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의 현대적 재해석
Ⅰ들어가는 말.
Ⅱ『금강경』에 나타난 보살의 인식.
Ⅲ『금강경』에 나타난 보살의 실천.
Ⅳ 맺음말.
Ⅰ.들어가는 말
오늘날 우리는 과학문명의 발달에 따른 생활권의 확대로 세계화 정보화로 국가와 국가, 민족과 민족간의 시간적, 공간적, 심리적 거리가 좁혀지고 있는 것을 체험한다. 지구촌의 시대, 정보화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인간의 의식주의 생활방식 뿐만 아니라 의식구조와 행동양식이 획일화 되어가고 있다. 과학문명의 발달로 오늘날 우리는 기술적인 지능은 가졌으되 자율적인 이성은 둔감한 인간, 인생의 목적과 의미를 생각하지 않고 감성적인 자극에 민감한 인간, 이것이 오늘날 우리 의식구조의 현상이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뭄훠드의 분석을 요약한다면 첫째, 전통 가치관의 몰락. 둘째, 개성의 상실 및 획일화. 셋째,즉물적(卽物的)풍조 등이다.
이런 사조로 오늘날 인류는 핵전쟁의 공포, 인구증가에 따른 식량의 문제, 공업화에 따른 빈부의 격차, 자원의 고갈, 환경의 오염 등으로 인류의 미래를 예측하기 어렵게 하는 위기의 문제들에 봉착하고 있다.이런 현상은 정신과 육체, 나와 남, 나와 사회, 나와 국가, 나와 자연을 나누는 무명(無明)에 의한 이분법적 사고에 연유하는 결과라 하겠다. 이러한 현대의 위기는 어디에서 유래되었을까? 필자는 이것을 서양의 ‘공작인적 인간(homo faber)관’에서 찾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현대사회 과학기술의 미증유의 발전은 과학기술과 경제적 생산을 인간의 본질로 간주하는 이상으로 삼기에 이름으로써 ‘공작인적 인간관’의 개가가 온 우주를 뒤덮게 되었다. 그리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답게 해주는 본성은 ‘공작’, ‘제작’, ‘생산’, ‘노동’, ‘실험’등과 같은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공작인적 인간관’의 현대사회는 인간의 ‘기능적 가치관’을 중시하게 되어 물질숭상의 물질주의적 세계관과 결부되어 현대사회에 있어서의 육체를 중심으로 삼는 인간관이 형성되어, 기술적인 지성은 가졌으되 자율적인 이성은 마비된 인간, 정신적인 가치에 둔감하면서 감성적인 자극에 민감한 인간으로 전락되어 가고 있다.
그리하여 현대는 물질과 정신, 기술문명과 정신문화의 균형과 조화를 상실한 현상이 나타나 인류가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우리’보다는 ‘나’만을 중시하는 개인주의에 빠지고 ‘의(義)’에는 둔감하면서도 ‘이(利)’에는 민감한 ‘시장형 인간’으로 보편화되고 있다. 이것은 가치관의 전도된 현상이다. 이런 전도된 자아관의 현상은 대승불교의 ‘보살(菩薩)의 자아관’의 대중화 ․ 보편화 ․ 세계화의 부재현상으로 유래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삶의 발전과 성공이 무엇인가’를 심각하게 되물어보고 대안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이런 방안을 『금강경』에 나타난 보살의 인식과 실천에서 찾고자 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金剛經(Vajracchidikā-prajnā-pāramitā-sūtra』는 초기 대승불교 당시 인도의 모든 인종, 종파, 남녀 카스트 등의 차이를 넘어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사회적, 도덕적, 정신적 면에서 평등함을 주장하고 일체중생이 모두 함께 성불할 수 있다는 원리를 제시한 종교적 理想을 담은 경전이다. 『(金剛經』의 산스끄리뜨 원전에 대한 현존하는 한역본 중 구역의 鳩摩羅什(Kumārajīva, 343-413) 역본(譯本)과 신역의 玄裝(Hsuan-Tsang,602-664)역본이 유명하다.
『大唐西域記』의 저자 현장스님은 인도 유학(629-645)에서 체득한 산스끄리뜨 실력으로 『금강경』을 원전에 충실하게 번역하였다. 그의 번역을 譯經史에서는 ‘新譯’이라 부르고 玄裝이전의 번역을 ‘舊譯’이라 부른다. 구역의 대표로는 鳩摩羅什(Kumārajīva)과 眞諦(Paramārtha)의 번역을 든다. 동아시아에서 『금강경』이라고 유통되어온 것은 玄裝譯本이 아니라 最古譯인 鳩摩羅什의 譯本이다. 학자들은 羅什의 『金剛經』은 ‘依義不依語’에 근거해서 산스끄리뜨 원문의 번쇄함을 축약하여 간결하면서도 그 뜻을 고결한 문장으로 정확하게 번역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金剛經』이라고 하면 鳩摩羅什의 한역본을 가리키는 것이다.
中國 梁나라 梁武帝(464-549)의 長子였던 昭明太子(501-531)는 羅什의 번역본 『金剛經』에 심취해 그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해주는 구실을 하는 內容槪要를 三十二分으로 ‘分節’하여 각 분에 이름을 붙였다고 전해오고 있다. 그의 ‘分節’은 각 ‘分’의 내용을 개관하고 있는 의미의 명칭으로 이론적으로 적절하다고 학자들은 보고 있다. 昭明太子가 羅什의 『金剛經』에 지금의 三十二分으로 分科한 것을 다섯 글자로 이루어진 分의 이름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法會因田分 第一 |
尊重正敎分 第十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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淨心行善分 第二十三 |
善現起請分 第二 |
如法受持分 第十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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福智無比分 第二十四 |
大乘正宗分 第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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離相寂滅分 第十四 |
化無所化分 第二十五 |
妙行無住分 第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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持經功德分 第十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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法身非相分 第二十六 |
如理實見分 第五 |
能淨業障分 第十六 |
無斷無滅分 第二十七 |
正信希有分 第六 |
究意無我分 第十七 |
不受不貪分 第二十八 |
無得無說分 第七 |
一體同觀分 第十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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威儀寂靜分 第二十九 |
依法出生分 第八 |
法界通化分 第十九 |
一合離相分 第三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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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相無相分 第九 |
離色離相分 第二十 |
知見不生分 第三十一 |
莊嚴淨土分 第十 |
非說所說分 第二十一 |
應化非眞分 第三十二 |
無爲福勝分 第十一 |
無法可得分 第二十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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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초기의 함허득통(涵虛得通, 1376-1433)은 여말의 나옹에서 조선초의 무학으로 이어지는 禪脈을 계승한 선사로사 『金剛經』 五家解에 설의(說誼)를 베풀었다. 현재 우리들이 대하고 있는 바와 같은 『금강반야바라밀경오가해설의(金剛般若波羅蜜經五家解說誼)』가 된 것은 세조의 명을 받들어 一書로 엮은 것이다. 『금강반야바라밀경오가해설의』는 그 뒤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에 있어서의 『金剛經』 유통의 주종을 이루고 있다. 『金剛經』五家解는 구마라집이 번역한 『金剛經』에 대한 다음과 같은 다섯 사람의 註解를 한 권의 책으로 엮어 놓은 문헌이다.
1. 唐(당) 규봉 종밀(780-831)의 찬요
2. 梁(양) 부흡(傅翕, 497-512)의 협송
3. 唐(당) 육조 혜능(638-713)의 解義
4. 宋(송) 야부도천(冶父道川) 협주
5. 종경(宗鏡, 시대 미상)의 제강(提綱)
「五家解」는 시대적으로 중국불교 전체를 망라하고 있다. 규봉 종밀(圭峰 宗密)은 무착의 18주설(住說)과 세친의 27단의설(斷疑說)을 계승하여, 철저하게 논리적인 해설을 하고 있다. 규봉은 본래 화엄종에 속한 사람이지만 禪學에도 밝아 禪敎一致를 주장했다. 그의『금강경』풀이는 인도의 전통적 『금강경』해석을 받아들여 중국의 화엄과 선(禪)에 접목시킨 입장에 있다. 대승불교 최초기에 성립한 『반야경』을 바탕으로 인도에서 중국에 걸쳐 전개된 진공묘유(眞空妙有)의 禪사상을 알뜰하게 엮어놓은 것은 다른 곳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독특한 사상적 위치라고 할 수 있다. 또한 Edward Conze의 梵本 역시 이 分節을 따르고 있다.
인도불교는 ‘自我實現說’로서 그 철학의 구조는 서양철학에 대비하면 ‘形而上學的 倫理說’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금강경』의 인식과 실천은 “인도의 모든 윤리적 실천은 형이상학적 깨달음에서 유래한다”는 패러다임의 전형이라고 볼 수 있다.
한 사상을 연구 하는 데는 Text에 대한 언어학 고찰, 사상사적 고찰 그리고 문화사적 고찰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 연구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따라서 논자는 Text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 논리적, 문법적, 어원적 그리고 문헌학적 기술들을 사용해야 한다는 P. T. Raju의 방법론을 채용해서 본 논문을 연구하고자 한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金剛經』이라고 하면 鳩摩羅什의 한역본이다. 이 羅什의 텍스트를 연구하면서, Edward Conze의 『Vajracchidikā-prajnā-pāramitā-sūtra』(1958)의 산스끄리뜨본을 대본으로 하여 연구를 진행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서『금강경』에 나타난 보살의 인식과 실천의 이념이 무엇인지를 究明하고자 한다.
출처: 박미례, 일본 경신사 소장 고려불화 수월관음도 복원본
Ⅱ.『금강경』에 나타난 보살의 인식
혼돈의 시대, 갈등의 시대에 살아가는 우리는 어떻게 행복과 불국토를 실현할 수 있을까. 그것은 『금강경』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는 길이다. 『금강경』은 중생 의식의 환상세계를 깨부수고 부처님 지혜의 실상 세계로 안내하는 나침반이다. 우리 범부들은 지혜로써 삶을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의식 즉 생각으로 살아간다. 그래서 『금강경』은 중생의 의식을 지혜(반야바라밀)로 깨부수어 태양광명과 같은 밝은 지혜로 이치에도 일에도 막힘이 없는 삶을 행복하게 살아가라는 것이다(第十四離相寂滅分).
불멸 이후 500여년이 흐른 A.D. 1세기에서 2세기사이 불교사상에는 중대한 개혁이 일어났다. 그 움직임은 인도 남부와 북서부의 많은 종파들 속에서 오랜 기간에 걸쳐 자라난 사상들로부터 비롯되었다. 슝가 왕조(183-71 B.C) 멸망 후 인도는 꾸샤나(kuṣāṇa)왕조(A.D. 48-220) 중심으로 한 북인도와 안다라 왕조(B.C. 60- A.D.290?)를 중심으로 한 남인도로 양분되었다. 이 시대에 대승 불교 운동가들은 시대적․사상적 혼돈을 지양하고 회통하기 위하여 그들의 이상을 담은 방대한 수량의 경전을 산출하였다는 데 이 중 초기 대승 경전으로 가장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것이『금강경』이다.
『금강경』은 일체제법이 고정적 실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관(觀)하는 공(空)사상을 나타낸 것으로서 서기 150년 전후에 성립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금강경』은 『바가바드기따』 와 같이 중생의 의식을 대변하는 수보리가 항상 중생의 입장에서 질문을 하고, 이에 대해 부처님이 ‘반야바라밀로’답하는 대화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금강경』에서는 공(śūnya)이라는 술어를 쓰지 않으면서 <‘즉비(卽非)의 논리’>로 공(空)사상을 설명하면서 『금강경』 전체의 대의(大義)를 제시하는 『대승정종분』의 가르침을 알아보자.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셨다. 모든 보살마하살(Bodhisattvamahāsattva)은 반드시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 받을지니라. 있는 바 일체의 중생의 종류인 알에서 태어난 것(卵生), 어미 태 안에서 태어난 것(胎生), 습기로 태어난 것(濕生), 자체가 없으며 의탁한 데 없이 홀연히 생겨난 것(化生), 욕계와 색계에 사는 형상이 있는 것(有色), 순 정신적 존재인 세계의 형상이 없는 것(無色), 생각이 있는 것(有想), 생각이 없는 것(無想),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요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닌 것(非有想非無想), 이것들을 내가 무여열반(無餘涅槃, anupadhiśeṣa-nirvāṇa)에 들게 하여 제도하리라.
이와 같이 한량없고, 셀 수 없고, 가없는 중생들을 제도하였으나 실로 멸도(滅度)를 얻는 중생이 없느니라. 어떤 까닭인가?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아상(我相)과 인상(人相)과 중생상(衆生相)과 수자상(壽者相)이 있다고 한다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이와 같이 大乘의 이상을 잘 나타내 주는 것이 菩薩(Bodhisattva)의 개념이다. 대승의 이상주의적 핵심은 신앙의 초점을 아라한에서 보살로 옮긴 점에 있다. 보살은 부파불교와 대승불교의 근본적 차이를 보여주는 근거였다. 부파불교시대를 거쳐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혁신불교로서 나타난 대승불교운동은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菩薩(Bodhisattva)을 제시하고, 부파불교의 이상적 인간상인 阿羅漢(Arhat)을 自己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存在로 폄하하였다. 부파불교에서 보살은 석가모니부처님과 같은 특별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지위였고 凡夫衆生들로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이상적 경지였다.
하지만 대승불교지도자들은 이러한 보살의 이상을 보편화하여 누구든지 달성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스스로를 ‘깨달음(bodhi, 菩提)을 얻고자 하는 사람(sattva, 薩埵)’이란 뜻으로 ‘菩薩(bodhi-sattva, 菩提薩埵)’이라 칭했다.『금강경』에서는 보살을 단순히 보살이라고만 하지 않고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 Bodhisattva-mahāsattva)이라 하여 구별하였다. 『금강경』에서는 보살, 즉 ‘깨달음을 추구하는 者’는 自利의 완성을 향하여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이것은 성문(聲聞, Śravaka)이나 연각(緣覺, Pratyekabuddha)도 가능하므로 이들과 구별하기 위하여 利他에 대한 완성을 지향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위의 예문(註 6)에서와 같이 ‘보살마하살’로 표현한 것이다.
보살마하살은 일체의 중생을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게 하는 자비의 원력으로 활동한다는 것은 이미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다. 『금강경』의 보살마하살은 생사의 세계에서 고통받고 있는 모든 중생, 즉 구류중생(九類衆生)들을 제도한다고 하는 이타행을 강조하는 실천주의적 불교를 제창하고 있다. 이것은 나의 깨달음을 타인의 깨달음으로 회향시킨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일체제법의 공관에서 보면 제도하는 자와 제도받는 자가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을 위의 인용문(註 7)에서 설하고 있다. 이러한 사상은 소승 중에서도 說一切有部(Sarvāstivāda)라는 部派가 주장한 ‘我空法有’의 주장을 바로 잡으려는 시대적 사명을 가지고 있었다. 또 위의 예문(註 8)에서는 아상(ātman-saṃjnā)․인상(pudgala-saṃjnā)․중생상(sattva-saṃjnā)․수자상(jiva-saṃjnā), 즉 四相의 부정이 보살(Bodhisattva)이라는 대승의 종지를 설하고 있다. 四相의 제거는 곧 번뇌심의 제거로서 ‘云何降伏其心’의 구체적인 실천 수행이다. 또한 그 四相의 제거는 곧 청정심의 발현을 의미하기 때문에 애써 청정심을 설명할 필요는 없다. 『금강경』은 四相 을 부정하는 ‘無相’을 설함으로써 초기 불교의 무아관을 새롭게 해석하였다(第十七 究意無我分). 다시 말해 ‘無相’의 실천은 초기불교의 무아의 실천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대승불교운동은 ‘석존의 불교’라는 원래의 관점으로 되돌아가려는 운동이었다. 반야 공관이 제시하고 있는 實相無相을 전체적인 대의와 본체로 내세움으로써 반야경전이 지니고 있는 지혜와 자비의 강조가 청정심을 유지하는 문제와 번뇌심을 다스리는 문제가 하나의 구조로 통일되어 있다. 곧 그것은 일상의 생활에서 일어나는 私心을 끊고 無我無心이 되어 진면목으로 살아가기를 권장하는 것이다. 그 방식이 곧 반야의 공이라는 방식이다.
無相의 실천은 반야의 지혜를 현현시키므로 위의 예문에서 ‘멸도(滅度)의 행위를 부정하는’인식론적 근거가 된다(第八 依法出生分). 이 四相의 부정은 당대의 인도 모든 사상, 즉 정통파나 비정통파의 모든 사견(mithyā dṛṣṭi)을 타파하여 회통한 새로운 보살승(Bodhisattva-yāna)운동의 진수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대승정신은 보살정신이요, 보살정신이 바로 반야사상이며, 반야사상은 바로 四相의 부정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分別思識의 개념이 일어나지 않는 ‘一念不生’하는 것이라면 그대로 佛境界가 되어 일체대상에 무심하게 작용하여 전체로서 나타나게 된다. 그래서 ‘心’을 한 곳에 매어두지 않는 인식이 필요하다. 이처럼 ‘無相의 心’을 일체에 적용시키는 인식이 ‘惺惺寂寂’의 인식이다. 그래서 ‘惺惺寂寂’은 ‘空寂靈知’와 더불어 깨어 있으되 매어 있지 않는 인식이다. 이것이 곧 『금강경』에 나타난 보살의 ‘惺惺寂寂’의 인식이다.
이와 같이『금강경』은 대승운동의 일환으로서 ‘般若波羅蜜(prajnāpāramitā)’을 최초로 명쾌하게 설하고 있다. 諸法이 공함을 깨닫는 것이 般若, 즉 智慧이며, 보살의 인식이다.
Ⅲ.『금강경』에 나타난 보살의 실천
‘반야바라밀’을 인식한 보살은 보살도를 다음과 같이 실천해야 한다고 설하고 있다.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있어 수(數)로 헤아릴 수 없는 무량한 세계에 가득 찬 칠보를 가지고 보시를 한다고 해도, 여기 선남자 선여인이 있어 보살의 마음을 발하여, 이 경을 지니고 그 사구게 등이라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며, 다른 사람을 위해 설해 준다면 그 복이 저 칠보의 복보다 나으리라.
위의 내용은 대승불교운동의 역사적 상황을 간접적으로 시사해 주고 있다. 이러한 『금강경』의 성립은 從來의 佛敎, 즉 部派佛敎敎團이 王(rāja)이나 長者(śreṣṭha)들의 후원 아래 출가자들이 安逸한 삶과 신도들의 물질적 布施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들만의 정신적 안정을 추구한 그들의 소극적이고 現世逃避的인 경향에 반발하여 在家者들의 宗敎的 覺醒을 배경으로 삼고 있었다. 대승사상의 발달은 당시 재가신도의 요구에 부응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종래의 불교, 즉 부파불교교단의 在家者들은 功德을 쌓는 매개체로서의 기능만 있고 생생한 종교적 자각은 저하되었던 것이다. 출가자들은 안정된 생활을 바탕으로 사원에서 아비다르마교학의 연구에만 몰두하고, 실천은 형식화되었다. 그리하여 대승불교운동자들인 善男子(Kula-putra)․善女人(Kula-duhitṛ)이 가장 강조한 점은 불교가 입각해 있는 法(眞理)의 종교적 자각과 실천이 되었다.『금강경』에 등장하는 선남자선〮여인은 발심보살로서 분별허상을 깨치고 무분별심과 무집착심과 평등심을 실천하는 대승 및 최상승의 인물로 등장되어 있다.
앞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대승불교에서는 종교적 관념의 측면에서나 사회실천의 측면에서 적극적인 利他의 誓願을 발하고 깨달음(菩提)을 구하여 수행하는 사람을 보살이라고 하였다. 대승보살은 종래의 의미에 새로운 내용을 부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본래 불교는 종교적 실천을 중시하는 것이지만 부파불교시대에서 들어오면 이런 측면이 희박해졌던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대승불교운동은 ‘석존의 불교’라는 원래의 관점으로 되돌아가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第十七 究竟無我分). 그러므로 『금강경』에서는 재가․출가라는 분별된 입장을 버리고 法(dharma)의 자각과 보살행을 강조하고 있다. 이 경전에서는 經卷의 受持, 讀誦, 그리고 이 경의 四句偈 하나라도 외우고 他人을 위해 설명해 준다면 그 功德(puṇya)은 온세상(三千大千世界)에 가득찬 물질적 七寶의 布施보다도 더 크다고 설하고 있다. 다시 말해 財施보다 法施를 더 강조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法施를 그토록 중시하였을까?
法施의 實踐은 ‘自覺覺他覺行窮滿’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금강경』은 王이나 長者들만이 할 수 있는 寺塔의 建立이나 莊園의 寄進과 같은 것을 할 수 없는 일반 민중 불교도도 발심만 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法施를 권장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대승불교 보살운동의 진보적 성격을 잘 나타내주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우리는 재물의 가치를 더 소중하게 생각하지만, 그보다 귀중한 것은 깨달음의 지혜를 우위에 둘 수 있는 마음이며, 이렇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 역사의 전개 방향이라고도 할 수 있다. 또한 이 경에서는 “小乘을 즐기는 사람들은 아견 ․ 인견 ․ 중생견 ․ 수자견에 집착하여, 이 경을 능히 자기 것으로 하지도 못하고, 읽고 외워 남을 위해 해설하지도 못하느니라”고 설하면서 대승과 소승의 차이점을 밝히고 있다. 小乘의 阿羅漢(arhat)이 닦아야 하는 修行의 방법은 八正道지만 大乘의 菩薩(bodhisattva)들은 空의 실천으로서 六波羅蜜을 닦는다. 六波羅蜜 중에서도 특별히 주목할 것은 布施(dāna)인데, 보살들은 이것을 자신들이 실천해야할 첫 번째 덕목으로 삼았다. 龍樹(150-250 A. D.)는 『大品般若經』을 주석한 『大智度論』에서 보시를 財施와 法施, 그리고 無畏施의 세 종류로 나누어 설하고 있다.
한편 보시를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가에 대한 정신적 자세를 經은 다음과 같이 설한다.
보살은 마땅히 법에 머무르는 바 없이 보시를 행할지니라. 이른바 색에 머물지 않는 보시며, 소리(聲)․냄새(香)․맛(味)․느낌(觸)과 법(法)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여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보시하여 상(相)에 머무르지 말 것이니라.
<중략> .......
수보리야! 보살이 상(相)에 머물지 않고 행하는 보시의 복덕도 또한 이와 같이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느니라. 수보리야 보살은 다만 마땅히 가르친 바와 같이 머물지니라.
보시의 가장 본질적인 정신자세는 相(lakṣaṇa), 즉 겉으로 나타난 모습에 집착함 없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나와 너가 존재하는 보시가 아니라 나와 너를 근원적으로 초월하는 무아(anātman)의 보시(dāna)를 행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견해는 無相을 宗旨로 삼고 無住를 본체로 삼는다는 것이다. 無住는 無住心으로서 번뇌심이 남아 있지 않다는 뜻과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는다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이와 같은 ‘心’은 무집착한 작용의 마음이다. 이와 같이『금강경』의 윤리적 실천인 無住相布施는 “인도의 모든 윤리적 실천은 형이상학적 깨달음에서 유래한다”는 패러다임의 전형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결론적으로 『금강경』에 나타난 보살의 인식은 四相의 부정인 ‘惺惺寂寂’의 인식으로, 실천적 윤리관은 무집착의 행인 무주상보시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금강경』의 사상구조는 간디의 윤리적 개념인 ahiṃsā(보편적 사랑)가 그의 satyā(眞理)로부터 유래하는 것과 같은 內容構造를 갖고 있음도 알 수 있다.
『금강경』은 이러한 ‘반야바라밀’을 인식한 보살은 보시와 인욕의 정신을 가지고 보살도를 실천해야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혼돈의 와중에 살아가는 우리는 『금강경』을 수지․독송․서사․해설하는 것이 행복한 삶과 불국토실현의 첩경이 아니겠는가.
Ⅳ.맺음말
본문에서 고찰 한 바와 같이 이익과 손해의 외적가치가 우선하는 현대사회에서는 가치의 사회적 실천이 어렵다.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는『금강경』에 나타난 보살의 인식과 실천이 사회적 가치가 되도록 하기 위한 패러다임의 정립이 중요하다. 논자는 그 대안의 실천방안을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정리하고자 한다.
첫째, 우리는 현대사회의 ‘도구화된 지성적 자아관((homo faber)’의 사조에서 相依相關的‘보살(菩薩)의 자아관’으로 갖는 사고의 습관을 기르자.
둘째, 우리는 진리(satya, pratītyasamutpāda)가 자기의 참 생명근원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진리를 자기 생명처럼 존중할 줄 아는 습관을 기르자.
셋째, 우리는 스스로 자기의 삶과 역사에 주인과 주체라는 것을 자각하고 찰라찰라 자기의 내면세계의 질적 향상에 최선을 다하는 습관을 기르자.
넷째, 우리는 항상 진리의 삶을 실천하기 위해서 자기의 ‘소의경전(所依經典)’을 매일 수지· 독송·사경하는 습관을 기르자.
다섯째, 우리는 『금강경』에 나타난 보살의 인식과 실천의 이념이 ‘無相’으로부터 ‘無住相布施’가 나타난 것과 같이 ‘佛性生命’의 인식에서 ‘萬有一體觀’으로 나타난 同體大悲의 정신을 오늘의 현대사회에 정착시키기 위하여 그 이념을 각 분야에서 보편화 ․ 대중화 ․ 세계화 하는데 선봉이 되자.
〔주요어 : 공작인적 인간관, 보살의 자아관, 반야바라밀, 보살마하살, 무상(無相), 무주상보시〕
참고문헌
『金剛般若波羅蜜經』第1卷, 鳩摩羅什譯, 大正藏(T 8).
『金剛般若波羅蜜經五家解說誼』己和, 韓國佛敎全書(H 7)
『大般若波羅蜜多經』第45 - 49券, 大正藏(T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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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he Reinterpretation of the Diamond Sūtra in the 21st Century
by S. K. Kim
Deptt. of Indian Philosophy
Dongguk University
During the last few decades there have been enormous developments in science and technology which have practically changed the face of the earth. But in spite of the great achievements in science and technology, we find that there prevails a certain chaos and confusion at all levels ― individual, social, moral, religious, political, national and international. We find people going from bad to worse everyday. There is confusion and anarchy at all levels of human existence.
In the face of these circumstances the need of the hour is the spiritual regeneration of human society. There is no doubt that the ethical ideals laid down by Indian sages thousands years ago are universal standards that can be followed at all times, and are a lasting cure for evils which have crept into modern society. This is true because these ideals were never regarded as mere theories of morality, but as modes of spiritual life by adopting which the individual and society could develop in a reconcilable manner. This need can be met only when the Diamond Sūtra's recognition and practice as a Principle of Reconciliation is carried out.
The title, Vajracchedik? Prajn?p?ramit?, is usual, following Max Muller, to render Vajracchedik? Sūtra as “Diamond Sutra”. This Sūtra is the most primitive and fundamental of all those dealing with the idea of Emptiness which developed out of the causation theory in Primitive Buddhism.
Arranged as a dialogue between Subhūti and the Buddha, the Sūtra is confined to a few topics only. The first conception in the Diamond Sūtra is that of the Bodhisattva. In Hīnayāna the followers of the Buddha were taught to become not Boddhisattvas but Arhats, but the Mah?y?nists wanted to make every being like Śakyamuni; they wanted to remove all the barriers that were supposed to lie between Buddhahood and common humanity.
The great difference between the Arhat and the Bodhisattva is that the former is intend upon his own enlightenment and liberation, while the Bodhisattva wishes to help all creatures and bring them to full enlightenment. In order to do this, although qualified for Nirv?ṇa, he voluntarily renounces it in order to remain in the world to help all creatures, men and animals. The Diamond Sūtra gives a fine description of the mentality of a Bodhisattva:
The Lord said: Here, Subhuti, someone who has set out in the vehicle of a Bodhisattva should produce a thought in this manner: ‘As many beings as there are in the universe of beings, comprehended under the term “beings” ― egg-born, born from a womb, moisture-born, or miraculously born; with or without form; with perception, without perception, and with neither perception nor non-perception, ― as far as any conceivable form of beings is conceived: all these I must lead to Nirvana, into that Realm of Nirvana which leaves nothing behind. And yet, although innumerable beings have thus been led to Nirvana’no being at all has been led to Nirvāṇa.' And why? If in a Bodhisattva the notion of a ‘being’should take place, he could not be called a ‘Bodhi-being’. ‘And why? He is not to be called a Bodhi-being, in whom the notion of a self or of a being should take place, or the notion of a living soul or of a person.’
We shall now present the major difference between the Hīnay?na and the Mah?y?na. Hīnayāna has often been criticized by Mahāyāna for its narrow conception of the Arhat as one who seeks Nirvāṇa for himself without any concern for his followmen. Such a single-minded concern of the Arhat for his own salvation, no matter how sublime and elevated it may be, is regarded by Mahāyāna as selfish, ignoble, unworthy, falling short of the ideal of the liberated man as one of both enlightenment and unbounded compassion (mahākaruṇa) for all sentient beings. Thus Mahāyāna replaces the concept of Arhat by that of the Bodhisattva.
As to the Arhat, the Mahāyānists maintained that he had not completely shaken off all attachment to ‘I’and ‘mine’. He set out to obtain Nirvāṇa for himself, and he won Nirvāṇa for himself, but others were left out of it. In this way, the Arhat could be said to make a difference between himself and others, and thereby to retain, by implication, some notion of himself as different from others ― thus showing his inability to realize the truth of Not-self to the full.
The Bodhisattva would be a man who does not only set himself free, but who is also skilful in devising means for bringing out and maturing the latent seeds of enlightenment in others. The innovation of the Diamond Sūtra is that it elaborated this idea into an ideal valid for all.
Key words : prajn?p?ramit?, anātman, animitta, boddhisattva-mahāsattva, apratiṣṭhitaṃ cittam, praṇidh?na, apratiṣṭhito dāna.
[출처] 『금강경』의 현대적 재해석|작성자 만남 창조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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