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본불교 가르침의 핵심 1
1. 만유란: 오온(五蘊), 십이처(十二處)와 십팔계(十八界)
불교에서 오온, 십이처, 십팔계란 만유(萬有)즉 존재하는 모든 것을 의미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이중 오온은 존재의 다섯 가지 측면을 나타내고 있고, 십이처와 십팔계는 무명촉으로 점철된 주관적인 인식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존재의 현주소를 나타내고 있다.
오온은 오음(五陰), 오수음(五受陰), 오취온(五取蘊), 오중(五衆), 오취(五聚)라고도 하는데, 존재하는 것들(구체적으로 인간)의 다섯 가지 측면을 가리키는 말이다. 색온(色蘊)은 몸과 물질을, 수온(受蘊)은 감수작용을, 상온(想蘊)은 개념화작용을, 행온(行蘊) 몸과 입과 마음의 행위를, 식온(識蘊)은 의식 그 자체 또는 인식작용을 의미한다.
십이처란 눈[眼處]․귀[耳處]․코[鼻處]․혀[舌處]․몸[身處]․마음[意處]이라는 주관성이 확립된 여섯 감각기관과, 모양과 빛깔[色境]․소리[聲境]․냄새[香境]․맛[味境]․닿거나 만져서 느낄 수 있는 것[觸境]․사유대상[法境]이라는 주관성이 개입된 여섯 감각대상을 의미한다. 십이처의 세계관은 감각대상조차 이미 순수객관 그대로가 아니라 인간 각자의 주관이 개입된 대상세계라는 점을 피력하고 있다.
십팔계란 주관성이 확립된 여섯 감각기관과 주관성이 개입된 여섯 감각대상에, 눈의 인식작용[眼識]․귀의 인식작용[耳識]․코의 인식작용[鼻識]․혀의 인식작용[舌識]․몸의 인식작용[身識]․마음의 인식작용[意識]이라는 여섯 가지 인식작용[六識]이 합해진 것이다. 십팔계의 세계관은 십이처의 세계관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주관성이 확립된 여섯 감각기관을 가지고 주관성이 개입된 여섯 감각대상을 끊임없이 인식하는 일을 되풀이하면서 더욱 더 주관을 견고히 하고 무명을 견고히 하면서 업을 쌓아나가는 주관의 세계를 피력하고 있다.
2. 만유의 속성: 삼법인(三法印)
①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고 생멸변화한다[제행무상(諸行無常)].
②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괴로운 것이다[일체개고(一切皆苦)].
③ 이 세상 모든 것은 서로 의존하여 생기는 것일 뿐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제법무아 (諸法無我)].
불교의 근본교설이 담긴 아함부경전을 보면 시종일관 이 세상(오온, 십이처, 십팔계)은 무상한 것이고 괴로운 것이며 아(我)가 아니라고 그 속성을 설하고 있다.
아함부경전 가운데 특히 잡아함경을 보면 ?오온은 영원하지 않은 것이고[無常], 괴로운 것이며[苦], 아(我)가 아니고[非我], 질환이며[病], 가시고[刺], 변하는 것이며[變易法], 파괴되는 것이고[壞], 소멸하는 것이며[滅], 악성종기이고[癰], 아픔이며[痛], 빈 것[空]이라고 그 속성을 규정하고 있다. 五蘊無常, 苦, 空, 非我를 설하는 까닭은 중생들의 의식 속에 있는 ①오온은 我[실체로서의 나]이다. ②我는 오온을 지닌 것이다. ③我속에 오온이 있다. ④오온속에 我가 있다는 등등의 잘못된 견해를 파하기 위해서이다. 오온이 실체로서의 나라면 영원해야 하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어야 하며, 내 마음대로 할 수 있기 때문에 괴로움이 없어야 한다. 그러나 오온은 실체로서의 나가 아니기에 영원하지 않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어 괴롭다. 위의 ①②③④가 다 잘못된 견해라면 과연 실체로서의 나란 무엇일까? 이에 대한 해답은 선(禪)을 통해서만이 알 수 있다.
잡아함경을 보면, ?십이처는 영원하지 않은 것이고, 괴로운 것이며, 아가 아니고, 공이다.?라고 그 속성을 규정하고 있다. 이처럼 십이처의 속성을 규정하는 까닭 또한 오온의 경우와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잡아함경을 보면, ?십팔계는 영원하지 않은 것이고, 괴로운 것이며, 아가 아니고, 공이다.?라고 그 속성을 규정하고 있다. 이처럼 십팔계의 속성을 규정하는 까닭 또한 오온의 경우와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3. 만유가 존재하는 법칙: 연기법(緣起法)
① 인과법(因果法): 인간과 대상세계 사이에 작용되는 법칙
② 인연화합법(因緣和合法): 사물의 생성․소멸․변천․발전에 적용되는 법칙
③ 상의상관성(相依相關性): 존재와 존재 사이에 적용되는 법칙
☞고통과 해탈의 연유를 밝힌 것이 십이연기법(十二緣起法).
☞①무명(無明) - 진리에 대한 무지[진리에 대한 근본적인 무지 + 사실에 대한 근본적 인 착각 + 일시적 형체에 대한 맹목적인 집착]
※ 여기에서 말하는 진리 또는 사실이란 핵심적으로 말해서 무아(無我)라는 진리 또는 사실을 말한다.
※ 무명과 반대되는 말로 명(明)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무명과 반대되는 뜻을 지니고 있다고 알면 된다
② 행(行) - 업(몸과 입과 마음으로 지은 업)
③ 식(識) - 의식
④ 명색(名色) - 인식내용을 개념화함
⑤ 육입(六入) - 주관성이 확립된 여섯 감각기관과 주관성이 개입된 여섯 감각대상
⑥ 촉(觸) - 주관성이 확립된 여섯 감각기관이 주관성이 개입된 여섯 감각대상을 대하 여 여섯 가지 인식작용(눈․귀․코․혀․몸․사유기관의 인식작용)을 일으키는 것
⑦ 수(受) - 느낌(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
⑧ 애(愛) - 세 가지 느낌에 대한 반응인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즐거운 느낌에 대하 여는 탐욕을 일으키고, 괴로운 느낌에 대하여는 성내는 마음을,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대하여는 어리석은 마음을 일으킨다]
⑨ 취(取) - 즐겁고 좋은 것은 취하고, 괴로운 것은 버리며,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것 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작용
⑩ 유(有) - 존재의 형성(욕계 존재와 색계 존재와 무색계 존재를 형성함)
⑪ 생(生) - 다시 태어남
⑫ 노사(老死) - 노사를 비롯한 갖가지 고통
여기에서 ①②를 과거로 보고, ③에서부터 ⑩까지를 현재로 보며, ⑪⑫는 미래로 본다. 십이연기설에 의하면 시작을 알 수 없는 시작부터 있어온 무명으로 인하여 쌓인 업[과거세에 ③에서 ⑩을 찰나찰나 왕복하며 지은 몸과 입과 마음의 업]은 현재의 나[과거세의 업에 의해 제한된 인식으로 대상을 주관화시켜 대할 수밖에 없는 나]를 낳았고, 현재 그 과거세의 경험에 의해 생긴 제한된 인식으로 ③에서 ⑩을 찰나찰나 왕복하며 업을 짓고 있는 나는 또 다시 일그러진 미래의 나를 형성하고 있다. 나는 현재를 살고 있지만 이미 그 속에 미래의 내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모습은 이미 그 자리에서 존재의 질[욕계존재로서의 질 혹은 색계존재로서의 질 혹은 무색계존재로서의 질]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요, 또한 그 누적은 미래의 나의 질을 결정할 것이다. 지금 우리가 중시해야 할 문제는 과거나 미래가 아니라 현재다. 다시 말하면 ③에서 ⑩에 이르는 과정을 주시해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의 일상생활은 ⑥의 연속이다. 그런데 문제는 ⑥의 연속이라는 그 자체가 아니라 ①에다 ②까지 덮어씌워진 ③에 의해 ⑥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를 일러 무명촉(無明觸)이라고 한다[이와 반대로 ①과 ②로 얼룩지지 않은 ③에 의해 이루어지는 ⑥을 명촉(明觸)이라 한다]. 중생의 일상생활은 무명촉의 연속이다. 그러므로 백년을 산들 또 다시 태어나 수백생을 다시 산들 여전히 무명촉의 연속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세존께서는 금생에 이 자리에서 무명촉을 완전히 멸하고 명촉을 완전히 이루라 하신 것이요, 불법을 만나는 것[명촉을 이루는 것]이 백천만겁난조우(百千萬劫難遭遇)라고 하신 것이다. ①②에 의해 눈에 색안경이 씌워진 우리는 그 제한된 안경으로 ⑥을 행하고 ⑥에 의해 인식된 내용이 다시 ④의 형태로 ③에 저장됨과 동시에 ⑦⑧⑨⑩이 차례로 행해진다. 과거세에 반복한 ③에서 ⑩에 이르는 작용에 의해 제한된 ③에는 여섯 감각대상조차도 이미 객관적 대상이 아니라 주관에 의해 인식되고 개념화된 제한되고 주관적인 대상이기에, ⑦은 필연적으로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지혜로운 사람은 ⑥의 단계에서 이미 자신의 주관을 제거해버리나, 그 아랫단계에 속하는 사람들은 ⑦ 혹은 ⑧의 단계에서 자신의 주관을 제거해버릴 수 있다. 그러나 ⑧에서조차 자신의 일그러진 주관을 인식하지 못하고 ⑨로 넘어간다면 ⑨에 대한 책임은 뒤따르는 법이다. ⑥의 단계에서 무명과 행에 의해 지배되지 않은 인식을 일으키는 것을 일러 명촉이라 하고, 무명과 행에 의해 지배되는 인식을 일으키는 것을 무명촉이라 했는데, 찰나찰나 일어나는 무명촉을 없애고 명촉을 일으키는 것이 좌선하는 의미다. 즉 무의식중에 무명과 행에 의해 지배되어 인식작용을 일으키는 것이 우리의 일상생활이라면, 인식작용이 무명과 행에 의해 지배되지 않도록 깨어서 지켜보는 것이 좌선[물론 행선이나 와선도 마찬가지]이라고 알면 될 것이다. 찰나찰나 일어나는 무명촉을 없애고 찰나찰나 명촉을 일으킨다면, 그 찰나찰나 우리는 깨달은 인간이다. 그리고 명촉의 누적은 어느 시점에 가면 무명을 남김없이 끊어 언제 어디서나 명촉만을 일으키는 부처를 이루게 할 것이다.
4. 연기법을 기반한 실천적 가르침(고통에서 벗어나 해탈하기 위해 실천해야 할 가르침)
① 십업설(十業說): 열가지 악행(살생, 도둑질, 비도덕적 성행위, 거짓말, 이간질하는 말, 꾸미는 말, 욕설, 탐욕, 성냄, 어리석음)은 행하지 말고 열가지 선행(십악을 행하지 않는 것)은 행하라.
② 사성제설(四聖諦說): 고통을 멸하는 바른 수행으로 이끄는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
․고성제(苦聖諦)-괴로움의 범위에 대한 진리[팔고(八苦): 생노병사고(生老病死苦)와 애별리고(愛別離苦), 원증회고(怨憎會苦), 구부득고(求不得苦), 오음 성고(五陰盛苦)]
․집성제(集聖諦)-괴로움의 원인은 무명(無明)이라는 진리[십이연기의 역관]
․멸성제(滅聖諦)-무명이 소멸하면 괴로움이 소멸한다는 진리[십이연기의 순관]
․도성제(道聖諦)-괴로움의 소멸을 위해 실천해야 할 방법에 대한 진리
[팔정도(八正道)- 바른 가치관,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 른 생활, 바른 노력, 바른 깨어있음, 바른 선정]
중아함경의 전유경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세존께서 사위국의 기수 급고독원에 계실 때 만동자 존자는 홀로 좌선하다가 어리석은 결심을 한다. 세존께서 세상은 영원한가 아닌가, 세상에 끝이 있는가 없는가, 목숨이 곧 몸인가 아니면 목숨과 몸은 다른 것인가, 부처는 사후에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하는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가 하는 문제에 대해 진위를 가려 설해주시지 않는다면 세존을 등지리라고. 그리고는 해질녘 세존께 나아가 그 사실을 말씀드린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그가 당신 밑에서 청정행을 닦게 된 이유가 과연 그러한 견해들에 대해 알고 싶어서였는가 하고 그를 꾸짖으신다. 그리고는 비구들에게 독화살 맞은 사람 비유를 설하신다. 즉 독화살을 맞은 사람이 우선 독화살을 뽑고 치료할 생각은 안하고 화살을 쏜 사람과 활의 재질, 화살의 재질 등에 대해 먼저 알기 전에는 화살을 뽑아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면 그러한 사실을 알기도 전에 죽게 되는 것처럼, 어떤 어리석은 사람이 위의 10가지 견해들에 대해서 세존께서 진위를 설해주시지 않으면 세존을 따라 청정행을 배우지 않겠다고 한다면 그는 그 사실을 알기 전에 목숨을 마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세존께서는 비유를 설하신 뒤 위의 10가지 견해들은 이치나 도리에도 맞지 않고 괴로움을 다하여 해탈하는 일과도 관련이 없으므로 설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는 이렇게 결론 지으신다.
?그러면 나는 어떤 가르침을 한결같이 설하는가? 나는 이러한 이치를 늘 설한다. 괴로움의 범위에 대한 진리, 괴로움의 원인에 대한 진리,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진리, 괴로움의 소멸을 위해 실천해야 할 방법에 대한 진리에 대해서 늘 설한다. 왜냐하면 이는 이치에도 맞고 도리에도 맞으며 청정행의 근본이 되고 지혜나 깨달음, 열반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존께서 누가 물어도 대답하지 않으신 위의 10가지 항목을 일러 십무기(十無記)라 한다. 그러면 세존께서는 왜 이 일들에 대해 대답을 피하셨는가? 그 이유는 그런 주제들이 괴로움을 다하는 일과는 사실상 무관한 논의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세존께서는 인생의 괴로움을 해결하기 위해 출가하시고 도를 닦으신 분이다. 그리고 괴로움을 바르게 다하여 거기서 완전히 벗어나신 분이다. 그러므로 남을 위해 가르침을 설하실 때도 괴로움을 다하는 일과 직접 간접으로 관련 있는 일만 설하셨다.
위에서 말하는 괴로움의 범위에 대한 진리, 괴로움의 원인에 대한 진리,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진리, 괴로움의 소멸을 위해 실천해야 할 방법에 대한 진리란 무엇인가? 사성제(四聖諦)를 말한다. 사성제는 세존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후 처음으로 설하신 가르침이다.
세존께서는 보리수 아래서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얻으신 후 범천왕의 간청을 받고는 누구에게 먼저 설법할까를 고민하신다. 그러다가 당신의 옛 스승이었던 알라라칼라마와 웃다카라마풋타를 생각해내신다. 그러자 허공의 어떤 천신들이 그들이 이미 죽었음을 알려준다. 이 말을 들으신 세존께서는 몹시 애석해하시며 다른 설법 대상을 찾으시다가 어려서부터 많은 도움을 주었을 뿐 아니라 고행림에서 줄곧 당신을 지켜보던 다섯 비구를 생각해내신 뒤, 그들이 녹야원에 있다는 것을 알아내신다. 그리고는 깨달음의 기쁨을 노래하신 후 그곳을 떠나 녹야원으로 향하신다. 세존께서 녹야원에 당도하시자 다섯 비구들은 멀리서 그 모습을 보고는 상대하지 말자고 서로 약속한다. 그러나 막상 세존께서 앞에 다가가시자 그들은 자기들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공경하는 자세로 맞이한다. 이에 세존께서는 그들에게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얻었음을 선언하신 뒤 부처님들 외에는 누구도 들어본 바 없는 진리인 사성제를 설하신다. 세존께서 사성제를 설하시자 다섯 비구 가운데 아야교진여가 최초로 열반을 얻고 이어서 나머지 네 비구도 열반을 얻는다.
십이연기설이 괴로움과 해탈 또는 생사가 존재하는 법칙을 밝히는 진리라면, 사성제는 십이연기설을 바탕으로 한 실천적인 가르침이다.
괴로움의 범위에 대한 진리에서는 태어나는 고통, 늙는 고통, 병드는 고통, 죽은 고통, 싫은 것과 만나는 고통,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고통,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고통, 오온 그 자체의 고통 등 여덟 가지 고통을 말함으로써 인간의 현실은 괴로움으로 가득차 있음을 밝히고 있다.
괴로움의 원인에 대한 진리에서는 괴로움의 원인은 곧 세 가지 느낌 그리고 세 가지 느낌에 대한 반응인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즐거운 느낌에 대하여는 탐욕을 일으키고, 괴로운 느낌에 대하여는 성내는 마음을,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마음에 대하여는 어리석은 마음을 일으킨다]이 끊임없이 생겨나 대상에 탐착하는 데 있다고 밝히고 있는데 이러한 것들의 연유를 깊이 파헤치려면 십이연기설의 도움이 필요하다. 십이연기란 생사를 비롯한 모든 고통이 발생하고 소멸하는[고통의 소멸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해탈의 발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과정을 12가지 지수로 설명한 법칙인데, 이는 어느 누가 만든 것이 아니요 그저 상주하는 법계(法界)의 법칙이다.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진리에서는 세 가지 느낌에 대한 반응인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남김 없이 다하여 다시는 일어나지 않으면 그것이 곧 괴로움의 소멸임을 밝히고 있는데 이것이 다하려면 십이연기설을 보건대 진리에 대한 무지를 끊어야 한다.
괴로움의 소멸을 위해 실천해야 할 방법에 대한 진리에서는 괴로움의 소멸을 위한 방법론으로 팔정도를 제시하고 있다. 팔정도란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활, 바른 노력, 바른 깨어있음, 바른 선정을 말한다. 바른 견해란 인생과 세계에 대해 올바른 가치관을 갖는 것으로 구체적으로는 삼법인(三法印, 만유의 속성에 대한 가르침-모든 존재와 현상은 영원하지 않고, 모든 존재와 현상에는 실체로서의 ?나?가 없으며, 모든 존재와 현상은 괴로운 것이라는 진리), 연기법(緣起法, 만유가 존재하는 법칙에 대한 가르침), 사성제(삼법인과 연기법을 바탕으로 한 실천적인 가르침)를 아는 것을 의미한다. 바른 사유란 그릇된 생각을 버리고 바른 생각을 일으키는 것으로 구체적으로는 사념처1)(四念處), 사의단2)(四意斷), 칠각지3)(七覺支), 십이연기(十二緣起) 등을 닦는 것을 의미한다. 바른 말이란 거짓말이나 욕하는 말, 이간질하는 말, 아첨하는 말이 아닌 바른 말을 하는 것이자 더 나아가서는 진리에 입각하여 하는 말을 의미한다. 바른 행위란 살생, 도둑질, 사음을 떠난 행위를 하는 것이자 더 나아가서는 진리에 입각하여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바른 생활이란 정당한 방법으로 의식주를 구함은 물론 더 나아가서는 진리에 입각하여 생활하는 것을 의미한다. 바른 노력이란 악을 없애고 선을 생겨나도록 노력하는 것으로 구체적으로는 사의단, 오근, 오력4) 등을 닦는 것을 의미한다. 바른 깨어있음이란 바르지 않은 생각을 버리고 바른 생각만을 지키는 것으로 구체적으로는 오근(五根), 오력(五力), 칠각지 등을 닦는 것을 의미한다. 바른 선정이란 산란한 마음을 버리고 마음을 고요히 하여 명상하는 것으로 구체적으로는 갖가지 관법(觀法) 수행 즉 부정관5)(不淨觀), 자비관6)(慈悲觀), 연기관7)(緣起觀), 계분별관8)(界分別觀), 수식관9)(數息觀) 등과 사선10)(四禪), 사무색정11)(四無色定), 멸진정12)(滅盡定) 등을 닦는 것을 의미한다. 팔정도의 여덟 가지 내용은 십이연기와 마찬가지로 그 순서가 바뀌면 안된다. 그 이유로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들 수 있다.
?해가 뜨기 전에 밝은 모양이 먼저 나타나듯, 비구가 괴로움을 바르게 다하여 괴로움의 끝에 이르기 전의 모습은 이른바 바른 견해를 지니는 것이다. 바른 견해는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활, 바른 노력, 바른 깨어있음, 바른 선정을 생겨나게 하나니, 선정삼매가 생겨나는 까닭에 불제자는 탐욕, 노여움, 어리석음에서 마음이 바르게 잘 해탈한다.?
중아함경의 상적유경에 의하면, 모든 짐승 발자국 가운데서 코끼리 발자국이 제일인 것처럼 좋은 가르침이 한량없이 많더라도 그 모든 가르침은 다 사성제로 포섭된다고 한다. 또 장아함경의 세기경 도리천품에 의하면, 사성제의 광명은 반딧불의 광명에서부터 장작더미의 광명, 욕계 육천(欲界六天)의 광명, 색계 십팔천(色界十八天)의 광명, 무색계 사천(無色界四天)의 광명 그리고 부처의 광명을 합한 광명보다 밝다. 왜일까? 사성제는 수많은 부처를 낳는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어느 때 세존께서는 비구들을 신서림(申恕林)으로 데리고 가시어 나뭇잎을 한 줌 집어드시고는 그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비구들이여! 내가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이루고서 본 도리 가운데 남에게 설한 것은 마치 이 손안의 나뭇잎과 같이 적다. 이렇게 적은 도리만 설한 것은 그 도리의 이치와 가르침과 청정행이 이익됨이 많아, 무명을 깨뜨리는 지혜[明]와 진리를 꿰뚫는 지혜[慧]로 바르게 깨달아 열반으로 향하게 하기 때문이다.
내가 위없는 깨달음을 이루고서 안 도리 가운데 남에게 설하지 않은 것은 마치 저 큰 숲의 나뭇잎과 같이 많다. 그 많은 도리들을 설하지 않은 것은 그 도리의 이치와 가르침과 행이 이익됨이 없어, 무명을 깨뜨리는 지혜와 진리를 꿰뚫는 지혜로 바르게 깨달아 열반으로 향하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위에서 말하는 세존께서 깨달음을 이루신 뒤 설한 도리란 바로 사성제를 말한다.
1) 부모에게서 받은 육신을 부정하다고 관조하는 신념처(身念處), 흔히들 즐거움이라고 생각하는 음행․자녀․재물 등은 모두 고통이라고 관조하는 수념처(受念處), 마음은 항상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고 늘 생멸변화하는 것이라고 관조하는 의념처(意念處), 모든 존재와 현상에 참다운 실체는 없다고 관조하는 법념처(法念處)
2) 이미 생긴 악은 부지런히 노력하여 끊는 단단(斷斷), 아직 생기지 않은 악은 생기지 않도록 방지하는 율의단(律儀斷), 아직 생기지 앟은 선은 생겨나도록 힘쓰는 수호단(隨護斷), 이미 생긴 선은 더욱 불어나도록 힘쓰는 수단(修斷)
3) 깨달음에 이르는 일곱 가지 갈래로, 뛰어난 지혜로써 가르침을 잊지 않는 염각의(念覺意), 진실된 가르침만을 선택하고 그릇된 가르침은 버리는 택법각의(擇法覺意), 진실한 가르침을 사유하면서 수행하는 정진각의(精進覺意), 정진하는 수행자에게 기쁨이 생기는 희각의(喜覺意), 기쁨이 생긴 수행자의 몸과 마음이 경쾌한 의각의(猗覺意), 몸과 마음이 경쾌한 수행자가 정신을 통일하여 삼매에 드는 정각의(定覺意), 통일된 마음을 평등하게 잘 관찰하는 사각의(捨覺意)
4) 오근이란 깨달음을 얻기 위한 다섯 가지 능력 즉 믿음, 정진, 기억, 선정, 지혜를 말하고, 오력이란 오근이 실제로 활동하는 구체적인 힘으로 오근보다는 진전된 수행 단계인 믿음, 정진, 기억, 선정, 지혜를 말한다.
5) 육신, 재물, 자녀, 음욕 등의 부정함을 관조하는 수행.
6) 모든 중생을 사랑하는 마음을 닦는 수행.
7) 연기의 이치를 관조하는 수행.
8) 모든 물심의 현상은 지수화풍공식의 육대가 모여 이루어진 것이라고 관조하여 탐욕을 여의는 수행.
9) 호흡의 숫자를 헤아리거나 들숨 날숨을 관조함으로써 마음의 집중력을 기르는 수행.
10) 그 마음이 색계(色界)의 수준에 머물 때 얻을 수 있는, 괴로움을 소멸시켜 해탈․열반을 얻기 위해 닦는 수행법 가운데 하나로, 육체적 욕망과 바르지 않은 일을 모두 여읜 경지인 초선(初禪), 언어가 멸하고 선정에서 생기는 희열이 가득한 경지인 제이선(第二禪), 감각적 대상에 대한 호악의 감정을 여읜 경지인 제삼선(第三禪), 희열을 버림으로써 오는 즐거움마저 떠나 호흡이 멸한 경지인 제사선(第四禪)을 말한다.
11) 그 마음이 무색계(無色界)의 수준에 머물 때 얻을 수 있는, 괴로움을 소멸시켜 해탈․열반을 얻기 위해 닦는 수행법 가운데 하나로, 모든 것을 한량없는 허공으로 보는 경지인 공처정(空處定), 모든 것을 한량없는 분별의식으로 보는 경지인 식처정(識處定), 모든 것을 비어있다고 보는 경지인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 비어있음을 이해하려는 행위조차 버린 지각도 무지각도 아닌 경지인 비유상비무상처정(非有想非無想處定)을 말한다.
12) 그 마음이 욕계는 물론이요 색계, 무색계까지 초월한 수준일 때 얻어지는 경지이다. 세존의 말씀에 의하면 이 선정은 모든 선정 가운데 제일이요 가장 크고 으뜸이며 훌륭하고 묘하다. 그리하여 이 선정을 얻고 이 선정에 의지하며 이 선정에 안주하면 다시는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괴로움을 받지 않는다고 한다.
'수행관련'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몸 관찰 - 우 실라난다 사야도 (0) | 2020.05.31 |
---|---|
마음챙김(싸띠팟타나)의 의미 -우판다따 사야도 (0) | 2020.05.17 |
[스크랩] 파아욱 또야 사야도 법문 / 첫 번째와 두 번째 성스런 진리를 알고 보는 방법 (0) | 2018.12.30 |
[스크랩] 청정도론 (0) | 2018.12.30 |
[스크랩] 동남아 상좌불교의 역사와 현황 (0) | 2018.12.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