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벳 불교

파드마삼바바

수선님 2021. 2. 12. 14:05

▲ 전(傳) 왕유, ‘복생수경도’, 중국 당, 비단에 연한 색, 25.5×45.5cm, 오사카 시립미술관.

“들어라! 그대는 이제 길을 찾아야 하는 시점에 도달했다. 그대는 이제 막 호흡이 멈추었고 근원의 눈부신 빛을 보기 시작했다. 그대가 살아있을 때 스승에게서 배웠듯이 이것은 죽음의 첫 번째 단계이다. 이 빛은 실재 그 자체이며 허공과 같아서 어떤 꾸밈도 없다. 이것은 그대의 근원적인 마음이며, 비어서 빛나는 그 마음은 결백하고 어떤 꾸밈도 없으며 중심도 경계도 없다. 이런 일이 발생할 때 그것의 실체를 인지하라! 그 속으로 들어가라! 그런 일이 발생할 때 나는 그대가 이해하도록 도울 것이다.”

 

인도서 태어난 파드마삼바바
‘티베트 사자의 서’ 완성 뒤
동굴 속에 숨기도록 했지만
발견돼 세상에 널리 알려져

복생은 분서갱유 발생하자
목숨 걸고 벽 속에 책 감춰


임종을 앞둔 사람의 눈이 감긴다. 잠시 후면 그의 영혼은 완전히 그의 몸을 빠져나갈 것이다. 그러나 어디로 갈 것인가. 내가 내 몸을 두고 떨어져야 하는 이 상황은 무엇이지? 임종자는 평생 자기 자신이라 확신했던 육체를 벗어나야 하는 두려움에 어리둥절해 있다. 이때 인도자의 목소리가 계속 들린다. 임종자의 두려움을 진정시켜주고 용기를 북돋워주는 목소리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길을 잃은 임종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두려움은 두려움의 실체를 직시할 때 사라진다. 모두가 마음의 작용이다. 인도자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같은 말을 계속 되풀이해서 들려준다. 행여 무의식에 빠진 임종자가 자신의 목소리를 듣지 못할까 염려되는 것처럼. 인도자는 임종자의 호흡이 멎기 직전에 그를 오른쪽으로 돌려 눕혀 잠자는 사자(獅子) 자세가 되게 한다. 임종자의 거친 호흡이 멎고 미세한 호흡이 멎을 때까지 인도자의 가르침은 계속된다. ‘티베트 사자의 서’는 이렇게 시작된다.

‘티베트 사자의 서’는 파드마삼바바가 쓴 책이다. 육체를 떠난 영혼이 인도자의 안내를 듣고 해탈하는 방법을 적은 책이다. 파드마삼바바가 부처님이 설법한 당시를 기초로 해서 밀교적으로 구술한 내용을 요기니 예세 초걀이 기록한 책이다. 그는 사자(死者)의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을 정도로 수행력이 뛰어났다. 석가모니부처님의 가르침을 펴기 위해 이 세상에 다시 온 사람으로 기록될 정도였다. 파드마삼바바는 구술을 끝낸 후 그 책을 동굴 속에서 숨기게 했다. 그 신비의 경전을 이해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파드마삼바바는 8세기경 인도에서 태어났다. 그는 연꽃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연화생(蓮華生)이라고도 부른다. 그는 인도 불교학의 중심지인 날란다에서 불교를 배운 후 송첸캄포왕의 초청으로 티베트로 건너갔다. 그는 티베트에서 수도원건축을 방해하던 마귀들을 쫓아내고 수도원은 완성시켰다. 그는 티베트뿐만 아니라 부탄 등에도 불교를 전해주었다. 인도 사람인 그를 티베트 불교에서 언급한 이유다. 달마대사를 인도가 아닌 중국 선불교를 시작할 때 언급하는 이유와 같다. 달마대사가 중국으로 건너가 선종의 씨앗을 뿌렸다면 파드마삼바바는 티베트인들에게 밀교의 씨앗을 뿌렸다. 두 사람이 불교를 전해준 경로는 다르지만 가르침의 내용은 비슷하다. 즉 살아있는 어떤 것도 개별화된 실체를 갖지 않으며 오직 마음만이 실재한다는 가르침이었다.

그의 예언대로 ‘티베트 사자의 서’는 카르마 링파에 의해 14세기에 티베트 북부지방의 한 동굴에서 처음 발굴되었다. ‘티베트 해탈의 서’와 함께였다. 그러나 이 책은 오랫동안 인접 국가를 떠돌다 20세기에 이르러 인도 서벵갈 다르질링에 있는 부티아 바스티 사원에서 재발견되었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종교학 교수이며 티베트 불교 연구자인 에반스 웬츠에 의해서였다. 부티아 바스티 사원은 파드마삼바바가 창시한 카큐파종(宗)의 사원이었다. 에반스 웬츠는 각 종파들을 찾아다니며 필사본과 목판본을 찾아 비교 검토하는 작업을 계속했다. 이로써 오랫동안 그 실체가 드러나지 않던 ‘티베트 사자의 서’는 에반스 웬츠에 의해 발견된 후 심리학의 거장 칼 구스타프 융의 서문과 함께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수행자인가. 환자인가. 깡마른 체구의 노인이 탁자에 팔을 기대고 앉아 두루마리를 보고 있다. 손으로 짚어가며 일일이 글자를 확인하는 모습이 깊은 사연이 있는 듯하다. 신체에 비해 유난히 커 보이는 머리는 들고 있기조차 힘들어 보인다. 주름진 살갗이 가슴과 팔과 다리를 겨우 덮고 있다. 여생이 얼마 남지 않는 노인이다. 몸은 비록 메마르고 볼품없지만 두루마리를 향한 눈빛은 더 없이 만족스러워 보인다. 고집스런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번진다. 자신의 소임을 다했으니 노인의 삶은 충만하다.

왕유(王維, 701~761)가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 이 그림은 제목이 ‘복생수경도(伏生授經圖)’다. 복생이라는 인물이 경전을 가르치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복생(伏生)은 중국의 제남(濟南) 출신으로 이름이 승(勝), 자는 자천(子賤)이다. 그는 진(秦)나라 때의 유학자로 '상서(尙書)'에 정통했다. 시황제(始皇帝)의 분서갱유(焚書坑儒) 때 상서가 사라질 것을 염려하여 그 책을 목숨 걸고 벽 속에 감추었다. 그는 진이 멸망하고 한(漢)이 들어서자 비로소 벽속에서 상서를 꺼냈다. 90세가 넘은 나이에도 한(漢) 문제(文帝)의 명을 받아 제자들에게 상서를 가르쳤다. ‘복생수경도’는 그 장면을 그린 작품인데 그의 출신 지역을 지칭하여 ‘사제남복생도(寫濟南伏生圖)’라는 제목으로도 불린다. 제남의 복생을 그린 그림이라는 뜻이다. 그의 나이를 감안하면 그림 속 노인이 왜소하고 주름이 많은 것이 이해될 것이다. 노학자를 그린 선은 가늘고 일정하다. 특별한 변화 없이 단조롭고 수수하다. 화려하지는 않았으나 그만하면 충분했던 학자의 삶을 진정성 있게 전해주는 울림 있는 선이다.

노학자가 진리를 위해 헌신하는 모습을 그린 ‘복생수경도’는 한나라 때부터 그림의 소재로 등장한다. 사천성(四川省)에서 출토된 한나라 때의 화상전(畵象塼)에는 여러 제자들을 앞에 두고 강의하는 복생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명(明)나라 때의 두근(杜菫,1368~1644)도 같은 제목의 그림을 남겼다.

복생과 파드마삼바바의 삶이 그러하듯 인류의 정신세계가 압축된 가르침을 지키고 전해주는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가르침을 행하는 일 못지않게 중요하다. 복생이 그렇고 파드마삼바바가 그렇다. 아무리 위대한 가르침이라 해도 그것을 지키고 전해주는 사람이 없다면 그 가르침은 당대에 끝난다. 인류의 발전은 기대할 수 없다. 숱한 고난과 역경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해준 구법승과 역경승 그리고 전법승들을 존경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무명을 밝힌 부처님의 가르침(燈)을 전해준 전등(傳燈)의 역사는 실로 눈물겹다. 숭고하고 뭉클하다. 캄캄한 우리 인생에 가르침의 빛(燈)을 밝혀준 전달자가 없었다면 우리는 현재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진짜 캄캄했을 것이다. 그렇게 귀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렇게 고생해서 전해준 진리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한번쯤 반성하고 되돌아볼 일이다. 고려청자와 조선백자를 개밥그릇으로 쓰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다.

파드마삼바바는 부처님으로부터 생사해탈의 법을 경전화해 세상에 알리라는 명을 받은 사람이었다. 그는 죽음을 앞둔 사람의 공포를 없애주기 위해 ‘티베트 사자의 서’를 구술함으로써 자신의 소임에 충실했다. 그러나 이 책은 단지 사자(死者)만을 위한 책이 아니다. 생자(生者)들을 위한 필독서다. 생과 사는 하나다. 삶과 죽음은 연장선상에 있다. 생과 사는 우리가 만들어낸 환영이고 무의식세계가 빚어낸 환상에 불과하다. 그 환영과 환상이 너무나 깊고 강해 죽어서 몸을 빠져나가는 순간 우리가 끝난다고 생각하고 두려워한다. 이 두려움은 살아있을 때의 자아(自我)만이 확실한 자기라고 믿는 데서 발생한다. 오랫동안 익혀왔던 나(我)에게 애착이 생겨 육체라는 굴레를 벗어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간 몸(中有)이 생기는 과보를 받는다. 그러나 나라고 생각하는 자아는 본래가 없는 것이다. 오직 무아(無我)만이 있을 뿐이다. 무아는 자아가 존재한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가르침을 한 번 듣고 바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것이 살아서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 이유다. 우리의 삶 자체가 죽음을 준비할 수 있는 최고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다. 언제 어떻게 우리를 덮칠지 아무도 모른다. 어쩌다 운 좋게 순조로운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면 ‘티베트 사자의 서’에 적힌 것처럼 우리 영혼은 뛰어난 인도자의 가르침에 따라 윤회에 들지 않고 바로 해탈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찌 알겠는가? 그때와 그 시간을. 이것이 우리가 ‘티베트 사자의 서’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다. 아니 평소에 마음공부를 꼭 해야 되는 이유다. 살아있을 때 제대로 공부하고 준비한 수행자라면 죽음을 만났을 때 굳이 인도자의 가르침이 없어도 해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정육 sixgardn@hanmail.net

 

 

 

 

 

 

 

 

 

[출처] 파드마삼바바|작성자 임기영불교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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