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 법명은 의순(意恂)이고 자(字)는 중부(中孚)이며 법호는 초의(草衣)또는 일지암(一枝庵)이라 불리웠으며 성씨는 장(張)씨이다. 어머니가 꿈에 큰 별이 품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잉태하였다고 하며 조선 정조 10년(丙午, 1786) 4월 5일 전남 나주군 삼향면(三鄕面)에서 태어났다.
5세 무렵, 강변에서 놀다가 급류에 떨어져 죽게 되었을 때 마침 인근사찰의 어느 스님에 의해 구원되어 목숨을 건졌다. 그 스님이 출가할 것을 권함에 따라 16세 되던 해에 남편 운흥사(雲興寺)로 들어가 벽봉민성(碧峰敏性) 스님을 은사로 하여 머리 깎고 스님이 되었다. 뒷날 대흥사 완호(玩虎)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받고 초의(草衣)라는 법호를 받는다.
초의 스님은 19세때, 월출산에 올라가 마침 해가 지면서 보름달이 바다 위로 솟아오르는 것을 바라보다가 일순 가슴이 탁 트이는 것을 경험하였다. 닫혔던 마음의 눈이 열리는 개안(開眼)의 순간이었다. 스님은 이 때부터 두루 제방의 선지식들을 찾아다니며 더욱 탁마한 끝에 마침내 경율론(經律論) 삼장(三藏)에 통달하였다. 스님은 선교(禪敎)의 학문뿐 아니라 유학(儒學)과 도교(道敎)등 제반 학문에까지 조예가 깊었으며 범서(梵書)에도 능통하였다.
완호 스님 조실에서 향을 사르고 법맥을 이었으며 금담(金潭)조사에게서 선법(禪法)을 전수받았다. 스님은 이후 금강산지리산한라산등 명산을 유람하는 한편 열수(洌水) 정약용(丁若鏞), 자하(紫霞) 신위(申緯), 해거도위(海居都尉) 홍석주(洪奭周),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석오(石梧) 윤치영(尹致英)등 당대의 대학자들과 폭넓은 교유를 가졌다.
스님은 차츰 자신의 명성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자 은거의 뜻을 갖기에 이른다. 세상을 피하여 숨어살 곳을 마련하니 곧 일지암(一枝庵)이다. 초의 스님은 일지암에서 두문불출한 채 40여 년간 지관(止觀)에 전력하였다. 그 뒤에 수행 정지을 위한 또 하나의 토굴을 지으니 용마암(龍馬庵)이며 다시 종신토록 주석할 막사를 지으니 바로 쾌년각(快年閣)이다.
당시 백파(白坡)스님은 백양산에 은거하면서 언제나 임제(臨濟)의 삼구(三句) 및 기용(機用)등을 연찬(連讚)하더니 초의 스님이 불이(不二)를 논하는 것을 보고 오처(誤處)와 깨달은 부분이라는 뜻의 오처(悟處)가 우리말 발음이 같기 때문이다.
스님은 어느 한 가지에도 능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동다송(東茶頌)》을 지어 우리나라의 차생활의 멋을 설명하였고 범패(음악)와 원예서예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장 담는법, 화초(花草) 기르는 법, 단방약 등에까지도 능하였다고 전한다. 이러한 점은 당시 교분이 두터웠던 실학(實學)의 대가 정약용과 김정희의 영향인 듯하다.
스님은 고종 3년(1866) 81세를 일기로 대둔사 쾌년각에서 입적하니 법랍 65년이었다. 초의 스님은 조선 중기의 진묵(震) 대사를 이상적 인물로 생각하였던지 당시까지 전해오던 진묵 대사의 일화를 모아 《진묵조사유적고(震祖師遺跡攷)》를 편집하였다.
초의 스님에게 사미계를 받은 스님이 40여 명, 보살계를 받은 스님이 70여며, 선교(禪敎)및 잡공(雜工)을 배운 사람은 수백 명에 달하였다. 대둔사 남쪽 기슭에 부도를 세웠는데 송파(松坡) 이희풍(李喜豊)이 탑명(塔銘)을 지었으며 탑의 오른쪽에 비석을 세웠는데 양석(養石) 신관호(申觀浩, 1810~1888)가 비문을 지었다.
저서로는 《선문사변만어(禪門四辯漫語)》《일지암유고(一枝庵遺稿)》《동다송(東茶頌)》《다신전(茶神傳)》《초의집(草衣集)》등이 있으며 스님에 관한 자료를 담은 문헌으로는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조선불교약사(朝鮮佛敎略史)》등이 있다.
초의 스님은 선사(禪師)로 유명할 뿐 아니라 최근 전통 문화를 전승발전시키고자 하는 여망에 따라 붐이 일고 있는 ‘차마시기[茶道]의 중흥조로 추앙받고 있기도 하다. 그는 당대의 뛰어난 시인이며 화가음악가이자 쇠잔해가던 조선 후기 선종사에 활력을 불어 넣은 선문(禪門)의 거목이다.
스님의 문학 정신은 《일지암유고(一枝庵遺稿) 에, 선사상은 《사변만어(四辯漫語)》에, 디도는 《동다송(東茶頌》에 각각 전해지고 있다. 스님의 선사상이 잘나타나 있는 《사변만어》는 당대의 유명한 선사 백파 스님(1767~1852)이 《선문수경(禪文手鏡)》이라는 저술을 세상에 발표한 것을 계기로 초의 스님이 선배 백파 스님의 소론을 하나하나 변증하기 위해 저술한 것이다.
백파 스님은 《선문수경》에서 선문의 5종(宗)과 삼처전심(三處傳心)에 대해 언급하면서 종래 선사들의 견해와 다른 주장을 많이 했다. 스님은 선을 조사선(祖師禪)여래선(如來禪)의리선(義理禪)등의 3종으로 나누어 설명했다. 그러나 선을 이와 같이 3종으로 판별하는 것부터 잘못이라고 생각했던 초의 스님은 조사선과 여래선, 격외선(格外禪)과 의리선 등의 사변(四辯)을 중심으로 백파 스님과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즉 조사선, 여래선, 의리선 등은 근기에 따른 구별일 수 없고 인명(人名)으로 조사선과 여래선, 법명(法名)으로 격외선과 의리선으로 판별되지만 조사선이 격외선이며 여래선은 의리선이라고 주장했다.
초의 스님은 여래선과 조사선과의 의미 규정을 백파 스님처럼 근기(根機)의 차이로 보지 않고 법의 ‘드러나지 않음[隱:조사선]’과 ‘드러남[顯:여래선]’으로 보고 있다. 물론 다소의 근기 차이를 예상해야만 여래선 조사선이라는 말이 성립하겠으나 조사선과 여래선을 우열(優劣)관계로 파악하면 조사선도 여래선도 모두 죽고 만다는 견해다.
초의 스님은 일우(一遇:淸風법사)의 사상에 연원을 둔 백파 스님의 소론이 옛 스님들의 정론에 위배되고 상도(常道)에 어긋난다[變古易常]고 반박했다. 초의 스님은 그 실례로 삼처전심(三處傳心)을 나누어 여래선 조사선으로 보는점, 여래선과 의리선을 차별시 하는점, 여래선을 격외선으로 보는 점, 삼구(三句)와 삼종선(三種禪)을 배당시키는 점 등을 들고 있다.
스님은 조사선 여래선의 입각처를 선(禪)과 교(敎)에 두고 있다. 깨달으면[悟心忘言]교가 선이 되고 미혹하면[滯言迷心] 선이 교가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특히 격외선과 의리선과의 관계를 선과 교와의 관계로 보고 그 입각처를 밝힘으로써 근본적 일치를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또 스님은 백파 스님이 살활기용 진공묘유(殺活機用 眞空妙有)를 설할 때 어느 곳은 살을 뜻하고 어느 곳은 활을 뜻하며 어느 곳은 기, 어느 곳은 용, 어느 곳은 진공, 어느 곳은 묘유를 설했다는 식의 방식을 채용하고 있으나 서로간의 긴밀한 관계를 어떻게 그렇게 나눌 수 있겠느냐고 반론을 제기했다.
비유컨대 손발만을 사람이라 할 수 없고 두복(頭腹)만을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는 주장이다. 백파 스님의 소론에 대한 초의 스님의 반론을 계기로 이 무렵 설두유형(雪竇有炯)우담홍기(優曇洪基)축원진하(竺源震河) 등을 중심으로 선논쟁이 거세게 일어 선사상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초의 스님의 선사상에서 주목되는 것은 당시 불교계가 선(禪) 일변도로 흐르고 있는 사조에 반해 지관(止觀)의 겸수(兼修)를 통해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진리를 구현하려고 노력하였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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