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인문과학 2

頓悟頓修(돈오돈수)의 起源(기원)과 主張者(주장자) 및 佛敎歷史上의 評價(평가)

수선님 2020. 9. 6. 11:48

頓悟頓修(돈오돈수)의 起源(기원)과 主張者(주장자) 및 佛敎歷史上의 評價(평가)
The Origin of Sudden Enlightenment & cultivation and its evaluation in the History of Buddhism
朴 商 洙 (Park, Sang Su)   東國大學校 佛敎學科 講師

 

     목     차          | ( 1/3) | (2/3) | (3/3) |
   Ⅰ. 머리말 ◀ 현재  첫 페이지 (2/3) 
   Ⅱ. 頓悟頓修의 起源(돈오돈수·기원)과 그 주장자들     1. 佛敎의 修證論(불교의 수증론)
          2. 宗密(종밀)과 延壽(연수)의 修證論   1) 頓漸四句(돈점사구)   2) 兩者(양자)의 계승관계
          3. 澄觀(징관)의 修證論     (1) 징관의 돈오돈수설   (2) 징관과 종밀의 돈오돈수설
                 (2)_1.先悟後修(선오후수)   (2)_2.先修後悟(선수후오)   (2)_3.修悟一時(수오일시)
          4. 壇經(단경)과 神會(신회) ◁ 다음 페이지 (2/3)  두번째
   Ⅲ. 頓悟頓修의 佛敎史的 評價(돈오돈수의 불교사적 평가)
          1. 中 國      (1) 宗密(종밀)   (2) 澄觀(징관)   (3) 延壽(연수)
             1_(4) 永明(영명) 이외의 禪師(선사)들 ◁ 다음 다음 페이지 (3/3)  세번째
          2. 韓 國      (1) 知訥(지눌)   (2) 慧諶(혜심)   (3) 西山(서산)   (4) 雲峯(운봉)
   Ⅳ. 맺는말

 

Ⅰ. 머리말
 
지금부터 십 수년 전에 退翁 聖哲(퇴옹성철)스님이 禪宗의 바른 수행도는 頓悟漸修(돈오점수)가 아니라 頓悟頓修(돈오돈수)라고 주장하여, 우리 나라 불교계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그 이후 이 문제와 관련된 학술회의가 여러 차례 진행되어 많은 논의와 주장이 제시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여태까지의 결과를 보면 그 돈오돈수의 근원을 성철스님에게서 찾으려는 경향도 있고 또한 그 내용과 옳고 그름에 있어서도 명확한 기준을 계속 모색하는 상태에 놓여 있다.
 
그리하여 이 시점에서 일단 다음과 같은 문제들이 검토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것은 우선 돈오돈수가 성철스님의 독자적 주장인가 아닌가 하는 점이다.
 
그 다음은 성철스님 이전에 이미 돈수돈수가 주장되었다면 그 주장자들은 누구이고 그들은 그 의미를 어떻게 규정하였으며, 또 지난날의 불교계에서는 그 돈오돈수를 어떻게 평가하고 어떻게 수용하였는가 하는 점 등이다.
 
이러한 사항들이 선결되고 나서 최근의 돈오돈수 주장을 되돌아보는 것도 의미있는 작업일 것이다. 이에 필자는 이러한 과제에 초점을 맞추어 불교의 수행법을 고찰해 보며 그 속에서 돈오돈수의 기원과 이 수행도의 옳고 그름에 대한 불교 역사상의 논란을 대략 조감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돈오점수가 결코 普照 知訥(보조지눌)스님에게서 처음으로 비롯된 것이 아니듯이 돈오돈수 역시 성철스님에게서 비로소 주장된 것이 아니라 그 기원은 보다 멀리 소급되어
 
초기의 선종시대에서 유래되었으며, 그 이후 敎宗과 禪宗(교종 · 선종)의 여러 學僧(학승)과 禪師(선사)들의 연구와 전승을 거치며 中國은 물론 우리 나라에서도 여러 평가를 거치며 많은 관심사가 되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한 결과에 근거하여 먼저 돈오돈수의 주장자 및 그들의 이론을 규명해 보고 그 다음 이 돈오돈수를 둘러싼 여러 의견과 평가를 고찰하기로 한다.
 
            Ⅱ. 頓悟頓修의 起源과 그 주장자들(돈오돈수의 기원과...)
 
   2-1. 佛敎의 修證論(불교의 수증론)

 
불교의 근본 목적은 우주와 인생의 진리를 깊이 깨달아 自覺(자각)하고 나아가 남들도 진리에 눈 뜨게 하는 데에 있다. 그런데 자각하여 진리를 證得(증득)하고 見性(견성)하려면 먼저 修行을 하지 않으면 안 되며, 여기에서 佛道(불도)의 수행과 증득에 관한 修證論(수증론)이 대두되는 것은 널리 알려진 상식이다.
 
그리하여 부처님 이래로 많은 세월이 흐르며 여러 가지 수행법이 제창되어 인도와 중국 및 우리 나라 등 각 나라에서 성립된 수 많은 불교의 學派(학파), 宗派(종파)마다 나름대로의 수증론이 주장되었다.
 
이제 본 考(고)에서 고찰하고자 하는 바는 그 수증론들 중에서 頓漸四句(돈점사구)에 관한 것이며, 그 돈점사구 중에서도 頓悟頓修(돈오돈수)에 대한 것이다.
 
돈점사구란 진리를 증득하는 깨달음인 悟와 그 실천 수행인 修에 모두 네 가지의 구별이 있다는 말이다. 불교의 수행론을 거론하다 보면 대개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바로 頓悟와 漸悟(점오)의 쟁론이다.
 
우선 돈오와 점오의 대결이라 하면 저 티베트의 삼예(bsam-yas)寺에서 8세기 말기에 벌어진 인도의 고승과 중국의 대승화상의 논쟁이 지적된다. 이 두 나라 고승들간의 돈오와 점오 대결은 불교 역사상 매우 유명한 사건이지만 그 돈오와 점오의 대립은 또 한편으로는 중국 안에서 보다 일찍이 파생하였다.
 
곧 중국에서는 鳩摩羅什(구마라습)의 제자인 道生(도생)이 5세기 초에 頓悟成佛(돈오성불)을 주장하여도생의 頓悟思想을 지지하는 자들과 漸悟(점오)를 따르는 慧觀(혜관) 등의 무리간에 논쟁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선종에서도 5조 弘忍의 문하에서 神透(신투)와 慧能(혜능)으로 대표되어 점오와 돈오의 대결이 발생하였지만 그 사상적 배경에는 그 보다 일찍 야기된 도생의 돈오사상의 영향과 전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서 논의하고자 하는 바는 위에서 열거한 돈오와 점오의 논쟁같은 悟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修면에도 관련된 것이다. 돈오돈수 문제는 悟修(오수) 양면에 걸친 수증론이기 때문이다.
 
근래에 불교계에서 논의되고 있는 것은 頓悟頓修와 頓悟漸修를 유심히 살펴보면, 이미 修에 頓과 漸의 구별이 있으니 悟(오)에도 또한 돈과 점의 차별이 있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을 것이다.
 
곧 修에만 頓修(돈수), 漸修(점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또한 悟에도 頓悟(돈오), 漸悟(점오)가 있을 수 있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修에도 頓과 漸이 있고 悟에도 頓과 漸이 있는 수증론을 예전에는 소위 頓漸四句(돈점사구)라 호칭하였다. 따라서 이 돈점사구에 의하면 수증론에는 기본적으로 頓悟頓修와 頓悟漸修가 있을 뿐 아니라
 
그 외에도 漸修頓悟(점수돈오)와 漸修漸悟(점수점오)가 있고 또한 頓修漸悟(돈수점오)가 더 첨가되어 모두 다섯 가지가 있게 된다.()
 
참고>이상의 다섯가지 수증론 중에서 頓悟頓修에는 세 가지의 유형이 내포되어 있어 돈오돈수를 세 가지로 셈하면 모두 일곱 가지가 되기도 한다. 세 가지 유형의 돈오돈수는 이 뒤의 澄觀(징관)의 수증론에서 언급되어 있다.
 
그런데 이러한 수증론의 분류는 이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불교 역사상 실제로 주장되고 논의되었던 문제들이었다. 곧 중국에서 불교가 흥성하던 唐나라 및 宋(송)나라 때에 이미 그 돈점사구에 입각한 다섯 가지 유형의 수증론이 거론되고 그 우열과 시비를 저울질하였던 것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에 일반적으로 華嚴宗(화엄종)의 宗密(종밀)과 禪宗(선종)의 延壽(연수)가 거론된다. 따라서 돈오돈수의 기원을 찾아 거슬러 올라 가면서 이들의 수증론부터 들어보기로 한다.
 
     2-2. 宗密과 延壽의 修證論(종밀과 연수의 수증론)
 
                    1) 頓漸四句(돈점사구)
 
禪宗의 수증론을 말할 때 곧잘 인용되는 것은 華嚴宗의 第5祖인 圭峰 宗密(규봉 종밀; 780∼841)과 선종 가운데 法眼宗의 永明 延壽(영명 연수; 904∼975)의 설이다.
 
이 둘은 모두 똑같이 돈오점수와 돈오돈수를 논했을 뿐 아니라 그 밖에도 頓漸四句(돈점사구)에 입각하여 점오점수와 점오돈수 및 돈수점오라는 다섯 가지 유형의 수증론을 말하였다.
 
다시 말하면 그 둘은 자신들이 지은 많은 저서 곳곳에서 돈점사구에 포함되는 모든 유형의 수증론을 함께 논하며 그 속에서 자신들의 견해에 합치하는 특정의 수증론을 선택하여 역설하였던 것이다.
 
그러한 까닭에 본 노녹의 대상이 돈수돈수이지만 종밀 등의 수증론을 고찰할 때 편의상 그들의 수증론 모두를 거론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그들의 수증론 전모를 거론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돈오돈수를 포함한 그들 수증론의 기원 및 선후전승 등을 해명하는 데 필요한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이제 兩者(양자)의 수증론을 요약하여 대조함에 있어 각 수증론을 비유적으로 해설한 대목을 중심으로 일단 종밀의 설만을 번역하도록 한다.
 
영명의 그것은 글자 몇 개를 제외하고는 종밀의 설과 거의 동일하기 때문이다. 각 수증론의 출처는, 종밀의 설은 모두 禪源諸詮集都序(선원제전집도서)에서 발췌하고 영명의 설은 1) 宗鏡錄(종경록)과 2) 萬善同歸集(만선동귀집)에서 발췌하였다.<표 참조>

 

宗      密

延      壽

1. 漸修頓悟

 

如伐木 片片漸斫 一時頓倒亦如遠詣都城 步步漸行 一日頓到也5)(나무를 베는데 여러 조각으로 점차 파하여 일시에 단박 쓰러짐과 같고, 또한 멀리서 도성에 이르는 데 한걸음 한걸음 점차 가서 하루에 단박 도달함과 같다)

1) 如伐木 片片漸斫 一時頓倒 亦如遠詣皇城6)

2) 如伐樹片片漸斫 一時頓倒7)

2. 頓修漸悟

 

如人學射 頓者箭箭直注意在於的 漸者久久方始漸親漸中(사람이 활쏘기를 배우는데 단박은 화살들에 직접 마음을 기울여 과녁에 두고, 점차는 오래되어 바야흐로 비로소 점차 친숙해지고 점차 적중시키는 것과 같다)

1) 如人學射 頓者箭箭直注意在於的 漸者久始方施漸親漸中
2) 如人學射 頓者箭箭直注意在於的 漸者久久方中漸親漸中...

3. 漸修漸悟

 

如登九層之台 足復漸高 所見漸遠(구층의 대를 오르는 데 발을 디디어 점차 오름에 보이는 바가 점차 멀어지는 것과 같다)

1) 如登九層之臺 足復漸高 所見漸遠
2) 如登九層之臺 足復漸高 所見漸遠

4. 頓悟漸修

 

約斷障說 如日頓出 霜露漸消 約成德說 如孩子生 卽頓具四 肢六根 長卽漸成志氣功用也(장애를 단절함에 의하여 말하면 해는 단박에 뜨지만 서리와 이슬은 점차 없어지는 것과 같고, 덕을 이룸에 의하여 말하면 어린 아이가 태어나서 곧 단박에 사지와 육근을 갖추지만 성장하여 곧 점차로 의자와 기개대로 힘을 쓸 수 있는 것과 같다)

1) 若約斷障說者 如日頓出 霜露漸消 若約成德說者 如孩子生 卽頓具四 肢六根 長卽漸成志氣功用
2) 如日頓出 霜露漸消

 

5. 頓悟頓修

 

斷障 如斬一 系 万條頓斷修德 如染一 系 万條頓色(장애를 단절함은 한 줄의 초록빛 실을 자름에 만 가닥이 단박에 끊어지는 것과 같고, 덕을 닦음은 한 줄의 초록빛 실을 물들임에 만 가닥이 채색되는 것과 같다)

1) 頓悟頓修=斷障 如斬一 絲 萬條頓斷 修德 如染一 系 萬條頓色
2) 頓悟頓修=斷障 如斬一 絲 萬條頓斷 修德 如染一 系 萬條頓色

이상의 대조에 의거하면 종밀과 영명이 주장한 다섯 가지 수증론은, 그 설명의 일부 글자가 몇 개 정도 다르거나 혹은 첨삭된 것을 제외하고 양자의 설명과 내용이 완전히 동일하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또한 영명의 萬善同歸集(만선동귀집)의 설명은 자신의 宗鏡錄(종경록)이나 종밀의 선을 간단하게 일부만 기록했다는 것도 드러난다.
 
                    2) 兩者의 계승 관계
 
그렇다면 이 둘의 설명이 완전히 동일한 까닭은 어찌된 것일까? 우선 연대적으로 120여년 전에 출생한 종밀의 주장을 영명이 답습하였을 것으로 짐작될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영명은 실제로 자신의저서에서 그러한 수증론을 설명하기 전에 그것이 인용된 설이라는 것을 밝혔다.
 
곧 종경록의 경우에는 첫째, 漸修頓悟(점수돈오)의 조항 설명을 "有云 先因漸修功成而豁然頓悟 如伐木片片漸斫一時頓倒(유운 선인점수공성이활연돈오 여벌목편편점작일시돈도) ··· (이르기를, 먼저 점차 닦아 공을 이룸으로 인하여 활연히 단박에 깨닫는 것은 나무를 베는데 여러 조각으로 점차 파하여 일시에 단박 쓰러짐과 같고 ···)"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 점수돈오의 설명이 앞에서 대조해 본 종밀의 것과 똑같으므로 여기에 말한 내용이란 다름 아닌 종밀이 말한 것이다. 점수돈오 외에 그밖의 나머지 수증론도 모두 종밀의 설과 동일하게 설해진다. 그리고 더 나아가 만선동귀집에서는 구체적으로 종밀의 명칭을 제시하였다. 곧
 
"圭峰禪師 有四句料簡 一漸修頓悟 如伐樹片片漸斫一時頓倒 二頓修漸悟(규봉선사 유사구료간 일점수돈오 여벌수편편점작일시돈도 이돈수점오) ··· (규봉선사에게 네 가지 구문으로 가려낸 수증론이 있으니, 첫째 점수돈오는 나무를 베는데 여러 조각으로 점차 파하여 일시에 단박 쓰러짐과 같고, 둘째 돈수점오는 ···)"라고 하였다.
 
이 점수돈오 및 기타의 설명이 종밀의 수증론과 전적으로 같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와 같이 영명 연수는 선사로서 돈오돈수를 비롯한 돈점오수의 수증론을 거론 하였지만, 그 수증론의 기본 내용은 본래 규봉 종밀의 주장을 그대로 계승하여 말한 것이다.
 
    2-3. 澄觀의 修證論(징관의 수증론)
 
                    1) 징관의 돈오돈수설
 
그런데 이로부터 한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과연 지금까지 설명한 수증론들은 모두 종밀이 최초로 주장한 것인가 하는 것이다. 물론 누구라도 神會(신회)의 사상을 알기에 적어도 돈오점수 정도는 종밀 이전에 주장되었음을 상기할 것이다.
 
그럼에도 궁금한 것은 그 많은 유형의 수증론을 종합적으로 정리하며 평가한 것은 그 시초가 종밀에게서 비롯된 것인가 아닌가 하는 점이다.
 
이와 관련하여 돈점오수에 의거한 다섯 가지의 수증론이 아직 정리되지는 않았지만 이미 澄觀(징관)의 저서인 華嚴經行願品疎(화엄경행원품소)와 [演義 (연의)]에 들어있음을 지적한 논문이 있는데,
 
그 논문에서는 징관의 다섯 가지 수증론을 그 두 저서에서 인용하여 제시하였다. [연의초]를 살펴보면 여기서는 돈오점수 · 돈수점오 · 점수점오의 네 가지를 말하고, 화엄경행원품소에서는 돈오점수 · 점수돈오 · 점수점오 · 돈오돈수의 네 가지를 설하였다.
 
따라서 양 쪽을 합하면 결국 돈오점수 · 돈수점오 · 점수돈오 · 점수점오 · 돈수돈오의 다섯 가지를 말한 것이다. 그 수증론들의 설명은 두 저서마다 조금씩 상이하여 일관성있게 설해지지는 않았다.
 
한편, 근래에 이러한 지적이 있기 전에 이미 고려시대에 저술된 普照 知訥(보조지눌)의 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 속에 [화엄경행원품소]에 있는 청량의 수증론이 인용되어 있어, 징관에게 돈점오수의 수증론이 있었다는 사실이 오래 전부터 우리 나라에 알려져 있었다.
 
알다시피 淸? 澄觀(징관; 738∼839)은 華嚴宗의 第4祖이며 종밀의 스승이다.
그런데 그런 위치에 있는 징관의 저서에 이미 돈오돈수를 포함한 다섯 수증론이 잘 정리되지는 않았어도 논의되어 있다는 사실은, 돈점오수의 수증론을 보다 먼저 분류하여 해설한 이는 종밀이나 영명이 아니라 화엄종의 징관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2) 징관과 종밀의 돈오돈수설
 
돈점오수의 수증론을 보다 먼저 정리한 인물은 징관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이 분야의 확립자는 징관이라고 확정지으려면 먼저 입증되어야 할 과제가 있다. 그것은 징관의 수증론이 그대로 종밀에게 계승된 것인가, 아니면 종밀의 수증론은 징관과는 별개인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그리하여 이에 대해 필자 나름대로 양자의 수증론을 비교해 보았더니, 종밀이 수립한 수증론의 종류와 그 내용의 많은 부분이 징관의 학설과 같거나 비슷하여 종밀의 수증론의 상당 부분이 징관에 기초하였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 이 자리는 그 분야가 주제도 아니고 또 각 수증론을 일일이 확인하는 것도 번거로우므로 일단 생략하기로 하며, 여기서는 주된 관심사인 돈오돈수 조항에 한하여 검토해 보고자 한다.
 
먼저 그 둘은 돈오돈수를 모두 세 가지로 구분하였다. 곧 징관은 [연의초]에서는 다만 頓修頓悟(돈수돈오)로 설명하였으나 [화엄경행원품소]에서는
 
"만약 頓悟頓修(돈오돈수)를 말하면 이것은 세 의미에 통한다. 만약 먼저 깨닫고 나중에 닦음이란 ··· 만약 먼저 닦고 나중에 깨달음을 말하면 ··· 만약 닦음과 깨달음이 일시임을 말하면 ···"라고 하여
 
돈오돈수에 先悟後修(선오후수)와 先修後悟(선수후오) 그리고 修悟一時(수오일시)의 세 가지 유형이 있음을 주장하였다.
 
또 종밀 역시 圓覺經大疏(원각경대소) 및 圓覺經大疏 (원각경대소초)와 圓覺經略疏 (원각경약소초)에서 징관과 똑같이 세 가지로 구분하여 설명하였는데, [원각경대소]의 기본 정의를 보다 상세히 부연한 [원각경대소초] 및 [약소초]의 설명은 모두 동일하다.
 
이하에서 양자의 그 세 가지 의미의 돈오돈수를 차례로 대조하며 분별해 본다.
 
   (1) 先悟後修(선오후수)

澄觀說

宗密設

若先悟後修 謂廓然頓了 名之爲悟不看不
              ①

證不收不攝 曠然合道 名之爲修 此則解悟
              ②                  ③

此定爲門 亦猶不拂不瑩而鏡自明(만약 먼저 깨닫고 나중에 닦음이란, 말하자면 확연히 단박에 아는 것을 이름하여 깨달음이라 하고 살피지 않고 증득하지 않고 거두지 않고 포섭하지 않으며 광연하게 道와 합하는 것을 이름하여 닦음이라 한다.
 
이것은 곧 解悟이며 이것은 선정으로써 그 문을 삼으며, 또한 오히려 닦지 않고 빛나게 하지 않아도 거울이 스스로 밝은 것과 같다)

 

(大疏) 先梧 [廓然頓了] 後修 [不著不證曠然合道] 爲解悟15)
(大疏 ) 如注所釋 謂由頓了 身心塵境皆空故 不著諸相不證心性心性本不動故 又由頓了恒沙功德皆備故 念念與之相應名爲合道 由悟於先故當解也16)
 
(대소) 먼저 깨닫고 [확연히 단박에 앎] 나중에 닦음은 [잡착하지 않고 중득하지 않고 광연하게 도와 합함] 解悟이다.
 
(대소초) 주석에서 해석한 것과 같으니 말하자면 단박에 몸과 마음과 객진경계가 모두 공함을 알기 때문에 모든 형상에 집착하지 않으며 마음의 성품을 증득하지 않으니 마음의 성품은 본래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또 단박에 항하사 만큼의 공덕을 모두 구비함을 아는 것으로 말미암아 생각 생각에 더불어 상응하는 것을 이름하여 도와 합한다고 한다. 깨달음이 먼저인 것에 말미암기 때문에 이해[解]에 해당한다.

돈오돈수의 첫째 유형인 이 先悟後修(선오후수)의 설명을 분석해 보자. 우선 종밀의 경우 [大疏초]의 설명은 先悟後修를 先悟와 後修 및 解悟(해오)의 셋으로 구별하여 정의한 [大疏 (대소초)]의 설을 보다 자세하게 해명한 것이다.
 
다음 대소에서 정의한 先悟의 설과 後修의 설 및 '解悟'라는 규정은 그 모두가 징관의 설에 그대로 포함되어 있다. 곧 종밀이 시도한 先悟의 설인 '廓然頓了(곽연돈료)'와 後修의 설인 '不看不證 曠然合道(불간불증 광연합도)', 그리고 선오후수는 '解悟'라는 규정은 징관의 선오후수설 중 밑줄친 ①, ②, ③의 설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다.
 
그 중에서 後修(후수)에 대한 종밀의 설은 징관의 ②의 설을 간략히 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돈오돈수의 첫째 형태인 선오후수설은 애초에 징관이 설한 것을 나중에 종밀이 그대로 수용하며 조금 더 해명한 것임이 확실하다. 그 다음 둘째 유형인 先修後悟(선수후오)의 설을 대조해 본다.
 
   (2) 先修後悟(선수후오)

澄觀說

宗密設

若云先修後悟 謂依前而修忽見心性名之爲悟 此爲證悟 則修如服藥 悟如病除17)(만약
       ③         ①        ②

먼저 닦고 나중에 깨닫는다고 한다면, 말하자면 이전에 의지하여 닦다가 홀연히 마음의 성품을 보는 것을 이름하여 깨달음이라 한다. 이것은 證俉이니 곧 닦음은약을 복용하는 것과 같고 깨달음은 병을 제거하는 것과 같다)

若云先修後悟 謂依前而修忽見心性名之爲悟 此爲證悟 則修如服藥 悟如病除17)(만약
       ③         ①        ②

먼저 닦고 나중에 깨닫는다고 한다면, 말하자면 이전에 의지하여 닦다가 홀연히 마음의 성품을 보는 것을 이름하여 깨달음이라 한다.
 
이것은 證俉이니 곧 닦음은 약을 복용하는 것과 같고 깨달음은 병을 제거하는 것과 같다)

 

 

(大疏) 先修 [服藥] 後悟 [病除] 爲證悟18)
(大疏 ) 謂頓由絶諸緣等云云
[如上所引] 故得心地豁開 以根欲俱勝故 不同前頓修漸悟也 注以修如服藥者 一服頓契也 悟如病除者熱病得  四肢百節一時輕淸也 不取漸漸平復之意 以悟在修後故當於證19)
(大疏) 先修 [服藥] 後悟 [病除] 爲證悟18)
(大疏 ) 謂頓由絶諸緣等云云
[如上所引] 故得心地豁開 以根欲俱勝故 不同前頓修漸悟也 注以修如服藥者 一服頓契也 悟如病除者熱病得  四肢百節一時輕淸也 不取漸漸平復之意 以悟在修後故當於證19)
 
(대소) 먼저 닦고 [약을 복용함] 나중에 깨달음은 [병을 제거함] 證俉이다.
 
(대소초) 말하자면 단박에 모든 인연 등을 단절함으로 말미암아 운운 [앞에서 인용한 바와 같다] 그러므로 心地가 활연하게 열린다. 근기와 욕망이 함께 수승하므로 앞의 頓修漸悟와는 같지 않다.
 
주석에서 닦음이 약을 복용함과 같다고 한 것은 한 번 복용함으로 단박에 계합하는 것이고, 깨달음이 병을 제거함과 같다고 한 것은 열병에 땀을 내면 사지와 백 마디 관절이 일시에 가쁜하고 시원해지는 것이니 점점 병이 나아지는 의미를 취하지는 않는다. 깨달음이 닦음의 뒤에 있기 때문에 증득(證)에 해당한다.

양자의 설을 대조해 보고 알겠지만 둘째 유형인 先修後悟(선수후오) 역시 첫째인 先悟後修(선오후수)처럼 징관의 설을 종밀이 계승하여 부연한 것임이 한 눈에 드러난다.
 
곧 先修는 '服藥(복약)'이고 後悟는 '病除(병제)'이며 이 선수후오는 '證俉(증오)'라는 大疏의 설은 모두 징관이 말한 선수후오설 가운데 밑줄친 ①, ②, ③의 내용을 그대로 따른 것이며, [大疏초]의 설명은 大疏의 설을 부연한 것이다.
 
[연의초]에서 말한 頓修頓悟(돈수돈오)는 바로 이 先修後悟에 해당하는데, 그 내용은 이 수증론의 성격을 비유적으로 말한 것이다. 그러면 셋째인 修悟一時(수오일시)의 설을 보자.
 
    (3) 修悟一時(수오일시)
 
이 修悟一時(수오일시) 역시 앞의 두 돈오돈수의 유형과 마찬가지로 되어 있다. 곧 修는 '無心忘照(무심망조)'요 悟는 '任運寂知(임운적지)'라는 종밀의 규정은 모두 징관의 설에서 찾아진다.
大疏설의 끝 부분인 修悟一時(수오일시)가 '곧 이 해 (解)와 증득[證]에 통한다'는 말은 이 수오일시가 解悟(해오)와 證俉(증오)의 양쪽에 모두 상통한다는 뜻이며, 이러한 판단 역시 징관으로부터 유래되는 바이다.
 

澄觀說

宗密設

若云修悟一時 謂無心忘照 任運寂知 則定
                   ①        ②

慧雙運 如明鏡無心 頓照萬像 則悟道解證
                                 ③

20)(만약 닦음과 깨달음이 일시라고 한다면, 말하자면 무심하게 비추어 보며 움직임을 당하여 고요히 아니 곧 선정과 지혜를 쌍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밝은 거울이 무심하게 단박 만 가지 형상을 비추는 것과 같으니 곧 깨달음이 이해(解)와 증득(證)에 따른다)

(大疏) 修 [無心忘照] 悟 [任云寂知] 一時 卽通解證21)

(大疏 ) 謂以無相爲修 分明爲悟 悟卽慧也用也 修卽定也體也……22)

(대소) 닦음과 [무심하게 비추어 봄] 깨달음이 [움직임을 당하여 고요히 앎] 일시이니 곧 이해(解)와 증득(證)에 통한다.

(대소초) 말하자면 형상이 없는 것으로써 닦고 분명함으로써 깨닫는다. 깨달음은 곧 지혜이고 용(用)이며 닦음은 곧 선정이고 체(體)이다.

이상과 같은 결과에 따르면 先悟後修(선오후수) · 先修後悟(선수후오) · 修悟一時(수오일시)라는 頓悟頓修(돈오돈수)의 세 가지 의미는 그 명칭과 기본 정의, 解悟냐 證俉냐의 구분 등 그 전부가 본래 청량 징관에게서 논의되고 체계화된 후, 그의 제자인 종밀에게 그대로 전폭 계승되어 주장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돈오돈수를 이렇게 세분하여 말한 것은 징관이 최초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필자의 견해에 의하면 징관은 六祖壇經(육조단경) 이래 주장된 간단한 형태의 돈오돈수를 구체적으로 세 가지 의미로 전개한 최초의 인물이 된다.
 
그런데 징관이 돈오돈수를 세 가지로 구분하여 논의하기는 하였지만, 그 돈오돈수에 이상의 세 가지 의미가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
 
징관의 저서에는 위에서 인용한 구문 외에 더 이상의 해설이 들어있지 않으나, 종밀의 저서에서는 "悟와 修가 모두 頓이지만 다만 미혹이 서로 선후가 되고 혹은 동시이므로 해오와 증오의 차이를 이룬다.라고 해명하였다.
 
다시 말하면 단절해야 할 번뇌인 미혹이 깨달음과 더불어 앞서거나 뒤에 있거나 혹은 동시적인 경우를 따라서 전부 세 가지 의미가 성립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는 하여도 그 세 가지 유형의 悟修 어느 한 면이라도 漸에 떨어지지 않는 까닭은 모두 頓이기 때문이니,
 
종밀이 [대소초]에서 先修後悟(선수후오)를 해설하면서 근기와 진리 추구 등의 욕망이 매우 뛰어나 頓修漸悟(돈수점오)가 아닌 頓修頓悟(돈수돈오)를 이룬다고 한 데에서 그 진면목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2-4. 壇經과 神會 (단경과 신회)
 

이제까지 고찰해 온 바에 의하면 돈오돈수설이 선종에서 역설되기는 하였으나, 그것이 여타의 수증론과 더불어 논의되고 구체적으로 세 가지의 형태로 체계화된 것은 종밀을 거슬러 올라가 화엄종의 징관에게서 유래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징관 이전에는 누가 있어 어떤 수증론을 제시하였을까? 현재로서는 징관 이전에 돈점오수의 수증론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인물이 발견되지 않는다. 아마도 청량 징관이 여러 수증론을 정리한 최초의 인물일 것이다.
 
그러나 최소한 돈오돈수만은 징관에 의해서 다른 수증론과 함께 논의되었을 망정 결코 징관에게서 창안된 것이 아님은 명백하다. 왜냐하면 돈오돈수설은 이미 六祖壇經(육조단경)에 출현하기 때문이다.
 
육조단경은 선종의 所依經典(소의외전)으로서 그 성립년대가 8세기 초엽으로 징관의 활약 시기보다 앞선다. 이 육조단경에 대한 연구 저서와 논문은 매우 많은데 이 단경의 수증론을 기존 연구 자료에 의해 제시하면, 현존하는 단경에서는 六祖 慧能이 다만 頓修를 두 곳에서 말하였다고 본다.
 
그 하나는 "迷人漸契悟人頓修(미인점계오인도수)[미혹한 사람은 점차로 계합하고 깨달은 사람은 단박에 닦는다]"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自性自悟 頓悟頓修 亦無漸次(자성자오 돈오돈수 역무점차)[자성을 스스로 깨달아 단박 깨치고 단박 닦으며 또한 점차가 없다]"라는 것이다. 따라서 단경의 어록에 근거하면 육조는 수증론으로서 다만 돈오돈수를 권장하였다고 하겠다.
 
참고>원융, '간화선', 藏經閣,1993,p176. 이 저서는 頓漸 분야에 관하여 돈황본과 기타의 유통분을 대비하여 설명하였는데, 필자가 인용한 것은 돈황본이 아닌 여러 유통분의 설이다. 돈황본은 약간 다르지만 돈오돈수를 말함에는 차이가 없다.
 
그런데 유의할 사항이 있으니 그것은 단경이 돈오돈수를 설한 최초의 문헌이 될 수는 있으나 그 돈오돈수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단경을 설한 육조 혹은 단경의 제작자에게는 그 당시 돈오돈수라는 말만으로도 충분했는지 모르나, 후대로 갈수록 그 의미가 정확하게 파악되고 온전히 전승되었다고 보는 것은 성급한 판단일 것이다.
 
어쩌면 단경의 설이 그토록 간단했기에 돈오돈수 외에 돈오점수설도 제기되고, 또 징관 같은 학승에게서 돈오돈수가 자세히 연구되어 세 가지 의미로 정비되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여하튼 단경의 수증론이 이렇게 결정되고 나면 이제 징관 이전에 단경을 제외하고 돈오돈수와 관련하여 문제시되는 존재로서 荷擇(하택) 神會(신회)가 남는다.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듯이 신회는 최초의 돈오점수 주장자로서 낙인 찍혀 일찍부터 선종에서 비판의 대상으로 취급되어 왔다. 그리고 오늘날의 학계의 전반적인 인식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견해와는 달리 보는 학설도 있다.
 
곧 胡適(호적)은 신회의 주장은 돈오점수가 아니라 돈오돈수라고 평하였으며, 그 뒤를 이어 신회의 주장을 일종의 頓修(돈수)로 파악하는 이도 있다. 정말 신회의 주장은 본래 돈오돈수에 있었는데 후세 사람이 그를 돈오점수자로 변모시켰단 말인가?
 
신회에 대한 보다 확실한 평가의 정립을 위하여 아직도 세월을 더 요구해야 하지 않을까.
 
여하튼 신회의 주장이 어떠하였던지 그에 관계없이 돈오돈수가 가장 먼저 주장된 것은 단경이라 하겠다. 현재까지는 悟修를 겸하여 논한 돈오돈수라는 수증론을 단경 이전의 그 누가 어떤 저서에서 말하였다는 보고도 학설도 전혀 제출되지 않고 있다.
 
                   Ⅲ. 頓悟頓修의 佛敎史的 評價
 
지금까지 돈오돈수의 주장자 및 그들의 수증론과 그 기원을 고찰해 보았다. 이제부터는 지난날의 불교 역사상 돈오돈수에 내려진 여러 사람들의 평가는 어떠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다만 이 경우, 돈오돈수의 주장은 처음 중국에서 비롯되었지만 그에 대한 관심과 평가는 우리 나라에서도 이루어졌으므로 이 분야는 중국과 한국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 고찰하고자 한다.
 
          3-1. 中國
 

불교 역사상 돈오돈수라는 수증론이 최초로 제창된 곳은 불교의 발상지인 印度(인도)가 아니라 중국이며, 중국의 많은 宗派(종파) 중에서도 선종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돈오돈수가 적극 환영받은 종파도 역시 전성기의 선종이었지만, 그러나 돈오돈수의 중요한 평가를 정립한 이들은 순수한 선종의 선사들 만이 아니라 선종 이전에 융성했던 화엄종의 학승들이었다.
 
곧 화엄종의 澄觀(징관), 宗密(종밀)과 선종의 永明(영명) 등이니, 이들은 돈오돈수라는 수증론을 주장하거나 거론하는 동시에 후세에 지침이 되는 평가를 내린 장본인들이기도 하다.
 
이들의 頓悟頓修觀(돈오돈수관)은 과연 어떠했는지 이하 차례로 고찰하기로 하되, 우선 논의상 종밀의 논평부터 검토한다.
 
   1) 宗密

 
돈오돈수에 가한 규봉 종밀의 평론은 아무리 강조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다. 그 까닭은 후대의 선종, 특히 중국 만이 아니라 우리 나라의 선종에까지 끼친 영향이 대단히 컸기 때문이다. 그리고 돈오돈수가 단경에서 설해진 이래 이 수증론을 돈오점수적으로 인식하여 평가한 최초의 장본인이 바로 종밀이다.
 
돈오돈수를 징관의 견해에 따라 세 가지로 분류하여 자세히 설명한 것은 圓覺經大疏초(원각경대소초)와 圓覺經略疏초(원각경약소초)이지만, 이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논의된 곳은 [都序(도서)]이다. 이 도서에 수록된 돈오돈수의 평론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돈오돈수를 말함이 있는데 이것은 上上智(상상지)의 근성과 (見性 등의) 욕망을 즐김이 함께 수승하여 하나를 듣고 천 가지를 깨달아 위대한 摠持(총지)를 얻어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고 前際(전제)와 後際(후제)를 끊는 것을 말한다.
 
이 사람의 三業은 오직 홀로 스스로 명료하여 다른 사람이 미칠 바가 아니다.
 
또한 사적에 따라 이를 말하면 牛頭融(우두융)대사 같은 무리이다. 이 부문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으니 만약 깨달음으로 인하여 닦는다면 곧 解悟(해오)이고 만약 닦음으로 인하여 깨닫는다면 곧 證俉(증오)이다.
 
그러나 위의 것은 모두 다만 금생에 의거하여 논의한 것일 뿐이고 만약 멀리 숙세를 추구하면 곧 오직 漸뿐이고 頓이 없다. 지금 頓을 보는 자는 이미 여러 생에서 漸에 훈습되어 발현된 것이다.
 
다시 한 번 이 요지를 풀이하면, 돈오돈수는 가장 근기가 뛰어난 자를 위하여 말한 것인데, 지금 세상에서 돈오돈수를 보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많은 지난 세상에서 점차적으로 수행하며 도를 닦아 오랜 세월 동안에 걸쳐 훈습된 그 힘으로 지금 세상에서 돈오돈수가 나타난 것이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돈오돈수라는 것도 결국은 알고 보면 오랜 동안 점차 닦아 이루어진 것이라는 말이다. 이 돈오돈수에 해오와 증오가 있다고 한 것은 저 [원각경대소초]에서 말한 해오의 先悟後修(선오후수), 증오의 先修後悟(선수후오),
 
그리고 해오와 증오에 통하는 悟修一時(오수일시)를 염두에 두고 [도서]에서는 그렇게 간단히 언급한 것이다. 그러나 돈오돈수에 세 가지 의미가 있어 해오와 증오로 나뉘었어도 종밀은 그 모두를 끝내 점수적으로 본 것에는 변함이 없다.
 
따라서 종밀에게는 그 많은 수증론 중에서 오직 돈오점수만이 옳다고 인정되어 마침내 돈오점수를 힘주어 주장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都序에서는
 
"여러 가지 수증론 중에서 오직 먼저 단박 깨닫고 나중에 점차 닦는다고 말하는 것만이 위배되는 듯하나, 의심을 끊고자 한다면 어찌 햇빛이 단박에 나타나서 서리와 이슬이 점차 사라짐을 보지 못하며 ··· 그러므로 돈오점수의 의미가 매우 중요로움을 알 것이다."라고 하였고,
 
역시 종밀이 지은 [承룡圖(승룡도)]에서는 "하택은 곧 반드시 먼저 단박 깨닫고 깨달음에 의하여 닦는다. ··· 이 頓悟漸修(돈오점수)의 뜻은 대승 一藏(일장)에 갖추어져 있어도 起信(기신) · 圓覺(원각) · 華嚴(화엄)은 그 근본이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돈오돈수를 이와 같이 바라보는 종밀의 시각에는 근본적인 결핍이 노출되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돈오돈수를 구현한 대상의 적용에서 비롯된다. 앞의 인용문에서 종밀은 돈오돈수의 체험자로서 牛頭 融을 거론하면서, 이에 비하여 馬祖 道一의 禪法은 그 깨달음은 頓悟(돈오)에 접근하였으나 적중하지 못하고 그 수행은 漸修(점수)와 전적으로 어긋난다고 평하였다.
 
우두 융은 牛頭宗(우두종)의 初祖(초조)인 牛頭 慧融(혜융) 또는 牛頭 法融(법융: 594∼657) 선사를 말한다. 그 우두선의 기본 사상은 般若空觀(반야공관)에 입각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우두 법융이 돈오돈수의 구현자라고 한다면 실제의 불교사적 전개와는 맞지 않는다.
 
종밀 이후에 번창한 중국 선종은 돈오점수를 멀리하고 돈오돈수에 우호적인 임제종 계통의 출현을 맞이하게 되는데 이 계통의 수증론이 저 우두종과 같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頓修는 우두에만 속하고 달마의 문하는 漸修가 되어 우두보다 하열하다는 결론이 되기에 종밀의 주장은 당치 않다고 보는 견해는 타당하다.
 
또한 돈오돈수는 단경에서 비로소 주장되었는데, 종밀처럼 우두종의선사에게서 그 실현을 보았다고 한다면 단경의 선법이 우두종에 적용되었다는 풀이도 가능해질 것이다.
 
그러나 우두종은 종밀 자신이 4祖 道信(도신)에게서 파생한 선종이며 우두 융은 5조 홍인과 동문이라고 설명했으니, 어떻게 5조 홍인의 문하에서 창출된 육조의 돈오돈수 가르침이 육조 이전에 홍인과 동문 수학한 우두 융에게서 그 실현을 보았다는 말인가 ?
 
본래 종밀이 [도서]와 [승습도]를 지은 까닭은 당시에 서로 대립하던 선종과 교종의 일치를 도모하고, 또 유력한 선종들 중에서도 그 무렵 위명을 떨치던 마조계통의 洪州宗(홍주종)을 억제하고 종밀 자신이 속한 荷擇宗(하택종)을 정통으로 선전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들 저서에 기록된 종밀의 평론은 오늘날 정당하다고 인정할 수 없는 사태에 이르렀으니, 그 이유는 종밀이 마조의 선사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고 또 마조의 선사상을 완성한 임제의 출현을 예상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다.
 
그리하여 종밀이 우두 융을 돈오돈수자라고 규정한 사유가 있었다 할지라도 실제로 전개된 불교적 상황과는 괴리되고 말았다. 그 때문에 종밀의 돈오돈수 이해에 무리가 따랐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오돈수를 점수적으로 평가한 종밀의 주장은 후세 불교에 무시못할 이론으로 등장하였으니 그러한 증거는 이 뒤에서 계속 확인될 것이다.
 
   2) 澄觀
 
종밀의 경우, 여러 가지 수증론 가운데서 유독 돈오점수만이 옳다고 적극 주장하면서, 돈오돈수도 긴 안목으로 바라보면 결국에는 점수로 환원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징관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이미 지적하였듯이 세 가지 의미로 사용된 돈오돈수의 제창자는 징관이며, 그 밖의 다른 여러 수증론을 보다 일찍 정리한 것도 역시 징관이다. 이렇게 돈점오수의 수증론을 먼저 정비하여 종밀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징관이지만,
 
수증론을 바라보는 징관의 시각은 결코 어느 하나에 국한되어 치우치지 않았다. 이제 수증론에 관한 징관의 평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漸(점)과 頓(돈)이 같지 않음을 지금 마땅히 간략하게 말한다. 漸을 말하면 곧 마음을 살펴 청정함을 닦고 방편으로 경전을 독송하니 혹은 頓悟漸修요 혹은 漸修漸悟고, 頓을 말하면 직접 마음의 체성을 가리키며 혹은 단박에 언어를 헐어버리니 혹은 頓悟頓修요 혹은 無修無悟(무수무오)다.
 
비록 이들은 같지 않으나 모두 識心(식심)으로 함께 도리를  보는 것을 기약하고자 하니, 그 의미를 얻은 즉 쌍방이 다 뛰어나 길은 달라도 귀착점이 같으며, 의미를 잃은 즉 양 쪽이 다쳐서 죽은 양(羊)과 다름이 없으리라.
 
곧 점차적인 수증론에 돈오점수와 점수점오 등이 있고 단박 이루는 수증론에 돈오돈수와 닦음도 없고 깨달음도 없는 것 등이 있으나, 이 양 쪽에 속하는 어떤 수증론도 진리나 도리를 깨달으면 모두 다 뛰어나고 그렇지 않으면 죽은 양처럼 볼 품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징관에게는 여러 가지 수증론이 모두 나름대로의 이치가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으며, 정말로 요긴한 바는 그 어떤 수증론을 따르든 불교의 진리를 깨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있다고 본 것이다.
 
다른 연구에 따르면 징관은 南宗과 北宗의 두 禪宗을 비판하며 동시에 그들의 융회를 의도하였으므로 종밀처럼 돈오점수만을 중시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돈오점수에 편중하지 않았다는 그 논자의 판단은 앞의 인용문에 비추어 볼 때 그 타당성이 곧 인지될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단경 이래의 간단한 돈오돈수를 세 가지 의미로 분류하여 체계화한 장본인은 징관이며, 징관의 그러한 돈오돈수설은 전부가 그대로 종밀에게 전해졌다.
 
그런데도 종밀은 자신의 사정에 따라 돈오돈수를 점수 쪽으로 귀속시켜가며 돈오점수만을 주장하였지만, 징관은 결코 그러한 태도를 취하지 않고 돈오돈수라는 수중론은 여타의 수증론처럼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고 길이 있다고 평가하였던 것이다.
 
   3) 延壽

 
순수한 禪宗의 선사로서 돈오돈수의 평가에 빠져서는 안 될 존재에 영명연수가 있다. 앞에서 거론한 징관이나 종밀은 선종과 교류가 있거나 선의 조예가 있었어도 모두 華嚴宗(화엄종)의 조사들이었다. 이에 비하여 영명은 선종 五家 중의 法眼宗(법안종)의 선사로서 교학도 깊이 연구하여 당대에 이름이 높았다.
 
그 영명에게 돈점오수의 수증론이 있었으며 그 수증론은 전부 종밀의 설을 계승한 것이라는 사실은 앞에서 규명한 대로다. 그렇다면 영명은 돈오돈수의 평가조차 종밀의 주장을 따라 똑같이 점수적으로 보았던가. 아니면 다르게 보았던가?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종밀의 수증론을 계승한 영명이지만 그 평가에 있어서는 종밀의 견해를 따르면서도 자신의 독자성을 주장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영명이 판단한 수증론의 평가는 그의 저서 여러 곳에 부분적으로 산재하는데 그 평론과 주장을 인용하면 대략 아래와 같다.
 
먼저 영명은 萬善同歸集(만선동귀집)에서 말하기를, "생각컨대 이 돈오점수는 이미 佛乘(불승)과 합하여 원만한 의미에 어긋나지 않는다. 돈오돈수 같은 것도 또한 많은 생애에서 점차 닦아 금생에 단박 익숙한 것이니, 이것은 本人에게 있어 그 사정에 맞아 스스로 증험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곧 누구나 다 성불할 수 있다는 一佛乘의 교리에 합하여 諸佛(제불)의 원만한 가르침의 의미에 어긋나지 않는 것이 돈오점수라는 것이다. 확실히 영명은 돈오점수를 부정하지 않았으니 또 다른 증거로서 宗鏡錄(종경록)에서는 楞嚴經(능엄경)의 경문을 들고 있다.
 
"이제 돈오점수를 취하니 깊이 교리에 합한다. 首楞嚴經(수능엄경)에 이르기를, '이치는 비록 단박에 깨달아서 깨달음을 따라 아우러 소멸되지만 현상은 점차 닦는데 있어서 차례로 없어진다'라고 하였다."
 
영명이 인용한 경문은 현존하는 능엄경에 나오는 "理卽頓悟 乘悟倂消 事非頓除 因次第盡(이즉돈오 승오병소 사비돈제 인차제진)"이라는 구절과 몇 군데 글자가 다르지만 어쨌든 돈오점수를 뒷받침하는 증거문으로 제시한 것이다.
 
그 다음에 제시한 돈오돈수의 설명을 들어 보면, 돈오돈수 역시 지난 많은 생애에서 점차 닦아 지금 생애에서 단박에 익숙해진 것이므로 해당하는 사람은 자신의 사정에 맞아 스스로 경험하여 성취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설명은 돈오돈수를 점차적으로 귀속시킨 종밀의 주장을 그대로 되풀이한 것이다.
 
그러나 이 설명의 끝 부분, 곧 해당하는 사람은 스스로 돈오돈수를 경험할 수 있다고 말한 데에서 돈오돈수를 강조한 점이 감지된다. 이것은 영명이 돈오돈수의 수증법이 돈오점수에 환원될 것이기는 해도, 그렇다고 종밀처럼 돈오점수 하나로 밀고 나가려고 하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러한 판단은 다음의 인용문에서 잘 드러난다. "頓漸四句(돈점사구) 중에서 만약 上上根(상상근)에 의하면 돈오돈수이고 만약 上根에 의하면 돈오점수이다."라고 하여, 돈점오수의 여러 수증론 가운데 최상의 근기자에게는 돈오돈수가 적용되고 그 다음 가는 상근기에게는 때로 돈오점수가 적용된다고 하였다.
 
이러한 영명의 주장은, 上上智根性(상상지근성)을 위하여 돈오돈수를 설한다는 종밀의 견해에 돈오점수에 적합한 근기는 上根이라는 자신의 생각을 덧붙여,() 돈오돈수와 돈오점수의 두 가지가 비록 적용되는 근기는 다소 다를망정 모두 수증론으로서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참고>돈오점수가 上根에 해당한다는 규정은 종밀의 저서인 '도서'나 '원각경대소' 및 '원각경대소초'에도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규정은 영명이 제시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영명이 선종의 수증론으로서 언제까지나 그 두 가지를 동등하게 제시하지는 않았다. 그 두 가지 수증론이 모두 타당성이 있다고 간주한 영명이지만 보다 비중있게 강조한 것은 돈오돈수라고 보아야 한다. 이렇게 판단할 만한 증거는 종경록의 도처에서 발견된다. 몇 가지 예문을 발췌해 보자.
 
질문 : 부처님의 뜻은 頓敎(돈교)와 漸敎(점교)를 열었고 禪門에서는 종지가 南宗과 北宗으로 나뉘었다. 지금 이것을 널리 세상에 나타내는 것은 어떠한 宗(종)의 가르침에 의한 것인가?
 
대답 : 이것은 見性하여 마음을 밝히는 것을 논하니, 자세히 종파를 나누어 그 가르침을 판정하지 않으며 다만 직접 頓悟圓修(돈오원수)에 들어가는 것을 제시할 뿐이다 ···. 만약 敎에 의하면 화엄이니 곧 一心(일심)으로 광대한 글을 시현하고, 만약 宗에 의하면 곧 달마이니 직접 중생의 心性(심성)의 뜻을 나타낸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돈교와 점교로 나뉘고 선종의 종지는 남종과 북종으로 갈라진 상황에서 영명이 이 종경록을 저술하여 세상에 나타내고자 하는 바는, 종래에 분파된 여러 종파의 교리를 판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수행자로 하여금 직접 頓悟圓修(돈오원수)에 들어가게 하고자 함이라는 것이다.
 
돈오원수란 돈오하여 원만한 수행을 이룬다는 뜻이며, 이 돈오원수의 성취를 지향하는 종경록의 취지에 합치하는 것은 敎(교)로서는 화엄이고 宗(종)으로서는 달마의 선종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이에 상응하는 수증론에는 돈오점수도 있을 것이고 돈오돈수도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이하의 예문에서는 종경록의 취지에 보다 잘 적용되는 수증론은 다름 아닌 돈오돈수라고 뚜렷이 발언하고 있다. 혹은 돈오돈수가 바로 宗鏡錄(종경록)에 해당한다.
 
화엄종과 같이 깨달음을 해가 비추는 것처럼 취급하니 곧 解悟와 證悟가 모두 전부 頓(돈)이다. 이 말은 돈오돈수에 해오와 증오가 있지만 그 모두가 돈오돈수이며, 이 돈오돈수가 바로 종경록의 근본 취지에 부합한다는 것이다.
 
이와 똑같은 의미를 말하는 보다 자세한 문장이 또 있으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논의상 번호를 붙여 구분한다.
 
① 돈오돈수를 말함이 있는데 이것은 上上根의 근성과 (見性 등의) 욕망을 즐김이 함께 수승하여 하나를 듣고 천 가지를 깨달아 위대한 摠持(총지)를 얻어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고 前際(전제)와 後際(후제)를 끊는 것을 말한다 ···.
 
② 또 단박 깨달음은 이 생애를 여의지 않고 곧 해탈을 얻으니, 사자새끼가 처음 태어나자마자 진짜 사자로 이름되는 것처럼 곧 닦을 때 즉시 부처의 지위에 들어가며, 봄에 대나무에서 죽순이 나오면 봄을 여의지 않고 곧 어미 대나무와 가지런하게 자라는 것과 같다 ···.
 
이것이 바로 宗鏡(종경)의 圓頓門(원돈문)이니, 곧 이를 마음에서 요지하여 제한이 없으며 다시 앞과 뒤가 없어 만법이 동시라, 그런 까닭으로 證道歌(증도가)에서 말하되, '그러므로 禪門에서는 마음을 요달하여 단박에 생함이 없는 慈忍(자인)의 힘에 들어가도다'라고 하였다.
 
③ 또 만약 깨달음을 써서 닦으면 곧 解悟이고 만약 닦음으로 인하여 깨달으면 곧 證悟이다.
 
지금 인용한 문장은 그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돈오돈수를 설명한 것이다. 그 중에서 ①과 ③에 속하는 설명은 모두 기존의 종밀설을 그대로 따른 것이고, ②에 속하는 설명은 영명 자신의 견해를 첨가한 것이다.
 
그런데 ②의 설명 가운데 '이것이 바로 宗鏡의 圓頓門이다'라고 하였는데, 이곳에서 설명한 바는 바로 돈오돈수 및 그에 대한 정의와 사자새끼와 죽순의 비유설이므로 결국은 돈오돈수의 내용을 가리킨다.
 
따라서 그 돈오돈수가 바로 종경록에서 표방하는 원돈문의 수증론이라는 것이다.
 
이어서 그 다음에 증문으로 인용한 선종에서도 이름 높은 永嘉(영가) 玄覺(현각)선사의 증도가의 한 구절은, 선종에서는 마음을 깊이 요달하여 無生法印(무생법인)의 경지에 단박에 도달함을 토로한 것이니 이 역시 돈오돈수의 경계에 잘 부합하는 예문이 아닐 수 없다.
 
인용문의 맨 나중에 나오는 해오와 증오라는 말은 돈오돈수에 해오와 증오의 구별이 있다는 것으로 이 역시 예전의 종밀의 구별을 수용한 것이다. 이로써 일찍이 청량이 수립한 세 가지 의미의 돈오돈수가 연수에게도 전승되었음을 볼 수 있다.
 
보통 연수는 종밀의 禪敎一致(선교일치)사상을 계승하여 주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여러 가지 수증론도 앞에서 고찰한 대로 종밀의 설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연수는 선종의 선사로서 "祖師(조사)는 頓悟하여 직접 (如來地에) 들어가는 것을 禪宗이라 이름한다"라고 하였으니, 어찌 단박에 見性을 성취하는 돈오돈수를 보다 강조하지 않았겠는가.
 
결론적으로 말하면 영명은 종밀이 정리한 수증론을 그대로 계승하여 설명했으나 종밀과 달리 돈오점수 외에 다시 돈오돈수를 함께 주장하였으며, 보다 더 힘 주어 강조한 것은 돈오돈수였던 것으로 판정된다.
 
     

  4) 永明 이외의 禪師들
 
중국의 불교는 唐武宗(당무종) 때 단행된 會昌(회창)의 法難(법난)을 계기로 종래의 화엄종, 밀교 등이 세력을 잃고 그 대신 선종의 발전을 보게 된다.
 
그리하여 당의 말기에서 五代에 걸쳐 선종의 五家가 분립하여 바야흐로 선종의 전성시대를 맞이하는데, 9세기 이후부터 선종의 주류는 그 오가 중에서도 이미 臨濟宗(임제종)에 이전되었다.
 
이 시기의 수증론에 관한 선종의 동향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조명될 수 있으니, 그 하나는 하택과 종밀에 대한 비판적 견해이고, 또 하나는 돈오돈수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는 것이다.
 
하택종에 대한 비판은 靑原系(청원계)의 法眼 文益(문익: 885∼958) 같은 선사들이 하택을 知解宗徒(지해종도)라고 비판한 데에서 확인되며, 하택의 종지를 이은 종밀 역시 선종 일반에서 환대받지 못하였다.
 
또한 오가 중에 후대에 가장 번성한 임제종은 종밀이 생전에 그토록 힘을 기울여 억제하려던 홍주종에서 배출된 臨濟 義玄(임제 의현)을 시초로 하여 성립되었는데,
그 임제종의 선사상은 看話禪(간화선)을 주장한 大慧 宗고(대혜 종고: 1089∼1163)에 의하여 결실을 맺는다.
 
그런데 이 간화선의 방법을 지금은 돈오돈수를 함축한 것으로 간주하거나, 또는 점차적인 지위와 방편을 빌지 않고 적절하게 구경에 도달할 수 있는 법이기에 돈오돈수 그 자체는 아니라도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라고 보기도 한다.
 
또 宋代(송대)의 선사들 중에서 돈오돈수와 돈오점수라는 용어를 사용한 예는 거의 없었으나, 그들이 이런 수증론들이 말하는 주제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한다.
이러한 시각은 선종의 수증론에 대한 적절한 표현으로서, 실제로 이름있는 선사들의 語錄(어록) 등에서 명확한 돈오돈수 용어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간화선의 선법을 어떻게 보든 그에 근거한 수증론은 돈오돈수와 무관하지 않아 임제하에서 돈오돈수의 견해를 피력한 대표적인 인물로서 天目中峰(천목 중봉: 1263∼1323)이 거론된다.
 
한편 중국 선종의 흐름은 南宋시대에 이르러 다소 변하여 임제종과 함께 曹洞宗(조동종)이 번성하였다. 조동종은 靑原계에서 성립된 종파로서 宏智(굉지) 正覺(정각: 1091∼1157)의 默照禪(묵조선) 주장으로 간화선과 비견된다.
 
그 묵조선은 임제종에 밀려 우리 나라에서는 예로부터 수용되지 않았으나, 그 방법에 간화선과 더불어 비록 차이가 있어도 기본적으로 公案(공안)의 투과에 근거한 것이므로 역시 頓的인 사상이 내포되어 있지 않다고 말 못할 것이다.
 
이 종파의 돈오돈수자로서 從容錄(종용록)을 펴낸 萬松(만종) 行秀(행수: 1166∼1246)를 지적하기도 한다.
 
이러한 중국 선종의 상황을 지켜보면서 수증론에 관한 선종의 대체적인 경향을 말하자면, 영명처럼 돈오돈수 외에 돈오점수를 인정한 선사도 있었으나 그 수효는 매우 미미하였고,
대다수는 하택과 종밀의 종지에 비판적이면서 화두와 공안에 입각한 선법으로서 돈오돈수에 동조하거나 관련있었던 것이다.
 
       3-2. 韓國
 

돈오돈수라는 수증론이 우리 나라에서 어느 때 처음으로 주장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六祖와 馬祖의 禪法에 근거하여 성립된 초기의 선문이 九山禪門(구산선문)이므로 그 이후로
 
단경이나 馬祖禪(마조선)을 매개로 하여 돈오돈수 사상이 이 땅에 전파되었다고 하지만, 전해지는 문헌의 부족 등으로 그 상세한 전모는 추측의 정도를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이다.
 
그 후 고려불교를 중흥시킨 보조 지눌의 평가에 영향받아 한국의 선불교는 이따금 돈오점수를 주장하곤 하였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비록 지눌처럼 적극적으로 저서를 지어 주장하지는 않았으나 여전히 돈오돈수를 취하거나 신봉하기도 하였으니, 그러한 경우는 많지 않으나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서 모두 발견된다.
 
그리하여 보조 이후 조선 말기까지를 해당 범위로 할 때, 돈오돈수와 관련하여 언급할 만한 인물로서 우선 현재 知訥(지눌) 외에 慧諶(혜심) · 西山(서산) · 雲峯(운봉)선사가 눈에 띈다. 이들의 돈오돈수관은 또 어떠했는지 연대순으로 열거해 본다.

   1) 知訥
 
우리 나라에 선종이 전래된 이래 육조단경에서 제창된 돈오돈수를 마다하고 돈오점수를 주장한 최초의 인물은 普照國師(보조국사) 知訥(지눌: 1158∼1210)이다. 지눌스님의 사상은 일반에 널리 알려져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간략하게 요점만 지적하겠다.
 
지눌은 여러 가지 수증론을 논의한 종밀 등의 저서에 이미 접하였으므로 자연 돈오돈수를 비롯한 많은 수증론을 알고 있었다. 거두절미하고 지눌의 돈오돈수관을 修心訣(수심결)에서 들어 보자.
 
대저 道에 들어가는데 문이 많으나 요약해 말하자면 頓悟와 漸修의 두 문에 지나지 않는다. 비록 頓悟頓修(돈오돈수)는 최상근기가 들어갈 수 있다고 하지만, 만약 과거를 추구하면 이미 여러 생애에서 깨달음에 의지하여 닦아 점차 훈습해 와서
 
금생에 이르러 들은 즉시 깨달음을 발하여 일시에 단박 미친 것이라. 실로 논의하자면 이것도 또한 먼저 깨닫고 나중에 닦는 근기이다. 곧 이 돈오점수의 두 문은 모든 성인들의 법칙이다 ···.
 
이상의 설명을 들어보면 곧 바로 돈오돈수를 돈오점수적으로 환원시켜 해석한 종밀의 설이 연상될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실제로 지눌의 이러한 평론은 그 인용 출처를 명시하지 않았을 뿐이지 저 종밀의 돈오돈수관을 그대로 요약한 것이 확실하다.
 
곧 돈오돈수는 최상의 근기가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나, 과거 여러 생애에서 깨달음에 의하여 닦아 오다가 금생에서 단박에 닦아 마치므로 결국은 돈오점수로 귀속된다는 말은, 모두 앞에서 고찰한 종밀의 돈오돈수관에 다름이 아니라는 사실을 누구라도 확인할 것이다.
 
그리하여 종래부터 지눌의 사상은 돈오돈수가 아닌 돈오점수로 대표되어 왔다.
그러나 지금의 사정은 예전과 다른 바가 있다. 그 까닭은 지눌에게 초기의 돈오점수로부터의 사상 전환이 있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곧 退翁 性徹(퇴옹 성철)스님의 지적에 따르면,
 
초기의 저술인 定慧結社文(정혜결사문)과 修心訣(수심결)에서는 하택과 규봉의 돈오점수를 達磨正傳(달마정전)이라고 역설하다가, 만년에 저술한 看話決疑論(간화결의론)과 節要(절요)에서는 하택과 규봉은 曹門(조문)의 敎外別傳(교외별전)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지눌의 저술들을 英譯(영역)한 Robert Buswell 교수는, 지눌이 節要(절요)를 지은 만년에 여전히 돈오점수의 정당성을 부정하려 하지는 않았으나, 당시 고려에 퍼져나가고 있던 禪의 새로운 형태인 看話禪(간화선)과 관련하여 돈오돈수 쪽으로도 상당히 기울어져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이와 같은 근래의 주장에 입각하면, 지눌은 처음에는 종밀의 견해를 좇아 돈오점수만을 역설하다가 만년에 이르러서는 돈오돈수 쪽으로도 전향하였던 것이다.
 
지눌의 사상 전환에 대한 보다 상세한 연구가 있어야 하겠지만, 이와 같은 논평 정도만으로도 지눌에게 돈오돈수와 화합할 수 있는 여지가 남아 있다는 것은 사실이라 하겠다.
 
   2) 慧諶
 
보조의 사상이 만년에 돈오돈수 쪽으로 전향되었다는 주장을 들어보았지만 바로 그로부터 궁금한 일이 야기된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오늘날의 연구자에게도 그러한 사실이 발견되었다면,
 
보조의 저글들을 유심히 읽어보면 드러나는 사실들을, 보조의 생존시대나 그 사후에라도 그러한 변천을 파악한 자가 보조의 제자들을 포함하여 하나도 없었다면 오히려 이상하지 않은가 하는 점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그 입장을 미묘하게 전하는 한 권의 책이 있다. 그 책명은 宗鏡撮要(종경촬요)로서 영명 연수가 지은 종경록 백 권의 방대한 내용을 紹興(소흥) 연간(1131∼1162)에 曇賁(담분)스님이 요점만을 추려내어 엮은 것이다.
 
따라서 이 책 중에는 영명의 수증론도 발췌되어 있으며, 그 내용은 종경록의 수증론을 요약해 놓은 것이다.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의미에서 이 종경촬요의 수증론을 간단히 인용해 본다. 편의상 번호를 붙인다.
 
① 頓漸(돈점)의 修證(수증)은 근기가 같지 않다. 漸修頓悟가 있으니 나무를 베는데 여러 조각으로 점차 파하여 일시에 단박 쓰러짐과 같고 ··· 頓修漸悟가 있으니 사람이 활쏘기를 배우는데 ··· 漸修漸悟가 있으니 구층의 대를 오르는데 ··· 먼저 頓悟하고 나중에 바야흐로 漸修함이 있으니 ···
 
② 頓悟頓修가 있으니 이것은 上上根性과 (見性 등의) 욕망을 즐김이 함께 수승하여 하나를 듣고 천 가지를 깨달아 ··· 이 생을 여의지 않고 곧 해탈을 얻으니 사자새끼가 처음 태어나자마자 진짜 사자로 이름되는 것처럼 ··· 이것이 바로 宗鏡(종경)의 圓頓門(원돈문)이니 ··· 만약 닦음으로 인하여 깨달으면 곧 證悟(증오)이다.
 
이상의 내용은 앞에서 한 번씩 인용하여 설명한 종경록의 수증론과 완전히 동일하다. 곧 수증론 가운데
 
①에 속하는 점수돈오 내지 돈오점수의 네 가지는 종밀의 수증론과 대조하며 영명의 그 계승을 확인한 바 있고, ②에 해당하는 해명한 데서 알아본 바 있다. 따라서 이 종경촬요의 수증론에서도 영명이 역설한 수증론으로서 종경록의 원돈문과 부합하는 것은 돈오돈수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 종경촬요의 맨 끝에는 이 책을 인쇄하여 보시하라고 부탁한 刑記(형기)가 붙어 있는데, 이 간기를 쓴 이는 송광사에 주석했던 眞覺國師(진각국사) 無依子(무의자) 慧諶(혜심: 1178∼1234)이다.
 
혜심은 바로 보조 지눌의 직제자였으니, 그 혜심이 이 책의 유포자였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바로 고려 왕조 때에도 돈오돈수의 주장자 내지 신봉자가 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이러한 발견은 결코 새로운 주장이 못된다.
 
일찍이 혜심이 看話禪(간화선)을 집성한 禪門拈頌(선문념송)을 편찬한 데에서 그의 입지가 돈오돈수에 근거한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일이다. 따라서 이번에
종경촬요의 수증론에 입각하여 혜심의 사상이 돈오돈수에 있었음을 드러낸 필자의 작업은 기존의 판정에 조그만 증거를 하나 더 보탠 정도이다.
 
   3) 西山
 
선문염송을 편찬하고 종경촬요를 유포하며 돈오돈수를 지향한 혜심국사 이후 뚜렷한 돈오돈수의 주장자가 발견되지 않은 채 李朝時代(이조시대)로 옮겨가는데, 그 조선시대에서 수증론과 더불어 주목할 만한 고승으로 西山大師(서산대사) 淸虛(청허) 休靜(휴정: 1520∼1604)이 꼽힌다.
 
西山은 조선불교 역사상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한 고승이었던 바, 과연 어떠한 수증론을 선택하여 지지하였을까? 이에 대한 견해가 몇 가지 있다.
 
R. Buswell 교수는 서산의 어떤 저서에 의거하여 판단한 것인지 이 점을 밝히지 않았으나, 서산같이 전적으로 간화선만 행한 후대의 선사들도 지눌의 돈오점수설을 수용하게 되어
 
돈오점수에 찬사를 바쳤다고 보았다. 또 서산의 사상을 주로 선가귀감에 한하여 연구한 논문에서는 서산의 수증론은 돈오점수에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성철스님은, 서산이 禪家龜鑑(선가귀감)을 지은 44세 때에는 돈오점수의 敎義(교의)를 먼저 배운 후 그 교의를 버리고 참선하라고 지시하였지만, 나이 들어 묘향산 금선대 시절에는
 
사상이 변화하여 圓頓信解(원돈신해)와 頓悟漸修는 死句(사구)이며 知解之病(지해지병)이라고 나무라며 경절문의 活句(활구)로 일관하여 후세의 名訓(명훈)이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서산의 남아 있는 저서는 여러 가지이며 대표적인 것은 일반적으로 [선가귀감]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이 선가귀감에 한하여 판단하면, 서산의 수증론은 누가 보아도 돈오점수에 있었음이 확연해진다. 그 예문을 일부 들어 보자.
 
그러므로 배우는 이는 먼저 참다운 가르침으로써 不變(불변)과 隨然(수연)의 두 가지 의미가 자기 마음의 性(성)과 相(상)이고 頓悟와 漸修의 두 문이 자기 수행의 처음과 끝이라는 것을 자세히 분별해야 한다.
 
그런 후에 敎義(교의)를 놓아 버리고 다만 자기 마음에 현전하는 한 생각으로써 禪旨(선지)를 자세히 참구한다면 반드시 얻는 바가 있을 것이니 말하자면 出身(출신)의 活路(활로)이다. 규봉이 말하기를, 설사 참으로 頓悟(돈오)하였어도 마침내 점차적인 수행을 해야 한다고 하였으니 진실로 옳은 말이다.
 
이 밖에도 돈오점수에 관한 말이 몇 곳에서 더 시설되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선가귀감에서 취한 서산의 수증론이 돈오점수에 있었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선가귀감]이 서산의 저서 모든 것은 아니라
 
그 외에도 心法要抄(심법요초)와 淸虛集(청허집) 등이 있으며, 또한 66세 때 편저한 禪敎釋(선교석)과 말년에 제자인 四溟大師(사명대사)에게 남긴 禪敎訣(선교결)도 있다.
 
앞에서 성철스님이 서산이 말년에 돈오점수를 비판하고 경절문의 활구로 일관하였다고 주장한 근거로 삼고 있는 문헌은 바로 [선교결] 등이다. 그 증거가 되는 구절을 뽑아 보면 이와 같다.
 
지금 禪(선)의 뜻을 그릇되게 이어받은 자는 혹은 頓漸(돈점)의 門으로써 바른 법맥을 삼고 혹은 圓頓(원돈)의 가르침으로써 宗乘(종승)을 지으며 ··· 혹은 그림자를 인식함으로써 자신으로 삼아, 눈 멀고 귀 먹은 방(棒)과 할(喝)을 마구 자행하여 부끄러운 줄을 모르니 이는 참으로 무슨 마음인가?
 
그 법을 비방하는 허물을 내가 어찌 감히 말하리오 ···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이제 그대가 팔방의 납자 무리들을 대하여 칼을 쓰되 긴밀히 하여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을 하지 말 것이며,
 
바로 본분의 경절문 활구로써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깨달아 스스로 얻게 하여야 바야흐로 宗師(종사)가 사람을 위하는 됨됨이니라. ··· 옛날 馬祖(마조)가 한 번 소리치자 백장은 귀가 멀고 황벽은 혀를 내둘렀으니 이것이 임제종의 연원이다. ···
 
이 글 중 처음에 나오는 '頓漸之門(돈점지문)'이란 바로 頓悟漸修門(돈오점수문)의 약칭이니 頓悟漸修를 때로는 頓漸으로 줄여 사용한 예는 이미 종밀의 저서에서도 엿보인다. 또, '圓頓之敎(원돈지교)'는 교종의 최고봉인 圓頓敎의 華嚴宗(화엄종) 교리를 말한다.
 
그런데 이 돈오점수나 원돈의 가르침은 禪宗의 종지와는 거리가 있어 그것으로 선의 법맥을 삼는 것은 오히려 허물이 된다고 말하며, 그리하여 끝 부분에 가서 수행자들을 대할 때는 경절문의 활구를 써서 수행자 스스로 증득하게 하여야 하며, 그래야만 선종의 정맥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러한 증언에 입각하면 [선교결]을 지은 말년에 서산이 돈오점수와 원돈교를 거부한 것이 확실하다. 따라서 서산이 수증론으로써 일생 동안 돈오점수를 신봉하였다고 말할 수는 없으며,
 
보다 정확하게 평하려면 [선가귀감]을 지은 때는 돈오점수를 수용하여 지지하였으나 [선교결] 등을 지은 무렵에는 돈오점수의 수행법을 버리고 오직 경절문으로 일관하였다고 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평가는 결국 성철스님의 주장과 동일하게 귀결되는 바이다.
 
그렇다면 서산의 돈오돈수관은 어떠하였을까? 이미 종밀과 보조의 저서를 알고 있었으며 돈오점수도 언급하였으니 돈오돈수를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서산의 禪敎觀(선교관)을 피력한 저서들 중에서 선가귀감은 물론 그 후에 지은 [선교석]과 [선교결] 및 [심법요초] 어디에도 돈오돈수에 관한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서산의 돈오돈수관이 어떠하였다고 명확하게 단정하기는 곤란하다.
 
하지만 말년에 이르러 원돈교의와 돈오점수를 부정하고 경절문의 참구로 일관한 것은 수증론으로서 돈오돈수에 입각하였거나 또는 거의 접근하였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4) 雲峯
 
조선시대의 저술 대부분은 文集(문집)이거나 私記(사기)로서 불교 교리를 논의한 저서는 극히 드물다. 그런 희귀한 교리 저서 중에 肅宗(숙종) 12년인 1686년에 지은 心性論(심성론)이 있으며, 그 저자는 大智(대지) 雲峯禪師(운봉선사)이다.
 
이 심성론은 주로 불교의 교리에 입각하여 心性을 논의한 것인데, 그 속에서 大乘起信論(대승기신론)에서 논의한 始覺(시각)에 頓悟와 漸悟가 있음을 말하며, 이어서 頓悟頓修를 거론하고 있다.
 
그러나 운봉선사가 돈오돈수를 어떻게 설명했든지 그것에 관계없이 운봉의 돈오돈수관을 엿보자고 한다면 이 [심성론]의 결말을 엿보는 정도로 가할 것이다. 그 결말 부분을 인용해 본다.
 
대저 道(도)에 들어가는데 문이 많으나 요약해 말하자면 頓悟와 漸修의 두 문에 지나지 않는다. 비록 頓悟頓修는 최상근기가 들어갈 수 있다고 하지만, 만약 과거를 추구하면 이미 여러 생애에서 깨달음에 의지하여 닦아 점차 훈습해 와서
 
금생에 이르러 들은 즉시 깨달음을 발하여 일시에 단박 마친 것이라, 실로 논의하자면 이것도 또한 먼저 깨닫고 나중에 닦는 근기이다. 곧 이 頓漸의 두 문은 모든 성인들의 법칙이다 ···.
 
앞에서부터 본 논고를 읽어본 이라면 이 글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분명히 그렇다. 돈오돈수를 평한 운봉의 이와 같은 말은 비록 그 출처를 명시하지 않았으나, 이미 한 번 인용한 보조의 돈오돈수 평가문과 조금도 글자 하나 틀리지 않고 전부 똑같다.
 
길게 말할 것도 없이 운봉의 돈오돈수 평가는 저 보조의 견해와 같고, 더 나아가 종밀의 주장을 추종한 것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사건이 발견된다. 이 [심성론]의 저자 운봉은 西山大師의 후예인 雨化和尙(우화화상)의 제자이다.
 
따라서 운봉의 師祖(사조)인 서산이 처음에는 돈오점수를 지지하다가 말년에는 이를 거부하였는데도 그 법손에게서 다시금 돈오점수가 재연된 셈이다.
 
운봉은 서산의 말년 저술인 [선교결] 등을 입수하여 읽어 볼 기회도 없었단 말인가? 그 자세한 경위는 불명확해도 이러한 사실은 宗儒抑佛(종유억불)하의 조선조에서도 돈오돈수와 돈오점수를 둘러싼 다른 견해들이 얼마간 분분했음을 입증하는 사례이다.
 
이 점은 고려조에서 지눌에 의해 돈오점수가 역설되다가 만년에 돈오돈수로 반응을 보이자 그 제자인 혜심부터 돈오돈수로 회향한 것과 대조적으로 비친다.
 
                      Ⅳ. 맺는말
 
頓悟頓修 !
 
근래 퇴옹 성철스님의 발언으로 야기된 이 문제는, 그러나 유구한 불교의 역사를 되돌아 보면서 예전부터 주장되고 논의되어 온 전통 깊은 선종의 수증론이었음이 확인되었다.
 
그리하여 지금까지의 고찰을 토대로 하여 이렇게 평할 수 있을 것이다.
돈오돈수는 어제 오늘에 시작된 것도 아니요, 성철스님 혼자서 독단적으로 주장한 것도 아니다. 근원을 따지자면 저 멀리 육조에게서 유래되었고, 시비를 논하자면 대다수인에게 지지되고 연관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앞으로 남은 과제는 무엇인가?
 
돈오돈수라는 수증론의 내용은 어떤 것이며, 성철스님이 말한 돈오돈수는 또 어떤 것인가?
과연 돈오돈수는 어떻게 佛道(불도)를 성취한다는 말인가?

 

 

 

제 4집_5 (3/3) 돈오돈수의 기원과 주장자 및 불교역사상의 평가_c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