니까야(Shwegyin Nikāya)가 대표적인 종단이다.
남방불교와 북방불교를 막론하고 불교 2600년 역사에는 수많은 교단 혹은 교파 혹은 부파 혹은 종파들이 존재하여 왔다. 중국에는 5-7세기에만 13개 이상의 종파가 있었으며 후대에 더 많은 종파들로 분파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한국불교에도 5교9산을 위시한 많은 종파들이 있었고 지금은 100개가 넘는 종단이 있으며 일본불교와 티벳불교 역시 마찬가지이고 남방불교의 여러 국가들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특정시대의 불교에만 한정시켜서 그 불교를 부파불교(Nikāya Buddhism)라고 칭하는 것은 엄정하지 못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초기불교의 가르침을 잘 전승하여 이를 연구하여 아비달마라는 엄정한 교학체계를 완성하여 이를 수행에 적용시켜 해탈열반을 추구한 불교를 부파불교라 칭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이러한 불교는 그 교학체계의 가장 큰 특징이 되는 아비달마 불교라 불러야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아비달마 불교는 대승불교가 흥기하면서 사라져버린 불교가 아니고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질 때까지 항상 주류(mainstream)가 된 불교이며 지금도 남방의 불교국가에서 면면부절로 전승되어 오는 세계의 주류불교이다.
4. 아비달마 불교의 특징
첫째, 아비달마 불교는 초기불교를 계승하는 불교교단의 정계(正系)이다. 아비달마(abhidharma)라는 술어는 ‘법(法, dharma, 다르마)에 대해서[對, abhi, 아비]’라는 일차적인 뜻을 가지며 그래서 아비달마는 ‘법의 연구’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현장스님은 구사론에서 이를 ‘대법(對法)’으로 옮겼다. 여기서 법은 부처님의 가르침[佛法, Buddha-dhamma]과 존재하는 모든 것[一切法, 諸法, sabbe dhammā]을 뜻한다. 아비달마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존재하는 모든 것을 대면하여 연구한[對, abhi] 것이다.
부처님과 직계제자들의 가르침을 초기불교라 하며 이것은 일차결집에서 율장과 경장으로 전승이 되었다. 이러한 초기불교의 가르침 즉 다르마를 연구하여 분류하고 분석하고 정의하고 체계화하고 표준화 한 것이 아비달마 불교이다. 아비달마 불교에서 발전시킨 교학체계를 아비담마/아비달마라고 하며 이것은 논장(論藏, Abhidhamma Pitaka)으로 확정이 된다.
둘째, 아비달마 불교는 제자들[성문, 聲聞, sāvaka, śrāvaka)의 불교 즉 성문들의 불교이다. 아비달마 불교는 석가모니 부처님과 직계제자들의 가르침 즉 다르마(법)를 계승하고 있기 때문에 아비달마 불교는 제자들의 불교 배우는 입장의 불교 전통을 계승하는 불교이다. 이러한 수동적이고 보수적인 입장의 불교이었기 때문에 후대 대승교도들은 이를 성문승(聲聞乘, Śrāvaka-yāna)이라 불렀다. 성문(聲聞)이란 부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 즉 제자들이라는 뜻이다. 성문은 특히 아비달마 불교시대에는 출가 제자들에게만 한정되었다.
셋째, 이처럼 아비달마 불교는 출가주의 불교이다. 그들은 출가하여 비구 혹은 비구니가 되어 계율을 엄격하게 지키면서 수행하였다. 재가와 출가의 구별을 엄격하게 하고 출가를 전제로 하여 교리나 수행형태를 조직하였다.
그러므로 아비달마 불교는 승원에 머물면서 금욕생활을 하고 교학과 수행에 전념하였다. 당시 교단의 주된 관심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충실하기 위한 교리의 해석이었으며, 자연히 출가자와 승원(僧院)을 중심으로 하는 학문불교의 성격을 띠어갔다. 따라서 출가를 전제로 하여 계율을 엄격하게 지키면서 수행하고, 또 타인의 구제보다는 자기 수행의 완성을 우선목표로 삼았다. 그래서 후대의 대승불교로부터 소승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대승에서 소승으로 지칭하는 불교는 바로 이 아비달마 불교 혹은 부파불교를 뜻한다.
넷째, 국왕이나 왕족이나 큰 상인들의 후원을 받았다. 출가 수행자들이 승원에서 교학과 수행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은 국왕이나 왕족이나 큰 상인들의 후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광대한 장원을 사원에 희사했다. 아쇼카 왕이 불교에 귀의하여 인도의 10곳으로 전법사단을 파견한 것은 아비달마 불교가 더 넓은 지역으로 전파되고 아비달마 교학이 더 정교하게 다듬어지는데 큰 역할을 한 것이나(『인도불교사』70쪽) 카니시까 왕이 설일체유부에 귀의한 것이 좋은 예이다. 그리고 이 시대에 인도에서 만들어진 여러 비문들은 그 지방의 유력한 인사들이 교단에 토지를 보시한 사실을 적고 있다.
다섯째, 아비달마 불교는 수행의 완성을 목표로 하는 불교였다. 특히 불교의 정계(正系)임을 자부하는 상좌부 불교는 아비달마(아비담마)가 철저하게 위빳사나 수행의 토대가 됨을 강조한다.(『아비담마 길라잡이』제8장 §1의 [해설]2를 참조할 것.) 빳냣띠(paññatti, 施設, 槪念)를 고유성질을 가진 법들(빠라맛타, paramattha, 究竟法)로 해체해서 드러나는 구경법들 가운데 열반을 제외한 71가지 구경법들이 위빳사나 수행의 토대가 된다고 강조한다.(72가지 법들은『아비담마 길라잡이』제1장 §2의 [해설] 2와 제2장 §3과 특히 제7장 §1을 참조할 것.)
아비달마 불교 시대의 출가자들은 생활의 걱정 없이 출세간주의를 관철하여 연구와 수행에 주력하였으며 이렇게 하여 분석적이고 치밀한 불교교리를 완성시켰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남방 상좌부의 칠론(七論)과 설일체유부의 칠론을 들 수 있다. 여기서 ‘논(論)’이라는 말의 원어가 ‘아비다르마(abhidharma)’이고 이를 한역(漢譯)한 것이 아비달마(阿毘達磨, 阿毘曇)이다. 북방 아비달마를 집대성 한 것으로는 세친스님의『아비달마 구사론』을 들 수 있고 남방 아비담마를 토대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정교하게 해석한 것으로는 붓다고사 스님의『청정도론』을 들 수 있다.
여섯째, 넓혀서 생각하면 아비달마뿐만 아니라 더 후대의 반야중관, 유식, 여래장, 정토, 밀교, 선불교도 모두 ‘법에 대해서’ 혹은 ‘법의 연구’로 번역되는 아비달마 불교에 영역에 넣을 수 있다. 왜냐하면 불교 2600년사에 존재하는 모든 불교는 모두 부처님의 법(달마)을 그 시대 혹은 그 지역에 맞게 연구하고 해석한 불교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불교 2600년 역사는 모두 초기불교와 아비달마 불교의 둘로 대별할 수 있다.
5. 아비달마불교가 주류불교(主流佛敎,Mainstream Buddhism)이다
이처럼 부파불교에서 완성한 교학과 수행체계인 아비달마 불교는 지금까지도 남방의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 베트남 등에 전해져서 지금까지도 단절됨이 없이 전승되어 온다. 그러므로 초기불교의 핵심인 법을 대면하여 연구하고 분류하고 분석하고 정의하고 해석하고 표준화하여 계승하고 있는 아비달마 불교는 불교역사에서 단절된 적이 없는 불교체계이다.
대승불교가 생긴 뒤에도 부파교단은 질적으로든 양적으로든 대승불교를 압도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AD 399년에 장안을 출발하여 인도로 성지순례를 한 법현 스님은『법현전』에서 그 무렵 인도에는 소승을 학습하는 절과 대승을 학습하는 절과 대승과 소승을 함께 학습하는 절 등의 세 가지가 있었다고 적고 있다. 여기서 그는 소승불교가 유행하던 나라 9개국, 대승불교가 유행하던 나라 3개국, 둘을 겸학하던 나라 3개국을 들고 있다.
현장 스님(602-664)의『대당서역기』에 의하면 소승을 배우는 사원 60개소, 대승을 학습하는 곳 24개소 둘 다를 겸하는 곳 15개소이다. 이처럼 소승불교 즉 부파불교 쪽이 훨씬 많다.
한편 671년에 인도를 탐방한 의정스님(635-713)의『남해기귀내법전』에 의하면 이 시대에도 소승불교는 대승을 압도하고 있었다.(이상『인도불교의 역사』147-148쪽 참조)
인도에서 불교가 없어질 때까지 인도불교의 주류는 바로 이 부파불교 혹은 아비달마 불교 혹은 소승불교였다. 인도만 한정해서 말하면 대승불교는 한 번도 주류였던 적이 없다고 해야 한다. 그리고 지금도 불교 정계임을 자부하는 상좌부 불교는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 국민들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 그들의 절대적인 귀의를 받으며 엄정한 교학과 수행체계로 면면부절하게 전승되어 온다.
6. 북방의 아비달마(Abhidharma)와 남방의 아비담마(Abhidhamma)
강사는 아비담마(Abhidhamma)라는 용어와 아비다르마(Abhidharma)라는 용어를 구분해서 사용하고 있음을 밝힌다. 아비담마는 남방의 상좌부(Theravāda)에서 전승되어온 교학체계를 뜻하고 아비다르마는 유부나 경량부 등 북방에서 심화된 교학을 말한다. 이 아비다르마는 중국에서 아비달마(阿毘達磨, 阿鼻達磨)로 음역이 되어 우리에게도 익숙하다. 아비담마는 중국에서 아비담(阿毘曇)으로 음역된 듯하다.
이처럼 남방불교에 전승되어오는 아비달마의 가르침은 빠알리어로 표기하여 아비담마(Abhidhamma)라 칭하고 북방불교에 전승되어오는 아비달마의 가르침은 산스끄리뜨 아비다르마(Abhidharma)의 음역인 아비달마(阿毘達磨, 阿鼻達磨)라 구분하여 부르는 것이 학계의 흐름이다. 이 둘을 통칭할 때도 후자인 아비달마로 칭한다. 필자도 본 교재에서 이 기준을 적용하고 있다.
이하 본 강의 교재는 남방 상좌부의 아비담마를 토대로 작성한 것이기 때문에 모두 아비담마(Abhidhamma)로 표기하고 있음을 밝힌다.
7. 아비담마(adhidhamma)란 무엇인가
문자적으로 ‘아비담마(abhidhamma, Sk. abhidharma)’는 접두어 abhi와 명사 dhamma로 분석된다. 여기서 접두어 abhi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는데 그것은 ① about(~에 對해여)와 ② above(~의 위에 = 뛰어난, 수승한[勝])이다.
그러므로 전자로 해석하면 아비담마는 ① ‘법에 대해서’라는 뜻이 되어 ‘법의 연구’라는 의미가 된다. 그래서 현장 스님은『아비달마 구사론』에서 아비다르마를 대법(對法)으로 옮겼다. 아비담마는 초기불교의 핵심인 법(담마)을 대면하여 연구하고 분류하고 분석하고 정의하고 해석하고 표준화한 것이다.(standardization)
후자로 해석하면 아비담마는 ② ‘수승한 법’이라는 뜻이 되어 ‘법의 핵심’이라는 의미가 된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승법(勝法)으로 옮기기도 하였고 무비법(無比法)으로도 옮겼다. 특히 붓다고사 스님은『담마상가니』의 주석서인 『앗타살리니』에서 ‘abhi’라는 접두어를 ‘뛰어나다, 특별하다’라는 뜻 즉 후자로 정의하고 있다. CBETA로 검색해보면 중국에서도 후자 즉 승법(勝法)이나 무비법(無比法)으로 옮긴 경우가 더 많다.
한편 주석서 문헌들은 경의 가르침을 방편적인 가르침[方便說, pariyāya-desana]이라 부르고 아비담마의 가르침을 비방편적인 가르침[非方便說, nippariyāya-desana]이라 부르고 있다.(DhsA.154; MAṬ.ii.123 등) 경의 가르침은 듣는 사람의 처지나 입장을 고려한 것이고 아비담마의 가르침은 그런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오직 법만을 대면하여[對法] 법의 핵심만을 드러낸[勝法]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8. 법(法, dhamma)이란 무엇인가
법(法, 담마, dhamma, Sk. dharma)은 인도의 모든 사상과 종교에서 아주 중요하게 쓰이는 술어이며 또한 방대한 인도의 제 문헌들에 가장 많이 나타나는 술어 중의 하나라는 것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초기불교 문헌에서도 dhamma(Sk. dharma)는 가장 많이 나타나는 술어 중의 하나이다.
빠알리『삼장』에 나타나는 담마(dhamma)의 여러 의미를 분류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는『담마상가니』(法集論)의 주석서인『앗타살리니』(DhsA.38)에 나타나는 붓다고사 스님의 주석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여기서 스님은 dhamma를 ① 빠리얏띠(pariyatti, 교학, 가르침) ② 헤뚜(hetu, 원인, 조건) ③ 구나(guṇa, 덕스러운 행위) ④ 닛삿따닛지와따(nissatta-nijjīvatā, 개념이 아닌 것)의 넷으로 분류하고 있다.
그리고『맛지마 니까야 주석서』(MA.i.17)에서 붓다고사 스님은 ‘모든 법[諸法, 一切法, sabba-dhammā, sabbe dhammā]’을 설명하면서 법(dhamma)의 용처를 아래의 열 가지 경우로 설명하고 있다. “‘법(dhamma)’은 ① 교학(가르침, pariyatti), ② 진리(sacca), ③ 삼매(samādhi), ④ 통찰지(paññā), ⑤ 자연적인 현상(pakati), ⑥ 고유성질(sabhāva), ⑦ 공성(suññatā), ⑧ 공덕(puñña), ⑨ 범계(犯戒, āpatti), ⑩ 알아야 할 것(ñeyya) 등을 나타낸다.
법(dhamma)에 대한 경들과 여러 주석서들의 설명을 종합하면 법은 크게 둘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첫째는 부처님 가르침(교학, 진리, 덕행)으로서의 법이요, 둘째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뜻하는 법이다. 이를 구분하기 위해서 요즘 서양학자들은 전자를 대문자 Dhamma로 후자를 소문자 dhamma로 표기한다. 전자는 불법(佛法, Buddha-dhamma)으로 정리되고 후자는 일체법(一切法, 諸法, sabbe dhammā)으로 일컬어진다.
그런데 부처님 가르침[佛法]과 일체법은 같은 내용을 담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대한불교 조계종의 소의경전인『금강경』에서도 “일체법이 모두 부처님의 가르침”(一切法 皆是佛法, 제17품)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佛法]이 바로 법(dhamma)이요, 이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밝힌 것이며[一切法], 이것은 궁극적인 행복인 열반과 깨달음을 실현하는 토대가 된다.
9. 초기불교에서 법(dhamma)은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초기불교에서 법은 기본적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뜻한다.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은 교학과 수행으로 구성된다. 세상의 모든 학문과 사상과 종교는 이론적인 면과 실천적인 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불교도 역시 그러하다. 불교에서는 전자를 교학(빠리얏띠, pariyatti, 배움) 이라 부르고 후자를 수행(빠띠빳띠, paṭipatti, 도닦음)이라 부른다. 초기불교에서 교학은 아래의 여섯 가지로 정리되어 나타나고 수행은 37보리분법으로 정리된다. 이를 간단히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자세한 것은『초기불교이해』를 살펴보기 바란다.
① 교학으로서의 법
『청정도론』을 위시한 주석서들은 교학으로서의 법을 온․처․계․근․제․연(蘊․處․界․根․諦․緣)의 여섯으로 정리하였다. 이것은『초기불교이해』제2편의 제6장부터 제16장에서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이 여섯 가지는 다음과 같다.
온(蘊, 무더기, khandha): 5온 = 물질[色, rūpa], 느낌[受, vedanā], 인식[想, saññā], 심리현상들[行, saṅkhārā], 알음알이[識, viññāṇa]의 다섯 가지 무더기이다.
처(處, 감각장소, āyatana): 12처 = 눈․귀․코․혀․몸․마음[眼․耳․鼻․舌․身․意]의 여섯 가지 감각장소[六內處]와 형색․소리․냄새․맛․감촉․법[色․聲․香․味․觸․法]의 여섯 가지 대상[六外處]인 12가지 감각장소이다.
계(界, 요소, dhātu): 18계 = 12처의 마음[意, 마노, mano]에서 여섯 가지 알음알이를 독립시켜서 모두 18가지가 된다. 즉 눈․귀․코․혀․몸․마음[眼․耳․鼻․舌․身․意]의 여섯 가지와 형색․소리․냄새․맛․감촉․법[色․聲․香․味․觸․法]의 여섯 가지와 눈의 알음알이[眼識], 귀의 알음알이[耳識], 코의 알음알이[鼻識], 혀의 알음알이[舌識], 몸의 알음알이[身識], 마노의 알음알이[意識]의 여섯을 합하여 18가지가 된다.
근(根, 기능, indriya): 22근 = 22근은『초기불교이해』제10장의 자료를 참조할 것.
제(諦, 진리, sacca): 4제 =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苦聖諦],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苦集聖諦],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苦滅聖諦],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의 성스러운 진리[苦滅道聖諦]의 네 가지 진리이다.
연(緣, 조건발생, paccaya, paṭiccasamuppāda): 12연기 = 괴로움의 발생구조와 소멸구조를 나타낸다.『초기불교이해』제15장과 제16장을 참조 것.
② 수행으로서의 법
주석서들은 37보리분법(菩提分法, 助道品, bodhipakkhiya-dhammā)을 들고 있다.
4념처(마음챙김의 확립), 4정근(바른 노력), 4여의족(성취수단), 5근(기능), 5력(힘), 7각지(깨달음의 구성요소), 8정도(여덟 가지 구성요소를 가진 성스러운 도, 八支聖道)의 일곱 가지로 분류되며 법수로는 모두 37가지가 된다.(.(이들에 대해서는『초기불교이해』제3편의 제17장부터 제25장까지를 참조할 것.
10. 아비담마에서 법(dhamma)은 고유성질[自性]을 가진 것이다
불교에서 법(dhamma)은 ① 부처님 가르침[佛法, Buddha-dhamma]과 ② 존재하는 모든 것[一切法, 諸法, sabbe dhammā]을 뜻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아비담마는 이러한 법(dhamma)을 연구하는(abhi, 對) 체계이다. 그러면 어떤 기준을 가지고 아비담마는 법을 연구하는가? 아비담마는 ‘고유성질[自性, sabhāva, Sk. svabhāva]’이라는 방법론을 도입하여 부처님 가르침과 존재하는 모든 것을 해체하고 분류하고 분석하고 고찰하여 체계화하고 있다. 그래서 아비담마에서는 법을 “고유성질(自性)을 가진 것(attano sabhāvaṁ dhārenti ti dhammā - DhsA.39)”으로 정의한다. 북방 아비달마의 논서인『아비달마 구사론』에서도 현장스님은 능지자상(能持自相) 혹은 임지자성(任持自性)으로 옮겼다.
아비담마는 먼저 존재하는 모든 것을 고유성질을 가졌는가 가지지 않았는가라는 기준으로 고찰하여 ① 고유성질을 가지지 않은 것들을 ‘개념’ 혹은 ‘개념적 존재(빤냣띠, paññatti, Sk. prajñapti, 施設, 假名)라 하여 논의의 대상에서 제외시킨다. 개념적 존재는 허공 꽃과 같고 토끼 뿔과 같고 거북이 털과 같아서 실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비담마는 이렇게 개념적 존재를 해체하거나 배제하고 고유성질을 가진 법들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이러한 ② 고유성질을 가진 법들을 아비담마에서는 궁극적 실재, 혹은 구경법[勝義法, paramattha-dhamma]이라 부른다. 아비담마 전반에서 별다른 설명이 없는 한 법(dhamma)은 바로 이 구경법을 뜻한다. 아비담마는 이처럼 부처님이 설하신 다양한 법들을 고유성질을 가진 것[任持自性]이라는 측면에서 연구하고 분류하고 분석하고 정의하고 해석하고 표준화한 것이다.
아비담마에 의하면 존재에는 ① 인습적인 것(sammuti)과 ② 궁극적 인 것(paramattha)의 두 가지가 있다.(VbhA.95 등)
① 인습적인 것은 보통의 개념적인 것(paññatti)과 인습적 표현(vohāra)을 지칭한다. 예를 들면, 중생, 사람, 남자, 여자, 동물 등뿐만 아니라 세상에 대한 우리의 분석적이지 못한 밑그림을 구성하는, 외관상 견고하게 남아 있는 산, 바위, 나무 , 집 등 여러 대상들이 모두 인습적인 것(sammuti)에 포함된다. 이런 개념들은 궁극적인 확실성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고 아비담마는 말한다. 왜냐하면 그 개념들이 나타내는 대상은 그들 자체로는 더 이상 분해할 수 없는 실재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이 존재하는 방식은 개념적인 것이지 사실 그대로가 아니다. 아비담마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들은 고유성질[自性, sabhāva]을 가진 실재가 아니다. 여러 궁극적인 것들이 모여져 이루어진 것들을 편의상 각각 다른 이름을 지어 부르고 있을 뿐이다.
② 궁극적인 것은 그와는 반대로 그 자신의 고유한 성질(sabhāva)을 가진다. 이것은 최종적인 것이요, 더 이상 분해할 수 없는 존재의 구성성분이며, 경험을 정확하게 분석한 결과로서 존재하는 구극의 단위이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법(dhamma)이라 한다. 예를 들면 사람 남자 여자 등은 인습적인 것이지 구극의 단위가 아니다. 사람이란 지·수·화·풍의 사대와 그에서 파생된 물질인 눈·귀·코·혀·몸 등과 마음, 이 마음과 같이 일어나는 여러 가지 정신작용들[마음 부수]이라는 최소단위들이 모여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을 구성하고 있는 땅의 요소나 물의 요소, 감각접촉, 느낌, 의도 등은 더 이상 분해되지 않는 그 자신의 고유한 성질을 가진 궁극적인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란 것은 인습적인 존재의 영역에 속하며 땅의 요소 등은 궁극적인 실재라 부른다.
이처럼 우리가 아비담마의 분석적 도구를 가지고 지혜로운 주의를 기울여보면 이런 인간이니 자연이니 너니 나니 하는 등의 개념 그 자체는 궁극적인 실재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단지 정신-물리적[名色, nāma-rūpa]인 과정일 뿐이 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정신-물리적인 과정들은 모두 최소단위들이 매순간 특정한 조건하에서 서로 조합되어 생멸을 거듭하는 것이다. 이런 그들 자신의 고유성질(sabhāva)을 가진 최소단위(dhamma)들을 아비담마에서는 궁극적 실재(paramattha, 혹은 구경법, 究竟法, paramattha-dhamma)라 한다.
이런 궁극적 실재는 정신-물리적인 현상의 구체적 본질로서 존재하지만 너무 미세하고 심오해서 훈련이 되지 않은 보통 사람들은 이것들을 인식할 수 없다. 대부분 사람들의 마음은 개념(paññatti)들로 뒤덮여 있어서 궁극적 실재를 보지 못한다. 대상에 지혜로운 주의[如理作意, yoniso manasikāra]를 기울임으로써 인간은 개념을 넘어서 보게 되고 궁극적 실재를 앎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그러므로 궁극적 실재는 최상의 지혜[智]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아비담마 길라잡이』제1장 §1의 [해설]에서 인용)
11. 법(法,dhamma) 혹은 구경법은 해체(vibhajja)했을 때 드러난다
초기불교와 아비담마의 특징은 해체해서 보기이다. 니까야에서는 존재를 온․처․계․근․제․연 즉 5온․12처․18계․22근․4제․12연기의 법들로 해체해서 설하고 있고, 아비담마/아비달마에서는 존재를 고유성질의 차이에 따라서 82법, 75법, 100법 등으로 분류하고 있다.
그러면 무엇을 해체하는가? 개념[施設, paññatti]을 해체한다. 인간은 실로 개념의 동물이다. 인간은 수많은 대상을 대하면서 무수한 인식이나 관념들을 만들어내고 이러한 여러 관념 속에서 공통 요소를 뽑아내어 종합하여 특정한 개념들을 만들어 낸다. 그런데 이런 개념을 만들어내면 우리는 즉시 그것에 의미부여를 하게 되고 그것을 실체화하여 그것에 속아버리게 된다. 개념들에 묶여있는 한 진정한 자유, 진정한 해탈이란 없다.
여기서 ‘개념’ 혹은 ‘개념적 존재’는 빤냣띠(paññatti, prajñapti)를 옮긴 것이다. 이를 중국에서는 시설(施設)로도 옮기고『중론』에서는 가명(假名)으로도 옮겼다. 그러면 무엇으로 해체하는가? 법들(dhammā)로 해체한다. 나라는 개념, 중생이라는 개념, 세상이라는 개념, 미인이라는 개념, 돈이라는 개념, 권력이라는 개념, 신이라는 개념을 법들로 해체한다. 이런 것들에 속으면 그게 바로 생사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체해서 드러나는 궁극적 실재를 구경법(究竟法, paramattha-dhamma)이라 한다.
해체라는 용어는 이미 초기불전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부처님 제자들 가운데 영감이 가장 뛰어난 분으로 칭송되는 왕기사 존자는 부처님을 “부분들로 해체해서 설하시는 분”(S8:8)이라고 찬탄하고 있다. 여기서 해체는 위밧자(vibhajja)를 옮긴 것이다. 그리고 이 위밧자라는 술어는 빠알리『삼장』을 2600년 동안 고스란히 전승해온 상좌부 불교를 특징짓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를 위밧자와딘(vibhajja-vādin, 해체를 설하는 자들)이라 불렀다.
그래서『상윳따 니까야』「와지라 경」(S5:10)에서 와지라(Vajirā) 비구니 스님은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읊고 있다.
“왜 그대는 ‘중생’이라고 상상하는가?
마라여, 그대는 견해에 빠졌는가?
단지 형성된 것들[行]의 더미일 뿐
여기서 중생이라고 할 만한 것을 찾을 수 없도다. {553}
마치 부품들을 조립한 것이 있을 때
‘마차’라는 명칭이 있는 것처럼
무더기들[蘊]이 있을 때 ‘중생’이라는
인습적 표현이 있을 뿐이로다. {554}
여기서 ‘중생’은 개념적 존재[施設, paññatti]이고 ‘형성된 것들[行]’과 무더기들[蘊]은 법들(dhammā)이다. ‘마차’는 개념적 존재의 보기이고 ‘부품들’은 법들의 보기이다. 불교에서 ‘나’라는 개념적 존재[施設, paññatti]를 오온이라는 ‘법(dhamma)’들로 해체해서 보는 것은 이처럼 오온무상(五蘊無常)과 오온개고(五蘊皆苦)와 오온무아(五蘊無我)를 극명하게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해체해서 보기의 가장 좋은 비유로는 「대념처 경」(D22)에 나타나는 백정의 비유를 들 수 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비구들이여, 마치 솜씨 좋은 백정이나 그 조수가 소를 잡아서 각을 뜬 다음 큰길 네 거리에 이를 벌려놓고 앉아있는 것과 같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이 몸을 처해진 대로 놓여진 대로 요소(界)별로 고찰한다. ‘이 몸에는 땅의 요소, 물의 요소, 불의 요소, 바람의 요소가 있다’고.”(D22 §6; M10 §12 )
주석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무슨 뜻인가? 백정이 소를 키울 때도 도살장으로 끌고 올 때도, 끌고 온 뒤에 묶어서 둘 때도, 잡을 때도, 잡혀 죽은 것을 볼 때도, 그것을 베어서 부분마다 나누지 않고서는 그에게 ‘소’라는 인식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뼈로부터 살을 발라내어 앉아있을 때 ‘소’라는 인식은 사라지고 ‘고기’라는 인식이 일어난다. 그는 ‘나는 소를 팔고, 그들은 소를 사가져 간다.’고 생각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고기를 팔고, 그들은 고기를 사가져 간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이 비구가 이전의 재가자이었거나 출가를 하였어도[명상주제를 들지 않는] 어리석은 범부일 때는 이 몸을 처해진 대로, 놓여진 대로 덩어리를 분해(해체)
하여 요소별로 따로따로 반조하지 않는 이상 그것에 대해 중생이라거나 사람이라거나 인간이라는 인식이 사라지지 않는다.(DA.iii.770; MA.i.272; 『네 가지 마음챙기는 공부』183)
나와 세상 등을 온․처․계․연 등의 법들로 해체해서 보지 못하면 염오-이욕-해탈-구경해탈지를 통해서 깨달음을 실현할 수 없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법으로 해체해서 보지 못하면 그는 불교적 수행을 하는 자가 아니다. 개념적 존재로 뭉쳐두면 속는다. 법들로 해체해야 깨닫는다. 뭉쳐두면 속고 해체하면 깨닫는다.
12. 이 세상에는 몇 개의 각각 다른 고유성질을 가진 법이 있는가
고유성질을 가진 것이 법이라면 당연히 이 세상에는 몇 개의 각각 다른 고유성질을 가진 법이 있는가를 규명해야한다. 이것은 아비담마의 출발점이요 토대요 기초이다. 상좌부에서는 82법을 들고 있고, 설일체유부에서는 75법으로 결론짓고, 대승의 아비달마인 유식에서는 100법을 들고 있다.
예를 들면 화학에서는 이 세상에서 각각 다른 고유성질을 가진 물질을 원소기호로 정리하여 최근에 코페르니슘을 112번으로 명명하였으며 비공식적으로는 118번까지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이러한 방법론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물리와 화학은 물질만을 다루지만 아비달마는 정신의 영역까지 고유성질을 가진 법들로 해체해서 설하는 것이 다르다.
그리고 화학에서는 원자는 고유성질을 가진 최소단위이지만 물질은 원자상태로는 존재할 수 없다고 한다. 남․북방 아비달마에서도 같은 방법으로 설명한다. 물질은 최소단위로 존재하는 것이 아나라 깔라빠(kalāpa) 상태로 존재한다고 한다. 물질 기본적으로 여덟 가지 법들의 무리(깔라빠)로 이루어져있다[八事具生]고 남․북방 아비달마는 이구동성으로 강조한다. 여기에 대해서는『아비담마 길라잡이』제6장을 참조하기 바란다.
13. 이러한 법들은 여러 가지 영역으로 분류가 된다
존재하는 모든 법들은 일체법으로 분류가 되고, 일체법은 다시 유위법과 무위법으로 분류가 되며, 유위법은 다시 심법과 심소법과 색법으로 분류가 되고 이 가운데 심소법은 다시 공통되는 것들, 해로운 것들, 유익한 것들을 분류가 되며 이는 다시 반드시들과 때때로들로 분류된다.(『아비담마 길라잡이』참조) 이것은 생물학에서 생물을 ‘계․문․강․목․과․속․종’으로 분류하는 것과 같은 방법론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일체법을 상좌부에서는 심․심소․색․열반의 4위(位)의 4가지 영역의 82법으로 분류하고 설일체유부에서는 여기에다 심불상응행법(心不相應行法)을 설정하여 모두 5가지 영역[五位]의 75법으로 분류하고 대승 아비달마인 유식에서는 다섯 가지 영역[五位]의 100법으로 분류한다.(도표를 참조할 것) 이 가운데 심(心)․심소(心所)․색(色)․심불상응행법(心不相應行法)은 유위법이고 열반은 무위법이다.(아래 도표 참조)
상좌부와 설일체유부의 법수들의 심․심소․색․열반의 4위(位)의 법들은 대동소이한데 설일체유부에서 심불상응행법을 설정하는 것이 남방 아비담마와 북방 아비달마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14. 고유성질[自性]을 가진 법(dhamma)의 분류 - 4位 82法
① 마음[心, citta]: “대상을 안다고 해서 마음이라 한다(ārammaṇaṁ cintetī ti cittaṁ).”(DhsA.63.) 마음은 대상을 안다[了別]는 특징을 가지고 있어서 그것이 아무리 다양하게 일어나더라도 안다는 특징으로만 본다면 하나이지만 그 하나인 마음을 아비담마에서는 여러 유형으로 구분짓고 있다. 이런 유형들은 복수로 ‘마음들’이라고 표현하는데 ① 마음이 일어나는 곳[地, bhūmi, 경지]와 ② 업과 과보와의 관계를 기준으로 89가지로, 더 자세하게는 121가지로 구별한다.(<도표> 참조)
② 마음부수(마음附隨, 心所, 쩨따시까, cetasika): “[마음과] 함께 일어나고 함께 멸하며, 동일한 대상을 가지고 동일한 토대를 가지는, 마음과 결합된 52가지 법을 마음부수들이라 한다.”(『아비담맛타 상가하』II.1) “사람들이 비록 ‘왕이 온다.’고 말하지만 왕은 결코 혼자 오지 않는다. 그는 항상 수행원들과 함께 온다. 그와 같이 마음이 일어날 때는 결코 혼자 일어나지 않고 항상 마음부수라는 수행원들과 함께 일어난다.”(DhsA. 67) 공통되는 것 13가지, 해로운 것 14가지, 아름다운 것 25가지로 모두 52가지로 분류한다.(<도표> 참조)
③ 물질[色, rūpa]: “변형(變形)된다고 해서 물질이라 한다.”(S22:79) “‘변형된다(ruppati)’고 했다. 이것은 물질(rūpa)이 차가움 등의 변형시키는 조건과 접촉하여 다르게 생성됨을 두고 말한 것이다.”(SAṬ.ii.210) 변형(ruppana)은 변화(viparinnāma)와 다르다. 변형(變形)은 형태나 모양이 있는 것이 그 형태나 모양이 바뀌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물질만의 특징이다. 느낌, 인식, 심리현상들, 알음알이(수․상․행․식)와 같은 정신의 무더기들의 경우 변화는 있으되 형태나 모양이 없기 때문에 변형은 없다. 그래서 변형은 물질에만 해당된다. 물질은 구체적인 물질 18가지와 추상적인 물질 10가지로 모두 28가지로 분류한다.(<도표> 참조)
④ 열반(涅槃, nibbāna): “출세간이라 불리고, 네 가지 도로써 실현해야 하며, 도와 과의 대상이고, 얽힘이라 부르는 갈애로부터 벗어나기 때문에 열반이라 한다.”(아비담맛타 상가하 VI.30)
15. 법은 찰나와 상속(相續,흐름,santati)이다. 여기에 사무쳐야 한다
고유성질을 가진 것이 법이다. 그리고 열반을 제외함 모든 유위법들은 찰나적인 존재이다. 이것이 아비담마에서 설명하는 법의 가장 큰 특징이다. 아비담마에서는 찰나(刹那, khaṇa)를 ‘법의 고유성질을 드러내는 최소단위의 시간’으로 이해한다. <주1>
<주1>
예를 들면, 설일체유부에서는 찰나를 “하나의 법이 지닌 온갖 상(즉 생․주․이․멸)의 작용이 모두 이루어질 때”라고 정의하기도 하고, “법(존재) 자체를 획득하고서 무간(無間)에 바로 소멸하는 것”라고 정의하기도 한다.(권오민 역,『아비달마 구사론』251쪽, 244쪽, 593쪽 참조) 그래서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법의 고유성질을 드러내는 최소단위의 시간’이라고 찰나를 풀어서 설명하고 있다. 학자들은『아비달마 구사론』을 분석하여 아비달마의 찰나는 75분의 1초 정도의 시간이라고 설명한다. 상좌부 주석서들의 설명을 보면 상좌부의 찰나는 훨씬 더 짧은 시간이다.
그리고 이 찰나는 다시 일어남[生, uppāda]과 머묾[住, ṭhiti]과 무너짐[壞, bhaṅga]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석서들은 말하고 있다.(『아비담마 길라잡이』제4장 §6과 해설 참조) 서양에서는 이것을 sub-moment라고 옮기고 있고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아찰나(亞刹那)’라고 옮겼다. 그러나 이 아찰나라는 술어는 주석서의 그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아찰나는 전문술어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고유성질이 없기 때문이다. 찰나를 아찰나로 쪼갤 수는 있고, 아찰나를 다시 아아찰나로 아아찰나는 다시 아아아찰나로 … 이렇게 쪼갤 수는 있겠지만 이렇게 아찰나로 쪼개버리면 법이 가지는 고유성질을 드러낼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을 전문술어로 표현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찰나는 ‘법의 고유성질을 드러내는 최소단위의 시간’인 것이다.
그리고 이 찰나동안에 존재하는 법은 당연히 조건발생 즉 연이생(緣而生)이다. 그리고 전찰나의 법이 멸하면 바로 다음 찰나의 법이 조건발생한다. 그러므로 단멸론도 절대로 될 수 없다. 이것을 남․북 아비담마/아비달마와 유식에서는 등무간연(等無間緣, samanantara-paccaya)이라 하여 아주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전찰나가 멸하면 후찰나로 흘러간다.[相續, santati] 그러니 법은 단멸론도 상주론도 아니다. 아비담마는 이렇게 법들을 찰나(khaṇa, Sk. kṣaṇa)와 흐름[相續]으로 멋지게 설명해낸다.
찰나와 흐름(상속)은 모든 불교 특히 남․북방 아비담마/아비달마와 대승의 아비달마인 유식 교학의 양대 축이 된다. 상좌부 아비담마 뿐만 아니라 모든 북방불교의 교학적 토대가 되는『아비달마 구사론』전체에서 찰나와 상속은 아주 많이 나타나고 강조되고 있다. 그래서 “일체의 유위법은 모두 유찰나(有刹那) 즉 찰나적 존재”(『아비달마 구사론』제2권 593쪽)라고 강조하고 있으며, “[찰나란] 법(존재) 자체를 획득하고서 무간(無間)에 바로 소멸하는 것을 말하니, 이와 같은 찰나(kṣaṇa)를 갖는 법을 ‘유찰나(kṣaṇika)’라고 이름한다.”라고 찰나를 정의한다.(Ibid) 그래서『아비달마 구사론』의 역자는 “찰나적 존재를 설하는 유부에 있어 존재(법, dhamma)와 찰나는 동의어이다.”라고 강조한다.(제3권 925쪽)
그리고 찰나와 상속 특히 상속은『아비달마 구사론』제9품「파집아품」(破執我品)에서 자아 등의 실체가 있다는 삿된 견해를 척파하는 기본적인 방법론으로 강조되고 있다. 그래서 ‘온의 상속’, ‘제온의 상속’, ‘오온의 상속’, ‘유루온의 상속’ ‘찰나생멸하는 제행의 불이(不異)의 상속’이라는 표현이『아비달마 구사론』제9품에는 적지 않게 나타나고 있다.(『아비달마 구사론』권오민 역, 제4권 1340쪽 등과 특히 제4권 1379~1380쪽을 참조할 것.)
그리고 이 찰나와 상속은 대승불교의 아비달마인 유식으로 그대로 전승되어서 유식의 가장 중요한 이론인 식전변설로 전개된다. 세친 스님의 제자인 안혜 스님은『유식30송』을 설명하면서 이 식전변을 ‘인찰나가 멸하고 과찰나가 인찰나와 다르게 생기는 것’으로 멋지게 해석한다. 그리고 유식의 여러 주석서에서는 종자생현행(種子生現行), 현행훈종자(現行薰種子), 종자생종자(種子生種子)의 구조로 식전변을 멋지게 설명하고 있다.(『成唯識論疏抄』등)
이처럼 남․북방 아비담마/아비달마와 대승 아비달마인 유식도 유위법을 찰나와 흐름[相續]으로 설명해 낸다. 이것이 아비담마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다. 여기에 조금이라도 사무치지 못하면 아비담마와 유식은 한낱 고승들의 언어적 유희에 불과하게 되고 말 수 있으니 두려운 일이다.
나아가서 윤회는 이러한 찰나생․찰나멸의 흐름으로 설명된다. 그래서『청정도론』등은 “무더기(蘊, 온)와 요소(界, 계)와 장소(處, 처)의 연속이요, 끊임없이 진행됨을 윤회라고 한다.”(Vis.XVII. 115; DA.ii.496; SA.ii.97)라고 정의하고 있다.
한편 상좌부 아비담마의 가장 큰 특징은 모든 물․심의 현상은 생멸을 거듭하지만 물질이 생멸하는 속도와 마음이 생멸하는 속도는 서로 다르다고 설하는 것이다. 아비담마에서는 물질이 머무는 동안 마음은 16번이나 일어났다가 사라진다고 가르친다.(물질이 일어나는 순간까지 합치면 17번이 되고 그래서 1:17로 정리된다.) 이것을 바탕으로 상좌부 아비담마의 인식론은 정교하게 체계화되었다. 이렇게 인식과정을 정리해 보면 제멋대로 일어나는 것 같은 우리 마음은 너무나 엄연한 법칙에 의해서 매찰나 생멸하고 있다는 것을 아비담마는 가르쳐주고 있다.
16. 법은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으로 파악해야한다
이것은 모든 불교의 가장 중요한 방법론이다
“법들에는 보편적인 특징[共相]과 개별적인 특징[自相]의 두 가지 특징(lakkhaṇa)이 있다. 이 둘 가운데서 물질의 무더기[色蘊]는 변형되는 것이 개별적 특징[自相, paccatta -lakkhaṇa = sabhāva-lakkhaṇa]임을 밝히셨다. 변형되는 것은 물질의 무더기에만 있고 느낌 등(즉 수․상․행․식)에는 없기 때문에 개별적 특징이라 불린다. 무상․고․무아라는 특징은 느낌 등에도 있다. 그래서 이것은 보편적 특징[共相, sāmañña-lakkhaṇa]이라 불린다.”(SA.ii.291∼292)
중국에서는 보편적 특징을 공상(共相)으로 개별적 특징을 자상(自相)으로 옮겼다. 이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은 법(dhamma)을 파악하고 구명하고 이해하고 정의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론으로 아비담마/아비달마와 중관과 유식과 여래장 계열의 모든 논서에 적용되어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자상과 공상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불교교학을 논할 수가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비담마․아비달마 특히『아비달마 구사론』에서 보듯이 북방 아비달마가 이처럼 제법의 자상의 입장을 너무 많이 강조했기 때문에 반야부의 경들은 제법무아로 특징지어지는 공상(共相)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주>
<주> 自相謂一切法自相。如變礙是色自相。領納是受自相。取像是想自相。造作是行自相。了別是識自相。如是等。若有為法自相。若無為法自相。是為自相。共相謂一切法共相。如苦是有漏法共相。無常是有為法共相。空無我是一切法共相。-『대반야바라밀다경』
그러나 <주>에서 보듯이 반야부의 경들에도 제법의 자상은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자상을 말하지 않으면 우리는 법들의 구분이나 차이나 분류에 대해서는 입도 벙긋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반야․중관은 단지 공상을 훨씬 더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반야심경』은 오온[자성]개공(五蘊[自性]皆空)을 강조하고 있다.
17. 제법은 철저한 상호의존에 의해서 존재한다
찰나동안에 존재하는 법은 당연히 조건발생 즉 연이생(緣而生)이다. 상좌부 아비담마에서는 24가지 조건[緣, paccaya]을 통해서 모든 법의 상호의존[paṭṭhāna] 혹은 상호관계를 밝히고 있고, 설일체유부에서는 6인-4연-5과로써, 유식에서는 10인-4연-5과로써 제법의 상호의존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 상호의존은 크나큰 힘(satti, śakti)을 가진다. 화엄의 중중무진연기는 이러한 상호의존이 발달된 것이지 이것을 초기경의 12연기와 연관지어 해석하는 것은 곤란하다. 북방의『아비달마 구사론』에서는 제법의 상호관계를 6인-4연-5과의 관계로 설명하고 있는데 용어만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① 6인: 능작인, 구유인, 상응인, 동류인, 변행인, 이숙인
② 4연: 증상연, 등무간연, 소연연, 인연
③ 5과: 증상과, 사용과, 등류과, 이숙과, 이계과
이렇게 남방불교의 핵심인『청정도론』과 북방불교의 요체라 할 수 있는『아비달마 구사론』은 이러한 상호의존[緣]을 통해서 제법의 상호관계를 심도 깊게 설명해내고 있다. 상호의존은『아비담마 길라잡이』제8장을 참조하기 바란다.
18. 아비담마는 위빳사나 수행의 이론적 토대이다
위빳사나는 법의 무상․고․무아를 통찰하는 수행이다.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대상이다. 사마타의 대상은 닮은 표상이라는 개념[施設]이고 위빳사나의 대상은 바로 이 법이다. 그러므로 아비담마는 위빳사나 수행의 이론적 토대가 된다. 특히 이 위빳사나의 대상이 되는 법을 구경법(究竟法, 勝義法, paramattha- dhamma)이라 부른다.
위빳사나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개념[施設, 假名, 빤냣띠, paññatti)이라는 술어와 법(담마, dhamma)이라는 술어를 구분해야한다. 예를 들면 ‘사람, 동물, 산, 강, 컴퓨터’ 등 우리가 개념지어 알고 있는 모든 것은 모두 빤냣띠 즉 개념적 존재이다. 이것들은 다시 여러 가지의 고유성질을 가진 법들로 분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개념적 존재(빤냣띠, paññatti)는 이런 여러 가지 고유성질을 가진 법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다. 강이라 하지만 거기에는 최소 단위인 물의 요소(āpo-dhātu)를 위시한 고유성질을 가진 물질의 법들이 모여서 흘러감이 있을 뿐 강이라는 불변하는 고유의 성질은 없다. 그들은 마음이 만들어낸(parikappanā) 개념이지 그들의 본성(sabhāva)에 의해서 존재하는 실재는 아니다.
사마타의 대상은 개념(빤냣띠)이요 위빳사나의 대상은 법(담마)이라는 것은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구분짓는 중요한 잣대가 되므로 숙지하고 있어야한다. 그래서 위빳사나는 바로 지금 여기서 일어나는 법들에 대해 무상․고․무아의 세 특상을 꿰뚫는 것(paṭivedha, 洞察,『청정도론』IV.48.) 혹은 수관(隨觀)하는 것(anupassanā, PT)으로 정의된다. 위빳사나는 이처럼 무상․고․무아를 통찰해서 각각 무상(無相) 해탈과 무원(無願) 해탈과 공(空) 해탈을 실현하는 체계로 설명이 된다.(DA.iii.1003~1004)
그래서『무애해도』는 “① 확신[信解, adhimokkha]이 큰 자는 무상(無常)이라고 마음에 잡도리하면서 표상 없는[無相] 해탈을 얻는다. ② 고요함[輕安, passaddhi]이 큰 자는 괴로움이라고 마음에 잡도리하면서 원함 없는[無願] 해탈을 얻는다. ③ 영지(靈知, veda)가 큰 자는 무아라고 마음에 잡도리하면서 공(空)한 해탈을 얻는다.”(Ps.ii.58)라고 이 세 가지 해탈을 설명하고 있다.
■ 아비담마에서 본 마음의 특징
⑴ 먼저 마음(citta)은 찰나생․찰나멸이다. 그리고 마음은 상속(相續)한다. 이것을 마음의 흐름[心相續, citta-santati]이라한다. 우리가 세간적인 차원에서 마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실제적으로는 마음들의 흐름, 즉 마음들이 찰나적으로 생멸하는 것이다. 아비담마의 마음은 한순간에 생겼다가 멸하는 것이다. 마음은 한순간에 일어나서 대상을 아는 기능을 수행하고 멸한다. 그러면 그 다음 마음이 조건에 따라 일어난다. 이렇게 마음은 흘러간다. 이들은 너무나 빠르게 상속하기 때문에 보통의 눈으로는 각각을 분간하기가 어려울 뿐이다.
⑵ 불교 특히 아비담마에서 마음은 항상 ‘대상(ārammaṇa)을 아는 것’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마음은 대상을 안다는 것으로서 오직 하나의 고유성질[自性, sabhaava]을 가진다. 마음은 일어나서 대상을 인식하는 기능을 하고서 멸한다. 그러면 인식과정의 법칙(niyama)에 따라 다음 순간의 마음이 일어난다. 아비담마 전체에서 “마음은 대상이 없이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 기본 전제이므로 반드시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담마빨라(Dhammapāla) 스님은 부처님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대상 없이 마음이 일어난다는 것은 잘못”(Pm.454)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유식에서도 마음은 언제나 대상을 가진다. 아뢰야식도 반드시 종․근․기(種․根․器, 종자와 신체와 자연계,『주석 성유식론』194~195쪽 참조)라는 대상을 가진다. 대상 없는 마음이란 결코 상정할 수조차 없다.
⑶ 마음은 대상을 아는 것으로서는 하나이지만 찰나생․찰나멸하기 때문에 불가설․불가설의 마음이 일어나고 멸했고 일어나고 멸하고 있으며 일어나고 멸할 것이다. 이러한 마음은 그 종류(jāti)에 따라서 넷으로 분류가 되는데 ‘유익한[善] 업을 짓는 마음’과 ‘해로운[不善] 업을 짓는 마음’과 ‘과보로 나타난(vipāka) 마음’과 ‘단지 작용만 하는(kiriya) 마음’이다. 이 넷의 정확한 개념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⑷ 마음은 대상을 알면서 업(業, kamma, 의도적 행위)을 짓는다. 업이 중요하고 무서운 이유는 업은 반드시 과보[異熟, vipāka]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업과 과보의 관계를 규명하는 것은 아비담마의 가장 큰 관심 가운데 하나이다. 업의 과보는 크게 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것은 ① 삶의 과정 중에 과보가 나타나는 것이고 ② 다음 생의 재생연결을 결정짓는 것이다.
⑸ 무수히 짓는 업은 당연히 ① 삶의 과정(pavatti) 중에 무수한 업의 과보를 생산한다. 이러한 무수한 과보 때문에 존재는 삶의 과정에서 무수한 대상과 마주친다. 대상과 마주치는 이러한 무수한 마음을 ‘과보의 마음(vipāka-citta)’ 혹은 ‘과보로 나타난 마음’이라 한다.
⑹ 한생에서 지은 무수한 업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업의 과보에 의해서 ② 다음 생이 결정된다. 다음 생을 결정하는 업은 한 생의 맨 마지막 자와나(javana, 速行) 과정에서 ‘업’이나 ‘업의 표상’이나 ‘태어날 곳의 표상’ 가운데 하나로 나타난다. 그러면 이것을 대상으로 다음 생의 최초의 마음이 결정되어 일어난다.
이렇게 하여 일어나는 다음 생의 최초의 마음을 ‘재생연결식(paṭisandhi-viññāṇa)’이라 하며 이것은 당연히 업의 과보로 나타난 것이다. 이러한 재생연결식이 결정되면 이 재생연결식은 그 생에 있어서 바왕가 혹은 존재지속심으로 찰나생․찰나멸하며 한 생 동안 상속하고 그 생의 맨 마지막 마음인 죽음의 마음으로 끝이 난다. 그러면 또 그 다음 생의 재생연결식이 위와 같은 과정으로 일어난다.
⑺ 이렇게 업의 과보는 ① 삶의 과정 중에서도 무수히 나타나며 ② 재생연결식이 결정되어 존재를 지속하게 한다. 유식에서도 전자는 인전변(因轉變)과 관계가 있고 후자는 과전변(果轉變)과 연결되어 있다. 아비담마에서는 전자를 인식과정(vīthi-citta)에 개재된 마음(제4장)이라 부르고 후자를 인식과정을 벗어난(vīthi-mutta) 마음(제5장)이라 부른다. 전자는 대상과 마주치는 역할을 하고 후자는 윤회를 하고 존재를 지속시키는 역할을 한다.
⑻ 이를 다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마음은 업을 짓는다. 업은 과보를 가져온다. 과보는 ① 대상과 마주치는 것으로도 나타나고 ② 존재를 지속시키는 역할로도 나타난다. 이처럼 마음은 대상을 만나서 이를 알고(경험하고) 업을 짓고 과보를 가져오고 또 만나고 알고 업을 짓고를 거듭하면서 찰나생․찰나멸을 거듭하면서 계속해서 흘러간다(상속). 이것이 우리 마음의 실상이다 이처럼 아비담마와 유식은 철저히 마음의 찰나와 상속에 바탕하여 법의 이론을 전개해간다.
⑼ 마음은 ① 대상을 아는 것이다. 그러면 마음은 어떤 과정을 통해서 대상을 아는가? 이것을 설명하는 것이 인식과정(vīthi-citta, 제4장)이다. 이러한 인식과정은 남방 상좌부 아비담마에 상세히 설명되는데 이것은 가히 불교인식론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인식과정은 물질이 일어나서 머물고 멸하는 시간(물질찰나)과 마음이 일어나서 머물고 멸하는 시간(심찰나, citta-khana)은 다르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한 번 물질이 일어났다가 멸하는 순간에 마음은 17번 일어났다가 멸한다고 전제하는데 이것은 상좌부에만 나타나는 독특한 설명이다.
인식과정은 크게 외부의 대상을 인식하는 五門인식과정과 마음의 대상을 인식하는 意門인식과정으로 나누어진다. 오문인식과정에서 예를 들면 눈에서 대상을 인식하는 과정에서는 ‘같은 대상’을 두고 17번의 마음이 생멸한다. 이것도 대상에 따라서 ① 매우 큰 것 ② 큰 것 ③ 작은 것 ④ 매우 작은 것의 크게 4가지 유형으로 나누어지는데 매우 큰 대상일 경우에 17번 일어나는 마음들은 바왕가(지나간 바왕가, 바왕가의 동요, 바왕가의 끊어짐), 오문전향, 받아들임, 조사, 결정, 7가지 자와나(javana, 速行), 2가지 등록이다. 그러나 충격이 매우 작은 대상들은 바왕가의 동요만 일으키고 인식과정이 끝나 버린다.(<도표 4.2> 참조) 의문인식과정은 오문인식과정보다 단순한데 그 이유는 오문전향, 받아들임, 조사, 결정의 과정이 없고 의문전향 다음에 바로 자와나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여기서 유념해야할 것은 각각의 인식과정은 반드시 하나 이상의 잠재의식을 거쳐서 그 다음의 인식과정으로 넘어간다는 점이다.
⑽ 마음은 ② 존재를 지속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역할을 하는 마음을 상좌부에서는 존재지속심[有分心, 바왕가, bhavaṅga, 잠재의식, life-continuum]이라 하고 유식의 아뢰야식(阿賴耶識, 알라야윈냐나, ālaya-vijñāna, 藏識)의 이론으로 발전한다. 마음은 이처럼 찰나생․찰나멸을 거듭하면서 존재를 지속시키면서 흘러간다. 마음을 비롯한 오온의 찰나생․찰나멸의 흐름이 내생으로 이어지는 것을 재생(再生, puna-bbhava, rebirth)이라 한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재생 즉 금생의 찰나생․찰나멸의 흐름[相續, santati]이 내생으로 연결되어 다시 태어나는 것을 윤회(輪廻, saṁsāra, vaṭṭa)라고 정의한다.(Vis.XVII.115; DA.ii.496; SA.ii.97)
특히 마음의 흐름과 재생연결의 원동력인 업에 대해서 상좌부 아비담마는 16가지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남방 아비담마에서 제시하는 業說을 나 자신의 삶에 비추어서 이해해 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 관련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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