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담영金山曇穎 선사는 송나라 때 임제종 승려로 속성은 구씨丘氏이고 호는 달관達觀이며 저장浙江 사람이다. 열세 살 때 용흥사龍興寺로 출가한 뒤 열여덟 살 때 변경汴京을 유람하면서 태위 이단원李端願의 화원에서 묵었다.
어느 날, 이단원이 선사에게 물었다.
“스님, 한 말씀 여쭙겠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지옥이 있다고 하던데 지옥이 정말로 있는 것입니까?”
담영이 말했다.
“여래께서 법을 설하시면서 ‘無’ 가운데 ‘有’를 말씀하셨는데, 눈으로 헛꽃을 보는 것처럼 있는 것 같아도 없고, 태위께서 지금 있는 것 가운데 없는 것을 찾는데 손에 물을 담아보면 없는 것 같아도 있는 것이니 실로 우습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눈앞에 있는 지옥은 보면서 어째서 마음속에 있는 천당을 보지 못하는 것일까요? 즐거움과 두려움이 마음속에 있고, 천당과 지옥도 한 생각 사이에 있는 것이며, 선악까지도 모두가 경계를 이룰 뿐이니 태위께서 마음에 대해 깨닫기만 하면 자연히 의심이 사라질 것입니다.”
태위가 물었다.
“마음에 대해 어떻게 깨닫습니까?”
“선악이란 것도 헤아리지 마십시오.”
“헤아리지 않은 뒤에 마음은 어디로 돌아갑니까?”
“돌아갈 곳이 없으니 《금강경》에서도 ‘머무는 곳 없이 마음을 내라(應無所住, 而生其心)’고 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갑니까?”
“태어나는 것을 모르는데 어떻게 죽음을 알겠습니까?”
태위가 말했다.
“태어나는 것에 대해서라면 제가 아는 게 있습니다.”
담영이 물었다.
“어디 들어봅시다. 태어남이 어디로부터 오는 것입니까?”
태위가 잠깐 생각에 잠기는 순간 담영이 손으로 태위의 가슴을 치며 말했다.
“여기서 생각하는 게 무엇입니까?”
태위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욕심에 쫓겨 바삐 사는 것만 알았을 뿐 사람이 늙고 죽는 것에 대해 몰랐습니다.”
담영이 말했다.
“사람의 한 평생이 한 바탕 꿈과 같습니다.”
영담의 그 말에 태위가 깨닫는 게 있어 아래와 같은 게송을 읊었다.
三十八歲 삼십팔세
懵然無知 몽연무지
及其有知 급기유지
何異無知 하이무지
滔滔汴水 도도변수
隱隱惰堤 은은타제
師其歸矣 사기귀의
箭浪東馳 전랑동치
태어나 삼십팔 년 살아오는 동안
어리석어 아는 것이 하나 없었네
오늘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지만
몰랐던 때와 달라진 게 무엇인가
변수는 오늘도 거침없이 흐르며
커다란 둑을 두려워하지 않더니
귀한 스승 만나서 귀의한 뒤에
화살처럼 흘러서 동쪽으로 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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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디서 와 어디로 가는가?
오랜 세월 수많은 사람들이 이것에 대해 생각했지만
어느 누구도 모두가 수긍할 수 있는 명쾌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명의 형태가 다양하다 하더라도
각각의 생명의 가치가 차별 없이 평등하다는 것 하나만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런 중에 불교는 어느 것도 실체로 영원할 수 없고
단지 인연의 화합으로 이루어지고 소멸한다는 연기緣起를 말한다.
그러니 우리는 모두 온 곳으로 가고 간 곳에서 온다.
그곳에 어디냐고 다른 사람에게 묻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자신보다 자신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이겠는가?
[출처] 이단원의 견도송見道頌 - 사는 동안 아는 것 하나 없다가|작성자 들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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