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몸에 대하여 몸을 관찰
마음챙김의 첫 번째 대상은 몸에 대하여 몸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그것을 열
네 (14) 가지 다른 방법으로 설명하셨습니다. 다른 말로는, 그분은 몸에 대하여 몸을 관찰하
는 데 관한 열 네 가지 원칙을 가르치셨습니다. 첫 번째 원칙은 호흡입니다. 부처님께서 말
씀 하셨습니다:
그런데, 비구들이여, 비구는 어떻게 몸에 대하여 몸을 관찰하며 지낼 것인가? 여기 지금 한 비구가 산림이나, 나무 밑이나, 한적한 곳으로 가서 다리를 포개서 앉고 그의 윗몸을 똑바로 세워두고 그의 수행의 대상에 그의 마음 챙김을 기울인다. 언제나 마음 챙겨서, 그는 숨을 들이쉬고, 언제나 마음 챙겨서, 그는 숨을 내쉰다.
“산림이나, 나무 밑이나, 한적한 곳으로 가서”라는 말씀으로, 부처님께서 수행하기에 적당 한 장소들을 가리키셨습니다. 첫 번째가 “산림”인바 은둔의 천국을 제공하는 어떠한 종류의 산림도 된다는 뜻입니다. 그 장소가 한적하여야 되기 때문에 촌락, 읍 또는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음향과 잡음에서 떨어져있고 아무도 살지 않는 산림이어야 합니다. 어떤 책에는 산림이란 사람이 거주하는 곳으로부터 오 백 번 엎드려 절하는 만큼의 거리 떨어져있는 곳이라고 정의합니다. 한번 엎드려 절하는 만큼의 거리는 여섯 피트(feet)와 같아서 그곳은 사람이 거주하는 곳으로부터 삼천 피트 떨어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람으로부터 이렇게 멀리 떨어져있는 곳에서는 한적함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요즘에는, 정말 한적한 곳을 찾기 어렵습니다. 산림에서도 수행자는 비행기 소리를 듣게 되기도 합니다.
경전에서 말씀하신 두 번째 장소는 “나무 밑”입니다. 어떤 나무 밑도 수행하기에 적당한 곳입니다. 그러나 산림과 같이 조용한 곳이어야 합니다. 세 번째 장소는 그저 “한적한 곳”입니다. 그것은 도시 또는 촌락일지라도 한적하여야 됩니다. 이들 장소에 관하여는, 한적함이 가장 중요한 조건입니다. 따라서, 어떤 장소든지 한적함을 제공한다면 수행하기에 적당한 곳입니다.
다른 경전에서, 한적한 곳의 전통적인 목록에는: 산림, 나무의 밑, 바위, 언덕의 갈라진 틈, 산의 동굴, 납골당 (묘지), 정글의 덤불, 열려있는 공간, 그리고 짚더미 이가 있습니다. 이들 목록에서 “바위”로 시작해서 마지막 일곱 장소도 “한적한 곳”으로 받아집니다. 이들 장소들이 언급된 것은 그것들이 조용하고 마음을 산란하게 만드는 것들로부터 떨어진 장소가 필요한 초심자들에게 가장 적합하기 때문입니다. 은둔수행 센터 또는 수행수도원에서 수행을 위한 한적한 환경을 제공하기도 합니다. 경험이 있고 집중력이 어느 정도 성숙한 사람에게는 어떤 곳도 수행하기에 알맞은 장소입니다.
“(그는) 다리를 포개서 앉고 그의 윗몸을 똑바로 세워두고 그의 수행의 대상에 그의 마음 챙김을 기울인다”: 이 말씀으로, 부처님께서 수행자가 수행을 위하여 어떻게 준비해야되고 무슨 자세를 취할 것인가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분은 전통적인 “다리를 포개서 앉는” 자세를 말씀하십니다. 동양 사람들은 바닥에 앉는 것에 익숙해서 다리를 포개서 앉는 것이 그들에게는 자연스럽습니다. 수행자는 이 자세로 앉는데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것은 수행을 위해서 아주 좋은 자세이며 게으름이나 산만을 조성하지 않는 평화로운 자세입니다.
다리를 포개서 앉는데는 세 가지 다른 형태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유지하기 가장 힘든 “결가부좌”입니다. 연습하지 않으면 수행자는 이자세로 오래 동안 앉아있지 못합니다. 수행자의 다리가 꼬여있는 이자세로 몇 분간 앉아 있은 후에는 아픔을 느낄 것입니다. 두 번째 자세는 “반가부좌”입니다. 한 다리를 다른 다리 위에 놓는 것으로서 이들은 꼬이지는 않습니다. 이자세로 더 오래 앉아 있을 수 있지만 수행자는 눌리는 것 같은 것을 느낄 것이며 몇 분 후에는 다리가 저려올 것입니다. 세 번째는 “쉬운 자세”입니다. 이 자세에서는 한쪽다리를 다른 다리 위가 아닌 앞에 두고 앉는 것입니다. 어떤 책에서는 이 자세를 “미얀마 식 자세”라고 합니다. 미얀마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 앉습니다. 이 자세는 초보자에게 제일 좋을 것 같습니다. 이것이 가장 편한 자세임으로 초보자들이 큰 불편함이 없이 오랜 시간 동안 이자세로 앉아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다리를 포개서 앉는 것이 아주 힘이 듭니다. 너무 힘이 들어서 그들의 사띠빠따나 수행에 지장을 줍니다. 이런 사람은 방석, 의자, 또는 긴 의자에 앉아도 됩니다. 왜냐하면 사띠빠따나 수행을 위하여 어느 정도의 편안함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너무 편안해서는 안되지만 어느 정도는 사띠빠따나 수행을 계속하기 위하여 필요합니다.
“그의 윗몸을 똑바로 세워두고”의 뜻은 사띠빠따나 수행자가 다리를 포개서 앉아있을 때 그들의 몸을 똑바로 유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수행자의 척추가 똑바를 때 척추에 있는 열 여덟 개의 등뼈들이 차례로 다른 것들 위에 놓입니다. 수행자가 똑바로 앉으면 수행자의 근육, 힘줄, 피부 와 살이 꼬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근육 등이 꼬였을 때처럼 아픈 느낌이 쉽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수행자의 마음이 수행 중에 통일되고, 아픔이 증가하면서 좌절되는 대신, 마음챙김의 성숙됨에 힘쓸 수 있습니다.
따라서, 다리를 포개서 앉고 수행자의 윗몸을 똑바로 세우는 것은 아주 적절한 자세로서 집중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호흡에 대한 마음 챙김
“그는 수행의 대상에 그의 마음 챙김을 기울인다” 라는 뜻은 수행자들은 그들의 마음을 수행의 대상에 집중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수행의 대상은 호흡일 것입니다. 따라서, 수행자는 들숨과 날숨에 마음을 둡니다 ,즉, 집중합니다.
“언제나 마음 챙겨서, 그는 숨을 들이쉬고, 언제나 마음 챙겨서, 그는 숨을 내쉰다”: 이것은 사띠빠따나 수행을 설명한 것입니다. 수행자가 사띠빠따나 수행을 할 때 수행자는 마음을 호흡에 둡니다. 수행자는 마음을 챙겨서 숨을 들이쉬고 내쉽니다. 실제로, 수행자는 마음을 콧구멍 입구에 두고 “들숨-날숨, 들숨-날숨”등 호흡을 관찰합니다. 수행자의 마음은 코끝에 머물러야하고 호흡을 따라서 수행자의 몸으로 들어가고 나오고 하면 안됩니다. 수행자는 들숨과 날숨을 두개의 다른 것으로 보려고 해야합니다. 들숨은 숨을 내쉴 때 존재하지 않고 날숨은 숨을 들이쉴 때 존재하지 않습니다.
수행자가 호흡에 대한 사띠빠따나 수행을 할 때 수행자는 여러 가지방법으로 호흡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이 가운데 네 가지를 이 경전에서 설명합니다.
긴 숨을 들어 마시면서 “나는 숨을 길게 들어 마신다”고 알고; 긴 숨을 내쉬면서 “나는 숨을 길게 내쉰다”고 압니다.
호흡을 관찰하는 과정 중에, 수행자가 때로는 긴 숨을 쉴 수도 있습니다. 그때 수행자들은 “우리들은 숨을 길게 마신다”고 알아야합니다. 그 뜻은 호흡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인다면 그것을 알아차리기에 실패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수행자가 길게 호흡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기 위하여 일부러 길게 호흡하여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겉으로가 아니고 철저하게 안다는 뜻입니다.
짧은 숨을 들어 마시면서 “나는 숨을 짧게 들어 마신다”고 알고; 짧은 숨을 내쉬면서 “나는 숨을 짧게 내쉰다”고 압니다.
때로는 수행자가 짧은 숨을 쉴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때 그들이 짧은 숨을 쉰다는 것을 철저히 알고; 그들이 그렇게 하고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기에 실패하지 않습니다. 여기 또한, 수행자는 일부러 호흡을 짧게 해서는 안된 다는 것을 이해하여야 합니다. 수행자는 단지 짧은 숨을 쉬고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들숨의 온 몸통을 명백히 알면서, 나는 숨을 들이마실 것이다”라고 하면서 노력하고 (팔리어를 직역하면, 자신을 훈련시키고); “날숨의 온 몸통을 명백히 알면서, 나는 숨을 내쉴 것이다”라고 하면서 노력합니다.
수행자가 호흡들을 관찰할 때 모든 호흡들을 명백히 보려고 노력해야합니다. “명백히 알면서”는 호흡들을 알아차리고, 그들을 꾸밈없도록 하고, 그들을 선명하게 보려고 노력한다는 뜻입니다. 팔리어 원전에서는 “들숨의 온 몸통(entire in-breath)”은 사빠카야(sabbakaya)인데 직역하면 몸 전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카야(kaya)또는 몸은 물질적인 몸 전체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호흡의 몸통을 뜻합니다. 팔리어인 카야 는 물질적인 몸과 무더기(group)를 뜻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수행자가 신체기관들의 몸통을(a body of members) 말할 때와 비슷합니다. 여기서 그것은 물질적인 온 몸통(entire physical body)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호흡만을 뜻하는바, 여기서 “온”(entire)이란 시작, 중간, 과 끝을 뜻합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호흡 하나 하나의 시작, 중간, 끝을 꼼꼼하게 살피도록 노력해야합니다. 수행자는 또한 이 절(this section)은 호흡에 대한 마음챙김에 관한 것임을 잊어서는 안되며 이 수행의 대상은 호흡이어야 하고 물질적인 온 몸통이어서는 안됩니다.
청정도론(Path of Purification)에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습니다.
그는 수련하면서, “나는 호흡의 온 몸통의 시작, 중간과 끝 을 알아차리고 꾸밈없도록 하면서 숨을 들이마실 것이다. 나는 호흡의 온 몸통의 시작, 중간과 끝 을 알아차리고 꾸밈없도록 하면서 숨을 내쉴 것이다”, 라고 자신을 훈련시킨다. 이와 같이 호흡들을 알아차리고 꾸밈없도록 하면서 그는 정신을 차리고 인식을 하면서 (with consciousness, associated with knowledge) 숨을 들이쉬고 내쉰다.
수행자는 이 구절에서 미래시제를 눈여겨보았을 것입니다. 전에 호흡에 대한 관찰에서는, 수행자는 긴 숨을 짧은 숨과 구별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많은 지식과 노력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기부터는 호흡을 명백히 그리고 철저히 보기 위해서 지식을 얻도록 노력을 해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와 다음구절들에서 미래시제를 사용합니다.
그렇다고 수행자가 더 힘있게 호흡을 해서 호흡이 그들에게 분명해지도록 해야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수행자가 호흡 하나 하나의 시작, 중간과 끝을 명백히 인지할 수 있을 때만 수행자의 집중, 지식 또는 이해가 깊고 철저하다고 말합니다. 수행자가 더 힘있게 호흡하기 때문에 수행자가 호흡을 명백히 볼 때, 그것은 수행자의 집중과 지식 때문이 아니고 대상의 거칠음 (grossness) 때문에 호흡을 명백히 본다는 뜻입니다. 그럼으로 수행자는 단지 호흡을 더 명백히 보기 위하여 더 힘있게 호흡해서는 안됩니다. 수행자가 그렇게 할 때 짧은 시간에 피로해 집니다. 따라서 호흡은 자연스러워야 합니다.
수행자가 이와 같은 수행을 할 때, 수행자는 정상적으로 호흡하면서 모든 들숨과 날숨을 명백히 보기 위하여 힘을 쓰고 지식을 얻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수행자가 호흡을 명백히 보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것들이 필요할까요? 명백한 관찰의 하나 하나의 행위에 얼마나 많은 요소가 포함되었을까요? 수행자는 노력, 마음챙김, 집중과 이해가 필요합니다.
“거친 들숨(the gross in-breath)(글자 데로 하면, 몸으로 조건지어진 것--literally, body-conditioned things)을 가라앉히면서, 나는 숨을 들이쉴 것이다,”하고 그는 노력하고; “거친 날숨 (the gross out-breath)를 가라앉히면서, 나는 숨을 내쉴 것이다,”하고 그는 노력합니다.
이 구절에서, 호흡을 “몸으로 조건지어진 것”이라고 일컬어 졌습니다. 팔리어로 “몸으로 조건지어진 것”이란 카야 싼카라 (kaya sankhara)입니다. 카야는 “몸”을 뜻하고 싼카라는 “조건지어진”(“conditioned")을 뜻합니다. 따라서, 그것은 “몸에 의하여 조건지어진 것”(“thing conditioned by the body")을 뜻합니다. 호흡은 의식 (consciousness)또는 마음 (mind)에 따라 생긴다고 합니다. 그러나 몸이 없으면, 호흡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비록 마음에 의하여 생기지만, 호흡은 일어나기 위하여, 즉 나타나기 위하여, 몸에 의존합니다. 따라서, “몸에 의하여 조건지어진 것”(“thing conditioned by the body")이라고 합니다.
싼카라(sankhara)는 팔리어 중에서 어려운 단어입니다. 경우에 따라서 많은 것을 뜻할 수 있습니다. 어떤 때는 “의지작용”(“volition"),즉 깜마(kamma)라 부르는 것을 뜻합니다. 의존해서 일어나는 것(Dependent Origination, 緣起)의 가르침에서는, 싼카라는 바로 이것을 뜻합니다. 어떤 때는, 그것은 의지작용을 비롯한 ”오십 개의 정신적 요소“를 뜻하는바 싼카라 칸다 (sankhara khandha)에서의 싼카라의 총체 (aggregate of sankhara)와 같습니다. 어떤 때는, 싼카라는 ”세상의 모든 것, 조건지어진 모든 것“을 뜻하는 바, 예컨데, ”모든 싼카라 (조건지어진 것)은 무상하다“고 말합니다. 어떤 때는, 그것은 아비담마 용어인 아산카리까 (asankharika)처럼 ”격려함“ 또는 ”촉구함“을 뜻합니다. 여기서는, 그것은 ”조건짓는“ (”conditioning")이라는 뜻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여기 카야 싼카라는 “몸에 의하여 조건지어진 호흡”을 뜻합니다.
이 카야 싼카라는 말은 또한 다르게도 번역되었습니다. 불교사전 (Buddhist Dictionary)에서는 “몸의 기능”(“bodily functions")이라고 번역되었고 Soma Thera 는 그의 저서 마음챙김의 방법 (The Way of Mindfulness)에서 ”몸의 움직임“ (”activities of the body")으로 번역했습니다. Nyanamoli 는 그의 저서 정화의 길(The Path of Purification)에서 “몸의 형성”(bodily formations")으로 번역했고 Nyanaponika는 그의 저서 불교선 수행의 핵심 (The Heart of Buddhist Meditation)에서 몸의 기능(bodily functions)으로 번역했습니다. Nyanasatta Thera 는 “몸의 움직임”(the activities of the body)라고 보았습니다. 여기서 이 용어가 뜻하는 것은 바로 “호흡”입니다. 여기서는 거친 호흡(gross breath)으로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가라앉혀야 하기 때문입니다.
“거친 들숨을 가라앉히면서(calming the gross in-breath)"라는 표현은 수행자가 의도적으로 호흡을 가라앉히고, 억제하고, 조용하게 한다는 뜻으로 받아드리면 안됩니다. 호흡이 아주 미세(subtle)할 때, 수행자는 열심히 노력하고, 주의를 기울이고, 더 많은 노력을 적용해서 호흡을 분간하도록 해야한다는 뜻입니다. 수행의 다른 대상은 집중과 이해가 증가하면서 더욱 명명백백하게 되지만 호흡은 수행의 다른 대상과 같지 안습니다. 수행자가 더욱 더욱 진보하면, 대상들, 예를 들면 카시나 (kasina, 지구모양의 디스크) 또는 다른 수행의 대상들, 은 수행자의 마음속에 더욱 명명백백하게 됩니다. 호흡은 이와 같지 않고 수행자가 진보함에 따라 더 미세해지고 인지하기 더욱 더욱 어려워집니다.
수행하지 않을 때, 수행자의 마음과 몸은 편안하지 안습니다. 수행자의 호흡은 수행자의 마음과 몸의 상황에 따르므로 거친 형태 (gross form)로 일어날것입니다. 그러나 수행자가 수행을 계속하면, 마음과 몸이 편안하고 안정하게되어 호흡이 섬세하게됩니다. 수행자가 집중의 성취를 향하여 더욱 진보할수록, 호흡은 더 미세해져서 수행자는 호흡이 있는지 없는지 탐색해야만할 정도입니다. 호흡이 너무 미세해져서, 한때는, 호흡이 어떻든 있는 것인지 의심할 것입니다. 수행자는 인지할 어떤 것도 찾지 못해서, 수행자는 호흡을 단순히 잃었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때, 수행자는 자신에게 다음과 같이 말해야합니다:“나는 안 죽었다, 나는 물에 빠져 죽지 않었다. 나는 아직 살아 있다. 그러나 나는 호흡을 인지할 수 없다 왜냐하면 호흡이 너무 미세하고 나의 집중과 이해가 예민하지 않고 충분히 계발되지 않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것들을 더 계발해야하고, 수행의 대상에 더 주의를 기울이어야 하고, 미세한 호흡을 인지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수행자가 노력을 계속해서 더 많은 이해를 얻었을 때, 수행자는 아무리 미세한 호흡일지라도 인지하게될 것입니다.
수행 중에 호흡을 인지할 수 없을 때도 수행을 포기하지 않아야 합니다. 수행자는 호흡이 자신에게 다시 명백하게될 때까지 미세한 호흡을 인지하도록 자신을 격려하고 독려해야합니다. 이것이 “거친 들숨을 가라앉힌다(calming the gross in-breath)"라는 뜻입니다. 수행자는 노력을 증가해야합니다.
경전에서, 부처님께서는 네 가지 호흡수행방법을 가르쳤습니다. 수행자가 이 수행을 할 때, 수행자는 긴 호흡, 짧은 호흡, 호흡의 길이, 그리고 미세해서 거의 인지할 수 없는 호흡을 완전히 인지해야 합니다.
이리하여, 수행자는 지금 마음 챙겨서 호흡하는 네 가지 방법을 알고있습니다. 첫째, 긴 숨을 들어 마시면서 수행자는 숨을 길게 들어 마신다고 알아야합니다. 둘째, 수행자는 긴 숨을 내쉬면서 그것을 알아야합니다. 셋째, 수행자는 짧은 숨을 들어 마시면서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넷째, 짧은 숨을 내쉬면서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마음 챙겨서 호흡하는 네 가지 규칙입니다.
부처님께서 비구들이 이 가르침을 더 명백히 이해하도록 비유를 주셨습니다. 그분이 말씀하셨을 때,
마치 숙련된 선반기술자(a skillful operator of a lathe)와 그의 제자가 길게 돌리듯이,
“길게 돌리듯이”(making a long turn)란 뜻은 드럼(drum)과 같이 큰 것을 만들 때 기술자는 선반 위에서 오래 동안 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짧게 돌릴 때” 라는 뜻은 상아로 된 바늘 (ivory needles)같은 작은 것을 만들 때 기술자는 선반 위에서 짧게 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돌림을 할 때, 수행자는 어떤 돌림을 하고있나 알아야합니다.
이와 같이, 그는 몸에 대하여 몸을 안으로 관찰하며 지내고, 또는--밖으로, 또는--(함께) 안과 밖으로 (몸에 대하여 몸을 관찰하며 지낸다--번역하면서 추가했음).
“안으로 관찰하며”란 무슨 뜻인가? 그것은 수행자가 자신의 들숨과 날숨을 관찰하고 알아차려 머문다는 뜻입니다. 수행자가 마음을 그들의 호흡에 머물게 할 때, “몸에 대하여 몸을 안으로 관찰한다”고 말합니다. 수행자가 그들 자신의 호흡에 마음을 머물게 하는 수행을 좀 하면, 때때로 다른 사람의 호흡도 같이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나의 호흡이 시작과 끝이 있고, 나타나고 살아지듯이, 다른 사람의 호흡도 그와 같다”. 이러한 방식으로 다른 사람의 호흡을 관찰합니다. 이렇게 할 때, 수행자가 “몸에 대하여 몸을 밖으로 관찰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을 처다 보고 그들의 호흡을 관찰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수행자가 다른 사람의 호흡을 생각하게된 경우에는 수행자는 다른 사람의 호흡도 알아차려야 합니다. 어떤 때는, 수행자는 자기자신의 호흡을, 그런 다음 다른 사람의 호흡을, 그런 다음 다시 자기자신의 호흡을 관찰합니다. 수행자는 자신의 호흡과 다른 사람의 호흡사이를 갔다왔다 합니다. 수행자가 그렇게 할 때 수행자는“몸에 대하여 몸을 안과 밖으로 관찰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수행자가 다른 사람을 처다 보고 그들의 호흡을 관찰 해야한다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는 호흡의 몸통(breath body)을 일어나게 하는 요소(origination factors)를 관찰하며 지내고, 또는 호흡의 몸통을 살아지게 하는 요소 (dissolution factors)를 관찰하며 지내고, 또는 호흡의 몸통의 일어남과 살아지는 요소들을 함께 관찰하며 지냅니다.
여기서, “일어나게 하는 요소”는 호흡이 일어나도록 하는 요소들을 뜻합니다. 해설자는 그것을 비유를 통해서 설명합니다. 대장장이(blacksmith)가 불이 필요할 때 그는 풀무를 씁니다. 여기 풀무가 있고, 풀무 끝에 대롱(spout)이라고 불리는 것이 있고, 그리고 대장장이의 노력이 있습니다. 이들 세 가지 것 (풀무, 대롱과 대장장이의 노력)에 따라, 바람이 생겨서 불을 만듭니다. 같은 방식으로, 호흡을 생기게 하기 위하여, 수행자는 육체적 몸, 코 구멍,과 마음이 필요합니다. 이들 세 가지 것에 따라, 각개의 호흡이 몸에서 생겨집니다. 그것들 없이, 호흡이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들 세 가지를 “호흡을 일어나게 하는 요소”라고 부릅니다. 수행자가 호흡에 대한 위빠싸나 수행을 할 때, “몸이 있기 때문에, 코 구멍이 있기 때문에, 그리고 마음이 있기 때문에, 이 호흡이 있다”는 생각이 가끔 떠오를 것입니다. 수행자가 이것을 정관 할 때, 수행자가 호흡을 “일어나게 하는 요소”를 관찰한다고 말해 집니다.
“살아지게 하는 요소”는 정반대를 뜻합니다. 육체적 몸이 없을 때, 호흡이 있을 수 없습니다. 코 구멍이 없을 때, 호흡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마음이 없을 때, 호흡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들 세 가지--몸의 붕괴, 코 구멍의 파괴, 와 마음 기능의 정지--를 호흡을“살아지게 하는 요소”라고 합니다. 그래서, 수행자가 이들 세 가지 요소를 관찰 할 때, 수행자가 호흡을 “살아지게 하는 요소”를 관찰한다고 말해집니다. 그리고 수행자가 여섯 가지 요소모두를 관찰하고 있을 때, 수행자가 호흡을 “일어나게 하는 요소”와 “살아지게 하는 요소”를 함께 관찰한다고 말해집니다.
이것은 수행자가 일부러 이들“일어나게 하는 요소”와 “살아지게 하는 요소”를 찾아야 한다고 해석하지 말아야 합니다. 뜻하는 바는 수행하는 동안 이들 요소에 대한 생각이 일어 날 때, 수행자는 호흡을 “일어나게 하는 요소”또는“살아지게 하는 요소”를 단지 알아보기만 해야합니다. 이 해석은 오래된 주석서(註釋書)에 담겨있습니다.
마하시 사야도께서 추가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분은 호흡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관찰하는 것도 이 구절에서 뜻하는바 라고 말했습니다. 팔리어로 “일어나게 하는 요소”는 사무다야 담마 (samudaya dhammas)입니다. 그것은 “어떤 것을 일어나게 하는 요소들”을 뜻할 수 있고 또한 “일어나는 상태 또는 성질” 또는 단지“일어남”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살아지게 하는 요소”도 마찬가지입니다. 팔리어로 “살아지게 하는 요소”는 바야 담마 (vaya dhammas)인바 “어떤 것을 살아지게 하는 요소들”을 뜻할 수 있습니다. 또한 “살아지는 상태” 또는 단지“사라짐”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큰스님의 의견으로는, 호흡이 일어남을 조금씩, 매순간 그리고 어떤 곳(코 끝에 닿는 호흡 같은 것)을 면밀히 관찰하는 수행자는 호흡의 사무다야 담마 (samudaya dhammas) 즉 호흡의 일어남을 관찰한다고 말해집니다. 또한, 호흡이 사라짐을 조금씩, 매순간 그리고 어떤 곳(코의 끝에 닿는 호흡 같은 것)을 면밀히 관찰하는 수행자는 호흡의 바야 담마 (vaya dhammas) 즉 호흡의 사라짐을 관찰한다고 말해집니다.
수행자가 호흡을 관찰할 때, 수행자는 우선 호흡의 시작을 보고, 다음에 호흡의 끝을 그리고 그것이 사라짐을 봅니다. 수행자가 면밀히 관찰 때, 수행자는 호흡이 일어나고 사라짐을 앎니다. 그래서, 수행자가 호흡의 일어나고 사라짐의 요소들을 볼 것이라는 것 보다 는 호흡의 일어나고 사라짐을 볼 것이라는 것이 더 자연스럽고 더 있음직 합니다. 그렇다고, 수행자가 수행 중에 일어나고 사라짐의 원인을 보는 것을 제외할 수 없습니다. 이래서, 이 구절에서 두 가지 설명모두 적절합니다. 두 번째의 뜻으로는, 번역은 다음과 같을 수 있습니다:“수행자는 호흡의 몸통을 일어나게 하는 성질을 관찰하며 지내고, 또는 호흡의 몸통을 살아지게 하는 성질을 관찰하며 지내고, 또는 호흡의 몸통의 일어남과 살아지는 성질들을 함께 관찰하며 지냅니다.”
또한 “오직 호흡의 몸통(breath body)만 있다”고 하자마자 그의 마음챙김이 자리잡게 됩니다.
이 경전에서 카야(kaya)라는 말은 많은 용도가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 뜻을 해석해야합니다. 여기에 호흡에 대한 장(section)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카야(kaya), 몸(body), 이 라는 단어가 보일 때마다 그것은 “호흡의 몸통(breath body)”이라는 뜻이라고 이해해야합니다. 그래서, 수행자가 호흡에 대하여 마음을 챙길 때, 그들의 마음챙김은 “오직 호흡의 몸통만 있다”에 자리잡게됩니다. 수행자가 마음을 호흡에 둘 때, 호흡이외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오직 호흡만 있고, 사람도 없고, 아무존재도 없고, 여자도 없고, 남자도 없고, 개인도 없고, 나도 없고, 나에 관한 아무 것도 없고, 영혼도 없고, 영혼에 관한 아무 것도 없고,
그리고 다른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직 호흡만 있으며 아무도 호흡을 규제하거나 호흡에 대하여 명령하거나, 호흡을 만들지 않고, 다만 호흡이 있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마음챙김이 자리잡습니다.
그리고 더 높은 앎과 마음챙김에 없어서는 안될 정도로 마음챙김이 자리잡힙니다.
이것은 더 높은 지식과 마음챙김을 목적으로 “오직 호흡의 몸통(breath body)만 있다”는 마음챙김이 자리잡는다는 뜻입니다. 수행자가 위빠싸나 수행과 같은 호흡 수행을 할 때 수행자는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낮은 단계의 앎에서 더 높은 단계의 앎으로 그리고 가장 높은 앎으로 나아갑니다. 수행자가 더 높은 단계의 앎과 집중으로 계속 나아가도록 돕기 위하여 마음챙김이 자리잡습니다. 수행자가 “오직 호흡만 있다”는 것을 깨닫지 않고 이 호흡이 영원하다 또는 소유자, 영혼, 또는 자아, 또는 어떤 영원한 실체를 가졌다고 이해할 때, 수행자는 위빠싸나 앎(knowledge)의 길로 전진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호흡의 몸통만 있다”라고 알아차림이 앎의 계발을 위하여 필요한 것입니다.
갈망과 그릇된 견해에 의하여 어떤 것에 의존하거나 (또는 집착하지)않고 그는 지냅니다.
출처: http://www.vmcwv.org/bbs/board.php?bo_table=menu3_3&wr_id=53&page=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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