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몸도 그렇고. 그래서 그걸 욕망을 놓음으로써 오는, 욕망을 버림으로써 오는 그 행복. 중도수행에선 그걸 기반으로 하는데,
벗어남의 행복을 다른 말로 하면 삼매의 행복이라 할 수 있어요.
욕망으로부터 벗어나고, 성냄으로부터 벗어난 그 마음 상태를 우리가 뭐라 하냐면 삼매라 합니다. 불교에선. 이 삼매의 마음은 고요하고 아주 평안하고 잘 집중돼 있고 행복이 항상 넘쳐요. 그래서 수행을 잘하는 사람은 항상 행복합니다. 마음 속에 행복이 넘쳐나게 돼요. 그래야 진짜 수행을 잘 하는 사람이거든요.
그래서 그렇게 되면 이런 고요하고 평온하고 행복한 마음 상태에서 뭐가 생길 수 있냐면 지혜가 생길 수 있어요. 이런 마음 상태에서 지혜가 발생할 수 있고. 또 이런 삼매에 들어가기 위해선 어떤 지혜가 필요합니까? 탐욕과 성냄이 버려져야 하는데 이 탐욕과 성냄이 버려지기 위해선 이 현상 자체가 조건발생이라 하는 연기적으로 발생했다는, 실체는 없고 작용만 있다는 연기적 지혜가 필요하겠죠.
지혜 없이는 삼매에 들 수 없어요.
지혜를 통해서 탐욕과 성냄을 놓을 수 있는 거잖아요 그쵸? 탐욕과 성냄이 일시적으로 사라진 마음 상태가 되면 우리 마음이 명경지수와 같이 아주 맑고 깨끗한 마음 상태가 됩니다. 그런 마음에서 우리가 편견을 가질 수가 없거든요. 우리가 세상을 볼 때 편견 없이, 정말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우리가 뭐라 해요? 그렇게 됐을 때 지혜가 계발된다는 거죠.
그래서 중도 수행이란 자체가 중도정견이 있으면 이걸 통해서 뭐가 생겨요? 바른 삼매가 생기고 바른 삼매를 통해 또 뭐가 생겨요? 아주 깊이 있는 지혜가 생깁니다.
이 두 가지는 어떻게요?
서로 상승 작용을 하죠.
삼매가 있으면 지혜가 더 깊어지고, 지혜가 있어야 삼매에 들고, 삼매가 있으면 또 더 깊은 지혜가 계발되고, 또 그 지혜가 더 깊게 삼매를 만들어 주고. 이렇게 서로 도와주면서 서로 조화롭게 되어 가는 그게 중도수행의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그래서 중도는 지관쌍수다. 삼매와 지혜가 같이 가야 되지 어떻게 삼매 없는 지혜가 있고 지혜 없는 삼매가 있냐는 거예요. 그래서 경전에서 보면 중도라고 하는 것을 다른 말로 할 때는 사마타와 위빳사나라고 하기도 합니다. 객사경이란 경에 나오는데요,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최상의 지혜로 닦아야 하는 법들인가?
최상의 지혜로 닦아야 하는 법들이 다른 말로 하면 뭐예요?
팔정도죠.
계발해야 하는 법들.
그게 뭐냐 사마타와 위빳사나.
무위에 이르는 길이 뭐냐? 사마타와 위빳사나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상윳따니까야에 보면 무위경이란 경이 있는데 거기 보면, 무위라는게 뭐예요? 아쌍카타. 쌍카타는 형성됐다. 조건에 의해 발생한 법이란 뜻이고, 아쌍카타란 건 형성되지 않은 법. 조건에 의해 만들어진게 아닌 일어날 수 있는 조건이 다 소멸된 상태이므로 이건 형성되지 않은 법. 열반이죠. 열반에 이르는 길이 바로 팔정도인데 이 팔정도를 다른 말로 사마타와 위빳사나로 요약할 수 있어요.
그래서 팔정도를 실천한다는건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실천한다는 건데 이게 따로 노는게 아니라 삼매를 바탕으로 지혜가 계발되고 지혜를 바탕으로 삼매가 계발되는. 항상 같이 간다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인제 자기 지혜를 통해서 중도정견. 중도의 정견을 통해서 연기에 대한 지혜, 사성제에 대한 지혜 이게 중도 정견이잖아요. 이 중도 정견을 통해 탐욕과 성냄을 버린 그 상태가 뭐예요? 정견-지혜를 바탕으로 해서 탐욕과 성냄을 벗어난 그걸 우리가 삼매라 한다 했죠? 그게 바른 삼매입니다. 탐욕과 성냄은 대표고.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다섯 장애요소입니다. 이것이 버려진 그 상태가 바른 삼매예요.
그렇게 해서 중도정견을 통해서 지혜를 통해서 바른 삼매를 계발하는 수행을 구태여 이름 붙이자면 뭐라 해요? 이걸 사마타라 이야기하죠. 수행의 특성이 다르기 때문에. 이름을 붙이자면 사마타라고 붙이는 거죠. 이런 바른 삼매를 바탕으로 지혜를 계발하는, 중도의 관점 연기의 관점에서 현상을 바라보고 관찰하고 사유하고. 또 사성제의 관점에서 현상을 바라보고 사유하고. 이게 중도잖아요. 중도의 관점에서 현상을 이해하는, 그렇게 함으로써 지혜가 계발되죠.
삼매를 바탕으로 지혜를 계발하는 이걸 뭐라 해요?
위빳사나라고 하는 거죠.
근데 왜 자꾸 사마타 위빳사나를 분리해서 사마타는 수행에 방해가 되고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는지는 잘못된 이해라고 전 생각합니다.
삼매 없는 지혜 없고 지혜 없는 삼매 없습니다.
이걸 법구경 372번 게송에 보면,
지혜 없는 자에겐 선정은 없다.
지혜가 없는 자는 선정을 닦을 수가 없어요.
또 선정 없는 자에게 지혜는 없다. 이렇게 이야기하죠.
선정이 없는 사람이 무슨 지혜가 있겠어요. 선정이란 상태는 탐욕과 성냄이 없는 마음 상태인데, 일시적으로 이것들이 다 제압된 상태인데 그런 상태에선 우리가 정말 객관적으로 볼 수 있어요. 편견이 없어집니다. 그러니까 지혜가 생기죠.
선정과 지혜를 함께 갖춘 자는 참으로 열반에 가까워지리라.
이게 법구경에 나오는 이야기거든요. 함 따라해 보세요.
지혜 없는 자에게는 선정은 없고,
선정 없는 자에게 지혜는 없다.
선정과 지혜를 함께 갖춘 자는
참으로 열반에 가까워지리라.
이게 법구경에서 이야기하는건데 이게 중도를 가장 잘 표현하는 중도수행을 가장 잘 표현하는 문구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제가 지난 법회 때도 간단히 말씀드렸지만 중도 수행은 세 가지로 요약돼요. 고행과 감각적 욕망에 탐닉하거나 고행에 빠지는 걸 극복하는 것, 그쵸? 그래서 벗어남의 행복을 바탕으로 해서 수행하는 것. 이걸 다른 말로 하면 탐욕과 성냄에 빠지지 않고 이 탐욕과 성냄을 벗어난 마음 상태, 또 하나는 중도가 선정과 지혜-지관쌍수- 선정과 지혜의 조화다. 이 중도란 말은 균형과 조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쪽으로 치우친 극단적인 견해가 아니라 균형감을 가지고 사마타와 위빳사나. 선정과 지혜의 조화. 이런 것들이 바로 중도 수행의 핵심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중도적 지혜-중도정견을 가지고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실천하다 보면 그 실천을 통해서 뭐가 생긴단 거예요? 중도 정견이 체득됩니다. 그게 깨달음이라 하는 거예요.
사마타 수행을 할 때는 내가 만약 호흡에만 마음을 두고 몰두한다 했을 때 호흡 하나만 잊지 않고 마음을 기울이고 있을 때 딴 생각이 일어나면 이 딴 생각이 일어나는걸 놓는 지혜가 뭐예요? 무상한 것이고. 이 현상 자체가 내가 집착할만한 대상이 아닌, 불완전한 것이고. 이것 자체가 내것이 아니다라는 지혜가 있어야 다른 마음이 일어났을 때 그걸 쉽게 놓고 돌아올 수 있잖아요. 여기에도 어떤 지혜가 들어가요?
중도의 지혜가 들어가죠. 중도의 지혜가 있어야 바른 삼매를 닦을 수 있다는 거죠. 또 장애 요소가 일어났을 때 이건 해로운 법이고 이건 버려야할 법이란 지혜가 있어야 이걸 버릴 수 있죠 그쵸? 이건 해로운 작용을 하는 거니까. 이런 것도 중도의 지혜가 있어야 삼매를 닦을 수 있단 거예요.
삼매를 닦았어요. 그라믄 내가 삼매를 닦은 다음에 중도의 지혜를 활용해서 바른 삼매에 들어가는 걸 이름하면 사마타라 했죠? 삼매를 닦아서 마음이 고요한 상태에서 내가 관찰한 법을 보니까, 아 내 몸도 조건에 의해 발생한 것이고 이것도 역시 무상이고 괴로움이고 무아구나 이렇게 통찰하면 이것이 고성제에 대한 통찰이거든요.
내가 관찰한 이 해로운 법.
이 탐욕이란 것이 알고 보니 괴로움의 원인이 되는구나.
이건 태어남의 원인이구나.
이걸 통찰하면 집성제를 통찰하는 거예요. 이거의 탐욕의 원인은 뭘까 이해하는게 이런게 다 지혜가 계발되는 거잖아요. 이렇게 지혜를 계발하는 수행이 뭐예요? 이게 위빳사나 수행입니다.
중도 정견이란 것에서 사마타 위빳사나를 실천하고. 물론 사마타 위빳사나 밑바탕엔 계가 있습니다. 청정한 계. 여러분이 계를 지키는건 우리 마음이 중도에서 멀어지지 않도록 바운더리 역할을 해 줘요. 그래서 계를 잘 지키고 그 계를 바탕으로 해서 사마타 위빳사나를 실천하면 나중에 여러분이 어떤 현상을 바라봐도 중도적으로 바라보는 눈이 생겨요.
그냥 우리가 탐욕이나 성냄이 작용해서 현상을 보는게 아니라 이건 조건 발생이라는 거. 내것이 아니라는거. 무아임을 알고 이것이 해로운 건지 유익한 건지 알고 이런 지혜가 즉시즉시 작동하는 그런 수준에 이르게 되면 그런걸 우리가 뭐라 하냐면 깨달음이라 한다는 거죠. 그래서 어떻게 보면 중도정견으로부터 시작해서 중도를 실천함으로써 그 중도정견을 터득해가서, 다시 말하면 사마타 위빳사나를 실천하며 중도를 터득하고, 그걸 통해서 중도정견을 체득하는 이게 중도수행이다. 이렇게 한마디로 정의할 수 있고요.
이 중도 지혜를 수행에 어떻게 적용하는지 그 노하우를 터득하는게 여러분이 해야할 일들이예요.
이걸 그냥 알고만 있어선 별 의미가 없어요.
수학 공식만 아는것처럼.
그걸로 문제를 많이 풀어봐야할거 아녜요. 여러분들이 일상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중도정견. 지혜 이걸 활용해서 그 중에서 중도정견에 가장 핵심적인 지혜 중 하나가 연기거든요. 조건발생. 조건발생이기 때문에 이것은 작용은 있지만 실체는 없고 작용 중에서도 유익한 작용이 있고 해로운 작용이 있단걸 정확히 이해하는게 중도의 가장 중요한 지혜입니다.
그래서 그걸 활용해서 자기 수행을 끌고가는 노하우를 배우는 거예요. 그런 노하우를 하나하나 초보적인 단계부터 초심자단계부터 기본 과정, 그 다음 고급과정 차례대로 배우는 프로그램을 저희들이 만들어놨는데 여러분들 한번씩 꼭 이수해 보시기 바랍니다. 대중들하고 수행해 보면 혼자 하는 거하곤 좀 다른게 있거든요.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요, 제가 오늘 말씀드린거 중에 궁금한 거 있음 질문해 보세요.
우리나라 불교에서 공적영지 이런말 들어 보셨어요? 화엄경에 나오는 이야기로 알고 있는데 그런 것들이 공적한데 영지가 있다. 실제 현상 자체가 실체는 없어요 공적해. 그럼에도 영지-그럼에도 신령스런 작용은 있어요. 우리 마음이란게 그래요. 공적하는데 실제로 거기선 여러분이 부처가 될 수도 있고 악인이 될 수도 있는 그게 다 뭐의 작용 땜에 그렇습니까? 그게 여러분 마음이 어떻게 작용되는가에 따라 부처가 되기도 하고 완전 천박한 중생이 되기도 하고 그런겁니다. 실체도 없는 것인데도 아주 신령스런 작용이 있기 때문에 성자가 되는 방향으로 노력을 기울이면 여러분이 성인같은 훌륭한 존재가 될 수도 있지만 맨날 남만 괴롭히고 어떻게든 남을 괴롭혀서 자기 이익을 취하려는 이런 사람은 아주 천박하고 한심한. 동물적인 인간이 되겠죠.
그건 작용을 어떻게 하냐에 따라 다른거죠.
우리 마음을 어떻게 쓰냐에 따라.
중도는 핵심적인 원리도 설해 주지만 그걸 어떻게 구체적으로 실천할 것인가 구체적인 방법론까지 다 설해 놨죠. 사마타를 하고 위빳사나를 하고 계를 지키고 이런거 있죠? 공적이란게 공할 공에 적적할 적. 신령스러울 영자에 알 지. 그게 뭐겠어요.
그니까 중도란 말이 우리나라에서도 성철스님께서도 백일법문을 하셔서 많이 알려져 있는데 그 속에 숨어 있는 연기적 원리, 연기의 가르침 때문에 이건 이러이러하단 원리에 대한 설명이 좀 없어요. 사람들이 양변에 빠지지 않고 이야기하는데 그걸 정확히 이해하기 쉽지 않죠.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이게 유무중도거든요. 이걸 무슨 말이야 할 수 있는데 이게 연기적으로 보면 조건 따라 발생했으니까 없는건 아니죠. 현상은 있잖아요. 근데 영원합니까 영원하지 않습니까? 이건 있다고 할 수 없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비유비무다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거죠.
여러분이 연기, 중간, 중도 이걸 정확히 이해하면 불교가 다 풀어지게 돼 있어요. 이걸 여러분 스스로가 터득해 가는 과정이다 수행이란 것이. 그렇게 이해하심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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