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따와나 일묵스님

일요법회 - 지혜의 힘, 생각의 힘 (일묵스님 법문)

수선님 2020. 9. 6. 11:35

<일요법회_지혜의 힘, 생각의 힘(일묵스님법문)>

 

지난 시간에는 선정에 대해 말씀을 드렸는데요, 오늘은 생각의 힘, 또는 지혜가 어떤 힘을 가지는지에 대해 설명을 드리려고 합니다. 이거는 위빠사나 수행과 관련이 있는데요, 불교수행을 하는 가장 큰 목적은 지혜를 계발해서 어리석음을 극복하는 데 있습니다. 탐진치에서 비롯되는 번뇌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번뇌라는 것은 어리석음에서 비롯되는데, 이 어리석음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해요. 이 지혜의 힘에 의해서 번뇌에서 벗어나는 게 불교의 중요한 목적입니다.

 

 

그런데 지혜를 계발하기 위해서는 전제되어야 할 게 있는데요, 가장 대표적인 것이 선정인데, 선정을 통해서 강력한 지혜가 계발될 수 있어요. 그래서 지난 시간에 선정에 대해서 말씀 드렸고 오늘은 전반적으로 정리를 하고요, 선정을 통해서 지혜를 계발하든 일상생활에서 알아차림을 통해서 지혜가 성숙되어서 번뇌를 버리든 간에, 일단 중요한 거는 지혜가 어떻게 성숙되고, 선정 후에 지혜가 성장하는 과정에 대해 이해하는 것이 좋고요, 그리고 번뇌가 사라지면 여러분의 삶이 어떻게 변하는지 이해를 하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혜가 성장을 하면 우리 마음의 고통의 원인을 버리게 되는데, 버려지는 과정이나 메커니즘을 간단히 설명드리겠습니다.

 

위빠사나 수행

불교수행에는 위빠사나와 사마타가 있는데, 지난 시간에 이야기한 선정을 닦는 수행은 사마타 수행에 해당합니다. 지혜를 계발하는 것은 위빠사나 수행에 해당하는데, 사마타 수행은 고요함을 계발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고, 위빠사나는 지혜를 계발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한마디로 이야기한다면 삶 속에서 바로 보고 바로 생각하는 거라고 말할 수 있어요. 일반적으로 위빠사나 수행을 테크닉적인 측면에서 접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테크닉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걸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게 뭔가를 잘 생각해봐야합니다. 위빠사나의 목적이 뭐냐? 그거는 바르게 생각하는 것, 바른 지혜를 계발하는 거라고 할 수 있어요.

 

 

아라한이 되면 어떻게 되냐면 항상 지혜가 작용하고 생각을 바르게 하게 됩니다. 깨달음이라는 것을 우리 삶과는 먼 것으로 여길 수 있는데, 아라한이 된다는 것은 삿된 견해가 아니라 바른 견해가 작용하고, 항상 바른 생각을 할 수 있는, 다시 말하면 팔정도에서 말하는 정견과 정사유가 확립된 존재라고 말할 수 있어요. 정견과 정사유는 다른 말로 하면 항상 지혜가 작용하고 바르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보면 생각에 어리석음이나 집착이나 성냄이 작용하는데, 아라한은 그게 아니라 항상 지혜가 작용하고 지혜가 완전히 정착된 존재입니다.

 

 

위빠사나 오래 한 사람들은 다양한 현상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생멸하는 걸 보기도 하고, 빛이 나타나는 걸 보기도 하고, 지혜가 예리해지는 걸 보기도 하고 그런데, 결국은 종착지점은 번뇌가 버려지고, 번뇌가 버려진 상태에서 생각하는 것, 그리고 지혜가 항상 작용하는 것, 이게 깨달음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삶에 부딪혔을 때 어리석음이 아니라 지혜가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 위빠사나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어요.

 

 

한국에서도 다양한 수행방법으로 수행을 하는데, 사람들이 경계를 맛보고 나서, 나는 이러이러한 경계를 체험했다 등등 이런 거에 초점을 맞출 수도 있는데 원래 수행은 얼마나 번뇌를 버리느냐, 부처님은 항상 탐진치의 소멸에 대해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은, 팔정도의 관점에서 말하면 정견과 정사유가 일상생활에서 완전히 확립되는 거라고 말할 수 있어요. 언제나 바른 견해와 바른 사유가 작용하는 것을 위빠사나 수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평소에 탐욕이 일어난다, 그러면 위빠사나가 안 되고 있는 상태입니다. 알아차림을 놓친 겁니다. 항상 지혜와 바른 생각이 작용할 때 올바른 수행을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혜에도 깊이의 차이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시계를 보고 시계라고 아는 것도 안다고 이야기할 수 있어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시계가 뭐로 만들어졌고 어떤 속성이 있고 하는 걸 알아요. 이런 것도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시계가 어떤 재질로 만들어졌고, 어떤 성질이 있고, 누가 만들었고 이런 걸 아주 속속들이 아는 것도 안다고 이야기하죠.

 

 

지혜라고 말하는 것도 천차만별입니다. 여러분이 안다고 하는 것과 부처님이 안다고 하는 것에는 차이가 엄청나게 납니다. 그래서 지혜라는 것도 한 순간에 갑자기 성숙되고 깊어지는 게 아니라 깊어지는 과정이 있어요. 그거는 번뇌가 얼마나 비워지느냐 이거하고도 관계가 있습니다. 번뇌가 비워지면 비워질수록 지혜가 더 예리해지고 강력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번뇌가 남아 있는 상태에서 단순히 생각을 통해 깊어질 수 있느냐하면 그건 아니라는 거죠.

 

 

생각의 힘

생각이라는 것에 대해 잠시 주목해보면 생각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필수 불가결한 요소입니다. 생각을 안 하고 살 수는 없잖아요. 부처님께서는 이 생각이 어떻게 하면 바른 생각이 되느냐에 주목하신 겁니다. 무작정 생각을 많이 한다고 성장하는 게 아니라 바른 생각을 해야 성장하는데, 이 생각의 하나의 속성이 반복되면 힘이 점점 강력해집니다. 그래서 그 생각이 나중에는 습성이 됩니다. 습관화되고, 고정관념이 되고 틀에 박히면서....어떤 면에서는 그게 편리한 측면도 있습니다. 모든 일을 다 판단해서 하려면 어렵잖아요. 익숙한 것은 그냥 습관적으로 하는 것이 편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습관이 제대로 형성되면 좋은데 잘못된 방향으로 형성되면 삶을 꼬이게 만듭니다.

 

 

생각이 어떻게 형성되느냐에 따라서 자만이 많아질 수 있습니다. 내가 최고고 남들은 못났다...이런 것이 자만이나 아만, 아상의 형태로 발전할 수 있어요. 그리고 어떤 경우는 자기가 생각한 것이 확인된 것도 아니예요, 어떤 분야에 대해 조금 알고 있는 것으로 재단을 하는 거죠. 남은 틀리고 내 생각이 맞다고...다른 사람의 생각은 배척하고 자기 생각만 옳다고 하는 거죠. 이런 거를 사견이라고 합니다. 견해라는 것이 되게 무서워요. 다른 사람의 생각은 부정하고 자기 생각만 옳다고 하니까 이건 대화 자체가 안 될 수 있어요. 이런 거는 잘못된 방향으로 형성된 겁니다. 사실인지 아닌지도 모르고 자기가 생각한 것에 대해 무조건 집착하는 것.

 

 

이거는 잘못된 방향으로 생각이 형성되면서, 아까 말했듯이 생각은 반복되면 힘이 생깁니다. 이게 탐욕이나 성냄 오해에 의해서 어떤 사람을 잘못 생각할 수도 있잖아요. 사실은 그 사람이 잘못된 것도 아닌데 내가 오해를 해서 그 사람을 미워하고...오랜 세월을 미워했는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니라 반대였다 그럴 수도 있는 거죠. 이렇게 탐욕과 성냄에 바탕을 둔 생각이 있을 수 있고 지혜에 바탕을 둔 생각이 있을 수 있는데 이거는 우리 삶을 지혜롭게 만들어 줍니다.

 

 

지혜를 바탕으로 생각을 하면 삶에 유익한 일들이 많아집니다. 생각을 통해 지혜가 계발되고 지혜는 번뇌를 가라앉게 만들어서 또 바른 생각을 하게 하고 그래서 또 지혜가 생기게 하고...이렇게 선순환이 될 수 있는 반면에 잘못하면 악순환이 될 수 있어요.

 

 

요즘 스트레스나 우울증 등이 다 생각의 반복을 통해 일어나는 거죠. 불만이 쌓이고 쌓인게 스트레스나 공포증, 우울증 등이 되고 심하면 자살까지 가는데요, 이거는 생각의 힘을 모르고 함부로 해서 그렇습니다. 선사어록에 보면 ‘한 생각이 무섭다’ 이런 말을 하거든요. 한 생각이 중생을 만들기도 하고, 한 생각이 부처를 만들기도 한다...생각 하나의 힘이라는 것이 엄청나게 무섭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생각을 바르게 하는 수행이다 또는 지혜를 계발하는 수행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바른 생각을 하기 위해서는 번뇌가 없는 상태에서 생각하는 게 중요합니다. 자비와 지혜에 바탕을 둔 생각이 유익한 생각이 되고, 탐욕과 성냄에 바탕을 둔 생각은 해로운 생각이 됩니다.

 

 

직관지와 추론지

선정을 닦는 중요한 이유가 뭐냐 하면, 선정에 들어가 있는 동안에는 번뇌라는 것이 철저히 차단됩니다. 번뇌가 차단된 상태에서 생각을 하면 굉장히 파워풀합니다. 그래서 생각을 통해서 지혜를 계발하게 해주는데....불교에서 지혜를 계발하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요, 첫째는 직관지라는 게 있어요. 여러분들 위빠사나 수행을 하다보면 어떤 현상을, 이걸 좀 선(禪)적으로 이야기하면 생각 이전의 상태를 보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이게 법요집이죠, 이 법요집을 법요집이라고 이름붙이기 전에 그 사물에 대해서 직관적으로 인지하는 게 있습니다. 그걸 포착하고 난 후에 법요집이라고 개념화하게 되요. 개념화가 될 때 나름대로의 습관이 작용하게 되는데, 이것이 그렇게 되기 전에 그 현상을 직관적으로 아는 것을 직관지라고 합니다. 이거는 생각을 통해 아는 것과 달라요.

 

 

골프를 되게 잘 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 스윙하는 것만 봐도 그 사람의 능력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잖아요. 그런 것처럼 현상 자체를 포착하는 것이 있고, 이 현상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직관적으로 알아진 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있는데, 이거는 추론지라고 이야기하죠.

 

 

선정 상태에서는 고요하기 때문에 생각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선정 상태에서 나오고 나면 선정 상태에서 직관적으로 알았던 것을 반조를 합니다. 그 반조라는 게 추론지입니다. 이 반조를 통해서 현상이 무상하고 실체가 없구나 하는 깊은 통찰이 일어나는데 이런 걸 통해서 깨달음의 영역까지 갈 수 있어요.

 

 

지혜를 계발하는 방법

이게 경전에 나오는 선정을 닦는 가장 중요한...선정 후에 반조를 통해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 선정의 아주 큰 장점이죠. 그래서 선정 후에 아주 깨끗한 마음 상태로 지혜를 계발할 수도 있고, 평소에 순간순간의 집중이죠, 찰나삼매라고 이야기 하는데 그 순간순간의 집중을 통해서...아까 이야기 했듯이 생각이 움직이지 않아도 현상에 대해 직관적으로 포착을 할 수 있습니다, 감각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을 실상을 본다고 하고, 그렇게 되는 상태를 찰나삼매라고 이야기해요. 이런 찰나삼매를 통해 직관적으로 알아진 것을 나중에 반조를 할 수 있어요. 이런 거를 통해서도 아주 깊은 지혜가 계발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혜를 계발하는 방법은 순간순간의 삼매에 의해 직관적으로 알아진 것에 대해서 반조를 통해 계발되기도 하고, 깊은 선정 후의 반조를 통해 계발되기도 하는데, 결국은 현상에 대한 깊이 있는 지혜를 계발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세상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거기에 대한 집착을 버릴 수가 없거든요.

 

 

이렇게 지혜가 계발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평소에는 자기가 어리석은 줄 모르고 어리석은 행동을 하겠죠. 자각을 하면 그런 어리석은 행동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혜가 있으면, 여러분들이 습관적으로 행동하는 게 있어요, 이걸 불교에서는 잠재성향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 것들을 지혜를 통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그거를 파악할 수가 있죠.

 

 

예를 들면, ‘나’라고 하는 개념...‘내’가 잘나야 되고, ‘내’가 잘 살아야 되고, ‘내’가 더 행복해야되고 이렇게 이야기 하는데, 이런 것들의 밑뿌리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나’라고 하는 것이 있다고 하는 어리석음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지혜가 깊어지면 이런 것들의 본질이나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 현상에 대해 집착하지 않는 방향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러면 이게 우리 삶에 큰 변화를 이끌어 내는 계기가 되는 거죠.

 

 

그래서 지혜는 어리석음을 타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그거를 통해서 탐욕과 성냄을 버릴 수 있게 되는 거죠. 탐진치 중에 어리석음이라고 하는 것은 탐욕과 성냄보다 한꺼풀 더 밑에 있습니다. 탐욕과 성냄은 표면에 드러나지만 어리석음은 그보다 깊은 곳에 잠재되어 있습니다. 일단은 탐욕과 성냄이 가라앉아야 어리석음이 드러나게 되거든요. 탐욕과 성냄이 있는 상태에서는 어리석음이 드러날 수가 없어요. 그래서 탐욕과 성냄이 가라 앉는 것을 고요함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번뇌가 가라앉았을 때 우리 마음에 고요함이 형성됩니다. 그러면 그 고요한 상태에서는 지혜가 작용할 수 있겠죠. 지혜가 작용하면 어떤 어리석음이 작용하는지를 알게 되어서 숨어 있는 어리석음을 드러나게 합니다. 그러면 그거를 극복할 수 있는 계기가 되죠.

 

 

지혜가 성숙되어 가는 과정

지혜가 성숙되어 가는 과정을 설명을 드리면요, 일단 삶에서 드러나는 현상에 대한 이해가 이루어집니다. 알아차림 수행을 하지 않으면 자기한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모르거든요. 아침에 눈을 뜨면 대개 몸이 피곤한데, 보통 그럴 때 짜증을 냅니다. 이거는 성냄이 작용하는 거죠. 그리고 오늘 하루 쉬었으면 좋겠다하는 마음이 드는데, 쉬었으면 좋겠다는 것도 일종의 욕심이 작용하는 거고, 밥 먹을 때 맛있다, 맛없다 이런 거는 탐욕과 성냄이 작용하는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루를 살펴보면 굉장히 많은 번뇌들이 오갑니다. 그런 번뇌들 중에 자각되지 않은 게 너무나 많아요. 자각이 되면 충분히 벗어날 수 있는데, 자각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극복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번뇌를 벗어나는 첫 번째 단계가 자기에게 일어나는 번뇌를 자각하는 겁니다. 두 번째는 그런 번뇌가 왜 일어나는지를 파악하는 겁니다. 그걸 조건을 파악하는 거라고 합니다. 그걸 알게 되면 어떤 것이 원인에 의해 일어났다가 원인이 사라지면 사라진다는 걸 알게 되는데 이거를 아는 거를 무상함을 안다고 합니다. 무상하다는 것은 그 현상이 안정적이지 않고 불안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재산이 영원히 유지된다고 하면 불안하지 않죠. 건강이나 소유물 등도 그게 영원하다고 한다면 불안할 이유가 없거든요. 그런데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아니까 불안해서 보험도 들고 건강검진도 하고 그러잖아요. 변한다는 것은 항상 불안정한 겁니다. 그래서 본질적으로 행복이라고 할 수 없기에 고(苦)라고 했고 실체가 없다고 합니다.

 

 

이런 통찰이 일어나면, 내가 쥐고 있는 이것이 붙잡으려고 해서 붙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 더 이상 붙들지 않습니다. 무상함을 이해하는 것은 탐욕을 이해하는 데 굉장히 큰 도움이 됩니다. 여러분들이 소유하고 있는 것은 잠시 빌려 쓴다고 생각해야지, 마치 콘도 사용하는 것처럼, 그것을 내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굉장히 큰 고통이 따릅니다. 소유하려고 해도 없는 것을 소유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괴로움이 동반되게 되어 있습니다. 무상하다는 것은 붙들려고 하는 순간 벌써 사라집니다. 눈으로 볼 때는 그대로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계속 변하고 있는 것이데, 소유자가 아니라 사용자의 개념으로...인연이 될 때까지는 사용하다가 인연이 다해서 가면 그냥 놓아주는 것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그런 지혜가 생기면 집착하는 거에서 마음이 멀어집니다. 한걸음 물러서게 되요. 한걸음 물러선 이 마음을 ‘염오의 지혜’라고 합니다. 그러다가 완전히 집착을 놓게 되는데 이때를 깨달음이라고 합니다. 욕망을 놓아버린다 이말이죠. 이렇게 되는 거를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이라고 해서 네 가지 형태의 깨달음을 이야기 했습니다. 깨달음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상당히 깊은 통찰이 필요합니다. 그냥 머리로 아는 걸로는 절대로 안돼요. 제가 설명하는 걸 듣고 머리로는 아 그렇겠구나하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거는 실제 생각이 벌어지기 전의 상태, 소위 말해서 법이라고 하는 것을 직관적으로 아는 지혜가 필요해요. 이거는 머리로 개념적으로 아는 거와는 다릅니다.

 

 

개념적으로 안다는 것은, 이것(시계)을 시계라고 이야기하면, 시계는 많은 종류가 있잖아요, 그런데 이거(시계)를 시계라고 이름 붙이는 순간 이것이 가진 많은 부분이 없어집니다. 하나의 모습만 있게 돼요. 그런데 직관적으로 안다는 것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아는 거기 때문에 훨씬 실질적인 앎이 된다는 거죠. 처음 수행을 할 때는 이름을 붙여서 수행을 하라고 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런 거는 언젠가는 극복해야 됩니다. 개념이라는 거는 껍데기만 보는 거기 때문에 실질적인 이해를 하기가 어려워요.

 

 

그래서 실제의 실상, 이거를 초기불교에서는 담마, 즉 법이라고 하는데요, 법은 실제로 일어나는 겁니다. 실제가 뭐냐면...예를 들어 여러분이 누구한테 맞아서 화가 났어요. 화라는 작용은 실질적으로 대상에 대해 거부감으로 작용하는 순간이 있죠. 이거는 실제로 일어나는 겁니다. 이거를 화라고 이름 붙이든, anger라고 이름 붙이든 그거는 이름에 불과한 거고 실제로 ‘대상에 거부감으로 작용하는 마음의 작용’ 이거는 실재란 말이예요. 실질적으로 일어나는 것을 아는 것은 현재를 알아야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거를 정확히 알아야만이 깨달음의 지혜로 갈 수 있습니다. 이런 실재는 상황이 바뀌면 사라집니다. 생각은 계속 머물 수 있잖아요. 화가 일어난 걸 기억으로 떠올릴 수 있어요. 그렇지만 실제로 있었던 그 일 자체는 순간적으로 지나가 버립니다. 그래서 실상을 보게 되면 무상이라는 통찰이 일어날 수 밖에 없어요.

 

 

이런 거를 보는 것은 사실 쉽지가 않습니다. 번뇌가 어느 정도 걷혔을 때, 마음이 또렷하고 명료해졌을 때 가능한 거예요. 이렇게 되기까지 수행을 계속해서 마음을 정화해야 법을 볼 수 있는데, 최적의 조건이 아까 이야기한 삼매상태입니다. 선정에 들어갔다 나온 마음은 법을 보기에 가장 적합한 상태가 되요. 그래서 부처님이 팔정도에서 정정이라고 하는 선정을 많이 이야기 하신거죠. 선정의 중요성을 강조하신 겁니다. 물론 선정을 닦지 않는다고 불가능한 것은 아닌데 쉽지 않다 이말이예요. 왜냐하면 법을 보기 위해서는 개념의 껍데기를 많이 벗겨야 되는데, 여러분들은 개념적으로 형성된 틀이 많거든요. 그거를 한꺼풀씩 벗겨내는 힘이 알아차림의 힘에 비례해요. 이거는 얼마나 정신이 또렷또렷하냐, 각성도에 비례합니다. 정신이 아주 또렷하게 차려지면 깊이 들여다볼 수 있고 정신이 흐리멍텅하면 현상에 휩쓸려 버리지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가 없습니다.

 

 

정신을 또렷하게 하고 각성도를 높여주는 게 사띠, 즉 알아차림의 작용이고 그런 상태에서 현상을 전광석화처럼 이해하는 것이 지혜의 작용입니다. 지혜나 알아차림의 힘에 비례해서 번뇌가 가라앉게 되고 이게 깊으면 깊을수록 현상을 깊이 봐서 무상하다고 알게 되면 집착할 만한 것이 없어집니다. 그러면 놓아지겠죠.

 

 

수다원이 되면 달라지는 것들

그렇게 되는 첫 번째 단계가 수다원이라는 존재가 되요. 수다원이 되면 달라지는 것이 삶의 방향이 명확해집니다. 정견이 바로 잡힌다고 이야기하는 거죠. 여러분은 이런 데 와서 공부하다보면 불교공부하고 바르게 살아야 되겠다 이렇게 생각하지만 또 집에 가서 감각적 욕망을 누리다보면 삶의 방향이 또 중생들의 방향으로 돌아가게 되요. 그럼 또 선원에 와서 바로 잡고, 이게 왔다갔다 해요. 수행을 하다가 다시 타락해서 다시 중생의 삶을 살 가능성은 항상 가지고 있습니다. 불퇴전이 아니라 퇴전될 수 있는 가능성을 항상 가지고 있는 거죠. 그런데 수다원이 되는 순간 퇴전이란 없습니다. 어떤 것이 바른 삶인지에 대한 가치관이 완벽하게 자리 잡습니다. 이때부터는 퇴전이 없고 아라한이 되는 거는 시간문제입니다. 아라한이 되는 데는 최대 일곱생이 걸린다고 합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이라는 것은 이런 수준입니다. 가치관이 완벽하게 자리 잡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은 변덕이 죽 끓듯 하잖아요. 아직까지는 왔다갔다 할 수 있어요. 지혜가 약한 경우는 조금만 유혹이 오면 그쪽으로 빠져들기 쉽습니다. 그리고 빠져드는 것 자체를 자각하기 힘들어요. 비유하자면 잠자는 사람 깨워 놓으면 눈 잠깐 떴다가 다시 잠들고...이런 거랑 비슷해요. 지혜의 힘이 강해질수록 어리석음을 제압하는 힘이 강해집니다. 어리석음은 여러분을 노예처럼 끌고 다닙니다. 화내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화내고 있고...이건 일종의 생각의 노예가 되는 거죠. 그런데 바른 생각을 한다는 것은 생각에 휩쓸리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의지적으로, 즉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거죠. 그래서 부처님은 아라한이 되면 자기가 하고 싶은 생각은 할 수 있고 하기 싫은 생각은 안할 수 있다고 했거든요.

 

 

수다원이 결코 쉬운 건 아닙니다. 요즘은 조금만하면 깨달았다고 하는데 깨달음도 천차만별입니다. 시계밥을 이렇게 주는구나 하는 것도 깨달았다고 표현할 수 있어요. 그런데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이란 네 가지 밖에 없어요.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 수다원이 어떤 상태인지를 이해만 하시면 수행을 한 후의 변화상이 보입니다.

 

 

수행자가 수행을 하면 어떤 삶을 살게 되느냐 이거예요. 가치관이 명확하면 첫째 망설임이 없어집니다. 지혜가 약하니까 이래야 될까 저래야 될까 계속 고민해요. 그런데 가치관이 명확한 사람은 해야 될 것과 안해야 될 것 등 명확하게 판단합니다. 그런데 보통 이게 옳은 줄 알지만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다 이렇게 물러서기 시작하면 끊임없이 물러서야 되고 그러다보면 거기서 벗어날 수 없는 거죠. 그런데 수다원이 되면 그것이 명확해지기 때문에 삶의 방향이 명확해지죠. 흔들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의심이 사라집니다. 법에 대한 의심이나, 이렇게 살면 나에게 이익이 있다는 것에 대해 추호의 의심이 없어집니다. 의심이 사라지니까 신심이 확고해집니다. 신심은 삼보에 대한 신심입니다. 불법승 삼보에 대한 신심이 확고해지고 칼이 들어와도 물러나지 않을 정도로 확고해진다고 합니다. 그거는 거꾸로 이야기하면 신심이 강력한 것도 굉장히 좋은 무기가 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수다원이 되는 방법 중에 신심이 확고해서 수다원이 되는 방법도 있거든요. 물론 여기서 말하는 신심은 맹목적인 신심이 아니라 이해를 통한 신심이죠. 이해를 해도 신심이 없으면 이렇게 사는 게 나한테 이익이 있나, 시간 낭비 아닌가 하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의심이 있으면 실천으로 잘 나타나지 않아요. 수행에서 꾸준함이 부족한 것은 신심이 부족한 경우가 많습니다. 신심이 있으면 어려운 난관을 뚫고 나가는 힘이 있습니다.

 

 

제가 미얀마에서 공부할 때, 미얀마는 우리나라 환경하고 엄청나게 차이가 납니다. 숲에 가면 모기가 수천마리가 달려들어요. 한번 숲에 나가면 모기한테 수십 번을 쏘이기도 하거든요. 지네도 있고 가끔 전갈도 보곤해요. 그리고 개미, 개미도 무서운 거더라고요. 한번은 자는데 제 침대에 개미가 습격을 해서 잠자리 뒤에 개미가 몇 백 마리 같이 있은 경우가 있었는데...그런 힘든 게 있는데, 저는 그게 힘들다기보다 너무나 행복하고 그랬었거든요. 그런 거는 불편함이지만 수행을 하면서 오는 즐거움, 이런 것은 불편함을 극복하기에 충분하단 말이예요. 그래서 신심이 있으면 자기에게 오는 어려움 같을 걸 얼마든지 극복하는 힘이 됩니다.

 

 

수다원이 되면 이런 신심이 확고해집니다. 절대 물러나지 않습니다. 외모나 이런 게 달라지는 게 아니라 마음상태가 달라집니다. 그래서 두 가지 기준, 삼보에 대한 신심이 확고한가, 오계를 의도적으로 어기지 않는가...수다원이 된 존재가 모기가 붙는다고 해서 죽이지 않습니다. 살생의 의도를 가지고 죽이지 않습니다. 모르고 지나가다가 밟을 수는 있어요. 의도적으로 마음을 내서 죽이지 않고, 술을 마시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거짓말을 절대 하지 않습니다..등등 다섯 가지 계율을 완벽하게 지킵니다. 그렇게 하면 수다원이라고 보면 된다고 부처님께서 벽돌집 경이라는 경에서 법의 거울에 대한 가르침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 외에도 수다원이 되면 달라지는 것이...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고통을 대지에 비유하면 수다원이 가지고 있는 고통은 손톱 위의 흙 정도라고 했어요. 수다원이라는 존재는 고통이라는 것이 거의 없다 이말이예요. 그리고 견해가 정확해집니다. 견해가 바르게 되면 삶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삶의 가치관 자체가 지혜와 자비를 바탕으로 한 가치관으로 확립됩니다. 다시는 탐욕이나 성냄에 의해 살지 않습니다. 수다원은 탐욕에 아주 미세하게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라한이 되면 욕심을 위해 부당한 일을 절대 하지 않습니다. 자기 욕망을 위해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는 것은 있을 수 없고, 성냄으로 인해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는 것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탐욕과 성냄을 행복으로 생각하기에 집착한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탐욕과 성냄에 휩쓸리며 살아가는 이유는 그것의 본질을 정확히 이해를 못해서 그렇습니다. 여러분 마음이 아직은 그렇게 사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합니다. 예를 들어 술을 마시는 게 행복하다고 생각하니까 술을 계속 마시는 거 아니겠어요? 술을 독약이라고 생각하면 마시겠어요? 절대 안마시죠. 그리고 탐욕은 정말 위험하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하겠어요?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니까 그걸 끊지 못하는 건데 지혜가 있으면 그걸 끊어주기 쉽다 그거예요. 지혜는 명확하게 보거든요. 이건 정말 위험한거다 하는 게 명확해지면 그걸 끊어낼 수 있다는거죠.

 

 

실제로 과학자들이 연구를 해 보면, 우울증이나 화 이런 게 암보다 위험하다고 합니다. 생각도 힘이 있습니다. 생각은 언덕위에서 눈을 굴리는 거와 같아요. 구르면 구를수록 자꾸 커지고 힘이 생깁니다. 그래서 이 힘이 강력해지면 나중에는 통제가 안돼요. 반대로 알아차리는 힘이 강해지면 나중에는 힘들이지 않고도 알아차리게 됩니다. 생각이 지혜로 작용하면 그게 강해지면서 나중에는 저절로 지혜가 작용해요. 자비도 관성이 있어서 자비를 자꾸 일으키다 보면 저절로 자비가 일어납니다. 어떻게 습관화하고 훈련시키느냐에 따라서 여러분 마음이 달라질 수 있다 이거죠. 그래서 생각을 바르게 하는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생각을 바르게 할 수 있는지...그건 지혜가 필요한 거죠. 지혜가 있어서 바르게 생각하면 여러분의 삶이 부드러워집니다.

 

 

그런데 어리석음이나 탐욕과 성냄에 바탕을 둔 생각이 일어나면 삶이 점점 어려워지고 정신적인 병도 생길 수 있습니다. 바람직하지 않은 생각이 반복되면서 다양한 형태의 괴물을 만들어냅니다. 생각은 생각일 뿐 실재하지 않는데, 반복되고 고착화되면 없는 게 아니라 실재같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생각이 괴물이 되지 전에 빨리 알아차려서 성장하지 않게 멈춰야 합니다. 그걸 내버려두면 위험해요. 어리석음은 지혜가 없는 사람에게는 들키지 않고 작용합니다. 매일 소량의 독을 먹고 나중에 심각해지는 것처럼, 어리석음은 조금씩 작용해서 나중에 심각해집니다. 그래서 평소에 자신에 대해 알아차리는 노력을 꾸준히 해야 합니다. 그거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건강한 삶을 위해서는 반드시 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관심을 가져라

그래서 밖으로만 관심을 가지지 말고, 자기 마음에 관심을 가지세요. 마음이 어떤 식으로 세상에 반응하고 살아가는지. 처음에는 자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뭘하고 있는지 자각을 해야 변화의 시작입니다. 화를 내고 모르고, 해태와 혼침에 빠져 무기력해졌는데 무기력함의 위험함을 모르고 빠져 지내면 무기력함이 습관이 됩니다. 번뇌가 움직일 때 번뇌인 줄 알고...탐진치로 움직이지 말고, 지혜와 자비가 작용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거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자각입니다. 병에도 자각 증세가 있는 건 빨리 알 수 있는데, 자각 증세가 없는 것은 심각해진 후에야 알 수 있습니다.

 

지혜의 힘을 믿으세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지혜는 세속적인 의미와는 조금 다릅니다. 세속적인 거는 외부 현상에 대해서 아는 것을 말하지만, 불교의 지혜는 마음이 세상과 관계 맺는 부분을 말합니다. 여기서 잘못되면 나머지는 다 어그러집니다. 그래서 지혜는 마음이 세상과 관계하는 것을 배우는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관계할 것인가. 관계하는 법을 알고 모르고는 천지차이입니다. 생각만으로는 여러분이 변하지 않지만, 지혜는 반응방식을 바꾸는 거기 때문에 이게 바뀌면 사람이 바뀝니다. 평생을 수행해도 사람이 바뀌지 않으면 지혜가 없는 겁니다. 지혜가 있으면 마음이 변하고 인생이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출처] 지혜의 힘, 생각의 힘|작성자 임기영불교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