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해에 당의 고종이 인문을 불러 꾸짖으며 말하기를 "너희가 우리의 병사를 청하여 고구려를 멸하였는데 우리를 해하니 무슨 이유이냐?" 하고 감옥에 가둔 다음, 군사 50만을 훈련시키고 설방을 장수로 하여 신라를 치게 하였다(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15년 조에 당 고종은 이근행을 안동진무대사에 임명하여 신라를 경략케 하였으며, 또한 설인귀가 천성을 공격하다가 패주한 사실이 보인다.). 이 때 의상법사가 유학을 하러 당에 들어왔다가 인문을 찾아 나아가 보니 인문이 그 사실을 말하였다.
의상이 곧 돌아와서 왕에게 이 사실을 알리니 왕은 매우 두려워하여 여러 신하들을 모아놓고 그 대책을 강구할 때 각간 김천존이 아뢰기를, "근자에 명랑법사가 용궁에 들어가서 비법을 전수하고 돌아왔으니 청하여 물어보십시오." 하였다.
명랑법사가 말하기를, "낭산의 남쪽에 신유림이 있는데 그 곳에 사천왕사를 세우고 도량을 열면 가할까 합니다." 하자, 그 때 정주에서 사자가 달려와서 보고하기를
"당병이 무수히 우리의 국경에 다가와서 바다 위를 순회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이에 왕은 명랑을 불러 물었다.
"일이 급하게 되었으니 어찌하면 좋겠소?" 명랑이 말하기를
"채백(彩帛)으로 절을 임시로 만들면 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채백으로 절을 짓고 풀로써 오방신상을 만들고 유가의 명승 12사람으로 하여금 명랑을 상수로 하여 문두루의 비밀 법을 쓰게 했다. 이 때 당병과 신라의 병사가 접전도 벌이기 전에 바람과 물결이 거세게 일어나고 당나라 배가 모두 물에 침몰하였다 후에 절을 고쳐서 다시 짓고 사천왕사라 이름하였는데, 지금까지도 단석이 없어지지를 않았다.
또 신인의 조사 명랑이 새로 금강사를 세우고 낙성회를 열었는데, 고승들은 모두들 모였지만 오직 혜공만은 오지 않았다 이에 명랑이 향을 피우고 정성껏 기도하였더니 잠시 후 그가 왔다 이 때 많은 비가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옷은 젖지 않았으며 신발에도 진흙이 묻어 있지 않았다 혜공이 명랑에게 말했다. "초청이 은근하여 왔소이다."
당나라 황제 고종이 장차 크게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치려함에 흠순 등이 남몰래 의상에게 권하여 먼저 돌아가도록 하였다 함형 원년 경오(670)에 본국으로 돌아와서 이 일을 조정에 알리니, 신인종의 고승 명랑에게 명하여 밀단을 가설하고 비법으로 기도해서 국난을 면하게 할 수 있었다.
이보다 먼저 밀본법사의 뒤에 고승 명랑이 있었다. 용궁에 들어가 신인을 얻어 신유림을 처음 세우고 여러 번 이웃 나라가 쳐들어오는 것을 기도로써 물리쳤다.…
금광사 본기를 살펴보면 이러하다.
법사 명랑이 신라에 정생 태어나 당나라로 건너가 도를 배우고 돌아오는 길에 바다용의 청에 따라 용궁에 들어가서 비법을 전하고, 황금 천량을 보시 받아 몰래 땅 밑으로 와서 자기 집 우물 밑에서 솟아나왔다 이어 자기 집을 희사해서 절을 만들고 용왕이 보시한 황금으로 탑과 불상을 장식했는데 광채가 빼어나게 빛났다. 때문에 절 이름을 금광사라 했다.
법사의 이름은 명랑이요, 자는 국육이며, 신라의 사간 재량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남간부인이며 혹 ‘법승량’ 이라고도 하는데, 소판 무림의 딸 김 씨로서, 즉 자장의 누이동생이다 재량에게 세 아들이 있었는데 맏아들은 국교 대덕이요, 그 다음은 의안 대덕이요, 법사는 그 막내아들이었다. 처음에 그 어머니가 푸른빛 나는 구슬을 입에 삼키는 꿈을 꾸고서 태기가 있었다. 신라 선덕왕 원년(632)에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정관 9년 을미(635)에 본국으로 돌아왔다.
총장 원년 무진(668)에 당나라 장수 이적이 대군을 거느리고 신라군과 합세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에, 그 남은 군사를 백제에 머물게 하고 장차 신라를 쳐 멸망시키려고 했다. 신라 사람들이 이것을 알고 군사를 내어 이를 막았다 당나라 고종이 이 말을 듣고는 크게 노하여 설방에게 명하여 군사를 일으켜 장차 신라를 치려했다. 문무왕이 이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여 법사를 청 해다가 비법을 써서 이를 물리치게 했다. 이로 인해서 그는 신인종의 시조가 되었다.
우리 태조가 나라를 세울 때 또한 해적이 와서 침범했으므로 이에 안혜, 낭융의 후예인 광학, 대연 두 고승을 청 해다가 법을 만들어 해적을 물리쳐 진압시켰는데 이들은 모두 명랑의 계통이다 그런 연유로 법사를 합하여 위로 인도의 고승 용수에 이르기까지를 9조로 삼았다 또 태조가 그들을 위해 현성사를 세워 한 종파의 근거로 삼았다. 또 신라 서울 동남쪽 20여리 되는 곳에 원원사란 절이 있는데 세간에는 이렇게 전한다.
'이 절은 안혜 등 4대덕이 김유신, 김의원, 김술종 등과 함께 발원하여 세운 것이며, 4대덕의 유골이 모두 절의 동쪽 봉우리에 묻혔으므로 사령산 조사암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4대덕은 모두 신라 때의 유명한 중이라고 하겠다.
돌백사 주첩주각에 쓰여 있는 것을 상고해 보면 이렇다 경주 호장 거천의 어머니는 아지녀이고 이 아지녀의 어머니는 명주녀이다. 명주녀의 어머니인 적리녀의 아들은 광학 대덕과 대연 삼중이다 이들 두 사람은 모두 신인종에 귀의했다 장흥 2년 신묘(931)에 태조를 따라 서울로 올라와 임금의 행차를 따라다니며 분향 수도하니, 태조는 그 노고를 포상하여 두 사람의 부모의 기일보(기일의 제사와 공양을 위한 보)로 전답 몇 결을 돌백사에 주었다.
그렇다면 광학 대연 두 사람은 성조(태조)를 따라 서울로 들어왔으며, 안사(안혜 법사)등은 김유신과 더불어 원원사를 세운 사람이라 하겠다 그러나 광학 등 두 사람의 뼈는 여기에 와서 안치되었을 뿐이며, 4대덕이 모두 원원사를 세웠다거나, 모두 성조를 따라온 것도 아니다 이것은 좀 더 자세히 살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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