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환경_ 불교의 가르침
하나
땅, 물, 불, 바람과 생명이 서로 의지하며 함께 살아가는 존재임을 깨닫습니다
“무엇으로 말미암아 내가 있게 되었는가?”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연기법은 존재의 생멸에 관한 상(象)의 연관성을 밝히신 것입니다. 즉 연기란 이 세상의 어떠한 것도 저절로 일어나거나 본래부터 있었던 것은 없고, 어떠한 원인과 조건으로 말미암아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말미암아 내가 있게 되었는지 생각해 봅시다.
나는 땅, 물, 불, 바람으로 이루어진 존재입니다. 땅, 물, 불, 바람은 자연이면서 동시에 나를 구성하고 있는 물질적 요소이기도 합니다. 땅(土)은 만물을 생성하게 하는 근원이며, 물(水)은 만물을 생장하게 합니다. 또한 불(火)는 만물을 잘 자라게 하여 결실을 맺게하고, 바람(風)은 끝없이 움직이면서 만물을 호흡하게 합니다.
땅, 물, 불, 바람을 생명의 텃밭이라고 한다면 ‘나’라는 생명은 이 텃밭의 열매입니다. 텃밭을 함부로 대하고 메마르게 하는 인연은 나(我)라는 생명의 열매를 부실하게 하는 과보를 낳습니다.
환경위기의 시대에 우리는 자신의 뿌리 깊은 사고를 되짚어 보고 잘못된 점을 참회하고 반성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자연과 뭇 생명을 ‘나’와는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고, 자연과 뭇 생명이 ‘나’를 위해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잘못된 태도와 어리석음으로 이제는 인간의 생존마저도 위협받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소유의식과 지배의식을 버리고, 나는 땅, 물, 불, 바람으로 구성된 존재이며, 내 안에는 모든 생명이 들어있고, ‘나’ 또한 다른 생명들이 살아가는 데 필요로 하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둘
육도중생이 다 나의 아버지요, 어머니 입니다. 따라서 생명있는 모든 존재를 귀하게 여깁니다.
“육도의 모든 중생들은 그대의 여러 생에 부모 아님이 없는지라.”<대승범망경>
“어머니가 하나 뿐인 외아들을 생명을 걸고 보호하듯, 일체의 생물에 대해서도 한량없는 자비의 마음을 일으키라.”
법장스님은 살생을 금하는 불살생계(不殺生戒)를 제1의 계로 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생명을 끊는 것은 업도(業道)를 무겁게 하기 때문이다.
이 무거운 업을 지고서는 도(道)에 들어갈 수 없으므로 대승과 소승, 도(道)와 속(俗)의 모든 계가 다함께 제정하고 있다.
둘째, 대비심을 어기어 해치기 때문이다.
<유가사지론>에 이르기를 ‘만약 사람이 묻기를 보살은 무엇으로 체를 삼습니까?라고 한다면 마땅히 바르게 답하되 대비를 체로 삼느니라’고 하였으니, 모름지기 중생을 위해 몸을 버리거늘 하물며 저 생명들을 해치겠는가.
셋째, 길러준 은혜를 등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육도중생이 다 나의 부모이니 세세생생에 이들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다하여 어찌 해칠 수 있겠는가.
넷째, 수승한 연(緣)을 어그러지게 하기 때문이다.
<대지도론>에 이르기를 ‘혹 개미가 부처를 이룬 분 앞에 있어서 그 제도를 받는다면 이 일은 알기 어려우니 만약 저 생명을 해친다면 그 개미와 더불어 연(緣)이 없으므로 제도 받지 못하느니라’고 하셨다.
다섯째, 일체 중생이 불성이 있어서 다 장래에 법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상불경보살이 중생을 깊이 공경하는 것처럼 오히려 공경하지 않음이 없어야 하거늘 어찌 중생을 해치는 것을 용납하겠는가.
여섯째, 보살의 무외시를 어기어 잃기 때문이다.
경에 이르기를 ‘불살생계를 지키는 까닭은 중생들에게 무외시를 베풀기 위해서 이니라’라고 하였다. 또 열반경 중에 ‘여래 수명이 한량없는 것은 다 불살(不殺)로 인한 것이니라’고 하였다.
일곱째, 사섭행(社攝行)을 어그러지게 하기 때문이다.
론(論)에 이르기를 ‘보살의 두 가지 이롭게 함 중에서 이타(利他)가 최상이니 만일 해치려는 마음을 일으켜서 중생이 버리고 떠난다면 설령 법을 베풀고자 하더라도 교화할 대상이 없기 때문이니라’고 하였다.
여덟째, 손해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지론에 이르기를 ‘설령 염부주에 무가진보가 가득하다 해도 목숨에는 비기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남의 목숨을 끊는 것도 역시 보물을 훔치는 죄가 되리라’고 하였다. <열반경>에 또 이르기를 ‘일체 생명은 칼과 몽둥이를 두려워하며 목숨에 애착하지 아니하는 것은 없느니라. 살생은 하지 말며 몽둥이 등 금하는 것을 하지 말지니라’라고 하였다.
아홉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함이다.
이른바 보살의 대비행은 중생에 의지하여 성취되는 것이니 은혜에 보답할 것을 생각해야지 어찌 해치는 것을 용납하리요.
열째, 법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삼세제불의 가업의 법이 그러하니 해칠 생각을 하지 않고 중생을 이익 되게 하는 까닭이다.
불교에서의 생명존중 사상은 유정물(有情物) 뿐만이 아니라 무정물(無情物)에게까지 미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계율정신을 받아 지킨다면 자연생태계를 파괴하는 마음은 거두어 지겠지요.
셋
생명들의 조화로운 삶의 방식인 사섭법(四攝法)을 실천하겠습니다.
“남에게 베풀고 자기 소유물을 놓아 보내는 보시행”
“고운말을 쓰고 말을 친절하게 하는 애어행”
“남을 돕고 힘쓰는 이타행”
“서로 돕고 서로 힘을 내서 일을 같이 하는 동사섭행”
제법무아(諸法無我)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라고 할만 한 어떤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뜻으로, 나는 없고 조건지어져 결합된 업에 의하여 변화가 일어난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를 바로 보지 못하고 우리는 잘못된 논리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만이 최고가 되기 위해서 남을 이겨야만 하는 경쟁의 논리”
이 논리는 오직 사람이 중심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마저도 언제나 최고가 될 수 없는 현실에서, 한 사람의 이익을 위해 나머지 모든 이가 패배자가 되어야 하는 삶의 방식입니다.
“내가 무엇을 얻기 위해서는 남이 무언가를 잃어야 한다는 대립의 논리”
이는 끊임없이 나와 남을 가르고 의심하고 배반하며 살아가야 하는 안타까운 삶의 방식입니다. 경쟁과 대립은 오늘을 사는 많은 사람들의 삶의 원리가 되어 개인과 사회, 자연을 황폐화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공존과 조화의 삶의 방식은 이와 다릅니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선입관과 단견(短見)을 버리고 서로를 잘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 다음은 서로 다른 것을 부각시키기 보다는 서로 같은 것은 무엇인가를 살펴서 공존의 토대를 찾는 일입니다. 이것이 확인되면 서로가 다른 것이 무엇이며 다르게한 원인이 무엇인가를 함께 밝힙니다. 이는 다짜고짜 내가 저 사람보다 잘난 것이 무엇인가. 저 사람을 기죽일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차원에서 나와 상대방의 차이를 부각시키는 것과 아주 다른 태도입니다. 상대를 이해하고 공존의 토대가 모아지고 나면 비로소 나와 상대가 서로 손을 잡아 공존과 조화의 삶이 가능한 것입니다.
넷
내것을 많이 가지는 것은 나를 병들게 하는 毒으로 알아 족함을 아는 생활을 하겠습니다.
“이익이 분수에 넘치면 어리석은 마음이 생기게 되나니 적은 이익으로써 부자가 되라 하셨느니라.”<보왕삼매론>
“옷입는 것에 대하여 수행자는 세 가지 옷만 가지며, 먹는 음식에 대하여 때아닌 때는 먹지 않으며, 머무는 곳에 대하여 나무밑에 있는 것”<불설십이두타경>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겠습니다.
“비구들이여 끊기도 어렵고 지속하기도 어려운 두 가지 일이 있다. 하나는 속세에 사는 속인으로서 의복이나, 음식, 침구나 온갖 생활기구에 대한 탐욕을 끊고 그 상태를 지속하는 일이요, 자른 하나는 출가 수행자로서 집을 떠나 세속의 모든 것에 대한 탐욕과 애착을 끊고 또 그 상태를 지속하는 일이다. 이러한 두 가지 일은 실행하기 매우 어려운 일이니라”<잡아함경>
사람에게는 욕구가 있습니다. 높게는 자성을 닦아 깨달음을 얻겠다는 욕구에서부터 일상적으로는 더 많은 물질을 고유하고 싶다는 욕구에 이르기까지 다양합니다. 다양할 뿐더러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입니다. 어제보다 오늘 더 많은 것을 소유해야 하고 남보다는 내가 더 많이 소유해야 하며 지금 것보다는 좀더 나은 것을 소유해야 합니다.
이 지구상에 인간의 숫자가 적고 자연이 풍요롭고 너그러울 때는 무한한 소유가 가능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급격한 인구증가와 도시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지구상의 한정돈 자연과 자원은 인간의 탐욕을 채우기에 부족해 버렸습니다. 모든 사람이 경쟁적으로 더 많은 물질적 풍요를 위해 다툼을 벌이자 자연은 노여움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기상 대이변, 자원의 고갈, 사라져 가는 생물들, 심지어는 마음 놓고 마실 물조차 없는 현실이 된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탐욕에 의해 빚어진 일이므로 이의 해결을 위해서는 인간 탐욕의 절제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부처님께서는 물질 뿐만 아니라 느낌, 생각, 행위, 의식마저도 나의 소유가 아니므로 마땅히 집착을 끊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무소유의 삶이 어렵다면 알맞게 소유하고, 그리고 일한 만큼 소비하는 것, 그리고 대가 이상의 수입이 생기면 그것은 곧 남의 것을 소유한 것이 되므로 환원하는 것 바로 이러한 마음자세가 필요합니다.
다섯
소박함을 지키고 화려함을 멀리하여 함께 사는 풍요로움을 누리겠습니다.
“모자는 머리를 위하여 쓰고, 신발은 발을 위하여 신고, 의복은 몸을 위하여 입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이 모자와 신발과 의복을 위하여 머리와 발과 몸을 희생한다면 그는 제 정신이 아니라고 할 것이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간단한 것과 단순한 것을 촌스러운 것, 뒤떨어진 것으로 생각하는 버릇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일상생활에서 쓰이는 물건을 살펴봅시다. 비누만 하더라도 빨강, 노랑, 파랑의 형형색색에다 과일향, 오이향, 인삼향 등 온갖 향을 갖고 있습니다. 또한 먹는 식품에도 첨가제, 발색제, 착색제 등 온갖 향과 맛, 색을 내는 물질을 첨가하고 있습니다. 그래야 팔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좀더 생각해봅시다. 이러한 향과 색은 거의 인공 화학물질의 조합물입니다. 인체에 해로운 것도 있을 것이며 이러한 화학물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자원과 에너지의 낭비가 뒤따를 것입니다.
사람들의 이러한 취향은 상품가치를 상품 고유의 기능과 성질로서 보는 것이 아니라 상품의 외양과 향으로 판단하는 잘못된 생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아무런 향도, 색도 없지만 물건 본래의 쓰임새를 제대로 볼 수 있는 생활습관이 익숙해질 때 생명과 자연이 풍요로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여섯
보다 적게 쓰고, 보다 적게 사고, 보다 적게 먹는 것, 그것을 수행에 들어가는 문으로 삼겠습니다.
“농부도 매양 춥고 굶주리는 고통 속에 지내고 베짜는 여인도 늘 몸을 가릴만한 옷이 없는데 하물며 나는 오래 일하지 아니 하니 주리고 추운 것을 어찌 싫다할 수 있으랴. 부드러운 옷, 맛있는 임식은 마땅히 그 은혜 무거워 도를 덜어내고 헤진 옷에 나물 밥은 시주은혜 가벼우므로 반드시 음덕이 쌓이리니 금생에 이 마음 밝히지 못하면 물 한방울 조차 소화하기 어렵아니라.”<초발심자경문>
편리한 것을 추구하는 인간의 심성은 각종 생명파괴의 원초적 동기가 되어 왔습니다. 하루종일 소와 씨름하며 밭갈고 씨 뿌리던 것이 기계로 단 몇 시간에 할 수 있게 되었고, 단축된 노동시간이 인간과 다른 생명의 보다 조화롭고 넉넉한 삶을 위하여 쓰여진다면 그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추구하는 편리는 이렇습니다.
우선은 ‘나만의 편리’ 입니다. 나만 편리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불편함을 감수해야 합니다. 하나밖에 없는 빵 조각을 힘이 세다는 이유로 나 혼자만 먹어버린다면 다른 사람은 배를 주릴 수 밖에 없습니다.
그 다음은 ‘당장의 편리’입니다. 내가 당장 편하기 위해서는 미래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당장의 난방을 위해서 우리는 막대한 화석연료를 소비하고 있습니다. 한정된 화석연료를 다 소비하고 난 후에 미래의 우리 자식들은 무엇으로 살아가야 할까요. 기술 개발이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에 우리의 미래를 맡기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이곳의 편리’입니다. 내가 살고 있는 이곳에서의 편리를 위해서는 다른 곳에서 사람들이 불편을 감수해야 합니다. 60,70년대에 우리 나라에는 중화학공업이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산업이 수출 100억불이라는 당시의 목표 달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러한 산업은 미국이나 일본 등지에서 공해배출 산업이라는 이유로 그곳 시민단체들의 강력한 항의에 밀려 자국 내에서 생산입지가 좁아지자 우리 나라 같은 개발도상국에 마구잡이로 들어온 것입니다.
개발과 진보라는 이름으로 자기 편리만을 추구하는 시기는 이제 지났습니다. 오히려 내가 불편함을 감수함으로서 남이 편할 수 있고, 당장 불편함으로써 미래가 편할 수 있으며, 이곳에서 불편함을 받아들임으로서 저곳이 편리할 수 있다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일곱
하챦은 것, 더러운 것, 썩는 것, 그것은 마음자리 밝혀주는 벗으로 삼겠습니다.
“모든 법은 본래 청정하여 깨끗하고 더러움을 여의었다. 다만 마음의 분별에 의해서 더럽고 깨끗하고가 나타날 뿐이다”
여기에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이 있습니다. 이것을 보고 머리카락은 어디서부터 지저분하다고 생각합니까?
화장실에 똥이 있습니다. 배추밭에 똥이 있습니다. 같은 똥입니다. 어느 것이 더 더럽습니까?
먹다 남은 밥 찌꺼기가 있습니다. 물을 끓여 먹으면 숭늉이 되고, 하수구에 버리면 쓰레기가 됩니다.
지나친 청결을 추구하는 우리의 삶의 방식은 불필요한 자원과 에너지의 낭비를 초래하고 있습니다.
빨래는 형광 표백제라는 유해한 화학물질을 써서라도 새하얗게 보이도록 만듭니다. 주부들은 집안을 티끌하나 없이 유지하기 위하여 많은 시간을 청소와 정돈에 투자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마음을 가꾸기 위해서는 여력이 없다고 느낍니다.
무엇이 깨끗한 것인지, 무엇을 위해 깨끗해야 하는지 미처 생각지도 못하고 깨끗하게 보이기 위해서 많은 힘과 시간을 투자합니다. 더러움과 조금만 더 친해진다면 그 힘과 시간과 자원을 마음을 닦고 생명과 자연을 깨끗이 하는 데 투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은 자연을 이용하기를 꿀벌이 꽃가루를 채집하듯 하라. 꿀벌이 꽃의 아름다움이나 향기를 다치는 일이 없듯이 사람도 자연을 이용할 때 자연의 풍요로움이나 아름다움을 오염시켜서도 안되며 자연에게서 회복력과 활력소를 빼앗겨서도 안된다.” <법구경 제4장 화향품>
여덟
마음이 맑으면 국토가 맑아지고 원하거든 마땅히 그 마음을 깨끗이 하라. 마음이 맑고 깨끗해짐에 따라 불국토는 깨끗해 지느니라.” <유마경>
자연은 살아 숨쉽니다. 봄이면 싹을 틔우고 여름에는 꽃을 피우며 가을에는 열매를 맺게 하고 겨울에는 휴식합니다. 자연에는 질서가 있습니다. 초식 동물이 풀을 먹고 살수 있도록 초목은 넉넉하고, 육식동물이 초식 동물울 잡아 먹을수 있도록 육식 동물은 힘이 셉니다. 뿐만아니라 자연은 원래 자신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이 버린 오물을 자신의 넉넉한 품으로 거두어 삭혀서 다시 생명을 살리는 자양분으로 만들 줄 압니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인간에게 되돌려 줍니다. 이러한 자연이 지금은 상처를 입고 피로가 쌓여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인간에게 너그럽고 경외의대상이기까지 했던 자연이 왜 대홍수이니 기상이변이니 하는 메시지로 인간에게 경고를 보내고 있을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점점 빠른 속도로 자연의 뼈와 살을 빌어와서 인간 편의를 위해 쓰고는 그 상처를 치유해 주고 영양분을 공급하기 보다 오히려 오물을 그 자리에 버림으로서 자연의 상처를 더욱 곪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된 것은 자연을 인간과 별개의 존재로 생각하고 인간이 마음껏 소유하는 지배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 데서 비롯 되었습니다. 이러한 마음으로는 국토가 깨끗해질 수 없습니다. 자연을 대하는 인간의 마음이 깨끗해야 국토가 깨끗합니다.
[출처] 불교와 환경_ 불교의 가르침|작성자 둘이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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