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 스님 "금강경 , 소의경전 타당한지 고민해야 할 때 "
금강경’ 바로 새겨 新 대승운동 밑거름 삼아야
‘정법불교를 모색하는 지리산 야단법석’은 조계종 소의경전인 <금강경>을 통한 현실고민을 주제로 8월 14일 오후첫 문을 열었다. <금강경>이 조계종 소의경전이기에 앞서 현대사회의 불교에 적합한지, 사부대중은 소의경전을 얼마나 실천하고 있는지 등이 주요논제가 됐다.
조계종의 대표적인 대강백 무비 스님(움직이는선원 조실)은 야단법석 첫날부터 이틀간 4강에 걸쳐 ‘조계종 표준 금강경에서 살펴본 수행지침 점검과 반성’을 주제로 법석을 펼쳤다.
이 자리에서는 ‘천불ㆍ만불로 만든 불상창고 같은 법당’,‘1029일 천도재는 무속행위 같은 일’,‘종정 상(相) 총무원장 상도 버려라’는등 한국불교 현실에 대한 고언이 봇물처럼 쏟아졌다.
무비 스님은 “선을 표방하는 조계종이 <금강경>을 소의경전으로 삼고 있지만 <금강경>이 대승불교의 소의경전으로는 부족함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고 문제제기를 했다.
<금강경>에 보살정신을 세상에 구현하는 방법에 대한 언급이 미약한 것 등 <금강경>이 조계종 소의경전으로 정해질 때는 소의경전으로 손색이 없다고 여겨졌지만, 이제는 사회변혁에 따라 불교부터 발전하고 변화해가야하는 고민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스님은 “불교가 할 일은 보살행이다. <금강경>에 보살정신이 담겨있으나 다른 경전에 비해 미미하다. 불교는 변화ㆍ발전하는 종교이다. 과감하게 바꿔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도법 스님은 토론을 통해 “무비 스님의 마음이 얼마나 절실했으면 소의경전인 <금강경>에 대한 문제제기를 했을까 하고 놀랐다”면서 “무비 스님이 한국불교를 아끼는 마음이 절절했기 때문일 것”이라 말했다.
이어 도법 스님은 “나도 같은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 한국불교가 대승불교다. 부처님 열반 후 500년 후 등장한 대승불교는 당시로는 천지가 개벽할 혁신적인 변화였다. 조계종단도 오늘의 현실에 응답하고 21세기 미래사회를 이끌어가려면, 소의경전을 바꾸는 문제 뿐 아니라 모든 것을 열어놓고 대범한 입장에서 화두를 던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금강경>의 소의경전 자격(?) 논란에 활발한 토론이 오갔다. 다수의 재가자가 무비 스님의 문제제기에 동의한 반면, 일부 스님 중에는 무비 스님의 견해에 이의를 제기하는 경우도 있었다.
철오 스님(구룡사)은 “<금강경>이 완전하지 않다면 완성된 경전은 무엇인가? 행사가 ‘중생제도, 동체대비’를 주제를 달고 계속 몰아가는데 깨달음 없이 동체대비가 가능한가? <금강경>은 소의경전으로도, 중생제도로도 부족함이 없다. 깨달음을 얻고 나면 자연히 중생제도로 이어진다”고 반박했다.
이에 무비 스님은 “완전한 경전을 꼽으라면 <법화경>을 들 수 있다. <법화경>은 불자로서 사회에 어떻게 회향할 것인지를 강조하고 모든 것을 배척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이어 스님은 “굳이 소의경전을 한 권만 선택할 이유가 있느냐”며 “조계종의 소의경전을 선택하라면 대승경전과 선종어록 등이다”고 설명했다.
다음은 무비 스님의 설법 전문.
1. 불교는 변화의 종교다
불교가 세상에 존재하는 여러 가지 종교 중에서 가장 우수한 종교로 인정받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 부단한 혁신과 변화를 도모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즉 안으로는 자신의 수행을 통해서 혁범성성(革凡成聖)을 목표로 하여 정진에 정진을 거듭하고 있다는 것이고, 밖으로는 이 세상의 예토(穢土)를 정토화(淨土化), 불국토화(佛國土化)한다는 원력실현(願力實現)을 지상목표로 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우리나라에는 서양의 물질문명이 들어와서 인간생활의 모든 분야에서 아주 짧은 시간에 놀라운 변화와 혁신(革新)을 가져왔지만 아무리 훑어보아도 중생이 부처가 되는 혁범성성이나 예토의 불국토화와 같은 표현이나 그와 유사한 시도는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면 불교에서 꾀하고자하는 그 혁신과 변화가 얼마나 엄청난 사실인가를 족히 짐작하리라.
이와 같은 성향을 가진 불교이기에 초기불교에서 세존의 열반만을 기다리던 한 무리가 있어 세존이 열반에 들자마자 교단의 혁신을 꾀하고 나선 것이다. 그것도 교리나 사상이 아닌 승가생활의 규범인 서릿발 같은 계율의 문제에 제동을 걸고 혁신을 모색한 것이다. 아무튼 그것이 출발점이 되어 부단한 변화를 모색해 온 교단은 드디어 진보적 성향인 대중부와 보수적 성향인 상좌부로 나뉘더니 급기야는 20여개 부파로 쪼개졌으나 그와 같은 와중에서 실로 불교 그 자체에는 엄청난 변화와 발전을 가져온 것도 사실이다.
대중부나 상좌부나 당시 출가자들은 승가집단만을 위한 고착된 사고 때문에 정토화니 불국토화니 하는 사회적인 책무에는 뒷전이었다. 즉 바깥세상의 어려움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살았던 것이다. 불교가 살아있는 전통으로 존속하기 위해서도 변화와 성장과 발전은 절실한 상황이었다. 그 결과로 기원전 1세기경 대중부 속에서 대승불교라는 급진적 교파가 생겨나게 된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대승불교란 불교내부에서 일어난 개혁 운동이었으며 출가자와 재가불자 모두 수용하려는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이며 반란이며 쿠데타였다. 그러나 그것은 살아있는 모든 존재를 해탈로 인도하는 실로 큰 수레였으며, 부처님의 진정한 정신이었다.
비록 2600여 년의 시간은 흘렀지만 이와 같은 전통을 계승해 온 오늘의 우리들이다. 실로 자랑스럽기도 하려니와 그 책임과 의무도 또한 무겁기 그지없다. 돌이켜 선사들의 자취를 살펴보면 자신이 차마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 없으며 지금 이 시대의 불교 상황도 참으로 암울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러나 저의 관견(管見)으로 더듬어 본 불교 그 자체는 너무나도 위대하고 한편 분에 넘치기에 차마 오늘날의 불교 현실이 눈에 밟혀 병든 노구지만 수수방관할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몇 분의 지사(志士)들이 자신과 그리고 불교계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도모해 보고자 노심초사하기에 미력이나마 운력(運力)에 동참한 것이다.
그들은 몸부림치며 전 국토를 걷기도 하고 삼보일배를 하면서 실로 무엇인가를 어떻게 해 보려고 무진 애를 쓴다. 그 걸음은 어제에 그랬듯이 오늘도 또 내일도 쉬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자신의 수행이든, 불교의 정화든, 아니면 단순한 방선시간의 포행이든, 그렇게 나아가고 또 나아간다. 비록 한낱 꿈에 불과할지라도 이상적인 불교, 세계불교의 모델이 될 만한 불교를 위한 불사가 되고, 오늘의 불교와 미래사회를 선도할 미래불교를 위한 길이 되었으면 한다. 나아감은 곧 변화요, 혁신이요, 그것이 곧 불교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근거를 마련하고 그 근거에 의해 논의하는 것이 옳다 생각돼 <금강경>으로 이번 자리를 돌아보게 됐다. 마침 조계종에서 표준 <금강경>이 편찬돼 처음으로 함께 읽으며 공개강의를 하게 됐다.
2. <금강경>이 소의경전으로 정해진 배경
<금강경>은 한국불교의 소의경전이다. <금강경>이 한국불교의 소의경전이라는 뜻은 무엇인가? 모든 불교도는 <금강경>의 정신에 의하여 수행과 전법과 삶의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금강경>의 눈으로 오늘의 한국불교를 점검하여 수행과 전법과 삶에 있어서 옳고 그름을 따져보고 일치와 불일치를 가려내어 그 대안을 모색해 보려고 시도해본다. 그것이 곧 정법불교(신 대승불교)를 모색하는 운동의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정법불교(신 대승불교)를 모색하는 운동이라면 사실 <금강경>으로서는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금강경>이 조계종의 소의경전으로, 또는 제일 각광받는 중요한 경전으로 정해지게 된 배경은 선불교의 역대 선사들이 특별히 애독한 관계로 우리나라에서 <금강경 오가해>가 편찬되어 전통 교육기관의 교과서로서 오랫동안 읽혀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사들이 그처럼 특별히 좋아한 이유는 조계종의 연원이라고 할 수 있는 조계 6조 혜능 선사의 영향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는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여러 가지 종파로 변천해 왔다. 사실 선불교는 대승불교가 쇠퇴하면서 생긴 불교다. 엄격하게 따지면 선불교가 아니라 그냥 선이라고 해야 마땅하다고 하는 주장이 적지 않다. 선불교는 불교가 중국에 건너와서 기존의 민중종교인 유교, 도교와 만나면서 탄생한 매우 특수한 정신세계다. 한편 노자와 장자, 중용, 대학을 섭렵한 중국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발전한 대승불교라고 하더라도 이미 그것은 그다지 특별한 매력은 주지 못하는 입장이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무튼 유불선을 아우르며 그 모든 것들의 상위에 자리하게 된 선불교의 선사들은 하늘을 찌르는 고준한 의식과 거의 도교의 도사들과 유사한 간소(簡素), 탈속(脫俗), 자연(自然), 유현(幽玄), 고고(枯孤), 정적(靜寂), 변화(變化), 부동(不動, 八風不動), 무소유(無所有) 등 삶의 모습으로 기존의 불교도들에게 태풍과 같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나는 이것을 선의 8대 정신으로 정리한다) 이러한 선불교가 우리나라에 그대로 전래되면서 선사들이 이미 즐겨 읽던 <금강경>이 언제부터인가 소의경전으로 정해졌다.
그러나 <금강경>은 대승불교가 완전하게 발달하기 이전 초기대승불교에 해당하는 경전이다. 그러므로 완전한 불교 즉, 이상적인 불교를 표현하는 데는 부족한 면이 없지 않다. 그렇다면 <금강경>을 이상적인 불교, 완전한 불교의 소의경전으로 삼는 것도 문제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 점도 다시 점검해 봐야할 일이다. <금강경>을 포함한 위에서 보인 선불교와 선사들의 삶에서는 대승적 보살정신으로 예토의 정토화에 대한 노력을 찾아보기란 지극히 미미한 부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금강경>에 의해 이상적인 정법불교를 모색하기란 어렵지 않은가? 하지만 오늘 우리는 우선 소의경전인 <금강경>에서 수행지침이 되고 삶의 좌표가 될 만 한 점들 몇 가지를 대강 찾아 초록하여 강호제현(江湖諸賢)들과 함께 오늘의 한국불교를 점검하고 그 대안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특별취재팀 | 2009-08-21 오후
야단법석(野壇法席)중에 열린 야단법석(夜壇法席)
정법불교를 모색하는 지리산 야단법석은 8월 14~15일 오전, 오후 법주 스님들의 강의와 토론에 이어 저녁에 진행된 특별 프로그램으로 활기를 더했다. 저녁 공양시간 이후 매일 저녁 8시부터 9시 30분까지 진행된 특별시간에는 이시우 박사의 ‘우주과학과 불교’ 강연, 도법 스님의 ‘지리산 성지화’와 ‘움직이는 선원’ 이야기, 지역민들이 꾸민 ‘이야기가 있는 작은 음악회’ 등의 짜임새 있는 프로그램이 함께 진행됐다.
첫 날인 14일 저녁. 야단법석이 진행되는 동안 각 방 방장부터 바닥청소, 화장실 청소 당번까지 출재가자를 막론하고 각자의 소임을 부여받았다.
300 여 사부대중은 강의 중간에 제공된 간식제공 도우미, 친환경 재래식 화장실의 청결 유지 등 각자 소임에 빈틈없는 모습을 보였다. 이들의 활약은 원만한 법회 진행을 이끌어가는 가장 큰 힘이 되기도 했다.
#폭염보다 뜨거웠던 정법의 열기
용상방을 마치고 전국 각지에서 모인 각계각층의 사람들은 4박 5일간 함께할 이들과의 만남의 시간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밝은사람들연구소 박찬욱 소장은 “불교가 사회에 어떻게 기여할 것인지 논의하는 자리가 됐으면 좋겠다”고 희망했다.
중앙승가대 학인 성민 스님은 “승가대는 불교학, 역경, 포교의 기존 3대 과목에 불교상담심리학을 개설해 사회복지에도 관심을 갖고 있다”며 “스님들도 자기공부 뿐만 아니라 사회 환원에 뜻을 가지고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소설<우담바라> 저자 남지심 씨는 “더운 날씨에도 여기 오는 분들의 뜻이 모여 자비행을 완성시키는 출발점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무더운 여름의 끝자락, 여름은 정법을 구현하는 이들의 열기를 시샘하는 듯했다. 선풍기 몇 대에 의지해 좁은 공간 속에서, 장시간 법문을 듣고 저녁예불과 공양을 마치면 휴식을 취하러 갈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참가자들은 다시 용맹정진을 이어갔다.
#부처님 연기 밤하늘에도 여실해
15일 저녁에는 이시우 박사의 ‘우주물리학과 불교’를 주제로 하는 강의가 열려 뜨거운 호응을 얻었다.
이시우 박사는 경북대와 서울대 천문학과 교수를 역임하고, 한국과학기술원 한림원 정회원으로서 깨달음의 세계가 우주에도 보편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연구하고 있는 한국 관측천문학의 개척자다.
이시우 박사는 이날 강연에서 “별들의 집합인 성단은 시간이 지나면서 외부의 강한 인력으로 작은 별들이 이탈한다. 이때 성단은 이탈로 인해 감소된 에너지를 유지하기 위해 수축한다. 즉, 구성원이 이탈하면 조직을 수축ㆍ안정화하는 것”이라며 “현종단도 불자들의 외면과 교세위축에 대해 자정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결국 붕괴되고 말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이 박사는 “우주에는 별들의 생주이멸(生住異滅)에 그치지 않고 성단과 우주전체가 생명체처럼 연기로 끊임없이 진화하는 법칙이 있다. 연기법은 불법의 근본을 이루고 있다. 불교 또한 연기적 공동체의 전체적 깨달음을 지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박사는 끝으로 “우주와 성단은 모두 성단과 별의 충돌에 의해 탄생한다”며 “출가와 재가는 논쟁을 해야 발전이 있다. 야단법석에서 현 종단을 향해 제기하는 목소리가 결국 현불교를 새롭게 할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지리산 성지화 운동 통해 불교 살릴 것
야단법석의 열기가 무르익어가는 16일. 도법 스님은 ‘지리산 성지화 운동’과 ‘움직이는 선원’에 대해 강의했다.
도법 스님은 “‘지리산 성지화 운동’과 ‘움직이는 선원’은 나와 사회, 불교가 우리 시대의 고민을 함께 풀어가고 모두가 이로운 길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한 결과물이다. 생명ㆍ공동체ㆍ지역ㆍ농업ㆍ불교계의 혼란과 위기에 대한 문명사적 대안, 불교적 대안”이라고 강조했다.
스님은 “한국사회 현실에서 불교계가 주체적으로 일을 해서 불교계와 사회 전체적으로 이익이 되는 것으로 평가 받고 도움을 줄 수 있는 해답이 지리산에 있다” 이라며 “앞으로 정책, 기획, 운영기구를 상설화 해 성지화를 진행해 갈 것”이라고 밝혔다.
스님은 또 ‘움직이는 선원’에 대해서는 “불교이론과 실천, 선불교와 교학불교, 대승불교와 초기불교, 세간과 출세간, 출재가자의 수행과 일상의 삶이 연기 중도적으로 통일되는 대안적 수행과 선원”이라며 “삶의 현장, 갈등이 벌어지는 문제의 현장이 모두 선원으로 출가, 재가, 시민대중 모두가 올해 동안거 지리산 팔백리를 침묵으로 걷는 수행”이라고 소개했다.
#소박한 공연 회향
길고 긴 야단법석의 마지막 날, 실상사 작은 학교에는 꾸밈없는 자연의 모습이 담긴 작은 음악회가 펼쳐졌다. 마가 스님(천안 만일사 주지)의 자비명상으로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시작된 음악회는 99% 아마추어라는 산내면 어린이들의 수준급 피아노ㆍ기타 공연, 이원규 시인의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외 3편의 시낭송, 이경재 선생의 실상사 작은학교 이야기, 이창수 씨의 사진 이야기, 훤민이네 귀농이야기 등 소박한 공연이 아름답게 펼쳐졌다.
이상언 기자 | 2009-08-21
“야단법석 횃불, 한국불교로 번져나가길”
나눔의 장, 지리산 야단법석에 대한 아쉬움 가득
지리산 야단법석 마지막 날인 8월 18일, 네 번째 법주 도법 스님의 법석에서는 야단법석에 대한 소감을 나누는 ‘나눔의 시간’이 진행됐다.
향봉 스님: 첫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참가자들의 한결같은 모습에 감사드린다. 이런 야단법석이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고 전국 곳곳에서 내용과 색깔이 다르더라도 이어지기를 바란다.
종교적 체험 이후 20여 년을 보낸 후 도법 스님을 만나 “나 깨쳤다, 나를 점검해 달라”고 말했다. 스님에게 “조계사, 해인사, 화엄학림 등 천 명, 만 명이 모여도 장소와 때를 가리지 않고 내가 보는 세계를 이야기하고 싶다”고 말했다.
도법 스님이 선방 수좌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야기를 해보라고 권유를 받아 법석에 참여하게 됐다. 어록, 경전을 물어봐도 좋다. 어느 것이든 좋다.
죽비 소리에 길들여지는 관습에서 눈 밝은 사람의 출현은 어렵다. 총림을 중심으로 선불장의 지도자스님들도 문제다. 여러 부분에서 동경의 대상일지언정 선지식은 아니지 않은가? 100개가 넘는 선방에서 2500여 비구ㆍ비구니 스님들이 결제를 하고 있지만 10년, 20년이 지나도 눈 밝은 사람이 없다. 간화선 정진 자세, 풍습이 달라져야 한다.
앞으로 남은 20년 동안 참으로 어디서든지 토론 하겠다. 회향심으로 살아가겠다.
도법 스님: 내 소감은 법석 시간에 말한 것들이 소감이다.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부처님을 모시고 화엄법회를 했다 하더라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본다. 이 자리는 여기 모인 우리끼리만 좋고자 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한국불교에 대한 해답을 찾아보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해답을 찾으려면 우리 문제를 드러내야 했다. 시기 질투의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다. 네 재산을 빼앗고 싶다고 하고 싶지 않다.
곰팡이는 확대ㆍ재생산 되기 마련이다. 여러 가지 논란이 있으리라고 보지만 우리 스스로를 정직하게 드러냈다는 점이 이번 행사의 가장 큰 성과다.
한국불교는 드러내면 살아난다. 총무원, 봉암사, 통도사, 해인사 등 한국불교 방방곡곡에서 무애실상의 모습을 드러내자. 드러내면 바람과 햇빛을 볼 수 있다. 이보다 더 좋은 대안은 없다고 본다. 참된 수행이고 해답이라고 본다.
성전 스님: 처음 주제를 접하고 한국 승단의 문제, 수행자의 자질 문제에 대해 재가자들이 함께한다는 점이 염려스러웠다. 삼보 중 하나로 존경받아야 할 출가자가 재가자들 앞에서 스스로의 위상을 추락시킬 필요가 있는가 라는 생각도 들었다.
법회를 마치고 우리 문제에 대해서 아파하고 회복기의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이 바뀌었다. 그동안 불교는 위선과 폐쇄적인 모습을 보여 왔다.
도법 스님의 “10년 선방 다니는 것보다는 이번 4박 5일 동안의 야단법석이 더 낫다”는 말은 한국불교의 심각성을 여실히 드러낸 것이다.
이택회 거사: 모자라고 부족한 점은 있었지만 사부대중이 함께 정법불교를 나눴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크다.
진오 스님: 과거지향적인 것은 옳지 않다. 종단이 바로 서고 불교가 바로 서기 위해서는 봉사와 신행이 더 필요하다. 존경받는 큰 스님들이 민중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우리의 울림이 홍보가 돼서 불교는 허영과 사치에서 벗어나 희망이 돼야 한다.
김명희 보살: 지금의 문제도 도법 스님의 진단과는 다르다. 종단 내부의 문제가 믿음과 불신, 보수와 진보의 문제가 아니라 거짓과 진실의 문제이며, 사기꾼 집단과 양심 집단의 문제다. 한국불교의 문제는 사부대중의 공동책임이다. 우리 스스로도 자정의 노력이 필요하다.
임완수 거사: 나는 불교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큰스님들이 어떻게 수행하고 어떤 법문을 하는 지가 궁금해서 왔다. 첫 날은 “이 정도면 나도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실망스러웠다. 둘째 날 수행기를 들으면서 “저 정도는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지막 날, 도반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한국불교의 미래는 밝다고 전망했다.
도법 스님 말처럼 이번 행사는 우리의 아픔을 드러낸 것이다. 서로가 문제점을 나누고 토론하고 고쳐나간다는 생각이 있는 이상 한국불교는 확실한 희망이 있다.
임영광 거사: 이번에 드러난 문제들은 불자들이라면 삼보를 비방하지 않는다는 입장에서 말하지 않았을 뿐이지, 그 내면은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무비 스님: “재가자들 앞에서 꼭 이렇게 해야 하는가”라는 지적은 재가자들을 바보로 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감춘다고 해서 감춰지지 않는다는데 왜 모른다고 생각하는가?
법석이 끝났는데 깨닫지 못하고 돌아간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출ㆍ재가자들이 한 방향으로 한 목소리로 고민하고 토론할 수 있었다는 것은 큰 기쁨과 즐거움이었다.
박오광 거사: 불교를 소설 수준으로 알던 내게는 특별한 경험이었다. 불교를 알기 전에는 불교 공부는 혜국 스님처럼 손가락을 자르고 해야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향봉ㆍ도법ㆍ무비 스님을 뵈면서 의외로 쉽게 문제를 풀 수 있다는 작은 실마리를 안고 간다.
이청자 보살: 불교에 입문한지 40여년이 됐지만 이 가운데 20년은 허송세월을 보냈다. 지금은 의료봉사를 한다. 조계사의 한 신도가 임종 전에 스님을 좀 만나게 해달라고 했다. 스님에게 부탁했지만 스님은 신도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안 나타났다.
(다른 것은 몰라도) 스님이라면 신도가 임종을 앞두고 있다면 꼭 만나줬으면 좋겠다. 우리는 3~4명이 찾아가 염불하는데 개신교인들은 무리지어 오는 모습을 자주 경험했다. 스님들이 시간이 안된다면 각 사찰에서 신도들을 교육시켜 보내 달라.
박동천 거사: 부처님의 자비정신에 대해서 논하려 했는데 갈증이 해소됐다. 미련 없이 돌아갈 수 있다. 따뜻한 훈풍은 남쪽에서 불러오는 것. 불교의 새로운 바람이 전국으로 퍼지길 바란다.
김동학 거사: 이판인 무비ㆍ혜국 스님, 사판인 향봉ㆍ도법 스님이 함께 한 자리였다. 고행자의 모습인 도법 스님과, 달마상 향봉 스님 등 이판사판 야단법석의 좋은 강연과 토론이었다.
전영철 목사: 2600년 불교 역사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새로운 불교의 중흥을 알리는 뜻 깊은 자리였다. 기탄 없는 토론은 긴장감을 자아내기도 했지만 도를 넘지 않는 절제가 돋보였다.
서로를 배려하는 불국정토의 모습에서 진한 감동을 받았다. 부처님, 역대 대승보살, 선사들의 뜻을 받들어 참 대승, 새로운 대승불교로서의 정법불교를 세우려는 절실한 대발원의 장이었다.
이번 야단법석은 절실한 대발원이라는 횃불의 점화와 같은 것이었고 불자들의 가슴 속에 이미 점화돼 있다. 불자님들은 발길이 머무는 곳마다 그 불씨를 옮기게 될 것이다.
월암 스님: 건전한 비판의 장(야단법석)에서 비판 대상의 한 사람(선방 수좌)으로서 내가 곰팡이가 아닌가 한다.
선원과 수좌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는 겸허하게 받아들이겠다. 선원과 수좌들이 거듭날 수 있는 자리. 수좌 스님들이 이 자리에 왔으면 더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야단법석의 횃불이 불타올라. 조계종, 한국불교, 전 중생의 야단법석이 돼서 화엄장엄의 불국토가 되기를 기원한다.
각묵 스님: 혜국 스님의 말씀을 6년 만에 다시 듣는 자리였다. 교학적으로는 비판을 할 수 있지만 선학적인 문제를 진지하게 연구하고 싶어졌다. 혜국 스님의 “간화선이 전부가 아니다. 수행체계 중에 하나다”라는 말씀은 간화선이 다시 일어설 발판을 디딘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도법 스님을 좋아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스님의 팔정도에 대한 견해 때문이다. 도법 스님에게 팔정도에 대해서 물었을 때 오줌을 쌀 뻔했다. 그만큼 감격적이었다. “이런 대목에서 요실을 하는구나” 하면서 감격했다.
법석의 마지막을 팔정도로 장식하고, 움직이는선원이 팔정도로 걸어간다는 것에 또 한번 감격했다.
강태석 거사: 한국불교가 무당불교, 기복불교에서 벗어나기를 바란다.
이호신 거사: 수행과 예술이 다르지 않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노치환 거사: 한나라당에서 활동 중이다. 여기서 하는 일과 정반대의 일을 하고 있다. 무거운 마음으로 이곳에 왔다. 현정부가 불교에 대해서 탄압을 한다는 말을 항상 듣다보니 이런 자리에 오기가 너무 힘들고 마음이 무겁다.
환경문제는 절집처럼 생활한다면 다 해결될 것이다. 여러 문제가 현실 부분에서는 부딪히는 부분이 많고 불가능한 부분도 많다. 고속철도 천성산 관통터널은 도룡뇽 때문에 환경손실 만큼의 경제적 손실이 있었다.
불교계는 4대 강 사업이 4대 강을 죽이는 사업이라고 이름을 바꾸라고 한다. 이런 야단법석의 원력으로 이 사업이 성공할 수 있도록 해준다면 감사할 것 같다. 스님과 사부대중이 우리나라를 생각하듯 MB도 우리나라를 생각한다. 우리나라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기대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도법스님: 한나라당 측과 야단법석을 하자고 제안하고 싶다.
질문자(비구니): 때로는 환희심, 때로는 먹먹해졌다. 더욱 철저히 수행정진하고 자비심을 발현해야겠다고 다짐하는 자리였다.
불교정화운동의 아픈 역사, 스님들의 해외여행과 숙박업소 이용 등에 대해서 이해해 주는 재가자들이 있어 고마웠다. 불가피한 상황에서 그럴 수 밖에 없음을 이해해 달라.
승가가 청정해야 하는 것은 옳은 말이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불교에 대해서 이해해 달라. 자비와 이해의 눈빛으로 바라보길 바란다. 수행하는 스님들을 부정적으로만 보지 말고 따뜻하게 봐 달라.
재연 스님: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화시켜 나가자는 것이 수행하자는 것이다. 가부좌와 근엄함, 참선 수행도 중요하다. 또 거울을 통해 자기 자신의 문제를 되돌리고 되돌리는 것이 수행이다.
연기와 무아를 깊이 있게 알며 부처가 된다가 아니라 실천으로 옮길 때 부처다. 희생, 헌신이 자비가 아니라. 친구의 아픔, 남들의 슬픔을 함께 아파하고 안쓰러워하는 것이다. 내가 중요한 만큼 불성이 있는 모두가 중요하다. 이제 돌아가서 진짜 부처ㆍ보살이 돼보자.
법인 스님: 한국불교의 문제가 허심탄회하게 드러나니 고통스럽다. 재가불자들의 질책을 하소연과 안타까움, 원망, 애정, 격려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문제를 드러낼 때 신뢰와 존경, 격려가 생긴다고 생각한다. 4박 5일 야단법석이 제대로 이뤄졌다.
특별취재팀 | 2009-08-21
“수행과 삶 여실지견으로 통일해야”
도법 스님, 팔정도 수행 강조
지리산 야단법석의 마지막 법주 도법 스님(움직이는선원 열중)은 주제법문 ‘본래 부처와 팔정도’를 통해 수행과 삶, 선교의 합일, 수행과 현실참여의 조화 등을 강조했다.
다음은 스님의 법문.
#본래 부처로 돌아가자
오늘의 한국불교는 비연기적 사고인 실체론적 불교관과 비중도적 실천론인 이분법적 수행론에 빠져 매우 혼란스럽다. 초기ㆍ대승불교와 교학ㆍ참선불교 등으로 구분하는 비연기적 사고가 만연해있다. 이렇듯 서로를 분리시켜 선후?경중?우열을 따지는 왜곡된 불교관으로 인해 참불교, 정법 불교가 무엇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수행자들도 비중도적인 양극단의 수행론(이론과 실천, 수행과 일상의 삶, 수행과 깨달음, 자리행과 이타행, 개인 수행과 현실 참여 등 이분법적 분별)에 회의와 갈등을 지닌 채 방황하고 있다.
이분법적인 양극단의 분별을 연기 중도적으로 통일시키고자 본래 부처와 팔정도론을 말하려 한다.
#진리에 합일해야 무심(無心)
무심선(無心禪)을 펼쳤던 백운 선사는 <직지심체요절>에서 “특별히 불법을 따로 배울 것 없다. 다만 스스로 무심하게 살아가라(莫學佛法 但自無心去)”고 했다.
무심은 진리에 일치하는 마음 씀씀이와 삶을 뜻한다. 즉 ‘활동하는 것도 참선이요, 앉아있는 것도 참선이다’, ‘눈 뜨고 감는 것 그대로 문수의 눈이요, 발 들고 내려놓는 것 그대로 보현의 행이다’ 등으로 표현되듯이 초기불교와 대승불교, 선불교와 교학불교, 수행과 일상의 삶, 자리행과 이타행, 자기 수행과 현실 참여가 분리되지 않고 연기 중도적으로 통일되는 활발발한 불교적 삶의 또 다른 이름이다.
부처님ㆍ가섭ㆍ아난ㆍ원효ㆍ진묵 등은 불교사의 대표적인 무심도인들이다. 그 분들이 목석처럼 살아갔겠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끊임없이 진리에 일치하는 대비원력의 정신으로 역동적인 사고와 실천, 만남과 대화, 배움과 가르침의 삶을 통일적으로 원융시키며 활발하게 살았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무심’의 참 뜻을 왜곡시켜 내면적이고 은둔적이거나 사고의 정지 또는 정적인 상태라고 알고 있다. 수행과 삶이 이원화되는 내면적이고 은둔적이며 소극적이고 정적인 삶이 마치 불교의 참모습인 것처럼 여기는 무지와 오류가 일반화되고 있다.
이렇게 되는 이유가 어디 있을까? 일차적으로 무심, 깨달음, 수행 등 우리가 사용하는 불교 개념들이 중생과 언어의 속성을 헤아리지 못한 까닭이다. 중생과 언어가 가진 한계, 문제를 잘 모르고 그 속성대로 다루고 있다.
#언어의 함정에 빠지지 말아야
‘하느님’이라는 말이 나오면 개신교인들은 좋아하지만, 불교인들은 싫어한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익숙하고 좋아하는 개념이냐 아니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반응한다. 말에 놀아나고, 말에 속고, 말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때문에 끊임없이 생각과 말과 지식이 쌓이고 넘쳐남에도 불구하고 삶의 문제가 풀리지 않고 계속 혼란스럽게 된다. 언어를 중도적으로 다루지 않고 극단, 즉 관념적으로 다루기 때문이다.
#본래 부처임을 알아야
‘본래 부처’라는 말을 중도적으로 생각해 보자. 불광사를 창건한 광덕 스님은 언제나 ‘구원성불(久遠成佛)’, 즉 본래부처론을 가르쳤다. 스님은 “일체 중생이 본래 성불했다. 지금 여기에서 본래 부처의 광명이 빛나고 있다. 지금 여기 현존하는 자신 밖에 그 어디에도 따로 부처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 자신을 떠나 특별하게 따로 있지도 않는 부처를 찾노라 헛고생하지 말고 지금 당장 본래 부처로 살아라. 본래 부처의 삶이 어떤 것인가? 바로 동체대비행인 보현행원의 삶이요 대무심행의 삶”이라고 말했다.
광덕 스님이 법회할 때, 신도들에게 “본래 부처라는 가르침을 들었는가?”라고 물으면 다들 “들었다”고 답했다. 그래서 “지금 자신이 본래 부처임을 알고 있는가?” 하고 물으면 대답이 없었다. 다른 것은 다 믿는데, 자기가 본래 부처라는 사실은 믿지 못하는 것이다.
본래 부처론이 불조의 핵심적인 가르침인데 왜 안 받아들여질까?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분리시키고 고정시키는 언어의 속성이다.
이 세상 그 무엇도 일단 언어로 표현되면 그 자체는 관념화된다. 실상은 분리되지 않았는데 분리된 것으로, 고정되지 않았는데 고정된 것으로 나타난다. 관념화된 언어를 중도, 즉 구체적 실상에 직결시켜 다루지 않고 극단, 즉 실상과 분리시켜 관념적으로 다루면 본질이 왜곡되고 나아가 혼란스럽게 된다. 불교도 마찬가지이다.
다른 하나는 언어와 모양을 쫓는 중생의 속성이다. 사람들 대부분이 부처는 아주 특별히 거룩하고 신비하고 불가사의한 존재라는 말과 모양에 속고 지배받고 있다. 마음?부처?중생이 본래 차별이 없다는 ‘본래 부처’의 실상과는 관계없이 전도몽상, 즉 부처는 특별하고 거룩하고 신비한 존재라는 사고, 즉 자기 선입견 또는 관념대로 생각하고 믿는다.
“부처는 아주 특별한 존재, 신비한 존재, 거룩한 존재인데, 업장 덩어리인 내가 감히 부처라니, 말도 안돼!”, “맨날 미워하고 욕심 부리는 하찮은 존재인 내가 어떻게 거룩한 부처일 수 있단 말인가”하며 전도, 즉 비중도적 사고로 스스로를 비하한다.
부처는 특별한 존재, 거룩한 존재, 신비한 존재라고 하는 사고, 즉 자신의 관념에 지배받고 있는 것이다. 굳이 불교 언어를 사용한다면 전도몽상의 불교를 하고 있는 셈이다.
#전도몽상에서 깨어나야
문제가 되고 있는 중생들의 관념들, 즉 허망한 분별망상을 타파하기 위해 옛 선사들은 이렇게 이야기했다. “착각하지 마. 부처? 부처가 별것 아니야. 부처도 눈이 두 개야. 너희들도 눈이 두 개잖아. 너희들과 아무 것도 다를 것이 없어”라며 중도의 길을 제시했다.
언어가 얼마나 중요한지, 언어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명쾌하게 잘 보여준 경우가 바로 <금강경>에서 부처를 “여어자(如語者), 실어자(實語者), 불이어자(不異語者), 불광어자(不?語者)”라고 한 것이다.
#실상에 일치한 수행이어야
깨달음과 수행에 대해 지나치게 신비한 의미를 부여해 깨달음과 수행의 본뜻이 왜곡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한국불교에 일반화된 깨달음과 수행에 대한 사고 경향을 정리해보면 수행과 일상의 삶, 수행과 깨달음, 깨달음과 현실의 삶이 하나로 통일되지 않고 따로따로 분리돼 있다.
이것이 불교계 문제의 원인이다. 문제의 원인이 된 비연기중도, 즉 삶을 갈등과 분열의 함정으로 빠지게 만드는 이원론적인 수행론을 해결해야 한국불교의 문제가 해결된다.
이원론적인 수행론을 극복하고 통일된 수행론을 확립해야 한다.
#‘본래 부처’가 한국불교의 약(藥)
대승불교의 핵심 사상은 ‘본래부처론’이다.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누구나 할 것 없이 지금 바로 국가, 종교, 이념, 선악시비, 이해득실을 넘어서는 평등의 길, 즉 대무심, 대자비, 대자유의 길이 열릴 수 있다.
더 소유하고(所有心) 더 추구하고(所求心) 더 얻고(所得心) 더 빨리 이루려고 하는 마음(速效心)의 병 등 간화십종병(看話十種病)도 본래부처론으로 접근할 때 비로소 해결이 가능하다.
3조승찬 선사는 <신심명>에서 “지극한 도는 어려울 것이 없다. 오직 분리시켜 차별하는 마음씀을 꺼려한다. 다만, 분리시켜 미워하거나 애착하지 말라. 그러면 확 트인 하늘처럼 명명백백하다(至道無難 唯嫌揀擇 但莫憎愛 洞然明白)”라고 말했다.
이것이 부처님이 뜻하신 중도 정신을 잘 계승한 대승불교의 특징이고 탁월성이다.
#팔정도의 실천이 중도
존재의 실상을 논리적으로 개념화한 것이 연기법이라면, 실천적으로 개념화한 것이 중도이다. 중도의 내용은 팔정도(정견ㆍ정사유ㆍ정어ㆍ정업ㆍ정명ㆍ정정진ㆍ정념ㆍ정정)다.
한국불교인들은 중도 또는 팔정도의 중요함을 끊임없이 강조하지만, 개념과 실상이 일치되도록 제대로 천착하지 않는다. 중도, 정도라는 개념을 중도적으로 실상에 직결시키지 않고 생각과 말만으로 극단의 사고로 다루고 있다.
팔정도(八正道)에서의 ‘바름(正)’이란 보편적 진리인 연기법으로 이루어진 존재의 실상, 생명의 실상, 유아독존, 비로자나불, 본래면목, 본래 부처 정신에 근거하여 제시한 수행론인 사성제를 사실대로 알아보고(如實知見) 사실대로 실천함(如實知見行)을 뜻한다. 즉 중도적 실천이다.
#실상을 바로 봐야 정견
무상ㆍ무아인 존재의 실상을 있는 사실대로 보는 것이 정견(正見)이며, 부처의 견해다. 이것이 정법불교다. 실상은 분리ㆍ독립되지 않았는데 분리ㆍ독립되었다고 극단적으로 생각하고, 고정ㆍ불변하지 않은데 고정ㆍ불변하다고 극단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삿된 견해이고 중생의 견해이며 삿된 불교다.
#본래 부처와 팔정도
팔정도의 첫째는 ‘정견’이다. 대부분 정견을 거쳐서 부처의 견해로 발전해간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정견 자체가 부처의 견해다. 그 밖에 부처의 견해가 따로 있지 않다. 지금 여기 직면한 현장의 일상적 삶에서 매 순간 순간마다 견해를 바르게 갈고 다듬는 것이 정견 수행이요, 그대로 깨달음의 수행이다.
‘정사유(正思惟)’는 실상대로 사유하는 것이다. 그것이 부처의 사유다. 직면한 현장의 일상적 삶에서 사유를 바르게 갈고 다듬는 것이 정사유 수행이요, 그대로 깨달음의 수행이다.
‘정어(正語)’는 실상에 근거하고 그 이치에 맞게 말하는 것이다. <금강경>에 “여래는 진리대로 말하는 자, 사실대로 말하는 자, 진리와 다르지 않게 말하는 자, 진실에 근거하지 않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자”라고 했다. 직면한 현장의 일상적 삶에서 언어를 바르게 또는 중도적으로 갈고 다듬는 것이 정어 수행이요, 깨달음의 수행이다.
‘정업(正業)’은 실상에 맞게 행위하는 것을 뜻한다. 직면한 현장의 일상적 삶에서 행위를 바르게 갈고 다듬는 것이 정업 수행이다.
‘정명(正命)’은 실상의 정신에 일치하는 생활을 위한 직업, 또는 실상에 일치하는 직업생활을 의미한다. 직면한 현장의 일상적 삶을 바르게 갈고 다듬는 것이 정명 수행이다.
‘정정진(正精進)’은 언제 어디에서나 실상에 일치하는 바른 견해ㆍ사유ㆍ언어ㆍ행위ㆍ생활ㆍ깨어있음ㆍ흔들리지 않음을 게으르지 않고 부지런히 갈고 다듬는 노력이다. 바른 견해를 바탕으로 흔들리지 않음을 보다 더 선명해지도록 줄기차게 노력하는 것이 정정진 수행이다 또, 직면한 현장의 일상적 삶을 법에 맞도록 하는 노력을 꾸준하게 갈고 다듬는 것이 정정진 수행이다.
‘정념(正念)’은 실상에 대해 깨어있음ㆍ알아차림ㆍ정신차림 등으로 설명된다. 직면한 현장의 일상적 삶에서 깨어있음이 생활화되도록 갈고 다듬는 것이 정념 수행이다.
‘정정(正定)’을 정신집중ㆍ정신통일이라고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 불교에서 삿된 선정ㆍ바른 선정이라는 말은 왜 생겼을까? 올바름, 즉 무소유, 무소구, 무소득, 무속효심에 입각해 실천하는 집중ㆍ통일이 바른 선정이다. 올바른 선정이란 언제 어디에서나 존재의 실상에 일치하는 견해ㆍ사유ㆍ언어ㆍ행동 등이 한결같이 흔들림 없는 상태를 뜻한다.
#분별 않음이 안심(安心)의 길
수행은 익숙한 중생의 삶을 생소하게 하고, 생소한 본래 부처의 삶을 생활화?체질화해서 익숙하게 하는 것이다. ‘본래 부처’의 삶인 팔정도를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학습하고 수련해 익숙하도록 하는 것이다. 충분하게 익숙해지면, 얼음이 저절로 녹아 흐르듯이, 흙기와가 저절로 해체되듯이 무명 업식도 저절로 녹아나고 해체된다. 이런 상태를 일러 깨달음을 얻었다, 부처 됐다고 한다. 그 밖에 다른 길이 있을 수 없고, 있지도 않다.
수행을 해도 불안한 것은 왜일까? 수행과 삶 등이 분리되면 온전한 삶이 되지 않아 수행한 만큼 불안과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 않는다. 개인 수행과 현실 참여가 하나인 까닭도 여기 있다. 이분법적 구분들이 하나 되지 않고 분리되는 한, 아무리 불교공부와 수행을 열심히 한다고 해도 그 자체가 또 다른 전도몽상에 불과하다.
어느 하나만을 선택하는 이분법적인 사고와 태도를 버리고 늘상 이론과 실천이 함께 균형을 이루도록 해야한다. 이론이 없이 길을 가는 것은 길을 모르면서 맹목적으로 길을 가는 격이 되고, 이론만 있고 실천이 없는 것은 길을 알지만 길을 가지 않고 제자리에 앉아있는 것과 같다.
특별취재팀 | 2009-08-21
“선방스님들 본분 지켜야 불교가 산다”
혜국 스님, 인재불사 중요성 거듭 강조
혜국 스님의 진솔한 수행담은 법문에 이은 토론에서도 계속됐다. 스님은 참선 수행을 묻는 질문 등에 하나하나 성의 있는 답변으로 대중을 감동시켰다.
이 자리에서는 고액의 해제비 등 갖은 병폐로 도마 위에 오른 선방이, 그래도 한국불교의 미래이며, 그 미래는 결코 어둡지 않다는 희망도 강조했다.
특히 혜국 스님은 인재불사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종단이 나서지 않으면 선원수좌회라도 나서겠다”고 밝혔다.
다음은 혜국 스님 법석의 토론 일부.
도법 스님: 혜국 스님이 하신 말씀이 선방의 수좌들에게도 일상적 삶이 되도록 해야 한다.
혜국 스님의 “간화선이 제일 중요하다, 전통이 중요하다”는 의견에 동의한다. 다만 간화선 외의 것을 배제하고 경시하는 것은 문제 삼고 싶다. 간화선을 통해 깨달은 것과 다른 방법으로 깨달은 것이 같을 수는 없지만 다를 수도 없다. 깨달음을 향한 과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고 본다.
성전 스님: 선방에 있는 스님들도 간화선만 하는 것은 아니다. 다양하다.
혜국 스님: 봉사가 눈뜨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생각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생각으로 깨달았는가 그렇지 않았는가의 차이는 참 중요하다. 생각이 끊어진 상태에서 깨달아야 한다.
성전 스님: 간화선 말고 다른 방법은 안된다는 것인가?
혜국 스님: 그렇다. ‘나무 아미타불’ 염불도 화두가 돼서 간화선을 해야 한다.
진오 스님 : 한국 불교의 문제는 무엇인가? 종단행정의 무능력과 후진 양성, 신도 교육의 부실이 문제다. 이는 선방스님들의 책임이 아니다. 불교가 사회에 기여하지 못한 책임이다.
불교는 스님에게 거는 기대가 많다. 특히 선방스님들에 거는 기대가 크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스님들에게 사회적 약자에 대한 손길도 요구한다. 선방에서 ‘선(禪)’도 중요하지만 사회적 책임도 잊어서는 안된다.
혜국 스님 : 나 자신부터 하심이 쉽지 않다. 경전에서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으로 우리 몸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또, 아버지의 정자 2억 마리 중 하나가 난자와 만나고, 어머니가 물을 마시면 그것으로 내 몸의 수분을 채우고, 어머니가 숨을 들이 마시면 나의 들숨날숨이 생긴다. 그렇게 보면 태양이 나를 비추고 있고, 물이 나를 지탱하고 있다. 곧 우주 만물이 나를 지탱하고 있다.
언젠가 마티즈 자동차를 타고 하야트 호텔에 갔었다. 그런데 차를 못 세우게 하더라. 그 날 해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떠 있었고 바람도 불며 나를 지탱해 주고 있었다. (해와 바람은) 차별이 없었는데 (기분이) 참 그랬다.
우리도 자신한테 도움 될 것 같은 사람 아니면 말도 잘 안 걸지 않나? 상(相)을 보는 것이다. 내 안에서 일어난 내 문제라는 것을 못보기 때문이다. 내게 젖어진 습이 그런 것이다.
간화선은 삶과 수행을 하나로 본다. 그런데 지금은 그것이 단점이 드러나고 있다. 세계관과 인생관이 바로 서면 하심은 저절로 된다.
정안 스님: 많은 스님들이 큰 부담을 안고 안거에 들어가 하루 15시간씩 치열하게 정진한다. 그런데 사회봉사활동까지 하라는 의견이 나오니 참 부담스럽다.
큰스님(혜국 스님)이 직접 이렇게 말씀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런 정도의 말씀은 제자들이 대신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혜국 스님: 간화선을 하다하다 안되던 때가 있었다. 성철 스님에게 그렇게 들었는데도 이해가 안갔다. 생각 끊어진 자리에서 화두가 있다는 말에 믿음이 안갔다, 그래서 성철 스님에게 “저는 법화사상으로 나가겠습니다. <법화경>의 길로 가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성철 스님은 “부엉이도 깜깜할수록 잘 보는데, 네가 안보인다고 하다니 그것은 너의 습”이라고 말하며, “하루 5000배 씩 하라”고 했다.
성철 스님 말씀대로 절을 했다. 7만배 8만배 쯤하니 절하는 나를 잊은 적이 있었다. 내가 내 부처에 절하게 될 때 절하는 사람을 잊을 수 있다.
20만배 하고 태백산에 갔다. 가서 2년 7개월 동안 장좌불와 했다. 장좌불와를 하는 동안 배 고프면 음식생각, 예전 도반들 생각에 선은 제대로 못했다. 안됐다. 했다고 하면 중생을 속이는 것이다.
그때만 해도 졸린 게 가장 큰 마장이었다. “성철 스님이 10년간 장좌불와 할 때 졸았을까 안 졸았을까” 이런 망상만 가득했다. 궁금증을 참다못해 성철 스님을 찾아 물었다.
성철 스님은 “내가 목석이냐, 안졸았게.” 그 말만 듣고 “아 그럼 나도 할 수 있겠구나” 싶었다. 잠을 이겨내려고 밧줄을 목에 묶었다. 졸다가 밧줄에 쓸린 목이 너무 아파서 수행이 더 안됐다.
산에서 생식하다 독풀을 먹었다. 그대로 엎어져 죽었었다. 내 영혼이 나와서 어머니를 찾아갔다. 하지만 나는 영혼이 없다고 믿는다. (영혼이) 있다고 하면 있는데 빠지고, 없다고 하면 없다고 빠진다.
“어머니 저 왔어요” 했는데 어머니가 듣지를 못했다. 그 순간 누가 나와 닮은 사람(시신)을 끌고 가는 것이 보였다. 따라가서 “누군데 나하고 이렇게 닮았나”하는 순간 다시 몸으로 되돌아갔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다시 발심을 했다.
유서를 쓰고 절벽 끝 바위에 올랐다. 물그릇을 머리에 얹고 또 다시 졸면 죽겠다는 각오였다, 머리에 물그릇을 놓았을 때가 해가 질 무렵이었다. 다시 시간을 확인하려고 눈을 뜨니 해가 동쪽에서 떴을 때였다.
‘일체개유불성(一切皆有佛性)’은 정말 맞다, 다만 삶과 수행이 하나가 될 때 확철대오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세상에 원효 대사가 다녀감은 대단한 일이다. 1초 사이도 극과 극이다.
간화선 교육에 대해 말하면, “익은 것은 설게 하고 설은 것은 익게하라”는 말이 있다.
진정성이 중요하다. 수좌스님들도 사회봉사활동을 해야 한다는데 농사를 지어도 진정성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나는 그 진정성 담긴 행에 자신이 없다. 내가 수좌승들에게 그런 수행을 시키고자 하지만 잘 안된다. (구참인) 내가 지도다운 지도를 못하고 있다, 죄송하다.
질문자(비구니): 선방에 있다. 안거가 끝난 뒤 1주일 정도 사회봉사를 할 방법을 실천한다면 한국불교의 위상이 높아지고 자기점검도 되지 않을까 한다.
혜국 스님: 선방을 잘 지키기는 것도 중요하다. 봉사는 많은 스님들이 하고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이 최선이다.
도법 스님: 선방은 선방으로 있어야하고 수좌는 수좌답게 존재해야 한다. 어떤 길을 갈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방향을 잘 잡는 것이다.
문경 봉암사를 보면 크고, 화려하다. 산문을 닫고 수행하는 한국 제일의 선원이다. 청정하고 좋다. 그런데 그 속을 들여다보면 과연 여기가 진정 선원인가? 또 이 안에서 이뤄지고 있는 실천적 삶이 수행인가? 이점에 대해 봉암사 대중들이 부끄럼 없이 말할 수 있는지 묻고 싶다.
비워내고 비워내야 할 봉암사가 요즘은 물질로 풍요로워지고 있다. 반면 마을주민들의 궁핍은 더 해 간다. 이것이 선원의 모습, 선원도량, 바람직한 수좌의 모습인가? 수좌가 수좌다워질 때 간화선이 살아날 수 있다.
인재문제를 살펴보면, 요즘 선방에는 이해관계를 떠나서 일과 책임을 다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유일하게 그것을 할 수 있는 곳이 선원 아니었던가? 수좌들이 요구하고 제안하고 분명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 내가 지켜본 바로는 선방의 이익을 추구했지 그것을 넘어서서 문제제기 하는 수좌나 선방은 없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정말 조계종의 미래는 보이지 않는다. ‘사람’을 키워야 한다. 승가교육, 사부대중 교육에 대한 혁명적인 대책을 모색하지 않으면 그 미래는 불투명 합니다. (선방을 뛰쳐) 나와서 데모하고 정치하란 말이 아니다. 수좌들이 그런 뜻과 마음을 가지고 행하면 되는 것이다.
종단에 어떤 종정ㆍ총무원장ㆍ중앙종회의원이 나오든 종단의 제일 정책을 승가교육으로 삼길 바란다. 절체절명을 승가교육에 두고, 그 힘을 선방에서 보태주길 바란다.
혜국 스님: 각목으로 머리를 쳐서 피흘린 각목 법사를 아는가? 나는 한국 불교를 희망적으로 본다. 막연함이 아니라 마음에서부터 그렇다. 조선시대 유교도 영원할 것 같았지만 지금은 거의 없어졌다. 세계적에서 개신교와 불교가 공존하면서 싸움 없는 나라는 한국뿐이다. 이것은 불교 덕이다.
나는 정신력을 ‘복(福)’이라고 본다. 이 정도까지 불교를 자리잡게 한 것은 선방이다. 선방이 있기에 불교가 유지되고 있다.
부처님 말씀을 우리가 실천하지 못하는 것은 인재가 없기 때문이다. 도법 스님이 말한 교육문제 참 중요하다. 하지만 종단이 안 하고 있다. 따끔하게 일어나야 할 일인 것도 맞고, 그것을 해야 하는 것이 수좌인 것도 맞다. 종단에 요구조건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수좌다. 인재를 찾을 수 있는 길이라면 나도 동참하겠다.
이택회 거사: 해제비 스님들에게 더 드려야한다. 스님들 국내에만 머물면 우물 안 개구리다. 재가불자로서 스님들이 넓은 식견과 안목을 갖기를 바란다.
재가불자들은 스님들에 해제비를 어떻게 하면 더 드릴 수 없나 고민해야 한다. 선방스님들에 부탁하고 싶은 것은 해제비를 통해 어떻게 불교에 도움이 될지 고민해야 한다.
마가 스님 : 수좌들이 무슨 화두를 드는지? 점검이 되지 않는 것 같다.
혜국 스님: 화두참구는 체험이 중요하다. 논문도 아니고, 수시로 점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해득실을 따질 문제가 절대 아니다. 다른 쪽으로 떨어질 수가 있다.
특별취재팀 | 2009-08-21
“간화선 목숨도 아깝지 않은 가르침”
혜국 스님, “깨달음 지상주의와 개인주의가 문제”
세 번째 법주인 혜국 스님(충주 석종사 선원장, 전국선원수좌회 대표)은 8월 17일 ‘간화선 제일주의에 빠져있다는 지적에 대해 한 말씀 드리고자 한다’는 주제의 법문을 했다.
스님은 “최근 제기되고 있는 수행풍토에 대한 지적을 겸허하게 받아들인다”면서, 자신을 “간화선을 부정하면 부처님을 부정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다음은 혜국 스님의 법문.
#화두, 알음알이로 접근 말아야
부처님이 이 세상에 출현해 가장 큰 일을 한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생각의 한계를 뛰어넘게 한 것이다.
“연기를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고 한다. 연기가 무엇인가?
돌부터 출가, 환갑 진갑 할 것 없이 시시각각 변하는 것이 ‘혜국’이지, 내 고정된 실체는 없다. 흔히 연기법을 설명하면서 ‘이것’과 ‘저것’을 말하는데, 우리가 말하는 ‘이것’ ‘저것’이 아니다.
<금강경>의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을 비롯해 <법화경> <열반경> <화엄경> 등에서 설한 법문을 두고 절벽과 같은 상태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던 적이 있다.
처음 선방을 찾아 전강 스님에게 ‘판치생모(板齒生毛)’ 화두를 받았다. 전강 스님이 ‘판치생모’를 의심하라는데 무엇을 의심해야 할지 몰랐다. 당시 나는 깨달음이 따로 있다는 아트만 사상에 젖어있었던 것 같다.
도저히 알 수 없었을 때 경봉 스님 회상을 찾게 됐다. 경봉 스님은 “어찌해서 ‘판떼기 이빨’에 털난 것을 화두로 하는가?”라며 “판떼기가 아니라 ‘앞이빨’에 털난 거다”라고 했다. 전강 스님은 분명 “판떼기에 털이 났다” 했는데, 경봉 스님은 다른 말을 하길래 혼란스러웠다.
한자로 ‘판치생모’를 써서 명동 화교학교를 찾아가 물었다. 판치생모가 앞이빨에 털 난 것인지, 판데기 이빨에 털난 것인지를.
어떤 노인에게 앞니가 판떼기 같다 해서 ‘판치’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송곳니는 개이빨처럼 생겨 결치, 어금니는 식치, 앞니는 판떼기처럼 생겨서 판치,
전강 스님이 틀렸다고 생각해 전강 스님을 찾아갔다. 그런 내게 전강 스님은 “저 때려 죽일 놈”이라고 호통을 쳤다.
''아무래도 화두는 안되겠다'' 싶어 주력(呪力)을 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성철 스님이 “선방에서 주력하는 놈도 중이냐”며 크게 나무랬다.
판떼기든, 앞이빨이든 말뿐으로, 아무 관계 없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그때 정리된 것이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면 이것이 있다. 극미생으로 나아가 한 생각 이전의 자리. 이것과 저것을 포함한 중도가 ‘화두’라는 것이다.
#“오직 모를 뿐”이어야
<금강경>에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라고 하는데, 어디까지 상(相)이라고 할 것인가?
서양인은 눈으로만 보지만, 동양인 입장에서는 입으로 맛본다고 하는등 모든 감각기관을 통해 본다.
연기에 의해, 각자에 의해 존재한다면 상이란 어디까지가 상인지 한계를 알 수 없었다. 특히 불교에서는 ‘한 생각 일어나는 것’이 상(相)이라고 한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한 찰나에 수백 가지 생각이 일고 사라진다.
화두에 대해 이론적으로 믿음은 가지만, 생각만 될 뿐 따라갈 수 없었다. 한 생각 일어나는 이전 자리를 경험해보지 못했다. 무척 애를 썼는데, 결국 참선하던 중 화두는 깨달아야 할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화두 자체는 앞뒤 전후좌우를 모르는, 사방이 모두 몰랐을 때라는 것을 알았다, “오직 모를 뿐”이 됐을 때가 중요하다.
이렇게 답답한 상태에서 조사스님들의 활구(活句)는 사람을 살리는 길이요, 숨통이 트이는 길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 간화선은 한국불교의 근간
간화선이 대혜 스님(1089~1163)에 이르러 새로 생겨난 수행법이라 생각하는 이들이 간혹 있다. 대혜 스님 대에 와서 간화선이 정형화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 내면은 부처님 가르침인 ‘모든 유정과 무정이 모두 불성을 갖고 있다(一切有情無情 皆有佛性)’에서 시작해 달마 대사에서 육조 혜능에 이르는 조사선, 간화선에 이르기까지 일맥상통한다.
간화선은 요즘처럼 논리적으로 또는 알음알이로 헤아리는 세상에서는 최상승법이요, 역대조사가 이미 고증한 너무나 소중한 수행법이다. 간화선을 부정하는 것은 부처님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부처님 가르침인 반야송성을 깨닫는 간화선이 아니라, 따로 간화선이 제일이라 생각한다면 이것은 큰 병중의 하나다.
앞선 법석에서 한국불교의 수행풍토에 대한 지적이 오갔다. 당연히 받아들여야 할 문제다.
스님들이 강원에서 처음 배우는 <치문>의 첫구절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생각으로 가득 차 생각의 세계에서는 벗어날 수 없다”고 나온다. 내 몸안에 생각이 가득 찼을 때 생각에서 벗어나기란 불가능하다. 무념(無念)ㆍ무상(無常)ㆍ무심(無心)이든 한번이라도 경험한 사람만이 “아차 내가 착각 했구나”하고 알 수 있고, 꿈을 꾸고 있는 사람은 꿈인지 알 수 없다.
간화선사가 아니었다면 오늘의 한국불교는 존재할 수 없었다. 숱한 법난과 종단분규 속에서 선맥을 지켜온 것은 종단이 아닌 간화선사들의 피눈물 나는 노력이었다. 나는 간화선이 목숨을 바칠 만큼 좋다. 이만큼 지탱해온 것만으로도 자랑스럽게 생각하지만 최근 선방 내에서 발생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마음이 아프다.
# 망상과 싸우려는 망상 버려야
내 생각이 업이지 내 생각을 벗어난 것은 없다. 수좌들에게 수행하는데 가장 문제가 무엇인지 물으면 잠과 망상이라고 한다. 내 밖에 망상이 있다면 싸울만 하다. 다만 안에 망상이 있다면 싸울 수록 망상이 치성할 것이다. 싸움을 포기해보라.
내 생각 이전자리를 깨달은 분(부처님)이 보여준 소식이 ‘삼처전심’이다. 2000여 년 넘도록 명안 대종사들이 이어준 가르침을 안 믿는다면 불교의 근간을 흔드는 것이다. 무엇을 믿겠다는 것인가?
# 간화선 제일주의가 문제
향봉 스님은 “내가 있는 자리가 중도(中道)”라고 했다. ‘내’가 있는 자리도 없어진다면 얼마나 더 좋겠는가? ‘나’는 본래 없는 것, ‘확연무상’이다. 대혜 스님 대에 간화선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인정할 수 없다.
간화선을 대혜 스님 대에 와서 정형화를 시켰지만 부처님의 삼처전심은 무엇을 보여준 것인가“ 화두다. 말이라고 하는 상(相)이 생기기 이전을 보여준 것, 생각이전을 그냥 보여준 것이다. 옛날 ‘화두’로는 수행이 안된다는 지적은 잘못이다.
옛날 화두, 지금 화두가 어디 있는가? 화두는 모양이 없는 세계가 아닌가?
3조 승찬 대사의 <신심명>에는 “지도무난 유혐간택 단막증애 통연명백”하다고 했다. 조주 스님을 비롯한 후대의 선지식들은 <신심명>에서 5칙(則)의 공안을 들어보였다. 언어 표현방식이 다를 뿐 말과 생각이 끊긴 도리를 이미 3조 승찬 대사 당시에도 쓰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4조 도신 대사의 안심법문을 지나 5조 홍인 대사에 이르러서는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의 세계를 구체적인 선문답 형식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선사들은 표현 방법만 달랐지 3조 스님때도, 그 후도 화두는 일상이었다.
5조 홍인 대사가 “내게 한 물건이 있다”고 한 것과 ‘이뭣꼬’ 화두가 무엇이 다른가?
세종대왕 이전에도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말이 있었다. 훈민정음 창제로 글자만 생긴 것이다. 간화선이 대혜 스님 대에 새로 생겼다는 말은 잘못됐다. 부처님 불법과 조사선과 간화선은 조금도 다를 것 없다. 다만, 간화선을 해야만 깨달을 수 있다면 아집이다.
# 간화선 부정은 부처님 부정하는 것
성철 스님은 <한국불교의 법맥>에서 “원오가 대혜에게 수시한 임제 정종기의 한 구절 등을 교가(敎家)에서 주석 붙이듯 알음알이 따라 해석하면 가소로울 뿐만 아니라 본분종사들이 금기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서옹 스님이 하루는 내게 물었다. “혜국 수좌, 조주 스님이 있던 관음원을 찾은 학자들이 잣나무는 없고 측백나무라고 했다네. 자네는 어찌 생각하나?” “스님, 저는 그냥 잣나무라 할랍니다.”
측백과 잣나무는 모두 인간이 이름 붙인 것에 불과하다. 깨달음의 세계는 보는 눈이 남아있는한 결코 볼 수 없는 세계다. 생각이 끊어지는 자리를 바로 보여주는 말을 해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생각 끊어지는 도리가 보배로 있다는 것은 조계선맥의 큰 자랑거리다.
#‘나’와 ‘너’의 차별은 아집 때문
화두에게 ‘나’를 전부 바쳐봤는가? 화두가 생각이 일어나기 전의 내 모습인 것은 제법무아의 ‘나’를 말한다. 하지만 나와 내 영혼, 내 마음과 네 마음이 따로 있다고 착각하는 것은 큰 병통이다. 이것은 이 방의 허공과 저 땅의 허공이 다르다는 생각과 같다. 벽만 허물면 이 허공 저 허공이 하나가 된다. 이 허공이 없어진 것도, 저 허공도 없어진 것도 아니다.
참선 수행자가 가장 실수하는 것은 유무(有無)와 시비(是非)를 따지는 것이다. ‘내’가 있기에 유과 무가 있다는 것은 나라고 하는 아집의 벽이 있을 때의 이야기다. 나의 모든 알음알이를 화두로 바꿔나갈 때 비로소 ‘나’는 없어지게 된다. 이것은 생각으로는 안된다.
# 선방 문제는 선방에서 해결할 일
뜨거운 눈물 쏟는 수좌가 적다. 수행풍토에 대해 지적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간화선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지만, 이는 선방의 문제이지, 간화선의 문제가 아니다.
국민소득 2만 달러 쯤 되면 사람들은 정신문화가 아닌 여가문화를 쫓는다. 인류의 문제다. 조계종단이 오늘날까지 온 것은 간화선의 힘이다. 간화선 자체의 피눈물 나는 노력으로 불교를 지켜왔지, 종단차원에서 간화선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화선 명맥이 지금까지 유지되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선방의 문제에 대해서는 엄청나게 마음이 아프다.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짚고 일어나야 하듯 선방 안에서 새로운 것을 찾아낼 때다. 전통을 무시하고 새 것을 쫓는 것은 엄청난 시행착오를 야기할 것이 자명하다.
간화선은 부처님 말씀을 올곧게 전달하는 법이다. 부처님이 고맙다. 간화선법을 알려준 은혜에 고맙다. 다만, 간화선 제일주의는 병 중의 병이다. 한국 승가를 구성하는 1만 2000여 비구ㆍ비구니 가운데 간화를 참구하는 스님만 따진다면 900여 명이다.
선방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모두 훤히 안다. 이를 어떻게 짊어지고 가야할 것인가. 선방에서 치열하게 수행하는 900여 수좌까지도 없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한국불교의 정체성은 어디서 찾을 것인가?
# 개인주의가 한국불교의 병폐
문제는 선방에까지 침투한 개인주의다. 선방까지 개인주의에 빠진 이유는 서구문명이 원인이다.
6살 때 서당을 다녔다. 훈장의 권위는 그림자도 밟아서는 안될 만큼 절대적이었다. 요즘 대학생들, 교수를 스승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젊은이들이 출가해서 선방을 찾는다.
선지식이 없다고 하는데, 요즘 젊은 사람들은 노스님들 공경하지도,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노스님을 잔소리꾼으로 보다 보니 탁마가 잘 이뤄지지 않고 있다. 어른 공경을 않는 것은 선방 뿐 아니라 인류 전체의 문제다.
# 청규 정신이 선방 살릴 것
해제비도 꼭 고쳐져야 할 문제지만 너무 지나치게 잘못 전해지고 있다. 몇몇 절의 해제비가 수백 만원 넘는 것은 문제지만 한 달에 15만원 해제비를 받는 절도 많다.
수도암에 머물 때 어느 보살이 2만원 하는 운동화를 사왔다. 한 번 운동화를 신기 시작하니 수십년 신었던 검은 고무신을 신지 않게 됐다. 한 번 편해진 사람, 한 번 펑펑 쓰기 시작한 사람이 되돌아가기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기에 상좌들과 노력하고 있다.
간화선 자체가 아닌 현금에 의해 일어나는 수행풍토에 대한 지적은 겸허히 경책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돌이켜보면 한국불교 역사에서 인재불사는 등한시돼 왔다. 선방에서도 인재불사를 고민해 교육원과 함께 <간화선>을 발간하고 3년째 <선원청규>를 편찬 중으로, 완성단계에 있다.
백장청규 정신이 사라졌다는 지적이 많다. 조계종이 종헌종법에 의해서 움직이다 보니, 백장청규가 생활화되기 어려웠던 점은 사실이다. 청규 정신이 되살아나 어른스님들이 어렵게 지키고 가꾸어 온 간화선 수행 가풍이 잘 지켜지길 바란다.
특별취재팀| 2009-08-21
“죽비로 길들여진 수행 풍토서는 선지식 나오기 어려워”
향봉 스님, 강도 높게 한국불교 병폐 성토
자신의 종교적 체험을 바탕으로 흡입력 있는 법문을 펼쳤던 향봉 스님(익산 사자암)은 8월 17일 자신의 두 번째 법석에서 “방장의 법어를 대필하거나 과도한 해제비를 주는 등 선지식이 없고, 배출될 수도 없는 풍토가 한국불교”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 문중 파벌에 갇혀 지나치게 폐쇄적
조계종의 종합수도 도량인 총림사찰에는 버젓이 폐쇄적인 형태가 실존한다. 해인사 출신이 아니면 해인사 주지가 될 수 없다. 강원장, 선원장, 율원장도 될 수 없다. 어느 한 곳이라 할 것 없이 통도사, 송광사, 수덕사 등 총림사찰 다섯 곳 모두가 부끄러운 전통의 못된 병을 앓고 있다.
총림의 정신적 지도자이며 사찰의 어른인 방장 선출방식에 있어서도 그 사찰 문중이 아니면 모시기는 커녕 후보명단에도 끼지 못한다. 제발 마음을 열어라. 한국불교가 변화해야 하고 고쳐나가야 할 부분이다.
# 앵무새 같은 법어는 내지 말아야
결제ㆍ해제 때마다 발표되는 총림 법어를 보자. 교계 신문들에 실리는 방장스님 법어를 보면 아직 내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고 느낀다. 온통 짜집기 투성이다. 한 쪽에는 호랑이가 나오다가 다른 쪽에는 쥐 그림이 등장하는 경우도 있다.
법어의 흐름이나 법어를 통해 일러주고 싶은 메시지가 활자 속에서 이미 흔들리고 있다. 그래서 방장 법어가 왜 저런지 물어봤다. 놀라운 대답을 들었다. “방장스님이 쓴 것이 아니라 시자스님이 썼다”는 것이다. 구술을 하고 받아쓰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네가 써라”하니 “알겠다”라는 것이 문제다.
법문도 마찬가지다. 교계 언론에서 산중의 어른이라는 분들이 짜깁기식 법문 아닌 법문을 늘어놓는 것을 보면 애잔함이 느껴진다. 세상에 가짜가 넘치니 실력 없는 선지식, 선지식 아닌 가짜들이 불교를 흔든다. 부끄러운 줄도 모른다.
# 앉아있는 선원, 변해야 산다
선원 대부분이 짜여진 정진 시간표에 의해 죽비소리로 앉고 서기를 반복한다. 한국의 선원은 좌선의 뿌리가 너무 깊게 박혀 있다. 앉아있는 선원에서 움직이는 선원으로 전환해 가야 한다. 새로운 시도와 출발이 있어야 한다.
한국불교에서 간화선은 불가침의 성역에 가깝다. 그러나 <육조단경>의 본문에 ‘화두’나 ‘공안’이라는 말은 찾아볼 수 없다. 이 땅에 구산선문을 열었던 시절에도 화두정진의 중요성을 제창한 조사는 없었다. 간화선의 화두정진에는 허물이 있을 수 없지만, 정진수행의 방법에는 개선해야 할 문제점이 많다.
육조혜능 선사는 좌선에만 집착함을 경계해 다음과 같은 게송까지 남기지 않았나? “살아서는 앉아서 눕지 못하고(生來坐不?) 죽어서는 누워서 앉지 못하네(死去?不坐) 송장이나 다를 바 없는 뼈덩이에서(一具臭骨頭) 어찌하여 깨달음을 얻으려 하랴(何爲立功課).”
# 도 넘은 해제비 지급 막아야
안거 해제비도 문제다. 해제비는 선원에서 한 철을 지내고 나면, 소속 사찰에서 지급하는 돈이다. 최근 충청도 어느 사찰에서 해제비를 750만원 줬다. 자기를 위해 자발적으로 참선수행 했는데 그 돈을 준 것이다. 90일 안거에 1인당 750만원을 줬다면 하루 임금으로는 7만원 이상이 된다. 그 돈이 누구 돈인가?
더 큰 문제는 해마다 기록이 깨지고 있다는 것이다. 적은 사찰도 물론 있다. 대중공양도 비구니스님 사찰에는 별로 없다. 비구니스님 도량 가운데 해제비를 많이 지급하는 절은 50만원, 보통 20~30만원 수준이다.
# 법거량 사라지면 죽은 선원
선지식이라 일컫는 해인사 성철 스님이 입적하고, 스님을 능가하는 제자가 배출됐는가? 그 반의 반이라도 도인이 출현했는가?
‘닭이 천 마리면 봉(鳳)이 한 마리’라는데 왜 한국불교에서는 이게 통하지 않는가?
전국 100여 선원에서 2500여 명이 수행하는데 도인이 안 나온다. 1년, 2년, 10년을 기다려도 나오지 않는다.
대체적으로 사미에서 비구 된 지 7~8년이 되면 타성이 생긴다. “몸과 마음을 던져서 부처님 말씀과 하나를 이뤄야겠다” “나는 왜 돈, 여자, 명예를 보면 흔들리는가” “나를 바로 잡기 위해 주력, 참선, 사경, 간경을 해야겠다” 하는 등 고뇌하는 모습이 없다.
그러다보니 선원에서 선문답의 법거량을 찾아보기도 힘들다. 왜 한국 선불교의 아름다운 전통인 선문답과 법거량이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있는가?
스님이 1만 명, 2만 명이냐는 숫자가 불교 발전을 좌우하지 않는다. 지금 한국사회를 대표하는 저명 인사들을 보자, 가톨릭 신자가 많다. 가톨릭 신자 아니더라도 가톨릭에 대한 신뢰 높다. 양이 문제가 아니라 질이다.
# 선방의 패거리 문화 청산해야
고불총림 방장 서옹 스님이 계실 때다. 서옹 스님이 광제 스님에게 인가를 내렸다. 스님은 <방함록>에 수록될 법어를 광제 스님에게 쓰라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광제 스님의 법어는 실리지 못했다. 광제 스님의 법어를 받은 측이 광제 스님의 법어를 안 싣기 위해 법을 고쳐 나이 제한까지 만들었다. 선방의 의식이 사회의 패거리문화보다 못하게 닫혀 있다. 이런 선방에서 어떻게 대승불교와 보살행을 실천할 수 있겠는가?
# 스님의 생일과 장례 검소해야
49재는 죽은 영가가 부처님 위신력을 통해 업장소멸해 왕생극락하기를 기원하고, 유가족을 위로하는 의미가 있다. 그런데 스님이 죽으면 제자들이 49재를 지낸다. 고인을 추모하는 의미에서 조촐하게 지낼 수는 있다. 요즘 스님의 49재는 인연 있는 사찰, 스님들이 번갈아 7개 사찰에서 옮겨 다니며 지내지고 있다.
생일문화도 그렇다. 출가자라는 사람들이 해마다 생일을 기억하고, 재가자들도 생략하는 환갑을 챙기기도 한다. 신도들은 주지스님 생일을 기억해 잔칫상을 차려준다. 특히 칠순, 팔순된 분들이라면 최소한 몇 십 년 수행해 온 분들 아닌가? 승가가 세속화되는 모습은 바꿔나가야 한다.
다음은 향봉 스님 법석에서 열린 토론의 일부.
질문자(우바이): 향봉 스님이 이번 법석에서 불교의 문제의식을 충분히 알려줘, 앞으로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가 문제로 남았다. 불교계의 폐단에 대한 적나라한 진단이 문제제기 수준으로 머문다면 많은 혼란이 야기될 것은 뻔하다. 뜻을 같이하는 사부대중이 모여 함께 풀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구체적인 실천방안이 제시돼야 한다. 잘못하면 향봉 스님 혼자만의 원맨쇼가 될 수 있다.
향봉 스님: 문제제기에 그쳐서는 안된다는 것은 안다. 외침으로 끝내지만은 않겠다는 생각으로 이런 야단법석을 펼쳤다. 재가자, 수행자 모두의 의식전환이 필요하다. 하나하나 달라져야 한다.
질문자(우바새, 익산): 야단법석에 모인 스님들이 원하는 것은 바른 수행과 재가자의 적극적인 포교 참여 등으로 정리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절 살림을 재가자들이 맡으면 어떤가? 스님은 법문과 수행에 전념하고 재가자들은 절 살림 살다가 모자라면 보태고, 남으면 사회에 회향하는 형태로 운영하는 것이다. 한국불교는 지나치게 스님 위주로 운영되고 있다.
법인 스님: 실상사가 그렇게 하고 있다. 실상사는 종무실장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다. 원주스님도 없고 불전함도 종무실 직원들이 관리한다. 스님들은 수행지도에만 전념하고 있다. 서울에서도 봉은사 등이 이러한 흐름에 동참하고 있다.
선원 해제비 문제가 나왔다. 이 문제를 선원에만 국한시키지 말고 한국불교의 대량생산과 소비, 업적주의 등의 관점에서 접근하면 어떨까? 의식전환을 강조하지만 제도가 바뀌면 의식도 정착된다.
원로스님이 입적해 5일장을 치루는 것이 부적절하다면 법과 제도를 바꾸면 된다. 법과 제도가 정립되지 않은 문제제기는 관념론에 그친다. 정착해야 한다. 법과 제도를 확립해야 한다. 재가자들도 정법불교를 바로 세우고 싶다면 정법 아닌 비법을 하는 스님에게 공양하지 말아라. 신도들이 스님을 망치고 있다.
신도가 수행자에게 ‘밥’을 준다면, 수행자는 신도에게 ‘법’을 준다. 정법불교를 않는 수행자에게 재가자는 두 가지 권리를 갖는다. 법문을 듣지 않을 권리와 공양을 올리지 않을 권리.정법과 비법을 구분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보면 된다. 수행은 하고 있는가, 무속행위를 하고 있지는 않은가, 대중을 현혹하고 있지 않는가 등. 신도들은 정법을 행하는 스님들에게 공양하고 힘을 보태야 한다. 신도들의 바른 공양운동을 제안한다.
질문자(우바이, 부산): 다수의 문제가 스님들 노후보장이 돼 있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질문자( 우바이, 대구): 한국불교를 보살들이 망친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하지만 스님들 중에는 선방 들어가면서 어디 선방 간다며 대중공양을 당부하는 경우가 있다. 또, 만행 나와서 오갈 때 없는 스님을 만나면 슬프다. 불편해도 스님은 꼭 절에서 주무셨으면 좋겠다. 토굴 등에 집착하는 모습도 안타깝다.
도법 스님: 한국불교의 실상이 적나라하게 짚어졌다. 오늘처럼 적나라했던 경우는 없었다. 그동안 스님들로부터 “집안의 추한 꼬라지를 스님끼리 소문나지 않게 고치면 되지 왜 동네방네에 들추느냐”는 지적도 숱하게 들어왔다.
우리끼리 잘 해보자 해서 잘 되면 얼마나 좋겠는가? 안에서 치열한 자기비판을 통한 자기혁신이 이뤄진다면 바깥사람들도 뭐라 하지 않는다. 불교계 폐단이 밝혀져 신도가 떨어지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곰팡이는 덮어두면 계속 확대 재생산된다. 없애려면 드러내서 바람을 쐬고 햇빛을 쏘이는 것 뿐이다. 한 달에 한 번씩 이런 야단법석을 지속적으로 연다면 한국불교의 미래를 환하게 이끌어 갈 것을 확신한다.
이 법석에서 향봉 스님이 한국불교에 대해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위험과 부담을 감수하면서 까지 지적한 것에 감사하다. 우리도 큰 마음을 보내고 힘을 보태자.
이민우 거사: 해제철 임에도 선원에서 올곧게 정진 중인 많은 수좌스님들이 있다. 잘못 생각하면 스님들의 본질적인 문제라고 생각될까 우려된다. 올곧게 수행하는 스님들은 망망대해에서 방향을 제시하는 나침반처럼 우리의 인생좌표이다. 재가자로서 스님들이 모두 다같이 매도되기 보다는 보호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향봉 스님: 언로가 막히면 그 집단은 썩는다. 불교계의 부끄럽고 추한 모습을 남대문 시장, 길거리에서 떠든 것이 아니다. 삼복더위에 야단법석을 찾은 참가자들이 무료로 오지도 않았다. 자기 시간, 비용 내서 참가한 사람들이다. 머리를 깎았는지 여부도 중요하지 않다.
출가자끼리 모여 속닥거리다, 재가자가 있으면 ‘양어가추(揚於家醜 집안의 허물을 드러내다)’하지 말자고 한다. 사부대중이 모인 자리면 머리를 맞대고 아픔을 함께 나누고 의식개혁을 일으켜야 한다.
특별취재팀 | 2009-08-21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나’의 소중함 깨달아야”
향봉 스님, 종교적 체험 중심의 법문 펼쳐
두번째 법주로 나선 향봉 스님(익산 사자암)은 8월 16일 열린 법석에서 당신의 종교적 체험을 중심으로 법문했다.
스님은 “인간의 감각기관 중 ‘입’ 아닌 것이 없어 구업(口業)이 가장 중요하다”며 “세상의 중심이 ‘나’인 것을 바로 알면 경전에도 스님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정법을 만난다”고 설했다.
또, 스님은 “20년의 침묵을 깨고 나선 첫 법회가 오늘 이 자리”라며 “그동안 종교적 체험을 했으니 이제 어느 곳이든 찾아가 법문을 하겠다”고 말했다.
다음은 스님의 법문이다.
# 무(無)자 화두 통해 종교적 체험해
나이 마흔이 됐을 때, 간절한 생각이 들었다. ‘영혼은 있을까?’‘간절히 기도하면 영가천도가 될까?’등 그런 궁금증이 인도로 가게 했고 그곳에서 종교적인 체험을 했다. 그 순간이 어떠했는지 그것은 드러낼 일도, 가르칠 일도 아니다.
초등학교 5~6학년 때 동진출가해서 학문적인 교양을 쌓지 못했다. 그래서 인도에 갔을 때 참 간절했다. 간절한 만큼 공부 한번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든 화두가 ‘무(無)자’였다. 달력을 보면, 망망대해를 보면 눈물이 나고 한국이 그리웠다. 의문이 풀리지 않으면 한국에 돌아가지 않겠다는 각오를 했다.
우연히 달력을 넘기는데 환하게 불이 켜졌다. 조명이 켜진 것이 아니라 어떤 빛이었다. 그 빛은 나를 준비 되어진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 아름다운 체험 이후로 20년간 말을 하지 않았다.
중국에 가서 내가 아는 불교가 맞는지 공부했다. 부처님 경전을 통해 소승이든 대승이든 내가 본 세계가 정확한지 공부했다. 5년 전 한국에 돌아와 익산 사자암에만 기거했다.
#‘입(口)’ 아닌 것 없어
<천수경> 처음에 나오는 것이 구업이다. 신ㆍ구ㆍ의(身口意) 삼업 가운데 악구(惡口 악담), 양설(兩舌 이간질 시키는 말), 기어(綺語 꾸미는 말), 망어(妄語 거짓말) 등 구업으로 짓는 업이 가장 많다.
천수천안관세음보살은 손과 눈만 천 개가 아니다. 귀나 코도 천 개이다. 우리 몸에는 아홉 개의 입이 있다. 코는 국 냄새 맡는 입이고, 눈은 보는 입이고, 귀는 듣는 입이다. 따라서 정구업(淨口業)의 바른 해석은 몸과 마음을 맑게 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 한생각에도 집착 말아야
<금강경>에서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이라는 말이 있다. 많은 사람들은 이를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생각을 내라’라고 해석한다. 이것을 “한 생각이 일어났거든 그것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로 바꿔보자. 생로병사는 모두 집착에서 온다.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는 하루에 천만 가지 생각을 한다. 너무 피곤하다. 생각이 일어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갖으려고 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
# 중도는 바로 ‘내’가 중심
팔만 장경의 핵심은 중도(中道)와 연기법칙이다. 그러나 중도(中道)에 대해 많은 스님들이 헤매고 있다. 경전에서 소나의 거문고 타는 말씀을 인용해 유교의 중용과 같은 의미로 중도를 해석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거문고 줄이 팽팽하면 소리가 맑지 않다. 느슨하면 둔탁하다. 좋은 소리를 내려면 줄이 고르게 되어야 한다.
<중용(中庸)>은 인(仁) 의(義) 예(禮) 지(知) 신(信)을 생활의 기본 덕목으로 삼아 어느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이 온당하게, 또는 지나치거나 모자람 없이 알맞게 덕과 도의 균형과 조화를 강조하는 가르침이다.
그러나 불교의 중도사상(中道思想)은 중용과 근본을 달리한다. 중용이 양변불락(兩邊不落)사상이라면 중도는 양변무애(兩邊無碍)이자 무변중심(無邊中心)사상이다. 불교의 중도에는 좌우가 없고 변두리가 없는 것이다.
어디서 어디까지가 동쪽인가? 내가 서 있는 곳부터 해 뜨는 방향을 동쪽이라고 한다. 그럼 서쪽은? 내가 서 있는 기준으로부터 해지는 곳이다. 어렵지 않다.
모서리에 앉아도 내가 앉으면 그곳이 중앙이다. 무하마드가 태어난 곳의 명칭이 메카로 바뀌었다. 어느 곳에 서 있어도 내가 세상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이며 세상의 주인인 것이다.
관점을 바꿔야 한다. 마음이 열려야 세상이 열린다. 목탁소리에 의해 운명이 변하는 것이 아니고, 생각이 바뀌어야 운명이 바뀌고 삶이 바뀌는 것이다. 참회하면 업장이 녹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우리의 의식이 바뀌어야 한다.
임제 선사는 불교의 중도를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으로 설명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으로 시작해 ‘즉심시불(卽心是佛) 심외무불(心外無佛)’ 등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가르침과 ‘법등명(法燈明) 자등명(自燈明)’의 최후 유훈이 이를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번뇌가 보리요, 중생이 곧 부처’라고 <법화경> 등에서 가르치는 것이다.
#‘나’라는 자신감, 오늘이 중요
자신에 대해 스스로 용기를 불어 넣어줘야 한다. 나 대신 그것을 해 줄 사람은 없다. 부처는 어렵게 전달하는 것이 진리라고 한 적이 없다. 진리는 내 주변에 널려있다. 진리와 한몸이 될 수 없는 것은 집착의 소유욕을 버리지 못해서다. 부처님이 태어날 때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 하셨다. 같은 이치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건 ‘나’다.
오늘이, 금생이 제일 중요하다. 불교는 오늘의 종교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나다. 내가 죽으면 끝이다. 우울하다거나, 돈 없다고 불평하면 안된다. 살아있다는 자체로 ‘나’는 선택받은 사람이다.
모든 것은 마음에서 비롯된다. 가정은 안 살피고 밖에만 잘 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은 맞아야 한다. 내 몸, 내 가족을 서운하게 해서는 안된다.
부처님이 열반에 들 때, 부처님은 “네 마음을 게을리 하지 말라. 네 마음의 스승이 최고의 스승이다”라고 말했다.
<성경>에는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라고 써 있다. 하지만 부처님은 “구하지 말라, 구할 수록 마음이 어지럽다. 두드리지 말라. 언제나 문을 열려있다”고 말했다. 얼마나 훌륭한가?
#경전에도 부처에게도 속아서는 안돼
불교텔레비전을 보니 누워있는 부처님상을 조성해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광고가 있었다. 진리가 옆에 있고, 쉽게 만날 수 있음에도 신도들은 복을 뺏길까봐 그 상을 향해 달려간다.
오늘날 한국불교는 선방에서 정진하는 수좌들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 하지만 불교는 승려에게 의지할 일도 경전에 의지할 일도 아니다.
예를 들어 커피맛, 김치맛을 언어나 문장으로 설명할 수 없다. 먹고도 설명 못하는 것은 그것에 매달려 있는 것이다. <금강경>에는 부처님이 깨달은 내용이 모두 녹아들어있다. 경전에 속아서도 안되지만 스님에게 의지해서도 안된다. 내 스스로 마음을 열어서 세상을 살아야 한다.
# 12연기 순서에 집착 말아야
12연기는 연기법칙의 큰 틀이다. 부처님은 연기를 순역(順逆)으로 꿰뚫어 깨달음을 얻었고, 나가르주나(용수보살)는 대중의 이해를 돕기 위해 12연기를 역순(逆順)으로 풀었다.
성철 스님은 “12연기는 순관이든 역관이든 설명이 안된다. 깨달아야 알지 그 이전까지 모른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12연기를 설명할 수 있다. 순서로 배열돼 있지 않고 흐트러져 있어도, 예를 들어 ‘도레미파솔라시도’가 섞여도 노래가 완성되는 것처럼 순서로 설명해서도 안되고, 역으로도 안된다. 단지 그렇게 나열해 놓은 것 뿐이다.
인과를 설명하는 것 가운데 육도 윤회는 불교와 관련 없다. 부처님이 탄생하기 500년 전부터 윤회설이 있었다. 육도 윤회를 불교에서 받아들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불교가 ‘내생이 있다, 없다’에 대해서는 할 말이 아니다. 단지 지금 우리가 사는 동안, 마음이 열렸을 때나 닫혔을 때나 한 개체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 뿐이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는 하나다. 우리도 지금 이 순간 생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윤회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깎은 사과를 책상위에 두면 산화작용에 의해 순간순간마다 그 색깔이 변하는 것처럼 연기의 법칙에서는 영원한 것,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 전생ㆍ내생 모두 없어 오직 오늘이 있을 뿐
연기의 원리에서는 우주를 창조하고 주재한다는 범천(브라흐만)을 인정할 수 없듯, 나를 주재한다는 ‘거짓 나’(아트만)도 인정될 수 없다. 영원불변한 내가 없는데 무엇이 주체가 돼 육도윤회를 한단 말인가? 불교는 모든 것이 인연으로 생겼다 하면서 다른 종교를 나무란다. 하지만 ‘나’를 주재하는 것을 아트만으로 규정하는 우리가 더 웃긴다.
꽃나무가 있다. 그 꽃이 뿌리로부터 땅에서부터 받아 들여서, 눈 귀 코 입이 작동할 때 꽃 향기도 인식할 수 있다. 눈이 작동할 때 숫자를 헤아릴 수 있다. 박수소리, 주먹소리, 보면서 들으면서 분별하며 작동한다. 희로애락, 설렘, 실망의 감정이 올라온다. 살아있는 오늘이 참으로 소중한 것이다. 오늘은 두 번 다시 오지 않기 때문이다.
# 치열하게, 간절하게 수행해야
신앙, 수행은 무섭게 해야 한다. 참으로 간절하게 수행해야 한다. 나는 종교적 체험을 하고난 뒤 20년을 침묵했다.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 20년 동안 방에 쳐 박혀 있었겠냐? 어록이나 경전 등을 꼼꼼히 살펴보는 시간을 가졌다.
어떤 스님에게 “물속에 담긴 달을 보며 꺼내달라”고 했었다. 그 스님은 내게 말하길, “그 달이 연꽃으로 피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자신의 마음이 열려 있으면 머리 굴려 이야기하지 않는다. 또 누가 뭐라 해도 당당하다. 종교적인 체험을 하면 당당하고 넉넉해진다. 자유로워진다. 내가 본 세계가 흔들리지 않고 날마다 좋은날이 된다.
다음은 향봉 스님 법석에서 열린 토론의 일부.
도법 스님: 스님의 해석 가운데 ‘코도 입이다’, ‘눈도 입이다’ 라고 하는 것은 많은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 반대로 원래대로 경전을 해석하면 어떤 문제가 있는가?
향봉 스님: 아무리 유명한 학문이라 해도 스승을 뛰어넘는 제자가 있어야 학문이 발전한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하면 안된다. 나는 단지 다양한 해석을 하고자 했을 뿐이다.
재연 스님: 경전을 대하는 태도, 우리의 약속이 있지 않은가? 공부하는 입장에서 경전의 의미를 국한하지 말고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더 좋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 바람직하다. 하지만 원래의 것은 꼭 있어야 할 바탕이고 새로운 해석은 그 다음이다.
향봉 스님: <천수경>도 중국에서 만들어진 위경(僞經)이다. <천수경> 자체도 위경이니 제대로 이해하려면 확대해석도 필요하다.
화엄학림 학인스님 : ‘정구업진언(淨口業眞言)’이나 아트만 등 향봉 스님이 자의적으로 해석한 부분에 대해 잘못된 불교가 전해져 신도들에게 끼칠 우려도 있다.
향봉 스님: 한국은 교학적으로 발전하기 어려운 것 같다. 동국대 불교대학도 일본 불교학을 연구발표할 뿐이다. 토시 몇 개 고쳐 그대로 교재로 삼고 있다.
한국 불교학자들은 수직으로 학문을 파고 들지 않는다. ‘정구업진언’에 대한 내 해석은 억지가 아니라 지금까지와는 달리 이런 차원에서도 해석할 수 있다는 말이다.
기독교적 이단적 해석이 아닌데도 도법, 실상사 주지스님, 화엄학림 스님 모두 전혀 맞지 않다고 말한다.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다고 인정할 필요가 있다. <천수경> 문제는 넘어가자.
특별취재팀 | 2009-08-21
“천불ㆍ만불 불상창고 같은 법당 막아야”
무비 스님, 한국불교 폐단 질타…②
“불상 조성에 집착하는 것은 <금강경>과 거리가 멀다. 심지어 불상 아닌 돌 등을 놓고 절을 짓고 절을 하기도 한다. 불상창고 같은 법당은 바람직하지 않다.”
무비 스님은 <금강경>의 눈으로 한국불교의 어두운 면을 드러냈다. 스님을 비롯해 법석에 자리한 사부대중은 천불ㆍ만불의 불상을 조성해 대웅전을 빼곡하게 채운 법당이나 바위가 불상과 엇비슷하게 생긴 것을 보고 불사를 하는 것에 대해 비판의 한 목소리를 냈다.
#“부처님 말씀 바로 알면 남 도울 수 밖에”
제8 무법출생분(依法出生分): “수보리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칠보를 가득 채워…”
무비 스님: 불자들이 우선 해야 할 일이 부처님 가르침을 깊고 넓게 배우고 아는 것이다. 예전에 송광사에서 ‘보왕삼매론’을 복사를 해서 올리는 것을 봤다. 그때 부처님 깨달음을 알리는 일이 힘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경전 문구를 한 장으로 정리해 1988년도 봄부터 알리기 시작했다. 불자로서 부처님 말씀을 제대로 느낀다면 저절로 희사하는 운동이 일어날 것이다.
#“법의 실체 바로 알아야”
제13분 여법수지분(如法受持分): “여래께서는 설하신 법이 없습니까?”
무비 스님: 경전의 가르침을 무소설(無所說)의 안목으로 보는가? 진정한 <금강경>은 과연 무엇인가? 한 목숨의 가치보다도 <금강경>의 사구게(四句偈) 가치가 더 많다는데, 세상 만사 다 접고 <금강경>에만 매달려야 할 문제 아닌가? 언어 문자로 보는 <금강경> 말고 진정한 <금강경>은 무엇인가?
보살: 교통사고로 왼팔을 못 쓰는 처사가 있었다. “처사님은 왼쪽 팔이 없어서 불편하지 않습니까”라고 물었더니 “오랫동안 안 써서 모르겠는데요”라고 하더라. 그 처사의 마음이 <금강경>을 대하는 우리들 마음 같다.
무비 스님: <금강경>의 진짜 뜻은 무엇인가? 이것은 평생 과제로 삼고 <금강경>을 수지독송해야 한다.
#“법 아닌 법 알아야”
제14 이상적멸분(離相寂滅分): “여래는 바른 말을 하는 이고, 참된 말을 하는 이며….”
무비 스님: 얼마나 바른 말, 참된 말, 이치에 맞는 말, 속임 없는 말을 하며, 양심대로 말하는가? 불교 교리를 사실 그대로 사찰운영과 관계없이 말하는가?
해진 스님(화엄학림): 이는 <금강경>에서 부처에게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닌가? 불법(佛法)이야 말로 불법(不法)이다.
도법 스님: 조계종단에 종헌ㆍ종법이 있어 조계종이 운영된다. 종정스님, 총무원장스님도 소의경전의 사상과 내용을 실현하기 위해서 있는데 종단 소의경전의 사상과 정신이 종단에서 실현되고 있는가는 의문이다. “상을 버리면 곧 부처”라고 말하면서 온통 상(相)노릇 하는 것이 아닌가. 종정상, 총무원장상, 주지상, 수좌상, 비구상 이런 상을 벗어던져야 한다.
#“마음은 연기 작용의 결과”
제18 일체동관분(一體同觀分):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여래에게 육안, 천안, 혜안, 법안, 불안이 있는가?”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무비 스님: 마음의 세계, 마음의 문제에 대해 논해보자.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는 구절. 주금강이라 불리던 덕산 스님이 노보살을 만나 떡을 두고 시험한 이야기처럼, 우리 주변에는 그때 그 노보살 같은 숨은 도인이 많을 것 이라 생각한다. 덕산 스님이 대답 못했다고 우리도 못 하라는 법 없으니 의견을 말해 달라.
각묵 스님: <금강경>에서의 마음은 범어 원전에서 ‘마음의 흐름’을 말한다. 마음을 흐름으로 보라는 것은 일체 유위법(有爲法)이 모두 찰나와 흐름(상속)으로 이뤄져 있다는 것을 뜻한다.
화두 때문에 출가했으나 간화선 공부를 해보니 안 되더라. 철저히 교학적으로 마음을 표현한다면 마음은 흘러가 얻을 수 없다. 또, 미래의 마음의 흐름은 오지 않은 것을 말한다.
법인 스님: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應無所住而生其心)’는 뜻은‘생각의 덫에 갇히지 말고 적극적으로 마음을 써라’라고 해석해야 한다. <금강경>을 소의경전으로 하지만 대부분 ‘응무소주(應無所住)’에 머물러 ‘이생기심(而生其心)’에 약하다. 상(相)내지 말라는 말에 갇힌 현실이다. 또, 과거 현재 미래의 마음을 알 수 없다는 것을 두고 마음을 얻을 수 없고, 깨달을 수 없다는 데 갇혀있는 건 아닌가?
마음은 실체가 아니라 육근(六根) 육경(六境) 육식(六識)이 화합해 만들어낸 연기작용의 결과다. 이것을 ‘이생기심’으로 활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선인도 악인도 연기(緣起)된 것으로 실체가 없다.
#“선악 기준 없어”
제23 정심행선분(淨心行善分): “진정한 선행(善行)이란 무엇인가?”
무비 스님: 선행이라 생각한 것이 악행이 될 수도 있다.
비구니스님: 법석의 논의가 사회봉사활동에 치우치고 있다. 불교가 수승한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데모하고 피 흘리는 곳에 스님들이 모두 나가야 하는 것 아니다. 스님이 해야 하는 선행과 재가자의 선행은 다르다.
의정부 거사: 현대불교신문 구독자다. 현대불교신문을 펼치는 순간, 불교의 신음소리가 넘쳐난다. 한국불교의 스님이 변해야 재가자가 변하고 불교가 변할 수 있다. 스님들이 먼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불교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하니, 옆 사람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무비 스님: 선행을 제대로 못해서 불교가 땅에 떨어졌다. 언론마다 곳곳에서 “불교 이대로 안된다” 라고 하고 있다. 불교가 새로운 각오 다져야할 때다.
#“부처의 모습에 치중 말아야”
제26 법신비상분(法身非相分): “여래의 신체적 특징과 그것을 떠난 여래란 무엇인가?”
제27 무단무멸분(無斷無滅分): “中道란 무엇인가?”
무비 스님: 신체적 특징을 떠난 여래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절실하다. 절집안에서 상(相)에 집착해서 너무 많은 불상을 조성하고 있다. 또 바위가 이렇게 생겼다 해서 보살상이네 부처상이네 하는 것도 현실이다.
<금강경>에 비춰 보면 한국불교의 현실은 너무나 처참하다. 불교가 망해가는 것은 부처님 말씀인 경전에 기준을 두지 않고 제멋대로 불교 간판을 거는 것이 문제다. 광고비 준다고 불교언론이 신문에 게재해주는 것도 문제다.
천불 만불 등 너무 많은 불상을 조성해 법당을 불상창고로 만들어서는 안된다. 조화롭게 만드는 중도가 필요하다.
제32 관념을 떠난 교화[應化非眞分]
무비 스님: 어떻게 남을 위해 설명해 줄 것인가? ‘상에 집착하지 말고 흔들리지 말라(不取於相 如如不動)’는 것은 상을 취하지 않은 행동이 법을 올바로 설하는 자세라는 말이다.
비구니스님: 선(禪)에 대해 바로 이해해야 한다. 한국선을 매도해서는 안된다. 강사가 영어문법을 강의한다면, 선사는 영어회화 가르치는 분이다. 화두 씨름해봐야 소용없다 하지만 안거마다 수천의 납자들이 화두를 들고 씨름하고 있다. 치열한 자기 구도 없다면 회향할 것도 없다.
복지센터 등은 스님이 아니어도 재가자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스님들을 현장으로 끌어낼 것이 아니라 “선방 가서 공부하십시오. 바깥 일은 재가자가 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이것이 올바른 불자라 생각한다. 참선 하는 스님을 부정적으로 보지 말라.
무비 스님: ‘불교란 무엇인가?’‘출가 수행자란 누구인가?’등 오늘의 한국불교 현주소를 바로 알고, 참된 목소리를 모으는 계기였다고 생각한다. 성토하자고 했음에도 말을 아껴 4강이 진행되는 동안 정법불교에 대한 토론이 미진했던 점은 아쉽다.
특별취재팀 | 2009-08-21
“법보종찰, 한국불교 1번지서 영가장사 말아야”
무비 스님, 한국불교 폐단 질타…①
하지만 해인사가 어떤 사찰인가. 법보인 ‘팔만대장경’을 모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사찰이다. 서릿발 같은 법만 거량해도 모자란 곳이다. 한국불교 1번지인 조계사도 마찬가지다. 최상승의 법을 거량해도 시간이 모자라고, 사람이 모자라야 한다. 그런데 이것이 오늘날 한국불교의 현실이다. 어떻게 하면 바람직한 불교를 세울 것인가?
현각 스님: 직접 거론하기 어렵지만, 영가를 팔아서 큰스님이 된 스님도 있다. 지난번 본말사주지연수 때, 한 주지스님이 설법전에 걸린 영가를 소개하면서 1인당 2만원인데, 10만명이 넘었다고 한다. 20억이 넘는 거액이다. 그 주지스님은 그렇게 모인 돈을 갖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면 되지 않느냐고 했다. 방편은 우리 삶에서 버릴 수 없는 것이다. 다만 본질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 같다.
도법 스님: 방편을 버릴 수는 없다. 법다운 방편, 법에 맞는 방법과 과정이 중요하다. 천도재는 상업화다. 법답게 하고 있는가, 법의 중심에서 48재를, 천도재를 하고 있는가, 상업화되지 않았냐는 돌이켜볼 문제다.
천도재를 통해 모은 돈을 합리적으로 쓰자는 의견도 있지만 위험한 발상이다. 49재를 하더라도 법의 정신에 맞게 해야 한다는 전제가 돼야 한다.
무비 스님: 신도들에게도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수요가 있으니 공급이 있다. 장사가 되니까 하는 것이다. 신도 의식 수준이 문제다. 염불, 참선 등 다양한 수행방법이 있는데도 천도재에 동조하니까 공급자가 생기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지나친 무속행위는 지양해야 하지 않겠는가. 천도의 실체를 명확히 파악하면, 그 많은 사람들이 운집하지 않을 것이다. 양쪽 다 한심할 뿐이다. 우리 모두 같이 반성하고 각성해야 한다.
특별취재팀 | 2009-08-21
“견성은 옆사람 살필 줄 아는 안목”
무비 스님 “불교의 사회참여 늘려 보살행 펼쳐야”
소의경전에 대한 논란은 뚜렷한 합의점을 찾지 못한 채 끝났다. 그러나 무비 스님의 법석은 <금강경>을 강독하며 각 분(分)마다 문제를 점검하며 무르익어 갔다. 스님은 대중과 <금강경> 각 분을 합송(合誦)한 후 점검 ㆍ토론하며 한국불교의 문제점을 진단했다.
#전법에 겸손ㆍ정직해야
제1 법회인유분(法會因由分) “이와 같이 저는 들었습니다.”
무비 스님: “불교는 이렇다”, “부처님은 이와 같이 말씀했다” 등으로 말하는 불자들이 많다. 이것은 대단한 착각이며 오만한 태도다. 불교를 강의하고 법을 설함에 있어 우리는 얼마나 겸손하고 정직한가?
지금 내가 말하는 것도 바로 문 밖만 나서면 서로 다르게 이야기 한다. 한 사람만 건너가면 본래의 뜻이 와전되는 것이 현실이다. 올바른 불자라면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했다”고 단정 짓지 말고 “이와 같이 저는 들었습니다”하고 겸손히 말해야 한다.
#어려운 이웃 바로 돕는 불교 돼야
제1 법회인유분(法會因由分)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습니다.”
제4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 “보살은 어떤 대상에도 집착 없이 보시해야 한다.”
무비 스님: <금강경>이 사위국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에 설해진 것은 고독한 사람들을 보살피고 살피고자 함이었다. 기수급고독원은 기타(祇陀) 태자와 급고독(給孤獨) 장자가 보시해 지어진 곳이다. 어려운 사람을 도우며 살았던 급고독 장자처럼 고독하고 외로운 사람들을 보살피라는 취지에서 <금강경>이 급고독원에서 설해졌다고 표현한 것이다.
근본불교라는 아함부 경전도 부처님 열반 후 400여 년이 지나서야 성문화됐다. <금강경> 등 대승불교 경전은 짧게는 500년, 1000년 후 지어진 것도 있다. 대승경전인 <금강경>이 기수급고독원에서 설해졌다는 것에는 의도적으로 어려운 이웃을 위해 살라는 보살정신을 표현했다. 이런 문제에 대해 과연 불자들이 얼마나 마음을 쓰고 있는가. 그것이 우리 수행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이런 것들도 생각해봐야 한다.
법인 스님(화엄학림 학장): 서울역 노숙자들에게 무료급식을 할 때 보살행이라고 칭해서는 안된다. 노숙자들이 왜 생길 수밖에 없는지 그 고통의 문제에 대해 보다 과학적이고 사회적으로 접근이 있어야 한다. 참선하고 경전 읽고 깨달아 보시하고, 고통에 대한 인식이 낮은 까닭에 사회적 대응방법이라고는 법보시라는 법문이 대부분이며, 현실 사안에 대한 자선사업에 머물고 있다.
보살행을 할 때 보다 개인적ㆍ사회적ㆍ범인류적 문제와 환경 문제 등 고(苦)에 대한 과학적이고 사회적인 인식으로 지평을 넓힐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불교의 보살행은 자선사업으로 가는 좁은 의미로 밖에 머무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부산 거사: 포교활동에도 변화가 필요하다. 현지에 가서 소외받는 사람들을 위해 활동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 마련이 시급하다.
현각 스님(불교환경연대 집행위원장): 종교별 사회복지시설을 보면 불교는 근래 들어서야 체면유지 하는 정도다. 또, 사회복지종사자들은 종교시설에서 일하는 것이 가장 힘들다고 한다. 우리가 역으로 이들을 힘들게 하는 사례도 있어 반성할 필요가 있다. <금강경>에서 말하는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 등에 얽매여 그들을 힘들게 한다면 그것은 잘못됐다.
주변을 돌아보면 해야 할 일이 많다. <천수경>을 교재로 지역 어르신들에게 한글교육을 실시해 큰 호응을 얻은 한 비구니 스님이 한 예다. 요즘 다문화가정이 주변에 많다. 한국문화를 모르고 온 결혼이주여성들에게 직접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방법 등도 찾아보자.
박찬욱 소장(밝은사람들): 보살행하면 이타행과 물질복지와 정신복지를 말하는 경우가 많다. 불교의 입장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정신적 복지다.
일반인이 살다보면 고통의 문제, 실제 생활에서 느끼는 고(苦)는 구체적이고 상세하지만 절에 오면 원칙적인 얘기만 들을 수 있을 뿐이다. 실생활에서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는지 테크닉이 부족하다. 구호가 아닌 치유에 관심을 둬야한다.
진오 스님(청정승가대중결사 의장): 종책 소임자 등에게 목욕봉사 등 봉사에 대한 의무를 부과해 자격조건 제한을 둬야 한다. 그래야만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포교종책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가 남지심: 부처님 가르침 정말 좋다. 하지만 가르침만으로 될까 하는 의문이 든다. 삶이라는 문제에서 아는 것만으로 완성될 수 있을까. 부처님 바른 법을 알리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안다는 것으로 끝나면 안된다. 삶의 실천, 인격의 완성이 따르지 않으면 무의미하다. 전법포교는 부처님 가르침을 전하는 것이다. 하지만 실천이 결여되면 부처님 가르침은 완성될 수 없다.
무비 스님: 부처님 가르침이 실천에 옮겨져야 한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말이다.
도법 스님: 지금 이 야단법석의 성격 자체가 <금강경>의 눈으로 한국불교 현실을 진단하고 길을 찾는 것이다. ‘진단’에 초점을 두고 구체적으로 보자.
스님들 가운데 ‘깨달음병 환자’, ‘부처병 환자’, ‘견성성불(見性成佛) 환자’가 많다. 이들에게 보살행을 하면 반드시 견성성불하고 부처된다는 확신을 주느냐가 중요하다. 법주스님(무비 스님)이 고통 받는 “이웃을 위해 보살행을 하면 성불한다, 부처된다”는 확신을 갖게 해주면 그 다음 문제는 저절로 풀릴 것 같다.
해인사는 ‘현대의 국민선사’라 불리는 성철 스님이 심오하고 고준한 법을 가르친 곳이다. 그러나 실제 상황을 보면 사하촌 주민들은 스님들을 불신하고 기피하고 불만을 갖고 있었다. 조계종 종립선원인 봉암사를 보자. 근래 들어 사찰의 외형은 크고 웅장하고 화려해졌지만 주변마을은 무참하게 버려졌다. 한국불교는 중생의 삶을 돌보는 근본적인 마인드의 변화가 필요하다.
무비 스님: 아픈 지적에 한 마디 덧붙이면, 어느 절에 주지 스님이 새로 부임했다. 짠 스님인데 설을 맞이해 쌀 90포대를 준비해 한 동네는 40포대, 옆 동네는 50포대를 나눠졌다. 주민들 사이에 난리가 났다.
“스님들이 어디 잘못된 것 아닌가” “다른 곳에 갈 쌀을 잘못 전한 것 아닌가”하는등 여러 억측이 난무했다. 이 이야기를 듣고 한없이 부끄러웠다. 그 동네가 바로 사하촌이었다.
봉암사ㆍ해인사의 경우도 같은 맥락에서 나온 이야기다. 고준한 성지가 있더라도 중생들에게 회향되지 않으면 아무 의미 없다. 그것이 소승(小乘)이다.
성도(成道)와 견성(見性)은 옆 사람을 볼 수 있고 살필 수 있는 안목이다. 사찰마다 가장 가까이 사는 주변 사하촌부터 보살필 줄 아는 각성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이미 성불돼 있는 존재다. 보살행을 실천하기만 하면 된다. 성불하겠다는 간판을 걸고 정진하는 사람, 진정 성불하고 싶어서 앉아 있는지 점검해봐야 한다. 정말 성불할거면 과연 그렇게 살 것인지, 불교계 치부이지만 이제는 다 깨놓고 얘기할 필요가 있다.
특별취재팀 | 2009-08-21
지리산 자락에 넘쳐난 정법 위한 苦言
지리산 실상사 등, 지리산 야단법석 개최
민족 성지(聖地) 지리산에서 사부대중이 한자리에 모여 한국불교의 미래를 고민했다.
움직이는 선원(조실 무비) 등 민족성지 지리산을 위한 불교연대 준비위원회는 8월 14~18일 지리산 실상사 작은학교에서 ‘정법불교를 모색하는 지리산 야단법석’을 개최했다.
행사에는 법주로 나선 무비 혜국 향봉 도업 스님을 비롯해 실상사 재연 스님, 벽송사 월암 스님, 황매암 일장 스님 등 지리산 인근스님을 중심으로 사부대중 300여 명이 참가했다.
서울 부산 대구 등 전국에서 법석에 동참한 재가자는 100여 명에 이르렀다. 특히 참가자 중에는 개신교 목사를 비롯해 자신이 불자가 아님을 떳떳하게 밝히는 재가자들이 있어, 정법을 갈구함에는 출ㆍ재가, 불자ㆍ비불자의 구분이 없음을 보여줬다.
첫 법주로 나선 무비 스님(움직이는 선원 조실)은 <금강경> 소의 경전 문제를 제기했다.
스님이 <금강경>을 문제 삼은 것은 조계종의 사상적 근간인 <금강경>을 바로 세워야 조계종이 바로 서고, 한국불교가 살아날 수 있다는 절박함 때문이었다.
주최 측이 물질적 풍요를 마음껏 누리고 있는 21세기 한국사회와 불교계에 대한 위기감에서 법석을 마련됐다고 밝힌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깨달음을 점검 받고자 두 번째 법주로 나선 향봉 스님(익산 사자암)은 한국불교의 폐단을 집중적으로 날카롭게 지적했다.
전국선원수좌회를 대표해 세 번째 법주로 법석을 이끈 혜국 스님(충주 석종사 금봉선원장)은 “간화선사가 아니었다면 오늘의 한국불교는 없었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도법 스님(움직이는 선원 열중)은 법석에서 종정상, 총무원장상, 종회의원상 등 스님들부터 상을 버려야 불교가 바로 선다고 강하게 주장을 펼쳐 눈길을 끌기도 했다.
도법 스님 뿐 아니라 다수의 대중들은 강도 높게 불교에 대한 비판을 퍼부었다.
성역과 같았던 <금강경>과 간화선, 깨달음 등 조계종의 근간을 뒤흔들만한 주제가 오갔다. 49재를 마흔 아홉 번 지내는 1029재, 천불ㆍ만불을 조성해 법당을 불상창고로 만드는 문제 등 불교문화의 현상에 대한 지적도 끊이지 않았다. 재가자들은 평소 스님에 대해 아쉬웠던 점들을 하소연하듯 쏟아냈다.
승가의 권위와 선방의 신비가 법석에 내동댕이쳐져 널브러진 상황에서 몇몇 재가불자는 승가를 외호하는 발언을 해 아름다운 모습을 연출하기도 했다.
한국불교에 일진광풍을 몰고 왔던 4박 5일간의 야단법석은 끝났다. 하지만 안다. 그래도 선방을 지키는 수좌, 포교일선에서 활동 중인 대중, 불교를 외호하는 재가자들이 있어 한국불교의 미래가 밝다는 것을.
특별취재팀=박재완ㆍ조동섭ㆍ노덕현ㆍ이상언ㆍ박선주 기자 | 2009-08-21
야단법석! 지리산에서 정법을 논하다
움직이는선원, 오후 14일 실상사 작은학교에서 첫발
“마음 속 담아둔 하나의 질문이라도 남으면 끝까지 토론한다.”
정법을 잣대로 한국불교의 현주소를 재는 2009 ‘정법불교를 모색하는 지리산 야단법석’(이하 야단법석)이 8월 14일 지리산 실상사 작은학교에서 열렸다.
8월 14일부터 18일까지 4박 5일간 열리는 이번 야단법석은 화엄사 쌍계사 실상사 대원사 벽송사 등 댐건설 등 환경파괴 위기에 처한 지리산 지역의 사찰들이 결성한 ‘민족성지 지리산을 위한 불교연대’(이하 불교연대)의 ‘움직이는 선원’ 프로젝트 첫 행사이기도 하다.
‘<금강경>의 눈으로 오늘의 한국불교를 점검하고 대안을 찾는다’을 주제로 열린 이번 야단법석은 무비 스님(움직이는선원 조실)을 법주로 전국선원수좌회 대표 혜국 스님, 향봉 스님, 도법 스님(움직이는 선원 열중) 등이 법사로 나섰다. 참가대중은 이날 입제식을 시작으로 스님들과 재가자 300여명이 한데 어우러져 숙식하며 불교의 미래대안을 모색한다.
이날 입제식에서 실상사 주지 재현 스님은 “제대로 공부하고 정진하는 분위기가 지리산에 꽉 찬 듯하다. 움직이는선원은 이러한 역동적인 기운으로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는 자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불교연대 측 대표로 쌍계사 주지 상훈 스님(불교연대 상임이사)는 “야단법석은 움직이는 선원을 예비 진단하는 첫 움직임”이라며 “4박 5일간의 토론을 통해 수행자 삶과 역할에 대해 다양한 실천적 대안 나오길 바란다”고 기대했다.
조계종 원로인 월탄 스님은 “고려말 당시 3만 승려 중 보조국사 등 단 6명이 정혜결사를 통해 혼탁한 당시 불교를 재생시켰다. 젊은 사부대중이 모인 이 자리를 통해 살아있는 불교로 거듭나길 기대한다”고 격려했다.
이날 총사회를 맡은 법인 스님은 취지문을 통해 “시대의 요구, 뭇생명의 부름에 응답하고자 부처님 대승보살, 선사 스님들의 뜻을 받들어 참 대승, 새로운 대승불교인 ‘정법불교를 모색하는 지리산 야단법석’을 연다”며 “파사현정의 횃불이 활활 타오르도록 지극정성을 다해 정진 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입재식에 이후 첫날 토론회로는 무비 스님의 ‘조계종 표준 금강경에서 살펴본 수행지침 점검과 반성’이 진행됐으며, 참가대중의 만남의 시간이 이어졌다.
일정
△ 14일: 입제식 및 무비 스님 1회 210분 △15일: 무비스님, 2회 450분 △16일: 무비 스님 1회 240분, 향봉 스님 1회 210분 △17일: 향봉 스님 2회 240분, 혜국 스님 1회 210분 △18일: 도법 스님 1회 240분. (063)636-3031, 3191
글=노덕현 기자, 사진=박재완 기자 | Dhavala@buddhapia.com 2009-08-14
정법불교를 모색하는 지리산 야단법석 움직이는선원 취지문
- 금강경의 눈으로 오늘의 한국불교를 점검하고 대안을 찾는다 -
2600여 년 전 인도 사회가 어수선하다. 중생들의 절절한 신음 소리가 세상 곳곳에 가득하다. 불신과 두려움의 안개가 자욱하다. 너나없이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방향과 길을 찾지 못해 안절부절이다. 세상은 올바른 방향을 밝혀줄 보편적 진리의 등불을 기다렸다. 사람들은 올바른 길을 안내해 줄 좋은 친구, 좋은 스승을 간절히 희망했다. 좋은 친구, 좋은 스승인 고타마 붓다는 뭇 생명들의 절절한 부름에 응답하려고 뜻을 내었다. 당시 사람들이 앓고 있는 병에 따른 처방으로 언어와 생각의 길이 끊긴 보편적 진리 즉 존재의 실상을 연기 무아와 사성제라는 언어와 이름의 등불을 밝혀 수행자들이 나아갈 방향과 길을 열어보였다.
무명 중생이 짊어질 수밖에 없는 운명적인 업보인가. 세월과 함께 이곳저곳의 불교계와 수행자의 진면목이 변질 왜곡되어갔다. 그로 인하여 사회와 불교계의 모순과 혼란이 날로 더 깊어졌다. 수행자와 대중들의 회의와 갈등의 방황도 갈수록 더 길어졌다. 2600여 년 불교 역사의 고비 고비마다 사회와 불교계, 수행자와 대중들은 나아갈 올바른 방향과 길을 안내해 줄 보편적 진리의 등불과 좋은 친구, 좋은 스승을 간절히 그리워했다. 그 때마다 좋은 친구, 좋은 스승인 대승 보살과 선사들은 언어와 생각의 길이 끊긴 보편적 진리 즉 존재의 실상을 중중무진 인드라망 법계와 역동적인 동체대비행, 원만구족의 본래부처와 활발발한 대무심행이라는 언어와 이름의 등불을 밝혀 수행자들이 나아갈 방향과 길을 열어보였다.
21세기 한국 사회와 불교계의 상황이 매우 우울하다. 한국 불교와 출가 수행자의 모습이 남루하기 그지없다. 승단의 심장이 썩어가고 있다. 정법의 등불이 가물가물하다. 한국 불교가 벼랑 끝자락으로 내몰리고 있다. 정법과 수행자의 진면목이 변질 왜곡되고, 그로 인한 모순과 혼란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불교란 무엇인가, 출가 수행자란 어떤 존재인가, 참담한 심정으로 근본적인 물음을 묻지 않을 수 없는 절박한 상황이 한국 불교 오늘의 현주소이다.
물질적 풍요를 마음껏 누리고 있는 21세기 현대 사회와 불교계가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줄 보편적 진리의 등불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고 있다. 최첨단의 편리를 마음껏 누리고 있는 21세기 현대인들과 수행자들이 올바른 길을 열어줄 좋은 친구, 좋은 스승을 간절히 소망하고 있다.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는 구체적인 몸짓이 절실하다. 뭇생명의 절절한 바람에 응답하는 참된 목소리가 목마르다.
정법 불교를 모색하는 야단법석이 그립다. 좋은 친구, 좋은 스승의 길을 가고자 하는 수행자들이 연기 무아, 인드라망, 본래부처로 표현되는 정법의 횃불을 밝히고 사성제, 동체대비, 대무심의 길을 시대에 맞게 열어가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여러 가지 모색을 해 왔다. 시대의 요구, 뭇 생명의 부름에 응답하고자 부처님, 대승 보살, 선사 스님들의 뜻을 받들어 참 대승, 새로운 대승불교인 정법불교를 모색하는 지리산 야단법석을 연다.
활발발하게 움직이는 선원이 필요하다. 기존의 조용하고 안정된 수행 도량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탐진치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중생들의 삶의 현장을 수행 도량으로 삼는다. 기존의 법당, 선방 중심의 은둔적이고 정적인 기도, 참선 수행이라는 틀을 벗어던지고 목전에서 시시각각 생노병사의 피눈물이 소용돌이치는 생사의 현장길을 걸으며 불법의 진면목, 자신의 진면목을 실답게 참구하고 만난다. 주관적인 자아도취, 자기 안주의 벽을 허물고 도반들과 더불어 허심탄회하고 치열하게 법과 수행과 삶에 대한 대화와 토론의 탁마를 통해 아상과 인상을 파헤치는 수행을 한다. 대승보살의 원력이 뜨겁게 꿈틀거리고 대무심, 대자비가 활발발하게 실천되는 참수행, 참보살행의 삶이 일상의 삶이 되도록 하기 위해 전 존재를 불태우는 움직이는 선원을 개설한다.
길은 털끝만큼의 막힘도 없이 만인에게 활짝 열려있다. 첫 마음이 바로 정각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뜻을 함께 하는 좋은 도반들이 있는 한 두려울 것이 없다. 그 누구, 그 무엇도 우리의 앞길을 막지 못한다. 불조의 숨결이 숨쉬고 중생의 신음소리가 절절한 현장의 길에서 지극한 간절심으로 실참 실구하는 구법의 행각이 모순과 혼란의 늪에 빠져있는 불교계와 우리 자신에게 분명한 활로가 될 것이다. 한 걸음, 한 호흡으로 실천되는 본래 부처의 동체대비, 대무심행이 방향과 길을 잃고 있는 수행자 자신과 불교계에 탄탄한 정로가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2600여 년 동안 불교사를 관통해온 정법불교, 파사현정의 횃불이 활활 타오르도록 지극정성을 다해 정진할 것을 다지고 또 다진다.
제방의 도반들이시여, 시대를 걱정하고 한국 불교를 아끼는 출가수행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염화미소의 마음으로 대승보살, 대승선사의 길에 함께 하길 간절히 청하고 간절히 청한다.
불보살은 증명하시고 호법성중은 증명하소서.
노덕현 기자 | Dhavala@buddhapia.com 2009-08-14
움직이는선원이란?
1. 야단법석
⑴ 목적
① 초기, 대승, 선, 현대 불교가 하나의 불교로 관통되는 불교관 확립
② 이론과 실천, 수행과 생활이 통일되는 수행론 형성
③ 생명 평화 위기로 표현되고 있는 현대 문명의 문제에 응답하는 대안 제시
⑵ 내용
① 소의경전 금강경의 눈으로 한국 불교 수행 문제의 실상을 진단하고 대안을 모색한다.
무비 스님께서 표준 금강경을 교재삼아 금강경 정신으로 한국 불교 수행 문제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진단하고, 오늘의 한국 불교 수행자들이 나아가야 할 올바른 방향인 수행과 현실적 삶이 통일되는 수행의 정로를 제시한다.
② 선원 수좌의 눈으로 한국 불교 수행의 현실을 진단하고 바람직한 방향을 모색한다.
혜국 스님께서 그동안 선원에서 수행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 불교 수행의 긍정적 측면과 한계, 부정적 측면을 진단하고, 바람직한 수행의 방향을 제시한다.
③ 치열한 수행을 통해 안목을 얻은 이의 눈으로 한국 불교의 현실을 진단하고 활로를 모색한다.
향봉 스님께서 외국에서 치열한 수행을 통해 얻은 안목으로 경전과 어록의 정신에 입각하여 한국 불교의 현실을 진단하고 대안을 제시한다.
④ 초기불교와 대승불교를 하나의 불교 수행론으로 통합시키는 이론적 대안을 모색한다.
초기불교 없는 대승불교는 없으며, 초기불교 또한 대승불교로 진행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따라서 도법 스님께서 초기불교와 대승불교가 서로의 분리 대립을 지양하고 하나의 불교로 회통하는 시론을 모색한다.
⑶ 방법
○ 60분~90분 강의하고 참여 대중들이 120분 이상을 자유롭고 충분하게 토론함.
○ 참가 대중들의 허심탄회한 대화와 토론을 통해 진단 내용을 더 다듬고 풍부하게 하여 한국 불교의 나아갈 방향과 바람직한 수행론 등의 대안을 모색한다.
⑷ 야단법석 일정
불기 2553년 8월 14일~8월 18일(4박 5일)
⑸ 장소
실상사 일원(실상사, 실상사작은학교, 한생명)
⑹ 야단법석 법사
움직이는선원 조실 무비스님
전국선원수좌대표 혜국스님
움직이는선원 열중 향봉스님
움직이는선원 열중 도법스님
움직이는 선원
⑴ 목적
① 불조가 걸어간 역사 현장의 길을 따라 실참실구하는 구법행각의 수행을 함
② 정법과 수행에 대해, 수행자의 삶과 역할에 대해 치열하게 대화하고 토론하는 탁마 수행을 함
③ 정법의 안목을 열고 대승보살의 서원을 다지는 다양한 실참실구의 방법을 모색함
⑵ 내용과 방법
1)
① 실참실구하며 지리산 800리를 침묵으로 걷는 순례를 함
② 매일 순례 출발 전과 순례 끝에 100대 절명상을 함
③ 50미터 간격으로 아침 8시에서 저녁 5시까지 침묵으로 걷는 순례를 함
④ 자연스러운 속도로 45분 걷고 15분 쉼
⑤ 저녁에는 침묵으로 푹 쉬고 잠을 잠
2)
① 1주일에 한 번 실참 실구를 내용으로 치열하게 대화와 토론을 통한 탁마 수행을 함
② 보름 또는 한 달에 한 번 조실 스님의 법문을 들음
③ 조실 스님과 열중 스님의 지도를 따름
④ 보름에 한 번 현대적 포살을 함(방법론을 연구해야 함)
※ 초기경전, 금강경, 임제록 등 교재를 갖고 움직이는 안거를 하는 것도 모색해볼만 함
⑶ 움직이는선원 일정
동안거 무렵(90일~100일)
⑷ 장소
지리산 일원
노덕현 기자 | Dhavala@buddhapia.com 2009-08-14
지리산 야단법석 청규
○ 지리산 야단법석 동참 대중은 행동과 말과 마음씀이 모두 법답고자 노력한다.
○ 상대를 존중하여 섬기고, 자신을 낮추고 아상을 덜어내는 하심(下心)의 무아행으로 화합한다.
○ 화안애어(和顔愛語)의 섭수행(攝受行)을 늘 염두(念頭)에 두는 보살행자로 야단법석에 임한다.
○ 야단법석 기간동안 성냄, 질투, 욕심, 교만함, 게으름과 같은 불선법이 마음에서 일어나는지를 늘 살펴 경계하고, 정법에 대한 열정, 마음챙김, 집중, 부지런함, 겸손, 해치지않음, 뉘우침과 같은 선법이 더 증장되도록 정진한다.
○ 야단법석이 시작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은 법의 모임이 되도록 함께 노력한다.
○ 나의 편리함을 구하기보다는 상대에게 불편함이 없는지를 먼저 배려한다.
○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인례 법사의 말씀에 잘 응한다.
○ 스님과 도반 상호간에 합장 예배 공경한다.
○ 토론을 할 때는 상대방에 대한 존중의 태도를 잃지 않아야 하며, 자신의 견해를 주장하더라도 고집하지 않는 열린 자세를 유지한다.
○ 일정표에 정한 시간을 잘 지킨다.
○ 야단법석 기간중 주야로 마을에 가서 음주(飮酒)나 별식(別食)을 하지 않는다.
○ 방, 공양간, 세면장, 해우소 등은 청결하게 사용한다.
○ 야단법석 도량이 청정을 유지하도록 몸과 마음을 가지런히 하고, 정리정돈한다.
○ 운력을 해야 할 경우 솔선수범한다.
○ 공양중에 가벼운 대화는 무방하나 소란하지 않도록 한다.
○ 자신이 사용한 공양구는 자신이 설거지하여 정돈한다.
○ 라면, 과자 기타 식품 첨가물이 다량 함유된 건강하지 않은 음식의 섭취를 자제하며, 쓰레기를 만들지 않도록 노력한다.
○ 쓰레기는 분리수거한다.
○ 씻을 때 샴푸, 린스 등 환경을 파괴하고 인체에도 유익하지 않은 세제를 사용하지 않는다.
노덕현 기자 | Dhavala@buddhapia.com 2009-08-14
[출처] 실상사 야단법석, 종합 보도[현대불교신문]|작성자 향산
'불교관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신과의사가 체험으로 보는 사마타와 위빠사나_20170121,전현수 박사,상도선원 (0) | 2020.09.20 |
---|---|
현대사회에서 구현해야 할 불교적 가치 - 미산스님(중앙승가대 교수) (0) | 2020.09.06 |
이기영, 학문과 신행의 일치를 실천한 석학 (0) | 2020.09.06 |
[초청법문] 뇌과학과 무아Q&A (0) | 2020.09.06 |
이승 [ 二乘 ] (0) | 2020.08.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