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운조사(開雲祖師)가 중국의 불공화상(不空和尙)으로부터 경을 전해 받아....
지금까지 170년 전 경상북도 상주(尙州) 땅에 개운(開雲)이라는 스님이 있었다. 그 당시에 스님도 많았고, 스승도 많았지만 진짜 스승다운 스승을 만날 수가 없어 천일(千日)을 기도드리는 중에 훌룡한 스승으르 만날 수 있기를 일심으로 기원하였다.
약 1년이 지났는데 어디선가 남루한 옷을 입고 문둥이 스님이 나타나서 같이 공부를 하자고 하는데 냄새가 나서 누구든지 곁에 가기가 싫을 정도였다. 그러나 싫다고 하지 않고 살면서 매일같이 지극지성(至極至誠)으로 모셨다. 아무리 극진하게 대접을 해도 툭하면 투정을 부리고 달려들어 때리기도 하니 같이 있는 사람이 참고 인내하기가 어려웠지만 개운은 끝까지 못마땅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느날 그 문둥이 스님이 개운 앞에 나타났는데 별안간 금빛으로 화하여 감히 똑바로 쳐다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금빛으로 변한 문둥이 스님이 묻기를,
“내가 네 스승이 될 만하지 않느냐?” 하니 개운이 그 자리에서 백배사례(百拜謝禮)하며
“과연 스승님이십니다.”
“너는 이제 도(道)를 닦을 그릇이 되었다. 때려도 싫어하지 아니하고 칭찬해도 좋아하지 아니하니, 너는 마음을 항복받아 도를 전해 받아도 되느니라.”
그리하여 그믐밤에 이끄는대로 쫓아 뒷산으로 올라가닌 별안간 사방이 대낮같이 밝아지며 어느새 바위 위에 한 집이 생겼는고로, 그 위에 올라 자세한 설법을 듣게 되었다. 때가 되면 하늘에서 밥이 와서 그것을 먹으며 처음으로 세상에서 해보지 못한 공부를 하게 되었다. 7일 만에 책 세 권을 내놓으면서 그 문둥이였던 스님이 자신의 내력을 말했다.
“나는 중국의 불공화상(不空和尙)이다. 너의 공부하고자 하는 마음이 극진한 고로 내가 문둥이 모습으로 너를 시험하였었노라. 이 책을 공부하되 지금을 알릴 대가 아니요 150년 이후에 세상에 전해야 할 책이니라.”
불공화상이라 하면 지금으로부터 약 1300년 전 중국에서 삼장법사(三藏法師)로 칭하던 유명한 고승(高僧)으로, 태생은 북인도(北印度) 사람이요, 불경을 많이 번역했던 분이다. 불공화상이 천여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개운스님 앞에 경(經)을 전하다니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개운스님이 불공화상과 작별하고 나서, 증표로 받은 세 권의 책을 가지고 20년간을 수도하여 드디어 3과(三果)를 증득하니 그 몸에서 빛이 나는 고로 사람들이 이상히 여겨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개운스님이 도를 이루었다는 소문이 나자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드는 고로 발 디딜틈이 없을 지경이었다.
스님은 지금 당장 중생들에게 법을 설한댓자 참다운 중셍구제가 못 된다는 것을 아시고, 오직 불공화상께 받은 책 세 권을 잘 보존해야 되겠기에 천정 위에 책을 얹고 도배를 한 다음, 큰 용을 불러다가 때가 될 때까지 그 곳을 지키게 하였다. 그러자 전에는 아무 것도 없었던 바위가 갈라지며 개울이 생기고 큰 용이 나왔다. 스님이 바위 위에 주먹으로 동천이라는 글씨를 쓰니 바위가 마치 진흙처럼 되어서 지금도 그 글씨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다. 상주 하북에서 원직사로 가는 도중에 그 바위가 있다.
그리고 나서 스님은 그곳을 떠나 지리산 묘향대로 갔다고 하나 사람들은 찾을 수가 없었다 하며, 후에 스님을 開雲祖師라 칭하여 그 이름을 높이 받들었다.
그로부터 약150여 년의 세월이 흘러 책이 세상에 나올 때가 되자 우연히 양성(暘星)이라는 스님이 그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양성스님은 지금도 산에 은둔해 계신는 불문(佛門)에서는 잘 알려진 고승(高僧)이다. 책을 살펴보니 참으로 세상에는 없는 진귀한 것인데 한 권은 보현보살(普賢菩薩)의 구두비결(口頭秘訣)이라고 했고, 다른 두 권은 능엄경(楞嚴經)인데 보통의 능엄경과 원문(原文)은 같았으나 주해(註解)는 전혀 다른 책이었다. 이 책이 귀중한 책이니 그냥 둘 수 없다 하여 청담스님과 고암스님이 서문을 쓰고 양성스님이 발문을 붙여 몇십 권을 만들어 도(道) 공부하는 사람들 몇몇이 나누어 보는 중에 본인도 한 권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귀한 책을 얻게 되자 처음에는 큰 기대를 걸고 책을 펼쳐 보았으나 「능엄경」두 권에서는 별 특별한 것을 발견하지 못하였고, 「선불가진수어록(仙佛家眞修語錄)」은 사용하는 말이 조금씩 달라서 그런지 도학이 깊지 못한 나로서는 막연하기만 하고 잘 이해 할 수 없는구절이 많아 그다지 큰 진전을 얻지 못하였다. 그러나 웬일인지 여기에는 어떤 감추어진 큰 뜻이 있으리라는 기대가 끊이지 않으므로 내 자신이 정성이 부족했다고 생각을 하고 참회(懺悔)의 기도를 하기로 작정하였다.
2. ...기존의 종문(宗門) 종파(宗派)에 매이지 않고 유불선(儒佛仙)을 종횡으로 꿰뚫는 것이 가히 비전(秘傳)의 진수(眞髓)라 할 만한 것이었다...
새로이 발심을 내어 미륵존불(彌勒尊佛)님께 매일 예배하고 목욕제계(沐浴薺戒)하며, 일심참회(一心懺悔)하기를 1년 가까이 하는 동안 거치른 음식 한 끼로 굶주림을 면하고 청수(淸水)를 양식 삼아 기도생활을 계속하였다.
무릎을 꿇고 금강좌(金剛座)로 앉아 치성을 드리는 중에 문득 정(定)에 들어 선불가진수어록(仙佛家眞修語錄)을 관하여보니 그 안에 있는 알지 못했던 뜻이 드러나 보이기 시작하는데, 그 뜻이 원대하며 기존의 종문(宗門) 종파(宗派)에 매이지 않고 유불선(儒佛仙)을 종횡으로 꿰뚫는 것이 가히 비전(秘傳)의 진수(眞髓)라 할 만한 것이었다. 또한 이는 세상에서나 절간에서 배우던 것과는 다른 점이 있어 마음 속으로 놀라는 바이기도 했다.
선정(禪定)에 들어 먼저 책이 보이고, 처음에 눈앞에 나타난 구절은 너무나 평범한 것이었다. 그러나 거기에서 실망하여 문맥을 놓쳤더라면 그 다음 구절로 이어지지 않았을 것이며, 후에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에 감춰진 엄청난 비밀을 찾아낼 수도 없었을 것이다.
<仙佛家眞修語錄中>
仙佛道始終之戒 婬殺盜也
선도와 불도의 처음이나 마침이나 지켜야 할 계는 음행하고 살생하고 도적질하는 것이 가장 큰 죄가 된다.
너무나 귀가 닳도록 들었던 구절이다. 음행하고 살생하고 도적질하는 자는 도를 구할 자격이 없다. 그런 행동, 그런 언어, 언어나 행동 이전에 마음으로도 이것을 범하고 있지는 않는가? 과연 도(道)한다는 우리가 얼마나 이러한 것들을 절실하게 지키고 있는가? 다시본문으로 돌아가서
「선도(仙道)와 불도(佛道)의 처음이나 마침이나.........」
선도라고 하니까 불도와 크게 다른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실은 그 근본을 따져 보면 똑같은 것이다. 굳이 분류하여 논한다면 도라는 것은 유(儒)와 불(佛)과 선(仙)으로 나누어 볼 수 있지만 결국 유불선은 다 붙여진 이름이요, 진실한 도(道)가 하나만 나오게 되면 이들 셋의 이름이 합하여 하나가 될 것이다. 모름지기 그 이름에 집착하여 뜻을 잃어서는 안될 것이다.
「처음이나 마침이나 그 계(戒)는 같은 것이다.」깊이 새겨볼수록 사무치는 구절이다. 그렇다. 참다운 도(道)란 하나로 일관되어 있는 것이다.
‘나는 이제 깨달았으니 자유롭게 만행(萬行)을 해도 걸림이 없으리라’하고 한번 잘못 생각하여 이 계를 놓치게 되면 평생의 공덕이 수포로 돌아가고 오히려 헤어나올 수 없는 깊은 수렁에 떨어지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도를 행하는 자의 근본 자세는 청정한 계행(戒行)에 있다. 이것은 결단코 낡은 율법이 아니라 오히려 새롭게 새기고 또 새겨야 할 황금율(黃金律)이다.
若戒行淸淨 邪慢永絶則 眞師自降
만약 계행이 청정하고, 삿되거나 아만함이 영영 끊어진다면 진실한 스승이 스스로 찾아올 것이다.
그러나
廢戒自滿者 千拜萬告 眞師何感乎
계를 폐하고 자만하는 자는 천 번 절하고 만 번을 고한들 어찌 진실한 스승이 감응하겠는가?
少少出家 修道爲名 然 不遇眞師
일찍이 젊어서 출가하여 도를 닦는다고 이름하나 진실한 스승을 만나지 못하면
晧首無成 其罪何在
머리가 하얗게 세도록 도를 이루지 못하니 그 죄가 어디에 있는가?
都是不守戒之大悖也 不虛心之自失也
모두 다 계를 지키지 못하여 크게 거스른 까닭이다. 마음을 비우지 않아서 스스로 실패한 것이다.
愼之愼之 佛法者解脫生老病死之道也
이를 삼가고 삼가하라, 불법(佛法)이란 나고 늙고 병나고 죽는 이것을 해탈하는 도이니라.
그렇다. 불법이란 한마디로 말해서 나고 늙고 병들어 죽는, 이것을 초월해 보자는 것이다. 그 굴레를 벗어나 보자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성인(聖人)이라 하는 사람들은 나고 늙고 병들어 죽는 것을 해결하고 있는가? 절에 다니는 사람들은 다 해결했는가? 승복 입고 머리 깍은 이들은 다 해결했는가? 이것이 문제인 것이다.
道란 무엇인가? 온전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본래 인간은 오늘날과 같이 탐진치(貪瞋癡)에 찌들은 이런 볼품 없는 모습이 아니었다. 사람이 본래 부처님이었으며, 본래 신선이었다. 그러므로 이 우주 법계(法界)를 자유자재(自由自在)로 왕래하며 한 가지 밝은 지혜로써 이 모든 우주의 법을 다 통하는, 불생불멸(不生不滅)하는 존재였다. 그러나 그와 같은 본래의 마음에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마음이 들어와 죽음이 생기고, 고통이 생기고, 육도윤회가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사람이면 누구나 다 그 근본은 지존(至尊)하신 부처님인지라 하루 바삐 자신 속의 부처을 깨달아 성불하는 것이 무엇보다 급한 일인 것이다. 그렇게 되찾아진 모습이야말로 인간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이며, 불성이며, 그 성품을 가리켜 성(聖)이라 한다.
그 곳에 이르는 길에는 크게 셋이 있다. 이름하여 유.불.선이다.
儒則聖之任
유교는 성스러움의 임(任)이요.
釋則聖之和
석가세존의 도는 성스러움의 화(和)요,
仙則聖之淸
선도는 성스러움의 청이다. 청(淸)은 회상의 것을 뜻한다.
全體之大道也
전체를 통합하는 것이 대도다.
유교는 성스럼움에 임하는 것이라 했다. 말하자면 입문(入門)하는 격이다. 불교는 성스러움에 조화(調和)하는 것이다. 성스러움에 친해지는 것을 말한다. 선(仙)은 성스러움이 맑게 드러나는 것이다. 꽃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仙을 통해서 儒와 佛은 통합될 수 있다. 그리하여 유.불.선을 합하여 하나로 만드는 것이며, 대도(大道)가 나와야 인생의 근본문제인 생로병사(生老病死)가 해결된다. 그저 아픈 마음의 위로가 아니라, 늙고 병들고 죽는, 이 온갖 인생고(人生苦)의 실질적인 해결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종교이며, 진실한 도의 시작이며 또한 마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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