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서 대부분의 교리는 수행과의 상관성을 지니면서 사용되고 있다. 재가수행자의 수행법은 형식과 방법론에서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본질적인 문제에서는 동일한 지향점을 향하고 있다. 승가의 전통이 수행 공동체의 형성과 전개에 있다면, 재가의 경우는 세속 생활의 영위와 함께 자신의 조건에 맞는 수행을 해 왔다.
우리나라 불교에서는 보살의 실천행이 중시되어 왔다. 생사의 고해를 건너서 열반의 세계에 이르고자 한 실천수행법은 육바라밀로 보시(布施)·지계(持戒)·인욕(忍辱)·정진(精進)·선정(禪定)·반야(般若) 바라밀(波羅蜜)이다. 초기불교와 달리 대승불교에서는 육바라밀이라는 수행법이 중시되었다. 육바라밀의 수행법에서 보시바라밀이 제일 먼저 언급되는 이유가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상보적인 관계로 삶을 영위해야 한다는 대승불교의 정신이 저변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보시(布施)바라밀은 재시(財施)·법시(法施)·무외시(無畏施)로 나누어진다. 우리나라 불교의 재가수행자들이 가장 보편적으로 많이 행한 수행이 ‘재시(財施)’와 ‘칭명염불수행’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두 가지는 불교가 전래된 시기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일반 재가불자들이 보편적으로 행하기 쉬운 수행이라고 본다.
신라시대 불교 수행자들의 상당수가 비승비속의 신분이며, 노힐부득(努肹夫得)과 달달박박(怛怛朴朴), 욱면비염불서승(郁面婢念佛西昇), 광덕(廣德)과 엄장(嚴莊), 원효(元曉) 등이 있다. 이들은 모두 재가자로서 수행하다가 서방정토로 가거나 부처가 된 이들로 묘사된다.
통일신라시대에는 불교적 소양과 동시에 유학적 소양을 함께 갖춘 관료 및 지식인으로서 불교 수행에 몰두하거나 대중교화에 헌신했던 김생(金生, 711~791), 최치원(857~904 ?) 등의 인물이 있다.
고려시대 재가불자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이자현과 이규보가 있다. 고려가 불교국가인 만큼 다수의 재가수행자들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문헌에 나타난 인물로는 최응(崔凝), 최항(崔沆), 이오(李䫨), 윤언희(尹彦頤), 최유청(崔惟淸), 이장용(李藏用), 정선(鄭僐), 한강(韓康), 권단(權㫜), 채홍철(蔡弘哲), 최우(崔瑀), 민책(閔漬), 조운걸(趙云仡) 등이 재가불자로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는 억불숭유의 영향으로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불교의 세력이 약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 대표적인 인물로 김수온(金守溫, 1410∼1481)이 있으며, 김시습(金時習, 1435~1493), 허균(許筠, 1569~1618), 김정희(金正喜, 786~1856), 김대현(金大鉉, ?~1870), 김택영(金澤榮, 1850~1927), 황현(黃玹, 1855~1910), 강위(姜瑋, 1820~1884), 유홍기(劉鴻基, 1831
~?) 등이 있다.
근대를 맞이하는 상황에서 불교계도 큰 변화를 겪게 되는데, 이 가운데 재가자의 불교 활동에서 엘리트 지식인들의 불교계 활동과 재가승의 등장이다. 대표적인 인물로 이능화(1869~1943)와 환속하여 재가 불교사상가로 활동한 한용운(1879~1944)이 언급된다. 그리고 장지연(1864~1921), 최남선(1890~1957), 권상로(1879~1965)가 있다.
출가자들이 지향한 수행의 목적이 깨달음을 통한 궁극에 있다면, 재가자들의 수행 목적은 공덕을 쌓아서 복을 구하는 데 치중해 있었다. 물론 거사(居士)라고 불리는 특정 그룹의 경우는 두 가지를 모두 지향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그래서 재가자들의 수행은 출가자들의 수행보다 다양한 방법에 의해 진행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재가수행자들은 수행의 다양성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근거를 《법화경》에서 찾았다고 보인다. 꽃 공양, 등 공양, 사경, 칭명염불, 기도 등과 같은 신행행위를 통해서 복을 구함과 동시에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재가수행의 범위에서 ‘재가’를 비승비속의 범위까지 확대해서 정하고, ‘수행’의 범위를 염불, 주력, 절, 독경, 간경, 위빠사나, 참선, 칭명염불, 기도, 보시바라밀 등으로 확대해서 보고자 한다. 통일신라 이전의 경우 《삼국유사》와 같은 사서를 통해 전해오는 기록이 있다. 고려의 경우는 국교가 불교이므로 국민의 상당수가 칭명염불이나 보시의 행위를 자연스럽게 진행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조선의 경우 억불의 상황에서 보편적으로 불교의례나 수행과 관련된 일들에 사회일반이 드러내고 함께하기에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조선시대 재가불자의 수행은 문헌에 나타난 대표적인 인물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근현대의 경우는 신구학문을 겸비하고 독실한 불교신앙을 지닌 인물들이 등장한다. 한편 칭명염불, 기도, 안거 등의 신행활동을 하면서 기존에 사회에 전면적으로 드러나지 못했던 여성 불자들의 등장과 활동이 두드러진다.
용수는 재가(在家)와 출가(出家)의 길에 대해 〈십주비바사론(十住毘婆沙論)〉에서 재가자와 출가자가 상호 간에 재시(財施)와 법시(法施)를 통해서 공존해야 함을 말했다. 우리나라의 불교 역사에서 재가자의 수행과 출가자의 수행은 서로 상보적인 관계 속에서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승가는 재가의 보시를 통해서, 재가는 승가의 법시를 통해서 상보적으로 진행되었다. 이 가운데 재가불자로 지내다가 승려가 된 사람도 있으며, 승려로 지내다가 재가로 환속한 경우도 있으며, 비승비속의 신분으로 삶을 진행한 사람들도 있다.
수행의 범위와 종류에 대해서는 문헌자료의 부족이나 필자의 한계로 인해 다양한 종류의 수행을 시대별로 정리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수행의 범위를 보시 가운데 재시나 법시 그리고 칭명염불, 기도 등을 중심으로 언급하고자 한다.
2.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
삼국시대 신라는 이차돈과 법흥왕이 대표적이라고 볼 수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법흥왕이 즉위한 14년(527)에 하급 신하인 이차돈(異次頓)이 불법을 위해 몸을 바쳤다.(《삼국유사》 〈興法〉 제3)”라고 하였다. 법흥왕과 이차돈의 대화를 통해 보시행(布施行)에 대한 신념과 포덕의 의지를 확인할 수 있다.
법흥대왕(法興大王)이 자극전(紫極殿)에서 등극하였을 때, 동방(扶桑)을 굽어 살피고 말하였다. “옛날에 한(漢)나라 명제(明帝)가 꿈에 감응하여 불법이 동쪽으로부터 흘러들어 왔다. 과인이 제위에 오르면 백성을 위해 복을 빌고 죄를 없애는 장소를 만들고자 한다.” 이에 조정 신하들은 그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한 채 오직 나라를 다스리는 대의만을 지키고 절을 세우려는 신성한 생각을 따르지 않았다. 대왕이 탄식하며 말하였다.
왕: “아아! 과인이 부덕하여 대업을 크게 이어받아 위로는 음양의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아래로는 뭇 백성들의 즐거움이 없어, 정무를 보는 틈틈이 석가의 교화(釋風)에 마음을 두고 있으나 누구와 더불어 일을 하리오? …… 살을 베이고 몸이 고문당해도 새 한 마리를 살리려 하였고, 피 뿌리며 스스로 목숨을 끊어도 짐승 일곱 마리를 불쌍하게 여겨야 할 것이다. 과인의 뜻은 백성들을 이롭게 하고자 함인데 어찌 죄 없는 자를 죽이겠는가?”
사인(이차돈): “버리기 어려운 모든 것들 중에 목숨보다 더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소신이 저녁에 죽어 불교가 아침에 행해진다면, 부처님의 해(佛日)는 다시 중천에 떠오르고 성스런 임금께서는 영원토록 편안할 것입니다.”
왕: “네가 그와 같이 한다면 가히 보살(大士)의 행동이라 할 수 있다.”
사인의 아내가 이를 슬퍼하여 좋은 터를 점쳐서 난야(蘭若)를 짓고 이름을 자추사(刺楸寺)라 하였다. 따라서 집집이 이 절에서 예를 올리면 반드시 대대로 영화를 누리고, 사람마다 도를 행하면 불교의 이로움을 깨닫게 되었다.
위에 언급된 이차돈의 순교와 관련된 내용을 보면 불교를 포덕하려는 이유에 대해 “백성을 위해 복을 빌고 죄를 없애는 장소를 만들고자 한다.” “저녁에 죽어 아침에 불교가 편안해진다면 부처님의 해가 중천에 떠오를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차돈의 행위에 대해 법흥왕은 “가히 보살의 행동이라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장소를 통한 불교적 의례행위에 의해서 복을 구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백제는 법왕과 무왕이 대표적인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법왕은 기미년(599)에 즉위하여, 이해 겨울 조서를 내려 살생을 금하고 민가에서 기르는 매 같은 새들을 놓아주게 하고 또 고기 잡는 도구를 불태워 모두 금지했다. 이듬해 경신년에는 30명에게 승려가 되는 것을 허락하고, 당시의 수도 사비성에 왕흥사를 세우게 하였지만 겨우 터를 닦고는 죽었다. 무왕(武王)은 왕위를 계승하여 선왕의 사업을 이어받아 몇 기(紀: 1기는 12년)를 지나 완성하고 절 이름도 역시 미륵사라 하였다(《삼국유사》 〈興法〉 제3). 그리고 아신왕 원년(392)에는 “불법을 숭상해서 복을 구하라”는 소칙을 내렸고 백성들에게 불교 신앙을 대대적으로 권유했다.
고구려에 대해서는 〈고구려본기〉에 이렇게 말하였다. “ ……이듬해 고구려에서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불교와 도교를 배울 것을 청하니, 당나라 황제가 허락하였다. 보장왕이 즉위할 때도 삼교(三敎)를 모두 일으키고자 하였다. 당시 총애받던 재상 연개소문이 왕을 설득하여 말하였다. ‘지금 유교와 불교는 모두 강성하지만 도교는 왕성하지 못하니, 특별히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도교를 구해야 합니다.’”(《삼국유사》 〈興法〉 제3)
《삼국유사》 〈탑상편〉에는 유일하게 가야불교에 해당하는 금관성의 파사석탑이 언급되고 있다. 그리고 신라의 여인 보개(寶開)가 민장사(敏藏寺)의 관세음보살에게 기도를 드려서 아들이 살아 돌아온 내용, 남백월의 두 성인인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이 미륵부처와 미타부처가 된 이야기, 경덕왕 대에 희명(希明)이라는 여인이 눈먼 아이를 위해 분황사의 천수대비에 노래를 지어 빌어서 눈 먼 아이의 눈을 뜨게 한 이야기가 있다. 노래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무릎 꿇으며
두 손바닥을 모아
천수관음 앞에
축원의 말씀을 올리나이다.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을 가졌으니
하나를 내놓아 하나를 덜기를
눈이 둘 다 없는 저에게
하나만 주어 고쳐 주시옵소서.
아아, 저에게 끼쳐 주시면
그 자비심 얼마나 크시나이까.
대나무 말 타고 파피리 불며 거리에서 놀더니
하루아침에 푸른 두 눈이 멀었네.
보살님이 자비로운 눈을 돌려주지 않았다면
헛되이 버들 꽃을 보냄이 몇 번의 봄 제사나 될까.
그리고 정신대왕(淨神大王)의 태자 보천(寶川), 효명(孝明) 두 형제가 오대산에서 수행한 이야기, 신라 정신왕의 태자 보질도가 동생 효명 태자와 함께 오대산에서 수행한 이야기를 통해서 이들이 예불을 드렸으며 관음진신을 만나고 《수구다라니경》을 외우고 문수보살에게 공양하는 등의 수행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중아찬 김지성이 돌아가신 부모를 위해 불사를 하고 수행한 이야기, 계화왕후(桂花王后)가 소성대왕이 죽자 슬퍼하여 명복을 빌기로 마음을 먹고 기도한 이야기 등을 통해 망자에 대해 명복을 비는 행위와 재시를 통해 넓은 의미의 수행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보시와 관련된 내용으로는 오대산 월정사의 다섯 성중과 신효 거사의 출가 동기 이야기, 신라 태대각간 최유덕의 사찰 중건 이야기 등이 있다.
《삼국유사》 〈신주편〉에는 재상 김양도가 어린 시절 밀본법사의 법력으로 귀신을 물리치고 불법을 독실하게 믿게 된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삼국유사》 〈감통편〉에는 여종 욱면이 염불 수행을 하여 극락에 오른 이야기, 문무왕 대에 광덕(廣德)과 엄장(嚴莊)이 수행해서 극락으로 가게 된 이야기가 있다. 《삼국유사》 〈효선편〉에서는 김대성이 죽은 곰을 위해 장수사(長壽寺)라고 하는 사찰을 지었으며, 이생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佛國寺)를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불사(石佛寺)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김대성의 이야기는 재시(財施)의 보편적인 예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3. 고려시대
고려시대의 불교수행자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다. 불교적 소양을 갖추었다고 알려진 지식인들 중 불교수행을 했다고 유추할 수 있는 내용을 여러 문헌을 통해서 알 수 있다. 한편으로 일반적인 민중들의 불교에 관련된 내용은 설화집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불교적 소양을 갖춘 지식인의 경우는 보통 거사(居士)라는 명칭으로 불렸는데 이들 중 대표적인 사람이 이자현과 이규보이다.
이자현(李資玄, 1061~1125)의 불교 사상은 《동문선》 권 제64에 실린 〈청평산 문수원기〉와 《고려사》 권 제95, 진정천책(眞靜天頙, 1207~?)의 저서라고 알려진 〈선문보장록(禪門寶藏錄)〉, 고려 중기의 문신 이인로(李仁老)의 《파한집》에서 언급된다. 《동문선》에 이자현이 ‘불교의 이치를 깊게 연구하였고 특히 참선을 좋아했다.’ ‘《설봉어록》을 읽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했다.’ ‘입정하였다가 7일 만에 나오기도 하였다.’는 등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고려사》에 왕이 이자현에게 사람의 천성을 수양하는 요결을 질문했을 때 “탐욕을 버리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심요(心要)》라는 책을 저술하여 왕에게 바쳤다고 한다. 《선문보장록》과 《파한집》에서는 ‘선 수행’을 했음을 알 수 있는 내용이 있다.
이규보(李奎報, 1168~1241)는 이자현과 마찬가지로 《수능엄경》을 중심으로 개인적 수행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규보의 《수능엄경》에 대한 이해는 《동국이상국집》 〈와송능엄유작이수(臥誦楞嚴有作二首)〉에 잘 드러난다.
늙어가니 경서를 손에서 놓고 능엄경을 익히고자 하네
밤에는 누워서도 외울 수 있으니 이불 안이 도량이네
밤에도 잘 외워짐을 믿고 값진 시간 헛되이 보내네
연꽃은 선연히 보이고 친엽은 꿈속에서도 환하네
위의 시를 통해서 이규보가 말년에 능엄경에 심취했으며, 《동국이상국집》 〈유걸퇴심유작(有乞退心有作)〉의 시(詩)에 나타난 “무엇으로 수양을 할까 능엄경을 외리라.”의 내용을 통해서도 이규보가 《능엄경》을 통해서 수행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다수의 시(詩)를 통해서 이규보의 불교신앙에 대한 내용을 알 수 있다. 이 가운데 〈산석영정중월이수(山夕詠井中月二首)〉를 통해서 공(空)과 연기(緣起)의 문제를 노래하였다.
이끼 덮인 바위틈 맑은 우물에
방금 떠오른 예쁜 달이 또렷이 비쳐 있다.
물길은 항아리에는 반쪽 그림자만 떠 있으니
둥근 달을 반쪽만 건져 가는 것은 아닐는지
산승이 달빛을 탐내어
물 한 동이에 달을 함께 길었네
절에 가서야 알게 되겠지
물 쏟아내면 달도 따라서 없어지는 줄을
이자현과 이규보는 불교사상의 영향을 받은 문학 작품들을 남겼으며, 수행을 겸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두 사람을 비롯한 거사라고 불리는 고려 문인들이 문학작품을 통해 불교관을 드러내었으며 불교에 대한 사상적 관심만을 가졌는지, 아니면 이와 함께 수행을 겸했는지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수행의 범위를 넓게 본다면 이들 역시 재가불자로서 수행을 겸한 것으로 본다. 이 외에도 고려시대의 거사들은 최응(崔凝), 최항(崔沆), 이오(李䫨). 윤언희(尹彦頤), 최유청(崔惟淸), 최우(崔瑀), 민책(閔漬), 이장용(李藏用), 정선(鄭僐), 한강(韓康), 권단(權㫜), 채홍철(蔡弘哲), 조운걸(趙云仡) 등 여러 명이 언급된다.
이 논문을 통해서 이들의 불교 사상과 재가수행의 내용을 면면히 언급하지는 못하지만 이들이 고려시대 재가불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보인다. 권상로는 이들이 불법을 좋아하여 소요자락, 독송, 불탑 주조를 했다고 묘사하고 있다.(《불교진흥회월보》 5호에 발표한 〈조선불교와 제대거사(諸大居士)〉) 이들 외에 일반 재가자들의 불교신앙의 모습은 이규보의 《왕륜사장육금상영험수습기》에 “사람들에게 시주하기를 권하니 위에서부터 높은 벼슬아치와 선비들과 서인에 이르기까지 시주하지 않는 이가 없어서 재물이 산같이 쌓였다. 판방리에 산직으로 있는 장관(將官)이 있는데, 빈궁하여 재물은 시주할 수 없고 다만 13세쯤 된 딸이 있었다. 이 딸을 바쳐서 심부름이나 시켜주기를 원하였다.”라는 것은 일반인들의 불교에 대한 신앙심을 나타낸다.
고려시대의 재가자들이 특정한 종류의 수행을 했다고 볼 수 있는 기록들은 찾기 어렵지만, 시주의 공덕을 한 정도가 《왕륜사장육금상영험수습기》에 보이는 정도라면 시주의 분위기가 사회 전반에 걸쳐서 진행되었을 것이고 칭명염불의 수행도 겸했을 것이라고 유추할 수 있다.
4. 조선시대
조선시대는 억불숭유의 영향으로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불교의 세력이 약해졌다. 정도전과 권근을 필두로 한 조선 초기 불교비판 유학자들에 의한 불교탄압으로 이후 조선의 국교인 유교를 중심으로 전개된 사회 문화 전반의 변화와 더불어 불교문화의 보편적 현상은 힘든 상황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조선시대의 재가불자 수행자로서 김수온(金守溫, 1410~1481), 김시습(金時習, 1435~1493), 허균(許筠, 1569~1618), 김정희(金正喜, 1786~1856), 강위(姜瑋, 1820~1884), 유홍기(劉鴻基, 1831~1884?), 이종원(李淙遠, 1864~ ?), 방덕권(方德權) 등이, 그리고 근세의 인물로 김대현(金大鉉)이 있다.
조선 전기에 불교가 위축되고 있던 상황에서 고승으로 알려진 승려 신미(信眉)의 동생인 김수온은 세조의 명을 받고 《석보상절(釋譜詳節)》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 《월인석보(月印釋譜)》 등을 집필 편찬하였으며, 사찰에 수많은 기문(記文)들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김수온의 불교에 대한 신앙심은 모친에 대한 ‘애도시(哀悼詩)’에 잘 나타난다.
가문의 번창을 알고자 한다면
자식들 가는 길의 현명함을 보아야만 할 것이네
세 아들은 나란히 郡守로 나아가고
한 아들은 佛僧이 되어 홀로 현묘한 이치를 깨달았구나.
사람마다 다투어 함께 말하노니
‘세상의 복 다 갖추었네’ 하는 도다.
김수온은 일상생활에서도 “아침과 저녁을 나물, 소금으로 먹었다(《成宗實錄》), 집이 한소(寒素)하여 대신(大臣)답지 않고 승려와 같은 생활을 하였다(《世祖實錄》), 김수온의 일상생활이 불교신앙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이로 인해 세조는 때때로 물품을 보내 주었다(《成宗實錄》).” 등의 내용을 통해 생활 속에서 불교적 수행을 겸했음을 알 수 있다.
김수온의 불교에 대한 평가는 유교 경전과의 비교를 통해서 보인다. “만일 불경을 읽어서 그 뜻을 얻게 되면, 《대학》 《중용》은 찌꺼기에 불과할 것이다.”(《世宗實錄 卷126》) 대군들에게 “《대학》·《중용》은 《법화경》 《화엄경》에 미치지 못합니다.(《世宗實錄 卷121》)” “비록 유학을 업으로 과거에 급제하였지만, 성품이 불서를 지독하게 좋아하였다. 그리하여 늘 스스로 말하기를 ‘《능엄경》이 《중용》보다 훨씬 낫다.’고 하였다.(《文宗實錄 卷1》)”는 내용을 통해서 김수온의 불교사상과 신앙 형태가 대승불교에 가까운 것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염불신앙을 강조한 내용으로 “눈을 감고 꼿꼿하게 앉아서 종일 밤새 합장하고 경을 외고 염불을 하며 설법하여 조금도 부끄러워하는 빛이 없었다(《世宗實錄 卷121》).”고 전해진다. 그리고 김시습에게 보낸 답시(答詩)를 통해 김수온이 불교신앙을 바탕으로 한 수행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갈림길이 다르지만 마음을 수양할 뿐이라오
마음을 수양함을 다른 데서 찾고 있네.
일삼는 곳에서 홀연히 막힘이 없는 것이니
지친 지게미를 어찌해서 일일이 찾으리오.
김시습의 불교 신앙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지만,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사건 이후 출가한 적이 있으며 유교 도교와 함께 불교가 그의 사상 확립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는 29세 때 효령대군의 추천으로 《법화경》 언해사업에 참여했으며 원각사(圓覺寺) 낙성회에 참여했고, 《유금오록(遊金鰲錄)》 《십현담요해(十玄談要解)》 《대화엄일승법계도주병서(大華嚴一乘法界圖註幷序)》 《화엄석제(華嚴釋題)》 《묘법연화경별찬(妙法蓮華經別讚)》 《조동오위요해(曹洞五位要解)》 등을 저술한 일은 자주 거론되어 왔다. 그리고 김시습의 일대기와 더불어 남긴 시를 살펴보면 각지의 명찰들을 주유하고 산사에서 참선했으며 여러 스님과 교유했다는 내용이 전한다.
바람 잦아든 솔창은 고요하고
향내 스러진 선실은 한가롭네.
이생을 내 이미 끊어버렸나니
水雲 간에 깃들어 살리라.(《梅月堂集》 권9 〈晩意〉)
헛된 몸뚱이는 결국 멸하기 마련이며
단청도 오래되면 또한 희미해진다네.
無生이 본래 이와 같으니
속된 세상이야 말해 무엇할까.(《梅月堂集》 권9 〈遊王輪寺〉)
누가 알리요 아름다운 은둔의 삶을
이미 생멸의 마음을 잊었다네.(《梅月堂集》 권3 〈巖竇〉)
누군가 편안히 참선할 곳 묻는다면
흐르는 물 한 난간 기둥에 꽃 가득 피었다 하리.
(《梅月堂集》 권3 〈贈峻上人〉)
이 외에도 많은 시가 전해오고 있지만 김시습의 불교적 사유와 구도적 면모, 그리고 수행적 삶을 알 수 있다. 김시습의 생애는 단지 불교에만 국한된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지만 생멸을 초월한 무생(無生)의 실상을 향한 구도의 열정은 면면히 드러나고 있다.
허균은 스스로 불교를 신앙한다고 밝혀 백월거사(白月居士)로 불렸다. 삼척(三陟) 부사로 임명되었을 때는 불사(佛事)를 행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파직된 적도 있다. 허균이 행한 불사는 혼자서 예불을 올리고 염불한 것을 말한다.
포단 바친 불공으로 청정한 마음 지키고
스님의 법문으로 외로운 내 처지 위로되네.
경전 속의 부처님 가르침은 빛나고
범종 소리는 산초나무 숲까지 퍼져가네.
괴로움의 바다는 건너기가 어려운데
자비의 항해를 부르기도 쉽지가 않구나.
그냥 사리자 쫓고자 하니
극락정토에서 서로 맞이하겠다.(神光寺 《惺所覆瓿藁》 卷1)
벼슬살이 변변치 않아 가을도 저물어가고
스님 법문이 나를 붙잡아 밤 다 새려 하네.
서럽구나, 이내 몸 고해의 삶에 매이어
머리카락 희도록 말 발자국 벗어나지 못하네.
(題僧卷用西潭韻 《惺所覆瓿藁》 卷1)
김정희는 백파나 초의선사와 교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증답백파서(證答白坡書)〉를 통해 선불교에 대한 논의를 펼칠 정도로 불교에 조예가 깊었다. 그리고 김정희는 《열반경》을 초록하고 《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을 선장(禪藏)보다 뛰어나다고 했으며, 《금강경오가해》 《능엄경》 《능가경》 《유마경》 《관음경》 《화엄경》 《법화경》 등의 경전에 대해 거론한 것으로 볼 때 불교의 교학에 관심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경전사서의 공덕을 칭송하고 자신이 직접 《반야심경》을 사경(寫經)한 기록이 있다. 그리고 선 수행을 겸했다는 내용은 ‘선열에 나아간 묘(妙)가 있는데 묘제(妙諦)를 함께 할 사람이 없으니 함께 토론하고 싶다(《완당전집》 권5)’ ‘괴로움은 본래 지은 업(業)에 반연해서 나왔다 사라지곤 하므로 다만 그것에 얽매이지 않고 괴로움을 돌려 즐거움으로 삼는 것은 약간의 공부와 수련을 얻었기 때문이다(《완당전집》 권5).’라는 초의선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보인다. 이를 통해서 추사가 불경을 두루 섭렵했을 뿐만 아니라 염불, 사경, 선 수행을 겸했음을 알 수 있다. 김정희의 불교에 대한 관심과 조예는 〈수락산 절(水落山寺)〉 〈정게, 초의에게 주다(靜偈贈衣師)〉 〈서벽정 가을날(棲碧亭秋日)〉 〈관음각에서 연운 심설과 더불어 시선의 모임을 갖다(觀音閣 與硯雲沁雪 作詩禪會)〉 등의 시에서 잘 드러난다.
월창거사(月窓居士) 김대현은 《자학정전(字學正典)》 《술몽쇄언(述夢瑣言)》 《선학입문》을 남겼다. 그리고 구한말 김택영(金澤榮), 황현(黃玹)과 함께 3대 시인으로 불린 문인이며 학자이자 개화사상가인 강위, 개화파로서 갑신정변의 주도자 가운데 한 사람인 유홍기, 불교 신행을 열심히 한 사람으로 소개되고 있는 이종원, 방덕권(이능화 《조선불교통사》) 등이 있다. 이처럼 조선시대의 거사들은 불교계에 지대한 공헌을 한 기록이 없으며 개인적인 관심사와 수행에 치우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들은 재가불자로서 불교의 포교를 위해 노력했다는 점에서 개인적인 수행 못지않게 넓은 의미에서 보면 수행의 한 방편을 행했다고 볼 수 있다.
5. 근현대
근대를 맞이하는 상황에서 불교계도 큰 변화를 겪게 되는데, 20세기 초부터 한국불교계에는 재가 불교 지식인들의 활동이 두드러진다. 재가자의 불교 활동으로는 엘리트 지식인들의 불교계 활동과 재가승의 등장을 들 수 있다. 대표적인 인물로 이능화(1869~1943)와 환속하여 재가불교사상가로 활동한 한용운(1879~1944)이 언급된다. 그리고 일제 식민지 시대의 대표적인 계몽사상가인 장지연(1864~1921), 최남선(1890~1957), 불교학자인 권상로(1879~1965)가 있다.
이능화가 불교를 신앙하게 된 것은 학문적 관심사에만 국한된 것이기보다 독실한 신앙인으로서 근원적인 종교적 문제의식에서 시작되었으며 쌍장 선사와의 만남과 《원각경》에 대한 인연으로 불교에 심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능화가 특정한 수행을 했다는 기록은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독실한 신앙인으로서 종교적 실천이 곧 이능화의 수행 중 하나였다고 볼 수 있다.
한용운은 출가하기 전에는 유학을 공부하고 서당에서 훈장까지 하였다. 한용운은 기본적으로 스님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재가로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조선불교유신론〉에서 불교가 산간불교나 승려불교만이 아니라 대중불교가 되어야 한다고 했으며, 〈선과 인생〉에서 선사들만의 선이 아니라 대중 모두의 선이 되어야 한다고 하여 선(禪)을 대중화시켰으므로 만해 스님의 수행 역시 이를 근간으로 했을 것으로 보인다.
박재현은 근대기 불교계 여성으로 불교 활동을 했던 사람에 대해 조선불교 여자청년회의 주축이었던 우봉순, 김일엽, 김광호, 김난득, 박성옥 등을 꼽는다. 이들은 경성에서 여학교를 졸업했거나 일본 유학을 다녀와 여성운동에 나선 신여성들로서, 기존 여성 신도들의 종교생활이 불공을 하거나 불사에 참여하여 복을 비는 신앙생활에 머물러 있음을 안타까워하면서 계몽과 교육사업에 열을 올렸다고 한다.
이 외에도 이보현월(李普賢月), 김수곤(金水坤), 김덕성심, 보현심, 박정혜일, 김백련성, 어대자해, 박덕림, 황의돈, 임천월, 이상락화, 대각심, 무진행 등의 이름이 거론된다. 이들은 주로 화주 역할을 했으며 안거 수행도 함께 겸했던 사람들로서 상당히 깊은 불심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금전적 지원을 한 화주 외에도 부목(負木)이나 화대(火臺), 공사(供司)나 공양주 등의 직책으로 사찰과 선원을 직접 지원한 ‘외호’들도 수행을 겸했다고 볼 수 있다.
묵암 거사 현공 윤주일((尹柱逸, 1895~1969), 포광 김영수(金映遂, 1884~1967), 해원 황의돈(黃義敦, 1887~1964), 화엄학과 삼론연구의 대가인 현곡 김잉석(金芿石, 1900~1965), 효성 조명기(趙明基, 1905~1988), 뇌허 김동화(金東華, 1902~1980) 등은 불교학계에 헌신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들은 현대 한국불교학 연구의 초석을 마련한 인물들이다.
한국의 유마거사라고 불리는 백봉 김기추(金基秋, 1908~1985)는 《금강경》 등 여러 경전의 한글 작업과 재가자들이 생활선을 실천할 수 있는 거사선(居士禪)을 강조했다. 그리고 재가자에게 선수행을 가르친 종달 이희익(李喜益, 1905~1990)도 거사선의 거두이다. 월하 김달진(金達鎭, 1907~1989)은 운허 스님과 함께 한글대장경 완간의 기틀을 마련했다.
어현경은 승가를 외호한 사람들로 삼보학회, 삼보장학회,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등을 창립했고 군법사 제도시행에 결정적 계기를 제공한 인물인 덕산 이한상(李漢相, 1917~1984), 대원정사, 불교방송, 대한불교진흥원, 대원회, 대원사가 있게 한 장본인인 대원 장경호(張敬浩, 1899~1976)를 들고 있다.
근현대를 맞이하면서 학자이자 재가불교 수행자의 역할을 겸한 인물로 간과할 수 없는 사람들 중 대표적인 인물로 백성욱(白性郁, 1897~1981), 불연 이기영(李箕永, 1922~1996), 혜안 서경수(徐景洙, 1925~1986), 하정 안계현(安啓賢, 1927~1981), 미산 홍정식(洪庭植, 1918~1995), 소산 우정상(禹貞相, 1917~1966), 병고 고익진(高翊晉, 1934~1988), 법운 이종익(李鍾益, 1912~1991), 한길로 법사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신구학문을 겸비한 인물로 본인의 불교학의 소양을 갖춘 것은 물론이거니와 후진양성을 위해 그리고 개인적인 수행을 위해 열정적인 삶을 살다간 분들이다. 이 밖에도 이 글을 통해서 다 언급할 수는 없지만 많은 재가불자의 수행과 노고가 있었기에 오늘의 불교가 있었다고 본다.
6. 마치는 말
삼국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불교에서 재가불자의 수행에 대해 살펴보았다. 시대별로 재가불자 수행의 상황과 범위는 다양하게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출가와 재가가 협력적인 구조에서 상보적인 역할을 했는가 하면, 재가로 지내다가 출가로 바뀐 경우나 출가자에서 재가자로 환속한 경우가 있었다. 각기 다른 상황에도 불구하고 깨달음을 추구함과 공덕을 짓기 위해 보시를 했다는 점에서는 유사한 면이 있었다.
재가불자의 다양한 수행방식에서 재시(財施)와 칭명염불(稱名念佛), 그리고 기도는 가장 보편적인 일반 민중들의 수행 방법이었다. 법시(法施)는 적어도 거사(居士)로 불리는 지식인의 범주에 포함된 사람들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때에 따라서 안거를 행한 경우도 있으며, 원불교나 진각종과 같이 종단의 전체적인 상황이 재가 중심의 수행으로 전개된 경우도 있었다.
석가모니 재세 당시에 교단의 성립부터 승단의 외호 역할을 맡아서 죽림정사와 기원정사를 지어 공양한 빔비사라 왕과 수달타 장자 등이 재시(財施)의 대표적인 예이다. 유마거사와 방거사, 부설(浮雪) 거사는 사회생활과 수행을 병행하여 높은 경지에 도달했다고 믿어지는 대표적인 경우이다. 이러한 전통이 우리나라의 불교에서도 하나의 전통이 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재가불자 수행의 전통은 깨달음과 구복이라는 두 가지 목적을 지향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전통이 이어져서 1924년 불법연구회를 시작으로 산업기관에서 열심히 일하고 퇴근 후 불법공부와 함께 민족갱생 운동을 전개한 원불교는 초기의 과정에서는 재가불교의 성격을 지녔다. 1953년 ‘새불교 운동’을 전개한 진각종도 재가불교 운동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1960년대 이후의 재가불교 운동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달마회’ 사단법인 유형으로 ‘대한불교삼보회’ ‘우리는 선우’ 재단법인 유형으로 ‘대한불교진흥원’ 불교 바로 세우기 재가연대로 ‘참여불교재가연대’ 간경수행 단체로 ‘금강경독송회’ 참선수행 단체로 ‘보림회’ 간화선수행 단체로 ‘법기사’ 염불수행 단체로 ‘문사수법회’ 위빠사나수행 단체로 ‘호두마을’ 등에서 활동한 대부분의 재가불자는 각기 방법은 다른 불교수행을 했지만 궁극에 이르고자 하는 마음은 한결같은 것이다.
불교신행을 수행하는 사람들은 개인적 수행과 구복에 몰두하는 부류도 있겠지만 인권 문제, 환경, 사회복지, 포교를 비롯한 제반 사회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대승불교의 정신을 계승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승가와 재가의 상보적인 관계가 조화롭게 전개되고, 불교 정신을 토대로 한 다양한 프로그램의 설계 및 개발을 통해서 사회 일반이 불교정신을 종교적 틀이라는 제한된 생각에서 벗어나 보편적 삶의 가치관으로 여겼으면 한다. ■
장재진 / 동명대학교 불교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동국대, 동 대학원 인도철학과 졸업(석사·박사과정 수료). 한국해양대 박사(동아시아 문화와 종교 전공). 주요 논저로 〈《법화경》에 나타난 ‘공간, 장소, 방위’와 정토세계〉 등의 논문과 《근대 동아시아의 종교다원주의와 유토피아》 《문화콘텐츠의 이해》 《한문으로 살펴보는 동아세아의 사상과 문화》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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