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영, 학문과 신행의 일치를 실천한 석학
특집 | 재가불교운동을 이끈 사람들
[78호] 2019년 06월 01일 (토) |
임동주 limdj12@daum.net |
1. 이기영의 생애
불연(不然) 이기영(李箕永)은 1960년대 이후 현대 한국불교에서 불교학 연구와 재가불교의 흥기 및 발전에 크게 기여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에 그의 생애를 간략히 소개하고 그가 추구한 이상적 불교와 구체적 신행 활동을 조명하고자 한다.
이기영은 일제강점기인 1922년 2월 20일 황해도 봉산에서 태어났다. 1941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사학과에 입학하여 예과(豫科) 2년을 수료하였다. 이어서 법문학부 사학과에서 학업을 이수하다가 일제의 학병징병으로 전쟁에 나갔으며, 1945년 해방을 맞아 귀국하였다. 이후 고향 사리원에서 역사 교사를 하다가 1950년 한국전쟁 발발 후 국군의 북진 시 피난 대열에 합류, 남하하여 대구에 정착하였다. 1952년부터 대구 효성여고의 역사 교사로 재직하였는데, 당시 효성여대 학장 전석재(全碩在) 신부의 도움으로 외국 유학의 기회를 얻었다. 1954년 7월부터 1960년 4월까지 벨기에의 루뱅 대학에서 역사학과 불교학을, 또 파리 대학에서 종교학을 수학하였다. 그는 벨기에에서 대승불교의 전반적 이론과 불교 문헌학의 탄탄한 기초를 닦았다.
1960년 4월 한국으로 귀국한 후 서울대 · 서강대 · 동국대 등에서 강사를 역임하고, 1964년 동국대에 인도철학과가 창립되면서 전임강사 및 교수로서 학문적 역량을 펼치게 되었다. 이때 학문적으로 가장 큰 수확은 1967년 《원효사상》을 펴낸 것이었다. 그런데 이를 계기로 1969년 불교대학장을 그만두고 동국대에서 물러났다. 같은 해 영남대학교 교수로 부임하여 교양학부장과 신라문화연구소장을 역임하였다. 1972년 국민대학 학장을 역임하고, 1974년 다시 동국대로 복귀하였다. 그리고 1976년 동국대 개교 70주년 기념 세계불교학술회의를 주관하였다. 한편, 1978년에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의 창설과 초기운영에 참여하였다.
특히, 1974년 한국불교연구원을 창립하고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불교의 연구와 교육활동을 바탕으로 올바른 신행의 정립과 불교의 사회적 실천을 추구하였다. 1988년 한국불교연구원 부설 ‘원효학당’을 설립하여 불교의 체계적 교육을 시행, 재가불교운동에 필요한 수많은 법사를 배출하는 등 인재 양성에 진력하였다. 1994년부터 2년간 재가불자들의 결사체인 ‘한국재가불교회의’의 공동회장으로서 재가불교운동을 이끌었다. 1996년 11월 9일 ‘종교와 국가’를 주제로 동국대 강당에서 열린 한국불교연구원 주최 국제학술대회 중 돌연 별세하였다.
2. 이기영의 불교학과 이상적인 불교
1) 불교사상의 현대적 해석
이기영의 평생 저술을 보면 저서가 번역서를 포함하여 66권이며, 논문이 138편이다. 이 외에 각종 잡지 등에 기고한 논설과 신문 및 단체 회보 등에 게재한 글들을 합치면 총 1,000편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이 중에 그가 유학에서 돌아온 후 1960년대에 발표한 논문이 10여 편에 이른다. 그런데 이 시기의 가장 괄목할 업적은 《원효사상》(원음각, 1967) 출간이었다.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하였으며 이기영의 대표적 저술이 되었다. 원효의 《기신론소 · 별기(起信論疏 · 別記)》를 주제로 한 《원효사상》은 불교사상의 현대적 해석이라는 점에서 불교학계는 물론 일반인들에게도 한국전통사상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관심을 불러일으킨 화제작이었다.
1969년부터 1986년 사이에는 29권의 저서, 9권의 번역서, 44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 시기 그의 학문적 편력은 대승불교철학 · 비교종교 · 한국불교 · 실존철학 등 다방면에 걸쳐 진행되었다.
이기영은 일찍이 “한국의 불교전통 속에서 오늘의 문제에 대처할 수 있는 빛을 보았고, 그중에서도 원효를 정점으로 한 최고 수준의 불교사상에서 눈부신 광명을 느꼈다. 그의 연구는 원효의 불교사상 연구에 집중되었는데, 원효사상을 그 자체로서 분석하고 정리하는 작업뿐 아니라, 사상의 보편적 진리성을 밝히고 그것의 현대적 의미를 살려내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쏟았다.”
1967년 《원효사상》 출간 이후 원효 관련 연구 논문은 총 45편에 달한다.이렇듯 원효의 사상에 관한 많은 연구에서 이기영은 원효사상의 핵심이 ‘귀일심원 요익중생(歸一心源 饒益衆生)’에 있다고 파악했다. 이기영이 특히 원효사상 연구에 집중하고 그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서술한 수많은 논설을 보면 그가 추구하는 바람직한 불교와 신행의 목표는 이 명제를 근간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이상적인 불교와 현대의 보살도
이기영의 연구 분야 중 불교철학 관련 연구는 불교의 학술적 토대를 튼튼하게 구축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토대 위에 바람직한 불교의 성립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기영이 추구하고 기대한 이상적인 불교는 기본적으로 대승불교를 지향하고 있다. 또한 원효사상의 집중적인 연구를 통하여 터득한 불교 이해를 그는 일관되게 원효의 교상판석에 의거하여 전개한다. 이른바 삼승의 불교를 회통하는 일승의 불교를 역설한다. 그것은 정법(正法)으로서 대승불교를 강조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지성불교의 핵심이며 이를 바탕으로 한 대승보살도의 구도불교가 구현되어 한국불교가 감성적인 기복불교의 편중에서 벗어나기를 기대하였다. 그리하여 출가수행자 중심의 산중불교가 아니라 재가불교로 불교의 대중화가 이루어지기를 염원하였다.
지성불교의 핵심을 정법(正法)의 구현에 두었던 이기영은 “오늘 우리 시대는 적어도 겉으로는 정법이 잘 알려지지 않은 시대이며 전 시대의 좋지 않은 잔재들이 남아 있어 정법이 새롭게 발돋움하지 못하는 시대이다. 설상가상으로 외래 사조의 범람이 극심하다. 과연 오늘 우리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어디 어떤 모습으로 정법이 살아 있는지 아직은 잘 눈에 띄질 않는다. 그래도 믿어서 좋은 것은 정법만이 영원히 죽지 않으며 그 정법만이 이 세계를 유지시키는 원동력이요, 핵심이라는 사실이다.”라고 술회하였다.
그러니까 이기영이 생각하는 불교는 결코 고고하거나 군림하는 종교, 또는 퇴영적이고 은둔적인 종교가 아니다. 그는 〈현대인의 보살도〉에서 “나는 생각한다. 불교는 결코 가난한 사람이 생활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참기만 하라고 그렇게 가르치는 종교가 아니다. 또 불교는 결코 부자가 이웃도 아랑곳없이 혼자서 그 재부를 무분별하게 남용해도 좋다고 그렇게 가르치는 종교도 아니다. 또 불교는 남이야 불편하고 고통스럽고 손해를 보든 말든 수단과 방편을 가리지 않고 자기 돈벌이에만 몰두해도 좋다고 가르치는 그러한 종교도 아니다. 그뿐만 아니다. 불교는 결코 이와 같은 모든 사태에 대하여 개의할 필요가 없는 것, 그 모든 것은 허망한 것이라고 가르치는 종교가 아닌 것이다.”라고 역설하였다. 불교는 사회의 문제에 적극 발언하고 개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기영은 ‘귀일심원 요익중생(歸一心源 饒益衆生)’의 이상을 달성하기 위한 실천덕목으로 육바라밀을 제시하였다. 특히 개인 각자가 ‘육근(六根)의 바라밀다’를 실천할 것을 제안하였다. 안 · 이 · 비 · 설 · 신 · 의로 육바라밀을 실천하라는 것이다. 이 육근의 바라밀다, 육식(六識)의 바라밀다가 이루어지면 육경(六境)의 바라밀다가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 그것을 사회라고 하든지 국가라고 하든지 국토의 완성이 이루어질 것이 분명하다고 역설하였다. 개인의 실천이 개인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개인이 사는 사회의 완성, 불국토의 실현으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3. 이기영의 구체적 신행 활동
1) 재가불교의 흥기와 발전의 중심
이기영이 외국 유학에서 국내로 돌아왔던 1960년 당시는 한국불교의 새로운 장이 열리기 시작하던 때이다. 1962년에 비구 중심의 ‘대한불교조계종’이 창립되고 이를 구심점으로 현대한국불교가 펼쳐지게 되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1960년을 전후하여 출가자 중심의 사찰과 교단 이외에 재가신자들 중심의 수많은 단체가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이는 서구문명의 급격한 유입과 타 종교의 급격한 부상에 대한 반대급부로 촉발된 불자들의 결집이 한몫했다는 분석도 있다.
현대 한국불교사에서 재가불교운동의 효시는 1957년에 창립된 ‘달마회’라고 할 수 있다. 이후 전국신도회, 대한불교청년회,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삼보법회, 한국거사림, 마야부인회, 전국관음회, 원각회, 학사불교회 등 일일이 다 매거(枚擧)할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재가 신행단체가 창립되어 1970년대∼1990년대에 재가불교의 전성기를 구가하게 되었다. 이 시기 이기영은 그 중심에서 활약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기영의 구체적인 신행 활동은 대학생을 대상으로 한 활발한 전법 활동, 한국불교연구원을 창립하여 구도회를 조직하고 이를 통하여 본격적으로 벌인 다양한 활동, 그리고 한국재가불교회의 공동회장으로 한국 재가불교운동에 리더십을 발휘한 활약 등으로 집약할 수 있다.
2) 대학생을 대상으로 한 전법 활동
1963년에 창립한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와 이기영과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불교학자인 이기영이 연구 및 교육 활동의 연장선에서 불교운동의 지도자로서 그 면모를 드러내기 시작한 신행이 바로 대학생 불자를 대상으로 한 전법(傳法) 활동에서 비롯하였기 때문이다.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는 1963년 창립 당시 서울의 17개 대학과 삼군사관학교 불교학생회가 결합, 지성불교 · 대중불교를 기치로 탄생하였다.
초창기 주요 활동은 전국의 각 대학 캠퍼스에서 당시로써는 새로운 포교 방법인 불교사상 강연회를 개최하여 불교를 포교함으로써 회원을 다수 확보하고 대학마다 불교학생회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1963년 초창기부터 전국의 대학 캠퍼스에서 개최하는 불교사상 강연회에 이기영이 단골 연사로 참여하였다. 우리의 전통사상으로서 이해가 어려운 것으로 인식되었던 불교, 그 진수를 현대적 언어와 문법으로 알기 쉽게 해석하여 전달함으로써 많은 대학생으로 하여금 불교에 입문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는 1963년 12월 법주사에서 개최한 대불련 제1차 수련대회와 1964년 6월 월정사에 개최한 제2차 수련대회에 연이어 참석하여 법문하는 등, 전국에서 모인 대학생 불자들의 수련을 직접 지도하였다. 당시 학생들의 수련 지도를 지원하기 위하여 이기영과 함께 참석한 인사로 청담 스님, 탄허 스님, 홍도 스님, 이한상 거사, 서경수 교수, 박성배 교수 등이 있었다.
이후 이기영의 대학생 전법 활동은 평생에 걸쳐 지속되었다. 그리고 항상 누구에게나 불교의 올바른 이해와 함께 그 현대적 의미를 밝혀 현실에 적용, 실천할 것을 강조하였다. 자신이 처한 세계와 현실 상황을 직시하여 문제를 파악하고 그 문제 해결에 신행의 초점을 맞추어 나갈 것을 역설하였다. 실제로 사회적 실천을 향한 대학생들의 신행결사를 이끌고 여기서 불교와 사회에 대한 새로운 주제와 내용을 한 모델로 제시하였다. 그것이 바로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가 새로운 불교운동 차원에서 기획하여 개최한 이른바 ‘화랑대회’였다. 제1차 화랑대회는 1972년 8월 22일부터 6일간 개최되었다. 종래 사찰에서 하던 수련대회와 달리 전북 무주 구천동 산야에서 전국의 17개 지부 83개 지회의 대표자 12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성황리에 대회가 치러졌다. 대회의 주제는 ‘한국청년의 새로운 정신적 방향’이었다. 이 주제에 대한 기조강연을 이기영이 담당하였다. 그는 강연에서 “과연 우리는 이념과 실천의 면에서 7세기 신라의 화랑들과 견주어 부끄러움 없는 정신적 자세와 역량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가 있을까?”라고 질문을 던지고 먼저 민족정신에서 반성의 실마리를 찾고, 종교적 철학적 각성, 역사관의 문제, 사회윤리의 정화를 내용으로 주제를 이끌어 나갔다. 특히 역사관의 문제에서 보살도의 이론적 해명과 사회적 실천을 촉구하는 운동이 어느 때보다도 시급함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오늘 우리 사회에 통용되고 있는 행복을 물질적인 데에서 찾으려는 생각과 행동, 불의에 대한 방관과 무관심 등 그릇된 윤리관을 바로잡아 사회윤리를 정화해 나가야 함을 강조하였다.
3) 한국불교연구원 및 구도회 활동
(1) 불교의 지성화를 위한 불교기초과정 강좌 개최
이기영은 1974년 한국불교연구원을 창립하였다. 민족문화의 중핵을 이루고 있는 불교의 사상 · 역사 · 예술 등 제 분야의 연구조사를 통해 창조적 민족문화의 창달을 도모하여 널리 국민의 정신적 역량을 함양하는 데 기여함을 목적으로 하였다. 구체적으로는 공동연구 · 공동수련 · 공동참여를 통하여 우리 고유의 문화적 전통을 계승, 발전시키고 나아가 새로운 한국의 빛과 예지를 계발하고자 하였다.
이기영은 불교의 사상과 역사와 예술 등의 연구를 일차적인 목표로 하고 있지만, 무엇보다도 불자들의 올바른 신행의 정립에 중점을 두었다. 건전한 윤리의식의 함양과 실천을 통하여 건강한 사회, 정직한 국가를 이룩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착수한 일이 불교의 지성화(구도불교), 불교의 대중화(재가불교)를 위한 교육사업으로 불교기초과정 강좌의 개설이었다. 불교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증대시켜 그가 추구한 이상적인 불교를 전파하는 일이었다. 이 길만이 한국의 잘못된 불교 현실 즉, 기복불교와 산중불교를 타파하여 구도불교와 재가불교를 실현하는 길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불교기초과정 강좌는 1974년부터 매년 4, 5회 시행하였다. 주로 서울 · 대구 · 부산 지역의 일반인과 대학생 및 청년을 대상으로 1996년 11월 9일 이기영이 타계하기 직전인 1996년 9월까지 무려 110회를 개최하였다. 이기영이 주로 강의를 담당하였으며, 동국대 교수 서경수와 정병조가 함께하였다. 이 강좌는 매회 평균 100명 내외의 인원이 참가하여 20여 년 동안 수강한 인원이 1만 명이 넘는다. 또한 이 기간에 별도로 개최한 중고등학생 및 청소년을 위한 강좌는 15회로, 수강 인원이 모두 2천 명에 달하였다. 보통 1주일간 매일 3시간씩 진행된 이 강좌는 당시에는 장소가 여의치 못하여 대학문화관, 청소년회관, 대학동창회관, 예식장, 사설학원 강당을 임차하여 이용하였지만 뜻밖에도 대성황을 이루었다. 이를 계기로 불교계에서는 도심 소재 사찰과 재가단체들이 이른바 불교교양대학을 개설하여 불교강좌를 개최하는 붐을 이루었다. 불교의 대중화, 즉 재가불교의 흥기가 촉발된 것이다.
(2) 구도회 창립과 공동수련 · 공동참여 실시
한국불교연구원에서는 불교기초과정 강좌를 이수한 후 계속하여 함께 불교를 공부하고 수행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결합하여 신행단체를 조직, 구도회를 창립하였다.
그 취지는 “기복불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재가불자들의 불교관을 바로잡고 바른 신심과 바른 이해 그리고 바른 수행을 통하여, 부처님의 정법을 배우고 닦으며 사회를 맑게 하고자 하는 데 뜻을 두었다.” 1974년 10월 서울에 처음 ‘한국불교연구원 구도회’라는 명칭의 재가불교단체를 설립하였다. 이어서 1976년 2월 대구지부를, 1977년 8월 부산지부를 창립하였다. 1988년 한국불교연구원이 사단법인으로 등록하면서 명칭을 각각 서울구도회, 대구구도회, 부산구도회로 정하였다. 1990년 광주구도회가 설립되고 1999년에 대전구도회가 설립되었다. 현재는 광주구도회는 존속하지 않으며, 부산구도회는 2018년 부산불교 침체의 영향으로 소멸되었다. 1990년대 초까지는 구도회 산하에 청년부, 대학생부, 중고등부를 육성하여 각기 정기법회 및 수련대회를 개최하고 봉사활동을 펴는 등 활동의 폭을 넓혔다.
기본적으로 구도회는 지역별로 매주 정기법회를 개최하고 있다. 그리고 공동수련이라는 슬로건 아래 매년 하계휴가 기간을 이용하여 이른바 연수과정으로서 전국수련대회를 개최하는데, 회원이면 의무적으로 참여하게 되어 있다. 1974년 8월 통도사에서 처음 개최하였으며 이후 실상사, 선암사, 쌍계사, 금산사, 불영사, 여천 흥국사, 직지사, 지리산 칠불사 등지에서 개최하였다. 이기영의 지도로 1996년까지 23회가 개최되었는데 총 2천여 명이 참가하였다. 2005년부터 연구원 부설 유마정사에서 개최하고 있으며 2018년까지 총 45회를 개최하였다. 예불, 참선, 염불 등의 수행 정진에 초점을 맞춘 수련대회이다. 한편 1989년 8월 전국의 초 · 중 · 고 교사들을 대상으로 전국교사불자회를 조직하고 연수회를 매년 개최해 왔다.
이 외에 불교탁본 전시회, 경주불적답사와 사회적 실천의 일환인 야학 보현학교 운영, 소녀 · 소년가장 돕기, 무료의료봉사, 양로원 방문, 국군장병 위문 등의 활동 등도 이루어졌다. 이렇게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여 건실한 재가불교 신행의 모범을 보여준 구도회에는 특기할 만한 사항이 있다. 사홍서원과 별도의 독자적인 ‘삼대서원’이 그것이다. 여기에는 원효사상을 바탕으로 한 이기영의 신행관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대승보살도를 바탕으로 그가 일관되게 추구하는 지성불교(구도불교)의 이념이자 실천 강령이다.
삼대 서원
一. 우리는 구도자(求道者) 보살(菩薩)의 길을 간다.
一. 우리는 귀일심원(歸一心源) 요익중생(饒益衆生)의 이상(理想)을 산다.
一. 우리는 사무량심(四無量心) 십바라밀(十波羅蜜)을 실천한다.
(3) 부설 교육기관 ‘원효학당’을 개설하여 법사 배출
이기영은 1988년 한국불교연구원을 법인화하고 부설 교육기관으로 2년제 대학원 과정의 ‘원효학당’을 개설하였다. 원효의 종교관과 철학관에 입각하여 조국의 미래를 책임질 인재를 양성함을 목적으로 설립한 것이다. 원효학당은 다양한 학제적 접근을 통하여 중점적으로 원효사상의 요체를 현대적으로 이해하도록 운영해가고 있다. 1990년 25명의 동장법사 배출을 시작으로 이후 2000년대 초까지 500여 명에 달하는 법사를 배출하였다.
3) 한국재가불교회의 공동회장으로 활동
이기영은 1994년부터 재가불자들의 결사체인 ‘한국재가불교회의’의 공동회장으로 활동하였다. 그의 신행이 불교의 사회적 실천이라는 불교사회운동으로 확장된 것이다. 이를 계기로 이후 재가불교운동은 시민사회 운동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그는 1995년부터는 ‘경부고속철도 경주통과백지화 추진위원회’ 위원장으로서 경주지역 문화 보존운동에 앞장섰다. 1996년 3월 ‘고속철도 경주 도심 통과 백지화를 위한 대정부 청원 및 성명대회’를 한국일보사 12층 강당에서 개최한 후 서명운동에 동참한 170,682명의 청원인 명단을 청와대에 제출하였다. 그리고 1996년 5월 ‘경부고속철도 경주통과 백지화’를 위한 궐기대회를 시민사회 단체의 수많은 회원이 동참한 가운데 종묘공원과 탑골공원에서 가졌다. 그러자 정부는 이에 새로운 고속철도노선안을 내놓기에 이르렀는데 당시 이기영은 이러한 정부의 움직임과 관련하여 〈한국경제신문〉에 기고한 논설을 통해 당국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일갈하였다.
신라 천년의 고도 경주는 신라문화가 우리 역사상 세계에서도 독특한 찬란한 빛으로 가득 찬 것임을 아는 그 아들 · 딸들에게는 천만금 수조 원과도 바꿀 수 없는 민족의 보배이다. 따라서 역대 정부는 그 문화적 가치를 보존하고 지켜야 할 의무를 갖고 있다. 다행히 문화체육부가 그러한 뜻이 담긴 고속철도노선안을 내놓아 오랫동안 규제만으로 불이익을 당해온 경주시민들에게도 희망을 갖게 한 것은 잘한 일이다. 물론 아직도 보완해야 할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 그리고 건설교통부는 처음에 경솔하게 노선을 결정하고 지금도 이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점에 대해서, 일찌감치 그 원인을 파기하고 학계나 문화계의 여론을 존중하는 것이 후환을 적게 하는 길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경주는 천년 민족의 숭고한 얼과 문화가 숨 쉬는 곳이다. 이것을 하루아침에 파괴해버리는 것은 만행이다. 최고 결정자의 선처가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특히, 이기영은 1996년 ‘한국불교재가회의’에 학술 · 문화 · 경제 등 다방면의 소위원회를 설치하고 본격적인 불교사회화의 기치를 올렸다. 그러나 그해 11월 9일 타계함으로써 그 꿈을 실현하지 못하였다.
4. 이기영이 남긴 교훈과 과제
1) 정법을 현대에 살려 나가는 일
이기영 선생은 1991년 자신의 고희기념 논총 《불교와 역사》의 서문 〈세월을 보내고 맞으며〉에서 자신의 지나간 생애를 돌아보고 다가올 세월 즉, 고희 이후의 생애에 무엇을 할 것인가를 다음과 같이 토로하였다.
이제 정말 조용히 조용히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원효가 제시한 정법을 현대에 살려가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 나는 1990년대를 잘 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정법을 현대에 살려가는 일’에서 이기영 선생이 말하는 정법의 내용은 한마디로 말해서 ‘귀일심원 요익중생’이다. 그리고 그것을 현대에 살려가는 일은 사회의 현실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그동안의 불교학 연구와 그것을 사회하기 위한 구체적인 신행활동이 모두 그 일이었음은 불문가지이다. 그런데 이기영은 계속하여 그 일을 수행할 것을 다짐한 것이다. 실제로 고희년 이후 발표한 논문만 하더라도 20편에 이른다. 한편, 불교와 사회의 현실이 그로 하여금 가만히 있게 하지 않았다. 앞 장의 구체적 신행 활동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가 고희를 맞이한 1991년 ‘한국불교재가회의’를 결성에 나서고, 이후 1994년 재가불자들의 결사체인 그 조직의 공동회장을 맡아 1996년 타계하기 전까지 재가불교운동을 이끌었다. 그의 다짐대로 불교학 연구와 사회적 실천은 그의 신행 활동으로서 일관되게 계속된 것이었다.
학자이자 교육자로서 이기영이 불교학의 연구와 교육, 그리고 신행을 통하여 우리에게 준 교훈은 한둘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본받아야 할 것은 그가 보여준 불교학 연구의 방향성에서 찾을 수 있다. 그의 연구는 대부분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빛나는 예지를 찾는 작업으로 진행되었다. 그 결과 한국의 불교전통 속에서 현실 문제 해결의 열쇠를 발견해내었다. 그것이 바로 원효사상이었다. 특히 그 핵심으로서 ‘귀일심원 요익중생’의 삶을 불교의 이상으로 제시하였다. 이것이 인간의 본래적인 모습과 인간이 도달해야 할 이상적인 모습을 동시에 명확히 밝혀주고 있는 진리라고 가르친 것이다. 이기영은 학문 연구도 종교적 성찰과 실천, 즉 신행도 이것의 실현에 목표를 두어야 함을 교훈으로 남긴 것이다.
2)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
(1) 한국불교의 세계화
한국불교는 인도불교 · 중국불교 · 일본불교 · 티베트불교 할 것 없이 상대적으로 세계적 관심을 끌 만한 유인 요소를 계발하지 못하였다. 중국과 일본을 잇는 가교적 역할 등의 인식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먼저 이루어야 할 일은 한국불교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계발하여 널리 알리는 일이다. 일찍이 이기영은 1969년 하와이대학 주최 한국학 국제학술대회에서 〈한국적 사유의 일 전형〉(《동방학지》 10집, 연세대)이라는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그는 한국불교의 세계화를 위한 밑거름으로 국내 개최의 국제학술대회를 매우 중요시하였다. 이에 세계의 석학들을 통해 한국불교를 인식시키고 선양하는 일이 한국불교 세계화의 지름길이라고 믿었다. 1976년 동국대 개교 70주년 기념 세계불교대회 개최를 주관하였다. 당시 대회의 주제는 ‘불교와 현대사회’로 12개국 200여 명의 불교학자가 대거 참가하였다. 1989년부터 이기영은 한국불교연구원 주최로 국제불교학술대회를 매년 개최하였다.
(2) 불교의 새로운 모델 정립
이기영은 〈불교의 본질과 현상〉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흔히 사람들은 기독교 이해의 예를 좇아, 불교도 그 본래의 깊은 근본 성격을 알려면 교조 석가모니의 옛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그 원형(原型)을 찾아 그것을 재현시키는 것이 오늘날 불교를 정도(正道)에 올려놓고 순조로운 발전을 기하는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부처님이 가르치신 ‘법’과 ‘도’를 정확히 깨닫자면 반드시 석가세존이 사시던 그때, 그곳, 그 말씀, 그 제도, 그 습관들만을 중시할 것이 아니라, 그 이후 불교가 계속 재해석되고 ‘법’과 ‘도’가 재발견되고 새로운 면모를 드러내 온 모든 발자취를 다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그래서 불교를 따르는 모든 사람 각자가 자기의 지혜와 능력을 배양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과제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불교가 있어야 할 본래의 모습, 바람직한 모습을 찾는 중이다. 말하자면 불교의 이상적 모델을 찾고 있는 셈인데, 우리가 본떠야 할 모델은 지난날 인도의 어느 특정한 것이거나, 우리나라 고대의 어떤 특수한 형태의 것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지난날들의 모델들은 다 그 나름대로 참고가 될 따름이며, 오늘의 우리는 우리의 혜안(慧眼)으로 본 정법(正法)에 의거해서, 이 시대의 새 모델을 우리 스스로 창조하는 것이 정도(正道)일 것이다.
침체 국면에 선 오늘날의 한국불교와 재가불교를 되살리기 위해서라도 후학들이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3) 불교와 사회의 인재 육성
불교의 미래를 이끌어 갈 인재를 길러내야 한다. 이기영은 타계하기 10개월 전인 1996년 1월 〈불교신문〉 칼럼 〈새로 출발하는 반세기 어떻게 할 것인가〉에서 “나는 한국불교계의 앞날이 지도자들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지혜와 덕성, 능력에 기대를 걸 수밖에 없다. 어제와 오는 내일에 걸쳐서 우리 불교의 방향을 조타(操舵)할 능력이 있는 일꾼을 기르는 일이 무엇보다도 최우선의 과제이다.”라고 역설하였다. 현재 한국불교학계의 원로 · 중진으로 활동하는 대부분의 불교학자는 이기영의 직간접적 가르침을 받은 후학들이다. 여기에다 그의 가르침과 신행에 영향을 받아 재가불교운동을 이끌고 있는 불자들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이 모든 이들에게 이 일을 최우선 과제로 부촉하고 있는 것이다.
불교의 방향을 이끌어갈 불자뿐 아니라 우리 사회의 제 문제를 불교의 정법을 바탕으로 해결해 나갈 인재를 육성하는 일도 꾸준히 추진해나가야 한다. 주지하다시피 우리 사회에서 영향력을 가진 각계 지도자들의 분포에서 유감스럽게도 불교가 차지하는 비중은 현격히 줄었다. 따라서 21세기 탈종교 시대를 맞아 불교신자 수가 제일 많이 감소하는 등 현재 한국불교의 교세는 급격히 추락하고 있다. 이에 사회 각 분야에 걸쳐 불교 인재를 기르는 일에 불교계가 전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
임동주
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사무국장 · 수석연구원. 서울사대, 동국대 대학원 졸업(철학박사).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회장 · 총동문회장, 참여불교재가연대 공동대표, 한국불교연구원 상임이사 등 역임. 주요 논문으로 〈보살화현 설화에 나타난 보살화현의 원리와 양상-삼국유사 소재 설화를 중심으로〉 〈불타의 역사적 인식과 고〉 〈설잠 김시습의 윤리관-불교사상을 중심으로〉 등과 공저서 《현대의 제 문제, 그 불교적 해답》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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