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원효의 생애
(617 - 686)
제1절 원효! 그리운 성사
1. 원효의 전기
원효성사(元曉聖師: 617-686)의 생애에 대한 자료는 몇 편의 전설적인 기록과 함께 많지는 않습니다. 고려 숙종대에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이 건의하여 화쟁국사(和諍國師)로 추증(追贈)하고(1101), 그 뒤 명종대(1171-1197)에 분황사(芬皇寺)에 화쟁국사비를 건립하였다고 전하지만, 산실되어 남아 있지 않습니다. 현재 남아 있는 성사의 전기(傳記)에 관한 자료는 다음의 세 가지 뿐입니다.
하나는 고선사서당화상비(高仙寺誓幢和尙碑)입니다. 이 비는 원효(元曉)의 손자 설중업(薛仲業)이 각간(角干)의 벼슬에 있던 김언승(金彦昇)에게 건의하여 후대인 신라 애장왕대(800-808)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김언승은 훗날 헌덕왕(809-825)이 되었습니다. 옛 고선사는 현재 경북 덕동댐 공사로 수몰되어버린 곳에 있었던 절입니다. 1915년 그 일부만 발견되어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둘은 <송고승전(宋高僧傳)>입니다. 송나라 승려 찬영(贊寧: 918-999)이 왕명을 받아 982년에 시작하여 988년에 30권으로 완성한 것입니다. 이 가운데 <원효전(元曉傳)>이 있습니다.
셋은 <삼국유사(三國遺事)>입니다. <삼국유사>는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년 김부식 지음)>와 더불어 한국 고대사를 알 수 있는 소중한 역사서 가운데 하나입니다. 고려 일연(一然: 1206-1283) 스님이 <삼국사기>에 빠진 역사의 사건들을 모아 기록한(1278-1282무렵) 것입니다. 대부분 불교에 관한 일들입니다. 이 가운데 <원효불기> 편이 있습니다. “원효불기(元曉不羈)”란 원효는 자유의지를 구속받지 않고 어떤 경계에도 메이지 않아 걸림이 없다는 뜻입니다.
위의 세 자료에 있는 성사의 생애 및 관련된 기록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세 곳에 중복된 것은 시대별로 정리하고 비문에서 산실된 부분은 성사의 삶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보충하였습니다.
2. 밤나무골의 상서로움
원효의 속성은 설씨(薛氏)입니다. 할아버지는 잉피공(仍皮公)이라는 벼슬을 하였습니다. 그 옛날에는 적대연(연못) 옆에 잉피공의 사당이 있었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담날내말(신라 17관등의 11위)이라는 벼슬을 하였습니다.
원효는 신라 진평왕 39년(617)에 압량군 불지촌(押梁郡 佛地村: 지금의 경산군 자인면) 밤나무골 사라수 아래서 태어났습니다. 어렸을 때 이름은 서당(誓幢) 혹은 신당(新幢)이라 불렀습니다. 법명은 원효(元曉), 법호는 화쟁(和諍)이며, 16세 무렵에 출가하였습니다.
원효가 태어난 마을을 불지촌(佛地村: 혹은 구릉) 혹은 발지촌(發智村)이라고도 불렀는데, 사라수(娑羅樹)라는 나무와 출생에 관한 이야기가 함께 전해지고 있습니다. 성사의 집은 본래 골짜기 서남쪽에 있었습니다. 애초에 그 어머니가 흐르는 별이 품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잉태하였습니다. 그 어머니가 임신하여 이미 만삭인데 마침 마을 부근 골짜기에 있는 밤나무 밑을 지나 가다가 갑자기 출산을 하게 되자 몹시 급해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해산하려 할 때 오색 구름이 그 거처를 덮었습니다. 상서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남편의 옷을 나무에 걸고 그 안에서 살아 지냈기 때문에 이 나무를 사라나무라 했다는 것입니다. 그 밤나무에 달린 밤알이 또한 이상하여 오랫 동안 사라밤이라고 불렀다고 전합니다.
옛부터 전해 오기를 옛적에 절을 관리하는 자가 그 절의 종에게 하루 저녁 끼니로 밤 두 알씩을 주었습니다. 이 종이 적다고 관청에 고소하니 관리가 괴상히 여기고 그 밤을 가져다가 조사를 해보니, 밤 한 알이 발우에 가득차게 되므로 도리어 한 알씩만 주라고 판결하였습니다. 이 일 때문에 그 곳을 밤나무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합니다.
원효가 출가한 뒤에는 집을 희사하여 절로 삼고 초개사(初開寺)라고 이름하였으며, 사라나무 아래도 절을 짓고 사라사라 이름하였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원효의 집안을 서울 사람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할아버지 대를 말하는 것이며 그 당시는 서울(경주)과는 조금 떨어진 경산에서 살았습니다.
3. 새벽이 되고자 출가하다
원효가 태어난 곳을 불지촌(佛地村)이라 하고 자신의 집으로 세운 절을 초개사라고 부른 것과 또 스스로 원효(元曉)라고 불렀다고 한 것 등은 모두 불교를 처음 빛나게 했다는 뜻입니다
원효도 역시 지방말이니 당시 사람들은 시골말로 새벽(塞部:새부)이라고 불렀습니다
훗날 사람들은 그 총명함과 영특함을 바라보고 대사의 덕은 전생에 심은 것이며
나면서부터 알아서 남달랐다고 칭송하였습니다. 원효는 총각 머리를 할 무렵에 출가 하였으니 매우 이른, 아마 십오륙세 정도일 것입니다
성사의 출가를 그리며
원효는 출가 이후 시대의 어둠을 바라보며 스스로 지어서 즐겨 부른 노래가 있었습니다
“나는 불교와 이 땅의 새벽이 되리라”
스스로 주인이 되어 걸림없이 살되 족벌과 계급과 권위를 타파하고
민중과 동아리되어 역사를 창조함으로써 정토의 새벽을 열고자 한 큰 뜻이었습니다
이 진실하고 굳은 서원을 일으켜 깨달음과 실천으로 승화되었을 것입니다
4. 원력 깊은 구도행
원효는 출가한 뒤 애초부터 스승을 가까이 하거나 멀리함이 없었습니다.
자비로운 석가모니 부처님이 마치 그림자가 형체 따르듯 하신 것과 같았습니다.
실로 느낄 수 있는 마음을 인하기 때문에 상응하는 이치가 반드시 그러한 것입니다. 위대하고 위대하십니다. 설사 법계를 궁구했다 하더라도 서로가 인가하고 법공의 자리에 올라 전등의 법을 짓고 법륜을 구르게 할 사람 누가 능히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서당화상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대사의 덕은 전생에 심은 것이고, 도는 태어나면서부터 알았습니다.
마음으로 인하여 스스로 깨달았으며 따로이 스승을 쫓는 일이 없었습니다.
성품은 고고하되 크게 자애로왔으며 정이 두터워 어두운 거리를 밝혔습니다.
괴로움을 없애고 고난으로부터 구제하고자 이미 사홍서원을 일으켰으며,
정밀한 이치를 연마하고자 일체 지자(智者)의 마음을 궁구하였습니다.
왕성 서북쪽 작은 절에 머물러 경론 뿐 아니라 참서(讖書)와 외전 등
세상에서 보지 않는 것도 두루 읽었습니다. 사물의 이치를 깨달아 걸림없이 글을 짓고 굳건히 나아가 물러섬이 없었습니다. 계정혜 삼학에 문득 통달하여
만인을 상대할만하다 하였습니다. 성사의 깨달음은 넓고도 깊었으니 실로 신의 경지에 오름과 같았습니다.
5. 마음법을 깨닫다
원효는 650년 34세 되던 해 젊은 의상(당시 26세)과 함께 유학을 가기로 마음 먹고 서해의 어느 해변을 두리번거렸습니다. 그런데 바로 떠나지 못하고 이틀 동안 머물렀습니다. 바로 그 밤에 어둠의 동굴에서 마음법을 깨달은 후, 당나라로 가던 발길을 돌려 이 민족과 동아리되고자 하면서 하늘을 찌르고 저 대륙이 진동하도록 외쳤던 깨달음의 노래가 있습니다.
心 生 故 種 種 法 生 심 생 고 종 종 법 생
心 滅 故 龕 墳 不 二 심 멸 고 감 분 불 이
마음이 생기면 갖가지 법이 생기고
마음이 사라지면 동굴과 무덤이 둘이 아니네!
<송고승전>의 <의상전>에 이르기를
의상이 나이 약관(당시 26세)에 당나라에서 교종(敎宗)이 성행한다는 말을 듣고, 원효법사와 함께 당나라로 유학을 가기로 뜻을 가졌습니다. 일행이 신라의 바닷가 당주(唐州) 경계에 이르러 큰 배를 구하여 바다를 건너려고 하였는데 갑자기 큰 비가 내려 길가의 동굴 속에 들어가 비바람을 피하여 밤을 새우게 되었습니다.
이튿날 새벽녘에 바라보니 바로 무덤 속 해골 옆이었습니다. 비가 계속 내려 한걸음도 나아갈 수 없어서 하루를 더 머무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다시 무덤으로 들어가는 길 안에서 하룻밤을 더 잤는데 밤중에 귀신이 나타났습니다.
원효는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서 “어젯 밤에 잘 때는 동굴이라 여겨서 편안했는데 오늘 밤 잠자리는 귀신 소굴이라는 생각 때문에 저주가 많구나. 그러하니 아! 알겠구나. 마음이 생기면 갖가지 법이 생기는구나! 마음이 사라지면 동굴과 무덤이 둘이 아니네!”라고 외쳤습니다.
“이 세상은 오직 마음먹기 나름이요, 온갖 법은 오로지 인식하기 나름이다. 마음 밖에 달리 법이 없거늘 어찌 밖에서 구하리요, 나는 당나라에 가지 않겠노라”라고 하면서 짐을 챙겨 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의상은 홀로 남아 죽어도 물러서지 않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 이것은 <송고승전>의 기록입니다.
마음법을 깨달은 시기
원효는 유학을 가던 길에서 크게 깨닫고 도중에 돌아왔다고 했는데 이 깨달음의 시기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다릅니다. 여기서는 그에 관하여 몇 가지만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유학을 가고자 했던 동기에 대해서 말하면, 645년에 현장법사(600-664)가 인도에서 17년간(629-645까지)의 유학을 마치고 경전 657권을 가지고 당나라에 돌아왔습니다. 이 때 그로부터 신학문을 배우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8살 아래인 의상(625-702)과 함께 첫 번째 시도를 하였습니다. 첫 번은 650년에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다시 두 번째 시도를 하였는데, 대개 이 때를 첫 번의 시도로부터 11년 후인 661년, 나이 45세가 되던 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두 번째 시도의 해를 정확히 밝히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원효가 요석공주를 만난 시기는 무열왕대인 654-661년 사이었습니다. 나이 38세로부터 45세까지의 시절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요석공주를 만난 후에 유학을 시도한 것이 됩니다. 대개 전해지기로는 요석공주를 만난 후 무애행을 시작했다고 하는데, 무애행이란 진정한 깨달음 이후에 나타나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단순한 광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또 하나, 1차 시도 후 11년 후에 다시 2차 시도를 하였다는 것은 원효의 천부적 능력을 헤아리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650년에 1차 시도에 실패하고, 바로 그 해의 2차 시도 때 마음법을 깨닫고 자신에 넘쳐 유학 길을 포기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사실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서라면 몰라도 마음법을 깨닫기 위해서 유학까지 갈 필요는 없었습니다. 아마 너나없이 유학을 선호하는 것은 자긍심을 잃은 사대주의적 사고도 한 몫 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점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대개 위대한 성인들은 그 깨달음의 시기가 비슷하고 깨달음의 동기 역시 안간힘을 써서 얻는 것이 아니라 단순하였습니다. 이것은 선천적 선근과 혈통이 크게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성인 혹은 선지식의 비문에 혈통과 출가 이전 가문의 상황을 반드시 기록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때문입니다. 원효는 그 행적과 저술 및 사상을 보아서 태어날 때부터 비범한 인물이었습니다. 지혜가 없으면 지혜 있는 자를 알아볼 수 없습니다.
6. 요석공주를 만난 인연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이르기를
스님이 일찍이 어느날 희귀한 행동을 하며 거리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 수허몰가부 아작지천주
누가 자루없는 도끼를 빌려주겠는가
내가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찍으리라
사람들이 아무도 그 노래의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 때 태종(武烈王)이 이 노래를 듣고 “이 스님은 필경 귀부인을 얻어서 귀한 아들을 낳고자 하는구나. 나라에 큰 현인이 있으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때 요석궁에 과부공주가 있어서 왕이 궁의 관리에게 명하여 원효를 찾아 데려오라 하였습니다.
관리가 명령을 받들어 원효를 찾으니 그는 이미 남산에서 내려와 문천교를 지나다가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때 원효는 일부러 물에 빠져서 옷을 적셨습니다. 궁의 관리가 스님을 궁에 데리고 가서 옷을 말리고 그 곳에서 쉬게 하였습니다.
공주는 과연 태기가 있더니 설총을 낳았습니다. 설총은 나면서부터 지혜롭고 민첩하여 경서와 역사에 널리 통달하니 신라 십현(十賢) 중의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방언으로 중국과 신라의 각 지방의 풍속과 물건 이름 등도 훤히 알고 육경(六經)과 문학을 훈독하고 해석했으니 지금도 우리나라에서 경을 강의하는 것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 전수해서 끊이지 않습니다. * 이것은 <삼국유사>에 실린 기록입니다.
의식의 혁명을 요구함
가만히 성사를 그리며 생각해 봅니다. 무열왕대(654-661)에 낡은 정치 무질서한 사회현상을 바라보다가 권좌를 향해 의식의 혁명을 요구하며 알쏭달쏭한 노래를 불렀습니다.
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 주겠는가!
내가 하늘을 받친 기둥을 찍어 버리겠노라!
자루는 지혜요, 도끼는 권력이며, 하늘을 받친 기둥은 세상을 유지하고 이끌어 가는 도의 질서요, 찍어버림은 낡은 질서의 틀을 깨고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고자 하는 의식의 혁명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외침은 전쟁에 시달린 민중의 고뇌를 외면하고, 골품제도(聖骨: 부모가 모두 왕계. 眞骨: 부모 중 한편만 왕족. 무열왕대부터는 진골출신)의 계급사회 그리고 기득권에 안주하는 정치세력과 승단을 향해 의식의 혁명을 요구하는 사자후였습니다. 이 절규로부터 울려오는 천둥소리를 듣지 못하고 한가로이 봄꿈을 꾸는 사랑노래로 착각하여 원효를 파계승으로 폄하하는 것은 안타깝고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원효의 지혜를 아는 자 없으니, 때로는 지혜롭고 때로는 우둔하고, 때로는 자애롭고 때로는 비범한 그의 행동이 범부의 눈에는 기이하게 보였을 뿐입니다.
7. 금강삼매경을 강설한 대들보
신라시대는 일찍이 경론을 강설하는 법회가 성행하였습니다. 문무왕대(661-681)에 원효는 백고좌법회는 초청받지 못했으나,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 논강에 초대받고 강설한 후, 시기와 질투 허위와 가식이 만연하고, 계급사회를 조장하여 권위에 안주하려는 승단을 향해 뼈있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지난 날 백 개의 서까래를 고를 때는 비록 끼이지 못했지만, 이제 대들보 하나를 놓는 데는 나 혼자만이 할 수 있구나!”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 3권의 개요
이 <논>은 책명에서 알 수 있듯이 <금강삼매경>에 대한 원효의 주석서입니다. 처음에는 5권을 지었으나 시기하는 무리에 의해 도난 당한 것으로 전합니다. 그리하여 급히 새로 3권으로 <약소(略疏)>를 지은 것이 현재에 전하고 있습니다. 내용은 이각(二角), 즉 본각(本覺)과 시각(始覺)이 원통하여 보살행을 행하는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이 논은 대개 중국 남북조시대에서 당나라까지 불교계에서 제기되었던 갖가지 교리들를 싣고 그 교설들을 회통하였습니다.
<금강삼매경>을 강설한 일화
<송고승전>에는 많은 분량으로, 그리고 <삼국유사>에는 몇 행 정도로 경을 강설하게 된 동기와 그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송고승전(권4 원효)> 의 기록입니다.
원효는 성은 설씨이며 동해 상주 사람입니다. 총각머리 할 나이에 머리를 깎고 출가 하였습니다. 스승을 좇아 배웠으며 여러 곳을 돌아다녀 일정함이 없었습니다. 힘써 뜻을 굽히지 않았으며, 걸림없이 글을 지었습니다. 씩씩하고 굳세게 나아가며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계정혜 삼학에 통달하였으니, 저 나라에서는 만인을 상대할만하다 하였습니다. 오묘한 이치를 깨달아 신의 경지에 들어갔음이 이와 같았습니다. 일찍이 의상법사와 당나라에 들어가고자 하였으니 현장삼장의 법문을 사모하여서였습니다. 그 인연이 이미 어그러지자 마음 닿는대로 가서 노닐었습니다. 얼마 후에 말도 안되는 소리를 지껄이고, 거칠고 빗나간 행동을 하였으며, 거사와 마찬가지로 술집과 기생집을 출입하는 것이, 보지(保誌)스님이 칼과 쇠지팡이르 차고 다니는 것과 같았습니다. 혹은 소(疏:해설서)를 지어서 <화엄경>을 강설하기도 하고, 혹은 거문고를 뜯으며 사당에서 노래하기도 하였습니다. 혹은 민가에서 자기도 하고, 혹은 산수간에서 좌선하기도 하였습니다. 마음 내키는대로 하니 도무지 일정함이 없었습니다.
당시에 국왕이 백고좌 인왕경법회를 베풀며 두루 큰 스님들을 찾았습니다. 원효의 고향에서는 명망이 있다고 그를 추천하였으나, 뭇 스님들이 원효를 시기하여 왕에게 받아드리지 말라고 건의를 하였습니다.
얼마 지난 후 왕비의 머리에 종기가 났는데 의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효험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대왕과 왕자 그리고 신하들이 산천의 영험스런 기도처에서 빌면서 가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무당이 말하기를 “ 다른 나라에 사람을 보내어 약을 구한다면 이 병은 치료될 것입니다.”하였습니다.
왕이 사신를 보내어 뱃길로 당나라에 들어가 그 나라의 의술을 구하게 하였습니다. 사신이 당나로 가는 도중에 남쪽 큰 바다 가운데서 문득 한 노인이 파도를 헤치고 나타나 훌쩍 배 위로 올라와서는 사신을 맞이하여 함께 바다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사신이 바라보니 궁전이 장엄하고 화려하였습니다. 용왕을 뵙게 되었는데 이름을‘금해’라 하였습니다.
용왕이 사신에게 말하기를 “너희 나라 왕비는 ‘청제왕’의 셋째 딸이다. 우리 궁중에 <금강삼매경>이 있으니 이각(二覺)이 원통하고 보살행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제 왕비의 병을 증상연(增上緣)으로 삼아 이 경전을 부촉하노라. 너희 나라로 가서 유포할 것이니라.”하였습니다.
그리고 30장 가량의 중복되거나 흐트러진 경전을 사신에게 맡기며 다시 말하기를 “이 경전이 바다를 건너는 도중에 잘못 될까 염려스럽구나”하였습니다. 그런 후 왕이 칼잡이를 시켜 사신의 장단지를 째고 그 속에 경를 넣은 다음 밀랍 종이로 싸서 약을 발랐더니 원래대로 상처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용왕이 말하기를 “대안(大安) 성자가 순서를 꿰매고 원효를 청하여 <소(疏:해설서>를 지어 강설한다면 부인의 병은 틀림없이 나을 것이니 설산의 아가타약이라 할지라도 약효가 이것만은 못할 것이니라” 하였습니다. 용왕이 바다 위까지 배웅하여 마침내 배에 올라 귀국하였습니다.
그 때 왕이 이 이야기를 듣고 기뻐하여 먼저 대안성자를 불러 편집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대안은 헤아리기 어려운 사람이었습니다. 모습과 의복이 특이하고 항상 시장터에서 구리로 된 발우를 두드리며 대안! 대안!하고 소리쳤기 때문에 “대안”이라고 이름하였습니다.
왕이 대안에게 하명하자 대안이 말하기를 “그냥 경전만 가져다 주십시오. 왕궁에는 들어가고 싶지 않습니다.”하였습니다.
대안이 경을 받아 배열하여 8품을 이루니 모든 부처님의 뜻에 합치되었습니다. 대안이 말하기를 “속히 원효에게 가서 강설하도록 하시오. 다른 사람은 안되오.” 하였습니다. 원효가 이 경을 받은 곳은 출생지인 상주였습니다.
원효는 왕이 보낸 시자에게 말하기를 “이 경은 본각(本覺)과 시각(始覺)을 종지(宗旨)로 삼았으니, 나를 위하여 소가 끄는 수레를 준비해서 두 뿔 사이에 붓과 벼루를 두시오.”하였습니다.
원효는 처음부터 끝까지 수레 위에서 <소(疏:해설서)> 5권을 완성하였습니다. 왕이 날을 택하여 황룡사에서 강설할 것을 부탁하였습니다. 그 때 야비한 사람들이 지어 놓은 <소>를 훔쳐 가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왕에게 사실을 알리고 3일을 연장하여 다시 3권을 짓고 <약소>라 불렀습니다. 강설하는 날에는 왕과 신하, 스님과 신도들이 법당에 구름같이 모여 들었습니다. 여기서 원효는 열변을 토했는데 위의가 있고 얽힌 것을 풀이하는데 법칙이 있었으며, 찬탄하여 손가락을 튕기자 소리가 허공을 울렸습니다.
원효가 강설을 마칠 무렵 다시 큰 소리로 말하기를 “지난날 백 개의 서까래를 고를 때는 비록 끼이지 못했지만, 이제 대들보 하나를 놓는 데는 나 혼자만이 할 수 있구나”라며 일성을 토하자 참석하였던 큰스님네들이 모두 얼굴을 숙이며 부끄러워 하였습니다.
애초에 원효의 행동에 항상됨이 없었고, 중생교화에 일정함이 없었습니다. 혹은 소반을 던져 대중을 구하기도 하고, 혹은 물 뿜어 불을 끄기도 하고, 혹은 여러 곳에 모습을 나타내기도 하고, 혹은 사방에 죽음을 알리기도 하였으니 , 이 또한 배도(盃渡)나 보지(保誌)와 같은 부류가 아니겠습니까. 그 성품이 두루하여 밝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소(疏)>에 광,약 두 본이 있는데 모두 본국에서 유행한다고 합나다. <약소(略疏)>는 본국에도 전해져 훗날 경을 번역하는 삼장법사가 고쳐 <논>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8. 일체무애인 일도출생사
원효성사는 이미 계를 잃어 설총을 낳은 후로는 속인의 옷을 바꾸어 입고 스스로 소성거사(小姓居士)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우연히 광대들이 가지고 노는 큰 박을 얻었는데 그 모양이 기이하였습니다. 스님은 그 모양을 따라서 도구를 만들어<화엄경> 속에서 말한 “일체 무애인 일도 출생사”(一切無碍人 一道出生死)라는 문구를 따서 이름을 무애(無碍)라 하고 노래를 지어 세상에 유포하였습니다. “일체에 걸림임이 없는 사람이 한 길에서 생사를 벗어난다”는 것입니다.
일정한 거처가 없이 마음 닿는대로 유행하였으며, 비범한 언행에 사람들이 이상히 여겼습니다. 일반인들처럼 술집과 기생집을 출입하는 것이 양나라 보지(保誌: 신통으로 유명함)스님이 칼과 쇠지팡이를 차고 다니는 것과 같았습니다. 거문고를 뜯으며 사당에서 노래하기도 하고, 민가에서 자기도 하고, 산수간에서 좌선하기도 하였습니다. 마음 내키는대로 하니 도무지 일정함이 없었습니다. 애초에 행동에 있어서 변화가 많았고 중생교화에 일정함이 없이 자유자재하였습니다.
게으름을 꾸짖어 정진하게 하고 능히 신통한 일을 보이되 법에 집착함이 없었습니다. 쟁반을 던져 당나라 선성사 화재를 막아 대중을 구하기도 하고, 물을 뿜어 불을 끄기도 하고, 물을 부어 연못을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여러 곳에서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고, 사방에 죽음을 알리기도 하고, 남쪽에서 강설하고 봉우리에 이르러 허공을 오르기도 하였으니 보통 스님들과는 크게 달랐습니다. 그러나 그 성품이 두루하여 밝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성사의 신이한 일들을 감히 형상화할 수 없고 기틀은 원대하여 더욱 알 수 없었습니다.
<화엄경소>를 지어 강의하기도 하고, 염불의 깊은 뜻을 전하기도 하였습니다. 근처에서 염불수행을 하는 엄장이 찾아와 왕생할 수 있는 염불법을 묻자 삽관법(揷觀法: 삽을 관하는 법)을 지도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염불법은 관상염불입니다.
9. 한없는 보살행
원효는 한없는 보살행으로 밤낮없이 바쁘게 활동하였습니다.
어느날 마을 사람들이 산을 바라보니 하얀 새들이 가득히 앉아 있으므로
이상하게 여겨 올라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은 새가 아니라 흰 헝겁 조각들이었습니다.
스님이 너무 바쁘게 다니다보니 옷이 소나무에 찢겨서 매달린 모습이
하얀 새들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그 후 사람들은 스님이 백 가지 소나무에 옷을 걸었다 하여 백송(百松)이라 불렀습니다.
진실로 민중의 희망이요 정토를 밝히는 새벽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모습을 보고 원효를“초지보살”이라 불렀습니다.
사복을 연화세계로 보낸 신통
서울 만선북리에 있는 과부가 남편도 없이 태기가 있어 아이를 낳았는데 나이 열두살이 되어도 말도 못하고 일어나지도 못하므로 사동(蛇童)이라고 불렀습니다. (그의 이름은 사복(蛇福)이다) 어느날 그의 어머니가 죽었습니다. 그때 원효스님은 고선사에 있었습니다. 사복이 원효스님을 찾아가니 원효스님은 그를 보고 맞아 인사를 하였으나 사복은 답례도 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와 내가 옛날에 경전을 싣고 다니던 암소가 이제 죽었으니 나와 함께 장사지내는 것이 어떻겠는가.”
원효스님은 “좋다”하고 함께 사복의 집으로 갔습니다. 여기서 사복은 원효스님에게 수계의식(포살)을 행하여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계를 주게 하니 원효스님은 그 시체 앞에서 수계하고 축원을 하였습니다.
“세상에 나지 말것이니 죽는 것이 괴로우니라. 죽지 말것이니 세상에 나는 것이 괴로우니라.” 하고, 말하자 사복이 축문이 너무 번거롭다고 하여 원효스님은 고쳐서 말했습니다.
“죽는 것도 사는 것도 모두 괴로우니라” 잘라 말했습니다.
이에 두 사람은 상여를 메고 활리산 동쪽 기슭으로 갔습니다. 원효스님은 말했습니다.
“지혜있는 호랑이를 지혜의 숲속에 장사지내는 것이 또한 마땅하지 않겠는가”
사복은 이에 게송을 지어 말했습니다.
“옛날 석가모니 부처님은 사라수 사이에서 열반에 드셨네
지금 또한 그와 같은 이가 있어 연화장세계로 들어가려 하네”
말을 마치고 띠풀의 줄기를 뽑으니 그 아래 명랑하고 청허한 세계가 있는데 칠보로 장식한 난간에 누각이 장엄하여 인간 세계가 아닌 것 같았습니다. 사복이 시체를 업고 그 속에 들어가니 갑자기 그 땅이 합쳐져버렸습니다. 이것을 보고 원효는 그대로 돌아왔습니다. 후에 사람들이 그를 위해서 금강산 동쪽에 절을 세우고 절 이름을 도량사라 하여 해마다 3월 14일이면 점찰법회를 여는 것을 상례로 삼았다고 합니다. 사복이 세상에 나타낸 일은 오직 이것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민간에서는 황당한 이야기를 덧붙였습니다. 가소로운 일입니다. 이것은 <삼국유사>의 기록입니다.
10. 깨달음과 사상을 기록하다
원효는 왕성 서북쪽의 작은 절에 머물면서 외전과 더불어 수많은 경론을 열람하고 해설하며, 자신의 깨달음과 그 사상 및 실천원리를 기록하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십문론(十門論)>이 뛰어났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세상에 계실 때는 원만하고 두루하신 말씀에 의지하였기 때문에 의혹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성인이 가신지 오래된 지금에는 사람들이 번뇌가 무겁고 깊어서, 삿된 견해가 비처럼 어지러이 뿌리고 쓸데없는 공론이 구름처럼 흩어졌습니다. 어떤 사람은 내가 옳다하고 다른 사람은 그르다 합니다. 서로가 자신의 주장만을 내세웁니다. 말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끝이 없었습니다.
원효는 이런 일들을 안타깝게 여기고 다툼을 화해하고자 필을 들어 서술하였습니다. 그 글은 산을 바라보고 깊은 골짜기로 돌아간 것 같았고, 나무를 버리고 큰 숲을 보게 한 것과 같았습니다. 비유하자면 청색과 쪽풀은 본체가 같고, 얼음과 물은 그 근원이 같으며, 거울이 수많은 형상을 받아드리고, 물이 천 갈래로 갈라지는 것과 같았습니다. 갖가지 비유를 들어 다툼을 화해하고 융통하게 서술하여 그 이름을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이라 하였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모두 말하기를 '참 훌륭하다' 하였습니다. <십문화쟁론>은 이와 같은 10문으로 구성되었습니다.
1. 삼승일승화쟁문(三乘一乘和諍門)
2. 공유이집화쟁문(空有異執和諍門)
3. 불성유무화쟁문(佛性有無和諍門)
4. 인법이집화쟁문(人法異執和諍門)
5. 삼성이의화쟁문(三性異義和諍門)
6. 오성성불의화쟁문(五性成佛義和諍門)
7. 이장이의화쟁문(二障異義和諍門)
8. 열반이의화쟁문(涅槃異義和諍門)
9. 불신이의화쟁문(佛身異義和諍門)
10. 불성이의화쟁문(佛性異義和諍門)
원효는 여기서 자신이 저술한 의도를 “백가의 서로 다른 쟁론을 화해시켜 한 맛인 법의 바다로 돌아가게 한다”(和百家之異諍 歸一味之法海)라고 밝힘으로써 화쟁사상의 논리를 천명하였습니다. <화엄종요(華嚴宗要)>는 이치는 비록 하나를 으뜸으로 하지만 이해와 실천에 따라서 수행계위를 논하였으니 다 함께 찬탄하고 춤추며 기뻐하였습니다. 이것은 중국에까지 전해졌으며 삼장법사도 보배로 귀중히 여겼습니다.
고선사서당화상비에서 극찬하였던 <십문화쟁론>은 단편만 남아 있고, 일심사상을 설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화엄경소>는 전10권 중에 안타깝게도 서문과 권3 한 권만 남아 있어서 전체 내용을 파악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러 저술에서 성사의 일관된 사상이 역력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원효는 자신이 깨달은 일심과 더불어 <기신론>의 논리를 인용하여 사상을 집약한 것으로 봅니다. 대승의 유일한 법으로 “일심법(一心法)”을 세우고 교문은 진여문에 의지하여 지행(止行)을 닦고, 생멸문에 의지하여 관행(觀行)을 일으키는 일심이문(一心二門)을 정립하였습니다. 그리고 일심이문에 의거하여 다툼을 화해함으로써 통하게 하고 몸소 실천하였습니다. 불법에 귀의한 모든 사람들은 다 함께 여래장(如來藏)을 품었으니, 보리심의 원을 세워 광대한 일심의 바다, 그 근원으로 돌아가야한다는 당위성을 집필하고, 인도하는데 몸과 마음을 바쳤던 것입니다.
11. 나무아미타불을 부르시오
원효는 천촌만락을 두루 유행하되 박들고 노래하고 춤추며 교화하였네
순박하나 우매한 곳곳 사람들에게 모두 부처의 명호를 알게 하고
함께 아미타불을 부르게 하였으니 자비로운 은혜는 참으로 위대하였네
민중에게 부처의 명호를 가르친 방편 오늘날 깊이 새겨야 할 교훈이라네
통일과 희망을 염원하는 민중들 그때나 지금도 영원히 부를 노래는
믿음으로 부르는 나무아미타불이니 불자는 부처의 명호를 불러야 하네
극악의 죄인이라도 진실로 참회하고 부처님과 정토를 한없이 염원하여
일념으로 부르고 십념으로 정진하면 반드시 일심정토에 왕생한다 하셨네
12. 성사의 외로운 열반
원효는 통일신라 신문왕 6년인 686년 3월 30일 혈사(穴寺)에서 열반하였으니 세수 70세였습니다. 곧 절의 서쪽 봉우리에 임시로 감실을 만들어 안치하였습니다. 여러 날이 지나지 않아서 말을 타고 온 무리들이 떼를 지어 유골을 가지고 가려 하였습니다. 아들 설총(薛聰)이 울음을 머금고 4월에 매번 성사의 경상(經床)에 이르러 경을 펼쳐 읽으며 모시다가 혈사의 법당 동쪽 가까운 산에서 조촐한 다비식을 받들어 행하였습니다.
다음 날 아침 해가 떠 오를 무렵, 설총이 유해를 모아 부수고 소상(塑像)을 빚어 생전의 모습처럼 분황사에 안치하였습니다. 어버이요, 스승이신 성사를 영원히 공경하고 사모하는 뜻을 나타낸 것입니다. 봉안을 마치고 설총이 예배한 후 몇 걸음 나오다 못내 아쉬워 고개를 돌리자, 소상(塑像)이 문득 돌아다 보았는데 오랫 동안 돌아다 본 그 모습대로 있었다고 전합니다. 성사가 일찍이 머물렀던 혈사 옆에는 설총의 집터가 있었습니다.
전하기로는 당시에 불법에 능한 9인이 있었는데 모두 대사(大師)라 불렀다고 합니다. 그리고 원효대사가 그 처음에 있었으며, 대사(大師)는 불교를 일으킨 선지식을 부르는 말일 것이라 하였습니다.
원효성사를 회상하며 가만히 생각해봅니다. 성사의 열반시에는 화려한 다비식도 없었습니다. 사리탑을 세운 흔적도 찾아볼 수 없으니, 사리를 찾느라 분주한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아마 사자는 죽어서도 두려운 존재이니 뭇 짐승들이 함부로 덤벼들지 못하는 격이었을 것입니다. 부처님은 불괴신(不壞身)이라 하였으니 그 정신이 천만대로 이어져 영원히 살아 있다는 말입니다. 이제 형상을 쫓는 자들의 사리탑이며 공덕비가 세월의 무상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고 있을 때, 성사의 형체없는 일심의지혜 자비광명 정신이야말로 이 땅에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원효성사는 스스로 일심법을 깨달은 의식의 혁명가였습니다. 세계와 생명의 실상을 통찰한 철학가였습니다. 불법대해를 자유롭게 헤엄치며 수많은 경론을 해설한 사상가였습니다. 예토와 정토를 넘나들며 중생의 마음을 헤아린 법신보살이었습니다. 역사와 고뇌의 흐름을 꿰뚫어 보는 역사가였습니다. 일심의 깨달음으로 생사의 바다에 몸을 던져 고뇌하는 범부와 고락을 함께 한 대승보살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마음은 지혜롭고 자애로우나 행동은 비범하였으니 범부의 눈에는 기이하게 보일 뿐이었습니다. 우리 곁에 다시 빛으로 오시기를 간절히 염원합니다.
13. 후손의 묘한 인연
아마 779년(신라 혜공왕15년)에 일어난 일인 것 같습니다. 성사의 후손이요, 손자인 설중업(薛仲業)이 사신으로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갔습니다. 높은 지위의 재상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가 중업이 성사의 어진 후손임을 알고서 매우 기뻐하였습니다. 일본 땅에서 여러 사람들이 정토로 왕생할 것을 기약하며 성사의 영험스런 저술을 머리에 이고서 잠시도 놓지 않았는데 그 손자를 만나 보았으니 재상은 너무도 기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3일 밤이나 찾아와 칭송하는 글을 바쳤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뒤 12년이나 흘렀습니다. 비록 몸소 예를 드리고 친히 받들지는 않았더라도 성사의 신이함을 아는 자는 공경함이 있었습니다. 또한, 법음을 전하고자 하는 자로서 봉덕사 법사인 삼장신장(三藏神將)이 있었습니다. 그는 성사의 자비스런 화해와 더불어 마음의 공적함을 알고 법의 무생(無生)을 본 것이었습니다. 속인과 승려가 모두 성사를 칭송하기를 승려 가운데 용이요, 법의 왕이라고 받들었습니다. 불법을 만나 행하면서 성인이 있어서 깃발을 잡고 단절이 없었는데, 이제 추모할 분 원효성사 밖에 쫓을 것이 없었습니다. 더욱이 다른 사람들의 칭송한 글을 보건데 이제 성사의 덕을 새겨야 할 조짐을 깨달았으니 “어찌 다시 천 갈래 흩어짐이 있을 것인가!”하였습니다.
중업(仲業)이 원성왕대(785-798년 사이)에 성사의 100주기를 생각하면서 몸소 추모사업을 생각하다가 상심하여 괴롭고 어려움이 두 배나 됨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곧 몸과 마음을 채찍질하고 진흙과 띠집을 빚어 성사의 옛 거사 형상을 만들어 3월에 안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폭주하고 옆의 들판으로 구름처럼 달려 들어가서 형상을 바라보고 진심으로 예를 드렸습니다. 그런 뒤에야 나라에서 관심을 보였습니다.
김언승(金彦昇: 헌덕왕 808-825)이라는 관료가 있었는데 각간(角干)이라는 벼슬(800-808년 사이)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원효성사에 대해서 이르기를 “바다와 산악의 정기를 타고 났고 하늘과 땅의 빼어남을 타고 났습니다. 부모의 교훈을 잇고 기백은 3천을 감당하며 마음은 6월을 뛰어 넘었습니다. 덕과 뜻은 바다와 같아 말로 다 형용할 수 없습니다. 저 산속을 보니 대덕 봉덕사 스님들이 있습니다. 비로소 명을 내리니 받들어 행하십시오. 마음과 목숨을 맡기고 뜻을 정성껏 하며 법을 높이고 사람을 중히 여겨 뜻을 기리시기바랍니다. 영험스런 자취는 문자가 아니고서는 그 일을 진술할 수가 없으니 기록이 아니고서 어찌 그 연유를 드러낼 수 있으리오. 그래서 스님들로 하여금 비문을 짓게 하고 일을 도모하도록 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명을 받은 스님들이 스스로 법도를 구하는 데도 무능하고 학문도 보잘 것 없다 하여 사양하였으나 끝내 면하지 못하여 일을 착수하기로 다짐하였습니다.
성사에 대한 글을 지어“티끌같은 세월이 흘러도 썩지 않고 겨자씨같은 무수한 세월에도 길이 존재하리라” 하고, 그 사이에 이르기를 “위대하도다 법의 본체여! 형체가 없는 곳이 없습니다. 시방에 몸을 드러내고 세 가지 신통함을 구족하였습니다. 고산대사는 불지에서 태어나 일생 동안 참된 말씀과 바른 이치를 궁구하였습니다.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자유자재로 넘나들었으나 붉은 화살이 그를 겨냥하고, 알 수 없는 소리와 기이한 행동으로 수없이 많은 비판을 받다가 환속하여 거사가 되었습니다. 담백한 바다와 같은 지혜로 해동의 상부에서 국가의 기강을 바로 잡았으니 진실로 문무를 겸비하였습니다.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춤을 추고 슬피 울기도 하였으니 정이 두터웠습니다. 씩씩한 이야기는 성스러움에 다하고 활달한 언설은 신이함에 통하였습니다. 다시 혈사를 수선하여 머물렀으니 길이 궁궐을 하직하고 한 번 굽힘을 끊지 않았습니다. 일정한 장소를 즐기며 도를 즐겼습니다. 천만대 이어갈 행적과 저술을 남겨 모두 다 은혜를 입었습니다.”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성사를 회상하며 이렇게 생각해 봅니다. 원효성사가 열반에 드시자 설총이 효를 다하여 다비식을 치르고 소상(塑像)을 안치하였습니다. 그후 100년이 흐른 뒤 손자 중업(仲業)이 힘써 마침내 비(碑)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원효성사를 대사라고 부르게 된 것은 손자 중업이 추모사업을 도모할 때부터였습니다.‘혈육의 후손이 아니었으면 성사의 자취와 큰뜻이 남아 있었을까?’하는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후손에 의해 빛을 드러냈으니 참으로 묘하고 묘한 인연이었습니다.
고려 숙종대(1101년)에 대각국사 의천이 건의하여 화쟁국사(和諍國師)로 추증하였으니 지혜로운 자만이 성사를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 뒤 명종대(1171-1197)에 분황사에 화쟁국사비(和諍國師碑)를 건립함으로써 마침내 열반 후 500여년만에 성사의 공덕을 다시 실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비는 남아 있지 않으니 애석함에 할 말을 잃습니다. 올해 3월 그믐날은 혼자서 열반일을 추모하며 후학의 우둔함과 허물을 참회하고 예를 드렸습니다. 고스란히 남아 있는 사상이라도 바르게 전하고자 더욱 정진할 것입니다. 성사의 옛터를 향해 예를 올리며 각오를 굳건히 다집니다. 정녕 이 땅이 곧 극락정토라면 이 하늘 아래 어느 곳엔가 머물고 계실 것입니다. 진실한 믿음으로 성사의 깊은 뜻을 관하오니 빛으로 감응하시어 인도하여 주시기를 염원합니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아미타불 나무화쟁국사
14. 연보(年譜)와 시대상황
555년 (진흥왕 16년) 10월 왕이 북한산을 순시, 국경을 설정하고 진흥왕순수비(眞 興王巡狩碑)를 세웠다.
562년 (진흥왕 23년) 대가야를 통합, 가야가 모두 멸망하였다. 7월 백제가 신라 변 경을 공격였다.
566년 (진흥왕 27년) 기원사, 실제사를 짓고, 거대한 가람 황룡사를 낙성하였다.
576년 (진지왕 1년) 화랑(花郞)을 제도화하였다. 577년10월 백제가 서쪽 변방을 공 격하였다.
589년 (진평왕 11년) 원광(圓光)법사(성은 朴씨)가 진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590년 수나라가 진(陳)을 멸망시켰다. 592년 중국 수나라 때 정토교 에 박학한 정영사 혜원(慧遠: 523-592)이 입적하였다.
595년 (진평왕 17년) 김유신(金庾信)이 출생하였다. 일본에서는 성덕태자가 섭정 (593-621)하면서 불교를 옹호하였다.
597년 (진평왕 19년) 11월 중국 천태종의 지자대사가 입적하였다.
600년 (진평왕 22년) 최초로 미타사를 창건했던 혜숙과, 안함이 풍랑으로 중국 유 학길에서 실패하였다. 원광이 수나라에서 귀국하였다.
602년 (진평왕 24년) 8월 원광으로부터 세속오계를 받은 귀산과 추항이 백제와 싸 우다가 전사했다. 603년 고구려가 신라의 북한산성을 공격하 고, 605년 8월 신라는 백제를 공격. 607년 고구려는 백제의 송산성, 백두성을 공격하였다.
608년 (진평왕 30년) 고구려와 전쟁이 자주 일어나자 왕이 원광으로 하여금 수나라 에 보내는 걸사표(乞師表)를 짓게 하였다.
609년 (진평왕 31년) 수나라 도작(道綽: 562-645)이 정토교에 귀의하였다.
612년 (진평왕 34년) 1월 수나라 양제가 113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2차 침공 했다. 7월 을지문덕이 살수에서 수나라 30만 대군을 섬멸(살 수대첩)하였다. 원측(圓測)법사가 출생하였다.
613년 (진평왕 35년) 7월 수나라 사신 왕세의가 황룡사에서 백고좌를 베풀자 원광 이 경전을 강설하였다. 수나라 양제가 우문술 등의 장수를 거 느고 고구려를 3차 침공하였다. 616년 백제는 신라 모산성을 공격하였다.
617년 (진평왕 39년) 원효가 경북 경산의 시골 밤나무골에서 출생하였다. 신분은 6 두품이니, 양친이 왕계인 성골(聖骨)도 아니고, 한 쪽만 왕 계인 진골(眞骨) 출신도 아니었다.
618년 (진평왕 40년) <원효 2세> 신라가 백제 가잠성을 탈환하였다. 고구려가 수 나라의 4차 침입을 격퇴하였다. 3월에는 수나라가 멸망하고 5월에 당나라가 건국 되었다.
621년 (진평왕 43년) <원효 5세> 설계두가 골품제를 비판하고 당나라로 건너갔다. 623년 백제가 신라 녹로현을 공격하였다.
625년 (진평왕 47년) <원효 9세> 의상(義湘)이 출생하였다. 고구려가 조공의 길을 막는다고 당나라에 호소하였다.
626년 (진평왕 48년) <원효 10세> 원측(15세)이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627년 (진평왕 49년) <원효 11세> 7월 백제가 서북방을 공격하고, 628년 2월 신 라의 가잠성을 공격하였다.
628년 (진평왕 50년) <원효 12세> 신라에서 굶주림으로 자녀를 매매하는 일이 발 생하였다. 629년 김유신(35세)이 고구려 랑비성을 격파하였 다.
630년 (진평왕 52년) <원효 14세> 원광법사가 황룡사에서 입적(84세 이상)하였다.
632년 (선덕여왕 1년) <원효 16세> 이 무렵에 원효(상투머리를 올릴 무렵)가 출가 하였다. 선덕여왕이 등극하였다. 분황사를 완성하였다. 633년 백제가 신라 서곡성을 공격하였다.
636년 (선덕여왕 5년) <원효 20세> 자장(慈藏)이 제자 10명과 함께 당나라로 유학 을 떠났다. 3월 왕이 병이 나자 황룡사에서 백고좌를 행하 여 <인왕경>을 강설하고 100인의 승려를 출가시켰다. 백제 가 5월에 독산성을 공격하였다.
638년 (선덕여왕 7년) <원효 22세> 선종의 6조 혜능(慧能)이 출생하였다. 신라가 고구려의 침입을 격파하였다.
642년 (선덕여왕 11년) <원효 26세> 7월 백제 의자왕이 군사를 일으켜 신라의 40 여 성을 공격하였다. 8월에는 고구려와 함께 당항성을 치 고, 신라의 당나라 교통로를 차단하였다. 전쟁에서 김춘추 의 맏사위 부부가 전사하였다. 10월 고구려에서 연개소문 이 영류왕을 죽이고 보장왕을 세우는 구테다가 발생하였 다. 김춘추(김유신과 동시대 화랑으로 비슷한 나이)가 고 구려에 구원군을 요청했으나 실패하였다. 김유신(48세)이 압독주 군주가 되었다.
643년 (선덕여왕 12년) <원효 27세> 3월 자장이 왕의 명에 따라 급히 귀국하였는 데, 부처님 사리 100과, 부처님의 금란가사, 경론 4백함 등을 가지고 왔다. 김유신이 백제의 7성을 탈취하였다.
645년 (선덕여왕 14년) <원효 29세> 의상이 출가하였다. 4월 당나라 태종이 고구 려를 크게공격했다. 9월에 안시성 전투에서 당군을 격퇴하 였다. 5월 백제가 신라를 공격하여 7성을 탈환하였다. 1월 당나라 현장이 인도 유학(629년부터 645년까지 17년간)을 마치고 장안으로 돌아왔다. 그 후 75부 1,335권을 번역하 였다.
647년 (선덕여왕 16년) <원효 31세> 세계 최고의 첨성대(瞻星臺)를 건립하였다. 1 월 비담과 염종이 여왕통치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키 자 김유신이 진압하였다. 반란 중에 선덕여왕이 피살 되었 다.
648년 (진덕여왕 2년) <원효 32세> 겨울 김춘추가 아들 김인문을 당나라에 보내 백제 협공을 요청하였다.
649년 (진덕여왕 3년) <원효 33세> 김춘추와 자장의 건의로 당나라 관복을 받아 드려 중국의 의관(衣冠)을 입기 시작했다. 8월 김유신이 직 산 일대에서 백제군을 격파하고, 백제는 7성을 탈환하는 전 투가 치열하였다. 장안 홍법사에서 정토신앙을 홍포하고 <정토론>을 저술한 가재(迦才)가 입적하였다.
650년 (진덕여왕 4년) <원효는 34세> 원효가 의상과 함께 당나라 유학을 시도 하였 으나 요동에서 실패하였다.
6월 고구려가 도교를 우대하자, 보덕이 백제 완산주 고대 산으로 망명하였다. 이 무렵 고구려 승려 보덕에게서 <열반 경> 등을 배웠다.
바로 이 해에, 원효가 의상과 함께 다시 유학을 가던 길에서 직산의 무덤에서 크게 깨닫고 유학을 단념하고 돌아왔다. 그 후 주로 분황사에서 불교를 대중화하기 위한 저술 활동에 힘 썼다.
654년 (무열왕 1년) <원효 38세> 진덕여왕이 죽고, 김춘추가 태종 무열왕으로 즉 위하였다. 왕의 골품 세습이 성골에서 진골로 바뀌게 되었다.
655년 (무열왕 2년) <원효 39세> 9월 왕의 둘째 사위 김흠윤이 백제를 공격하다가 전사하였다. 10월 왕이 셋째 딸 지조를 김유신(61세)에게 출 가시켰다. 이전에 김춘추는 김유신(가야국계통의 김씨)의 셋 째 누이 문희와 혼인하였다.
660년 (무열왕 7년) <원효 44세> 1월 김유신이 상대등에 올랐다. 7월 김유신이 소 정방의 당군과 연합하여 계백을 황산벌에서 격파하고, 사비성 함락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654년- 661년(무열왕대) <원효 38세-45세 무렵> 원효가 요석궁 공주와 인연이 되 어 설총을 낳았다. 이후 소성거사(小性居士)라 자칭하며 저술 과 불교 대중화에 전념하였다.
661년 (문무왕 1년) <원효 45세> 무열왕이 죽고 문무왕이 즉위하였다. 의상(37세) 이 당나라 화엄종 지엄(智嚴) 문하에 유학을 갔다.
662년 (문무왕 2년) <원효 46세> 2월 원효가 김유신의 고려 원정에 종군하여 당나 라 장수 소정방이 보낸 암호문을 해독하여 공을 세웠다. 663 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 잔여군을 완전 장악하였다.
664년 (문무왕 4년) <원효 48세> 2월 중국 법상종의 현장(玄奘)이 입적하였다.
667년 (문무왕 7년) <원효 51세> 신라의 승려 순경(順璟)이 제자를 중국에 보내 원 효가 밝힌 현장의 논리적 모순을 지적하였다.
668년 (문무왕 8년) <원효 52세> 나당연합군에 의해 고구려가 멸망하였다. 10월 중국 화엄종의 지엄 입적하였다.
670년 (문무왕 10년) <원효 54세> 의상이 당나라에서 귀국하였다. 신라와 당나라 가 대립이 격화되어, 신라 백제 고구려 군민의 항쟁이 시작 되었다.
671년 (문무왕11년) <원효 55세> 원효가 행명사에서 <판비량론>을 저술하였다.
673년 (문무왕 13년) <원효57세> 7월 김유신(79세)이 죽었다.
674년 (문무왕 14년) <원효 58세> 중국 선종의 제5조 홍인 입적하였다. 675년 신 라가 경기도 양주 부근에서 당군을 격파하였다. 선종의 5조 홍인(弘忍: 602-675)이 입적하였다.
676년 (문무왕 16년) <원효 60세> 2월 의상이 왕명을 받들어 영주 부석사를 창건 하였다. 11월 신라가 당나라 군대를 격파하여 완전히 축출하 고 대동강 이남에서 삼국통일을 완성하였다.
661년-681년 (문무왕대) <원효 45세-65세 무렵> 원효는 <금강삼매경론>을 저술하 고 강설하였다. 이 무렵 대안(大安) 법사와 친분을 맺었다. 이 무렵 영취산의 낭지(朗智)로부터 <법화경>을 배웠다. 염불법 으로 광덕, 엄장 등을 교화하였다.
681년 (문무왕 21년) <원효 65세> 문무왕이 죽었는데, 유언에 따라 동해의 큰바위 가운데 화장한 유골을 봉안하였다. 신문왕이 즉위하였다.
이 무렵 설총이 화왕계(花王戒: 모란과 왕을 비유한 우화)를 지었다. 정토교를 홍포하던 선도(善道: 613-681) 입적하였 다.
682년 (신문왕 2년) <원효 66세 이후> 저술에 전념하였고, <화엄경> 십회향품 에서 붓을 꺾었다. 만년에는 궁월에서 떨어진 혈사 (穴寺)로 거처 를 옮겨 유유자적하였다.
686년 (신문왕 6년) <원효 70세)> 원효 3월 30일 혈사에서 입적하였다. 설총이 유해를 부수어 상을 조성하여 분황사에 모셨다.
7월 원측이 당나라 불수기사에서 입적하였다. 의상(湘:625-) 이 입적하였다. 713년 선종의 6조혜능(慧能:638-713)이 입적 하였다. 712년 중국 화엄종의 3조법장(法藏:643-712)이 입적 하였다.
735년 (성덕왕 34년) 원효의 <유마경소>를 일본에서 서사하였다.
751년 (경덕왕 10년) 대상(大相) 김대성이 불국사 창건하였다
766년 (혜공왕 2년) 5월 진표(眞表)가 금산사에 미륵장육상을 주조하였다.
770년 (혜공왕 6년) 경덕왕신종(봉덕사종=에밀레종)을 주조하였다.
779년 (혜공왕 15년) 원효의 손자 설중업이 일본에 사신으로 건너가 조부의 훌륭한 인품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이 때 이미 원효의 <무량수경종 요>가 일본에 전해졌었다.
806년 (애장왕 7년) 불사(佛寺)의 새로운 창건을 금하였다.
800년- 808년 (애장왕대) 손자 설중업이 건의하고 김언승이 후원하여 고선사에 <서 당화상비>를 건립하였다.
821년 (헌덕왕 13년) 도의선사(道義禪師: 784년에 당나라로 건너감)가 서당지장(西 堂智藏)의 법을 받고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최초로 선법(禪 法)이 전해졌다. 그는 설악산 진전사에서 은거하다가 제자 염거(廉居)에게 법을 전한 뒤 입적하였다. 867년 4월 임제종 의 의현(義玄:?-867)이 입적하였다.
918년 (고려 건국) 6월 왕건이 궁예 부하들의 추대를 받아 고려를 건국하였다.
935년 (경순왕 9년) 신라 992년의 역사가 멸망하고 고려에 합병되었다.
1101년 (고려숙종6년) 대각국사 의천(1055-1101)의 건의로 원효를 화쟁국사(和諍國 師)로 추증하였다.
1158년 (의종12년) 보조지눌(1158-1210)이 출생하여 8세에 출가하였다. 1200년부 터 송광산 길상사(조게산 송광사)에서 11년간 선풍을 일으켰다.
1171년- 1197년(고려 명종대) 분황사에 원효의 화쟁국사비를 건립하였다.
아! 그런데 성사를 사모하고 그리워하던 대각국사가
화쟁국사로 추증하여 세운 그 비는 지금 어디로 사라졌을까?
[출처: jkb100479] (정목스님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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