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에 법에 대해서 간단히 제가 말씀드렸는데요, 오늘은 이 세상에 있는 현상들이 불교에서 가장 핵심적인 가르침이 조건 따라 일어난다고 하는 연기에 대한 이야기죠.
그래서 오늘은 12연기에 대해 제가 간단히 설명드리려고 합니다.
원래 우리가 아무래도 살아있는 존재들한텐 가장 관심사, 어떻게 보면 가장 의문 중 하나가 뭐냐면 우리가 왜 여기 태어나 있고 무엇을, 나란 존재가 도대체 뭐고, 여기 왜 태어나 있느냐, 어떻게해서 태어났느냐 그 부분하고, 또 여러분들이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하게 될텐데 죽어서 어디로 갈 것인가? 하는 이런 문제는 생명체가 있는 존재가 가지고 있는 아주 근원적인 질문에 해당하죠.
그래서 이런 문제에 대한 답을 내기 위해 많은 사상가들, 스승들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학자들 철학자들도 그렇고 많은 연구도 하고 이야기도 했지만 그거에 대해 명확하게 드러낸 가르침이 불교에서 말하는 이 연기의 가르침입니다.
이 연기란 가르침이 나오기 전까진 여러분 다 아시겠지만 간단히 말씀드리면 제일 대표적인 한쪽은 뭐냐면 어떤 자아란게 있어서 그 자아가 바뀌면서 이 모양도 되고 저 모양도 되고 이렇게 한다는. 또는 조물주 창조주가 있어서 어떤 존재를 창조한다는 이런게 하나의 대표적인 견해. 이걸 '유견'이라 합니다. 뭔가 있다. 존재가 있다고 하는. 존재가 있는데 그 실체가 있고 창조주나 여러 모습으로 바뀐다 이렇게 보는게 있고 또 하나는 그거에 대해 존재란건 우연히 생긴거고 죽으면 끝이고 죽으면 그냥 흙으로 물로 사대로 돌아간다. 그냥 죽으면 끝이다 다른건 없다. 이렇게 바라보는 하나의 흐름이 있었어요.
그래서 하나는 상견-뭔가 영원한 실체가 있어서 그것이 영원히 존재한다고 보는, 뭔가 존재라는 것에 변하지 않는 실체가 있다 보는 한쪽이 있었고요. 그게 아니라 존재는 우연히 발생한 거다 이렇게 해서 죽으면 끝이다, 더 이상 그런것도 없다 이렇게 보는게 있었는데요. 그거에 대한 중간. 어느 한쪽도 인정하지 않고 그것의 중간에서 법을 설하신게 부처님 연기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상윳따니까야에 보면 까짜야나 고따경(?)이라고 있어요. 우리나라에선 가전연경이라고 많이 알려져 있는데요, 여기 보면.
모든 것이 있다라 하는건 하나의 극단이고, 모든 것이 없다라 하는 건 두번째 극단이다.
있다 없다. 유와 무. 모든 존재의 실체가 있다고 보는게 유견. 상견이라 하기도 하고 있을 유 써서 존재한다 그렇게. 뭔가 존재의 실체가 있다 보는게 있고. 그걸 유견 또는 상견이라 하고요. 또 하나는 존재 자체가 죽으면 끝이지 뭐, 그냥 살아서 몸이 있다가 흩어지면 끝이지 윤회를 하거나 다시 태어나거나 이런건 없다. 죽으면 끝이다. 이렇게 보는게 단견이라고도 하고 단멸, 무견이라고도 하죠. 없을 무 써서.
이 두 가지는 부처님이 보시긴 극단적인 견해라고 본거죠. 난 이런걸 의지하지 않고 중간에 의해서 법을 설한다. 중간-중, 이건 저희 할아버지 스님인 성철 스님이 중도라고 표현했는데요 백일법문에 보면 중도를 가지고 백일 동안 법문하시는게 백일법문인데. 정확하게 용어을 쓰자면 중도란 표현보단 '중' 이란 표현이 맞습니다.
보통 불교에서 중도라고 하는 건 팔정도를 이야기할 때 중도라 하고요, 연기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닌 중간에서 법을 설한다는 연기를 말할 땐 중이라고 씁니다. 그래서 용수가 쓴 그것도 '중론'이죠. 중도론 아니고. 중론에서 핵심이 연기에 대한 이야기거든요. 중에 의해 법을 설한다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말하게 12연기입니다. 나는 중에 의해서 법을 설한다, 그럼 중이 뭐냐 했을 때 무명이 있으면 행이 있고, 행이 있으면 식이 있고 이렇게 해서 12연기를 설한 거죠.
무명 때문에 무명이 있음 행이 있고 행이 있으면 식이 있고 식이 있으면 뭐가 있고 이렇게 죽 가서 생로사가 일어난다 이렇게 봤으니까 무명이란 조건으로 의도적 행위가 있고 행을 좇고 식이 있고, 무명이 소멸되면 행이 소멸되고 그래서 이건 생로사도 없다. 조건이 있으면, 이걸 다시 요약하면,
조건이 있으면 태어나고,
조건이 없으면 태어나지 않는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다.
이게 중간이죠. 무조건 안 태어난다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항상 존재한다도 아니고 조건이 있으면 계속 존재한다는 거죠. 그런데 태어나게 만드는 조건이 사라지면 더 이상 태어나지 않는다. 이렇게 항상 영원하게 존재하는 것이 있는 것도 아니고 무조건 항상 존재한다는 것도 아니고, 이 중간에서 법을 설하는 것이 연기법이다 하고, 이 연기를 '중'이다 이야기하는 거죠.
지난 시간에 제가 법이란 개념을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데, 하나는 어떤 현상을 부처님의 관점에서 이해한 것. 이것을 법이라 이야기해요. 그래서 또 하나는 진리를 설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또 법이라 하기도 하는데 진리의 가르침 중 대표적인게 연기와 연기를 좀 체계적으로 정리한 사(성)제. 이건 같은 표현이죠. 그래서 연기를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꾸 불교에 대해 이렇다저렇다 딴소리를 합니다. 윤회가 없다 하기도 하고.
요즘은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과 스님들도 윤회에 대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거 같아요. 불교 학자들도. 윤회는 방편설이고, 인도 고대 문화에 있었던 윤회설이 불교에 그냥 들어온 거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되게 많은데요. 아까도 제가 말씀드렸지만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고 나서 현상계의 본질을 들여다보니까 이 현상계는 다 조건에 의해서 발생하더라. 이게 연기의 시발점이거든요. 모든 건 조건에서 일어난다.
그렇다면 조건에서 일어난다면, 우리 존재가 태어나는건 무슨 조건에서 일어나는가? 이걸 통찰해서 그걸 정리한게 연기법이고, 연기를 좀 더 체계적으로 터득하는 방법론까지 보태서 체계적으로 정리한게 사성제거든요.
그걸 부정하게 되면 불교 근간 자체가 무너지는 거예요. 불교 자체가 진리가 아니란 이야기밖에 안돼. 부처님 하신 말씀이 거짓말이 되고.
자기가 이해를 못하면 입을 닫아야 해.
내가 잘 모르는 부분에 대해선 이건 내가 모른다 부처님이 이래 말씀하셨는데 난 이거 잘 모르겠다 이렇게 말함 괜찮은데 자기가 이해 못한다고 법을 왜곡하는건 상당히 위험한 겁니다. 자기가 모를 땐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바람직하고 우리가 아직은 깨닫지 못해서 알지 못한다면 내가 아직 지혜가 부족해 보지 못한 것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야 되겠죠 그쵸?
적어도 불교가 거짓이 아니라면 부처님의 가르침의 근간에선 윤회가 없다 말하는건 불교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란 걸 연기의 가르침을 공부해 보고 사성제를 공부해보면 그게 불교의 근간인데 그걸 부정하는건 말이 안된다. 그건 어떻게 보면 불교를 훼손하는 거고 불교가 진리라는걸 부정하는 이야기밖에 안됩니다. 그래서 십이연기에 대해선 제가 조금 있다 다시 설명드리도록 하고,
그렇다면 연기란 건 뭔가? 연기는 다른 말로 하면 연기란 말 자체는 '빠띠짜사무빠다'란 빨리어 번역인데 빠띠짜란 의지하다는 말입니다. 영어로는 dependant죠. 사무빠다란 일어나다란 뜻인데. 의지해 일어난다, 만약 자아가 있고 창조주가 있다면 이건 조건에 의존하는게 아니라 당신의 자기 나름대로 원하는대로 할 수 있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거죠. 변하지 않는 실체가 있단건 무슨 말이냐면 무엇에 의지하면 안된단 거예요 그쵸? 주변에 의지하는 뭔가가 있다는 건 영원하지 않는 거잖아요. 영원한 자아가 있단 말은 주변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의지하지 않는다/다시 말하면 독립적이다. 그런 의미인데,
부처님 보시긴 이 세상에 그런건 없다는 거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정신 현상이든 물질 현상이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 하물며 우주조차도 영원하지 않더라 그런 이야기죠.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의존해서 발생한다.
이것을 중국에선 의존 대신 조건이란 말을 썼어요. 조건은 여러가지 일어나는데 있어서 여러 가지 조건이 있단 말이잖아요. 그래서 그런 조건에 의해서 일어난다. 조건 '연' 일어날 '기' 그래서 연기라 번역한 겁니다.
이걸 우리 나라 말론, 의존발생/조건발생이랄 수 있는데 아무래도 우리나라에선 연기란 말이 워낙 보편화돼 있어서 조건 발생이라 번역하면 이해하실 수 있죠.
그럼 조건이란 게 무슨 의미냐, 뭘 의지한다 할 때 무슨 의미냐, 상윳따니까야 보면 조건경이란 경이 있는데 조건은 다른 것으로부터 일어나는게 아니라 그것을 의지해야만 결과가 일어날 수 있고 이건 진실하고 거짓이 아니고 근원적인 원인을 말한다고 조건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떤 결과가 일어나는데 있어서 이것이 없으면 이것이 일어날 수 없는 그런 원인 이런걸 이야기하는 거죠. 그리고 이건 거짓이 아냐, 진실이고 참된 것이고 근원적인 것이다 이거야. 예를 들어 여러분들이 뭔가 어떤 우리 마음이 없고 대상과의 접촉이 없으면 우리 의식이 일어날 수 없겠죠. 이런게 원인이 되는거죠. 접촉이 있어야만이 의식이 일어날 수 있다 이럴 때 접촉이 조건이 되겠죠.
그래서 불교에서 말하는 건 이 세상의 모든 건 이유없이 일어나는건 없다는 거죠. 뭔가 원인이 있다. 그래서 우리가 불자로서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은 항상 어떤 일이 일어나면 이건 원인이 있다. 이유없이 일어나지 않는다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게 일종의 부처님이 말씀하신 진리의 관점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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