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깨달은 분이 뇌가 망가져서 말도 못하고 이상한 행동을 한다면 그 때 그분의 깨달음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아뢰아식에있다고 해야 할까요?
A. 일단 깨달았다고 할 수 있겠구요. 청정도론을 찾아보니까 아나함 이상은 해치는 일이 못 벌어진답니다. 불도 범접하지 못하고. 어떤 분이 질문했어요. 깨달은 분에게 전신마취 걸면 어떻게 될까? 전신마취해서어떻게 할 수가 없답니다. 아나함 이상 되면 세속의 거친 일을 그분에게 적용하지 못 한다고 합니다. 업에 의해 돌아가실 수는 있으나 이상한 일이 일어나거나 할 수는 없다.그렇게 나옵니다. 깨달음 자체는 없습니다.깨달음은 있는 것을 지우는것이 깨달음이지 한 점 식이 자유로워졌다고 하는 것은 상태가 아니라서 몸이 아무리 망가지고 하더라도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Q. 법성게는 화엄경의 이야기입니다. 니까야를 공부해보면 부처님이 깨달음에 도달하는 과정은 숙명통 천안통 누진통으로 가시지 않습니까? 대승불교에서 제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이 삼명이 없더라구요. 화엄경에서 말씀하신 하나의 티끌 안에 여럿이 있다고 하는 것이 지금의 저에게 전생이 다 들어가 있고 한 시간이 …과거 전생이 저 하나로 나타나고 이런 이야기가 아닐까? 그렇게 봐야 부처님의 가르침하고 법성게의 이야기가 일치하는 것이 아닐까요?
다음 질문은 객관세계가 있는 겁니까? 없는 겁니까? 저는 자연과학을 전공했는데 마치 객관세계가 없는 것 같이 말씀을 하시는데 시간을 측정하고 제가 보지 않더라도 바깥에서 반도체가 만들어지고 그런 것들이 제 생활에 영향을 주는데 객관세계가 없다고 하는 것이 화엄에서 얘기한 기세간器世間 이 아닌가요? 기세器世間 간과 중생세간이 혼돈되어서 이렇게 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A. '한 찰라 속에 과거가 다 들어간다'
화엄경 법성게 일미진중함시방을 말씀드렸거든요. 다음 구절이 무량원겁즉일념 無量遠劫卽一念 일념즉심무량겁一念卽心無量劫이라고 하는 구절이 나옵니다. 일미진중함시방은 스마트폰, TV, 라디오를 가지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 순간 모든 공간 속에 스마트폰 전파가 들어와 있습니다. 다행히 주파수가 맞으면 전파가 수신이 되거든요. 이 안에 모든 분들 모습들이 들어와 있구요. 일미진중함시방은 예를 들기 쉬운데 일념즉심무량겁의 경우는 한 찰라 속에 과거가 다 들어간다는 이야기인데 기기 중에 녹음기 MP3 같은 경우가 해당합니다. 일미진중함시방을 응용한 기기는 많이 퍼져 있습니다. 일념즉심무량겁을 응용한 기기는 많이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에 쉽게 설명을 잘 못하겠지만 비디오, 카메라 든지 하는 것들은 그 물질 속에 그 때 있었던 사건들이 각인이 되었다는 것이거든요. 그것을 재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컵도 이 컵을 만들 때 모든 정보가 각인이 되어 있을 겁니다. 이 찰라 속에 무한히 들어가 있다는 얘기이고 부처님께서 삼매의 눈이 열려 전생을 기억하시는 것은 일념즉심무량겁의 이치가 있어 가능하구요.
화엄경 일미진중함시방이나 일념즉심무량겁은 모두 아비달마구사론에 나온 것입니다. 아비달마는 찰라 미진을 이야기 하지만 닫혀 있어요. 객관적인 것만 이야기 합니다. 화엄에서는 그것이 모두 담고 있다는 열린 상태를 이야기 하기 때문에 초기불교의 무상무아의 가르침이 아비달마에서 찰라미진설로 시간공간론이 긍정적으로 바뀐 것이구요 화엄에서는 열린 세계로 바뀝니다. 화엄에서 일미진을 라이프니찌의 단자론과 비교를 많이 합니다. 단자(모나드)는 차이점이 뭐냐하면 창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화엄의 일미진은 창이 있습니다. 우주가 다 들어와 있습니다.
'주관 객관을 나누는 이분법에서 벗어나자'
객관세계는 없는 것인가? 질문하셨는데 일체유심조를 말하죠. 모든 것이 마음이 만들었다고 하는 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일체가 물질이라고 하면 오히려 이해가 쉽습니다. 불교용어로 유식무경唯識無境 이라고 하는 것이 있지요. 오직 마음일뿐 대상,경계는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유식무경이 일체유심조에요. 그것이 이해가 안되면 유경무식이라고 해도 됩니다. 밖의 모든 것이 대상, 풍경이에요. 여기 이 탱화도 풍경이고 긁을 때 느낌도 밖에서 일어납니다. 꿈을 꿀 때 내가 뜻하지 않은 영상들이 나타납니다.이것도 풍경이에요. 갑자기 어제 먹은 도넛츠가 생각이 나요. 이것도 창 밖에 참새가 한마리 날아가듯이 똑같이 풍경이에요. 실제로 마음, 머릿 속에서 일어났는데 엄밀히 보니까 풍경과 다를 바가 없더라는 말입니다. 이런 경우 유경무식의 통찰이 생기거든요. 같은 이야기라는 겁니다. 유식무경이 모든 것이 마음이라는 주장이 아니구요 경과 식의 이분법, 주관과 객관의 이분법적 시각을 타파하기 위해 통합적으로 설명하려고 하는 것인데 유경무식, 일체유경 이렇게 이해해도 됩니다.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마음이라면 마음이랄 것도 없죠. 모두가 마음이에요. 그러면 마음이라 붙일 것도 없지요. 세상에 마음 아니라고 할 것이 있어야 마음이라고 하는 개념이 성립합니다. 모두가 물질이에요. 뇌도 마음도 모두가 물질이에요. 그러면 물질이라고할 것도 없지요. 물질 아닌 것이 있어야 물질이라고 하는 개념이 성립하는데.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유식무경 보다 더 깊은 것은 경식구민境識俱泯 이라고 합니다. 대상과 마음이 모두가 사라졌다고 합니다. 유식유경 '주관도 있고 객관도 있다.마음도 있고 대상도 있다.'고 하는 것이 일반 사람들 사고방식이고 한 단계 올라가면 유식무경 '오직 마음만 있고 대상은 없다.' 이렇게 되구요. 하나 더 올라가면 경식구민 이라고 하는 말이 경에 나옵니다. 최상의 조망은 대상은 마음이라고 할 것도 없고 대상이라고 할 것도 없다고 합니다. 대상 세계가 없다는 것이 아니고 마음만 있고 몽상만 하고 산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관 객관을 나누는 이분법에서 벗어나자는 말입니다.
Q 아비달마에서 의식이 심장에 의지해서 ..하고 있는데 뇌과학과 충돌한다고 보십니까?
A. 앞 찰라의 육식이 마음의 토대입니다.
아비달마 중에 남방논서에 하다야바투 심장의 토대라고 번역합니다. 빨리어로는 하다야바투 이고 범어로는 후리다야바수투하고 합니다. 후리다야는 반야심경 할 때 심장이구요 바스투는 토대 대상 실체입니다. 마음의 거주처가 심장이라고 하는데 그건 남방불교가 아닙니다. 남방논서라고 하더라도 외도 것들이 많이 들어가 있어요. 심장 속에 마음이 있다고 하는 것은 우빠니샤드의 사상입니다. 우빠니사드에서 아하뜨만이 심장속에 있다고 하는데 오역이 돼서 심장 속에 마음이 있다고 합니다. 잘못된 이론이 남방논서에 들어간 것인데 마하쉬사하드(?)의 법문에 나와 있기를 요즘은 심장을 이식하기 때문에 심장 속에 마음이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뇌속에 있다고 해야 한다고 합니다. 앞서 이야기 했듯이 뇌도 마음의 토대가 아니에요. 구사론에서는 앞 찰라의 육식이 마음의 토대입니다. 의근이 심장이냐 뇌이냐 하는 것인데 의근이 심장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불교에서 하는 말이구요 뇌인줄 알았는데 뇌도 아닙니다. '앞 찰라의 육식이 의근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남방논서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 안에도 잡다한 것이 많이 섞여있다고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Q. 강조하신 내용대로 욕계 중생의 두 가지 관심사인 '먹는 것'과 '섹스'에서 놓여나 자유로워지는 것이 불자의 길이라면, 일반 사찰에서 특히 요즘 들어 사찰음식을 중시하고 그런 음식점도 만들어 널리 펴고 경연대회를 여는 등 나름 노력하고 홍보하고 있으며, 또 어떤 사찰에서는 젊은 미혼 남녀를 짝지어주기 위한 미팅을 주선하는 등 여러 활동들을 하고 있는데, 이를 불교적으로 어떻게 보면 좋을지...
A. 세상을 교화할 때는 십악을 방편으로 잘 써서 교화를 하는 것이 맞을 것...
섹스하고 먹이가 불교에서는 버리지만 그 두 가지가 행복의 원천입니다. 앞서 오계 봉독하셨는데 십악하면 범위가 더 넓어집니다. 십계. 살생, 도둑질하지 말라, 음행하지 말라하고 하는데 악은 행복의 원천입니다. 세속살 때 악만 지으면서 잡히지만 않으면 최고로 행복한 사람이에요. 예전 영웅호걸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라이온 킹 같은 경우 사자 중에서 가장 센 놈이에요. 뭘까요? 어떻게 할까요? 살생 가장 잘 하는 놈이에요. 어떤 놈이 와도 다 물어 죽입니다. 도둑질, 누가 먹이 구해오면 다 강탈합니다 다음 음행, 모든 암사자 모두 거느립니다. 옛날 황제, 왕 이런 사람들 다 라이온 킹들입니다. 징기스칸, 진시왕, 알렉산더, 삼천궁녀 거느리고 있잖아요. 거짓말도 마찬가지에요. 내가 곤란할 때 거짓말해서 모면 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내가 친한친구가 있는데 다른 친구를 사귀어서 나와 멀어졌어요. 그때 이간질해서 떼어버립니다. 양설, "제가 원래 아주 나쁜 놈인데.." "그래" 하고 멀어지면 다시 나와 가까워집니다. 양설, 두 말하는 겁니다. 기어, 직장상사에게 그냥 발린 말을 합니다. 이럴 경우에 나중에 인사고과에서 좋은 점수 받아서 승진합니다. 실제로 악이 행복의 원천인 것을 명심하셔야 해요. 그렇게 사는 것이 호락호락 하지 않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거꾸로 살라고 10선을 행하라고 하십니다. 최강자일 경우 다 차지합니다. 2인자일 경우만 해도 최강자에게 채근 당합니다. 힘에 의해 서열이 잡힌 사회는 모두가 불행한 사회에요. 최강자 라이온킹도 3년 못 가서 2인자로 밀려난답니다. 부처님은그 당시 짐승 같은 사회에 평화의 오아시스를 만드신 분입니다. '10선을 행하라' '짐승과 반대로 살아라'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을 모을 때는 행복을 가지고 모아야 합니다. 음식과 결혼 말씀하셨는데 하여간 세력은 행복이에요. 상도선원에 오래 나오신 분들이 많지 않다고 하시더라구요. 왜 그런지 아세요? 법문을 해주기 때문이에요. 복을 드려야 하는데 십악을 충족하게 해드려야 하는데 그걸 안한다는 말입니다.재물 모으게 해드리고 병낫게 해드리고 그게 기도하는 절은 세력이 커요. 부산 ㅇㅇ사, 구ㅇ사…… 모두 기복입니다. 기복을 말할 경우 세력이 생기는데 지혜를 말할 경우 세력이 안 생깁니다. 왜? 일반 사람들이 다 복을 추구하지 "내생에 안 태어나게 해드릴테니 번뇌 제거하세요" 하면 몇 명이 그걸 따르겠습니까?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많은데. 출가가 보통 일이 아니고 그래서 스님을 공경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와 반대 길을 사시는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직도 십악의 짜릿한 행복의 미련을 버리지 못해서 이러고 있습니다.
사찰음식 당연히 본질과는 어긋납니다. 그렇지만 그런 것을 다 칠 경우 아무도 안 모여요. 혼자 독학으로 수행하다 혼자 늙어 죽습니다. 이렇게 됩니다. 세상을 교화할 때는 십악을 잘 써서 그렇게 교화를 하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왜 입과 성기가 중심인가 하면 성기가 뭐냐 하면 다윈이 이야기 했던 성 선택이에요. 종족의 최강자가 성을 선택해서 후세를 낳습니다. 그 다음 자연 선택은 먹이에요. 다윈 진화론 원리가 두가지가 있는데 natural selection이 있고 sexual selection이 있습니다. natural selection은 먹이 획득에서 굶어 죽지 않은 놈들입니다. 불교 공부하다 보면 짐승도 살만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큰 오해입니다. 그 놈의 입장에서 보면 고통이 두 가지가 있습ㄴ다. 굶주림의 고통과 살해의 공포입니다. 어리버리 하면 다른 놈이 잡아 먹습니다. 우리 몸이 고기 몸이기 때문에. 왜 고기 몸인 줄 아세요? 남의 고기를 먹고 살거나 남에게 먹히기 때문에 고기 몸이에요. 욕계 중생은 먹고 먹히고 삽니다. 인간은 최강의 포식자이기 때문에 먹히는 것을 몰라요. 남의 고기만 먹고 살기 때문에. 야생동물은 항상 기민하게 살펴야만 목숨이 보존이 되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습니다. 늦게 가는 벌레는 먹히기도 하고. 호락호락 하지 않습니다. 늙은 사자는 한 보름을 굶다가 굶어죽습니다. 굶어 죽지도 못합니다. 쓰러지면 벌써 독수리가 숨 끊어지기 전에 내려옵니다. 하이에나도 뜯어 먹습니다. 모든 고기 몸의 생명은 죽을 때 살해 당합니다. 인간만이 행복이 뭐냐하면 병들어 죽는 겁니다. 최고의 행복은 말기 암에 걸려 죽는 것. 세상과 작별할 것, 내가 죽을 것을 미리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행복한 죽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을 준비할 수 있기 때문에. 나쁜 죽음은 비명횡사 하는 것. 자다가 죽는 것. 이것은 준비도 못하고 죽습니다. 내세에 어디로 갈지도 모릅니다.
입과 성기가 왜 중요하냐 하면 성 선택과 내가 여기에 이렇게 있다고 하는 것은 먹이 획득에 성공을 했다고하는 것이고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Sex에 성공했기 때문입니다. 왜? 성적 능력이 생기는 사춘기 이후까지 살아 남았기 때문입니다. 두 가지가 성공했기 때문에 내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 분들, 조부모, 증조부모고조부모, 선조들이 다 성공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생명의 유전자 속에는 암수를 불문하고 어마어마한 식욕이 있고 음욕이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행동의 중심이에요. 프로이드의 입장입니다. 리비도,이드.
프로이드, 다윈, 불교가 다 겹치는데 그런 서양 사상가들의 책을 안 봐도 얼굴 모습만 봐도 다 알아요. 얼굴에 이목구비가 다 몰려 있지요. 먹이 탐지기에요. 눈,코 같은게 입주위에 포진한 먹이 탐지기에요. 원래는 짐승이 앞에 있던 거에요. 왜 동물이 움직입니까? 먹이 먹으려고 움직이는 겁니다. 지렁이는 앞에 입구멍만 있어요. 이런 놈들이 약해요. 눈이 있으면 더 강자가 됩니다. 그러다가 감관이 달라붙죠. 그러다가 직립을 해요. 그래서 여기에 오밀조밀하게 몰려있는 겁니다. 먹이 탐지기가 삼단계가 있고 눈,코,혀를 통과해야 목구멍으로 들어가죠? 귀는 먹히지 않는 진통탐지기에요. 큰 놈이 공기를 진동시켜요. 쿵쿵쿵 물고기는 물속에서 옆줄이 있어요. 천둥하면 금방 도망갑니다. 큰 놈이 자기에게 위협을 주기 때문에귀는 먹히지 않게 하는 기관이구요. 눈,코,입은 먹는 기관입니다. 영화 보고 노래하고 하는 것이 원래 기능이 아닙니다. 사람의 생김새도 우리는 축생이구나 중생이구나 부처님 가르침은 '인간아 들어라'가 아니고 '중생아 들어라'고 시작합니다. 그게 생명의 본질이고 그 비참함을 알 때 불교가 마음에 와닿습니다.
지금은 가상, 인공적인 것들이 발달해 있어서 짐승 아닌채 하고 아침에 세수하고 변장하고 나와서 다른 생명체인 것 처럼 시늉을 하잖아요. 그런데 나중에 죽을 때 다시 그 세계로 들어갑니다. 그 세계에서 애기로 태어납니다. 전혜린씨가 쓴 수필에 보면 애기 낳고 나서 '나도 동물이구나' 하는 상심에 빠집니다. 그걸 몰랐나요? 불교에서는 '나도 짐승이구나'하는 것을 알아야 약육강식 속에서 부침을 하기 때문에. 거기에서 마음이 벗어나서 그것이 부처님 가르침이고. 그렇다고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는것은 아닙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고 마음이 한 걸음 떠나 있고 그러면 자기 삶이 바둑장기 훈수 두듯이 객관적으로 보입니다. 그 때 최고의 재벌도 될 수 있고 권력자도 될 수 있고 객관적으로 보기 때문에. 그렇지만 마음은 한 수 접고서 봐라 하는 것입니다. 악은 당연히 불교 방편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Q. 책을보니까 아라한이나 부처님이나 깨달음을 얻고나서도 몸의 고통은 여전히 있어서 어떤 아라한은 자살을 했고 부처님은 주치의를 뵙고 복통을 일으키면서 몸의 고통을 느끼셨는데 정신적 번뇌를 다 벗어난 후에 뇌의 작용이 몸의 고통을 제어하거나 상관이 없거나 할 수 있고 아라한이나 부처님께서 그런 육체적 고통이 왔을 때 어떻게 해결하고 넘어가셨는지 해석을 부탁드립니다.
A. 깨달음은 '한 점 식'의 흐름이 동물적 속성,번뇌에서 벗어나는 것, 몸의 고통과는 상관이 없다.
깨달았다해서 몸의 고통이 나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신선도, 도가 같은 경우는 그런 것을 할 꺼에요. 불교는 몸의 고통과는 아무 관련성이 없습니다. 한 점 식의 흐름이 동물적 속성 번뇌에서 벗어나면 해탈이구요 부처님도 돌아가실 때 복통도 앓고 하시는데 그것을 불교의 깨달음을 통해서 제어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만약 제어하려고 한다면 신통력을 배우던지 도가의 신선술을 닦던지 하면 몰라도 불교와는 무관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앓아누워도 깨달은 분은 깨달은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하나 예를 들자면 사성제가 불교의 가르침을 가장 간략하게 요약한 가르침인데 불교 가르침의 핵심은 일반 사람들은 어려움이 있을 때 세상속에서 해결해요. 배고프면 돈을 벌고 열등감을 느끼면 권력을 얻고 하는 등 바깥에서 해결합니다.짐승도 바깥에서 해결합니다. 그런데 근본적인 해결은 마음에서 된다고 하는 겁니다. 사성제 핵심은 일반적인 사람들이 하듯이 세상밖에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의 번뇌를 뿌리 뽑아야 해결된다고 하는 겁니다.
[출처] [초청법문]7월세째주_뇌과학과 무아Q&A (상도선원) | 작성자 백운암 상도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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