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화장

수선님 2020. 11. 8. 11:48

화장

 

기본정보

사자(死者)의 유해(遺骸)를 불로 태우는 장법

일반정보

『열반경(涅槃經)』에 의하면, 석가는 그 유해를 다비(茶毘)하였는데, 석가를 따르는 사람들이 그의 사리와 재를 나누어 각처에 봉안하면서 탑파가 건립되었다고 한다. 이로써 화장(火葬)은 불교의 발전과 더불어 불교신자 및 일반에게도 크게 유행하게 되었다. 신라에서 화장을 채용한 왕은 문무왕(文武王), 효성왕(孝成王), 선덕왕(宣德王), 원성왕(元聖王), 진성여왕(眞聖女王), 효공왕(孝恭王), 신덕왕(神德王), 경명왕(景明王) 등 8명이다.

전문정보

화장은 불교의 발전과 함께 유행하게 되는데, 시신을 태워 이승에서의 더러운 형체를 없애고자 하는 사고에서 시작된 불교예식인 다비(茶毘)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특히 불교에서는 화장 후 사리를 수습하여 사리탑이나 부도 등의 건조물에 봉안하는데, 이는 2차장의 의미를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리에 죽은 사람의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보아 영혼을 사리로 재탄생시키는 수단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처럼 뜰에 장작을 쌓고 시신을 불에 태우는 화장은 현장법사(玄奘法師)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서도 볼 수 있듯이 사자를 물에 띄워 없어지게 하는 수장(水葬)이나, 숲속에 버려 야수들이 먹게 하는 야장(野葬)과 함께 죽은 자를 보내는 한 방법으로 널리 이용되었다.

화장은 유럽에서는 신석기시대 후기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청동기시대에는 화장하여 골호(骨壺)에 봉안하는 풍습이 중부 유럽을 중심으로 영국, 이탈리아까지 전파되었다. 동아시아에서도 중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들이 화장을 채용하고 있다. 그 중 특히 일본의 경우는 불교의 발전과 더불어 화장이 유행하게 되는 모습을 보여 주목된다. 이 때 화장의 유형은 대체로 4가지로 구분된다. 첫째는 점토를 바른 목곽(木槨)을 만들어 그 안에서 화장한 후 뼈를 다른 곳으로 이동하지 않은 상태로 고분을 만드는 경우이고, 둘째는 화장한 장소에 장골기(藏骨器)를 놓고 뼈를 담는 것, 셋째는 화장한 장소와는 다른 별도의 장소에서 장골기에 뼈를 담아 묻는 경우, 넷째는 장골기에 넣지 않고 산골하는 경우 등이 있다. 문헌기록에 보이는 일본에서의 화장 사례는 승 도조(道照)(700년 사망)가 가장 이른 시기이며, 천황의 화장은 40대 지통천황(持統天皇)(702년 사망)이 처음이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芳賀登, 1980)

그러나 이러한 화장은 사체(死體)를 잘 보존하고자 하는 관습이 강하게 남아있던 동아시아에서 불교 전래 초기에는 일반적으로 환영받지 못하였다. 중국에서도 불교 도입 초기에 외국인 승려들은 유언을 통해 화장을 하였으나, 중국인 승려들은 대부분 토장(土葬)을 하였다. 한국에서도 불교도입 초기의 상황을 보여주는 『삼국유사』의 기록을 살펴보면, 승려들도 일반적인 토장을 택하는 경우가 종종 나타나 이러한 상황이 공통적으로 찾아진다.

신라에서 화장을 채용한 왕은 문무왕(文武王), 효성왕(孝成王), 선덕왕(宣德王), 원성왕(元聖王), 진성여왕(眞聖女王), 효공왕(孝恭王), 신덕왕(神德王), 경명왕(景明王) 등 8명이 찾아지는 반면, 백제에서는 왕보다는 승려 혹은 불교에 깊이 귀의하던 특정한 사람들에게서 화장묘가 주로 나타난다.(山本孝文, 2003)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을 토대로 위에서 열거한 신라 왕들의 화장기록을 확인해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알 수 있다. 즉 8명의 왕 중에서 산골(散骨)한 왕은 문무왕, 효성왕, 선덕왕, 진성여왕, 경명왕으로 총 5명이다. 문무왕의 경우는 화장 후 산골을 했는지 장골(藏骨)을 했는지 논란이 있지만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조사 결과, 장골처로 보이는 그 어떠한 시설도 확인되지 않아 산골의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 효성왕과 선덕왕은 문무왕과 같이 동해에 산골하였으며 진성여왕은 서악(西岳) 또는 황산(黃山), 경명왕은 황복사(皇福寺)에서 화장하여 성등잉산(省等仍山)에 산골하였다고 한다.(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2002)

화장하여 장골한 왕은 원성왕, 효공왕, 신덕왕으로 승려인 자장(慈藏)이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원성왕의 경우는 『삼국사기』에 화장한 기록은 보이나 산골인지 장골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현재 경주의 괘릉을 원성왕릉으로 추정하고 있어 이것이 사실이라면 장골로 볼 수 있을 것이다.(이근직, 2006) 원성왕은 봉덕사(奉德寺) 남(南), 효공왕은 사자사(獅子寺) 북(北), 신덕왕은 잠현(箴峴) 또는 죽성(竹城)에 장골했음이 확인된다.(석병철, 2007)

참고문헌

화장은 불교의 발전과 함께 유행하게 되는데, 시신을 태워 이승에서의 더러운 형체를 없애고자 하는 사고에서 시작된 불교예식인 다비(茶毘)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특히 불교에서는 화장 후 사리를 수습하여 사리탑이나 부도 등의 건조물에 봉안하는데, 이는 2차장의 의미를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리에 죽은 사람의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보아 영혼을 사리로 재탄생시키는 수단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처럼 뜰에 장작을 쌓고 시신을 불에 태우는 화장은 현장법사(玄奘法師)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서도 볼 수 있듯이 사자를 물에 띄워 없어지게 하는 수장(水葬)이나, 숲속에 버려 야수들이 먹게 하는 야장(野葬)과 함께 죽은 자를 보내는 한 방법으로 널리 이용되었다.

화장은 유럽에서는 신석기시대 후기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청동기시대에는 화장하여 골호(骨壺)에 봉안하는 풍습이 중부 유럽을 중심으로 영국, 이탈리아까지 전파되었다. 동아시아에서도 중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들이 화장을 채용하고 있다. 그 중 특히 일본의 경우는 불교의 발전과 더불어 화장이 유행하게 되는 모습을 보여 주목된다. 이 때 화장의 유형은 대체로 4가지로 구분된다. 첫째는 점토를 바른 목곽(木槨)을 만들어 그 안에서 화장한 후 뼈를 다른 곳으로 이동하지 않은 상태로 고분을 만드는 경우이고, 둘째는 화장한 장소에 장골기(藏骨器)를 놓고 뼈를 담는 것, 셋째는 화장한 장소와는 다른 별도의 장소에서 장골기에 뼈를 담아 묻는 경우, 넷째는 장골기에 넣지 않고 산골하는 경우 등이 있다. 문헌기록에 보이는 일본에서의 화장 사례는 승 도조(道照)(700년 사망)가 가장 이른 시기이며, 천황의 화장은 40대 지통천황(持統天皇)(702년 사망)이 처음이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芳賀登, 1980)

그러나 이러한 화장은 사체(死體)를 잘 보존하고자 하는 관습이 강하게 남아있던 동아시아에서 불교 전래 초기에는 일반적으로 환영받지 못하였다. 중국에서도 불교 도입 초기에 외국인 승려들은 유언을 통해 화장을 하였으나, 중국인 승려들은 대부분 토장(土葬)을 하였다. 한국에서도 불교도입 초기의 상황을 보여주는 『삼국유사』의 기록을 살펴보면, 승려들도 일반적인 토장을 택하는 경우가 종종 나타나 이러한 상황이 공통적으로 찾아진다.

신라에서 화장을 채용한 왕은 문무왕(文武王), 효성왕(孝成王), 선덕왕(宣德王), 원성왕(元聖王), 진성여왕(眞聖女王), 효공왕(孝恭王), 신덕왕(神德王), 경명왕(景明王) 등 8명이 찾아지는 반면, 백제에서는 왕보다는 승려 혹은 불교에 깊이 귀의하던 특정한 사람들에게서 화장묘가 주로 나타난다.(山本孝文, 2003)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을 토대로 위에서 열거한 신라 왕들의 화장기록을 확인해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알 수 있다. 즉 8명의 왕 중에서 산골(散骨)한 왕은 문무왕, 효성왕, 선덕왕, 진성여왕, 경명왕으로 총 5명이다. 문무왕의 경우는 화장 후 산골을 했는지 장골(藏骨)을 했는지 논란이 있지만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조사 결과, 장골처로 보이는 그 어떠한 시설도 확인되지 않아 산골의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 효성왕과 선덕왕은 문무왕과 같이 동해에 산골하였으며 진성여왕은 서악(西岳) 또는 황산(黃山), 경명왕은 황복사(皇福寺)에서 화장하여 성등잉산(省等仍山)에 산골하였다고 한다.(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2002)

화장하여 장골한 왕은 원성왕, 효공왕, 신덕왕으로 승려인 자장(慈藏)이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원성왕의 경우는 『삼국사기』에 화장한 기록은 보이나 산골인지 장골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현재 경주의 괘릉을 원성왕릉으로 추정하고 있어 이것이 사실이라면 장골로 볼 수 있을 것이다.(이근직, 2006) 원성왕은 봉덕사(奉德寺) 남(南), 효공왕은 사자사(獅子寺) 북(北), 신덕왕은 잠현(箴峴) 또는 죽성(竹城)에 장골했음이 확인된다.(석병철, 2007)

관련원문 및 해석

第三十四 孝成王 [金氏 名承慶 父聖德王 母炤德太后 妃惠明王后 眞宗角干之女 丁丑立 理五年 法流寺火葬 骨散東海]

제34 효성왕 [김씨이며, 이름은 승경이다. 아버지는 성덕왕이고, 어머니는 소덕태후이다. 왕비는 혜명왕후로, 진종각간의 딸이다. 정축년(737)에 즉위하여 5년간 다스렸다. 법류사에서 화장하여 뼈를 동해에 뿌렸다.]

第五十一 眞聖女王 [金氏 名曼憲 卽定康王之同母妹也 王之匹(魏)(弘)大角干 追封惠成大王 丁未立 理十年 丁巳遜位于小子孝恭王 十二月崩 火葬 散骨于牟梁西岳 一作未黃山]

제51 진성여왕 [성은 김씨이며 이름은 만헌으로 즉 정강왕의 누이동생이다. 왕의 배필은 위홍대각간이니 혜성대왕으로 추봉되었다. 정미(887)에 즉위하여 10년간 다스렸다. 정사(897)에 소자 효공왕에게 양위하였다. 12월에 돌아가시니 화장하여 모량 서악 또는 미황산에 뼈를 뿌렸다]

第五十二 孝恭王 [金氏 名嶢 父憲康王 母<文>資王后 丁巳立 理十五年 火葬師子寺北 骨藏于仇知堤東山脇]

제52 효공왕 [김씨이며, 이름은 요이다. 아버지는 헌강왕이고, 어머니는 문자왕후이다. 정사(897)에 즉위하여 15년간 다스렸다. 사자사 북쪽에 화장하고 뼈는 구지제 동쪽 산허리에 묻었다.]

第五十三 神德王 [朴氏 名景徽 本名秀宗 母眞花夫人 夫人之父順弘角干 追諡成<武>大王 祖元隣角干 乃<阿>達(羅)王之遠孫 父<文>元伊干 追封興廉大王 祖文官海干 義父銳謙角干 追封宣成大王 妃資成王后 一云懿成 又孝資 壬申立 理五年 火葬 藏骨于箴峴南]

제53 신덕왕 [박씨이며, 이름은 경휘로 본래 이름은 수종이다. 어머니는 진화부인이고, 부인의 아버지는 순홍 각간이니 시호를 성무대왕으로 추봉하였으며, 할아버지는 원린 각간으로 곧 아달라왕의 원손이다. 아버지는 문원 이간이니 흥렴대왕으로 추봉되었고, 할아버지는 문관 해간이며, 의부는 예겸 각간이니 선성대왕으로 추봉되었다. 왕비는 자성왕후로 혹은 의성 또는 효자라고도 한다. 임신(912)에 즉위하여 5년간 다스렸다. 화장하여 뼈는 잠현 남쪽에 묻었다.]

第五十四 景明王 [朴氏 名昇英 父神德 母資成 妃長沙宅大尊角干 追封聖僖大王之子 大尊卽水宗伊干之子 丁丑立 理七年 火葬皇福寺 散骨于省等仍山西]

 

 

 

 

 

 

 

 

[출처] 화장|작성자 임기영불교연구소

'기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경전산책 중국불교 13경-②  (0) 2021.01.03
동양윤리사상 정리  (0) 2020.12.20
야단법석  (0) 2020.12.06
아잔 브람의 행복론  (0) 2020.11.22
영계탐구 사후세계는 어떤 곳인가<8> 죽음 앞에서 哭한 공자  (0) 2020.1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