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입사행의 구조와 그 전승
김 호 귀1)*
․목 차․
Ⅰ. 서 언 2. 동산법문의 전승
Ⅱ. 이입사행의 구조 3. 조사선에서의 수용
1. 안심법문 Ⅳ. 이입사행과 오위
2. 이입의 성격 1. 조동오위
3. 행입의 형태 2. 이입사행과 오위의 관계
Ⅲ. 이입사행의 전승 Ⅴ. 결 어
1. 초기선종과 이입사행
Ⅰ. 서 언
보제달마의 사상을 논하는 데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이입사행에 대한 내용이다.1) 그런데 여기에서는 이입사행의 사상적인 측면을 접근하는 데 있어서 첫째 이입과 사행의 상호관계의 입장과, 둘째 그것이 후대에 어떤 모습으로 전승되었는가 하는 것을 살피면서 특히 조동종 교의와의 관계에 대하여 접근해 보고자 한다. 이입과 사행의 상호관계에 대해서는 이입의 성격과 사행의 형태에 대하여 고찰해 보고, 각각 그것이 달마에게 있어서 어떤 사상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는가 하는 점을 달마선법의 특색인 안심법문과 관련시켜 보고자 한다. 다음으로 이입사행의 전승에 대해서는 초기선종에 끼친 달마의 사상에 초점을 맞추어 보려 한다. 그 과정에서 달마의 이입과 사행의 관계가 회호․불회호의 관계에 있음을 조동종의 교의인 오위와 관련시켜 살펴봄으로써 달마의 사상이 오위사상의 바탕에도 깔려 있음을 파악해 보고자 한다.
Ⅱ. 이입사행의 구조
1. 안심법문
달마의 사상을 살피는데는 우선 안심법문에 대한 의미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달마와 혜가의 안심문답은 후대 선문답의 원형이 되었다. 그 달마선의 시초는 바로 안심문답에 의한 바가 컸음을 부정할 수 없다. 혜가가 달마의 제자가 된 것도 바로 이 안심문답에 의한 것이었다. 거기에는 단순할 이만치 명쾌한 선의 이론이 생생하게 약동하고 있다. 선문답은 점차 복잡화되고 난해해져 간다. 의미를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을 흔히 선문답이라 하는 것은 이를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살아있는 선문답은 매우 순일무잡하고 단순명쾌하였다. 그리하여 생생한 선문답에는 어떤 수식이나 갖가지 언설도 무용지물이다. 그처럼 소박하기 때문에 생생한 일상회화를 가능하게 만들었던 곳에는 달마를 조사로 하는 선의 실천적인 독자성이 있는 것이다. 자칫하면 달마의 어록인 「이입사행론장권자」는 차원이 낮은 대화의 기록으로 보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처럼 단순한 형태의 문답이 기록으로 남게 된 것은 한편으로는 불법을 중시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달마와 그 제자들의 단순명쾌한 언어를 반드시 환영한 것만은 아니었다. 나아가서 공공연하게 반대의 손을 뻗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도 달마의 언어가 단순명쾌하여 널리 일반의 지지를 받았기 때문에 도리어 환영과 동시에 혐의도 받았던 것이다. 사실 달마의 어록은 이미 그와 같은 소지를 포함하고 있었다. 네 가지 실천으로서 보원행과 수연행을 말한 것이 무엇보다도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무소구행도 칭법행도 일상생활과 구체적으로 관련된 점은 마찬가지이다.
예의 안심문답에 대해서는 달마와 혜가의 안심에 대한 문답 이후 혜가와 승찬 사이에 이루어진 죄의 성품에 대한 문답2)과, 승찬과 도신의 속박과 해탈에 대한 문답3)과, 혜가와 한 승려와의 문답 등 여러 가지로 인용 내지 응용되어 가는 것을 볼 수가 있다. 혜가와 한 승려의 예를 들면 절봉직인이 비단을 절단하는데 있어서 우선 상대방에게 비단을 내밀 것을 요구하는 다음의 비유가 있다.
또 묻는다. “저를 안심시켜 주십시오”
답한다. “그대의 마음을 가지고 오너라. 안심시켜 주리라”
또 말한다. “어떻게 저를 안심시켜 주십시오”
답한다. “비유하자면 재봉사에게 옷을 재단해 줄 것을 요청하는 것과 같다. 재봉사는 그대의 비단을 받고 나서야 비로소 가위를 댈 수 있다. 그런데 본래 비단을 보지 않고서 어떻게 허공을 재단해 줄 수 있겠는가. 그대가 이미 마음을 나에게 가지고 올 수 없는 이상 나는 그대에게 어떤 마음을 안심시켜 줄 수가 있단 말인가. 나는 실로 허공을 안심시켜 줄 수는 없다네”4)
혜가가 한 승에게 그대의 마음을 가져오너라 하는 그러한 단적인 언어의 의미를 설명하는 것은 분명히 후대에 나온 전등사서에서 부가된 것으로 보인다. 거기에서 혜가는 허공을 절단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앞의 안심문답에 있어서 처음에 이 비유는 생생하게 살아 있다. 살아 있는 언행이 새삼스럽게 비유된 것에 불과하다. 비단의 비유는 참신하다. 비단상인이 왕래하는 당시의 일상생활에 즉해 있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비유는 결국 비유에 불과하다. 허공의 비유는 이에 떨어지고 만다. 이미 달마에 있어서 안심은 달마 앞에 있는 혜가 자신의 당면문제였다. 그것이 혜가와 한 승과의 문답에서 한 승의 당면문제로 안심이 등장하고 있지만, 그 비유가 비단의 비유로 상승하고 있는 것은 달마와 혜가의 안심법문의 성격이 벌써 즉금의 당체에서 약간 벗어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른바 그만큼 달마의 어록은 이미 여러 사람들의 관심 속에서 변질 내지는 널리 선포되어 갔음을 말해주고 있다.
보리달마의 여러 가지 가르침 가운데 「이입사행론」 만큼은 이론의 여지없이 달마의 친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입은 이입과 행입을 가리키는 말로서 여기 이입의 리법은 진여의 리법이다. 인위를 버리고 분별을 잊고 스스로 진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망을 버리고 진으로 돌아가는 것인데, 나아가서는 진과 망이 서로 은밀하게 부합하는 것을 말한다. 행입은 이입의 구체적인 실천을 의미한다. 그러나 단순히 이입의 실천적인 측면만이 드러나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서의 ‘입’이라는 말은 깨달음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이입은 행입의 원리이고 행입은 이입의 실천일 수가 있다. 그러나 달마의 가르침은 단순히 이입과 행입이라는 각자의 입장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 이면에는 형이상학적인 이법으로서의 이입은 곧 철저하게 행위로 드러나는 행입과 혼동되지 않고, 그 자체가 뚜렷한 영역을 지니면서 그것이 동시에 깨달음의 원리로서 확대되어 행입의 하나하나에 이입의 실상이 자리하고 있다. 곧 이입 없는 행입은 무모한 행위이기 쉽상이고, 행입 없는 이입은 공리공론에 빠지기 쉽다. 이러한 의미에서 달마는 행입이라는 구체적인 실천성을 이입이라는 원리성으로 재정립한 것이다. 왜냐하면 달마의 행입은 이전에 벌써 소승불교의 실천인 오정심관에서 드러나 있었으며,5) ꡔ화엄경ꡕ 속에서도 그 상세한 실천이 나타나 있었기 때문이다.6) 달마는 실천적인 수행을 그 자신이 이입이라는 원리성에 입각하여 서로의 불가분리적인 회호성을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달마가 행입의 원천으로 내세운 이입의 발상은 안심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앞서 언급한 ꡔ화엄경」의 내용도 그 한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이입과 사행의 구체적인 성격과 형태를 살펴 그것이 이후의 선종사에서 어떻게 전승되어 가고 있는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2. 이입의 성격
달마는 이입의 성격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기르치고 있다.
대저 도를 깨닫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것을 요약해서 말하면 두 가지 종류 밖에 되지 않는다. 하나는 이입이고 또 하나는 행입이다. 이입이란 교에 의지하여 종지를 깨닫는 것이다. 그것은 곧 중생은 부처와 같은 진성은 지니고 있음을 깊이 믿는 것이다. 단지 객진번뇌의 망상에 뒤덮여 있어 그 진성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만약 망을 버리고 진으로 돌아가 벽관을 응주하면 자타가 없고 범성이 평등하여 굳건히 머물러 움직이지 않게 된다. 이리하여 다시는 문교에 따르지 않으면 그것이 진리에 그윽하게 합치되어 분별이 없어 적연무위하게 되는 것이 곧 이입이다.7)
이 말에는 진리에 대한 달마의 생각이 잘 드러나 있다. 자교오종이라는 말은 그대로 교에 의지하여 종지를 깨닫는다는 뜻이다. 그 교라는 것은 다름 아닌 부처님의 일대시교를 말한다. 그 가르침을 심신함으로써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이 심신은 곧 일절중생실유불성을 자각하는 것이다. 그 자각의 한 가운데는 중생과 부처의 자타가 없고 성인과 범부의 구분이 없다. 그 활용태가 곧 벽관8)이다. 그러기에 벽관은 문교의 형태이고 문교는 벽관의 내용이다. 문교와 벽관이 다른 것이 아니다. 객진번뇌는 단지 자각하지 못하는 상태일 뿐이지 달리 번뇌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 번뇌는 보리의 중생적인 형태이고, 보리는 번뇌의 부처적인 내용일 뿐이다. 이와 같은 확신에 가득 차 있는 입장이 곧 달마 이입의 성격이다.
3. 행입의 형태
달마가 말하는 행입의 구체적인 형태는 벽관이다. 벽관은 달마의 안심이 겉으로 드러난 모습이기도 하면서 곧 안심의 내용이기도 하다. 안심이 이입으로 터득된 것이라면, 그 안심은 벽관을 통하여 바로 그 벽관의 모습으로 완성되어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벽관은 좌선의 모습이면서 안심의 내용일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좌선은 안심의 방편이 아니라 안심 그 자체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담림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 때 도육과 혜가 두 사람이 있었는데 오직 이 두 사문만큼은 비록 나이는 적었지만 그 뜻이 고원하여 달마법사 만난 것을 무척 다행으로 여기면서 수 년 동안 모시면서 경건하게 물어 스승의 뜻을 잘 터득하였다. 달마법사도 이에 그 정성에 감탄하면서 진도로써 다음과 같이 가르쳐 주었다. 「이와 같이 안심하고, 이와 같이 발행하며, 이와 같이 순물하고, 이와 같이 방편을 써라. 이것이 곧 대승의 안심법이니, 잘못됨이 없이 행하라」 여기에서 ‘이와 같이 안심하라’는 것은 벽관이고, ‘이와 같이 발행하라’는 것은 사행이며, ‘이와 같이 순물하라’는 것은 기혐을 방호하는 것이고, ‘이와 같이 방편을 행하라’는 것은 그것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9)
담림은 벽관이 되기 위해서는 안심이 이루어져야 함을 말하면서 아울러 사행과 기혐을 방호할 것과 방편으로 행하라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이 네 가지는 바로 사행의 근거이기도 하다. 벽관이라는 것은 달마선법의 특색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말이다. 특히 안심을 벽관으로 보고 있는 것은 안심에 대한 달마의 견해가 드러난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 안심에서 심은 ꡔ금강경ꡕ에서 수보리가 세존에 대하여 질문한 세 가지 곧, 운하응주․운하수행․운하항복기심10) 가운데 첫째의 운하응주의 구체적인 내용인 자성청정심에 어떻게 주해야 하는가의 심 바로 그것이다. 그 자성청정심에 주하되 집착을 내지 말아야 한다는 방법이 담림의 여시방편의 내용이기도 하다.
이처럼 자성청정심에 안주한다는 것은 진리의 자각을 통한 벽관일 때에야 비로소 여시안심일 수 있는 것이다. 혜가와 보제달마의 대화 가운데 등장하는 안심법문에 있어서도 그 내용은 곧 혜가의 안심 바로 그것이었다.11) 곧 혜가가 자기의 불안한 마음을 찾아보았으나 결국은 찾을 수 없었다[멱심료부가득]고 말하자 달마가 그대는 이미 안심이 되었다[아여여안심경]고 말하였다. 여기에서 혜가가 불안한 마음을 찾아보는 행위는 곧 벽관의 행위이다. 그 벽관의 행위를 거쳐 결국은 불안한 마음을 찾을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불안한 마음을 찾아보았으나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존재하는 불안한 마음을 찾을 수 없다는 포기 내지는 절망의 뜻이 아니다. 혜가가 벽관을 통하여 관찰해 보니 불안한 마음이라는 것은 애당초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다는 것을 훤히 꿰뚫어 보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불안한 마음에 대한 철저한 자각을 말한다. 그래서 달마가 굳이 혜가를 향하여 그대의 불안한 마음을 이미 안심시켜 주었다고 인가하기 이전에 혜가는 벌써 자성청정심에 안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곧 벽관이라는 달마의 가르침이 혜가를 통하여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혜가는 또한 자신이 깨달은 안심의 원리를 다른 제자의 질문에 그대로 적용하여 가르쳐 주고 있다.12) 이것은 바로 혜가가 달마로부터 배운 사행의 구체적인 형태인 보원행․수연행․무소구행․칭법행의 전개원리이기도 하다.
이 네 가지 실천수행은 모두 그 바탕에 대승의 공관사상이 깔려 있다. 이것은 달마의 리법에서 안심수행으로 완성된 바탕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형태이지 안심의 이법에서 터득하지 못한 것을 네 가지 실천으로 완성해 나아간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법의 원리는 이미 이법 그대로 완성되어 있다. 다만 이법의 원리가 네 가지 실천수행으로 일상생활 전반에 걸쳐 드러나고 있는 것이 사행이라는 형태의 전개이다. 곧 보살의 현실생활은 이입을 떠나지 않는 행입의 실천이고, 행입의 실천은 곧 이입의 자기완성이기도 하다. 곧 달마에게 있어서 안심의 리법은 벽관의 사행으로 펼쳐지고 있다. 그러나 이입은 철저하게 행위와 혼동됨이 없이 그 자체의 뚜렷한 영역을 지니면서 더불어 깨달음의 원리로서 항상 행입으로 확대되어 낱낱의 행위에 이입의 실상을 부여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이입과 행입의 상호관계가 달마 이후에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전개되어가고 있는가 살펴보고자 한다.
Ⅲ. 이입사행의 전승
1. 초기선종과 이입사행
달마와 양 무제와의 대화에 나타난 달마의 입장은 바로 이입의 입장을 잘 보여주고 있다. 달마가 추구한 것은 사탑의 조성․경전의 유포․도승․구복신앙과 같은 유형적인 공덕이 아니었다. 사람마다 제각기 함유하고 있는 불성의 현현이었다. 달마는 그것을 「이종입」13) 속에서 잘 드러내고 있다. 곧 모든 중생이 동일진성을 지니고 있음을 깊이 믿고, 그것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달리 언어문교를 방편삼아 종지를 깨치는 것일 뿐 그것에 끄달리지 말며, 벽관을 통해 진리에 계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보제달마의 태도는 한결같이 간결직지 그것이었다. 그 까닭은 마음의 깊은 심연을 직지하는 방법으로 달마가 선택한 최선의 방법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혜가는 철저한 심법의 소유자로서 공의 실천에 힘썼다. 단지 달마로부터 전수 받은 사권 ꡔ릉가경ꡕ을 감지승찬에게 전했을 뿐이다.14) 혜가에게서 사법한 승찬은 당대에 아직 선종이 본격적인 형태를 갖추기 이전에 나타난 운문형태의 최초의 저술이라 할 수 있는 ꡔ신심명ꡕ을 남기고 있다. 이 속에는 불법의 요도 및 불조의 신심을 명료하게 압축하고 있다. 특히 '신심'이라는 두 글자는 이 ꡔ신심명ꡕ의 강령으로서 초심에 대기를 발하여 불이의 대도를 체득함으로써 신심불이 불이신심의 종지를 꿰뚫게 하는 내용으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에서 ꡔ신심명ꡕ에서는 일체의 이견을 단절하는 내용으로서 지와 동․일과 이․일과 일체․대와 소․유와 무, 그리고 능과 경 등의 회호를 일심의 원리로 전개하고 있다.15)
신심이 여기에서는 상즉상재 호섭호융이라는 일심의 원리로 전개되고 있다. 그 일심이 바로 다름아닌 신이고 일체로서 달마의 이입에 나타난 중생의 동일진성을 신하는 입장이다. 그리고 모두의 「지도무난 유혐간택」과 말미의 「신심불이 불이신심」이라는 구절은 ꡔ신심명ꡕ의 강요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본 편은 일심불생으로 일체를 포용하여 유즉무 무즉유로서 일즉일절 일체즉일의 무애자재한 실천을 노래하고 있다. 우리는 이 ꡔ신심명ꡕ 속에 화엄사상과 여래장사상이 들어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곧 신심불이의 심은 곧 우리들이 본래부터 구족한 심성이고 개개인에게 원성되어 있는 불심을 가리킨다. 그래서 신심을 포괄한 능통일의 일심으로서 소위 자성청정심․여래장 내지 불성을 의미한다. 이것은 바로 달마의 이입사행 가운데 이입으로서 사행 속의 칭법행의 취지도 또한 이 입장과 같다. 왜냐하면 달마의 신은 바로 본각적인 입장에서의 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중량소는 달마의 신에 대하여 달마의 이입사행설에 설해진 신은 철저하게 본각위에 기초하고 있는 「금강대승」이라는 밀교의 신과 지극히 유사성이 깊다고 말하면서 금강수우의 설을 인용하여 신의 두 가지 입장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밀교에서 특히 중점이 되는 신을 Śraddhā(심신)와 adhimukti(신해)의 두 가지가 있다고 하여 이 신에 대하여
(1) 신해(adhimukti)는 이를 견하여 신하는 것이다. 곧 반야에 의거하는 신이다.
(2) 심신(Śraddhā)은 사에 의하고 인에 의하는 신이다. 곧 불성 내지는 심청정에 대한 신이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지금 달마선에 있어서 신도 이입의 함생동일진성의 심신과 행입의 칭법행에 있어서 성정지리의 신해가 밀교의 그것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16)
달마선은 송대 이후 본각문의 신에 대한 근거의 반성으로부터 시각문적인 간화선의 의단으로 전환되어 간 것이다.17) 달마선이 대승을 표방하고 달마선을 계승한 중국선이 대승불교의 일파로서 본각문에 입각하고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상상근기의 선을 중하근기에까지 확대하는 과정에 있어서는 시각문적인 요소가 표면화되어 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시각문적인 간화를 향한 계기가 달마선의 「지사문의」와 같은 가르침 속에 이미 포함되어 있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만 「지사문의」라 해도 그것이 본각문을 떠난 것이 아니라 달마에 있어서는 본각돈오의 동적인 묘용의 그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시각문적인 계기가 점차로 표면화되어 본각문에 입각하고 있으면서도 시각문적인 간화의 측면이 강조되어 대두된 것이 소위 송대 및 그 이후의 간화선이다. 이 시각문적인 송대 간화선의 입장에 대하여 달마선 본래의 본각문적인 입장을 정전하고 다시 그것을 현성시켜 본증자각의 틀을 갖춘 것이 굉지정각의 묵조선의 입장이었다.
한편 도신에 있어서 타좌의 본지는 임운무작으로서 일심의 명정을 기하는 데 있다. 그 정심은 백천의 묘문으로서 항사의 공덕이 내는 근원이다. 요요하게 상지하는 일심은 일체의 작위를 끊고 임운하는 곳에 현현한다. 또한 달마의 가르침인 대승의 정리에 입하는 긴요한 것으로 ꡔ릉가사자기ꡕ에서는 (1) 지심체, (2) 지심용, (3) 상각부정, (4) 상관심공적, (5) 수일불이 등을 언급하고 있다.
무량수경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제불의 법신이 일체중생의 심상에 드니 그 심이 곧 부처를 이룬다’ 그러니 마땅히 알라. 부처는 곧 이 마음이요, 마음 밖에 달리 부처가 없다는 것을. 그것을 간략히 말하자면 무릇 다섯 가지가 된다. 첫째는 마음의 체를 아는 것이다. 마음의 체성은 청정하여 부처와 같다. 둘째는 마음의 용을 아는 것이다. 마음의 작용이 법보를 내고 열반을 짓나니 모든 번뇌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셋째는 깨달음은 영원하다. 깨달음은 멀리 있지 않으나 각각의 법은 상이 없다. 넷째는 항상 신이 공적함을 관한다. 안과 밖이 다름이 없어 몸이 법계에 드니 일찍이 걸림이 없다. 다섯째는 일을 굳게 지킨다. 동과 정이 항상 함께 하여 수행자로 하여금 분명히 불성을 보아 곧 선정에 들게 한다. 여러 경전에는 많은 종류의 관법이 있으나 부대사가 설한 바 수일불이가 가장 뛰어나다.18)
즉 마음의 체를 알고, 마음의 작용을 알며, 항상 부지런히 깨어 있고, 항상 몸이 공적함을 관찰하며, 하나를 지켜 변함이 없게 하는 것[지심체․지심용․상각불정․상관신공적․수일불이]을 강요로 하면서 그 원리는 좌선관심에 두고 있어서 달마의 벽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여기에서 승찬의 신심이 수일, 즉 수일심진여의 원리로 바뀌어 있을 뿐이다. 심의 본체가 불성임을 알아 불성이 동과 정의 이변에 흔들리지 않는 평등일미임을 관한다. 이 일심의 진여(불성)를 지킨다는 것은 저 ꡔ금강삼매경ꡕ의 골자이기도 하다.19) 한편 달마 이입사행의 사상적인 원천이 바로 ꡔ금강삼매경ꡕ에 있다는 종래의 견해에 대하여 오히려 유전성산의 주장20)이 있는가 하면, 수야홍원의 주장도 제기되어 있다.21) 이러한 사실은 달마의 이입사행설이 초기선종사상에 얼마나 보편적으로 권위를 지니고 있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2. 동산법문의 전승
사조도신을 중심으로 하여 오조홍인을 거쳐 남능북수로 일컬어지는 남종과 북종의 시기에 가장 널리 세력을 지니고 있었던 일군의 선종사상을 동산법문이라 한다. 여기에서 남종과 북종의 명칭은 이후 남종선과 북종선의 명칭과는 맥을 달리한다. 여기에서의 남북 양종의 명칭은 곧 지역적인 구분으로서 일찍이 수도 장안과 낙양에 진출해 있던 귀족을 중심으로 하는 선종의 일군과 혜능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가고 있던 남방의 서민층을 중심으로 하는 일군의 선종을 일컫는 말이다. 사실 혜능이 시적한 이후 그의 제자들로부터 번영한 남종선과 북종선의 의미는 이와 같은 지역적인 계층적인 측면에다 돈점의 사상적인 측면이 가미되어 일컬어지는 명칭이었다.
이 가운데 당시 남종과 북종의 직접적인 계보의 중심에 있었던 홍인은 ꡔ금강반야경ꡕ을 수지하면서 심성의 본원에 철저함을 본지로 삼아 수심, 즉 수본진심의 참학을 강조하였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ꡔ기주인대사도범취성오해탈종수심요론ꡕ을 저술하였다.22) 혜능은 ꡔ수심요론ꡕ을 인대사가 범인을 깨달음으로 인도하기 위해 수심의 도를 보여준 요론이라 정의하고, 그 근본사상은 ‘수심’에 있다고 설명하였다.23) 홍인은 이 수본진심은 혜능의 견성으로 이어진다. 혜능은 후에 무상계의 수계를 중심으로 한 「마가반야파라밀법」을 설하여 ꡔ륙조단경ꡕ이 편집된다. 그 핵심적인 선법은 「견성성불」이다. 홍인은 ꡔ수심요론ꡕ에서 「우선 진심을 지킨 후 성불을 얻는다」 라고 했는데, 이것은 혜능의 견성성불의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양자가 「자성원만청정지심」을 수심으로 지켜갈 것인가, 아니면 「자성청정원만지심」을 그 자체로 인정할 것인가의 차이이다. 혜능의 견성은 홍인의 수심에 의해 개화했으며, 혜능은 홍인의 수심․수진심․수본정심을 고양한 것이라 할 수 있다.24) 즉 심의 종교적 개념을 성으로 완성한 것이다. 그 일례는 ꡔ단경ꡕ의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선 혜능이 홍인을 처음 친견하는 곳에서 주고받은 이야기도 바로 불성의 문제였다. 이 불성이 후에 혜능에게는 청정자성을 의미하는 중요한 개념으로 사용되어 간다.
여기에서는 이전과 같은 심의 추구라든가 간심의 문제가 아니라 본래성품의 현현이 이야기되고 있다.25) 누구나 이미 구족하고 있다는 불성의 개현은 바로 그의 오도송에 잘 나타나 있다. 이미 견성은 수선의 의미를 넘어 절대경의 차원으로 나타나 있다. 신수와 혜능의 오도송26)의 대비는 바로 이 점을 더욱 극명하게 상징하고 있다. 그래서 홍인의 선은 자성청정심에 계증하는 것을 주로 삼아 정심을 중시하고 즉심즉불의 리를 고조시킨 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단지 홍인은 그의 저술보다는 자신의 인격에 그 정신을 구현한 사람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ꡔ릉가사자기ꡕ에는 홍인에게 특수한 선법이 있었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27)
또한 도신의 법을 이은 법융(594-657)은 처음 우두선을 별립하였다. 법융에게는 ꡔ심명ꡕ이라는 저술이 있으며, 또한 ꡔ절관론ꡕ도 그의 저술로 알려지고 있다.28) 그가 주안점으로 삼은 것은 「보제본유 번뇌본무」를 강조하여 일체의 작위를 떠나 일심을 전현시키는 것이었다. 우두의 일심은 본래부터 구족해 있는 본각에 입각한 일심으로서, 이 일심은 곧 달마안심의 심인 자성청정심이다.29) 이러한 내용은 ꡔ절관론ꡕ에 잘 나타나 있다. ꡔ절관론ꡕ은 우선 그 도입부분에서 「대도는 충허유적하여 심으로는 알 수 없고, 말로도 나타낼 수 없다. 그렇지만 이제 짐짓 이인의 인물을 설정하여 서로 진실을 말하게 하는 것이다」 라고 하고, 이하 입리라는 선생과 연문이라는 제자 사이에 이루어지고 있는 문답에 따라 전편이 구성되어 있다. 그 벽두에서 연문의 「심이란 어떤 것이며 어떻게 심을 안정시키는가」 라는 물음에 대하여 「무심」의 지리를 설하고 이 「절관의 무심」이 심을 안정시키는 「대도」 바로 그것이다고 말하는데, 이것이 전편의 주제가 되어 있다. 이리하여 우두는 일심의 근본을 확신한 바탕위에 공관에 철저하여 불공의 묘성을 현현시키려고 노력하였음을 알 수 있다.
혜능은 반야공관에 의하여 도에 들었다고 할 수 있다. 그 반야공관의 사상은 대범사에서 행한 마가반야파라밀법이 그 좋은 예이다. 이 법은 몸을 가지고 직접 염념에 행해야 할 것으로서 이것을 반야삼매라 칭한다. 그리고 정혜는 일체로서 불이이다. 확실히 정은 혜이 체이고, 혜는 정의 용이어서 혜에 즉했을 때 정은 혜에 있고, 정에 즉했을 때 혜는 정에 있다. 혜능은 불성의 유무에 의하여 홍인에게 인정받고 그 문하에 들어간 바와 같이 그의 생애를 통하여 동일진성의 철견을 강조하였다.30) 그러면서도 그것은 교가와 같이 심성을 대상으로 하여 지각하는 것이 아니라 곧바로 심성 그 자체를 계당하여 그 자신이 되고 그것을 전체적으로 구현하는 것이다. 심성에 철견하는 행이 곧 좌선이다. 그리고 좌라는 것은 일체에 있어서 걸림이 없고 망념이 사라지는 것을 말하고, 선이란 본성을 철견하여 혼란스럽지 않는 것을 말한다. 또한 밖으로 상을 여윈 것을 선이라 하고, 안으로 산란하지 않는 것을 정이라 한다. 본각진성이 서로 융즉하여 혜와 정이 발현되는 것이야말로 바로 혜능의 선이다. 이러한 법문을 곧 돈교라 칭한다. 여기에 철견하는 것이 바로 돈오이다. 돈오는 곧 자기의 묘심에 입각하여 번뇌망념이 본래 공한 것을 증득하는 것이다. 혜능의 오후보임 16년 동안의 수행은 돈오묘수를 증득하기에 충분하다. 일상의 사위의가 모두 직심으로 확충되고 일체법에 있어서 집착이 없는 실천을 일행삼매라 한다. 혜능은 단순한 타좌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 선정의 참된 정신을 그 생활 전체 속에서 구현하였다. 나아가서 설간에게도 「도는 심을 말미암아 깨닫는 것이다. 어찌 좌에 있겠는가」라고 말한다. 그리고 직심이 곧 도장이기 때문에 정토는 반드시 직심을 떠나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며, 만약 무생돈법을 깨달으면 서방을 보는 것도 단지 찰나에 있을 것이다고 말한다. 이처럼 돈교의 법문은 출가와 재가의 차별이 없이 일체에 타당하게 적용되고 있다.
3. 조사선에서의 수용
한편 혜능의 제자인 남악회양의 사상과 그 실천은 남종선의 특색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수와 증을 대립시켜서 좌선하면서 깨달음을 구하거나 작불을 도모하는 것이 아니다. 그 반대로 본증묘수․수증일여의 좌선이야말로 불염오의 행이었다. 또한 회양은 일체가 일심법계에 다름 아니기 때문에 학인은 유무의 대립을 포월하여 무이의 진심으로 귀착해야 할 것을 강조한다. 또한 회양은 「그대의 지금 그 마음이 곧 불이다. 때문에 달마가 서래하여 오직 일심을 전했을 뿐이다. 삼계유심이란 삼라와 만상이 일법에 인하는 것이어서 무릇 소견하는 색은 모두 자심일 뿐이다」 라고 설하여 즉심즉불․삼계유심의 입장을 개시하였다. 이 일법은 곧 일심을 말하는 것으로 ꡔ화엄경ꡕ의 일절유심조의 심이기도 하다. 여기 일절유심조에서의 심은 중생심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심과 불과 중생에 차이가 없는 것으로서 수행의 입장에서는 자성청정심의 지향이다. 이 심 역시 일심으로서 달마의 안심이고 벽관이다.
하택신회의 ꡔ현종기ꡕ에는 「무념을 종으로 삼고 무작을 본으로 삼으며 진공을 체로 삼고 묘용을 용으로 삼는다. 대저 진여는 무념으로서 상념으로 알 수 있는 바가 아니고, 실상은 무생으로서 어찌 색심으로 볼 수 있으랴」31) 라고 서술하고 있듯이 신회는 적지를 체로 삼고 무념을 종으로 삼고 있다. 그 선은 돈오점수를 입장으로 내세우고 있다. 점수를 내세우는 것은 아직 남종의 돈오묘수에까지는 이르지 못한 까닭이다. 그러나 북종의 실수점오와는 크게 다르다.
ꡔ송고승전ꡕ 무업전에 있는 마조와 무업의 문답에 의하면 마조도일은 시심시불을 설하여 법신실상의 본자구족를 주장하였다.32) 이것은 중생 외에 달리 불이 없다는 만법유심관에 입각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선이 철저하게 돈이고 적극적이었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한편 ꡔ송고승전ꡕ의 기록에 의하면 석두의 답변은 지극히 간속하다. 그 사상에는 승조의 영향이 엿보인다. 곧 만물을 회하여 자기로 삼는 점은 피차에 서로 일치하고 있다. 그의 저술로 ꡔ참동계ꡕ와 ꡔ초암가ꡕ 등이 있다. ꡔ종경록ꡕ 권98과 ꡔ전등록ꡕ 권14에 의하면 석두는 행사와 마찬가지로 즉심시불을 역설하였다. 또한 석두는 ꡔ참동계ꡕ에 의하여 영원과 지파의 회호와 불회호를 밝혔으며, 나아가서 남북양종의 조화를 도모하였다. 이것은 이후 조동종의 주요한 교의 가운데 하나인 오위의 기초가 되는 것으로서 달마의 이입과 사행이 서로간에 회호와 불회호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그대로 증명해 주는 좋은 사상적 증거이기도 하다.
백장회해의 사상으로는 ꡔ고존숙어록ꡕ에 수록되어 있는 상당어에 「영광이 독휘하여 아득히 근진을 벗어난다. 체로진상하여 문자에 구속되지 않는다. 심성은 무염하여 본래 원성하다. 단지 망연을 여의기만 하면 곧 그것이 여여불이다」33) 라는 말에서 간략하게 그 종요를 엿볼 수 있다. 대중에게 입도하는 돈오의 법요를 설함에 불저을 종으로 삼고 무구를 심요로 삼았다. 남천보원과 서당지장은 모두 마조도일의 법을 얻고 선기가 종횡하여 교화의 문을 크게 열어 종풍을 선양하는데 힘썼다. 특히 남천은 불시심․불시불․불시물의 삼구를 제언하여 즉심즉불의 병폐를 지적하였다. 조주가 어느 날 「어떤 것이 도입니까」라고 묻자 「평상심이 곧 도이다」라고 답한 것은 특히 유명하다. 또한 황벽희운의 중심사상은 본원청정한 일심이 곧 불이라는 것이기 때문에 밖을 향하여 도를 구하지 않고 오로지 일심에 계합할 것을 설하는 데에 있다. 확실히 불심을 오수하여 무구무저하게 될 때 사람은 비로소 선에 철저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백장과 남전과 황벽의 기본사상은 모두 특별히 구할 것이 없이 일상 평소의 마음을 지니고서 집착을 내지 말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 역시 달마의 사행 가운데 특히 일상생활의 수행을 강조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무소구행과 칭법행에 일심으로 계합할 것을 강조하는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Ⅳ. 이입사행과 오위
1. 조동오위
오위사상의 원류는 석두희천의 ꡔ참동계ꡕ의 회호사상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석두희천은 「참동계」에서 리․사 그리고 명․암이라는 대립의 초극으로 승화하고 있다. 석두는 심과 불과 중생과 보제와 번뇌의 체는 같지만 이름만 다를 뿐이며, 영묘한 마음의 체는 구경원만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현상의 세계도 모두 자기 마음의 모습이라고 한다. ꡔ전등록ꡕ에서는 그의 종풍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의 법문은 선대부터 부처님께서 전해 주신 것으로서 선정과 정진을 논하지 않는다. 다만 부처님의 지견을 통달하면 곧 마음이 부처이다. 마음과 부처와 중생 그리고 보리와 번뇌는 명칭은 다르나 본체는 같다. 자기 마음의 신령한 체성은 단상을 떠나 있어서 곧 성품은 더럽고 깨끗함이 없고, 담연하고 원만하여 성인과 범부가 같으며, 응함에 방소가 없어 심과 의와 식을 여의었다. 삼계와 육도가 오직 마음에서 나타난 것이다. 그러니 어찌 물 속의 달과 거울 속의 그림자에 생멸이 있으랴. 그대들이 그것을 인식만 한다면 두루 갖추지 않은 바가 없는 것이다34)
ꡔ참동계ꡕ는 그 제목에서도 볼 수 있듯이 차별현상[참]과 평등일여[동]의 실제가 상즉원융함을 말한 것이다. 여기에 나타난 상즉과 회호의 원리는 조동오위35)의 사상적인 기초가 되어 있다.
신령스런 근원은 밝고 맑으며 지말은 그윽하게 흐른다.
사에 집착하는 것은 본래 미혹이고 이치에 계합하더라도 그것은 깨침이 아니다.
육근의 일체경계는 회호도 하고 또 불회호도 한다.
회호하면 다시 섭하고 그렇지 않으면 제자리에 머문다. ···
밝음 속에는 본래 어둠이 있으니 어둠이라는 상으로 헤아리지 말라.
어둠 속에도 또한 본래 밝음이 있으므로 밝음이라는 상으로 찾으려 하지 말라.
밝음과 어둠의 관계는 마치 걸음걸이와 같아서 서로 앞뒤가 없다.36)
영원과 지파․리와 사․본과 말․명과 암 등이 각각 일체의 경계에서 회호와 불회호를 이룬다. 그러면서도 한 차원 높게 이원적인 대립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회호의 논리를 통하고 있다. 마치 그것은 걸음을 걸을 때의 왼발과 오른발처럼 서로 전후가 없이 앞선 듯 뒤선 듯 함께 진행해 나아간다. 이러한 원리가 그냥 논리에 그치지 않고 주체적으로 실천적인 계기로 나아갈 것을 요구한다. 이와 같은 석두의 회호와 불회호의 실천논리는 그의 제자 약산유엄에게 전해져 간결직절한 일구에 의한 단적인 접화방법으로 나타나고 있다.37) 즉 약산의 선풍은 좌선에 있어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무사량의 좌선이 아니라 사량분별을 초월한 비사량의 입장에서 절대진리를 드러내고 있다. 또한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 간결하게 일구로 답변하고 있는 것도 바로 비사량의 입장으로 이끌어 들이려는 접화방법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흐름은 바야흐로 당시의 선계에 만연해 있던 교의를 실천적인 입장에서 제자를 접화하려는 새로운 지도원리의 출현을 암시해 주고 있다.38) 석두와 약산으로 이어지는 사상적인 계보는 운암담성을 거쳐 동산양개에 이르러 그의 ꡔ보경삼매ꡕ에서 마침내 회호와 불회호의 원리가 완성된다. 그것이 소위 오위사상이다.
오위는 운암담성이 석두의 사상을 기본으로 하여 기초를 세운 뒤 동산양개가 ꡔ보경삼매ꡕ에서 그 회호와 불회호의 원리를 밝히고 마침내 ꡔ오위현결ꡕ에서 편정오위의 교의를 완성시킨 조동종파의 철학적 실천적 원리이다. 그 다섯 가지에 대한 각각의 비유는 정과 편의 다섯 가지 위상을 암시하는 바로서 ꡔ보경삼매ꡕ 내에서 가장 흔히 언급되고 있다. 정과 편에서 정은 주관․주체․리를, 그리고 편은 객관․객체․사를 상징하고 있다. 그래서 정을 흑원(●)으로 나타내는 것에 상대하여 편을 백원(○)으로 나타내어 도시하기도 한다.
2. 이입사행과 오위의 관계
달마의 이입사행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으로서 이입은 모든 중생이 동일진성을 구비하고 있다는 이치를 깊이 믿음으로서 깨달음을 얻는 입장이고, 행입은 이입을 깨달음의 원리로 파악하여 그 실천수행이라 간주하기도 한다. 그러나 달마선법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이치 따로 실천 따로의 구분이 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달마의 벽관은 면벽 그대로의 좌선행위가 바로 깨달음의 현성이다. 달마의 깨달음은 벽관이라는 좌선수행 이외에 달리 그 결과로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달마는 인도에서 이미 깨달음을 완성하고 당시의 여섯 종파의 견해를 타파하였다.39) 그리고 불조의 혜명을 전승하기 위하여 중국에 건너와서 시절인연을 기다리면서 한 행위가 벽관이었다. 이 벽관은 달마가 수행이 부족해서 가행한 것이 아니라 이미 완성되어 있는 깨달음의 현성 그대로의 행위였다. 달마에 있어서 이입은 이미 이입 그 자체로 깨달음의 현성이고, 행입은 행입 그 자체로 깨달음의 현성이었다. 그래서 굳이 이입을 통한 수행의 실천인 행입이 필요하지도 않았고, 행입의 원리를 실상적인 차원에서 보증받기 위한 이입이 아니었다. 이입은 그대로 이입이고 행입은 그대로 행입일 뿐이었다. 이것은 달마가 오직 벽관을 통한 불립문자만을 고집한 것이 아니라 그의 어록에서 극명하게 나타나 있는 자교오종의 입장에 잘 나타나 있다. 자교오종에서의 「교」는 곧 정법안장을 담고 있는 부처님의 일대시교이고, 「종」은 일대시교에 함장되어 있는 정법안장이다. 그래서 일대시교와 정법안장의 관계는 서로간에 부즉불리의 관계이다. 달리 회호․불회호의 상관성을 지니고 있다. 여기에서 이입을 일대시교로 보고 행입을 정법안장으로 본다면 일대시교 자체에 본래부터 모든 깨달음의 원리와 깨달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고, 정법안장도 일대시교가 부처님에 의해서 설해지건 설해지지 않건 간에 관계없이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었다. 다만 그것을 자각하는 몫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 자각이 달마에게 있어서는 벽관의 좌선이었고, 혜가에게 있어서는 안심의 터득이었다. 그래서 이입과 행입의 관계는 곧 안심과 벽관의 관계처럼 안심 그대로 깨달음의 현성이고 벽관 그대로 깨달음의 완성을 나타낸다. 바로 이러한 관계가 이후 동산과 조산에 의하여 하나의 교의로써 완성된 오위의 기초원리이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이입과 행입을 각각 이와 행으로 표현하여 오위의 구조 속에 달마의 이입사행의 구조를 대비시켜 보고자 한다.
오위의 기본 구조가 정과 편의 회호와 불회호의 상차상관의 구조라는 것은 이미 언급한 바와 있다. 바로 이러한 구조속에 달마의 이입사행을 대입하여 달마사상의 구조를 살펴서 달마사상이 후대 오위의 기본적인 틀이 되었음을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달마의 이행(이입과 사행)이 지니고 있는 성격이 선법의 실천적인 표현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입과 행입이 모두 수행자의 입장에서 깨달음을 자각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행은 달마선법의 이론이면서 수증의 형태임을 감안한다면 동상의 오위 또한 수행의 단계가 아니라 실천의 다섯 측면에서 이루어진 것40)과 극히 유사한 행태임을 알 수 있다. 우선 오위에서 제일위 정중편은 정의 본체로부터 편의 현상으로의 전개로서 정과 편의 회호이다. 제이위 편중정은 편의 현상으로부터 정의 본체에로의 전개로서 편과 정의 회호이다. 제삼위 정중래는 순수한 정인 본체만의 전개로서 불회호이다. 제사위 편중지는 순수한 편인 현상만의 전개로서 불회호이다. 제오위 겸중도는 정과 편인 본체와 현상을 잃지 않으면서 정과 편을 초월하여 수행이 완성된 실천적 승화이다.
이것은 달마의 이행에 대해서도 적용시켜 볼 수가 있다. 달마는 불립문자 교외별전을 표방하는 선종의 기치를 그 이면적인 측면에서 파악하여 자교오종이라 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것은 곧 달마의 벽관이 단순한 좌선의 형태가 아니라 안심의 현성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자교오종의 교가 입격의 교가 아니라 출격의 교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달마의 이행의 회호관계로 말하자면 이입은 그 속에 행이 완성되어 있는 이입이고, 행입은 그 속에 리가 현성되어 있는 행입임을 인정할 수 있다. 따라서 곧 벽관은 이중행이고, 안심은 행중리의 구조가 된다. 그리고 이행의 불회호관계로 말하자면 벽관과 안심의 상관성은 벽관이 좌선의 표현이라는 측면에서 벽관 그 자체인 이중래이고, 안심은 중생의 동일진성의 내용이라는 측면에서 안심 그 자체인 행중지이다. 그러나 벽관은 안심을 내용으로 한 안심의 벽관이고, 안심은 벽관을 형식으로 한 벽관의 안심이다. 이와 같은 이행의 상차상관 구조가 곧 회호․불회호의 관계인 겸중도로서 달마의 자교오종의 다른 표현이다.
이러한 구조는 달리 사행의 구체적인 내용에 잘 나타나 있다. 곧 제일위 이중행은 칭법행으로서 자성청정의 이치에 철저한 자리이타이고, 제이위 행중리는 보원행으로서 현세의 행위 속에서 깨달음에 어긋나지 않는 도리를 깨우쳐 가는 것이며, 제삼위 이중래는 수연행으로서 일체의 도리는 서로서로 무애한 이법의 관계로 형성되어 있는 것이고, 제사위 행중지는 무소구행으로서 일체행이 무위행으로 드러나 있는 것이며, 제오위 겸중도는 사행으로서 일체의 수증이 갈무리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제오위의 사행은 네 가지 실천적인 행위의 의미만이 아니라 달마선법의 이행을 모두 포함한 사행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다섯 계위는 수행 순서상의 계차적인 의미가 아니라 각각의 수행 속에 보살행이 현현되어 다섯 측면이라는 의미이다. 여기에서 이와 행의 관계를 각각의 상리과 상즉의 상태로 보아서는 어느 것도 온전한 성립을 이룰 수 없다. 왜냐하면 양자는 각각 그 자체의 본질상으로 보면 타자이면서 동시에 자기인 회호와 불회호의 관계에 서 있다. 다시 말해 서로 합일관계에 있으면서 동시에 긍정과 부정이라는 한정적인 관계이다. 바로 이 합일관계이면서 한정관계야말로 진리를 현현시키는 중요한 실천적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이 이와 행의 관계에서 ‘중’이라는 용어는 이와 행에 대한 동적인 매개체이면서 전체를 구체화시켜가는 합일체의 역할을 하고 있다. 즉 동용중의 이를 한정하여 행으로 나아가게 하고, 현상의 행을 이에 합일시켜 회호와 불회호로 이끌어간다. 이리하여 ‘이와 행과 중’이라는 삼자에 의하여 언어도단 언전불급의 동일진성이라는 안심을 자교오종으로 상징화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고 있다.
Ⅴ. 결 어
후대 중국선종의 선사상의 근거는 모두 달마로부터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만큼 달마의 가르침은 그것이 역사적인 진위를 떠나서 달마에게 부여된 권위가 대단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이입사행은 가장 달마의 친설에 가까운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여기에서는 그 이입사행의 구조와 그 전승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이입사행은 이입과 행입이라는 이론적인 방법과 실천적인 방법이라는 구조로 파악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근본에 있어서 이입과 행입의 전개는 이입을 바탕으로 한 행입의 전개이면서 동시에 이입과 행입이 각각 완전한 하나의 수증형태임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달마에게 있어서 그 사상적 성격과 형태는 안심법문과 벽관이 보여주고 있듯이 안심은 달마가 체득한 깨달음의 원리에서 파악한 것이라면 벽관은 그 깨달음의 행태적인 모습에서 파악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자의 구조는 이입을 통한 행입도 아니고 행입을 뒷받침하는 이입도 아니다. 그 관계는 이입은 이입대로 행입은 행입대로 완전한 수증의 형태로서 상호 회호와 불회호의 상차상관에 서 있는 구조이다. 이것은 달마가 사용한 자교오종이라는 말의 의미에 대한 재평가를 필요로 한다. 달마의 제자에 대한 접화방식이 형태로는 소승적인 모습을 띠고 있지만 달마가 추구한 것은 유루적인 복덕 내지 수행의 점진적인 방식이 아니었다. 오히려 무루공덕을 강조한 본각적인 입장에 서 있었기 때문에 사행의 원리로서 이입에 접근한 것이 아니라 이입의 행위로서 사행에 접근해 나아갔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이입과 행입이라는 방법은 아직 선법이 성숙하지 못한 중국에 와서 달마가 전미개오케 하는 방편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입과 행입을 통해서 달마가 진정 말하고자 했던 것은 안심과 벽관의 그 모습 그대로였다. 혜가는 이것을 터득하여 달마로부터 사법한 제자가 된 것이다.
이러한 이입과 행입의 구조는 이후 초기선종사상의 기본적인 토대가 되었음을 살펴볼 수 있었다. 나아가서 조사선의 접화방식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조동종의 기본적 교의인 오위의 구조적인 토대를 제공하였다. 따라서 역으로 달마의 이입과 행입의 성격과 형태를 살펴보는데 있어서 후대의 오위의 구조를 배대한 결과 이입과 행입의 관계는 달마가 전하려 했던 반야공관에 근거한 대승벽관의 실천적인 형태가 잘 드러날 수 있었다. 곧 이입과 행입의 관계는 달마가 터득한 깨달음의 구조 곧 안심과 벽관의 입장을 현실 속에서 네 가지 행위의 각각으로 드러내려 했던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불립문자와 교외별전의 출격적 형태인 자교오종이라는 의미를 통하여 이입은 그냥 이입이 아니라 행입과의 겸중도의 관계 속에서 보다 잘 표현될 수 있었다.
이 이입과 행입의 구조는 선종의 수증방식에 있어서 이입과 행입의 어떤 입장을 강조하는가에 따라서 때로는 간화선으로 때로는 묵조선으로 등장하는 원류이기도 하다. 해동에 전래된 선사상에 있어서 소위 선종의 종지로서 불립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 견성성불이라는 입장은 결코 단순한 교의 부정 내지 배제가 아니었다. 역대로 언설문자를 구사하지 않은 선사는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 문자에 전도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언전의 묘를 터득했기 때문이다. 그 언전의 묘란 다름 아닌 언설과 자신과의 관계 속에서 언설에 몰입하지도 않고 초탈하지도 않은 회호․불회호의 관계를 터득한 결과였다. 그래서 소위 선종의 종지라고 표방하는 것은 반드시 교를 통하여 교를 타고 넘은 불립문자이지 않으면 위험천만한 일이다. 그 교라는 입격을 거친 불립문자의 출격이어야지, 그렇지 않은 직지인심이란 무명행에 떨어지기 쉽상이다. 달마는 바로 이와 같은 선법의 맹점을 타파하기 위한 방법으로 이입과 행입을 통한 안심과 벽관을 자교오종으로 회통한 것이다.
각주)-----------------
* 동국대학교 강사
1) 달마의 사행의 근본은 소승의 오정심관에서 연유하였고, 또한 ꡔ화엄경ꡕ 「명법품」에서도 그 근거를 찾아볼 수 있다.
2) ꡔ전등록ꡕ 권3, (대정장51, p.220하)
3) ꡔ전등록ꡕ 권3, (대정장51, p.221하)
4) 유전성산, ꡔ달마の어록ꡕ 「이입사행론」, (축마서방. 1996년) pp.294-
298.
“우문 교제자안심 답 장여심래 여여안 단여제자안심 답 비여청교인재의 교인득여견백 시득하도 본불견견백 녕득여여재할허공 여기불능장심여아 아지위여안심하물심 아실불능안허공”
5) 한편 소승불교 선정의 특징으로는 (1) 그 이원적인 실재관에 의하여 형식적으로 고정화 되었고, (2) 팔정도의 앞 칠지를 정정의 방편으로 삼아 이것을 목적시 하였으며, (3) 수정의 효과를 구체적으로 드러내려고 단계를 중요시하였고, (4) 그 단계설을 욕계․색계․무색계의 삼계설에 결부시켜 선관의 항목이 조직적이 아닌 수집적인 경향을 취하였으며, (5) 그 선수의 어떤 하나를 취하여 닦아도 그 최후는 심지가 구경적인 것이 되어 대승으로 변화하고, (6) 소승의 법수를 선관으로 삼아 닦은 유가사와 이외에 미친 영향은 절대적인 것이 되었다는 점 등을 들 수가 있다.
6) ꡔ화엄경ꡕ 권18 「명법품」, (대정장10, p.97)
“불자 보살 운하어제중생 수기소응 이위설법 소위지기소작 지기인연 지기심행 지기욕락 탐욕다자 위설부정 진에다자 위설대자 우치다자 교근관찰 삼독등자 위설성취승지법문 락생사자 위설삼고 약착처소 설처공적 심해태자 설대정진 회아만자 설법평등 다첨광자 위설보살 기심질직 락적정자 광위설법 영기성취 보살 여시수기소응 이위설법”
7) ꡔ전등록ꡕ 권30, (대정장51, p.458중) “부입도다도 요이언지 부출이종 일시리입 이시항입 리입자 위자교오종 심신함생동일진성 단위객진망상소복 부능현료 야야사망귀진 응주벽관 무자무타 범성등일 견주부이 갱부수어문교 차즉여리명부 무유분별 적연무위 명지리입”
8) 벽이란 밖으로부터 객진과 작위적 망념이 침입하지 않는 것으로 심의 비유이기도 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벽을 관찰한다든지 벽이 되어 관찰한다든지 하는 것은 바로 벽을 마주 한다든가 벽을 등진다든가 하는 의미와 동일하다. 벽을 등지지 않고서는 벽을 마주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9) ꡔ전등록ꡕ 권30, (대정장51, p.458중)
“우시유유도육혜가 차이사문 연수후생 준지고원 행봉법사 사지수재 건공자계 선몽사의 법사감기정성 회이진도 여시안심 여시발행 여시순물 여시방편 차시대승안심지법 령무착류 여시안심자벽관 여시발행자사행 여시순물자방호기혐 여시방편자견기불저”
10) 보제유지 역, ꡔ금강반야파라밀경ꡕ, (대정장8, p.752하)
11) ꡔ전등록ꡕ 권30, (대정장30, p.219중)
12) ꡔ조당집ꡕ 권2, (고려대장경45, p.246상)
“유일거사 불설년기 후유사십 급지예사 불칭성명 운 제자신환풍질 청화상참회 사운 여장죄래 위여여참회 거사왈 멱죄부가견 사운 아령위여참회경 여금의의불법승보 거사문 단견화상칙지시승 미심세간하자시불 운하위법 사운 시심시불 시심시법 법불무이 여지지호 거사왈 금일시지 죄성부재내외중간 여기심연 불법무이야”
13) ꡔ소실육문ꡕ, (대정장48, p.369하)
14) 혜가의 사상은 달마 이입사행의 근본취지에 철오하고, 릉가경을 의용하여 만법유심의 일심에 입각하였다. 그리하여 이견의 대대를 무릇 자심에서 나타난 망심으로 간주하였는데, 이것은 달마보다도 적극적인 표현으로 볼 수 있다.
15) ꡔ신심명ꡕ, (대정장48, pp.376중-377상)
16) 전중량소, 「달마선における신について」 (ꡔ종학연구ꡕ7. 구택대학. 1965)
17) 유전성산, 「간화선における신と의の문제」 (ꡔ일본불교학회연보ꡕ
28) p.128.
18) ꡔ릉가사자기ꡕ, (대정장85, p.1288상).
“무량수경운 제불법신 입일체중생심상 시심작불 당지불즉시심 심외갱무별불야 약이언지 범유오종 일자 지심체 체성청정 체여불동 이자 지심용 용생법보 기작항적 만혹개여 삼자 상각불정 각심재전 각법무상 사자 상관신공적 내외통동 입신어법계지중 미증유애 오자수일불이 동정상주능령학자 명견불성 조입정문 제경관법 비유다종 부대사소설 독거수일불이”
19) ꡔ금강삼매경ꡕ, (대정장9, p,370상)에 다음과 같은 말에서 엿볼 수 있다.
“대력보살언 하위존삼수일 입여래선 불언 존삼자 존삼해탈 수일자 수일심여 입여래선자리관심정여 입여시심지 즉입실제”
20) 유전성산, ꡔダルマꡕ, (강담사. 1998년) p.142.
“달마의 이입사행설과 그 불설에 의한 근거라고 하는 금강삼매경의 관계는 크게 주목할 가치가 있다. 종래는 금강삼매경에 의하여 달마가 이입사행설을 설했다고 생각하였다. 사실은 오히려 그 반대이다. 달마의 이입사행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하여 금강삼매경이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근대의 연구에 의하여 확인되었다”
21) 수야홍원, 「보제달마の‘이입사행설’と금강삼매경」, (ꡔ구택대학불교학부연구기요ꡕ13. 1955년)
“금강삼매경과 보리달마 이입사행설의 관계는 이입사행설이 금강삼매경으로부터 채용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달마설이 금강삼매경에 의용된 것 같다”
22) 약하여 ꡔ수심요론ꡕ이라 하며, 달리 ꡔ최상승론ꡕ․ꡔ일승현자심론ꡕ이라고도 한다. 한편 ꡔ수심요론ꡕ은 그의 제자 혜능이 스승인 홍인의 이름을 가탁하여 저술했다는 설도 있다. 중천효, 「릉가종と동산법문」, (ꡔ강좌돈황ꡕ8. 「돈황불전と선」 pp.159-160)
23) 위의 책, p.161.
24) 위의 책, p.160.
25) 심을 고요하게 단지 무념으로만 삼는 간심적인 좌선은 배제하고 있다. 즉 지성과의 대화(ꡔ단경ꡕ 대정장48, p.358중)에서, “ ···· 사(혜능)왈 여종옥천래 응시세작 대왈 불시 사왈 하득불시 대왈 미설즉시 설료불시 사왈 여사약위시중 대왈 상지회대중 주심관정 장좌불와 사왈 주심관정시병비선 장좌구신 어리하익” 이라 말하는 것은 그 일례이다.
26) ꡔ단경ꡕ, (대정장48, pp.348중-349상)
27) 대정장85, p.1289중.
28) ꡔ절관론ꡕ은 달마의 저술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이후 ꡔ시취경휘박사추도호ꡕ, (ꡔ대정대학보ꡕ 제30․31집. 1940년)에서 관구진대씨는 ꡔ절관론ꡕ은 우두선 초조의 우두법융의 찬술이라 발표하였다. 이 추론은 후에 ꡔ천태교학연구소교학대회기요ꡕ (제1집. 1951년)에 「돈황출토ꡔ절관론ꡕ소고」를 통해 세상의 학자들에게 주목되어 왔다. ꡔ절관론ꡕ을 자세히 검토해 보면 그 사상에 남종선의 특색이 현저하다는 학자들의 견해는 거의 일치한다. 혜능 혹은 신회보다 앞에 결국 남종선의 성립하기 이전의 사상과 선풍이 강남의 땅에 선포되었음을 알 수 있다.
29)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논증으로는 평정준영씨는 ꡔ돈황불전と선ꡕ(ꡔ강좌돈황ꡕ 8. p.204)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현존하는 ꡔ절관론ꡕ이 달마의 ꡔ이입사행론ꡕ을 전제로 하여 그 뜻을 계승하여 찬술되었다고 하는 것은 학자의 본문연구에서도 밝혀져 있다. 이것은 달마찬술설을 완전히 부인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이 오히려 우두법융 혹은 우두종의 사람들이 얼마나 달마의 전등설을 충실히 서술하려고 했는가 하는 그 증거가 바로 ꡔ절관론ꡕ이다. 이런 의미에서는 종전의 전등설이 말하고 있듯이 우두선이 분명 달마선의 분파라는 증거를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ꡔ절관론ꡕ의 내용이 극히 반야적 경향이 풍부한 작품이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삼론의 영향을 크게 받아 그 반야적 경향이 강한 우두종의 사람들이 달마선의 전등을 주장하려고 쓴 것이 이 ꡔ절관론ꡕ이었다고 보는 것이 온당할 것이다」
30) 혜능과 홍인의 첫 대면부터가 불성 곧 중생의 동일진성에 대한 문답이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후 그의 법어집인 ꡔ단경ꡕ의 전체에 걸쳐 등장하는 자성법문은 곧 이러한 사실을 방증해 주는 좋은 예이다.
31) ꡔ신회화상선어록ꡕ, (ꡔ중국불교전적선간ꡕ 양증문 편교) p.52.
“무념위종 무작위본 진공위체 묘유위용 부진여무념 비상념이능지 실상무생 기색심이능견”
32) ꡔ송고승전ꡕ 권11, (대정장50, p.772)
“(무)업언하활연개오 체루비읍향대적왈 본위불도장원 근고광겁방시득성 금일시지 법신실상본자구족 일절만법종심소생 단유명자무유실자 대적왈 여시여시 일체법성불생불멸 일체제법본자공적”
33) ꡔ고존숙어록ꡕ 권2, (만속장118, p.163상)
“영광독요회탈근진 체노진상부구문자 심성무염본자원성 단리망연즉여여불”
34) ꡔ전등록ꡕ 권14, (대정장51, p.309중-하)
“오지법문선불전수 불론선정정진 달불지지견즉심즉불 심불중생보제번뇌명이체일 여등당지 자기심령체 리단상성비구정 담연원만범성제동 응용무방리심의식 삼계육도유자심현 수월경상기유생멸 여능지지무소불비”
35) 조동오위라는 말은 조동종파에서 내세우는 수행의 실천원리를 다섯 가지 측면에서 파악한 것이다. 특히 그 기본원리는 가령 물과 파도에 비유하면 불회호는 물은 물이고 파도는 파도이다고 보는 입장이다. 곧 물과 파도가 엄연히 존재하는 것으로서 서로가 뒤섞이지 않고 각각이 존재하는 입장이다. 회호는 물과 파도가 각각 물과 파도만으로 존재하는것이 아니라 물이 곧 파도이고 파도가 곧 물이라는 입장이다. 물과 파도가 뒤섞여 있어 구분이 없다. 이와 같은 회호와 불회호의 입장의 관계를 정과 편을 가지고 다섯 측면으로 수행의 원리를 파악한 것이다. 정은 원리를 편은 현상을 상징한다. 그래서 정중편은 원리속에서 현상이 드러나는 입장이고, 편중정은 현상속에 원리가 작용하는 입장이며, 정중래는 순수한 원리만의 입장이고, 편중지는 순수한 현상만의 입장이며, 겸중도는 원리와 현상이 상호간에 각각의 위를 지키면서 동시에 그 위를 고집하지 않고 한 차원 승화된 입장이다.
36) ꡔ참동계ꡕ, (ꡔ전등록ꡕ 권30, 대정장51, p.459중. ꡔ명각선사어록ꡕ 권4, 대정장47, p.697상-중)
“영원명교결 지파암류주 집사원시미 계리역비오 문문일체경 회호불회호 회이경상섭 불이의위주 ··· ··· 암합상중언 명명청탁구 ··· ··· 당명중유암 물이암상우 당암중유명 물이명명도 명암각상대 비여전후보”
37) ꡔ전등록ꡕ 권14, (대정장51, p.312상-중)
38) 당시 임제의현의 갈․덕산선감의 봉․운문문언의 일자관으로 대표되는 선종의 독특한 지도원리도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따라서 위앙종의 원상과 동산양개의 오위 및 그에 대한 후학들의 오위에 대한 도해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원류는 달마의 이입과 행입의 서로간의 회호적인 관점에서 이해하면 더욱 명확하다.
39) 이것을 육종대파라 하는데 ꡔ전등록ꡕ 권3, (대정장51, p.217중)에 의하면, 육종이란 소위 (1) 유상종 : 유물론으로 진리의 상인 실상을 말하는 종파. (2) 무상종 : 일체를 부정하는 허무론자의 선정삼매에 투철한 종파. (3) 정혜종 : 유물론자의 바른 이지를 나타낸 종파. (4) 무득종 : 회의론자의 진실한 입장에서 무득에 대한 깨달음을 인정하는 종파. (5) 적정종 : 유심론자의 선종의 입장에서 적정을 알도록 하는 종파. (6) 계행종 : 계행론자의 청정한 계를 가르치는 종파 등을 말한다. 이것은 모두 외도를 바른 진실의 정법에 귀의하도록 한 달마의 정안을 보여주고 있다.
40) 졸론, 「동산양개의 보경삼매 고」 (ꡔ미래불교의 향방ꡕ. 미천 목정배 박사 화갑기념논총. 1997)
“「보경삼매」는 그 명칭과 비유 속에 한결같이 오위사상을 내포하고 있다. 특히 오비유를 통하여 정과 편이 오위의 행태로 전개되는 원리를 나타낸 것이다. 「보경삼매」는 동산양개의 다른 게송인 「신풍음」․「현중명」․「오위현결」․「강요송」․「공훈오위송」 등과 함께 그의 철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사상을 이론적인 사상에 그친 것이 아니라 그 저변에는 반드시 수행의 실천적인 측면을 강조하였다. 단순한 언어유희나 깨침의 기쁨을 토로하는 데에 그치는 게송이라면 그것은 하나의 문학작품 내지 철학시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동산의 게송이 당시에 철학시, 수도게의 금과옥조로서 제자들에 대한 접화 및 수행의 지침으로 부촉된 바로 자신이 깨친 오묘한 선리를 비유를 통하여 표현하면서 그것을 실천수행으로 나아가게 겨냥했다는 점에서 동산사상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
각주)-----------------
[출처] 이입사행의 구조와 그 전승|작성자 노원앙마
'불교와 인문과학 1' 카테고리의 다른 글
極微 해석을 통해 본 世親 철학의 轉移 (0) | 2020.04.19 |
---|---|
징관의 해인삼매관 대하여 (0) | 2020.04.05 |
반야사상에 있어서 꿈의 비유와 교설 (0) | 2020.04.05 |
이종철 교수의 불교강좌 [전문] (0) | 2020.04.05 |
중론 - 가려뽑은 <중론> (0) | 2020.03.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