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인문과학 2

『절요』를 통해 본 보조 지눌의 사상

수선님 2020. 10. 11. 11:29

절요』를 통해 본 보조 지눌의 사상

 

-동원-


목차
Ⅰ. 서론
  1. 절요의 의미
  2. 절요의 찬술 배경
Ⅱ. 본론
  1. 절요의 통일된 사상
   1) 삼종문의 통합
   2) 선, 교의 통합
  2. 선의 진리관과 실천론
   1) 진리관인 공적영지심
   2) 실천론인 돈오점수
Ⅲ. 결론

 

Ⅰ. 서론
1. 절요의 의미
  절요는 조선조에 강원 사집과의 교과목으로 선정된 이래 지금까지 승가 내전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절요는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의 줄임말로 『법집별행록』이라는 책을 절요하여 아울러 개인적인 견해인 사기를 써 넣었다는 뜻이다.
  이 『법집별행록』은 규봉종밀스님의 저술로 추정되고 있는데, 정말로 찬술했는지는 확실치 않고, 책을 본 사람도 없다고 한다. 다만 규봉의 작품 중 『법집별행록』과 내용이 같은 것으로서 『중화전심지선문사자승습도』가 있어 아마도 이 책을 의지하여 절요를 찬술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절요의 대지는 ‘간돈점 현영지’이다. 즉 돈점을 가려서 신령스러운 지를 드러낸다는 뜻인데, 그 뜻은 법집별행록이라는 말에서도 잘 드러난다. 『법집별행록』에서 법집이란 하택종, 북종, 홍주종, 우두종 4종에서 보인바 법만을 집하였다는 의미이고, 별행이란 4종 중 특히 하택종을 별달리 먼저 두어 설명하고, 그 외 3종을 이끌어갔기 때문이다.
  보조스님의 많은 저술 중에서도 『절요』는 스님이 입적하기 9개월 전쯤(1209년 52세) 마지막으로 펴낸 책으로 스님의 사상을 종합하고 있는 대표적 저술이다. 따라서 절요를 통하여 지눌스님의 사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2. 절요의 찬술배경
  지눌스님이 살았던 12~13C의 고려시대는 전 고려사를 통해서도 가장 혼란한 시기로, 당시 불교는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서 정변의 소용돌이에 휩쓸리어 결국 승려의 기강은 무너지고, 불교가 타락하여 불교 내적으로는 선과 교가 첨예하게 대립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에 살았던 지눌(1158~1210)은 어려서 잔병이 많았는데, 부모님이 출가시킬 것을 약속하고 불전에 기도한 끝에 병이 나은 인연으로 16세(1173년)에 승선(승려의 과거시험)에 합격했으나, 보장된 출세의 길을 마다하고, 뜻 맞는 도반 몇 명과 정혜결사를 기약한 다음 남쪽으로 유행하였다.
  그는 선과 교를 겸학하면서 이른바 언교문자를 통해 세 번에 걸쳐 심기가 크게 일전하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처음은 창평 청원사에 머물면서 『육조단경』을 읽고 마음속에 항상 자재하는 부처가 있음을 깨달아 계오한 것이며, 28세 때 하가산 보문사로 거처를 옮겨 선교가 둘이 아닌 근거를 찾기 위해서 3년간 대장경을 열람하다가 ‘한 티끌이 대천세계를 머금었다. 여래의 지혜도 그와 같아서 중생들 마음에 갖추어져 있지만은 어리석은 범부들은 그런 줄을 깨닫지 못한다.’1)는 부분에서 실마리를 얻고 후에 이통현의 『화엄론』의 ‘선은 조사의 마음이며,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다’2)는 부분에서 선교회통, 정혜쌍수의 새로운 지도체계를 세우게 되는데 이것이 두 번째 심기일전의 깨달음이다.
  33세 때에는 팔공산 거조암에 있던 도반 득재스님과 함께 정혜결사를 조직하고 습정균혜하며 8년간 정진하다가 40세 때 시자 두어 명과 같이 지리산 상무주암에 은거하여 오로지 내관에 힘썼지만, 구경각을 증득하지 못하다가 대혜선사의 어록을 열람하던 중 순식간에 홀연히 대오를 얻었다고 한다. 이것이 세 번째에 해당되는데 구절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선정은 고요한 곳에도 있지 않고 또 시끄러운 곳에도 있지 않으며, 일상 인연에 따르는 곳에도 있지 않고, 생각하고 분별하는 곳에도 있지 않다. 그러나 먼저 고요한 곳이나 시끄러운 곳이나 일상인연에 따르는 곳이나 생각하고 분별하는 곳을 버리지 않고 참구해야 한다. 만일 갑자기 눈이 열리면 비로소 그것이 집안일임을 알 것이다’3) 이 구절에서 그는 오랜 체증이 내려간 듯 자유해탈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한다.
  그 후 43세 때 조계산 수선사(지금의 송광사)로 옮겨 입적할 때까지 11년 동안 대중을 거느리고, 돈오점수의 수행을 위한 정혜결사 운동을 전개하며 새로운 수행체계인 성적등지문, 원돈신해문, 간화경절문이라는 3문을 세워 승속을 가리지 않고 후학을 제접하며 조계선의 선양에 힘썼다. 53세(1210년)에 이르러 법상에 올라 설법하고 ‘일체의 모든 진리가 이 가운데 있느니라.’는  말을 남기며 육환장을 든 채 입적하셨다.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그의 평생의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선과 교를 회통해서 고려불교를 정법불교로 이끌어갈까 하는데 있었다. 그 대안으로 내놓은 것이 바로 ‘정혜결사’인데, 그것을 바로 추진하기 위해서 그는 깨침과 닦음에 대한 바른 이정표를 제시할 필요를 느꼈고, 그때마다 여러 가지 의견을 내 놓았다. 예컨대, 『권수정혜결사문』에서는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는 지침을 강조했고, 『수심결』에서는 돈오점수의 체계를, 『원돈성불론』, 『화엄론절요』에서는 화엄에 입각한 원돈신해의 길, 또 『간화결의론』에서는 화두를 들어 바로 깨쳐 들어가는 경재법 등을 강조했다. 이러한 사상이 종합된 종합선물 세트와 같은 것이 『절요』이다.

 

Ⅱ. 본론
1. 절요의 통일된 사상
  1) 삼종문의 통합
    (1) 성적등지문(수행상의 원칙)
  성적등지문을 현재 선가의 표현으로 하면 성성적적이 된다. 성성이란 장소와 시간을 가리지 않고 항상 깨어있는 상태를 말하며, 적적이란 깨어있어 온갖 것을 보고 듣지만 결코 보고 듣는 것에 사려 분별없이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경지를 일컫는다. 여기서 성성과 적적을 선후로 나누어서 보면 안 되고, 성성이 곧 적적이며, 적적이 곧 성성인 것으로 보아야 참다운 성적등지이다.
    (2) 원돈신해문(성적등지에 들어가기 위한 전제조건)
  원돈신해란 본래 자신이 그대로 부처임을 확신하는 것이다. 지눌은 선교가 대립하는 상황에서 이러한 믿음(중생=부처)을 교종의 가르침에서도 찾아내고 더욱 더 선과 교가 둘이 아님을 확신하였다.
    (3)경절문
  경절문이란 지름길로 끊어 들어가는 문이다. 본래 중생이 부처임을 확실히 믿고, 성성적적하다면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가 요구된다. 그 실제적 수행방편 중 자리행으로 경절문을 들고 있다. 지눌은 『대혜어록』을 통해 깨친바가 있는데, 대혜선사는 간화선의 주장자로 ‘선은 결코 고요함이나 시끄러움 등의 외부적 환경에 걸림이 없이 화두를 간하는 것’으로 깨칠 것을 강조했다.
  지눌은 말에 의해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해하고서도 몸을 굴리는 길(출신활로)을 얻지 못하면 아무리 하루 종일 관찰하여도 갈수록 지해의 속박을 벗어날 수가 없다고 보아 간화경절문을 제시했다. 경절문의 수승함을 세우되, 필수로 보지는 않고 하근기의 사람은 지해4)의 가르침에 의지하여서 닦아도 된다고 보았다. 여기서 지눌이 일체 중생을 제도하고자 하는 자비심을 느낄 수가 있다.
  이상이 지눌의 삼종문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성적등지문이란 수행 시 지켜야 할 대원칙이며, 이에 이르기 위한 초심자의 입도방편(전제조건)이 원돈신해문이다. 그러나 일단 입도한 연후에는 입도 방편이었던 지해를 떨구어 참다운 성적등지의 상태를 지켜나가기 위해서 보다 고차원적인 수행방안인 경절문이 요구되어진다.
  이 간화경절문은 특히 상근대지로서는 처음부터 곧바로 들어갈 수 있는 수승한 방편이기도 한 것이다. 다만 위 3종문을 좁게 해석하여 별도의 길이라든가 꼭 단계적인 것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2) 선교의 통합
  12-13C 고려불교는 출가교단이 세속화되고, 선교가 대립하는 가운데 자각운동으로서 각지에서 결사 운동이 일어났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지눌의 정혜결사이다. 이 정혜결사의 주요 내용이 바로 선교의 통합이다. 지눌은 당시 선가와 교가의 병으로 치선과 광혜를 들고 있다.
  치선이란 선가의 병으로, 자기 종의 우위만을 내세우며 문자가 가리키는 곳에 의지하지 않고, 덮어놓고 앉아 애만 쓰는 것을 일컬으며, 그 처방으로 여실한 언교로 오수의 본말을 분명히 결택하여 마음을 비추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또 광혜는 교가의 병으로 의리나 지견에 걸려있는 경우를 말하며, 그 처방으로는 다름 아닌 본분종사5)들이 제시한 경절문의 언구를 들고 있다.
  이로써 이상에서 살펴본 3종문과 선교통합의 체계가 다름 아닌 돈오점수의 체계인 것을 알 수 있다. 즉 원돈신해란 중생이 부처임을 믿는 것이니 돈오이고, 성적등지와 경절문은 점수에 해당하며, 선교통합 또한 돈오점수 체계 의한다. 즉 여실한 지해로 마음의 성상을 깨닫고(돈오), 그런 다음 화두를 드는 공부로(점수) 출신활로를 얻으면 큰 자재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유의할 것은 이러한 이론은 모두 실천을 위한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면 지눌의 사상을 진리관과 실천론으로 나누어 살펴보겠다.
2. 선의 진리관과 실천론
 1)진리관인 공적영지심
  지눌의 사상을 진리관과 실천론의 면으로 나눌 수 있는데 진리관은 법, 실천론은 인, 또 전자는 선원, 후자는 선행으로 표현할 수 있다. 절요에서는 마음에 대한 문제를 깊이 살피고 있는데, 그것은 마음을 떠난 수행은 무의미하고, 또 마음의 성상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실천의 방향과 내용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보조는 그 예로써 4종의 선(하택종, 북종, 홍주종, 우두종)을 자세히 들고 있다. 4종 중에도 보조는 하택종의 입장에서 마음을 공적영지로 보고 있다. 공적은 일체의 모든 대립과 상이 끊어진 바탕이며, 영지는 그러면서도 일체를 환히 비추어 알 수 있는 밝은 바탕을 가리킨다. 공적이 불변하는 마음의 본성이라면 영지는 수연하는 마음의 작용, 상을 가리킨다. 불변과 수연, 체와 용, 성과 상이 즉하여 있어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이며 동시인 것처럼 공적과 영지도 그러하다. 이것이 지눌 사상의 일관된 체계이다. 지눌이 선문 4종을 평가하는 기준도 이 적과 지인데 조계의 적자가 못되고 지해종사라 불리는 하택신회의 사상을 받아들인 까닭도 이 공적영지에 있다.
  그러면 마음에 대한 4종의 입장을 살펴보겠다. 하택종은 위에서 술한 바이고, 북종에서는 ‘중생에게 있는 본래의 깨달은 성품은 마치 거울처럼 밝은데, 번뇌가 덮이면 거울에 먼지가 낀 것과 같다’하여 복심멸망(마음을 항복해 망령된 것을 멸함)을 주장한다. 홍주종에서는 ‘우리들의 일거일동 심지어 삼독심조차 불성의 작용으로서 다 참다운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끊을 것도 없고, 닦을 것도 없이 그저 신임정성(마음에 맡김)할 뿐이다. 세 번째 우두종은 일체의 모든 것이 꿈같이 공하여 무로 보아 모든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잊고 무사하여 휴심불기(마음을 쉬어 일으키지 않는 것)로 수행을 삼았다. 보조는 본래 번뇌망상이 공한 것을 모르는 북종은 논외로 하였고, 수연(작용)의 면만 치우쳐 있는 홍주종과 불변(본체)의 면에만 치우쳐 있는 우두종보다는 불변, 수연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하택종의 사상을 받아들였다. 왜냐하면 12-13C 고려불교에서는 하택종이라는 방편이 제일 적합하였기 때문이다. 
 2)실천론인 돈오점수
  앞에서도 말했듯이 마음을 떠난 실천은 있을 수 없다. 즉 공적영지심을 떠난 선행, 돈오점수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지눌이 말하는 돈오점수란 무엇인가?
  절요에서 지눌은 진여의 이치에는 오히려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거늘, 인의 입장에서는 수증취입의 문이 있어서 미오범성이 있는 것이니 ‘미혹에서 깨닫는 것은 돈오요, 범부가 변해 성인이 되는 것은 점수다’라고 전한다. 즉 법(진여의 자리)은 일찍이 미혹된 적도 없었으므로, 깨친다는 말도 필요 없는데 요는 중생들이 자신이 부처인 것을 100% 믿지 않기 때문에 돈오다 점수다 하는 것이 생겨난 것이다. 돈오란 바로 ‘나다’하는 착각에서 깨어나 부처와 추호도 다르지 않은 참나, 참마음을 아는 확실한 눈 뜸이다. 그것은 단순한 지식적 차원의 앎이 아니라, 생생한 체험이다.
  이렇게 나=부처 인줄 깨달았다면 일을 마친 것인가? 물론 깨친 대로 살아지면 완성된 경지라 할 수 있으나(지눌은 소수의 상상근기자에게 해당한다고 봄) 대개의 사람들은 돈오한 후에도 수많은 겁 동안의 습기 때문에 쉽게 되지 않으므로 점수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럼 돈오 후의 점수란 무엇인가? 확실히 눈뜬 상태에서 무조건 끊고 닦는 것이 아닌, 끊는다는 생각도 없이 끊고(무단이단), 닦는다는 생각도 없이 닦는(무수이수) 이른바 무념수이다. 이점이 오전의 수와 다른 점이다. 오전의 수가 나다하는 놈이 공하다는 것을 모르고 닦는 유위, 유념의 수, 선후가 있는 닦음이라면, 오후의 수는 나다라는 놈이 공한 것을 아는 무위, 무념의 수, 즉 선후가 없는 닦음이다. 지눌은 또 점수의 내용에는 습기를 제거하는 자리행 뿐만 아니라 바라밀행 등을 통한 이타행도 포함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면 왜 그토록 돈오점수를 주장했을까? 그것은 12-13C 고려불교를 떠나서 말할 수 없다. 당시 다수가 걸린 병인 교가의 병(광혜)과 선가의 병(치선)을 치료하고, 선교를 회통하기 위해서는 돈오점수라는 방편이 가장 적합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즉 3현 10지에 들기 위해서는 3아승지겁을 닦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교학자들은 퇴굴심을 내기 쉬우므로, 돈오(나는 이미 부처이다)의 처방을 주고, 나는 이미 부처라고 생각하는 선학자들은 스스로를 지나치게 높이 평가하여 닦음을 게을리 하기 쉬우므로, 점수의 처방을 준 것이다.

 

Ⅲ. 결론
  이상에서 절요를 통해 지눌의 사상을 간략히 살펴보았다. 그의 제자 혜심은 은사인 지눌을 ‘우행호시’라고 표현했다. 현실의 문제를 꿰뚫어 보는 날카로운 ‘호랑이의 눈’을 가지고 평생에 걸쳐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소와 같은 걸음’의 실천이 있었기 때문이다. 선종출신의 사굴산계에 속하면서도 선과 교를 통합하는 돈오점수론을 편 것은 당시로서는 굉장히 획기적인 일이었다. 그만큼 그는 어떤 특정한 스승이나 산문에 얽매이지 않고, 오직 진리만을 쫓은 열린 마음의 수행자였음을 알 수 있다. 비록 800여년 전의 일이지만 오늘날의 우리에게 많은 점을 시사해 준다.
  원두반 가을철 동안 절요를 배우고 또 이글을 준비하면서 다시 한 번 출가하는 마음으로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모자란 점이 많지만 이를 계기로 초발심으로 정진불퇴할 것을 발원해 본다.
참고문헌
1. 『절요』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2004
2. 『목우자 지눌연구』강건기, 부처님세상, 2001
3. 『보조사상』제4집, 보조사상 연구원, 1990
4. 『조선불교통사』이능화, 보련각, 1973
5. 『마음닦는 길』 강건기, 불일출판사, 1996
6. 「지눌의 선사상 연구」한희석, 동국대 불교학과 학생논단 중.

 

1) 『조선불교통사』하 p.338
2) 『화엄론절요서』, 『한국불교전서』4책 p.767 하, p.768상
3)『대정신수대장경』, 「대혜보각선사법어」19권 p.983. 하
4) 자기의 사량분별을 통해 깨달아 아는 것으로 알음알이라고도 함.
5) 본래의 면목에 계합하여 도를 배우는 사람을 지도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사람.

 

 

 

 

 

 

[출처] 『절요』를 통해 본 보조 지눌의 사상|작성자 노원앙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