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불교사(佛敎史)

수선님 2021. 7. 18.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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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사(佛敎史)

 

 

1. 인도불교사

2. 중국불교사

3. 한국불교사

4. 일본불교사

5. 티베트 불교사

6. 동남아불교사

7. 서양의 불교현황

 

 

 

 

1. 인도 불교사
                                                             김 경 동

 

 


목  차

 

1.도입

2.고대인도(붓다 탄생전의 사회)

3.원시 불교(붓다 입멸과 경전의 결집)

4.부파불교(마우랴 왕조)

5.힌두이즘과 대승불교 형성(쿠샨 왕조, 굽타 왕조)

6.밀교(팔라 왕조)

7.이슬람교의 침입과 불교 부흥 운동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에서 불교가 동화되었음을, 쇠퇴되었음을 좁은 불교인으로 항상 가슴아파 해 했었다. 혹시, 다른 나라의 불교도 역시 그러한 과정을 밟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하지만, 지금의 여러지역 불교는 민족 종교로 불교 특유의 유연성에 의해 그들의 생활 의식과 관습을 담은 채, 역사의 질곡을 해쳐나가 자연스럽게 호흡을 같이 하는 것을 보면서 불교인으로 가슴 뿌듯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우리 모두가 깊이 반성하고 앞으로 새롭게 해 나가야 할 일이 많음을 알고 있기에, 나는 인도를 새롭게 찾아 간 것이고 이곳에서 진정한 인도 불교의 모습과 그곳의 불교 부흥운동을 살펴보기로 한 것이다.
  이 인도 불교사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통시적인 입장에서 쓰고자 하였으나, 일부 사건을 연대는 그대로 하되 목차에 따라 옮겨 놓은 것이 있음을 미리 말해 두고자 한다.
  자료의 수집과 편집에 참여하고 도와주신 선배님과 동기 법우에게 감사의 마음을 가지며 글을 펴낸다.

 

 

  인도는 영국의 통치하에서 200년의 세월을 보내고 제 2차 세계대전 후에 독립했다. 그 후, 이슬람교도인 파키스탄이 인도에서 분리하게 되는데 종교에 대해서 유연한 인도인에게 있어 이러한 분쟁은 일찌기 없었던 일이었다.
  인도의 자연환경은 바다와 산맥에 의해 고립되어 있어 다른 동양지역과는 또 다른 독특한 문화체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풍토는 위도상으로 본다면 열대에서 온대에 걸쳐 있지만 거의 열대기후에 속하며 무더운 여름(3-5월), 장마철(6-8월), 건조한 겨울(10-2월)등의 세계절로 나뉘어 진다. 이러한 찌는 듯 한 더위, 높은 습도, 건조한 대기가 주민들을 더욱더 사색적으로 형성시켰다고 보는 이도 있다. 원주민은 문다(Munda)인, 드라비다인을 위시하여 그 계통의 종족들, 침입 민족인 아리아인(Arya)과 그 계통의  혼혈 종족등 약 4억 5천 3백만이 넘는다. 이러한 인종적인 다양성으로 인도의 문화에는 여러 민족의 요소가 섞여 있게 되었다.
  인도 속에서는 우리들이 쉽게 이해 할 수 없는 모습들을 볼 수 있다. 특히 무수히 많은 사원과 신앙에 의아해 한다 . 이러한 화려한 종교 행사가 경제적 가난과 사회적 불안정을 감추기 위한 모습으로 나타났다고 여겨 질 수도 있겠으나, 인도인의 사상은 현실 생활과 분리되지 않고 실천에 그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인도인들은 오직 현재에만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 삶의 실천 속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지는 생활을 추구하고 있다.
  드라비다인들은 모계적인 부족을 구성하고 각지에 작은 촌락을 이루어 정착하였다. 그러던 중 인도 서북부 인더스강 유역, 펀잡 지방에 기원전 2000년경 아리아인들이 유입되면서 인도 문화의 새로운 장을 열게 된다. 이들은 무사, 사제, 중간 계층 그리고 원주민인 노예 계층을 자연 스럽게 이루어 후에 사성 계급제도를 형성 시켰으며 이들의 종교 문화는 현실적인 이익을 위해 여러 신들 가운데 일신(一神)을 권청(權請)하여 제단에 곡물을 바쳐 불에 태우는 제식을 행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점차로 동남쪽으로 번져나가 비옥한 평원에서 농경이 더욱 활발하게 되어 경제적인 발전과 사회적인 안정을 누릴 수 있게 된다. 또한 부족국가에서 군주제 국가적인 성격을 나타내게 되면서 왕조가 중시되는 형태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 경제적인 변화가 새로운 사상을 더욱 절실히 요구하게 되었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였을 것이다.
  이에 기원전 5세기경 붇다가 출현하면서 인도에서 불교가 시작되게 되었다.  대체로 이 때부터 붇다 입멸 후 여러 부파로 분리하게 될 때까지의 불교를 원시불교라고 한다. 이들은 승가를 형성하여 이동하면서 기후 조건과 생활 여건의 이유로 점차로 승원에 머무르게 된다.
  세월이 지날 수록 계율을 고스란히 지키고자 하는 사람과 그 해석을 유연하게 하고자 하는 사람이 생기게 된다. 이와 같이 붇다 입멸 후 그 교리에 대한 입장의 차이로 불교는 여러 부파를 형성 시키게 된다. 붇다 성도 후 불상을 만드는 일은 경전을 문자로 기록하는 일과 함께 유한한 붇다의 모습밖에 보여 줄 수 없다는 이유로 금기시 되었다. 그러한 속에서 숭배, 예배의 대상이 붇다의 사리에 탑을 세워 공양하는 일로 진전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 재가 신자들은 붇다의 가르침의 내용보다는 붇다에 대한 동경이 신앙의 원천이 되어 불탑 신앙 집단을 형성하게 되는 데 이는 보살집단이 성립하는 모체가 된다.
  이미 굽타왕조때 부터 대폭적인 힌두이즘을 받아들였고 이 시대 불교에 미친 힌두파의 영향은 힌두적 신들의 수용과 주술적인 의례의 도입 뿐만 아니라, 불교 교단에 힌두적 제사법도 받아 들이고 있었다. 즉, 현세 이익적인 의례와 주술적인 요소가 열반 성불을 위한 방법으로 승화, 순화 되는 측면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로 발생한 것이 밀교이다. 그러나 불교가 세속화(힌두화)  되었다고 해서 불교의 본질이 상실되었다고 간주하는 것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불교의 계와 율은 엄연히 존재하였으며, 그 지킴에 있어서 여전히 엄격하였기 때문이다.
  밀교의 불교 의례는 카스트에 관계없이 만인에게 개방되어 일정한 통과 의례 보다는 단지 덕을 쌓는 것과 기원 의례를 수행하는 것만으로도 신자가 될 수 있었다. 따라서, 신도들의 결속력은 그리 강하지는 못하여 카스트를 중심으로 하는 힌두세계 내에서 토착화하는데 실패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불교는 이슬람교도들의 침입으로 급속히 쇠락하였으며 일부는 장소를 옮겨 명맥만을 유지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현재에 이르러서는 스리랑카의 다르마 팔라등에 의해 불교 부흥 운동이 일어났으며 열반 2천 5백년을 기념하는 붓다 자안티(1956)에 암베드카르를 지도자로 해서 불교에의 집단 개종이 일어나게 되었다.

 


  인더스문명(B.C.3000-2000)은 정연하고도 장대한 도시를 건설하고 청동기 시대의  문명을 형성하였으며 주로 드라비다人인 그들은 모계적인 부족을 구성하고 각지에 작은 촌락들을 이루어 정착하였다.
  그러다가 기원전2000년경 아리아인(Arya)이 인도 서북부 인더스강 유역의 펀잡(Panjab)지방에 유입된다. 이들은 B.C.15세기 이후 인도 문화 형성에 주체적인 지위를 자치하게 되는데, 사회 생활은  주로 가부장 제도에 의해 운영하고 생업은 목축을 하였다. 점차로 농경도행해지면서 무사, 사제, 중간계층 그리고 원주민인 노예 계층을 자연스럽게 이루어 후에 사성 계급제도(Varna)(사제자(Bramana),왕족(Ksatriya),서민(Vaisya),노예(Sudra))를 형성시킨다.
  사성(Varna)은  "피부색의 차이로" 대체로 흰색의 아리아인이 상위의 세 계급을 차지하고 검은색의 원주민이 하위의 계급을 이루었다. 이들의 잡혼으로 B.C.6-7세기경에 "태어남의 의미"의 뜻인 자티(jati)즉, 카스트가 성립된다. 다시 말하면, 그들의 이상 제도는 바르나(Varna;빛깔)이고, 현실의 사회체제에 관한 제도는 카스트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카스트는 지배계급의 혈통 보존이라는 필요에서 출발한 직업에 따른 신분제도로 예외나 혼용이 이루어지고는 있으나 지금까지도 그 유형이 존재하고 있다. 여러 이민족이 모여있는 인도사회 속에서 카스트는 직업내 단결을 강화 시켜 전체의 질서를 유지시켜 준다는 장점도 있기 때문에 많은 사회적인 문제에도 불구하고 계속 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아리아인들의 종교문화는 현실적 이익을 위해 여러 신들 가운데 일신(一神)을 권청(勸請)하여 제단에 공물을 바쳐 불에 태우는 제식을 행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종교 문화가 문헌으로 작성된 것이 베다(Veda)(B.C. 10-8C 경)이다. -
   베다는 신에 대한 찬가를 모은 것으로 인도인들의 솔직한 종교 감정을 보여 주고 있다. 좁은 의미에서의 베다 문헌은 [리그 베다], [야주르 베다], [사마 베다], [아타르바 베다]의 네가지를 말한다. 이 외에도 브라흐마나(Brahmana,梵書), 아라냐카( 林書),우파니샤드(Upanisad,奧義書)가 있는데 이들은 넒은 의미에서 베다 문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점차 동남쪽으로 번져 나가 갠지즈강과 야무나 강 사이의 비옥한 평원에서 농경이 더욱 활발하게 되어 경제적 발전과 사회적 안정으로 새로운 사회 제도와 질서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또한 부족 국가에서 점차로 군주제국가적인 성격을 나타내게 되면서 왕조가 중시되는 형태로 발전되었다. 이 시대 가장 유력했던 도시국가로는 마가다국(Magada)을 비롯하여 코살라(Kosala),아반티(Avanti),밤사(Vamsa)가 있었다. 원주민과의 혼혈로 새로운 종족을 형성하여 전통적인 베다 종교나 관습을 무시하게 되었으며 경제적인 발전과 왕족, 자산가들의 대두는 종래의 계급제도를 흔들리게 하였다. 이같은 경제, 사회, 문화의 현저한 변화는 자유롭고 혁신적인 사상의 발생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바라문 지상주의와 피흘리는 제식 만능주의에 회의를 느낀 혁신적인 사상가들은 바라문에 대한 새로운 정신적 지도자로 사문(沙門, Sramana, Samana, 승가의 지도자)이 되었다. 불교 또한 이러한 사문의 한 형태 였다.
  그러나, 많은 사문들이 혈통의 순수성을 주장하여 카스트의 지위를 스스로 인정 한 데 반하여 불교 사문들은 계급, 신분을 묻지 않고 그 출가를 인정하였다. 한때 사악했던 살인귀 아힌사카( 일명 앙굴리마라 )마저도 마음을 크게 돌려 불교 교단에 출가한 이상, 그를 잡으러 온 파세나지왕도 아힌사카가 출가 했기에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 이렇듯 불교의 사문에게 있어서 출신 카스트는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왕이라도 붇다와 그 제자에게 경의를 표했다. 또한 이러한 불교의 성격은 후에 많은 이민족들이 불교에 귀의하게 된 원인이 되기도 한다.


  기원전 5세기경 붇다가 출현하면서 인도에서 불교가 시작되게 된다. 대체로 이 시기의 불교, 다시 말해 붇다께서 포교를 위해 많은 곳을 다니시고 많은 사람들을 교화시킨 때에서 부터 붇다의 입멸 후, 여러가지 원인에 의해 각 부파로 분리하게 될 때 까지의 불교를 원시불교라고 한다. 이 원시불교의 중심 교리로는 연기설과 팔정도가 있다.
  붇다는 성도후 녹야원에서  다섯비구에게 최초의 설법을 하게 되는 데 후세의 전법륜경(轉法輪經)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전한다.  [쾌락 생활과 고행 생활과 같은 양극단으로 치우친 수행방법은 무익한 것임을 몸소  깨달았다. 이러한 양극단을 버린 중도(中道)를 위해 여덟가지 도(八正道 - 바른 견해,바른 결의 ,바른 습관, 바른 행위, 바른 생활, 바른 노력, 바른 상념, 바른 명상)를 이야기 한다.]
  붇다의 설법을 들은 이들은 그 뜻을 받아들여 제자가 되었다. 이것이 바로 불교에 있어서 승가(僧伽,Samga)의 성립을 의미한다. 이는 불교 특유의 것이 아니고 당시 유행자 공동체의 한 형태였다.
  그러나 기후 영향으로 유행하는데 어려움이 생기자 안거가 필요하게 되었으며 이를 위하여 주처와 원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러한 승가의 질서를 자자와 포살로 이끌어 나갔다. 그러다가 점차로 계율이 형성되면서 부터 비구승가는 더 이상의 유행자의 형태가 아니고 정착한 수도승의 모임이라 할 정도로 그 성격이 변하였다. 이러한 이행은 원만하게 이루어졌으며 초기 승가에서 이미 형성되고 있었다. 더불어 일정한 승원에 머무르게 됨은, 교리와 계율을 전수하고 발전시키기에 좋은 환경을 제공해 줄 수 있게 되어, 교단 및 교법을 존속시키는 기반이 되었다.
  초기의 불교는 전통적인 바라문보다 정통성에 집착하지 않고 새로운 관념과 관행을 자유로이 받아들여, 전통이 중시되는 농촌보다는 변화를 요구하는 도시의 풍조와 일치하여 도시를 중심으로 발전한 도시형의 종교였다. 또한, 불교교단에 대한 후원자와 승가의 경제를 유지시켜 주던 도시와 가까이에 있었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였을 것이다. 이렇듯 초기 불교 승단은 오늘날 처럼 산속 깊숙히 있는 것이 아니라 민중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 함께 호흡하며 친근하게 가까이 있었던 것이다.
  붇다가 설한 규율이나 교리는 때와 장소에 따라서, 적절한 비유를 통하여 설하였기에 체계가 확실하게 규정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붇다가 있을 당시에는 규율이나 교리에 의문이 생기면 붇다께 여쭈어 일러 주신 대로 행하면 되었으나, 입멸하게 됨으로써 교리에 대한 각기 다른 생각에 부딪히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러던 중, 대가섭(Mahakassapa)등의 후계자들은 붇다 재세중의 교리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붇다가 열반에 든 그해, 라자가하(王舍城)교외의 칠엽굴에서 대가섭이 사회자가 되고 우팔리(Upali)가 율(律)을,아난다(Ananda)가 경(經)을 암송하게 되고, 이것을 참석한 500비구들이 검토하여 함께 암송하였다. 이를 제1 결집(라자가하 결집,500결집)이라고 한다. 그러나 참가자는 500명으로 교통과 통신등의 문제로 인해 지방에서는 참여하지 못한 비구들이 많았을 것이기에, 이러한 경전 결집을 인정하지 않고 새로운 결집을 요구하게 되는 일부 비구들이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붇다 입멸후, 100년 경에 두가지의 일이 일어나게 된다. 하나는 계율에 대한 해석의 차이였다. 베사리의 비구들은 보다 융통성 있는 해석을 원했고 코살라국의 장로(長老)야사와 그를 따르는 비구들은 아난다의 정통성을 흔들림 없이 계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야사는 베사리에 700비구를 모아 결집을 하게 되는데, 이 당시 문제시 되었던 것은 10사로 교리보다는 일상생활의 규율에 관한 문제였다. 이것을 제2결집(베사리 결집,700결집)이라 한다. 또 다른 하나는 마하데바(大天)스님의 출현이다. 마하데바는 5사를 들어 최고의 깨달음을 얻었다는 아라한을 비방하게 되는데, 이러한 마하데바의 주장은 불교를 상좌부(上座部)와  대중부(大衆部)로 나뉘어지게 하는 원인을 제공하게 된다.
  이와 같이, 붇다 입멸 후 100년경에 원시 불교가 분열을 거듭하여 20여개의 교단으로 갈라진 시대의 불교를 총칭하여 부파불교라 한다. 100년이라는 세월은 사람의 기억을 흐리게 하기에 알맞은 기간으로 세월이 지날 수록 계율을 고스란히 지키고자 하는 사람과 그 해석을 유연하게 하고자 하는 사람이 생기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 일것이다. 따라서, 정통파라 자처하는 상좌부와 시대와 사상 해석 변화에 민감한 진보파(후에 대중부(大衆部)로 불리어짐)로 나뉘어 지게 된것이다. 이는 수백년 후에 나타나게 되는 소승과 대승의 대립 경향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정통파가 반드시 가장 오래된 전통을 충실히 전한다고 단정 할 수는 없다. 전통을 보존하려는 노력 자체가 전통을 왜곡하는 경우도 결코 적지 않기 때문이다. 초기 종교의 전파가 일반적으로 그러하듯이 포교하기 위한 서북인도, 중인도 등지에서는 보수적인 경향이 불교의 발생지역인 동인도에서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진보적인 경향을 뛰었을 것이다.
  이 즈음 알렉산더 대왕의 인도 원정(B.C.327 - 325)으로 그리스 및 서아시아인들이 서북인도 지역에 들어오게 되는데 이들은 후에 새로운 왕조를 이루게 된다. 알렉산더 대왕의 출현은 인도를 순간적으로 혼란속에 몰았고 이러한 어수선함 속에서 찬드라 굽타(Chandragupta)가 마가다국을 멸망시키고 작은 나라들을 병합하여 마우랴(Maurya)왕조(B.C.317-B.C.180년경)를 열게 된다.
  이 통일은 이민족의 침입이 잦고 혼란이 많은 인도 역사에서 큰 의미를 가지며, 동시에 불교가 전인도적으로 발전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마우랴왕조의 아쇼카(Asoka)왕은 영토 확장 사업을 충실히 계승하는 한편, 문화 향상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이를 위해, 칼링가지역(지금의 오릿사 지방)을 정복하러 갔다가 바르게 살며, 이웃을 사랑하는 일반 백성들이 전쟁속에서 무참히 죽음을 당하는 모습들을 보게 되면서 영토확장의 명분이 얼마나 공허한 것인지를 깨닫고 불교에 귀의하게 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불교를 수용하게 된 것이 중앙집권적인 조직과 군사력에 의한 무력만으로는 광활한 영토와 인도의 여러 이민족을 통치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높은 정치 이념 다르마가 필요했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이 칼링가에서의 경험은 왕을 독실한 불교 신자가 되게 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의심할 수 가 없다.
  왕은 몸소 국내 각지로 법의 순행을 하고 그 지방의 주민들에게 법을 가르쳤다. 또한 법의 사신 파견으로 외국과 인도 여러 지역 곳곳에 불교를 전파하게 된다. 따라서 스리랑카(실론)와 헬레니즘 문화권으로 불교가 확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지역은 포교의 거점이 되는 동시에 후에 부파를 형성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특히, 스리랑카는 전설에 의하면 아쇼카 왕자 (혹은 동생이라고도 함.) 마힌다가 전도해 개교되었다고 하는데 그 후 현재까지 매우 번창하고 있으며 상좌부(테라바다) 불교의 중심지가 되고 있다.
  여기에서 하나의 종교아래 여러 부파가 생기게 된 원인을 좀 더 자세히 고찰해 보자. 첫번째는 앞에서도 잠시 이야기 되었듯이 붇다 입멸 후 그 교리에 대한 해석에 따른 입장의 차이를 들 수 있다. 두번째는 불교 교단에 귀의하게 되는 사람이 증가함에 따라 너무 많은 사람들이 함께 단체 생활을 운영해 나가는 데는 무리가 있어 지도자인 스승이나 선배를 따라 또 다른 집단을 형성 해 나가게 되었다는 이유를 들 수 있다. 마지막으로는 산맥과 강이 많아 지리적으로 험한 인도 반도에서는 주장학설이나 해석하는 입장에는 독특한 차이가 없으나 단지 지역적으로 떨어져 있기 때문에 각기 나름대로의 학설을 정립해 나갔음은 쉽게 짐작해 낼 수 있다.
  이렇게 불교가 지역적으로 발전하여 각지에 승가가 생기게 되면서 불교 경전이나 계율이 처음의 마가다 및 코살라 지방의 언어에서 여러 지방의 말로 전해질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자연히 여러 부파간의 논쟁이 일어나게 되고, 이러한 논쟁이 일어나면서 자신의 파에 대한 학설에 보다 깊은 연구가 이루어져 교법에 대한 정리, 해석이 새롭게 일어나게 되었다.
  특히, 유력한 부파는 독자적으로 삼장(삼장,tri-pitaka)을 편찬하였는데, 구송으로 전해 지던 부파의 삼가장이 가장 먼저 문자로 쓰여지게 된 것은 B.C. 1세기 세일론(현재의 스리랑카) 상좌부에서 였다고 전해진다.
  삼장에는 율(律)장, 경(經)장, 논(論)장이 있다. 대체로 각 부파는 근본 성전으로 법(法)즉 '경'과 '율'을 가지고 있었다. 율은 지역적 시대적 요청에 의해 나름대로 조금씩 특색을 발휘한 것은 '법의 해석' 이었다. 이 같은 법의 해석은 각 부파가 '논(論)'이라는 형태로 제작하여 전승하면서 독특한 교의를 전개시켜 갔다. 부파불교를 아비달마(법의 분석, 해석)불교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아쇼카왕은 불교를 국교로 삼았으나. 한 종교의 우수함을 보여주기 위해 다른 종교를 탄압하거나 비난한 일은 없었다. 불교가 붇다 입멸 후 200여년 동안 특별한 유력자 없이 교단이 계속 유지되어 왔다는 사실을 그냥 지나쳐도 안 되지만, 이 아쇼카왕의 절대적 후원이 없었다면 불교는 어쩌면 인도 어느 지방의 작은 종교로 남아 있었을지도 모른다. 확실히 완전한 승리자 였으면서도 모든 전쟁을 그만두고, 화려한 궁중 생활에서 공공의 시설을 만들어 이웃을 생각하게 하고, 놀이와 제물을 위해 바치던 희생을 그만두게 한 사실은 그 시대 혁신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이는 풍부한 생활과 바라문적 제사에 길들여진 귀족의 불만을 사 그의 말년을 불행하게 만든 원인이 되기도 했다. 불을 피워 제물을 바쳐 자신의 불행을 염려하는 것보다 타인에게 베풀고 선을 실천함으로 복을 쌓는 일을 권했던 그 시대를 오늘날 우리 세대에서 다시 새겨봄은 큰 의미를 가질것이다.
  불교가 지역적으로 발전 할 때는 해석상의 차이나 전통성의 주장이 크게 부각되지는 않았지만, 중앙으로 들어옴으로 해서 그 논쟁에 대한 결과는 그냥 내 버려 둘 수 없을 만큼 중요하게 되었다. 이에, 경전의 새로운 결집이 필요하게 되었던 것이다. 불멸 후 330년경 아쇼카왕의 보호 아래 1천의 스님들이 파탈리 푸트라에서 3장(藏)을 확정하게 되는데, 이를 제 3 결집(1천 결집, 파탈리푸트라 결집)이라고 한다.
  아쇼카왕 이후 마우랴 왕조는 흔들렸으며 얼마 후 푸샤미트라(Pusyamitra)의 반란으로 마우랴왕조는 무너지게 된다. 이리하여 쿠샨왕조가 열리게 될 때까지의 200여년 동안 인도는 혼란의 시대를 맞게 된다. 푸샤미트라는  쑹가(Sunga B.C.187-75)왕조를 일으키고 이 쑹가 왕조에서는 마우랴왕조의 정책에 대한 반동으로 브라만적인 성격을 부활한 복고적인 정책이 이루어졌다. 물론, 그의 즉위 배경에서 알 수 있듯이 전쟁을 금하고 보다 민중 앞에 다가선 불교적인 정치 이념보다는 절대적이고 강압적인 정치 이념을 필요로 했음은 쉽게 짐작 할 수 있다. 이러한 바라문적인 질서를  강요하였음에도 이전 왕실과 통치자의 후원을 중심으로 발전하던 불교에서 그 인도주의적이고 민주적인 성격으로 서서히 민중속으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푸샤미트라왕의 만년(B.C.155-153년 경)에는 서북인도로 부터 심한 공격을 받게 되는데, 이들이 바로 알렉산더 원정때 남아서 나라를 이룩한 박트리아(Bactria)왕조 였다. 박트리아 왕조는 알렉산더 대왕이 못다 이룬 꿈을 이루기 위해 인도 내륙쪽으로 들어오고자 했던 것이다.
  이 박트리아의 메난드로스(인도이름 : Milindra밀린드라, 혹은 Milanda 밀란다)왕은 불교를 옹호 하였는데, 그 상황을 보면 , 왕은 여러 종교를 둘러보다 나가세나 (Nagasena,那先)장로와 불교 교리에 대해 여러가지의 문답을 주고 받은 결과 느낀 바 있어 불교에 귀의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문답의 내용이  {밀란다 팡아,(나선비구경(那先比丘經))}로  전해지고 있다.
  이 밀란다 팡아는 불교의 교리를 설명함에 있어 쉽고 가까운 사물에 대한 비유를 써서 당시 많은 사람들이 읽기도 했는데, 그 내용을 잠시 살펴보자.
  [메난드로스왕은 "당신들 스님들의 말씀에 의하면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 악한 일을 해도 죽기직전에 부처님을 마음속으로 생각하면 반드시 천상에 태어난다고 하는데 저에게는 믿기지 않습니다." 고 묻는다. 나가세나가 "작은 돌을 물 위에 두면 그 돌은 뜨겠습니까, 가라앉겠습니까?" 라고 되묻자, 왕은 "반드시 가라 앉습니다." 라고 대답한다. "그렇다면 1백개의 큰 돌을 배에 실으면 배는 가라앉겠습니까?" 라고 다시 되묻자 왕은 "가라앉지 않습니다." 고 대답했다. 거기에서 나가세나는 "배에 실은 1백 개의 큰돌은 배 덕택에 가라앉지 않은 것입니다. 사람도 전에 악한 짓을 했어도 한 번 만 부처님을 마음속으로 생각하면 지옥에 가지 않고 천상에 태어 납니다. 작은 돌이 가라 앉는 것과 같이 불교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죽은 뒤에 지옥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불교사의 전개,渡邊照광)]  라는 붇다에 대한 신앙을 강조한 내용이 유명하다.
  메난드로스 왕은 아주 훌륭한 정치를 펴서 그의 사후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애석해 했다. 그와 나가세나장로의 만남은 헬레니즘적인 서양과 인도적인 동양의 만남이라는 큰 의의를 가진다. 이에, 좀더 메난드로스왕의 불교 수용 배경을 고찰 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메난드로스 왕은 그리스인으로 인도인에게 있어서는 이민족이였다. 카스트가 뼈 속 깊이 묻혀 있는 인도에서 이민족은 아무리 높은 지식이나 교양을 가지고 있다하여도 다슈(악마)로 경멸 당했다. 이에 반해, 불교는 앞에서도 언급되었듯이 계급적 차별을 부정, 4성의 평등을 설하여 이민족을 적대시 하는 일은 없었던 것이다.
  슝가 왕조는 마지막왕의 신하에 의해 무너지고 칸바 왕조를 세우지만 이 왕조는 45년만에 남인도의 안드리아 왕조에 의해 멸망당하게 된다. 안드리아 왕조는 마우랴 왕조때에는 그의 지배하에 있었으나 이쇼카왕의 사후, 서서히 독립하여 기원전 28년 경에 칸바 왕조를 무너 뜨리고 중앙에 진출하게 된다.
  아쇼카왕은 불교를 배웠으며 푸샤미트라는 바라문교를 배웠다. 그러나, 안드리아왕조는 원래 아리아인이 아니었으며 불교와 바라문교는 다같이 문화적으로 우세한 북인도의 아리아인으로부터 수입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배경으로 안드리아 왕국에서는 불교와 바라문교가 나란히 발전 할 수 있었다. 이 시기에는 석굴을 대단히 많이 건설하였는데, 현재 데칸 지방에 남아 있는 불교의 석굴은 거의 이 왕조치하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 중에서 바라문교의 신자가 불교 승려를 위해 석굴을 만든 것도 있어서, 종교간의 충돌은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는 불교가 힌두교의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는 환경을 제공하고 있었던 것이다.
  불교가 왕조와 도시 자산가들의 지지와 민중의 호응속에서 급속히 발전해 나가고 있는 기간에도, 옛 아리아인의 베다 성전에서 계속 이어져 내려오던 바라문의 영향력은 결코 약해지지 않았다. 불교가 몇 번의 결집을 통해 교단을 정화하고 아울러 민중에 가까워지려고 노력하였건만, 많은 부파가 새롭게 생겨나게 되어 기원전 1 세기 경에는 18부 혹은, 20 부파의 분열을 마쳤다.
  그러는 동안 [마누 법전] 의 제작(B.C.1 세기)으로 농촌에서는 바라문의 권위를 세웠으며, 산스크리트 문법을 확립(B.C.2세기)하여 바라문 문화로 대표되는 산스크리트 문화로 중앙의 문화를 이끌어 나갔다. 특히, 종교적인 면에서의 바라문교는 각 지방에 남아 있던 부족 신앙이나 민속 신앙을 베다 성전의 권위에 포괄하여 흡수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힌두교라고 부르는 종교의 모습이 이 시기에 정립되었다.
  한편, 서북부 인도에서는 기원전.후로 하여 같은 유목민족인 흉노(匈奴)족에게 쫓겨 중앙 아시아 人인 월지족(月氏族)이 박트리아 땅으로 내려 오게 된다. 이들은 박트리아를 무너 뜨리고 유목민에서 점차로 정착하는 생활로 옮겨 자기들만의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쿠샨(Kusana,Kusan A.D. 1세기 전반)왕조를 열게 된다.
  이들은 중국의 비단을 로마로 팔러 들어가는 상인들에 의해 개척된 비단길을 통하여 동쪽으로는 중국, 서쪽으로는 로마제국과의 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게 된다. 또한 중국과 인도의 문화교류, 불교의 전파에 중요한 역할을 해 내게 된다. 쿠샨왕조는 처음에는 자신들의 종교를 보호 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인도내의 여러 종교에 감화 되어 특히 불교(부파 시대의 불교)에 귀의 하게 된다.
   그 배경을 살펴 보면, 무역등으로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게 되나 바라문을 비롯한 인도인들에게 있어서는 이민족이었기에 사회적으로는 특정한 지위를 부여 받을 수 없었다. 따라서, 카스트를 부정하면서도 사회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불교에 귀의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또 다른면에서는 그 나라를 통치하기 위해서는 백성들이 가장 관심있어 하는 종교를 보호 해 주는 것이 정책적으로 필요하였기에 불교를 택했다고 볼 수 있다. 후자로 해석해 보면 불교는 그 시대 서북인도에서는 확고한 자리를 갖고 있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쿠샨 왕조의 3 대째 왕인 카니시카(Kaniska)왕의 출현은 인도 불교계에 있어 새로운 장을 열게 했다. 그는 중국이나 일본등지의 불교도에게는 아쇼카왕과 함께 존경 받는  왕으로 후대에 기록되어지고 있다. 카니시카왕은 설일체유부(設一切有部)의 장로인 파르스바(Parsva)에 귀의하게 된다. 그리하여 카니시카 가람을 세우는 등 불교를 융성 시킨다. 또한 그와 아스바고샤(Asvaghosa)와의 만남은 불교사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아스바고샤는 처음에는 뛰어난 바라문교도 였다. 그는 불교도를 비롯한 많은 종교인들과 논쟁을 벌여 그들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파르스바 장로를 만나 이루어진 논쟁에서 느낀바 있어 불교에 귀의하게 된다. 아스바고샤는 훌륭한 문인이였으며, 시인이자 음악가 이기도 했다. 그의 음악적 재능은 500명의 왕자를 일시에 불교에 귀의 시킬 정도로 뛰어나 놀란 왕이 그에게 연주를 그만 둘 것을 부탁할 정도 였다고 한다. 또한, 이 시기 여러 찬불송을 산스크리트어로 편찬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붇다짜리따(Buddhacanta, 佛所行讚)]로 붇다의 일생을 써 놓은 것이었다. 이는 후에 산스크리트 문학의 백미로 일컬어지고 있다.
  카니시카 왕 때 불교사적으로 중요한 또 하나의 일이 일어나게 되는 데 그것은 경전의 결집이다. 이 시대 여러 부파 중에 하나인 설일체유부는 7論중 하나인 발지론에서 유부교의 집대성인 [아비달마대비바사론(阿毘達磨大毘婆沙論)]을 편찬하게 되는 데 이를 가리켜 제 4 결집이라고 한다. 이 결집된 내용이 엄청나게 많은 것이기에 카니시카왕 때 모든것이 이루어졌다고 말하기에는 억지스러운 면이 있다. 따라서 계속해서 결집을 해오다가 카니시카왕의 보호 아래에서 끝을 맺게 되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 또한, 그 시대 안정된 사회 속에서 발전된 불교 미술은 놀라운 수준이었다.
  그리스 헬레니즘과 불교가 융합된 간다라 미술은 쿠샨왕조 초기에 출현하여 카니시카왕 때 최전성기를 이루었으며 아시아 불교 미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지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 지역은 간다라(현재의  페샤와르에 상당하는 지역)를 중심으로 동으로는 탁실과 서로는 핫다(Hadda)에서 카티씨, 북으로는 스와트(Swat)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 퍼져 이썼다. 이 시대에는 장식을 위해 불상, 보살상이 제작되었다. 붇다 성도 후, 잦은 이민족의 침입과 교역의 융성으로 활발한 문화 교류가 가능해 지고 이에 따른 여러 문화의 자극에 전통의 구속에서 일부 벗어난 불교도들은 불상을 조각하기에 이른다(1세기말에서 2세기 초에 걸쳐)이러한 불상의 출현은 불상에 대한 예배 의례를 가져 왔고, 후에 발생하는 밀교의 의례는 불상이 없었다면 발전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순수한 인도적 기법인 미투라 미술도 존재했었다.
  아울러, 출가자를 중심으로 경전이나 연구하고 계율을 암송하던 전문적인 종교에서 지금의 찬불가와 같은 음악을 아슈바고샤가 연주하고, 불상을 조각하여 그곳을 재가 신자들이 찾아 갈 수 있었다는 데 보다 더 일반화된 종교로의 불교를 발견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불상에 예배함으로 자연스럽게 붇다에 대한 신격화가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다시 한번 시대순으로 되살펴 본다면 붇다가 입멸한 후,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불상을 만드는 일은 경전을 문자로 기록하는 일과 함께 유한한 붇다의 모습밖에 보여 줄 수 없다는 이유로 금기시 되었다. 그러한 속에서 숭배, 예배의 대상이 붇다의 사리에 탑을 세워 공양하는 일로 진전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동시에 불탑 숭배는 공덕을 쌓는 중요한 행위로 여기기도 했다. 이 제가 신자들은 붇다의 가르침의 내용 보다는 붇다에 대한 동경이 신앙의 원천이 되어 불탑 신앙 집단을 형성하게 된다. B.C.2세기 무렵부터 부파불교가 출가자를 중심으로 하여여 아비달마 연구에서 보여진 것처럼 점차로 전문화되고, 힌두교에서는 박티 신앙이 현저하여 자신을 비우고 신에게 귀의 하는 것이 신선한 모습으로 비쳐지게 된다. 이러한 배경속에서 출가하지 못한 대중들의 구원을 목적으로 대승 불교가 일어나게 된다.
 대승불교의 출현은 언필칭 재가 신자들의 위대한 승리였다는 말을 종종 듣게 된다. 권력과 유착한 일부 승려의 타락성을 공격하고 나아가 이미 비불교화된 기존 승단을 부정하는 적극적인 자세로 불탑 주변의 신자들은 붇다의 근본 가르침으로 돌아가 그에 입각한 진정한 신앙공동체를 형성하고 이념체계를 정립해 나갔다. 이는 믿음이 돈독한 이라면 재가와 출가를 막론하고 어느 누구든지 부처가 될 수 있다고 가르치는 대승불교의 기본적인 입장에서 비롯된 것임에 틀림없다.
  또한 출가를 전제로 하는 엄격한 명상수행을 통하여 보살도를 닦아 나가는 기존의 승려 사회에 대한 소리없는 혁명이었던 것이다. 여기에, 기존 승단에 회의를 느끼고 민중교화를 그 본래적 임무로 자각하고 노력하던 진보적 승려들이 합류하면서 새로운 불교운동이 일어난다. 이들은 기존 승려의 편협하고 이기적인 모습을 '소승'으로 공격하고 스스로를 '대승'이라 이름하여 인도전역으로 급속히 퍼져나갔다.
 대승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관념, 사상은 보살(bodhisattva,菩薩)행과 이타행(利他行)이다. 보살은 붇다의 전생을 가리키는, 붇다 한 사람에게만 적용되던 말에서 이타의 서원을 발하고 깨달음을 구하여 수행하는 사람으로 본래 의미에 새로운 내용을 부여하였다. 찬불을 기조로 한 민중교화를 위하여 만들어진 설화집인 자타카(붇다께서 과거의 많은 생애 가운데, 사람으로 혹은 동물로 태어나 하게 되는 많은 경험들을 내용으로 함.) 에서 보살은 중생을 위하여 보시를 비롯한 많은 선행을 쌓고, 이러한 공덕이 쌓인 결과, 붇다가 된다고 설하고있다.
 아슈바고샤보다 한 세대 늦게 남인도 안드라 왕조에서는 나가르주나(龍樹)가 출현하게 된다. 이로서 잔잔히 흐르고 있던 대승은 뛰어난 논사를 만남으로 해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그는 데칸고원의 비다르바에서 탄생하여 젊었을 때에는 바라문교에 정통했지만 후에 불교에 귀의하여 출가(유부계)하였다. 이 후 대승의 교리를 체득한 후, 싸타바하나왕조의 보호아래 나가르쥬나콘다에서 입멸하였다. 저서로는 [라트나발리](Ratnavali),[중론(Madhyamakakarika,中論)], [대지도론(大智度論)], [대품반야(大品般若)], [십주 비바사론(十住 毘婆沙論)]이 있는데, 특히 [중론] 은 중관학파를 형성하여 그 전통이 6세기 이후에 부활하게 된다. 나가르쥬나 학설을 계승한 아랴데바(Aryadeva,聖天)는 공(空)사상을 내외에 선양하는 데 노력하였다. 저서로는 [사백론(四百論)],[百論(백론)],[백자론(百字論)]이 있는 데 후에 [백론], [중론], [십이문론]을 三論이라하여 중국 에서는 여기에 기반을 하여 삼론종을 이룬다.
 쿠샨 왕조와 안드라 왕조는 활발한 문화 교류를 하며 서로 견제, 발전하다가 2세기 무렵 거의 같은 시기에 두 왕조는 몰락한다. 이후 인도는 100여년간의 혼란을 견뎌 내어야만 했다. 4세기경 굽타 왕조가 일어설 때까지의 주목 할 만한 논사나 경전이 알려져 있는 기록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인도는 4세기 초 굽타 왕조가 성립(A.D 300 - A.D.500)된 시대로 부터 문화 부흥의 큰 전환기에 들어간다. 서북인도에서 서인도, 그리고 갠지즈강 중류지방에 이르는 지역을 수 세기에 걸쳐 이민족이 지배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리스 세력의 박트리아 왕조, 중앙 아시아 출신의 쿠샨 왕족등이 그것이다. 그러다가 동인도 마가다 지방 출신인 굽타 왕조에 의해 마우랴 왕조 이래 처음으로 인도인의 지배에 의한 대제국이 수립되었다. 굽타 왕조 시대는 그 왕을 찬드라 굽타 1 세라고 불렀다는데서 나타나듯이 바라문을 중시하는 복고적인 성격을 나타내었다. 따라서 바라문의 문화인 산스크리트를 중앙에 들여 각종 법령, 문학, 종교에 사용하였다.
  굽타왕조의 복고적인 성격으로 이 시대 인도 대륙의 여러 왕들은 대부분 힌두교도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불교 교단이 박해를 받은 사실은 없었다. 오히려 힌두의 왕들은 불교 교단을 외호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신앙과 관계된 것이 아니라, 어떠한 종교, 종파에도 동등하게 존경, 보호하는 오래된 전통에 따른 것이었다. 그리고 불교는 특히 이 굽타 왕조 시대에 힌두 세계의 여러 문화를 대폭적으로 수용하였다. 역으로 말하면, 불교가 힌두교의 신관(神觀)과 신앙에 흡수되어 갔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힌두교도의 입장에서 불교는 힌두교의 일파로 간주되는 원인이 되었고, 따라서 이단으로 배척될 점을 갖지 않았음으로도 힌두왕들의 외호를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바수반두는 본시 경량부에 속해 유부의 개설서 <<구사론>>을 저술했는데 뒤에 형 아상가(無著)의 권유로 대승에 들어가 형의 뒤를 이어 새로운 교리체계를 확립했다. 그는 활동적이어서 소승이나 도의 어긋남에 대한 비판도 시도하여 불교의 명성을 높이는 일에 크나큰 공헌을 하였다. 중인도의 아요다를 주요무대로 해서 굽타왕조의 왕(아마 찬드라 굽타 1세)의 후원으로 아요다외에 푸루랴푸라, 캐시미르등에도 불교사원을 건립했다. 바수반두의 계통은 그 후 대승불교의 주류가 되어 번영하였다.
 5세기초 굽타왕이 날란다사원을 지음으로 불교는 고향땅인 마가다로 그 중심이 옮겨진다. 당시 소승불교에서는 유부계와 정량계가 대승불교에서는 중관계와 유식계로 나뉠 수 있다. 이 중관계와 유식계는 8세기 이후 급속히 쇠락하고 중관, 유가의 중간적 경향을 취하는 중관유가파가 나타났다. 또 이러한 사실들은 동시에 밀교사 이기도 한 것이다.

 


  굽타왕조의 몰락 이후,불교에 귀의한 하르샤바르다나왕(Harsavardhana,戒日)을 이어 프라티하라(Pratihara,750-1000C)왕조는 서북방에서 인도로 들어온  여러민족의 혼혈자손으로 스스로 무사계급의 자손인 라즈푸트(Rajput)라 부르며 봉건적인 지배제도를 학립하였다. 보통 인도 역사상 중세의 시작을 이 시대부터 비롯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들은 전통을 존중하는 불교를 박해하는 데 이로 인해 불교는 장소를 옮기고 이 시기에 급속히 밀교화가 진행되어진다.  이어 8세기 중엽 팔라(Pala)왕조(730년-1197년 견)가 일어나 세나왕조에 의해 무너질 때까지 일관하여 불교를 보호하였다. 고팔라(Gopala,치세 750-770C)왕때 마가다에 오단타푸리(Odantapuri)사원을 그리고 다르마팔라(Dharmapala, 치세 990-810c)왕때 역시 마가다에 비크라마시라(Vikramasila)가 세워지게 되어 난다라와 함께 밀교위주의 불교학이 행해진 3대 사원이 된다. 특히 비크라마시라 사원은 인도 불교 최후의 거점으로 티벳으로 전해져 티벳불교를 형성하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팔라왕조때의 논사로는 중관유가파로 [탓트바상그라하](Tantvasamgraha)를 지은 산타라크시티(Santaraksita)와 티벳 라마(Lama)교의 실질적인 창시자가 되는 파드마삼바마(Padmasambhava)가 있었다.
이미 굽타시대때 부터 대폭적인 힌두이즘을 받아들였고 이 시대 불교에 미친 힌두파의 영향은 힌두적 신들의 수용과 주술적 의례의 도입뿐만 아니라, 불교 교단의 승들은 이미 힌두적 제사법도 받아들이고 있었다. 즉, 현세 이익적인 의례와 주술적인 요소가 열반 성불을 위한 수행방법으로 승화, 순화되는 측면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로 발생한 것이 밀교이다. 그러나, 불교가 세속화(힌두화) 되었다고 해서 불교의 본질이 상실되었다고 간주하는 것은 옳지 않다. 왜냐 하면 불교의 계와 율은 엄연히 존재 하였으며,그 지킴에 있어서 여전히 엄격 하였기 때문이다.
 밀교의 가장 큰 특징은 주술적인 의례를 조직화한 것과 신비주의적인 경향이다. 이에 여러가지 종교에 대하여 두드러지게 관대한 대승불교는 힌두이즘의 영향 아래에서 7세기 중엽부터 급속히 밀교화 되었다.
 초기경전에서 보이는 밀교는 주로 몸을 보호하고 복을 빌며 재앙을 물리치기 위해 주문을 읊는 의례(잡밀)인데, 대승경전에서는 이같은 목적을 위해 많은 다라니를  설하고 있다. 밀교는 진언승(眞言乘,Manttrayana)인 순수밀교와 금강승(金剛乘, Vajrayana), 시륜승(時輪乘, Kalac]akrayana)이라 불리는 탄트라 밀교로 나눌 수 있다. 진언승에서는 지혜와 방편이 중심 교리로 경전에는 [ 대일경(大日經,Mahavairocana-sutra)], [ 금강정경(金剛頂經)]이 있다. 금강승에서는 지혜는 정적인 성격이기 때문에 여성으로, 방편은 동적인 남성에 비유되어 남녀의 교합을 요가로서 나타내었다.문헌으로는[문수사리근본의궤경](文殊師利根本儀軌經,Manjusrimulakalpa), [일체여래금강삼업최상비밀대교왕경(一切如來金剛三業最上秘密大敎王經,Guhyasamajatantra)],[비밀집회(秘密集會,Tathagataguhyaka) 탄트라]가 있다.
 점차로 불교의 본질인 열반이 힌두교의 탄트리즘의 그것과 거의 등질의 것이 됨으로 불교는 불교로서의 존재 이유를 잃고 힌두세계로 흡수 될 수 밖에 없는 한 원인을 제공하게 되었다. 금강승의 일개 분파인 시륜승은 10세기 무렵부터 성행하여 인도밀교의 최후가 된다. 11세기초 활약한 탄트라 밀교 논사로는 후에 티베트에 들어가 티베트 불교를 부흥시키는 아티샤(Atisa Dipapamkara Srijnana, 980-1052)가 있다.대부분 티베트어로 되어 있는 밀교, 탄트라 문헌은 그 연대가 거의 알려 지지 않고 있으며 내용도 아직 밝혀 지지 않아 연구 될 과제이다.

 


 아프카니스탄의 투르크계 가즈니(Ghazni) 왕조는 이슬람교도로 986년 부터 인도  정복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북인도 원정에서 이민족의 이슬람교의 개종, 노예와 물자의 약탈이 주된 목적이였으므로 점령지를 오랫동안 지배하지 않았지만 불교나 힌두교의 사원과 성지를 파괴하고 보물을 약탈했으며 승려를 살해하는 역사상 유래가 없을 정도의 참극을 자행했다.
  구르(Ghur) 왕조에 이르러 비크라마시라 사원이 파괴되면서 불교는 인도 본토로부터 그 모습을 감추어 버리게 되었다. 이와 같이 불교가 발생한 인도에서 불교가 쇠퇴한 원인을 고찰 해보자. 밀교의 불교 의례는 카스트에 관계없이 만인에게 개방되 일정한 통과의례가 없이 단지 덕을 쌓는 것과 기원 의례를 수행는 것만으로도 신자가 될 수 있었다. 따라서 신도들의 결속도 그리 강하지는 못하여 카스트를 중심으로 하는 힌두세계 내에 토착화하는데 실패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슬람교도의 침입이 북인도에서 불교가 쇠퇴하게 되는 큰 원인이 되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사원이 파괴되고 승려가 살해되었으며, 혹은 네팔, 티벳 등지로 피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불교를 외호하였던 왕가 또는 자산가가 몰락하였던 점도 간과 될 수 없는 요인이다. 그러나 전적으로 이슬람교도의 박해에 의해 인도 불교가 소멸되었다고 보는 것은 잘못이다. 이미 불교의 본질적인 열반이 힌두교의 그것과 유사하게 됨으로 불교로서의 존재 이유를 상실하여 불교가 점차로 힌두세계로 흡수 됨으로 그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이다.
19세기에 들어와 영국의 식민지 지배 아래서 인도 문화의 르네상스가 제창되자 스리랑카의 다르마팔라 등에 의한 인도 불교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이들의 노력에 의해 붓다가야 불탑의 보수와 불교도에 의한 관리가 실현되었다. 이 운동은 ' 대보리회(大普 會) ' 가 중심이 되었다.
또 한 갈래의 부흥 운동은 불가촉천민으로 천대받던 하층 민중들 사이에 반(反)힌두의 표상으로 사성평등(四姓平等)의 불교를 신앙하자는 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특히, 부처님 열반 2천 5백 년을 기념하는 붓다자얀티(1956)에 암베드카르를 지도자로 해서 불교에의 집단 개종이 일어났다.  (불교 입문)
불교가 12세기 이슬람 침입을 기회로, 이미 쇠퇴, 동화되고 있던 불교는 인도 본토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불교도가 오랫동안 쌓아 올렸던 정신적 유산의 대부분은 인도인들에게 전해져 불교라는 이름을 의식하지 않는 경우에 있어서도 많은 인도인은 불교적인 것이다.

 

 

B.C
* 3000-2000 인더스 문명
  2000년 경 - 아리아인의  서북부 인더스강 유역 펀잡 지방 유입.
* 1200 - 1000 [리그베다] 성립
* 1000 - 600 초기 힌두교 성립
* 500  - 六師外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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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5C - B.C.4C 발생정착기

* 붇다의 탄생
           B.C. 463년 경 ( 북전, 유부 (?) )
           B.C. 560년 경 ( 남전 )     ---  463년 보다 약 100년 이전
*붇다의 입멸
          B.C.485 - 분별 설부 전승
          B.C.383 - 유부 전승
          B.C.544 - 3 - 남방 불교 국가에서 채택된 연대
          B.C.478 - L'Inde classique

* 제 1 결집(라자가하 결집,500결집)-붓다 입멸의 해
* 제 2 결집(베사리 결집,700결집)
          불멸 후 100년 - 분별설부, 법장부, 화지부, 설산부 전승
          불멸 후 110년 - 유부 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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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4C - A.D. 1C;근본 분열 - 대승이전(원시 불교 -  부파 불교)

* 근본 분열
            불멸 후 100년 이후 아쇼카 치세 - 분별 설부 전승
            불멸 후 116년 아쇼카 치세 -  유부 전승
* B.C 327 - 325      알렉산더 대왕의 인도 원정
* B.C 317   마가다 왕국 멸망
            마우랴 왕조 설립
                  (찬드라 굽타 즉위)
* B.C 261   아쇼카왕의 칼링가 정복   ---   전도사 파견
* 제 3결집(파탈리푸트라 결집)
            불멸후 236년 아쇼카,마우랴 치세 - 분별설부 전승(남전)
* B.C 2C    산스크리트 문법 확립
* B.C 180   마우랴 왕조 멸망
            푸샤미트라의 슝가왕조 개창
* B.C 2C - A.D 2C
            남인도지역( 데칸고원 ); 안드라 왕조 개창
* B.C 163   박트리아의 메난드로스왕 즉위
* B.C 68년 경
            슝가 왕조의 몰락  ---   칸바왕조의 흥기
* B.C 1C - A.D 75년
            샤카-파흐라마시대 (불경이 문자로 기록된 것으로 추측 됨)
* B.C 30년 경
            칸바 왕조의 멸망  ---   남인도 사타바하나 왕조 융성                   
                                    (안드라 왕조)
* B.C 1C    마누법전 18부 혹은 20부파분열을  마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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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 1C - A.D. 7C 대승 불교 흥기 -밀교 이전
* A.D 1C전후;신불교 운동 - 점차 대승으로 발전 (대승 불교 흥기)
* A.D 30C   쿠샨 왕조 시작
* A.D 67    중국으로 불교 전래
            바가바드기타
* A.D 100   안드라 왕조 최성기 (90 - 120)
            (간다라와 마투라의 조각이 점차 이루어지다)
* A.D 128 - 153
            카니시카왕 (서북인도 중심으로 소승불교에서 대승불교로 발전)
            파르스바 , 아슈바고사 , 나가르주나
* 제 4 결집
            입멸후 400년 혹은 입멸후 600년
* A.D 300   굽타 왕조 성립
            찬드라 굽타 1세 즉위(320 - 335년경)  ---  사무드라 굽타 (335 - 375)
* A.D 320 - 400
            바수반두 출현
            찬드라 굽타2세(375 - 415)
            ( 라마야나, 마하바라타, 산스크리트 널리 보급, 중국과의  문화 교류)
* A.D 480   에프탈리의 인도 침입
* A.D 500   굽타왕조의 몰락,이슬람공 침입 시작
* A.D. 6C 말엽
            중관파와 유식파 속에 힌두교의 쉬바 신앙이 침투

A.D. 7C - A.D. 12C 밀교 출현 - 비크라마쉴라 대학의 파괴까지

 

 

 


2. 중국불교사

 

1) 후한
2) 위진남북조
3) 수,당
4) 송
5) 원
6) 명. 청

 


1) 후한의 불교

고대 아시아에 성립하였던 두 개의 커다란 문화권은 인도 문화권과 중국 문화권이다. 이 두 개의 문화권은 지리적으로는 같은 아시아 대륙에 존재하며 땅이 연결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티베트 고원과 히말라야 산맥으로 나뉘어 있기 때문에 이질적인 문화권을 형성하였다.

기후나 풍토 등의 자연적 조건은 물론 인종, 언어, 풍속, 관습, 사회구조 등의 차이도 뚜렷하다. 기원전 1500년 경에 인도에서는 베다 문명이 꽃을 피웠으나 중국에서는 은주(殷周) 문명이 발달하였다. 불교의 개조인 고타마 붓다가 활약하였던 기원전 5, 4세기 경에 중국은 춘추 전국시대였고 공자나 노자를 비롯한 많은 사상사들이 출현하였던 시대였다.

이 두 개의 단절되었던 문화가 교류할 수 있게 된 것은 기원전 2세기말 중앙아시아를 횡단할 수 있는 동서교통로가 열린 무렵부터였다. 서쪽 로마제국에서부터 동쪽 장안(長安)에 이르는 실크로드가 개설되고 동서교통에 의한 통상교역이 확대되었다. 서북인도에서부터 아프카니스탄, 파키스탄 지방으로 전파된 불교는 실크로드의 상인들과 함께 점차 중국에 전파되었다. 불교는 서북인도에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전파한 것만이 아니고 수마트라섬과 말레이 반도를 우회하여 남부해로를 통하여 베트남을 경유하여 중국남부에도 전해졌다.

인도 승려와 서역 승려가 중국에 건너오기도 하였으나 중국 승려인 법현, 현장, 의정 등은 인도의 성지를 순례하고 불전을 가져오기 위해 많은 고난을 무릅쓰고 긴 세월에 걸쳐 서역을 순례하고 돌아오기도 했다. 이와 같이 빈번한 문화교류에 의하여 불교는 이질적인 문화권인 중국에 점차 전파되었던 것이다. 중국에 전해진 경전을 다라니를 제외하고 모두 한문으로 번역되었다.

이는 자기들의 언어로 불교를 이해하려고 한 노력의 결과이다. 그로 인하여 불교 전래가 시작되면서부터 당대에 이르기까지 경전의 한역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업이 되었다. 후한 이후 송대에 이르기까지 천년 동안 이러한 작업이 계속되었던 것이다. 또한 현장의 역경사업을 완성시킨 번경원처럼 국가적 사업으로 조직적으로 행해진 번역사업의 결과로 세계의 번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방대한 한역대장경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 한역대장경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 중국불교이다.

동아시아 불교권에서는 한자문화권의 성립과 아울러 한역경전이 전파되었던 것이다. 경전의 번역뿐만 아니라 중국의 불교인들은 많은 불교전적을 저술하였다. 세일론, 버마, 타이 등의 남방불교와 중국불교가 다른 점을 대승불교권이라는 것이다. 대승불교는 중국에서 발전되고 형성되어 천태종이나 화엄종 같은 교학을 형성하고 선이나 정토와 같은 실천불교를 탄생시켰다.

인도에서는 원시불교에서 부파불교가 발달하고 다시 대승불교가 흥기하였는데 중국에는 인도불교의 발전단계와 상관없이 유입되었기 때문에 혼란을 초래하게 되었다. 소승경전과 대승경전 간에 교리상 해석차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모든 경전에 대한 가치판단을 위해 교상판석(敎相判釋)이 행해지게 되었다. 교상판석으로 각 종파는 자신들의 위치를 결정지었으며 또한 나름대로 경전에 대한 가치판단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 교상판석은 중국불교의 특징이기도 하다.

불교가 중국에 들어온 연대에 대해서는 중국문헌에 몇 가지 설이 기록되어있다. 그것은 주대(周代)에 이미 중국인이 불교를 알고 있었다있고도 하고, 그보다 뒤인 후한대의 명제(明帝)시대라고도 한다. 그러나 그 사이에는 수백 년이라는 차이가 다. 이런 차이를 가져오게 된 것은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가 중앙아시아에 전해져서 중앙아시아와 중국과의 교류가 이루어지는 사이에 어느새 불교가 들어와서 그 정확한 연대를 결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 중국에서는 민족 신앙인 도교와 불교의 항쟁이 계속되었고 불교교단이 성립하여 상당한 세력을 갖게 됨과 동시에 그에 자극되어 도교교단도 형성되어 이 두 세력간에 우열이 논해지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불교는 전래가 이미 오래 전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내세워서 그 권위를 유지하려고 불교전래의 역사를 아주 오랜 시대로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해서 불교전래에 대한 여러 설이 나오게 되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유력한 것이 후한(後漢) 명제(明帝)의 구법설(求法說)이다. 명제의 구법에 대한 기사는 <후한서(後漢書)>의 ‘서역전(西域傳)’ 등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그것은 후한의 명제가 꿈 속에서 금인(金人)을 보았는데 그 금인이 부처님이라는 것을 알고 사절을 서역으로 보내서 불법(佛法)을 얻어오도록 하였다.

도중에 백마에다 경전과 불상을 싣고 오는 가섭마등(迦葉摩騰)과 축법란(竺法蘭) 두 사람을 만났는데 영평 10년 그들과 함께 도성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 때문에 명제는 크게 기뻐하여 국도의 낙양문 밖에 백마사(白馬寺)를 세우고 그들을 거기에 주석하도록 하였으며, 여기에서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이 역출되었다고 한다. 이 설은 삼국시대부터 전해져 오던 것으로 오랫동안 이것을 사실로서 인정해 왔다.

그러나 현재는 몽견(蒙見) 구법사절단 파견의 연시, 사자의 이름 등이 문헌마다 갖가지라는 점과 무엇보다도 당시 중국과 서역과의 공식사절은 없었으며, <사십이장경> 그 자체가 후세의 초출(抄出)이라는 점에서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여겨지고 있다. 이는 아마도 불교가 황제에 의해 중국에 받아들여졌고 또 황제의 존신(尊信)을 받게 되었다는 점을 들어 불교의 권위를 내세우려고 만들어진 것일 것이다.

역사가들이 주목하는 두 가지 자료가 있다. 하나는 <위략>의 기록이고, 또 하나는 <후한서>의 초왕영전이다. <위략(魏略)>이라는 글은 <삼국지> 가운데 <위지(魏志)> ‘서융전(西戎傳)’ 가운데 들어 있는 것인데 위인(魏人) 어환의 기록에 의한 것이다. 이 속에 전한말(前漢末) 애제(愛帝)의 원수(元壽) 원년(기원전 2세기)에 박사제자(博士弟子)인 경려(景慮)가 대월지국왕의 사자 이존(伊存)에게서 <부도경(浮屠經)>을 구수(口受)받았다고 기록되어있다.

이것은 사료로서 신빙성도 있고 불교전래에 관한 가장 오래된 자료이다. <후한서> 72권 초왕영전(楚王英傳)의 기재는 대략 다음과 같다. 영(英)은 명제가 이복동생으로 영평 8년 황제에 대해 이심(異心)이 있다고 의심을 받게 되었다. 이에 대해 명제가 영에게 내린 칙서 가운데 영이 평소에 불교를 존경하고 사문, 우바새를 공양하고 있었다고 말하고 그 때에 영이 명제에게 헌상한 재물을 돌려보내고 그 봉불을 도우려 했다는 말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초왕영의 봉불은 명제의 구법설과는 달리 역사적 사실로서 인정되고 있다. 이상을 종합해 볼 때 불교는 전한말기 즉 서력기원이 시작되기 전후 무렵에 중국인의 이목에 띄게 되었고, 서기 1세기무렵에는 장안(長安), 낙양(洛陽)으로부터 다시 초왕영의 봉지인 평성(彭城) 근방까지 발달하여 후한왕족의 귀의를 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유의할 것은 이존의 불경구수설(佛經口受說)이나 초왕영의 봉불이 모두 기록상에 나타나 있는 것을 근거로 하는 것일 뿐 이것이 곧 중국인이 불교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거나 혹은 귀의했다는 최초의 사실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서력 기원이 시작되는 전후 경에 불교가 중국에 유입되었다는 것은 육로에 의한 동서교통이 열렸다는 점에 유래하고 있다.

중국인이 불교를 알고 초왕영이 불교를 신봉했다고는 하지만 불교가 확실히 중국에 기초를 굳힌 것은 후한 말에 불전의 한역이 이루어지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후한 말엽 환제(桓帝) 때 중국에 도래한 승려 가운데 유명한 사람으로 안세고(安世高)와 지루가참(支婁迦讖)이 있다. 안세고는 안식국의 태자였는데 부왕의 죽음으로 인해 출가하였으며 아비달마교학과 선경(禪經)에 통달하였다.

그는 환제로부터 영제(靈帝)시대에 걸친 약 20년간 오직 경전의 한역에 종사하였다. 역출 경전은 <사제경(四諦經)>, <전법륜경(轉法輪經)>, <팔정도경(八正道經)>, <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 등 34부 40권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것들은 모두 소승경전에 속하는 것이다. 안세고는 뒤에 후한 말의 소란을 피해서 남방으로 건너가 회계(會稽)에서 죽었다고 하지만 분명하지는 않다. 지루가참은 안세고보다 조금 늦게 중국에 들어왔다.

월지국 출생으로 환제의 말경 낙양에 이르러 영제시대에 <도행반야경(道行般若經)>, <반주삼매경(般舟三昧經)>, <수능엄경(首楞嚴經)>, <무량청정평등각경(無量淸淨平等覺經)> 등 13부 27권을 역출했다고 한다. 이것은 모두가 대승경전이다. 이 두 사람이 2세기 중엽에 후한의 수도 낙양에서 각기 대승과 소승의 경전을 역출한 것은 각자의 출신지에 따른 불교계통의 차이에 의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전들을 대하는 중국인들은 사성제(四聖諦), 팔정도(八正道), 십이인연(十二因緣)을 설하는 원시적인 사상형태의 소승경전과 교학의 발달한 대승경전을 동시에 수용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당시에는 대승경전과 소승경전의 성립에 대한 의문을 갖지 않았고 그 동안의 역사적 발전과정을 고려하지도 않았다. 대승과 소승의 두 가지 경전을 모두 불타의 직설이라고 받아들였다는 점이 중국불교의 특이함이다.
 

 


2) 위진 남북조의 불교

위진(魏晋)의 360여년 간은 진(秦)과 한(漢)에 걸친 400여년의 통일시대를 이어 다시 중국이 분열한 시대였다. 안세고와 지루가참이 중국에 건너왔던 후한의 환제와 영제시대는 후한의 정치적 통제력이 약화하여 붕과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던 때였다. 후한 말이 되어 관신이 발호하여 명사나 학자가 탄압을 받아 한나라 왕실의 위신은 땅에 떨어져 군웅이 봉기하고 종교반란이 끊임없이 일어나게 되었다. 마침내 한제국은 무너져 위(魏), 오(吳), 촉(蜀)의 삼국 분립시대가 되었다가 다시 진(晋)에 의해 통일되었다.

삼국 중에서 위는 화북을 점유하고 그 세력도 강하였으며, 오도 강남의 옥토에 근거하였으나 촉은 사천의 분지에 위치하고 영역도 작았다. 이 촉에 들어간 불교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기 때문에 촉의 불교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이 촉을 제외하면 삼국시대의 불교의 중심지는 북에서는 낙양(洛陽)이었고, 남에서는 건업(建業)이었다. 위, 오, 촉 삼국의 정립시대에 강북에서 활약한 번역가는 중인도의 담가가라(曇柯迦羅) 등이며, 강남에서는 오의 지겸(支謙), 강승회(康僧會) 등이 주목된다.

이 가운데 담가가라가 가평 2년(250) 낙양에서 역출한 <승지계본(僧祗戒本)>과 담제가 역출한 사분율(四分律)의 수계작법인 <담무덕갈마>는 이제까지 중국의 승려가 단지 삭발만을 할 뿐 정규적인 수계작법을 알지 못하던 것을 엄격하게 시행하기 위한 것이었고, 이 법에 따라 중국인으로서 처음으로 출가한 사람이 주사행(朱士行)이었다고 한다.

오의 지겸은 대월지국의 말예(末裔)로서 어려서 그 조부인 법도와 함께 중국으로 귀화하였는데, 지루가참의 문인 지량(支亮)에게서 배웠고 손권의 총애를 받아 박사가 되고 동궁의 보도(輔導)에 임명됨과 동시에 <대아미타경>, <유마경>, <서응본기경>, <대반니원경> 등을 번역하였고, 또 <무량수경>, <중본기경>에 의하여 <찬보살연귀범패삼계>를 제작하였으며, <요본생사경>의 주해도 달았다.

강승회는 원래 강거(康居) 사람으로 후에 인도로부터 교지(交趾:베트남 중부)로 옮겼다가 출가하여 적오 10년(247) 건업(建業)에 이사하여 육바라밀의 실천행을 설하는 <육도집경> 등을 번역했는데 그의 본 뜻은 실천포교에 있었으며 오주 손권을 귀의시켜서 강남에 처음으로 건초사(建初寺)를 건립한 것은 유명하다. 또 그는 지겸과 마찬가지로 범패에 뛰어나 미성(美聲)이었다고 한다.

위는 촉을 멸망시키고 위의 장수인 사마염은 제위를 뺏은 뒤 낙양에 도읍을 정하고 진(晋)이라고 했다가 다시 오를 멸망시키고 약 50여년 동안 천하를 통일하였다. 이것을 서진(西晋)이라고 한다. 이 시대의 번역승으로서 대표적인 인물은 축법호(竺法護)이다. 월지인의 말예(末裔)로서 돈황에서 출생했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월지보살, 돈황보살이라고 존칭되었다.

그는 8세에 출가하였고, 당시 방등(方等)경전이 서역에 많다는 말을 듣고 서역을 순례하여 많은 범본을 얻었다. 돈황으로부터 장안으로 들어가 태시(泰始) 원년(265)부터 영가 2년(308) 78세로 입적하기까지 약 40년간을 오로지 역경에만 종사하였는데 <광찬반야경>, <정법화경>, <무량청정평등각경> 등 모두 154부 309권을 번역함으로써 중국불교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는 축법호가 범어나 서역어에 정통하였다는 점과 그의 명성을 듣고 모여든 승려가 늘 수천에 이르렀으며 특히 섭승원, 섭도진 부자처럼 역장에 있으면서 그의 역경을 전어(傳語), 필수(筆受), 권진(勸進)하는 사람이 많았다는 데에 기인한다.

이어서 중국은 북방에 오호(五胡: 흉노, 선비, 갈, 저, 강)가 다투어 일어나 서진을 멸망시키고 진의 일족은 남하하여 건강에 수도를 정하고 동진(東晋)이라 불렀다.

오호가 세운 나라는 이조(二趙: 전조, 후조), 삼진(三秦: 전진, 후진, 서진), 사연(四燕: 전연, 후연, 남연, 북연), 오량(五凉: 전량, 후량, 서량, 남량, 북량), 하(夏), 성(成) 등의 16국인데 그 중 전량, 서량, 북량은 한족이지만 이것을 통틀어 5호16국이라고 한다. 따라서 북지는 모든 종족이 서로 쟁탈하여 전란이 그치지 않고 인심도 극히 각박하였으나 불교는 오히려 성행하였다.

이것은 한족에 있어서 불교는 외래종교이며 그 설하는 바도 외래의 사상이라는 풍조가 있었는데 반해, 5호 사람들은 원래 고유문화를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자유스러운 입장에서 불교를 받아들이고 통치자도 군사나 그 밖의 결단을 필요하는 사건에 대처하여 명확한 판단을 얻는 데에 주술에 능하거나 통달한 신이승(神異僧)을 환영하였다. 그 중에서도 후조, 전진, 후진, 북량의 4국에 있어서는 불교의 융성이 특히 두드러졌다. 후조는 업에 수도를 정하고 한 때는 북지 전역을 통일하였다.

불교계에서는 구자의 승려 불도징(佛圖澄)이 대표자이다. 그는 오장과 계빈에서 수학하고 서진의 영가 4년(310) 낙양에 들어갔는데 뒤에 후조의 건국자인 석륵(石勒)의 패업(覇業)을 도와 존숭되었다. 이어서 석호(石虎)에게 깊은 예우를 받게 되었으며 건무 14년(348) 117세로 입적하기까지 약 38년간에 걸쳐 불교의 홍포에 힘썼다. 불도징의 문도는 항상 수백을 넘었으며 전후 만명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그 중 도안, 법화, 축법태, 축법아, 법상 등이 다음 대의 불교계를 이어갔으며 그 가운데 도안이 으뜸이었다.

도안은 상산부류(常山扶柳)사람으로 12세에 출가하여 불도징에게 사사하여 두각을 나타냈으며 뒤에 후조 및 전연의 병란을 피해서 동학 5백여명을 이끌고 남하하였다. 그가 양양(襄陽)의 단계사에 있을 때에는 그의 명성을 듣고 따르는 자가 많았으며 문필가로 알려진 습착치 같은 사람도 도안과 깊은 교류를 가졌다. 그는 양양에 15년간 살았는데 전진의 부견은 강북을 통일하여 도안의 명성을 듣고 10만의 대군을 보내 양양을 공략하여 도안과 습착치를 장안으로 모셔왔다.

그는 이때로부터 7년간 장안의 오중사에 주석하였으며 그의 승도는 항상 수천명이나 되었고, 가르침을 전하는데 힘쓰다가 건원 21년(385) 72세를 일기로 입적하였다. 도안은 전역된 수많은 경전에 대한 목록을 제작하였는데 이것이 <종리중경목록>이며, 이를 세상에서는 <도안록>이라고 부르고 있으나 현존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양(梁)의 승우(僧祐)는 새로이 역출된 경전을 여기에 보강하여 <출삼장기집>을 편찬하였으며 이것으로 <도안록>의 원형을 복원할 수 있다. 그 뒤 <역대삼보기> 이하 각 시대를 통하여 경전의 목록이 편찬되어 후대의 불교연구에 크게 공헌하였다.

도안은 <방광반야경> 등을 강의하고, 여러 경전에 서문을 작성하고 주석을 단 것이 거의 22부에 이르렀다. 종래의 경전해석이 노장의 무(無)사상을 빌어서 불교의 반야사상을 설명하는 이른바 격의불교였고, 축법아, 강법랑, 동진의 축잠의 본무의(本無義), 지둔의 즉색의(卽色義), 축법온의 심무의(心無義) 등이 이 뒤를 따랐으나 도안은 이를 비판하고 공(空)을 일체제법 본성공적(一切諸法 本性空寂)이라고 풀이했다.

이것은 이어 구마라집에 의해 전해지는 용수의 사상을 이해하는 근저가 되었다. 종래의 출가자들의 성은 주로 출생국이나 스승의 성을 따랐는데, 도안은 이를 비판하고 출가자는 모두 불타의 가르침을 신봉하는 사람이므로 석(釋)씨로 성을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스스로 석도안으로 칭하였다.

또 도안은 승니궤범, 불법헌정삼례(佛法憲章三例)를 제정하여 종래 잡다한 행의방법을 통일하였다. 전진의 뒤를 이은 후진에서는 불교가 더욱 성행하였는데, 그 대표자는 구마라집(鳩摩羅什)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인도인인 구마나염이며, 어머니는 구자국왕의 누이인 가비가였다.

그는 7세에 출가하여 9세 때에 어머니와 함께 계빈으로 가서 반두달다에게서 소승을 배우고, 수리야소마에게서는 대승을 닦았으며 그 밖에도 여러 스승들에게서 수학을 거듭하고 구자로 돌아온 뒤로는 대승의 선양에 전념하였으며 그의 명성은 서역제국은 물론 한토에까지 알려졌다.

이 때 전진의 부견은 도안으로부터 구마라집의 명성을 전해듣고 여광(呂光)에게 구자국을 멸망시키고 구마라집을 붙잡아 오려고 했으나 도중에 전진이 멸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고장(姑藏)에 할거하여 후량국을 세웠다. 그 때문에 구마라집은 10여년 동안 머물렀으며 후진의 요흥(妖興)은 후량을 토벌하여 구마라집을 장안으로 데려갔다. 그 때 그의 나이 58세로 홍시 3년(401) 12월이었다.

요흥은 그를 국사로 예우하여 서명각과 소요원을 하사하고 후에 그를 위하여 장안대사를 건립하여 경전번역의 도량으로 제공하였다. 구마라집은 장안에서 역경에 12년 동안 종사하다가 홍시 15년(413) 4월에 70세를 일기로 장안대사에서 입적하였다.

그 동안 역출한 경전은 70부 384권에 이르렀으며 여기서 주목할만한 것은 반야, 법화, 유마, 미타 등의 여러 대승경전과 <중론>, <십이문론>, <대지도론> <십주비바사론>, <성실론>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대승론부는 이 때에 처음으로 중국에 전해졌으며 뒤에 이것을 바탕으로 하여 삼론, 성실 등의 종파가 흥기하였다. 한편 북량에서 활약한 담무참(曇無讖)이 있다.

그는 처음에는 소승을 배웠다가 뒤에 대승으로 돌아갔는데 계빈, 구자, 돈황을 거쳐서 현시 원년(412) 고장(姑藏)으로 들어가 하서왕인 저거몽손의 예우를 받았으며 현시 10년에 <대반열반경> 40권을 역출하였고, 당시 이 지역에 있던 혜숭, 도랑 등이 필수자가 되었다.

뒤에 강남에서 혜엄, 혜관 등이 사영운 등과 함께 법현의 6권 <니원경>과 이 40권본을 대교하여 새롭게 6권의 <열반경> 남본을 만들게 되었으며, 이 때문에 열반경의 연구가 성행하여 제(齊), 양(梁) 사이의 보량(寶亮), 양의 지장(智藏) 등은 각기 의소를 찬술하여 열반학파가 강남에서 번영하게 되었다.

도생, 각현 등의 강남에서 활약한 배후에는 장안의 구마라집과 쌍벽을 이룬 혜원(慧遠)이 있었다. 혜원은 21세에 그의 동생인 혜지와 함께 도안문하로 들어가 양양에 있었으나 때마침 병란이 있어서 스승과 헤어져 여산으로 들어가 동림사에서 30여년을 주석하였다. 그 동안 손님을 전송할 때도 호계까지에 그쳐 산을 내려오는 일이 없었다. 불법홍포에 전념하여 원흥 원년(402) 유유민, 주속지 등 230명의 도속들과 함께 결사하여 염불을 행하였다.

그의 염불은 오로지 <반주삼매경>에 의해서 시방현재불의 하나로서 미타불을 염하는 것으로 후세의 미타염불과는 다른 것인데 뒤에 정토교에서는 혜원을 정교종의 시조로 삼고 있다. 혜원이 강남에서 명사들을 많이 모을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신이 훌륭한 반야학자였던 데에도 원인이 있지만 유학과 노장사상에 통달하였기 때문이다.

혜원은 의희 12년(416) 83세로 동림사에서 입적했는데 그 사이에 그의 요청에 의해 각현은 <달마다라선경>을 역출하여 강남에서 선정의 보급에 힘썼다. 혜원 자신은 불교의 난해한 사상에 대해서 구마라집에서 서신을 주고 받았는데 이 서신은 <대승의장>으로 현존하고 있다. 또 그의 저작인<사문불경왕자론>은 당시 환현이 사문으로 하여금 왕자에 예배하도록 한데 반론하여 저술된 것이다.


남북조의 불교

남북조는 송(宋), 제(齊), 양(梁), 진(陳)의 남조와 북위(北魏), 동위(東魏), 서위(西魏), 북제(北齊), 북주(北周)의 북조를 가리킨다. 북위의 태무제가 화북의 여러 나라를 통일하고 나서 수가 남북을 통일하기까지 150년간을 말한다. 동진시대와 마찬가지로 화북은 호족 지배하에 있었으며 강남지방은 한민족에 의해서 통치되고 있었다.

왕조의 변천은 어지럽게 행해졌지만 불교는 동진시대를 계승하여 커다란 발전을 이루었던 시대이다. 엄청나게 번역되었던 한역불전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어 불교의 여러 학파가 성립되었던 것도 남북조 시대이다. 불교교단의 사회적 세력이 강대해졌기 때문에 북조에서는 북위 태무제의 폐불과 북주 무제의 폐불이 행해져 국가권력에 의한 불교교단의 탄압이 행해졌다.

또한 종교교단으로 성립된 도교와의 대립항쟁이 있었던 것도 남북조 종교사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북위의 낙양이나 남조 건강(建康)에서 이루어진 불교사원의 아름답고 우아한 건축, 미술이나 운강, 용문석굴에서 볼 수 있는 불교문화의 발달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남조(南朝)의 불교

남북조에 있어서 불교의 활동양상은 이전과 다르다. 강남의 불교는 귀족사회의 고답적인 사상의 논의에 의해 교학이 발전했다는 것과 법사(法社)의 형성을 그 특색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강북에서는 오호의 국왕이 불교의 신이(神異), 방술(方術)을 환영하고 이것을 열렬하게 신앙하였으며 왕이나 고관이 행하는 사탑(寺塔)의 건립, 불상(佛像)의 조립 풍조가 일반 민중에게까지 유행하였다. 송(宋)의 무제는 처음에는 승려의 수를 줄이려고 했으나 시행하지 않고 구마라집의 문하인 혜엄(慧儼), 승도(僧導) 등을 예우하고 문제(文帝)에 이르러서는 스스로 불교교리를 연구하고 상서령인 하상지(何尙之)에게 인과(因果)의 이치를 하문하였으며 고승을 내전으로 청해 경전을 강설하도록 했으며 또 중흥사에서 팔관재를 여는 등 크게 보호했다.

그리고 또 혜림(慧琳)으로 하여금 국정에 참여하게 하여 세인들이 그를 흑인의 재상이라고 불렀다. 그런 까닭에 당시의 이름난 귀족들이 불교에 관계하였으며 따라서 건강(建康)의 불교는 융성하였다. 혜림은 또 <백흑론>을 저술하여 유불의 같고 다름을 논하였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하승천(何承天)의 <달성론>, 혜원문하의 종병(宗炳)이 쓴 <난백흑론>과 <명불론>, 안연지(顔延之)의 <석하형양달성론> 등이 계속해서 저술되어 모두 불교교리를 논하였다.

제(齊)의 고제(高帝)와 무제(武帝)는 모두가 불교에 깊은 조예를 가졌으며 특히 무제의 태자인 문혜태자, 숙자량은 깊이 귀의하여 늘 고승을 초대했으며, 숙자량은 스스로 불법을 강의하고 화엄회, 용화회, 도림회를 설치하여 사신(捨身), 방생(放生), 시약(施藥)을 행했으며 일반인들을 위하여 일상적으로 실천하는 불교를 설한 <정주자정행법문> 20권을 펴내기도 하였다.

그리고 번역가로서는 <무량의경>을 번역한 담마가타야사, <선견율비바사>를 번역한 승가발타라, <백유경>을 번역한 구나비지, <법화경제바달다품>을 번역한 달마마제 등이 있다. 양(梁)대 55년간은 남조불교의 전성시대로서 특히 치세 48년에 걸친 무제(武帝)의 불교신앙은 역대 제왕 중에서 가장 돈독했다. 무제는 원래 숙자량의 문인이며 천감 3년(504) 4월 8일 불탄일(佛誕日)을 기하여 도속 2만여명을 이끌고 중운전에서 사도봉불(捨道奉佛)식을 거행하였고, 천감 10년(511)에는 스스로 단주육문(斷酒肉文)을 공표하였으며 다시 천감 16년(517)에는 제사(祭祀)를 위해 생류(生類)를 죽이는 것을 금지함과 함께 천하의 도관을 폐하고 도사를 환속시켰다.

이 때문에 양의 도사들은 북제(北齊)로 이주했다고 한다. 강남의 역경은 송(宋) 초에는 활발했으나 제(齊)와 양(梁) 2대에는 불교의 융성에 비해 완만해지다가 말기에 접어들면서 다시 남해를 경유한 역경가를 맞이하여 활발해지게 되었다. 그 대표자가 진제(眞諦)이다. 진제는 서인도 사람으로 양무제의 초청을 받고 대동 12년(546) 해로를 따라 광주에 이르러 태청 2년(548) 건강으로 들어가 무제를 만났으나 후경(侯景)의 난 때문에 부춘(富春)으로 옮긴 다음 뒤에 잠시 건강으로 돌아왔다가 양(梁) 말엽의 난을 피해 예장(預章)을 비롯하여 여러 곳을 전전하던 끝에 진(陳)의 대견 원년(569)에 광주에서 입적하였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역경에 전념하여 49부 142권의 경론을 역출하였다. 그의 역경 가운데 특히 <섭대승론>, <섭대승론석>, <대승기신론>, <십칠지론>, <결정장론>, <중분별론>, <전식론>, <금광명경>, <불성론>, <유식론>, <삼무성론>, <아비달마구사석론> 등의 번역은 섭론종, 구사종을 낳게 했으며 유식학 연구의 단서를 열었다. 진(陳)의 5세 33년간은 양의 불교를 이어받았다.

즉 문제는 양말의 전란으로 파괴된 금릉의 사찰을 복원했으며 무차대회를 열었는데 문제, 선제, 후주도 이를 따라 사신(捨身)공양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무렵에는 혜사(慧思)가 있었는데 그는 북제의 혜문(慧文)에게서 법화의 미묘한 이치를 체득하였는데 양 원제의 승성 3년(554)경 광주 대소산으로 들어갔다가 후에 다시 남악(南嶽)으로 옮겨 10여년간을 머물면서 오직 행화(行化)를 일삼았다. 그를 세상에서는 남악대사라고 부른다. <대승지관법문>, <무쟁삼매법문>, <안락행의> 등이 그의 저술이라고 알려져 있다.


북조(北朝)의 불교

북위(北魏)에 있어서도 불교는 성행했으며 특히 교단의 발전은 눈부시게 이루어져 사원수가 3만, 승려가 3백만 명이었다고 하며 특히 태조 도무제 자신도 불교를 신봉하고 보호하였고, 태종 명원제도 마찬가지였고 세조 태무제도 관중(關中)에서 국도인 평성(平城)으로 온 담시(曇始)를 중히 여겼는데 뒤에 도교로 전도하여 드디어 폐불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도교는 한말 삼국시대의 장각, 장수, 장노 등이 주창한 태평도 및 오두미도에 비롯하여 <노자도덕경>을 독송하면서 기도, 부적, 주술에 의해 치병을 일삼는 속신으로 같은 시대의 좌자, 갈현 등에 의해 창도된 신선(神仙), 양생(養生), 단약(丹藥)의 방술과 합류하여 조직화되어 천사(天師) 밑에 도강, 제주, 도둑, 주부, 간령, 귀사 등의 직제를 두고 널리 신도를 획득하였다.

다시 거기에 노장의 철학을 가미하여 서진시대에는 제주왕부가 하내의 불승인 백원(帛遠)과 더불어 도불의 논쟁을 하여 <노자호화경>을 만들만큼 발달하였다. 이어서 동진시대에는 갈홍이 <포박자>, <신선전> 등을 저술하였고, 여산의 도사인 육수정이 송의 명제의 명을 받아 건강의 숭허관주가 되어 <상청진경>을 비롯한 도교경전을 증보하고 모든 파의 도교를 정리하여 통진, 통현, 통신의 삼통으로 분류하여 그 목록인 <현도관경목>을 만들었다.

그리고 양의 도사인 도홍경도 모산에 은거하면서 <진고> 7편을 만들었고, 북위의 구겸지에 이르러서는 도교가 국가적 종교로까지 발전하였다. 구겸지는 20년간 숭산에서 수행 후 태상노군(太上老君: 노자)에게서 천사의 위와 <운중음송신과지계> 20권을 전수받았다고 칭하면서 북위의 수도인 평성으로 나와 사도 최호의 존경을 받고 그의 추천에 의해 태무제의 신임을 받게 되었다.

태무제는 이 때문에 평성의 동남부에 천사도량을 세우고 스스로 태평진군이라 칭하고 연호도 태평진군(太平眞君)으로 바꾸고, 사문을 탄압하고 가혹한 폐불을 단행하였다. 그 주모자는 구겸지와 최호이지만 그 배후에는 당시 호족과 한족과의 항쟁이 있었고, 당시 교단의 경이적인 발전은 승려의 타락과 교단의 부패를 가져왔으며 거기에 사원과 승려의 증가로 인해 국가경제의 피폐도 폐불을 단행하게 한 하나의 요인이었던 것이다.

개오(蓋吳)의 난을 친정한 태무제는 태평진군 7년(446) 2월 장안의 한 사원에 많은 병기를 감추어 놓고 실내에 양주구나 부녀의 밀실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개오와 내통한 모의와 불교의 타락에 개탄한 나머지 최호 등의 진언을 받아들여 폐불을 단행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구겸지가 죽고 최호는 족주(族誅)되었다. 폐불 후 6년 태무제가 죽고 문성제(文成帝)가 즉위하자 불교부흥의 칙서가 내려졌다. 이 때에 담요(曇曜)는 사문통으로 임명되었고 교계에 군림함과 동시에 대동운강의 대석굴을 개착하였으며, 헌문제(獻文帝)도 장육석가상을 조립하고 또 높이 약100m의 영녕사탑을 건립하였다.

효문제(孝文帝)는 도등(道登), 승연(僧淵) 등을 스승으로 하여 낙양에 천도하면서 용문에 대석굴을 개착하였다. 선무제(宣武帝)는 스스로 보리유지의 역경에 필수를 담당하였으며 당시 서역에서 도래한 사문만도 3천명에 이르렀다고 전해진다. 따라서 이 때에 경전번역사업이 가장 성행했다. 담요는 길가야와 함께 <잡보장경>, <부법장인연전> 등을 번역하였고, 인도승 보리유지, 늑나마제, 불타선다는 선무제 치하에서 활약했는데 그들이 번역한 <십지경론>은 지론종을 흥기시켰고 남북 2도파로 갈라져서 <화엄경> 중시의 풍조를 만들었다.

보리유지는 <금강반야경>, <입능가경>, <무량수경론>을, 늑나마제는 <보성론>을, 불타선다는 <섭대승론>을 번역했다. 북위는 분열하여 동위(東魏)와 서위(西魏)로 갈라지고, 각기 업과 장안에 수도를 정했으며 동위는 고환, 서위는 우문태가 다스렸다.

이어서 고환의 아들인 고양이 북제(北齊)를 건국하고(550), 우문태는 형의 아들인 우문호가 혁명을 일으켜 북주(北周)를 건국하고(557) 우문태의 아들인 우문옹을 옹립되어서 무제가 되었다. 고양 즉 북제 문선제의 봉불은 강남의 양무제에 비유되며 혜광제일의 문인인 법상(法上)을 계사로 하여 천보 6년(555) 폐도(廢道)의 칙을 내릴 정도였으나 이에 대립하는 북주의 무제는 부국강병책을 강행하는 데 있어서 절과 승려가 많다는 것을 무익하다고 여겨 폐불을 단행하였다.

즉 천화 2년(567) 환속승인 위원숭의 폐불에 대한 상소 및 도사 장빈의 암약을 발단으로 무제는 천화 4년(569)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승려, 도사 및 중신을 불러 유불도(儒佛道) 삼교의 우열을 논하게 하였으며 그 동안에 불교도측에서는 견란의 <소도론>, 북주 도안의 <이교론> 등의 상소도 있었으나 무제는 건덕 3년(574) 3월 도불 2교를 모두 폐한다는 칙서를 내렸다.

이로 인하여 사원의 경전과 불상은 모조리 파괴되고 승려도 모두 환속하게 되어 군민에 편입되었으나, 지조가 굳은 승려는 대부분 법란을 피해서 산중으로 숨거나 강남으로 옮겨갔다. 이러한 폐불로 말미암아 북주의 불교는 한 때 파멸지경에 이르렀으나 얼마 안 가 무제가 병사하고 이어서 즉위한 선제, 정제 때에는 다시 불교가 부흥하였다.

 


3) 송(宋)의 불교

귀덕군의 절도사인 조광윤은 후주의 선양를 이어 제위에 오른 뒤 송(宋)을 건국하여 수도를 개봉에 정했다. 후주의 현덕 2년(955) 세종의 파불사건을 이어받은 송태조는 먼저 불교의 부흥정책을 취하여 민심의 파악에 힘썼다.

건릉 원년(960) 6월에는 천하의 제사원에 칙서를 내려서 후주가 발한 무액사원의 폐훼에 대한 정지를 명하여 폐해야 할 사원으로서 아직까지 그대로 남아있는 사원의 존속을 허락하고 이미 폐한 사원의 불상을 옮기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새로운 조사나 도승에 대해서는 제한을 두었으며 세종의 숙청정책을 답습하면서도 극단적인 면만을 시정하였다. 태조는 건국의 해에 황제 탄생일인 2월 16일을 장준절이라 정하고 수도인 개봉의 상국사로 백관을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었다.

그 후로 태조는 종종 상국사로 행차하여 기우의 건재를 올렸고 개보 2년(969)의 장준절에는 천하의 사문에게 경율론의 교의 10조를 전시(殿試)하였으며 이에 장원한 자에게는 자의(紫衣)를 하사하였다. 시경도승(試經度僧)과 전시(殿試)에 의한 교단의 숙청 및 승니의 향상을 기하였다.

태조의 칙서에 의해서 우가응제사문인 문승은 <대장경수함색은> 660권을 편수하였으며, 또 개보 4년(971) 고품의 장종신에게 촉의 익주로 가서 대장경판의 조조(雕造)를 하도록 명하였다. 이러한 태조의 불교 보호정책은 태종에 이르러 송조(宋朝)의 기초확립과 함께 성과를 보게 되었다. 태종은 태평흥국 원년(976) 칙서를 내려서 천하의 동자들을 널리 제도하였는데 그 수가 17만명에 이르렀다.

그 다음 해 동경의 태평흥국사에 개선전을 세워 태조의 어용(御容)을 봉안하여 선제향화의 대사로 하였다. 이것은 후주이 세종에 의한 파불로 폐해졌던 용흥사가 부흥된 것이다. 현서, 감숙지방이 송의 판도에 들자 서역과의 교역도 열리게 되어 우진, 고창의 사문들이 왕래하였다. 창수의 사문 도원은 인도로 건너가 18년간을 내왕하면서 불사리와 패엽의 범경 등을 진헌하였다. 그 때 천축구법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승려를 모집하였는데 157명이 응모하였고, 그들에게 행장전(行裝錢)을 하사하여 파견하였다.

이 같은 기운을 타고 서인도의 사문 가지, 법견, 진리 등 세 사람이 오게 되었으며 이어서 남인도 사문 미라 등 14명이 들어왔다. 중인도의 법천삼장인 범진이 집필철문하였으며 왕구종이 윤문하였다. 왕구정의 상소에 의해서 태조가 이를 알고 법천을 궁중으로 불러서 자방포(紫方袍)를 하사하였다. 또 법진은 법천삼장으로 하여금 불전번역사업을 일으키도록 진언케 하여 태종의 윤허를 받았다.

이 무렵에 천식재와 시초 두 삼장이 내조하여 이때부터 역경사업이 착수되었다. 태종은 중사 정수균에게 명하여 동경 태평흥국사의 서쪽에 역경원을 세우게 했으며 중앙을 역경당이라 하고 동서를 윤문당, 서서(西序)를 중의당이라 이름하였다. 태평 흥국 7년(982) 6월에 이 역경원은 준공하였고, 천식재 등 여러 삼장이 주석하여 가지고 온 범본을 역출하게 되었다.

송대의 국가사업으로 태평 흥국사의 역경원에서 새롭게 번역된 경전은 천식재의 <성불모경>, 법천의 <길상지세경>, 시호의 <여래장엄경> 각1권이며 이것들은 모두 대장경에 편입되어서 개판유행하게 되었다. 이 때부터 금지되었던 범본의 번역이 차츰 이루어지게 되었으며 매년 신역불전을 진헌하였으며 신경은 모두 대장경에 입장하여 유행시키게 되었다. 송의 역경사업은 태종, 진종때부터 인종 때까지 계속되었다.

대중 상부 8년(1015)에는 양억, 유정 등에 의해서 <대중상부법보록> 21권의 신역경전목록이 작성되었고, 그 속록으로서 경우 4년(1037) 유정 등에 의한 <경우신수법보록> 21권이 있다. 이를 전후하여 <천축자원>과 <신역경음의> 70권의 사서(辭書)가 저술되었으며, 천성 5년(1027)의 <천성석교총록> 3권은 당의 개원록, 정원록에 송대의 신역입장경전을 포함시킨 흠정대장경의 총목록이다.

불사와 승려의 중가에 따라 불전의 수요도 늘어나서 사경 외에 경문을 목판에 새겨서 그 판목으로 다량의 경전을 인쇄하는 새로운 형식이 생겨났다. 이 점에 만당(晩唐), 오대(五代)는 구식인 사경에서 신식인 인경(印經)으로 옮겨지는 과도기를 맞이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이 서력 10세기의 북송에 이르러서는 대장경의 출판을 보게 되었다.

송의 태조는 개보 4년(971) 고품인 장종신을 촉의 익주로 보내서 대장경판의 조조를 명하였다. 이 대사업은 그 후 12년이 걸려서 태종의 태평흥국 8년(938)에 완성을 보게 되었다. 그 내용을 보면 개원록에 수록한 경율론 등 5천여권, 그 판목수는 십만여판이나 되는 방대한 양이었다.

이것은 개판지의 이름을 따서 촉판이라고 부르며 북송의 칙판대장경이라고 불리웠다. 이 대장경의 판목은 태평 흥국 8년 익주 성도에서 수도인 동경 개봉부로 진상했다. 그래서 태종은 태평흥국사 역경원 서쪽에 인경원(印經院)을 창립하고 여기에 경판을 보관하고 인쇄하였다. 이 때에 인경원은 역경원과 함께 전법원(傳法院)이라고 총칭하기도 했다.
 

 


4) 원(元)의 불교
 
원을 일으킨 몽고족은 요, 금의 시대에는 외몽고 지방에서 유목생활을 하고 있었으나 12세기말에 태무진이 몽고의 부족을 통일하여 내외몽고에 세력을 키워갔으며 1206년에는 대한(大汗)의 위에 올라 징기스칸이라는 존호를 받았다. 그가 바로 원의 태조이다. 태조는 먼저 서하(西夏)를 멸망시키고 금을 압박했으나 봉선(鋒先)을 서쪽으로 돌려 대서정(大西征)을 시작하였다.

이 서정은 태종시대까지 계속되었으며 몽고군은 유럽에까지 진출하였다. 서하와 급도 몽고군에게 항복하였으며 한반도까지도 그 세력하에 들어갔다. 세조시대에 이르러서는 드디어 남송을 멸망시키고 전 중국을 지배하게 되었으며 원조가 출현했던 것이다. 원은 징기스칸이 즉위하고부터 멸망할 때까지 162년간 국호를 원으로 바꾼 세조의 즉위부터는 11대 190년간 계속되었다.

원조는 그 지배 지역내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에 대해 평등하고 관대한 태도를 취하였다. 적어도 반몽고적 색채를 띠지 않는 한 종교에 대해 자유로운 포교활동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라마교는 티벳에서 일어난 불교의 한 파이지만 티벳 재래의 봄보교와의 융합하여 독특한 밀교적 색채를 띠고 있었다. 몽고에 들어온 라마승은 나마였다.

그는 헌종시대에 전 몽고제국내의 석교(釋敎)를 총령하고 아울러 국가의 추기(樞機)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원대의 라마승으로써 가장 유명한 사람은 팔사파(八思巴)이다. 그는 사키야파의 승려로 세조의 절대적 신임을 받아 국사가 되고 티벳 및 구서하령(舊西夏領)의 일반 행정권과 몽고 제국내에 전 불교계를 통섭하게 되었다. 그는 또 한편으로 세조의 명을 받아서 티벳문자를 바탕으로 하는 몽고신자 이른바 팔사파문자를 제정하였다.

이 문자를 사용한 것으로는 원말 순제 때에 만들어진 거용관과가탑(居庸關過街塔)에 새겨진 다라니와 그 밖의 것으로 알려졌다. 팔사파의 활약으로 라마교와 원조정과의 관계는 밀접하게 되었다. 이후 원조정은 라마승을 제사로 존숭하고 역대 황제는 제사로부터 수계를 받는 것이 상례로 되었다.

세조의 지원 6년(1269) 불교와 티벳 관계사항을 처리하는 기관으로서 총제원(總制院)이 설립되었는데 나중에 선정원(宣政院)으로 개칭되었다. 이것은 제사(帝師)에 직속하여 일반 행정기구의 중책인 중서성(中書省)과는 따로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제사의 명령은 소칙과 같은 권위로서 시행되었다.

선정원의 장관을 원사(院師)라 하였는데 2명을 정원으로 하여 그 하위자는 반드시 제사가 추거하는 승려로 하고, 동지(同知), 부사(副使), 참의(參議) 등도 각기 두 사람씩 승속병용으로 하였다. 그 후로 왕실의 라마교 우대가 고조됨에 따라서 이 기구도 확장되었고 명종의 천력 2년(1329)에는 원사가 10명까지 증원되게 되었다. 남송의 고토인 강남에 대해서는 세조 때에 항주에 강남석교총통소(江南釋敎總統所)가 설치되어 관내에 교단을 총령하고 그 장관인 총통에는 처음에 라마승이 임명되었다.

문종 때에는 불교통섭제도의 개혁이 행해졌으며 중앙의 선정원 밑에 전국적으로 16의 광교총관부(廣敎總管府)가 분치되어 불교교단을 획일적 조직으로 총령하였는데 이것도 얼마 안 가서 폐지되고 행선정원이 부활되었다. 지방의 주현에는 각기 승관이 설치되어서 그 지방의 불교일반을 감독하였다. 선정원과 함께 불교관계의 관부로서 중요한 것에 공덕사사(功德使司)가 있다.

공덕사사란 황제국가가 수공덕(修功德)을 위해서 행하는 불교적 사업을 처리하는 관부를 말한다. 지원 17년(1280)에 창설된 뒤로 때로는 중절한 때도 있었으나 문종시대까지 존속되어 불사집행의 추진역이 되었다. 공덕사사의 장관을 공덕사라 하여 10명으로 정해져 있었으나 때로는 6명일 때도 있었다. 불사를 행하기 위한 기관으로는 따로 연경사(延慶司)가 있었다. 이것은 지원 21년(1361)에 설치되고부터 원말까지 계속되었다.

이것은 주로 왕실의 사적인 불사를 집행하는 것이었다.
 

 


5) 명(明), 청(淸)의 불교

원말의 천재기아에 의한 사회불안 속에 미륵교비(彌勒敎匪) 한산동과 한림아 부자의 반란이 확대되어 드디어 송국(宋國)이라고 이름하였다. 곽자홍의 부하인 주원장은 원래 황각사의 승려였는데 환속하여 병졸이 되었다가 부장이 되어 군옹을 파하고 금릉에 도읍하여 명(明)이라 호하고 제위에 올라 홍무(洪武)라고 개원하였다.

명조는 사원생활을 체험한 제왕의 독재하에 시정 또한 보수적이었으며 반란의 기반이 되기 쉬운 불교교단을 단속하면서 보호하였다. 원의 선정원의 제도를 본따서 불교통제기관으로서의 선세원(善世院)이 금릉의 천계사에 설치되었고 통령(統領), 부통령(副統領), 찬령(贊領), 기화(紀化) 등의 승관제가 정해진 것은 홍무 원년(1368)의 일이다.

홍무 15년(1382)에는 선세원이 승사록으로 바뀌었고, 선세(善世), 천교(闡敎), 강경(講經), 각의(覺義)의 승관을 두게 되었으며 지방의 부주현에는 각기 승강사(僧綱司), 승정사(僧正司), 승회사(僧會司)가 있어서 중앙집권적인 불교통제기관이 확립되었다. 또 홍무 6년(1373)에는 계율을 잘 지키고 경전에 능통한 자만이 도첩을 청할 수 있게 되었으며 여자는 40세를 넘어야만 출가하여 승니가 될 수 있다는 규정이 제정되기도 했다.

송 이후 사원에서의 선(禪), 교(敎), 율(律)의 분류가 명대에서는 선(禪), 강(講), 교(敎)의 세 가지로 분류되었다. 이 분류에 따라서 홍무 15년에 선승은 다갈색인 옷과 홍조 옥색의 가사를, 강승(講僧)은 옥색 옷에 홍조 천홍의 가사를, 교승(敎僧)은 백의와 흑조 천홍의 가사를 착용하도록 규정하였다.

또 명불교를 대표하는 선과 정토에 대해서 염불은 참선을 방해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실로 참선에 도움이 된다고 하는 선정일치를 주축으로 하는 각 종파의 호융(互融)은 명대불교의 특색이다. 이러한 경향은 이 시기에 불교 홍포에 힘쓴 주굉, 진가, 덕청, 지욱 등 사대사(四大師)에게서 볼 수 있는 공통점인 것이다.

운서 주굉은 절강 인화사람으로 화엄을 변융에게서, 선을 소암에게서 받아 정토에 귀의하여 지계 염불하였다. 그는 응경 5년(1571)에 항주 운서사로 들어가서 염불삼매에 들면서 교화에 전력을 다했다. 승속의 문제가 천여명이 되었으며 선정동귀설(禪淨同歸說)을 취하고 화엄교설에 의하여 설명하면서 제종융합의 신불교제창에 힘썼다.

그의 저서로는 당시 승풍숙정을 강조한 <치문숭행록(緇門崇行錄)>을 비롯하여 <아미타경소>, <왕생집>, <범망경계소발은>, <죽창수필>, <선관책진>, <자지록>, <수륙의궤>, <운서공주규약> 등 교의, 일상생활, 의궤 등 각 방면에 걸친 저술이 매우 많다. 자백 진가는 강소오강 사람으로 화엄의 변융에게서 심인(心印)을 얻었으며 주굉과는 동문이다. <아미타불찬>, <무량수불찬> 등에 의해서 염불을 고취하고 있다. 그는 만력 후반기의 정치적 대사건이었던 광해사건에 연좌되었고, 또한 황태자 책봉에 관한 요서(妖書)의 와중에 휘말려 옥사하고 말았다.

그는 불전의 보급이야말로 불법흥륭의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여겨 번독(飜讀)에 편리한 <방책본대장경>의 출판에 힘썼다. 감산 덕청도 변융, 소암, 운곡 등에게서 배웠으며 뒤에 여산에 초암을 짓고 염불행에 힘썼다. 그에게는 <법화경통의> 7권, <원각경직해> 2권, <조론약주> 6권, <감산대사몽유집> 55권, <감산어록> 20권 등의 저술이 있다. 이들은 모두 선, 화엄, 염불의 회융에 의해서 모든 종파가 조화를 이루려는 것이었다. 또 <중용직해>, <노자해>, <장자내편주> 등도 불교사상에 의해서 유, 도의 전적을 해석하고 3교의 일치를 시도하였다. 우익 지욱은 강소목독 사람인데 앞의 세 사람들보다 약 50년후에 태어났다.

그는 천태를 종으로 하였다. 사명 지례의 설을 계승하여 <교관강요>, <대승지관석요>를 저술하였고, <아미타경요게>, <능가경의소>, <점찰경의소>, <범망경합주>, <열장지진> 등 40부에 이르는 저술도 있다. 그는 ‘선은 부처님 마음이고, 교는 부처님 말씀이며, 율은 부처님의 행이며, 이 세 가지가 구비되어야만 비로소 완전한 불교가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천태종에서 출발하였으면서도 정토종을 종(宗)으로 하여 선, 교, 율의 사상실천을 융합한 신불교의 제창자로서 명대불교의 귀결을 대표한 인물이다.

또 <사서우익해>, <주역선해> 등 유교에 관계되는 저서도 있다. 기독교에 대해서는 주굉과 마찬가지로 적극적인 배격을 하였으며 <천학초징>, <천학재징>과 같은 저서도 있다. 명의 만력 44년(1616) 만주에 있었던 여진족의 부족을 통일한 노이합적(弩爾哈赤)은 한위(汗位)에 올라 나라를 세우고 천명(天命)이라 개원했다.

그 후 30년 동안에 명을 멸망시키고 천하를 통일하고 순치제(順治帝)에 이르러서 입관하여 북경을 국도로 정하였다. 청의 왕들은 만주시대를 포함하여 불교(라마교)에 대해서는 이번정책(理蕃政策)의 입장에서 존숭하였다. 특히 옹정제는 황태자가 살고 있는 궁전을 불교사원으로 만들어서 옹화궁이라 이름하였고, 스스로는 원명거사라고 칭하며 선불일관설(仙佛一貫說)을 취하여 3교를 함께 행하기를 주장하였으며 선법에 대해서도 교(敎), 선(禪), 정(淨)의 조화를 설하였다.

순치 중에 불, 도 2교에 대한 국가통제의 기관으로서 승도관(僧道官)을 두었으며, 불교측에서는 승록사, 승강사, 승정사, 승회사가 중앙에서부터 지방의 각 행정기관에 설치되었다. 불교교단은 승관에게 속박되고 사원의 신축, 출가득도나 승니의 사행(私行)에 대해서까지 엄중한 제한을 받게 되었고 종교적 활동의 자주성을 상실한 법제하에 놓여졌다. 청초에는 명대 불교계의 추세를 이어받아 선종, 특히 임제종이 성행하였다.

그 중에도 천동 원오, 경산 원수, 동계 성충 등의 세 파가 역대 군주의 존숭을 받았으며 많은 명승을 배출하여 청대 불교의 지도적 역할을 하였다. 또 진강 금산사, 고민사, 상주 천녕사의 세 총림을 비롯하여 서천목산 선운사, 항주 영은사, 영파 천동산 홍법사 등은 강남의 대표적인 명찰로서 이들 세 파의 사람들이 활약한 곳이다. 이 파의 대표적인 승려는 천동 도민, 감박 성총, 옥림 통수 등이다.

한민족의 문화정책의 입장에서 이미 강희제 때에 명의 만력판에 이어지는 <속장경>, <우속장경>이 보각되었다. 이어서 칙판한문대장경이 옹정 건륭년간에 북경에서 조각되었고, 건륭 13년(1748) 2월에는 <어제중간장경서>가 하사되었고, 같은 해 12월에는 7838권의 완성을 보았다. 이 밖에도 건륭제는 한문대장경의 만주어역을 계획하여 건륭55년(1790)에 완성하였다. 이것들은 모두가 만주 조정의 문화정책과 통치정책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들이다.
 

 

 

3. 한 국  불 교 사 (1) -고대,근대불교사
                                                               김 선 영

 

목  차

                                      
 1.고대 삼국 시대의 불교                  4.조선왕조 시대의  불교
      1.고구려의  불교  수용                     1.건국초 불교
      2.백제의  불교  수용                       2.억불정책 (1)
      3.신라의 불교 수용                         3.세조의 불교 장려정책 
      4.신라  불교의 전개                        4.억불정책 (2) 
        1>신라 왕실의  호국  불교                5.문정대비의 불교부흥  
        2>신라  불교학의 발전-의상               6.청허휴정(淸虛休靜)과 당시의
        3>신라의  통불교적 발전-원효                             구국흥법(救國興法)

 2.통일 신라의 불교                       5.근대불교
      1.신라불교의 타락과 선종의 수용            1.일제 불교의 영향
                                                2.항일 불교 운동
 3.고려 시대의 불교
      1.왕실.호국불교
      2.천태종의 개창
      3.무신정권 아래에서의 불교
      4.민중불교 항쟁과 귀족 불교
      5.고려의 미륵 신앙

 

 

 

  부처님의 가르침이 이 땅에 전래된지가 벌써 1600여년을 넘고 있다. 우리 대중들과 생사 고락을 같이 하면서 민족 종교로서 면면히 이어져 오긴 하지만 세월이 흐를 수록 맹목적이고 기복적인 신앙 형태로 변질되어 버렸다. 무엇인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어버린 이 시점에서 불교의 혁신은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그리고 항상 대중과 함께 해온 불교였지만, 한번 제대로  불교에 대한 정확한 이해나 평가의 기회는 적었던 것 같다. 이번 기회로  가급적 많은 자료를 가지고 정확하고 공정하게 쓰려고 했지만, 아직 미흡한 점이 많다.
  한국불교사에 관한 서적이 너무 전문인들을 중심으로 씌어진 까닭에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많았고 특히 해방후의 한국불교사에 대한 연구자료가 거의 전무하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싶을 정도였다. 자료상으로도 많은 부족함이 있었고 그 부족한 자료로 정리하느라 오히려 어려운 점이 많았다. 그리고 한정된 지면 관계로 간단하게 소개만 하는 형식으로 넘어간 부분이 많은데 이 책의 말미에 기록한 참고서적을 통하여 보다 나은 이해를 돕기 바란다.
제목은 {한국불교사} 라는 이름을 빌어 서술했으나 다분히 주관적인 관점이 많이 제시된것 같다. 하지만 여기에 제시된 것들은 본인의 생각이 아니라 이미 기존에 존재하는, 많은 연구 논문에 의해 이미 발표되었던 것임을 밝혀 둔다. 이는  다양한 관점을 제시하고 싶었던 본인의 바램이었다.
  여기에서는 한국 불교사를 그 시대 변화에 따라 서술하되 불교의 변화 양상과 그 이유를 제시하였다. 또한 각 시대를 이끌었던 승려들의 사상이나 활동을 간략히 소개하고, 그들 사상의 장단점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마지막으로 이 글이 불자들의 눈과 귀를 뜨게 하여 한국불교를 제대로 인식하도록 하여 잘못된 길로 오도 되지 않기를 바라며 작업에 참여할 기회를 제공해 주시고 물심양면으로 도와 주신 선배님들과 법우님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1.고대 삼국 시대의 불교


  한국 불교는 중국 불교의 전래에서 시작되었다는 북방전래설이 정설로 되어 있다. 고구려의 경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면 372년(소수림왕 2년), 전진왕 부견(符堅)이 사신과 승려 순도(順道)를 통해 불상과 불경을 보냄으로써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양고승전(梁高僧傳)과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에 동진(東晋)의 고승 도림(道林)이 고구려 승려에게 청담격의(淸談格義)불교의 대표자인 법심(法深)을 소개하는 서신을 보냈다는 기록으로 보아 372년이전에 이미 문화교류의 방편으로 민간경로로 전파되었음을 알게 한다.
  이 당시의 왕권은 민중에 대한 지배의 필요성과 자기네 지위를 신성시 해 주던 재래 신앙(자연신과 조상신 숭배)의 기능이 약화 됨에 따라 새로운 지배이념을 필요로 하였다. 그리하여 372년 왕실이 불교 수용의 주체가 되어 중앙 집권적 지배 체재를 정비 하는 데 이용하게 된다.
  한편 전진왕이 불교를 전하게 되는 것은 당시 중국 북방을 정복하고 남방의 동진과 대치한 상황에서 후방인 동북방의 견제의 필요에서 고구려와 관계 개선을 위한 문화 교류의 한 방편이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또한 고구려에 공식적으로 들어온 전진 불교는 도안의 새로운 불교였다.
  따라서 고구려의 불교는 민간 경로를 통한 격의적 불교와 왕실을 통한 도안적 불교의 두 가지 형태로 발전이 가능했다. 그래서 전자의 경우, 사회에 토착화 되어 민간 사회나 지방 사회의 신앙적인 기반을 형성할 수 있었고 후자는 공식적인 불교가 왕실의 지원 아래 순도에 의해 포교되면서 중앙 왕실이나 지식층에 기반을 두고 발전해 나갔다. 따라서 다른 삼국에 비해서 아주 두드러진 발전을 할 수 있었다. 이의 대표적인 예로 고구려에서는 승려 학자 승랑을 배출 하였는데 그는 `섭산의 고구려 승랑 대사'라고 불리었으며 그는 고구려 불교의 주체적인 수용에 앞장서면서 존재와 無의 변증법적인 지향을 밝혔다. 그러나 그의 진보적인 인식론도 관념론적 제약으로 인해 변혁적인 세계관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봉건 지배자에게 봉사하는 한계를 극복치 못했다.
  그 후 불교의 주류는 삼론종이라는 학문적인 경향으로 기울었고 그 당시 고구려의 불교가 어떤 상태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여기에서 한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광개토대왕은 고구려 최대의 영토를 차지한 왕이다. 그의 계속되는 정복 전쟁속에서 죽는 것은 백성들 뿐이었고 그런데도 계속 불교를 신봉하라는 교령을 내렸다. 그리고 권력에 의해 짓밟힌 민중들의 행복을 신앙의 위안과 복으로써 보상받게 하여 민심을 수습하려고 하였다. 이는 기복신앙적인 호국불교의 최초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고구려의 호국불교는 [중생의 이익과 안락을 위하여 진리를 말하라.] 는 석가모니불의 본 뜻과는 달리, 거짓말과 시기와 간첩질을 하면서까지 철저히 지배권력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권력의 이익을 위해 민중을 배신하고 수탈에 일조하는 이른바 호국불교의 허구성과 모순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하지만 당 태종 침략시에 나타난 승려들의 반외세 투쟁으로, 최초 승군이 있기도 했지만, 이것도 또한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정권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진정 중생을 위한 것이었는지, 또한 호국불교라는 말이 팔만대장경에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말인데 도대체 언제 부터 어디에서 나온 말인가? 말만 호국불교라 외치지 말고 그 뜻을 한 번 음미해 볼 필요성을 느낀다.
말년에는 불교, 유교와 함께 도교가 당에서 전래되어 성행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고구려 말 영류왕( 榮留王 ), 보장왕 시대에는 사람들이 다투어 도교의 일파였던 오두미도(五斗米道) 의 가르침을 받았다 한다.
  기복을 위한 기도 불사로서 왕실에서 수용한 불교는 국민의 정신 통일의 크나큰 역할을 했지만 말기에 이르러 특히 연개소문에 의해 배불정책이 일어났고 재차 당에서 도교가 들어오자 백성들은 다투어 오두미도( 五斗米道 )를 신봉하였고 결국 불교는 쇠약해지고 훌륭한 불교 승려들은 일본이나 신라로 망명하기에 이른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면 백제 384년 (침류왕 원년)에 동진에서 온 인도 승려 마라난타에 의해 백제 불교가 시작되었다. 인도의 승려이거나 중앙 아시아 출신으로 생각되는  마라난타는 해동고승전에 의하면 신통한 이적을 가진 사람으로서 백제왕은 그를 궁중으로 맞아들여 예를 다하여 공경했다. 이는 왕실이 그의 신통력 주술에 의지하여 왕실의 안녕을 빌고자 하고 또한 재래신앙에 대신하여 전란에 동요하는 민중을 통제할 지배이념으로써 불교를 수용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반야 사상과 정토 신앙이 봉건 지배층에 의해 사용되어 그들의 착취를 은폐시키고, 민중의 저항의식을 마비시키기 위해 왜곡된 불교 신앙으로 적극 보급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392년(아신왕 원년)에는 왕이 불교 신앙을 대대적으로 권장하였다. 그는 '불법을 숭상해서 복을 구하라'는 소칙을 내렸고, 민중에게 불교의 신봉을 권유했다.
그 후 170여년간 백제는 대외적으로 정치나 경제적인 면에서는 약했다. 하지만 불교의 발전은 그 동안에도 계속 이루어 졌던 것으로 짐작된다. 대표적으로 겸익의 `미륵 불광사 사적'의 편찬 업적을 통해 알 수 있는데 - 이것은 백제 율종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  그러한 것은 단시일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지난날의 불교 업적의 축적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백제는 불교가 매우 성행했는데 그것은 당시 미륵 정토신앙과 결합 하여 실천 불교로서 민중 속에 뿌리 내리는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민중에게는 미륵신앙이 뿌리 깊었고 왕실 측에서는 계율학이 주종을 이루고 있었다. 이로인해 왕실의 지지아래 율종과 계율 연구가 매우 활발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법왕의 '살생 금지령'을 통한 국민적 계율 실천이 가능했었던 것 같다.

 

  신라의 불교 공인은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150년 가량 늦은 법흥왕(528년)때 이루어 진다. 하지만 여러 자료를 통해 이미 그 이전 부터 (고구려에 불교가 들어 온지 40 - 80년 후에) 고구려에서 신라로 불교가 들어온 듯 하며 그 경로가 공식적이지 못한 터라 은밀하게 포교되었다. 하지만 이 당시의 불교는 기복 신앙의 형태였고 공인되지 못한다. 그러다가 향의 전래를 계기로 왕실에 공식적으로 불교가 전래되었다.
  신라에서 나타난 불교 수용 과정에서의 갈등은 두 가지로 파악된다. 첫째로 사회적 정치적 갈등을 들 수 있다. 이차돈 등의 불교도의 불교 공인 요구와 왕권 신장 및 중앙 집권적인 지배 체제 확립을 위한 새로운 지배 이념을 필요로 하는 왕권의 요구가 상응한데 반해, 부족 합의제의 고수를 지향하는 전통 귀족 세력은 법흥왕과 이차돈의 불교 승인요구를 극력 거부 하였던 것이 그 형태이다. 둘째로 종교적, 문화적 갈등을 들 수 있는데, 법흥왕의  불교 승인 요구에 대하여 귀족층과 전통 부족 세력을 대표하는 대신들이 승려들의 머리모양, 옷차림새 그리고 그들의 언변에 상당한 비난을 가한 것이었다. 이러한 갈등에도 불구하고 불교가 신라에서 공인되었는데 그 과정상 결코 순조롭지는 못했다.
  법흥왕 때 (527년) 귀족들의 봉불(奉佛) 반대 주장에 대하여 이차돈(異次頓)은 자신의 목을 베어 분분한 의견을 결정토록 자청했고, 이차돈은 죽음에 임하여 "나는 불법을 위해 형을 받는다. 부처님이시여 만약 당신께 신(神)이 있다면 나의 죽음을 통하여 이적을 행하소서." 이런 말을 끝으로 처형되었다. 이차돈의 목을 베자 흰피가 솟구쳤고 사방이 캄캄해지면서 땅이 진동하고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등 이적이 나타나 중신 귀족이 더 이상 왕의 뜻을 거스를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여기에서 한가지 재미있는 것이 있다. 삼국사기의 김부식은 이차돈의 죽음을 그대로 종교적인 이유로 묘사하고 있고 삼국유사의 일연은 정치적인 이유로 묘사하고 있다. 당시 불교를 받아들이려는 주체는 대왕(大王) 이었고 그를 결사적으로 막으려는 것은 군신(群臣) 들이었다. 즉 법흥왕이 그의 왕권을 강화 하고 귀족세력을 억누르기 위한 일종의 정치적인 쇼로써 그 일을 벌였고 봉불을 반대하던 군신들에게 연대 책임을 물게 하여 그네들의 세력을 약화 시키기 위한 것으로도 보인다. 또한 '흰 젖빛의 피 ' 는 신화적 기술 양식의 일종으로 당대 왕 측근들에 의해 조작된 풍문으로 간주 할 수도 있다. 어찌되었건 이차돈의 죽음을 계기로 법흥왕은 불교 수용 정책을 강력히 관철시킬 수 있었고 그리하여 부족합의제를 지향하던 귀족층의 반대를 누르고 불교를 공인하고 중앙 집권적인 왕권 전제 통치를 강화해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이렇듯 왕실에서는 지방세력을 억제하고 왕권을 신장하기 위하여 부족 연맹체 사회의 지배 이념이었던 재래 신앙을 대신하여 새로운 지배이념으로 불교를 받아들였다 할 수 있다.
  그리고 수용 과정상의 갈등은 왕권의 지원과 불교도의 재래 신앙과의 융화를 위한 의식적인 노력에 의해 무마되고 극복되었고, 재래 신앙은 대체로 불교 신앙에 흡수 통합되었다.
  신라 불교의 특징을 살펴보면 첫째로 수용 과정상 중국 불교가 직수입 되는게 아니라 고구려를 거치면서 한층 더 토착화 되었고, 다른 나라에 비해 어느 정도 민중화 되기 쉬웠다는 점이다. 둘째로 불교 수용 공인을 둘러싸고 지배권력 내부에서 이해 관계를 달리  하여 갈등이 치열하였으나 대체로 민주적 합의에 의해 외래 종교가 받아들여 졌다는데 있다.
  비록 신라는 삼국 가운데서 가장 뒤늦게 불교를 정식으로 받아들였지만 이차돈의 죽음을 계기로 고구려나 백제보다 훨씬 밀접하게 불교를 국가와 정치면에 직결시켜 국가 발전에 활용했다.

 


    
     1>신라 왕실의 호국 불교
  법흥왕에 이은 진흥왕은 왕권의 확립 및 신장과 국토 확장에 힘쓰면서 불교의 국교화를 통해 민심을 수습하고 지배 질서를 확립하고자 했다. 그 예로
       ① 법흥왕이 착공했던 홍륜사 완성(554년)
       ② 사람들의 출가 공인(544년)
       ③ 고구려 침략 때 귀화해 온 승려 혜량을 승통으로 삼음(551)
       ④ 부족적 축제를 팔관회의 형식으로 계승 발전
       ⑤ 승관제를 확립하여 불교의 국교화,제도화에 주력
       ⑥ 황룡사의 건립으로 용으로 상징되는 신라 왕권의 신장을 반영하며 왕
          권 신성화의 도구 구실을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러한 일들이 오히려 사회적으로 정신적인 면을 통합하여 신라가 삼국 통일의 주체가 되게 하는데 기여한 면도 없지 않다.
  삼국 통일에 이바지 한 대표적인 승려로서 원광이 있다. 그는 불교적인 여러 측면에서 보았을때 큰 획을  긋고 간 사람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도 신라의 지배 권력의 이익을 위해 일했던, 승려 귀족으로서 계급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인물이었다. 이러한 경향은 원광 뿐만 아니라 자장에게서도 나타난다. 자장의 이야기는 뒤로 미루고 원광의 이야기를 계속하자. 우리들이 원광이라면 떠오르는 것이 바로 [세속5계] 이다. 여기서 나타나는 의미를 살펴보면 첫째, 나라(임금)에 충성하고, 둘째, 부모에 효도하고, 세째, 벗은 믿음으로 사귀고, 넷째 싸움에서 물러서지 말며 다섯째, 살생을 가려서 하라. 의 내용이다. 언뜻보면 둘째, 세째 계명이 유교적인 사고인것 같으나,이는 육방례경(六方禮經)과 같은 초기 경전에도 나오는 세속인에 대한 불교의 핵심적인 교훈이다. 그리고 다섯째 계명은 자연숭배의 샤머니즘적 의식이 불교와 혼용된 것을 보여 준다.  그러나, 첫째, 넷째 계명은 불교적인 윤리와 무관한 왕실 옹호의 윤리이며,당시 귀족들의 요구에 규합하는 윤리이다.  이러한 원광의 임전무퇴의 계율이 고구려, 백제와의 싸움에 큰 힘이 되어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데 정신적인 힘이 되었음을 인정하지만, 그도 왕실 호국불교를 이끈 한 사람이었다.
  다음으로 자장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불교가 신라 땅에 본격적으로 뿌리를 박는 결정적인 시기에 이와같이 신라 땅이 결코 불교와 무관한 낯선 땅이 아니라 본래 불국토였다는 신념을 신라 사람들에게 불어넣어 불교에 귀의하게 하는 중요한 구실을 한 것이 바로 자장이었다. 그는 선덕 여왕 때 활약한 승려로서 원광에 이어 신라 불교를 발전 시키는데 기여한 사람이었다.하지만 한층 왕실과 귀족 지배층의 이익을 위해 봉사한 사람이었다. 겉으로는 엄격한 계율과 의식을 갖추고 대국통으로서 전국의 승려들을 감찰하고 포살, 자자의 의식을 시행했으나, 거대한 절이나 탑등을 건설하는데 민중을 동원하여 혹사시켰다. 그러니, 당연히 민중들도 그러한 귀족 불교의 위선에 대해 반대 하면서, 당시 지배층의 억압과 전쟁과 노역의 시달림에서 해방되기를 갈구하게 되었다. 결국 귀족의 편에 서서 그들의 민중에 대한 억압이나 수탈을 합리화 시켜 주던 자장은 더 이상 민중의 스승이 되지 못하였다.
  원래 석가모니불 불교는 계급적 권위를 타파하고 억압 받는 민중에게 인간의 존엄과 평등을 일깨우고자 했으나, 중국 불교를 거쳐 신라에 이르러 결국 왕권이나 신성화하고, 지배층을 위해 일하는 귀족 불교로 되어 민중을 무시하는 종교로 타락하고 만 것이다. 이렇듯 신라 불교가 귀족 불교로서의 성격이 강했지만, 세속민중과 살면서 자기의 삶과 진리를 중생에게 바치면서 진정한 불교를 실천하는 승려 - 혜숙, 혜공, 대안, 사복 - 들도 있었다.


     2>신라 불교학의 발전-의상
  의상은 원효와 함께 신라 불교를 대표하는 승려로서 한국 화엄의 기초를 닦은 승려이다. 그는 학문을 대성함과 동시에 제자를 양성하고 대중 교화에 힘쓰며, 불교의 사회적 실천에도 힘쓴 사람 이었다. 그의 사상은 본질적으로 사물은 차별될 수 없다는 평등 사상과, 상호 연관성을 중시 하는 - 홀로 존재 할 수 없다.- 것을 핵심으로 한다. 그리고 그의 사상은 후에 고려의 화엄종에까지 큰 영향을 끼쳤다. 또 한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그의 신앙적 실천이 관음 신앙을 대중화 시키는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이는 국토 및 동해 용왕 신앙과 결합시킨 의상의 민족적 관음 신앙에 힙입었다 할 수 있다. 그리고 자장의 문수 보살, 불국토 신앙이 사대주의적 요소로 인해 민중에게 외면 받은 것과 대조된다. 그는 권력을 멀리하고 완고한 골품제 사회에서 신분의 평등을 주장하였고 왕에게 올바른 정치를 직접 요구하는 등 지행일치의 실천에 앞섰던 진보적 지식인이었다.


     3>신라의 통불교적 발전-원효
  통일 신라 초기에 불교계에서 화려하게 활약을 한 사람 중 특히 원효는 한국 불교사에서 가장 독창적인 사상가이자 실천자였다.
  삼국 통일 이후의 신라 불교학은 원효에 의해 불교 각 경전의 이론이 통합될 수 있었고, 그로 인해 통불교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또한 원효는 [정토 신앙] 을 대중화 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귀족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틀에 매이지 않는 생활로 대중속에 들어감으로써 역사와 민족의 기억속에 오래도록 살아남는 최대의 고승으로 자리잡았다. 원효의 정토 구원관은 인간의 평등을 전제로 하고 귀족불교를 전면으로 부정하였다. 그 당시 현실적으로 고통 받는 민중에게는 엄격한 계율이나 어려운 이론보다는 정토를 지향하는 염원을 가지고 삶을 이어나갈 의지가 더욱 절실하였다. 이러한 원효의 노력으로  신라의 불교는 점차로 귀족 불교에서 민중 불교로 넘어 오게 되었다. 하지만 한가지 아쉬운 점은 원효가 비록 지배 계급의 소유물이었던 귀족 불교를 타파하고 민중 불교로 이끄는 데는 성공했지만, 당시의 제도적 왕권 불교에 대응하고 정토 실현을 위한 민중의 공동체적 노력을 수정할 수 있는 민중 불교 결사와 같은 조직화를 시도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는 민중을 염세적인 현실 도피로 이끌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이로 인해 아미타불 타력 신앙에 의해 숙명적이고 체념적이며, 현실 도피적인 신앙으로 오도 될 가능성을 남겼다. 그리하여 정토교가 좀 더 주체적이고,조직적인 민중불교로 발전하지 못하고 염불.기복신앙으로 세속화 되어 버린지도 모른다.
  우리 나라에서 주체적 연구를 통해 발전된 신라 불교학으로서의 원효의 불교학은 중국과 일본에 큰 영향을 주게 되었다.그의 저술은 중국으로 들어가 중국 불교의 존숭(尊嵩)을 받고,그의 실천적 불교 대중화 운동은 일본의 불교 민중화 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 외에도 화엄학,대현(大賢)등도 외국에 영향을 끼치는 데, 이는 신라 불교의 자주적인 발전과 대외적인 영향력을 반영한다.))


                2.통일 신라의 불교


  이 시기의 불교는 대규모의 사찰, 불상, 탑, 종을 지어 호사한 왕실의 권위를 드러내 보이고 왕실 귀족의 안녕과 복을 기원해 주었다. 그 대가로 승려들은 엄청난 땅과 노비를 기부 받았는데, 그러한 행위가 너무 심해져 한 때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그렇게, 신라 불교가 봉건 지배계급과 밀착하여 사치와 타락의 길로 떨어진 것과 때를 같이하여, 신라 골품제의 모순으로 귀족 내부의 권력 다툼이 생기는 한편 지방의 호족 세력이 득세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 지방 호족의 성장과 함께, 문자에 의지하지 않고 각자가 스스로 깨달을 것을 주장하는 지방의 새로운 불교 종파로 선종이 성장해 왔다. 이 당시 9세기의 신라는 골품제가 신분체재의 모순을 드러내 봉건 체제가 점차 흔들리고 있었고, 지방의 호족세력이 사회 모순을 극복할 주체로 떠오르면서 선종은 그 이념적 기반이 되었다. 또한 이 선종은 직설적이고 간명한 방법과 평등주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어, 당시 귀족 불교인 교종이 난해하고, 관념적이고, 지배자의 복을 비는 일만 일삼던 때에 비하여,상당히 지방민중에게 호응을 받았다.
  하지만, 선종도 하나의 착취자였던 호족의 이념적 기반에 불과 했다. 호족들에 의해 농민들은 땅을 잃어 유랑하였고 마침내, 그 착취자들에 대항하여 맞서게 되었다. 그리하여 선종도 민중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산간에 은둔하며 참선에 전념하는 산중불교로 자리 잡는다.
  신라 봉건 사회의 모순이 극에 이르러 귀족들 사이의 내분과 민중 봉기가 극에 달한 9세기에는 미륵 신앙과 도참 사상이 민중들에게 크게 호응을 받았다. 미륵 신앙은 백제 말, 고창 지방 검단에 의해 일어났고 민중적인 실천 불교로써 민중속에 파고 들기 쉬웠다. (( 그리고 삼국 시대에는 비록 왕실과 귀족층의 주도하에 전개 되었으나 민중의 고난을 동정하는 태도를 취하여 개인적인 구원을 위한 신앙이 아니라 사회적인 구원, 민중 구제를 위한 집단적인 신앙 이었다. 특히 진표의 미륵 신앙이 대표적이었는데, 그는 소외된 지방에서 - 신라의 중심지가 아니라 - 미륵 신앙운동을 일으켰다.))

 

 

                3. 고려 시대의 불교


   송악의 호족 세력이었던 왕건이 918년 궁예를 몰아 내고 고려 정권을 세우고, 936년 후삼국을 통일하면서 고려 시대는 시작된다. 건국기에 왕건은 동요하는 민심을 무마하고 지방 호족 세력을 회유하기 위해 일련의 회유 정책으로써 불교를 숭봉하는 정책을 폈다. 그래서 즉위 원년(918)에, 신라 봉건 지배 계급의 이익을 위해 연례행사로 치러쳤던 왕실 주체의 호족불교 행사인 팔관회 제도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태조가 자손들에게 남긴 유훈 [ 훈요십조] 에 나타나듯이 - 훈요 십조의 제 1조에 " 우리나라의 대업은 반드시 부처님의 가호에 힘입은 것이므로 선 . 교 사찰을 세우고 주지를 보내 분향 수도하게 할 지어다." 하며 불교 숭봉을 표방하면서도 동시에 " 후세에 간신이 정권을 잡아 승려의 청탁을 따르게 되면 각 종파가 서로 사찰을 뺏는 다툼을 벌일 것이니, 이를 엄금 할 지어다."  라고 하여 불교에 대한 국가적 통제의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그래서, 불교는 지배층의 안녕과 복을 빌어 주고,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국교적인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민중들은 고려 왕권의 기만적 불교 통제 정책아래 소외되었고, 왕권의 비호 아래 날이 갈수록 불교는 점점 썩기 시작했다.
  불교의 부패는 광종 때 가장 혹심했었다고 할 수 있다. 광종은 왕실의 왕권 강화 정책의 일환으로 지방 호족 세력의 이념적 기반이었던 선종을 버리고, 화엄종을 선택하여 왕권 강화를 도모했다. 그는 왕권강화를 위한 시책으로 과거 제도를 실시하고 특히 승과를 개설, 시행하였다. 한편 광종은  승과의 선발 기준으로 균여의 화엄학을 채택할 정도로  균여를 숭봉하였다. 그리고 균여 또한 화엄종의 남악파, 북악파의 갈등을 해소하여 통합된 지배이념으로써 광종의 왕권 강화 정책에 이바지 하였다. 이렇게 전제 왕권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것과는 다르게 불교의 대중화에도 힘을 기울였는데 그가 지은 [보현 십원가] 를 보면 잘 나타나듯이 화엄사상을 노래로 지어 민중속에 퍼뜨렸다. 이는 원효가 그의 화엄사상을 노래로 지어 민중속에 퍼뜨린 것과 같이 균여에 의해 불교 대중화 운동이 일어난 것은 매우 특이 할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사상이 귀족 불교를 위한 것이었다는 한계는 벗을 수 없다.
  그러던 중 성종 때의 정치 사상가 최승로는 [시무책] 을 통해 왕권의 불교 비호 정책을 강력히 비판하였다. 그는 당시 권력의 후광을 믿고 횡포를 부리던 귀족 불교 승려들을 규탄하였으며, 그 대신 현실주의적인 유교를 새로운 통치이념으로 제시하였다. 성종은 그의 폐정개혁안을 받아들여 불교를 억압하는 정책을 폈으나, 그것도 일시적인 것에 그치고 말았다.
  현종에 이르러 폐지 되었던 연등회와 팔관회가 다시 부활되었고 황룡사9층탑을 재수리하고 고려대장경이 조판되었다. 이것은 당시 거란 침략에 맞서 호국불교 행사를 통해 국민단결을 꾀하고자 한 것이라 할 수 있지만 나라와 왕실의 안녕을 기하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화엄종은 신라 의상의 화엄종을 계승하여 고려 역대 왕권의 적극적인 지원아래 귀족 불교로 발전했다. 그리고 법상종은 유가종이라고도 하는데 대현(大賢)등의 신라 유가종을 계승한 것으로 왕권과 밀착하여 발전하였다. 화엄종과 법상종이 왕권과 결탁하여 위세를 떨치던 이 시기에 선종은 그에 비해 9산 선문으로 분열되어 별로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러다가 11세기 중반까지 중앙 집권화가 완성됨으로써 서서히 9산 선종도 왕권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교종과 선종이 서로 대립 분열하고 있는 상황에서 왕권은 각 종파 불교의 융화와 통일된 지배이념을 요구하게 되었다.
  문종의 왕자로서 11세기에 승려가 된 의천은 그러한 왕권의 요구에 부응할 수 있는 적임자였다. 이것은 왕자를 츨가 시켜 승려 지도자로 앉힘으로써 불교  세력을 적당히 통합하고 왕권의 통제 아래 두려 했던 것이다.
  의천은 1085년 중국(송)에 건너가 새로운 통합의 지도이념으로 천태학을 배우고 천태종을 개창하였다. 그리고 화엄종과 법상종의 융화와 교종과 선종의 융화를 꾀하여 통일적 지배이념을 요구하는 왕권에 이바지 했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원효의 계승자임을 자처하기도 했지만 오히려 민중불교 보다는 철저한 왕실 불교 지도자에 불과했다. 이러한 왜곡된 반 민중적 불교의 전통은 조선을 거쳐 해방후에 거치기까지 줄기차게 이어져 나라의 주체인 민중을 외면하고 현실에 등돌리고 참선을 일삼는 형태로 남아있게 되었다.

 

  이 시기에 불교는 왕실만을 위해 존재하였고, 왕실에 의해 대표적인 착취자로 등장하면서, 왕실과 함께 타락했다. 특히 인종의 뒤를 이은 의종은 승려들과 함께 방탕하게 놀음과 잔치로 세월을 보내고, 사찰을 곳곳에 세워 향락 장소로 이용하곤 했다. 이러한 왕실의 부패와 함께 민생고가 날로 가중되어 가고 민중들의  불만이  폭발해  나가기 시작할 때  승려들은  약해진  왕권을 위해 무신정권에 항변하여 싸우기도 했다. 그리고 이제까지 권력에 빌붙어 또 하나의 착취자로 군림해 오던 불교 대사찰들도 민중들의 새로운  주요 공격 대상이  되었다.
  그러는 가운데 무신정권의 옹호를 받으며 선종은 성장해 나갔고, 선종은 선.교의 대립을 지양하고 교종을 포용함으로써 불교계의 주도권을 잡고자 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지눌(知訥;1158-1210)과 그 계승자들에 의해 시도되었다.
  지눌은 세속적인 이익을 위해 권력과 밀착 해 온 귀족 불교에 대한 비판의식에서  정혜결사(定慧結社)를  결성하였다. 이 결사는 선종 뿐만 아니라 교종, 유교, 도교에까지 문호를 개방하였고 세속적 명리를 추구해온 불교의 자기 비판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당시의 농민들이 지배자의 착취에 못 이겨 곳곳에서 봉기하고 지방하층의 승려까지 이에  참여하는 상황에서, 그가 결성한 결사는 도탄에 빠진 현실을 무시하고  오직  내적  수행의 길에만 정진하고자 하여,  현실 도피적인 지식층의 결사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게 한다. 그러나 지눌은 권력으로부터 해방되어 청정한 수행에 전념하는 것을 지향하였고, 무신정권에 자력이든 타력이든 이용되긴 했지만, 선교융합의 창조적 노선을 추구함으로써 고려 불교를 발전시키는데 커다란 공헌을 한 사람임에는 틀림없다.  그리고 지눌과 혜심에  의한 간화선(看話禪), 그 외에 지눌에 의한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 법집멸행록절요병입사기, 그리고 선(禪)문학을 집대성한 혜심의 선문염송(禪門念頌)은 불교강원의 교과목으로써 우리나라 불교에 큰 영향을 끼쳤다. 또 한편으로는, 우리 불교의 주류가 선과 교를 병행하면서,  `마음'을 찾는 내적  수양에 치중하고, 사회 참여보다는 은둔 수도를 지향하는 것이 약간은 그의 영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한다.
  천태종의 요세(了世;1163-1245)는 지눌과 같은 시기에 백련결사를 결성하여 불교계 내부의 분열대립과 타락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하여  중앙 집권력에 결탁하지 않고 오직 지방민중의 기반 위에서 불교 대중화에 힘썼다. 백련 결사의 성장은 이내 지배계층의 눈에 띄어  요세(了世)도 말년에 중앙 지배 권력층의 회유책에 휘말려 끝내 부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 백련결사는 지눌의 정혜결사와 함께 고려 불교의 중요한 신앙결사로서 자리잡았고 불교발전에 크나큰 공헌을 했다.

 

  몽고의 침략에 대한 민중 불교의 항쟁으로, 충주성과 개경에서의 노비와 승려들의 항쟁이 있었고, 특히 승려 김윤후의 투쟁을 들 수 있다. 그는 명리와 계율을 뛰어 넘어 민중을 구제하는 민중 불교적 입장에 서서, 몽고침략군 철수에 앞장 섰다. 그에 비해 이 시기의 귀족 불교는 대장경 조판과 호국기도등의  기복불사로 몽고 침략에 대처하였는데 이 때 새겨진 대장경이 현재 [해인사]에 소장되어  있는  `팔만 대장경' 인 것이다.
  공민왕에 이르러서도 불교 숭상 정책이 계속되는데, 초기에 보우(普愚1301-1382)를  왕사로  추대했다.  보우는  현재  선종의  종조로 받아들여지는 승려로서 당시 대립.분열하고 있던 선종 각파의 통합을 꾀하였다. 그는 승직임명권을 차지하여 고려 불교 전체를 장악, 통제할 수 있었으며, 아울러서 구산선(九山禪)을 통합하고 임제선(임제선) 계승하였으며 많은 시와 노래를 제작했다. 그리고 보우도 당시의 정치와 불교의 개혁을 절감했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는 나라로부터 받은 여러가지의 대우를 받은 대가로 왕실의 안녕을 기원해주면서 민중들과는  더욱 멀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고려의 미륵 신앙은 건국 초에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차원에서 왕실의 지원으로 미륵불이 많이 만들어 졌던 옛 후백제 땅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그래서 고려의 어수선한 정세와 함께 말세 의식과 관련되어 미륵불이 땅 속에서 솟아 나오기를 기원하는 하체  매몰불이 많이 만들어졌다. 이러한 것은 대부분 민중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현실적인 생활상 요구에 따른 신앙 대상이 되었다. 득남(得男)을 기원하거나 자연 재해, 전쟁 따위의 재난이 일어나는 것을 막는 등의 기원으로 밀교 신앙은 전개 되었다. 그리고 운주골의 천불천탑은 아직 수수께끼적 요소가 많아서 확신 할 수는 없지만,  미륵 신앙을 배경으로 설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민중적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4.조선왕조 시대의 불교

  한국불교의 특징으로 흔히 지적되는 것이 산중불교(山中佛敎)라는 것이다. 이는 말 그대로 산 속에 숨어서 사람들을 멀리하는 불교라는 뜻이다. 우리나라의 유수한 사찰들이 산 속에 자리잡고 있는 현상의 설명적 표현이다.((그러나 황룡사나 불국사는 절 이 아니라 제정 일치 시대에 현저하게 대중의 신앙 생활과는 유리된, 그리고 국가권력의 철통같은 비호속에서 이루어진 강압적이고 위압적인 특수권력조직이며 오늘날의 제도로 말하자면 그것이 바로 청와대이며 중앙청과 같은 역할을 한다. 우리는 왜 합천 가야산 촌구석에 그다지도 거대한 해인사가 있으며 왜 승주군 조계산 허리에 그다지도 거대한 송광사가 있는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그 규모의 장대함과 거기에 들어간 인간 예술품의 에너지가 후대 조선왕조이 한양 한복판안의 궁궐의 규모를 능가하면 능가했지 못하지는 않다는 사실을 영락교회나 순복음교회가 산속에 들어앉아 있다고 생각하는 단순한 인식에서 벗어나야 할것이다. 고대 사찰규모의 장대함에 있어서 가장 반동적인 사실은 당대 그 사찰이 성립하고 있었던 場인, 민중의 삶의 현실이다. 당시 대중들이 사는 집이란 정말 형편없는 것이었다.주변은 모두 황량한 들판의 논밭뿐이며 그 대중들이 사는 집이란 나무 마루도 없이 땅을 파고 짚이엉을 얹은 매우 소략한 토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지은  그 엄청난 건축물들을 보면서  그 건축물을 짓게한 지배자의 어마어마한 권세와 그 영력에 벌벌 떨 뿐이었고 당대의 왕이 사는 건물이 사찰에 비하면 매우 소박할 정도였으니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좋을까 ? 과연 {원래 사찰은 중생의 교화를 사명으로 하고 있음으로 번창한 도시보다는 가까운 아름다운 자연속에 자리잡는다.} 라는 말로 받아 들여야하는 것이 옳을까?)) 어찌되었건, 우리의 경우 대찰(大刹) 뿐만 아니라 군소 암자까지 산 속에 위치한다는 것은 조선조 시대의 숭유억불 정책으로 승려들의 도성 출입이 금지 되었들 때 자연히 사찰이 산중에 들어가게 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고려 시대에 전성의 극에 달하던 불교가 조선시대에 와서는 그 상황이 완전히 달라 졌다. 건국 초 부터 유교국가의 기초를 확립하기 위한 계획적인 불교 정비사업이 진행되었는데, 그것은 국가의 재정과 인적인 자원을 확보하려는 현실적인 요구에서 일어났던 것이며, 결코 사상적인 극복에서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즉 유학 자체를 진흥하려는 적극적인 사상운동이었다기 보다는 오히려 불교의 현실적인 폐단인 경제적 세력을 몰수하는 데 주요한 목적이 있었다.
  왕권을 중심으로 하는 유교주의자들의 열의에 찬 숭유정책( 崇儒政策 )에도 불구하고 왕실을 중심으로 하는 불교는 좀처럼 청산되지를 않아 때로 유교주의자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고려말기에 있어서의 유교의 진흥운동은 불교 배척을 계기로 그 척불 운동이 정치적 또는 행정적인 방면의 주장에 의해서 힘을 얻었던 것이며 결코 순전한 학문적인 이론 투쟁과 같은 정신 운동의 소산이 아니었다. 현실적으로는 유교주의자들이 생각하는 바와 같이 불교를 완전히 물리치고 사상과 행정의 여러면에 완전히 독점적인 지위를 바라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태조 이성계만 하더라도 구체적으로 불교의 폐해가 지적되고 의론이 있을 적에는 민심에 큰 충격을 주지 않을 한도내에서 척불정책을 채용하려 했으나 그의 개인 생활이나 종교적 신앙 면에선 오직 한 사람의 불교도로서 일관 했다.
  이성계는 즉위 초에 무학(無學)을 왕사(王師)로 모시는등 고려의 제도를 그대로 답습했다. 그리고 군역의 면제자인 승려의 수를 억제하는 한편 승려의 질적인 향상도 아울러 꾀하기 위해 태조때 부터 도첩제를 강화하여 실시하였다.
  이렇듯 태조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으로 불교의 부패청산에 손을 대었지만 일부 유교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은 불교의 근절이라는 것은 그로서는 염두에도 두지 아니하였다.  그것도 그런것이 삼국시대로부터의 불교는 국가를 이롭게 하고 국민을 복되게 하여 주는 신앙으로서 여전히 대중에 대한 교화력을 유지하여 가고 있었고 특히 태조 이성계에 의해서 처음으로 실시된 수륙회(水陸會)만 보더라도 그의 유연성을 알 수 있다.

 

  태종이 왕에 즉위하면서 불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시작되었다. 태종은 태조의
견제를 받지 않을 수 없었지만 결국 숭유억불(崇儒抑佛)의 방침을 시종 견지하여 정책상으로는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했다.
  역(役)의 부담자인 민정(民丁)의 확보와 공천(公賤)의 보충이라는 인적 물적 국가 재원(財源)의 재확보를 위해 도징(道澄)과 설연(雪然)의 비행을 기회로 불교사원의 정리에 손을 대었다. 이리하여 사원의 재산을 동결 시키고 사전(寺田)을 몰수하였다. 그리고 전국의 남겨둘 공인사찰(公認寺刹)로 242사(寺)를 정하였고 여기에 상주(常住) 할 승려의 정원수도 책정하여 그 정원수에 따라 전지(田地)와 노비가 책정되었다.
  이러한 일들로 지배층에서는  오히려 조세원을 확대 할 수 있었고 환속당한 승려들과 사원의 노비들은 양인이 되어 부역과 조세의 부담을 져,국가의 경제적 기반을 단단히 하는데 한 몫을 담당한다.
  결국 전국에 242개의 사찰만이 남게 되었고 왕사.국사 제도도 폐지 되었으며 능사(稜師)의 제도도 금지되었다. 그리고 종전의 11개의 불교 종단을 7개로 축소시킨것은 불교의 발전을 저해하는 하나의 요인이 되기도 했다.
  세종에 이르러서는 억불보다 더한 훼불(毁佛)정책이 강행되었다. 태종 때의 불교 종단이 11개에서 7개로 통폐합 되었던 것이 세종 때 다시 선.교양종(禪.敎兩宗)으로 통합되었다. 또한 전국의 사찰 수도 제한 하여 태종 때의 242寺 법정 사찰에서 36寺로 축소 되어 선.교 양종에 배속 되었다. 그리고 세종은 한성부내에 토목공사를 실시하여 수도의 경영을 위해 한때는 승려들을 노동에 참여하게 하여 노동력을 이용했지만 그 이후로는 승려의 파계를 이유로 도성내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금지했다.
  이 때 세종의 친형이 효령대군이 불교를 숭신하여 천태종 승려 행평(行平)에게 사사,제자가 되어 노승의 사실(師室)에 귀의하고 승려들이 하는 모금운동에 참여하여 탑등의 사찰건립이나 중수에 사용할 기부금을 모았다. 세종이 이를 묵과해 준 까닭은 왕실에서 불교 신앙에 젖은 대비(大妃)를 비롯한 여성뿐만 아니라 궁녀들이 삭발하고 승려가 되는 일이 많았다. 그리고 이러한 국가적인 불교 억제 조치에도 불구하고 양반들은 집안의 복을 위해 재를 올리고,불교식으로 장례를 치르고 제사 때에는 승려를 초청하였다. 그리고 민중들사이에서는 초파일 연등행사가 나라의 억제 조치에도 불구하고 매년 행해졌다. 이러한 상황에 감화 받은 세종은 점차 숭불의 왕으로 변신해 갔다.
 말년에는 세종도 불교를  신봉하게 되어 석가불의 일대기를 엮도록 명하였고 우리글자 훈민정음으로 불교 서사시 [월인천강지곡]을 짓기도 했다.

 

  조선의 대호불왕(大護佛王)이라 할 수 있는 세조는 유신(儒臣)들의 반발을 억누르고 독실한 신자로 자처하며 불교를 중흥시켰다.
  세조가 호법 사업을 편 이유는 다음의 3가지 측면에서 파악될수 있는데 첫째, 세조의 집권과정에서 친족과 정적을 많이 살해한 데서 오는 죄책감에서 일수도 있고 둘째, 그의 집권과정상의 약점을 극복하기위해 현재의 야당격이었던 불교를 수용하는 측면 셋째, 정변에 따른 민심의 동요를 불교의 보호와 장려로서 수습하고자한 측면에서 파악할 수 있다.
  불교 신자였던 세조가 후세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법화경, 선종영가집, 금강경, 반야심경등의 불경을 훈민정음으로 번역 배포한 것이다. 그리고 세종의 명에 따라 수양대군(세조)이 김수온(金守溫)과 승려들의 후원으로 귀중한 불교서적들이 많이 간행되었다. 세조는 금강반야경을 직접 썼으며 대규모의 왕실 원찰 원각사를 창건하였고, 세종때 금지했던 승려의 도성출입을 재허용하는등 많은 호법사업을 했다.

 

   성종은 세조 당시 불교를  신봉하던 훈구파(勳舊派) 세력을  억제하기 위해 유교정치를 지향하고 사림파를 대거 등용 하였다. 성종의 즉위로 억불정책이 다시 시작되었다.
  당시, 도첩을 가지지 않은 승려들이 증가 하는 것은 - 군역제도의 문란으로 국역을 기피하려는 수단으로 승(僧)이 된 양민이 많았다. -  민정(民丁)의 확보라는 점에서 국가의 중대한 관심이었다. 그러므로 유신(儒臣)들은 도첩이 없는 승려들을 색출하여 도첩제를 엄격히 시행하고 불교 자체도 뿌리 뽑아 없애려는 급진적인 억불책을 서둘렀고 급기야 성종 23년에 도첩제 자체를 폐지시킨다.
  성종은 간경도감을 폐지하고 출가를  완전히 금했고 승려들을 환속시켜 절이 텅텅비는 사태가 곳곳에서 도출되었다.
  이러한 강력한 불교 억압정책으로 인해  사대부 양반들의  개인적 불교  신앙 마저도 극도로 위축 되어 그나마 유지 되던 불교식 장례나 제사법은 점차 사라져  갔다.  성종의 뒤를  이은 연산군도 억불정책을 폈다. 그는  사찰에  있던 승려들을 쫓아내어 관노로 삼았고 토지도 몰수 했으며 승과(僧科)도 폐지 하였고, 선.교 양종의 본사도 폐지 시켰다. 이로인해 승려들은 사회적 지위를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이것은 당시 불교의 부패상에 대한 의식적인 조치보다는 단순히 성종의 불교 배척정책을 계승했던 것으로 파악 할 수 있다.
  연산군에 이어 중종에 이르러 억불정책은 최고조에 다달았다. 그는 지난 날의 사화(士禍)로 거세되었던 사림파 유학자들을 적극 등용하여 그들에 의한 도학정치가 실시되었고 불교는 더욱 억압 받게 되었다. 그는 승과를 합법적으로 폐지 시켜 선.교 양종의 종단 자체까지 그 존재가 무의미 해졌고 마침내 선명치 않은  無종파의 혼합적 현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상히도 절과 승려는 계속 늘어 났는데 - 봉건 지배계급의 가혹한 수탈로 파산한 민중이나 도적들, 부역 기피자등이 절(寺)로 들어온 것이었다. 이는 한 마디로 불교 억압정책에 불만을 품은 승려들과 착취당한 민중들이 이해관계를 같이 하여 결합하기 시작한 것이었으며 불교의 적극적인 반항이었다. 이에 대해 지배층에서는 유교의 이른바 [미풍양속]을 퍼뜨리고 [미신]을 타파하려는 명분으로 향약을 실시하여 유교 지배이념을 지방까지 퍼뜨려 민중의 오랜 신앙이었던 불교를 타파하고자 하였다. 특히 삼국시대부터 내려온 민중의 오랜 신앙이었던 민중의 불교적 공동체 생활조직인 향도(香徒)나 계를 말살하고자 한 것이었으며 이러한 지배층의 억불책에 의해 끝내는 거의 말살되고 말았다.

 

  인종의 재위 8개월만에 승하한 탓으로 명종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그의 어머니 문정대비가 섭정하게 되었다. 이로써 불교는 다시 부흥의 기운이 감돌았다. 대비는 지나친 억불정책으로 인해 오히려 불법적인 불교의 반항이 커짐을 알고 불교를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약간 부흥시켜 주었다.
  그녀는 중종의 배불정책을 바꾸어서 6년(1551년)에는 중흥불사의 대임을 보우에게 맡기고 보우의 진언에 따라 양종과 승과를 다시 시행하고, 도첩을 주어 봉은사를 선종으로, 봉선사를 교종으로 삼았다. 그리고 승과를 통해 휴정(서산대사), 유정(사명대사)등의 후대의 뛰어난 불교 지도자를 발굴했다.
  명종때 활약한 보우(普雨)는 유불일치론(儒佛一致論)과 아울러 선교일치론(禪敎一致論)을 주장했다. 유교와 불교는 국가 사회에 나타난 면에서는 각기 다르지만 그 이치의 근본을 따지자면 서로 일치하여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다같이 인간의 본심과 본성을 근본으로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禪은 行의 철학이며 華嚴은 理의 철학이라고 하면서 선과 화엄의 융합을 꾀하려 하였다.
  그러다가 1565년 4월에 문정왕후가 죽자 명종은 친히 정사에 임하고, 보우를 탄핵하는 여론을 받아들여 제주도에 유배시켰다. 그후 보우는 창살당하여 목숨을 잃었고, 그 다음 해에 양종의 승과제도가 폐지되었다.
 하지만  연산군 이전의 제도를 부활시켜 왕이 승하한 15년간은 조선불교의 중흥기라 할 수 있으며 보우의 업적 또한 대단한 것이었다.

 

  산간총림에 축소된 불교는 그 속에서 수도와 전법에 힘쓰면서 자활의 길을 모색했다. 하지만 문정대비의 승하 후 배불정책은 날로 심해  갔다.
  그러던 중 조선 후기에 일어난 임진 왜란을 계기로 의승군들이 왜적과의 싸움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보이자, 선조는 조직적 역량이 있는 승려들을 전투에  이용하고자 했다. 이때 휴정과 유정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휴정은 어린 나이에 출가하여 33세에 승과에 급제했었고 임진왜란때 나라의 부름에 부응하여 73세의 노승으로 승군 오천여명을 이끌고 유정과  함께 왜적을 무찔러 큰 공을 세웠다.  그의 실천으로 보여준 현실 참여 의식과 민중 구제의 사상은 [청허집]과  [선가귀감]등의 저술로 나타났고  억불로 쇠퇴의 극에 달하던 불교를 중흥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사명당 유정(四溟堂 惟政)은 휴정과 마찬가지로 명종 때의 승과출신으로, 휴정을 도와 왜군을 크게 무찔렀다. 그는 전란 후에도 민생문제와 국력회복에 관한 방침을 건의하였고, 사명집(四溟集)등의 저술을 남겼다.
  휴정이나  유정은 당시 선종의 대표자의 지도자였다. 그들 둘 다 승과에 합격하여 명리를  누릴  수 있었으나  이를  거부하고  참선  수도의  길을  걸었다.  이는  이전의  선사들과  다르게  형식주의적, 계율주의의  속박과  지배이념과 신분을 뛰어넘어 자유인의 경지로서  사회참여와 실천에  앞장 선 것이라 할수 있다.
  하지만 그들에게서 한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선조가 강화로 도망갈때 국민들이 왕한테 돌을 던질 정도였다 하는데, 이땅의 백성들은 왜병의 창간에 짓밟혀 죽어가도 아무것도 모르고 속수무책이었던 썩어빠진 이성계의 후손인 왕과 조선의 통치자들을 위해서 의병을 일으켰던가? 그정도의 통솔력과 군사력이 있었다면, 왜 그렇게 싸워주고 다시 국권을 봉납하고 산 속으로 들어 갔는가?
  서산과 사명의 최대의 비극이 바로 그들의 호국관에 있다. 즉 불교가 국가보다 한차원 낮은 것으로서, 불교는 아니 종교는 국난을 당해서는 국가를 위해서 봉사하는 일만 해야한다는 생각 그 이상의 보편주의적 사유가 그들에게 전무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통해 종교가 국가이념을 초월하지 못하고 그에 예속되어 있는 세속적인 호국불교의 모습을 휴정과 유정을 통해 찾을 수가 있는 것이다.

 

  청허휴정과 유정 이후 중흥된  교단은 조계임제(曹溪臨濟)계통의 선종이었다. 그렇다고 선수(禪修)에만 전념한 것이 아니라 교학연구에도 힘써  화엄대가(華嚴大家)가  많았었다. 하지만 한가지 아쉬운 것은 조선불교에서 원효이래로 그를 뛰어 넘는 인물이 전무하다는 것이다.
   조선  말기의 불교는 두가지 형태로 나뉜다. 어수선한 정세와 맞물려 민중의 편에 서서 왕실에 저항하기도 하고 외세의 침략에 맞서서 있는 한가지 형태와, 현실과는 동떨어져 지배층의 불교 배척에도 불구하고 상류지향적 문화를 추구하면서 지배층에 아부하는 자들이 그것이다. 후자는 나중에  참선과 염불을 구하는 이판승(理判僧)과 절의 사무와 제반 역입에 종사하는 사판승(事判僧)으로 나뉘어 교단의 명맥을 지속시켰다. 그리고 조선의 억불 정책은 국가적 귀족적 불교를 소멸 시키고 대중들의 종교로 정착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특히 미륵 신앙이 민중과 밀착 하였는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末法 시대의 고통을 구제 할 당대 불교로서의 미륵 하생을 고대하는 미륵신앙이 민중을 중심으로 깊숙히 침투하였다. 이러한 미륵 신앙은 조선의 임꺽정의 난, 정여립의 난, 이몽학의 난, 홍경래의 난등의 민중 세력과 불교세력의 형태로 그 흐름이 이어졌다. 그리고 줄곧 승려들이 입성금지의 법령에 묶여 있던 것이 일본승려의 상서(上書)에 의해 1895년 입성 금지가 완전히 해제되었다.

 

 

 

 


                 5.근대  불교
 

  근대 불교의 시기는 편의 상 승려의 입성금지 해제(1895년)에서 8.15해방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여기에서 입성해제의 의미를 한 번 살펴보자. 입성해제는 1895년 일본의 승려 사노의 상서(上書)하에 이루어졌다. 조선 건국이래 500여년산 줄곧 핍박받으며 입성금지가 되었던 승려들에게는 이보다 더 고마운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노의 근본 목적은 파악하지 못하고 마냥 고마워하기만 할 뿐 민족종교로서의 불교의 책임과 역할을 인지하지 못하고 日人의 손에 의해 풀린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도 못했다. 이로부터 친일 불교는 시작되었는데, 그 계기는 이것뿐만 아니라 당시 한일합방 이후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의 공격에서 사찰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일본불교와 제휴하거나 일본종파에 귀속하기도 했고, 또 자신의 영달을 위해 일하는 경우도 있었다.
  승려의 도성 출입 허가 이후 일본 승려와의 교류는 더욱 빈번해졌고, 그들과 제휴함으로써 자신의 신분도 높이고 사찰도 지킬 수 있는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었기 때문에 일본 불교종파에 자신들의 사찰을 예속 시키는 것이 최선책이라 믿었다. 늦게나마 정부에서는 억불책을 지양하고 국가적인 관리체계를 계획하여, 1899년 서울 창신동에 원흥사( 도성 출입을 가능하게 해 준 日僧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이회광이 설립.)를 세워 한국 불교의 총종무소로 삼았다. 하지만, 원흥사는 원종 종무원과 함께 친일을 상징하며 한일 불교합방의 요람이 되었다. 원흥사에 불교연구회가 설립되었고, 1908년에 전국 승려 대표자 52명이 여기에 모여 원종(圓宗) 종무원을 세워, 억불책 500여년만에 없어졌던 종명(宗名)을 다시 회복했다.그러나 대종정(大宗正)으로 추대되었던 이회광(李晦光)이 일본 조동종과 손을 잡고 매불행위를 한 것에 대한 거센 반발로 광주 증심사를 중심으로 승려 대회를 열고 송광사에서 임제종을 세웠다. 하지만 1911년, 일본의 사찰령과 함께 이 두 종파마저 없어지게 된다.
  교권에 관심이 있어서 일본불교 임제종에 한국불교를 귀속시키고자 한 이회광은 이렇게 말한다. "한국 불교는 다른 불교와 같이 사회에 대한 자선사업이 없어 이 세상에서 환영 못 받는다. 이런 식으로 가면 한국의 불교는 진흥하지 못할 것이니 한국 불교의 종명을 개종하고 사찰의 재산을 정리해야 한다!!" 이렇게 말하면서 한국 불교를 일본에 귀속시켜 그 대가로 교권을 장악하고자 했다.
  한국 불교를 소생시킨다는 명분으로 내려진 사찰령은 승단의 좋은 옛 관습을 파괴했다. 특히 사찰의 주지 임명의 문제에 대해서 이다. 주지 임명 방법으로는   相承, 法類相續,招待 席의 3가지 였다. 불교가 시작되어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주지의 임무는 藷般 사무를 관장하는 것이어서 자신의 수행에 방해되기 때문에 사양하는 것이 통례였고, 설사 주지직을 맡은 후에도 수행하는 스님을 어떻게 하면 더 잘 수행하도록 보살필까 하는 데 직무의 중점을 두었다. 하지만 일본 사원의 지주 제도를 그대로 도입한 사찰령에 의해 지주 권한이 상당히 비대해졌다.
  이로 인해 주지는 그 자리를 고수 하여, 더 나아가 종권을 장악하기 위해 일본 불교에 동화하거나 귀속하는 일을 획책했던 것이다. 사찰의 공의제도(公議制度)가 없어지고 주지의 전횡시대(專橫時代)가 되자 일반 승려와 주지와의 거리는 멀어졌고, 민중과는 더욱 멀어지제 되었다. 주지의 관심은 오직 총무부 -본산주지의 임무권자가 총무 였다.-에 쏠려, 사찰 재산의 처리에 공정치 못했던 일이 허다했다.
  어쨌든 사찰령으로 인한 지주 권한 비대에 대한 비판으로 젊은 승려 백여명이 각황사에 모여 조선불교 청년회를 창립하고 8개의 개혁안을 건의했다. 그리고 조선 불교유신회가 사찰령의 철폐를 주장하고 나서기도 했으나 이 모두 무산 되었다. 그리고 일본의 사찰령에 의해 불교 교단은 조선 불교 선.교 양종이라는 이름으로 일제 총독의 지배하에 30본사로 나뉘어졌다. 이에 30본사 주지들이 임명되고, 주지들의 화합하에 각황사에 연합사무소가 설치되었다. 그러나 본사 주지 권한과 세력의 확대로 좀 더 강력한 중앙 통치의 재구성을 요구하게 되었다. 政.敎분리의 혁신을 주장한 승려들이 각황사에서 중앙 교무원을 설치했다. 이로써 중앙통제기구로서의 모습은 갖출 수 있었다. 그러다가 선명한 종명(宗名),종지(宗旨),종헌(宗憲)등의 제정의 필요성을 느껴 1941년 태고사(현,조계종)를 세워 31本山의 총 本山으로 삼고, 좀 더 강력한 유기적인 중앙 통제적 역할을 하는 조계종이 탄생하게 된 것이었다. 이는 해방과 더불어 대한 불교 조계종으로 재정비하려 새로운 출발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 시점에서 조선 불교의 당면 과제는 두 가지로 분류 시킬 수 있다. 즉 한일 합방의 현실에서 일본의 정치적 간섭과 일본불교의 영향에 대해 조선 불교의 주체성을 어떻게 확립 할 것인가와, 급변하는 사회정세 및 세계조류에 어떻게 부응 할 것인가였다. 이를 둘러 싸고 조선 불교는 민족 종교로서의 불교의 책임과 역할을 망각하고 일신의 영달과 안일를 위해 일제와 타협하는 매불적인 행위를 하는 반민족적 세력과, 소위 산중 불교의 맥락을 이어 은둔 생활을 일삼는 무기력한 보수 세력, 나머지 하나는 민중의 소통에 귀 기울이고 외세의 침입에 맞서 구국투쟁의 대열에 동참하는 세력으로 3가지 형태로 구분 할 수 있다. 조선 불교의 사회 운동이 표면화하여 업적을  남긴 것은 독립운동에의 참여와 청년 운동의 촉진 등으로 나타날 수 있는데, 이때 나타난 조선 불교의 선구자가 만해 한용운 이었다.
  그는 일제 침략기인 그 시점에서 유신을 외치면서 그의 혁신 이념을 알리고 실천했다. 그가 식민지 조선의 역사적 현실을 발견하는 계기 역시 실천적 투쟁속에서 이루어 졌는데 그것이 바로 해인사 주지였던 친일파 승려 이회광 일당의 음모를 분쇄하는 운동이었다. 앞에서 말했듯이 이회광은 불교 확장이라는 미명하에 일본 조동종과 결탁하여 일본의 조선 식민지 지배를 종교의 분야에 까지 확대 시킨 것이었다. 그래서 만해는 여러해 승려 대회를 열어 일본 불교와의 연합 획책을 규탄하여 결국 친일 흉계를 백지화 시켰다. 또한 그는 구국 독립 실현을 위해 지극히 인도 주의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어 불교의 근본이념을 실천으로 보여 주면서도 총 종교적인 이념구현에 압장섰다. 그야말로 조선 불교의 은둔주의와 몽매주의를 타파하고자 했던 열렬한 승려이자 시인이었고 독립운동가였으며 지눌과 원효의 사상과 전통을 이어받은 진정한 인물 이었다.
  불교는 3.1운동과 신간회등의 항일 투쟁에 동참한다. 3.1운동의 민족대표의 자격으로 백용성, 만해 한용운 스님이 참여하고 전국 사찰에서 독립 선언서를 배포하고 만세 시위를 주도 하였다. 민족 연합전선인 신간회가 만들어지자 조선불교 청년회와 불교 여자 청년회의 회원들은 신간회와 그자매 단체의 근우회에 각각 참여 했다. 또한 비합법적 비밀결사운동으로 만당(卍黨)을 결성했다.

 

*******   참고   *******

    日帝下에서의 대처승
 日帝의 침략은 이 땅의 불교에도 비극의 씨앗을 뿌렸다. 소위 內鮮一體라는 구호 하에 한국 불교의 왜색화 경향이 노골화된 것이다. 일본 불교는 생활불교를 표방하면서, 승려의 결혼.육식등에 대해서 관대하였다. 반면 한국 불교는 참담한 현실속에서도 청정한 율행(律行)을 생명처럼 지켜오고 있었다. 또 당시의 33本山을 중심으로 하여 스님들의 도쿄 유학이 시도된 적이 있다. 그때 한국에서 파견된 이들의 대부분은 대처승(帶妻僧)의 신분이 되어 되돌아 왔다.
  1945년 해방 이후부터 야기된 이른바 비구 대처의 갈등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1945년에는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불교에 대한 특별유시가 있었다. [왜색(倭色) 승려는 사찰에서 물러나라. ] 는 내용이었다. 왜색 승려는 구체적으로 대처승을 가리킨 용어였다. 그 해 선학원에서는 비구승을 중심으로 하는 승려 대회가 열렸다. 대통령의 유시내용 대로 전국의 사찰에서 대처승을 몰아 내기 위한 결의 대회였다. 이 회의를 주도한 이들로는 曉峰(효봉), 金鳥(금조), 東山(동산), 靑潭(청담)등을 들 수 있다.
  정확한 통계는 아니지만 당시 비구의 숫자는 전국을 통틀어 200여명을 넘지 못했으리라는 추정이다. 따라서 이들은 전국 사찰 1천2백여개소를 관할 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레서 당시의 기성교단과의 타협이 불가피 했다.
  당시 태고종(지금의 조계종) 종무원 (지금의 총무원)에서는 중재안을 냈다. 즉 전국의 사찰을 궁극적으로는 비구승들에게 양도하지만 현재의 대처승들에게 그 당대만은 사찰 거주를 허용 할 것, 비구승들의 수도처를 20여군데 지정하여 단독으로 수행에 전렴토록 할 것등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자신의 사찰을 비구 도량으로 선뜻 내 놓는이가 없었다. 양측은 서로 빼앗고 빼앗기는 공방전을 계속 벌여 나갔다. 1960년의 불국사 난투극은 이 갈등의 절정이었다. 드디어 양자는 결별을 선언하고 비구승들은 통합 종단으로서 [대한 불교 조계종]을 탄생시켰다.
  한편, 대처 승단은 태고종으로 발족하게 된다. 이 때가 1962년 이였다. 이 와중에서 망실된 재산과 토지는 그 양을 측량할 수 없을 정도였다. 결과적으로 불교에 대한 정부 관권의 개입이라는 바람직스럽지 못한 형태를 낳게 된다. 또 5.16 쿠데타 직후 종교의 자유를 내세워서 불교계의 여러 종파들을 등록 시킨 것도 문제 였다. 비슷비슷한 종풍(宗風)을 내건 불교 단체들이 문공부에 등록하였다. 이 때를 전후 하여 한국 불교에는 26개의 종파가 난립하게 된다. 조계종의 첫번째 수행 과업은 태고종이 소유하던 사찰들의 합법적인 접수 였다. 정화라는 기치아래 거의 모든 사찰들이 조계종으로 등록하게 된다. 이 접수 과정에서 무자격한 승려들이 대거 조계종안으로 스며든다. 이들은 수행이나 사회제도에는 관심이 없고 재산권의 이득만을 노리는 이들이 승복을 걸치게 된 것이다. 조계종단 안에서 폭력이 활개를 치게 된것이다. 오늘의 비극은 바로 이 보이지 않는 악연(惡綠)이 뿌린 인과응보이다. 정화불사를 주도 했던 청담(淸潭) 스님은 이점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다음으로 조계종에 주어진 문제는 총무원의 재정적인 독립이었다. 분규에 따른 소송은 해당 사찰이 감당하는 것보다는 총무원이라는 대표성 있는 단체가 맡는 것이 순리였다. 그러나 총무원에는 자금 동원 능력이 없었다. 따라서 각 본사를 통한 분담금 납부 제도가 실시 된다. 특히 전국의 명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막대한 입장료 수입이 생겼다.
  물론 그 돈의 일부는 문화재 보수등을 위하여 지방 단체장이 관리하였다. 그러나 일부는 사찰의 운영에 쓰이게 된다. 이 이권을 둘러 싼 잡음들도 끊일 사이가 없었고 그래서 조계종 총무원의 자리는 늘 단명(短命)일 수 밖에 없었다.
  지난 18년 동안 24명이 총무원장직을 거처 갔다. 평균 수명이 8개월 밖에 안되는 것이다. 본사 주지의 임면권을 총무원장이 장악하지만, 돈은 본사 주지가 쥐고 있기 때문에 이 마찰은 피할 길이 없다. 서의현 총무원장은 86년에 취임하였다. 그는 현대 조계종사에서 유일하게 임기를 채웠을 뿐만 아니라 연임을 거쳐 3선까지 바라보았던 인물이다. 그가 재직한 8년은 아마 당분간은 전무후무한 기록으로 남을 듯 싶다.

 

               한 국  불 교 사 (2) - 현대불교사
                                                              박 상 규

목  차


1.탄압과 분규의 현대불교사 (1950년대 - 1980년대를 중점)

     1.정화운동 - 잘못 끼워진 단추 
          1>정화운동의 태동 - 1차 혁신운동
          2>정화운동의 왜곡과 변질 - 이승만의 정화유시
          3>정화운동에서 비구와 대처의 종권분규로의 변질
          4>비구와 대처의 종권분규
          5>정화운동의 실패와 그 폐해
     2.통합종단 , 조계종내의 분규
          1>1950년대말 - 1970년대 초까지의 조계종 내분
          2>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의 종권분규
          3>1988년 봉은사 분규
          4>1991년 종정선출을 둘러싼 분규
          5>종단분규의 원인과 그 해결
     3.끊이지 않는 탄압과 훼불

 

 

 

 


1.탄압과 분규의 현대불교사 (1950년대 - 1980년대 중점)

  본 고가 다루려는 현대불교사가 다른 어떤 나라의 현대불교사가 아님은 자명한 사실이다. 왜 이 자명한 사실을 재차 강조하는가? 그것은 본 고가 다루려는 현대불교사가 한국 현대불교사인 이상, 한반도가 지녔던 슬픈 운명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벌써 근대불교사를 다룸으로서 입증된 사실이거니와 현대불교사 역시 '민족모순'이 안겨다 주는 것에 의해 규정된 근대불교의 모순을 그대로 내포하고 있었다.
  이러한 모순을 풀려고 했던 주체적 몸짓이 바로 정화운동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역사의 잘못 끼워진 단추가 되었으며 한국현대불교사의 모순구조를 만들어내는 결정적인 구실을 하게 된다. 정화운동은 비구-대처간의 분쟁으로 왜곡,변질되고 이후 비구종단내의 종권다툼으로 다시 왜곡되어 한국현대사에 자취를 남겨 놓았다. 끊임없는 종권다툼은 한국불교의 모순의 응결구조로 작용하면서 한국불교의 건강성을 마구 갉아 먹어 버려 더 이상 회생불능의 종교로 만들어 버렸다. 여기에 결정적인 타격을 준 것이 10.27법난이었다. 법난의 아픔은 깊은 것이었고, 깊은만큼 치유는 많은 노력과 오랜 기간을 요구했다.
  이제 일제잔재 청산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전개된 정화운동과 법난의 역사를 조망해 보려 한다.그것은 분명 한국불교의 아픔이고 상처였으나 또한 환골탈태의 새로운 역사를 열어 나아가려는 움직임을 태동시키는 역할도 하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1) 정화운동의 태동  -  1차 혁신운동
  일제국주의의 대한(對韓)불교정책은 한국불교의 왜색화와 총독부로의 종권이양책을 그 골자로 하였으며 이는 대처승의 육성과 사찰령의 실시로 현실화 되었다. 이러한 제도적 조치를 통하여 일제국주의는 불교를 식민통치의 수단으로 효율적으로 이용했고, 불교는 자율성이 말살되고 전통성이 거세되어 갔다. 사찰령은 주지전횡제도를 가능케 하였으며 주지임명권을 총독부가 지님으로써 종권을 완전 장악하는 수법이 관철되던 상황이 바로 해방직전의 상황이었다.따라서 해방후 불교계의 과제는 식민잔재의 청산과 민족불교의 전통을 바로 세우는 것이었다. 친일매국,보수파 타락승, 매교승의 제거와 교단의 정화, 또한 불교계에 뿌리박혀 있는 일제 불교정책의 잔재청산이 가장 긴급한 과제였던 것이다.불교내의 반민족적,반불교적 요소들은 척결하고 불교의 순수성을 되찾고자 하는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의해 전개된 것이 불교정화운동이었다. 불교정화운동은 '불교혁신 총연맹'에 의해 전개되어진 1차 혁신운동에서 그 태동의 기운을 감지할 수 있었다.
  여기에서 잠시 1차 불교혁신운동을 살펴보자. 제1차 불교혁신운동은 '불교혁신회','불교혁신동맹'.'불교여성 총동맹','혁명불교도연맹','선학원','불교청년회'의 7개 단체가 모여 결성된 '불교혁신 총연맹'에 의해 전개되었는바 그들이 내세웠던 목표들은 네가지로 압축요약될 수 있는데, 다음과 같다.
    첫째, 사찰령에 의한 주지 전횡의 폐지
    둘째, 불교의 대중화
    셋째, 부패된 교단의 혁신
    네째, 사찰재산에 관심을 두지 않고 수도에만 전념하는 승려상 확립
  이와 같은 1차 혁신운동의 주요 목표들을 살펴보면, 이 운동이 민족적 각성과 종교적 양심을 자기 출발점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1차 혁신운동은 ,불교혁신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하여 자주독립국가 건설에 일조해야 한다는 지향점을 파악해 내었다. 자연히 혁신운동은 주체적 실천으로 전개되었고 '민주주의 민족전선'에 참가하게 되었으며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그 세력을 넓혀 갔다.이러한 불교혁신운동이 가열차게 전개되자 위협을 느낀 미군정과 보수,어용 총무원은 불교내의 진보세력을 좌경,용공으로 매도하면서 탄압을 가하였으며 불교혁신 총연맹은 47년 11월 해산 당하고 만다.관권의 탄압을 피해 혁신연맹의 중요인물 56명이 월북하게 됨으로써 1차 불교혁신운동은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2) 정화운동의 왜곡및 변질  -  이승만의 정화유시
  정치적 혼란과 6.25의 민족사적 비극은 불교계의 민족적 역할 모색의 미진한 기운마저도 끊어버리기에 충분했던 것일까? 역사적 격변기에 불교계는 붓다 가르침의 전파와 그 실천이라는 대의를 역사공간에 실현해 내지 못하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일제가 심어 놓고 간 상처의 씨앗은 너무나 질긴 생명력을 지녔었다. 일제가 한국불교에 뿌려놓은 씨앗은 ,대처승의 급속한 증가와 그로 인한 청정비구 승풍의 무너짐이라는 상처로 남았다. 상처의 생체기는 쉬이 아물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954년 당시 한국불교의 승려 분포를 보면 대처승이 7000명이었는데 반해 비구승은 200여명에 불과했던 것이다.
  따라서 비구측의, 일제 잔재의 청산과 민족정기 고양은 대처승의 추방으로 귀결되어지는 듯한 기운이 감돌고 있을 무렵, 1954년 5월 21일 이승만 정권은 불현듯 정화유시를 내린다. 이것이 1차 정화유시였으며 그 내용은 '처자를 거느린 사람은 승려가 아니므로 사찰에서 물러가라'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대처승 추방유시나 다름없었다. 불교에 각별한 애정도 갖지 않고 있었던 독실한 크리스챤 대통령이 왜 하필 이런 미묘한 문제에 대한 발언을 서슴없이 하였을까? 대통령은 크리스챤이었기에 당연히 불교현실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결여되었기 때문에 돌출한 사건이라고 여기면 될까? 아니면 의도된 정치적 계산이었던 것일까? 이에 대한 결론은 앞으로의 서술 속에서 명백해 지리라 본다. 계속해서 그 때의 정황을 살펴 보자. 이후, 이승만은 3차례에 걸쳐 정화유시를 내리게 되고 불교계는 비구-대처의 확연한 대치선이 그어지게 된다. 이승만의 1차 유시이후, 대처승에 대한 비구승의 요구가 '수행사찰 분배요구'에서 '종권인계'로 비약했던 것이다.1차 혁신운동의 좌절 이후 뚜렷한 진전이 없던 정화의 의지는 이승만의 정화유시를 도화선으로 하여 비구-대처의 종권다툼으로 변질하였던 것이다.

    3) 정화운동에서 비구-대처의 종권분규로의 변질
  불교 내의 비민족적,비불교적인 일제의 모순들을 척결하고 불교의 순수성을 되찾고자 한 정화운동은 당연한 시대적 요청이자 한국불교의 과제였다. 그러나 순수한 동기와 의지를 지녔던 정화운동은 앞에서 잠깐 언급하였거니와 6.25와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운동'으로서 지속적으로 전개되지 못했던 처지에 놓여 있었다. 바로 이때 단행되었던 것이 이승만의 1차 정화유시였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 땅의 불교세력들은 이승만의 유시를 정화운동의 계기점으로 포착하게 되었다. 앞으로의 서술을 통하여 밝혀질 것이지만 이것은 역사의 잘 못 끼워진 단추가 되어 버렸다. 첫번째 단추를 잘 못 끼워 버리면 우리는 끝까지 잘 못 끼워버리는 파국을 맞이할 수 밖에 없다. 이승만의 정화유시및 정권개입이라는 계기점에서 출발한 정화운동은 한국현대불교사를 왜곡되고 뒤틀리게 만든, 그래서 잘 못 끼워진 단추의 구실을 하여 버린 것이다.

    4) 비구 - 대처의 종권분규
  이승만의 유시가 있은 1개월 후인 1954년 6월 24일, 대처승들에게 눌려 지내던 열세의 비구승들이 서울 선학원(禪學院)에 모여 대처승 추방결의를 하였다. 이로써 불교정화운동은 '불교정화'라는 순수동기가 대의명분으로 전락해 버리고 실제에 있어서는 비구-대처 싸움의 양상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비구측의 대처승 추방결의를 종권도전으로 인식한 대처승 중심의 기성교단은 1954년 7월, 1945년에 제정되었던 '조선불교 교헌'을 '불교 조계종 종헌'으로 바꾸고 종단 대표직명을 다시 교정(敎正)에서 종정(宗正)으로 환원시켜 만암스님을 종정에 추대하였다. 계속해서 비구측에서는 두차례에 걸친 전국비구승대회(1954.8.24 와 9.27)를 열고 대처승측에 자진 환속과 종권 이양을 요구했으며 그 해 10월 9일에는 조선불교의 총본산인 태고사(太古寺)를 강제 접수하고 사찰간판을 조계사(曹溪寺)로 바꾸어 걸었다. 대처측은 11월 23일 조계사 탈환을 시도하였으며 조계사 접수를 둘러 싼 공방은 1년동안 계속되었다. 그 해 비구측은 4차례에 걸쳐 경무대를 방문하여 대처승 추방 협조를 거듭 호소하였다. 불교정화가 비구-대처의 종권다툼으로 변질,왜곡되면서 종권쟁탈을 위해 정권에 의존하는 사태가 빈번하게 발생했던 것이다.
  1955년 8월 11일 비구측은 전국승려대회를 개최하여 '조선불교 교헌'을 제정하고 비구 독자적인 종단 집행부를 구성하였다. 이로써 조선불교는 두개의 총무원으로 갈라졌으며, 비구-대처의 대립은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종단이 비구,대처로 두조각이 나자 대처측은 조계사 승려대회(1955.8.11)를 무효라고 주장하면서 서울 민사지법에 '사찰정화대책위원회 결의 무효 확인 소송'을 제기(1955.8.15),법적투쟁을 시작했다. 이 소송제기는 계속해서 맞소송을 불러 일으키며 불교내 문제를 법정으로 번져 놓게 했으며 이는 앞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정권과의 공생관계를 노리는 종권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10 여개월만에 내려진 법원의 판결은 대처승측의 승소판결로 끝났고(1956.6.15) 서울 고법항소에서도 공소기각이 되어 대처승의 승소였다.(1957.6.15) 서울 민사 지방법원에서 패소한 비구측은 패소의 원인을 집행부의 능력부족이라 판단내리고 청담 총무원장을 인책 퇴진시켰다.(1956.10.27) 그 후 비구 내분으로 인해 총무원장은 단명하였으며 끊임없는 종권불안의 나날들을 보내야만 했다.
  1960년에 4.19혁명으로 이승만이 물러나자 정부의 비호를 받은 비구측에 밀려 대부분의 사찰에서 물러가고 대처측은 조계사 탈환을 시도했으나(1960.4.27) 실패로 돌아 갔으며 5월 3일 석가탄신일 기념행사 후 다시 '비구승 물러가라'라는 구호를 외치며 가두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에 비구측은 '불법에 대처승 없다'(1960.11.19)는 구호를 내걸고 가두시위를 했다. 시위의 공방이 계속되던 중 이청담스님을 위원장으로 하는 '불교정화 대책위'를 구성하고 승려대회를 열었다. 승려대회에서는 대법원에 계류중인 '사찰정화대책위원회 결의 무효 확인 소송'을 오판할 경우 순교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어 11월 24일 대법원이 서울고법에서 내린 대처측 패소판결을 파기하고 환송판결을 내리자 비구,비구니 500여명이 대법원에 난입, 집단시위를 벌였으며 6명이 할복을 기도하였다. 검찰을 대법원 난입과 관련하여 비구승 24명을 구속,기소하였다.(1960.12.21)
  1960년 한 해가 저물고 대법원 난동을 몰고 왔던 상기(上記)의 소송은 1961년 3월 대법원이 비구승단을 법적으로 인정함으로써 비구측의 승소로 결론지어졌다. 그러나 전국 사찰 쟁탈전은 오히려 더욱 가속화 되어 아침마다 주지가 바뀌는 사태가 속출하고 이런 사태들은 곧장 법정투쟁으로 이어졌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종헌 쟁탈전이 지루하게도 이어질 무렵, 5.16군사 쿠테타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는 1,2차 불교정화에 대한 담화를 발표하고(1961.11.9 , 12.9) 문교부는 '불교재건위원회 조례안'을 양측에 제시하나 거부되었다. 이에 박정희는 최고회의 의장 명의의 담화를 발표하였는 바 그것은 "불교계의 분규를 조속히 종속하고 대동단결하여 불교자체의 융성과 민족문화의 향상에 힘쓰라.      정부는 불교재건위원회를 만들어 국민의 여론에 따라 이를 시정하려고 했으나 거두지 못하였음은 유감된 일       분쟁관계자들은 대국적인 견지에서 해결을 모색하라.       이와 같은 분쟁사태가 계속된다면 단연코 묵과하지 않겠다." 는 요지를 담고 있었다.(1962.1.13)
  박정희의 담화가 있은 며칠 후 비구-대처 양측 대표들은 문교부에서 주선한 '불교재건위'구성에 극적으로 합의했다(1962.1.18) 1월 22일 양측 대표들은 중앙공보관에서 문교부장관 참석하에 재건위 결성식을 가지고 1월 31일 제 4차 회의에서 통합종단을 구성키 위한 '불교재건 비상 종회 회칙'을 확정하고 종회의원을 선임한 후 발전적으로 해체했다.
  불교재건 비상종회는 새 종단(비구.대처 통합종단)의 명칭을'대한불교 조계종'으로 하고 교조는 태고 보우국사로 하는 등 종명,종지 등에 완전히 합의하고 2월 28일 종헌을 제정했다. 비상종회에서 승려 자격문제에 '대처승 기득권 문제는 문교부의 해석에 따른다'는 단서에 대해 대처측이 반발했으나 표결결과 가(可)-15 , 부(否)-14 , 무효-1 로 패배했다. 비구측은 3월 6일 대처측의 반발을 묵살하고 재 종헌을 제정, 21일 공포하였다. 5.16쿠테타 후 비구.대처 분규수습을 위해 구성된 불교재건 비상종회는 제 8차 회의에서 출가독신 수행자만을 승려로 인정할 것을 의결하고 제 9차 회의에서는 종정에 이효봉스님을, 총무원장에 임석진 스님을 추대하는 등 새 종단 구성에 착수하였으며 4월 11일에는 조계사에서 취임식을 거행하였다. 이로써 비구.대처 통합종단인 조계종의 출범이 선포되었다. 이어 4월 14일 문교부에 정식 등록함으로써 비구중심의 조계종이 한국불교를 대표하게 되었다.
  이로써 비구-대처의 지루했던 종권분규는 일단락 되었다. 한때  대처측이 비구측과 다시 투쟁할 것을 선언하면서 서울 민사지법에 '조계종 종헌 무효확인 및 종정추대 무효확인 소송'을 제기함으로써(1962.10.4) 새로운 분규를 예고하는 듯 하였으나 정부당국에 의한 대처측 반발 강력 억제 입장으로 사그라들었다. 이 후 대처측은 대처측 제30회 중앙종회(1968.11.18)에서 통합종단 백지화를 선언하고 대처측 제9차 전국 대의원회의 (1970.4.16)에서 '한국불교 태고종'으로 독자노선을 선언함으로써 비구-대처는 각각의 종단을 가지게 되었다.

    5) 정화운동의 실패와 그 폐해
  이승만의 유시를 계기로 50년대 이후 진행된 정화운동의 양상은 (불교혁신운동 당시의 진보적 정신은 흐려져 버리고) 비구-대처의 종권분규로 왜곡되어 나타났으며 그 전개과정을 보면 다음과 같은 몇 가지의 특징을 가진다.  ① 정부수뇌(이승만과 박정희)의 유시와담화로 시작되어 문교부가 개입하여 적극 중재를 시도  ② 양측대표가 일단 화합해서 통합문제를 의논하다가 '승려'의 자격문제와 이에 따른 이해 관계로 대립  ③ 결국 문화부는 대처측의 완전 동의 없는 비구측의 통합종단 구성을 인정  ④ 대처승은 다시 이탈해서 법정에서 통합종단의 불법성(不法性)을 호소  ⑤ 1차에서 대처승 승소, 2차에서 비구승 승소 등 법정판결의 번복을 계속  ⑥ 그 방법에 있어 단식,데모,할복,법원 난입,유혈난투 등의 수단을 동원  ⑦ 문교당국은 물론 법원마저도 불교정화문제를 정치적으로 다루려 한다는 등등이 그것이다.
  살펴 보았던 것처럼 불교정화운동은 민족사적 관점에서 일제잔재의 청산과 불교의 순수성을 회복하려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였으나 이승만의 정화유시로 왜곡,변질되어 전개되고 내부의 자율적,자주적 정화운동은 말살되어 버렸다. 그 폐단을 살펴보면, ① 한국불교계에 제도적 규제와 계속적인 분쟁을 야기시켰으며  ② 분쟁해결을 관권과의 결탁을 통해 해결하려는 악습을 조장하였고  ③ 이로 인해 한국불교를 소수권력의 시녀로 전락시켜 버렸다. 또한 분규과정에서 사찰재산의 유실과 임의적 처분,인적.물적 손실을 초래함으로 인해  ④ 불교발전의 족쇄를 채우게 하는 '불교재산관리법'(현재,'전통사찰보존법'으로 명칭만 변경되어 있을 뿐이다.)이라는 악법을 제정케 하는 구실을 제공하였다. 뿐만아니라 한국불교가 현대사를 관통하는 동안 내내 모순과 질곡으로 몰아 넣는 원인인  ⑤ 종단과 승려의 자질 저하  ⑥ 종단의 분열과 종파의 분열 등의 폐해를 안겨다 주었다.
  안타깝게도 비구-대처분규는 비구 종단내의 분규로 이어진다. 이제 비구 종단내의 분규를 살펴보자.

 

  50년대 정화운동에서부터 잘 못 끼워진 단추는 통합종단이 들어 선 이후에도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면서 한국불교의 걸림돌로 작용했다. 비구-대처 분쟁을 통해 비구 중심의 조계종이 한국불교의 최대종단으로 자리잡은 이후에는 조계종 내의 종권분규가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조계종 분규의 전체적 양상은 종단을 대표하는 종정과 종단의 행정을 책임지는 총무원장과의 대립으로 일관된다. 명목상 종권을 대표하는 종정과 실질적으로 종단을 대표하는 총무원장간의 반목은 종단 주도권 장악을 위한 각 사찰별 문중,법맥의 대립이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60년대 말부터 70년대 초까지 계속된 분규는 청담스님계와 경산스님계의 대립이라 할 수 있을 것이며 70년대부터 80년대까지의 분규는 조계사측과 개운사측의 대립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통합종단 조계종내의 종권분규를 이 양자로 나누어서 살펴보자.


    1) 60년대 말  -  70년대 초까지의 조계종 내분
  앞에서 살펴 보았던 것처럼, 통합종단 조계종은 종정에 효봉스님을 추대하고 총무원장에 임석진 스님(대처측)을 선출함으로써 그 출범을 알렸다.(1962.4.11)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서 대처측 임석진 총무원장 이하 집행부는 취임 5개월만에 조계종 초대 중앙종회 의원의 구성비율(비구 32 : 대처 8)에 이의를 제기하고 전원 사임했다.(1962.9.10) 이로써 통합종단의 초대 총무원장은 그 해 12월 30일자로 퇴진하게 되고 비구측은 바로 당일 대처측의 김법룡스님을 총무원장으로 선출하고 새 집행부를 구성하는 신속성을 발휘했다. 김법룡 충무원장은 계속되는 비구-대처의 알력 속에서도 3년 3개월이라는 조계종 사상 최장수의 재임기간을 채우고 66년 4월 물러갔으며 김법룡스님의 후임으로 비구측의 손경산스님을 총무원장으로 선출하였다.(1966.4.12) 이로써 그 동안 - 외형적으로나마 - 균형을 이루어 오던 비구-대처의 균형은 무너지고 조계종의 실권은 완전히 비구측으로 넘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새로이 조계종의 총무원장으로 선출된 손경산 스님은 통합종단 조계종에 가담한 대처측 화동파(和同派)에 대한 처리에 있어서 온건론을 유지하였다. 이에 반해 초대 종정인 이청담스님은 곪은 손가락은 절단해 버려야 한다는 강경론을 펼치고 있었다. 이들은 잦은 의견대립을 보이면서 청담-경산 이라는 새로운 대립구도를 서서히 표면화시키기 사작하였다. 조계종 14회 중앙종회(1966.11.30)는 통합종단의 제2대 종정으로 이청담스님을 재추대하게 되고 종정-총무원장의 잦은 의견대립은 문중,파벌의식이 개입됨으로써 종권다툼의 양상으로 번질 기운을 안으로 삭이고 있었다. 급기야 1967년 7월 해인사에서 열린 제16회 임시종회에서는 이 문제가 표면화 되었다. 여기서 당시 총무원장 손경산 스님이 동국대학교 재단을 운영함에 있어서 종단이 4천여만원의 빚을 지게 된데 대한 규탄이 있었고 청담스님은 경산스님의 사퇴만이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경산스님이 이에 불응하자 청담스님은 사표를 던졌으며 이에 경산스님도 어쩔 수 없이 사표를 제출했다. 해인사 종회를 계기로 청담,경산 두 거두가 종권의 정당에서 물러가자 조계종은 제3대 종정에 윤고암스님을, 총무원장에 박기종스님을 선출하였다.(1967.8.9)
  1969년 8월 12일 한동안 조계종권에 멀어져 있던 청담스님이 "불교정화 이념과 제반 불사가 부진함을 참회하여 대한불교 조계종을 탈퇴한다." 고 하여 조계종 탈퇴선언을 함으로서 조계종단은 다시 벌집을 쑤셔 놓은 듯 들끓었다. 청담스님의 조계종 탈퇴선언은 당시 총무원장 박기종스님에 의해 자신의 불교유신재건안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등 총무원장과의 불화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탈퇴선언이 있은 지 10여일이 지난 후 (1969.8.23) 청담스님의 탈퇴선언에 자극을 받은 선학원(청담스님 지지파)측은 9월 1일 전국비구승대회를 개최할 것을 결의했다. 청담스님을 지지하는 선학원측과 총무원측의 대립이 노골화되기 시작했던 지점이었다. 청담스님탈퇴의 책임 문제에 대한 선학원측의 강력한 공세를 받은 당시 총무원장 박기종스님은 사퇴할 뜻을 밝혔다(1969.8.26) 이처럼 청담스님 탈퇴선언으로 본격화 된 종단분규는 청담스님측과 경산스님측의 총무원 실권장악을 둘러싼 주도권 싸움으로 집약되었던 것이다. 이어 9월 1일 개최된 제21회 비상종회는 선학원측의 최월산스님을 총무원장으로 선츨하였으나(1969.9.13) 봉은사 땅 매각사건으로 10개월만에 물러나게 된다. 최월산 총무원장 후임으로 다시 청담스님이 선출되어 청담 총무원장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1970.7.22)
  새롭게 구성된 청담 집행부는 총무원장 외유중에 김경우 총무부장이 관악산 염주암을 임의로 매각해 버림으로 인해 집단사퇴하게 되고 청담 총무원장만이 임시중앙종회(1971.7.27)에서 재선출되었다. 그러나 그 해 11월 15일 청담스님이 갑자기 입적함으로써 조계종 내분은 새로운 양상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청담스님의 입적 후 그 후임을 놓고 조계종단은 다시 파란이 이는 듯 하였으나 비교적 파벌색이 적은 강석주 스님을 후임 총무원장으로 선출하였고(1971.11.23) 강석주 집행부는 청담스님 입적 열흘 후인 11월 25일 출범하게 되었다. 강원장은 재임 1여년만인 1973년 1월 25일 손경산 총무원장에게 종권을 넘겨 주고 물러났다.

    2) 70년대부터 80년대 까지의 종권분규
  봉은사 염불암 땅 매각사건으로 총무원 집행부에 대한 불신이 팽배한 때 손원장은 젊은 승려들의 옹립을 받으며 등장했다.(1973.1.25) 그러나 손원장 집행부는 73년 5월 윤고암 종정의 사회국장 해임 거부를 발단으로 종정 권한 문제를 둘러싼 종권다툼을 시작했다. 윤종정이 물러나고(1974.7) 문중배경도 없고 대처측 출신이라 종권을 전혀 넘보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는 파벌색이 없는 이서옹스님이 종정으로 추대됨으로써(1974.8.3) 지루한 종권다툼은 일단락되는 듯 했다.
  그러나 이서옹 종정은 예상을 뒤엎고 종정 친정체제를 주장하면서 종단 실무를 관장하겠다고 나서게 되고 이에 손경산 집행부는 정면 도전했다. 이 종정과 손 원장의 종권다툼은 종정취임 두달만인 1975년 9월 30일 손 원장의 구속사태를 빚었다. 손 원장은 경기도 양주 대성암 토지 매각 대금을 다른 항목에 전용해 썼다는 '유용' 혐의로 조계종 사상 현직 원장이 구속되는 충격적인 첫 사례를 남겼다. 손 원장의 구속사태로 새 총무원장에 송서암스님이 선출되었다.(1975.10.6) 그러나 종권안정 여망과는 달리 송서암 집행부는 종단 행정 경륜의 일천함으로 혼미를 거듭하였고 이어 박기종 스님(1975.12.5 - 1976.10.4) - 고경덕 스님 (1976.10.4 - 1976.12.3) - 김자운 스님(1976.12.3 - 1977.3.23)등이 차례로 총무원장으로 선출되었으나 곧 물러나게 됨으로 종권은 불안하기만 하였다. 김자운 집행부에 이어 김혜정 총무원장 집행부가 새로 구성되었다.(1977.7.23) 김혜정 총무원장 집행부는 서옹 종정측으로서 실무친정의 근거지가 되고 이에 반기를 든 종회 중심의 재야세력은 김혜정 집행부에 강경히 맞섰다.
  종권다툼의 양상은 종회측의 이 종정 불신임안 통과(1977.10.7), 종정직 해임 확인 청구소송(1977.11.9), 이 종정의 종회 해산 명령(1977.11.11)의 공방을 벌이며 일진일퇴를 거듭하였다. 종회측은 해인사 종회후 채벽암 스님을 종정 직무대행으로 추대하고 서울 개운사에 임시 총무원 간판을 내달게 되었다.(1978.3.10) 마침내 조계종단이 조계사 총무원(종정)측과 개운사 총무원(종회중심의 재야)측으로 양분되는 사태에 이르게 되었다.
  조계사측과 개운사측으로 양분된 조계종의 내분은 80년에 들어서면서 재판 판결과 승단 지지도가 개운사측으로 확연히 기울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양측은 대립구도 탈피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협상에 임한 결과 분규종식을 위한 종회의원 총선에 합의하게 되었다.(1980.3.30) 합의에 따라 제 6대 종회의원 선거가 전격적으로 실시되었으며(1980.4.17) 새로 구성된 제 6대 의원의 표대결로 총무원장 송월주 스님과 종회의 정.부의장을 선출하였는데 모두 개운사측이 독점하였다(1980.4.26 - 4.27) 이에 조계사측이 반발하여 종정추대에는 실패하였다.
  그러나 송월주 총무원장 체제의 출범이라는 성과를 얻은 당시 상황은 3년동안 계속된 조계사, 개운사 만의 종권분규를 완전 종식시키지 못하였다. 조계종단은 법적인 통일만을 이루었을 뿐이었다. 이 당시 종정 추대에 실패한 종회가 다시 5월 7일 종회를 열어 종정추대를 재시도했으나 총무원장, 종회 정.부의장 등을 모두 개운사측이 독점한 것에 반발한 조계사측이 다시 송월주 총무원장의 자격미달을 들고 나와 당선 무효를 주장하였고 이를 계기로 양측의 공식 대회는 두절되고 와해 상태로 돌입했기 때문이다.
  5월 13일 개운사측이 조계사측의 총무원을 강제로 점거하면서 양 조계종단은 다시 내분상태로 되돌아 가게 되었고 이를 주시하고 있던 사찰 당국은 조계종단이 더 이상 자체 정화능력이 없다고 판단하고 무력으로 조계종단을 정화하려 했다. 이것이 이른바 한국불교 1600년 사상 가장 치욕적인 10.27법난이었던 것이다.
  조계종은 1980년 11월 8일 '정화중흥회의'를 발족시켜 법통을 잇고 이어 종헌을 개정하고 이성철 스님을 종정으로 추대하고 이성수 스님을 총무원장으로 선출하였다.(1981.1.7) 조계종 '정화중흥회의'가 총무원 중심제의 종헌을 탄생시킴으로써 총무원장 1인 독재체제는 여러 형식적 장치에도 불구하고 그 효력을 발휘하였다. 총무원장은 본,말사 주지 임명에 개입하면서 파벌,문중의식을 확대,재생산해 내고 그 과정에서 각종 비리,부패의 진원지가 되었다. 이로써 81년 이후 1년동안 4번이나 총무원장이 교체되는 난맥상(성수 > 초우 > 법전 > 진경)을 노출하였다. 1982년 4월 6일 총무원장으로 새롭게 선출된 황진경 스님 역시 - 10.27법난이후 실력파로 부상해 있었던지라 종권불안정을 종식시키리라는 기대와는 달리 - 당시 동맹관계에 있던 서의현 종회의장으로부터 종권도전을 받기 시작하였으며 급기야 1983년 8월 6일 신흥사  주지 교체 인사를 둘러싸고 전대미문의 승려살인 사건을 유발하였다. 이에 황원장은 책임을 지고 자진 사임했다.(1983.9.3) 이에 앞서 원로스님들은 봉은사에서 원로회의를 열어 '조계종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신흥사 사태에 대한 책임을 물어 당시 총무원 집행부와 종회의원 모두를 사퇴시키고 총무원과 종회를 해산키로 결의하였다.(1983.8.27)
  1983년 9월 5일에는 조계사에서 전국승려대회가 개최되고 여기에서 비상종단운영회의설치가 결의되었다. 신흥사 사태수습을 명분으로 출범한 비상종단은 김서운 총무원장을 내세우고 평화적 종권 인수인계를 시도했으나 여의치 않게 되자 서울 봉은사에 임시 총무원 간판을 걸었다. 비상종단은 그 동안 소장승려와 '불교사회문화연구소'에서 꾸준히 준비해 온 개혁안을 토대로 개혁작업을 실행해 나갔다. 비상종단의 개혁작업은 혁신적이고 구체적이었으나 종단 내의 보수기득세력과 권력의 공작에 의해 좌초되고 말았다. 즉 1984년 8월 1일 재야측이 이성철 종정의 지지를 받으면서 소집한 전국승려대회가 만장일치로 비상종단을 불신임하고 오추원 총무원장을 선출하였고 2일에는 총무원을 접수하였던 것이다.

    3) 88년 봉은사 분규
  1988년, 서의현 총무원장과 봉은사 주지였던 변밀운 스님간의 종권다툼으로 인해 봉은사 분규가 발생했다. 당시 1987년 대선을 앞두고 있는 상황하에서 그들의 종권다툼은 폭력적 물리력 행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당시 민정당 후보였던 노태우를 당선시킴으로써 그 이후 종권을 보장받는 형식으로 나타났다. 그리하여 이들은 서로 앞다투어 노태우 당선기원법회를 열었던 것이다. 87년 대선 이후 정권이양 이후 종권이 불안정한 상황에서 서의현 체제에 반기를 든 세력들이 밀운스님을 중심으로 하는 독자적인 총무원 체제를 꾸리면서 분규가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정권을 등에 업고 중앙승가대 발전을 담보로 하여 학인스님들을 전면에 내세워 폭력으로 봉은사를 접수하는 사태로 이어졌으며 접수의 성공으로 봉은사 분규는 일단락되었다.

    4) 91년  종정 선출을 둘러싼 분규
  한편, 1991년 2월로서 임기가 만료된 성철스님의 후임을 놓고 성철스님의 연임을 주장하는 범어문중과 원산스님의 추대를 주장하는 덕숭문중간의 대립으로 새로운 분규가 시작되었다. 8년 종헌 개정시 종정선출권한이 원로회의에 있는가 종회에 있는가를 놓고 대립하던 양 세력이 각기 '비상수습대책위'와 '전국교구본사주지연합회'로 조직을 꾸리면서 각자의 정통성을 주장하게 되었다. 이때 서의현 총무원장이 범어문중에 가담하게 되고 이에 '교구본사주지연합회'로 반 서의현세력이 결집하면서 승려대회를 개최하여 각각의 총무원을 구성하게 되었다. 반대측 역시 승려대회를 개최하여 성철스님을 종정으로 재추대하였다. 이는 뿌리깊은 문중,파벌의식이 초래한 한국불교의 또 하나의 뒤틀린 모습이 아닐 수 없다.

    5) 종단분규의 원인과 그 해결
  이상에서 본 고는 한국현대불교사를 다루면서 청산해야 할 역사를 조명해 보았다. 현대사를 관통하면서 한국불교는 종권다툼의 각축장화 되었고 그것은 끊임없는 종단분규,종권불안으로 이어졌음을 살펴보았다. 과히 '현대한국불교사는 종단분규사'라는 명제를 실감할만 하였을 것이다. 여기서 종단분규의 양상을 좀 정리하고 넘어가자. 종단분규는 주로 3가지 유형으로 표출되었다. 즉 주지임명에 관한 분규, 총무원장 선출 혹은 정통성에 관한 분규, 종정선출 혹은 종정과 총무원장간의 갈등에서 일어난 분규가 그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종단분규의 원인은 무엇일까?  종단분규의 원인을 묻는 한 설문조사에서 스님들은  ① 일부 기득권 스님들의 종권욕, 이권다툼(65.5%)  ② 불교사상의 혼란과 수행정진의지 부족(20.6%)  ③ 종단제도의 미흡과 운영의 불합리(8.1%)  ④ 정치권력의 불교계 이간책(5.6%) 등의 순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위 4개항은 불자들의 의식문제에서부터 교육,수행,포교 등 제도개혁의 문제 나아가 종단 내의 비민주적 요소를 온존케 하는 악법제도, 정권에의 예속성 등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다. 사실 이 모든 요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원인 - 결과의 관계에 있는 것이어서 어느 하나의 요인을 절대적으로 지배적인 요인이라 말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종단분규의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종단분규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처음으로 만나는 지점이 정화운동이다. 정화운동의 폐해가 현재의 종단분규의 원인으로 작용했음을, 앞에서 살펴보았던 바에 의해 알 수 있다. 그런데 정화운동 역시 다른 원인의 작용이었다. 그것은 바로 일제 잔재의 온존이며 일제 잔재의 온존은 일제국주의의 조선 지배정책의 일환이었던 '사찰령'의 온존을 의미한다.
  사찰령은 한국불교의 여러 전통을 파괴하면서 한국불교 모순의 원인으로서 작용하여 모순을 확대, 재생산시켜 나아갔던 것이다. 즉, 사찰령은 전국의 사찰을 본사와 말사로 구분하고 본,말사 주지의 임명을 총독부가 담당케 함으로써 불교를 식민지적 지배하에 놓이게 했으며, 일제에 의해 임명되는 주지에게 권한을 극대화시켜 줌으로서 '주지 전횡제도'를 가능케 했다. 일제가 물러가고 난 후부터 총독부의 역할을 총무원이 대신하고 있고 총무원은 다시 정치권력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왜곡된 현상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주지전횡제도와 총무원장 1인 독재체제로 귀결되는 제도적 악법이 현대불교사를 규정한 종단분규의 원인의 하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종단분규의 또 하나의 원인은 정권의 재창출, 정통성 확보를 위해 종단분규의 씨를 뿌리고 개입하기도 하는 역대 정권의 기만성이다. 이승만 정권의 정화유시로부터 10.27법난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5, 6 공화국 下에서의 정권과 총무원과의 관계는 이를 잘 증명해 주는 것이다.
  또한 91년 이후 종단분규의 한 양상으로 나타난 종정선출을 둘러싼 종권다툼은 문중간의 파벌의식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자기 문중하에 보다 많은 사찰을 운영하기 위하여 문중들은 종정과 총무원장을 자기 문중하에서 배출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이러한 욕구는 실제 초탈해야 할 재산권과 인사권의 확보를 위한 것이다. 이러한 문중간의 파벌의식은 종단분규의 한 원인으로서 충분히 작용해 왔던 것이다.
  종단분규의 원인이 이러할진대 그 해결방안은 무엇일까?  그 해결방안은 개혁일 수 밖에 없다. 오직 새로 태어남으로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밖에 없다. 만해 한용운 스님은 '조선불교유신론'에서 "유신(維新)이란 것은 무엇인가? 그것의 파괴의 아들이다. 파괴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유신의 어머니이다."라고 갈파하였다. 과거 모순의 고리를 끊어버리고 파괴해 버릴 때만이 유신과 개혁은 완수될 수 있을 것이다. 개혁의 방향을 살펴보면  ① 정권으로부터의 '자주'를 획득해야 하며 (불교의 자주화)  ② 총무원장 1인 독재체제, 주지전횡을 가능하게 하는 제도를 개혁해야 하며 (제도적 개혁)  ③ 한국불교 모순의 책임자는 불자 대중 자신이라는 의식으로 전환해야 하며 (의식개혁)  ④ 불교사상을 현대적으로 정립해야 하며 (사상의 혁신)  ⑤ 청정,화합의 승풍을 진작시켜야 (승풍진작,인물개혁) 하는 것으로 압축될 것이다.

 

  누누이 강조하는 바 한국불교의 모순은 한국의 민족모순이 불교적으로 전이된 것이다. 현대사에 있어서 한반도의 민족모순은 일제국주의와 미제국주의의 뿌리깊은 식민정책에 의해 그 골은 깊고 넓어만 갔다. 제국주의의 식민정책은 문화정책에도 일관되게 흐르며 문화정책은 종교정책을 포함시킨다. 제국주의적 문화침탈에 의해 민족종교인 불교의 모순은 극도로 심화되어 왔다. 그 모순들의 현실태로서의 종권분규를 앞에서 다루었다. 이제 그 모순의 또 다른 현실태인 탄압과 훼불을 개략해 보려한다.
  탄압은 주로 자체 정화능력의 결여를 명분으로 내세우며 정치적 계산에 의해 개입하면서 불교의 정치권력에 대한 예속성,의존성 심화를 조장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이것의 대표적인 사례가 이승만의 정화유시와 10.27법난이다. 뿐만 아니라 탄압은 민족세력화, 진보세력화의 조짐을 보일때 정권은 철퇴를 가함으로서 민족,민중의식 고양의 저지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는 원각사 법당 난입사건, 각종 집회방해로 나타난다. 훼불은  ① 제반정책에 있어서 소외시키는 유형  ② 기독교 편향의 사회,문화 속에서 왜곡,변질 시키는 유형  ③ 군 내의 불교탄압 유형  ④ 이교도들에 의한 불교비방, 훼불유형 등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끊이지 않는 탄압과 훼불은 근본적으로 불자 대중의 각성을 바탕으로 불교의 자주화, 불교의 혁신, 민족문화의 고양을 통해 극복되어질 수 있으리라 본다. 이것은 단순히 불교중흥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민족 중흥의 계기로 작용한다는 데 그 역사적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90년대 불교

1. 종단개혁투쟁의 발단과 그 전개

    1) 종단개혁투쟁의 발단 - 서의현 반대투쟁

  종단개혁투쟁은 서의현 반대투쟁을 그 촉발지점으로 하여 개혁회의의 출범과 해체, 개혁종단의 출범, 개혁종단의 지속적인 개혁작업을 포괄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종단개혁투쟁은 여전히 지속되어야 한다는 필연성을 확보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종단개혁투쟁의 촉발지점으로 작용하였던 서의현 반대투쟁을 살펴본다. 1994년의 벽두 상무대 이전공사 자금유용에 대한 국방부 특검단의 수사발표(1994.1.27)가 있은 다음 날 조기현은 '특정범죄 가중처벌법 위반 및 뇌물공여' 등의 혐의로 구속수감 되었다. 이를 전후로 하여 상무대 이전공사 자금과 관련하여 각종 소문이 나돌고 있었는데  이때 민주당 정대철의원이 '상무대 비자금 조성'의혹문제를 폭로하였다. 폭로의 내용인 즉, 당시 조계종 전국신도회장이던 청우종합건설대표 조기현이 상무대 이전사업의 대금으로 받은 금액중 223억원을 비자금으로 조성하고 이 중 80억원을 동화사 대불공사에 시주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화사 대불공사에 시주했다는 80억원은 서의현을 통해 대선시기에 김영삼후보쪽으로 들어갔다는 것이었다.
  상무대 비리사건은  ① 서의현의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혔으며  ② 여전히 불교계 종단권력이 정치권력과 결탁해 있으며 정치권력 역시 종단권력과의 모종의 공생관계를 유지하고 있음이 드러 났으며  ③ 서의현으로 상징되는 부패,비리 기득권 세력의 제거가 필연적이며  ④ 이러한 일련의 이유로 인하여 불교의 개혁이 필연적이라는 불자대중의 인식이 급속히 확산되어 가는 계기가 된 사건이었다.
  한편 서의현은 '상무대 비리사건'이 자신의 차기 종권장악에 막대한 타격을 입힐 것이라 예상하고는 이 사건을 조기에 진압하고 종권을 장악하기 위해 3월 18일에 차기 총무원장선거를 3월 30일 개최한다고 발표했던 것이다. '실천불교전국승가회'와 같은 불교개혁을 꾸준히 모색해 온 종단개혁세력은 이와 같은 서의현의 불법적이고 도발적인 3월 30일 종회개최설에 반대하여 하나로 세력화 되는 바, 그 세력화의 결과가 바로 '범승가 종단개혁 추진회(범.종.추)'의 결성(1994.3.23)이었던 것이다.
  상무대 비리사건과 3월 30일 종회개최발표는 범종추를 종단개혁투쟁의 구심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제 종단개혁투쟁의 구심점이 된 범종추는 3월 26일부터 '구종법회'를 이끌어 나아갔으며 이에 앞서 3월 25일에는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와 동국대 불교학생회 학생들이 농성에 돌입하였다. 종단개혁의 열기는 승,속을 불문하고 불자대중의 가슴에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갔던 것이다. 3월 28일에는 종단개혁을 위한 결의대회를 가지며 '서원장 3선음모 결사반대'를 결의하고 '상무대 80억 비리의 진상규명'을 촉구하였다. 이후 3월 29일 새벽 6시 30분 서의현 총무원장은 조직 폭력배 300여명을 사주하여 총무원에서의 농성스님및 재가불자들을 습격하였으며 경찰들은 농성자들을 강제연행하기에 이르렀고 종단개혁세력은 이 날의 강재연행,폭력을 3.29법난으로 규정하고 불교개혁을 가로막는 정치권력과의 일대격전도 불사할 것을 선언하였다.
  3.29법난 당시 범종추 소속스님들 뿐만 아니라 대불련 소속법우들 역시 (대.경지부에서도 30여명이 참가하였다.)강제연행,폭행을 당하면서 불교자주, 불교개혁의 기치를 내리지 않았다. 그러한 열의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비호를 받은 서의현 세력은 3월 30일 제 112회 임시중앙종회를 개최하여 서의현의 3선을 결의하였다. 바로 다음 날 재가불자들의 조직적이고 한층 더 강력한 투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불교를 바르게 세우기 위한 재가불자연합'이 창립을 선언하고(1994.3.31) 범종추와 함께 종단개혁완수를 위해 투쟁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후 몇번의 양심선언이 서의현의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히고 이에 맞서 서의현 세력의 강제로 추측되는 서암스님의 승려대회 중지교시가 발표(1994.4.9) 되는 등 혼미를 거듭하면서 결국에는 4.10 전국승려대회 개최로 이어졌다. 전국승려대회에서는  ① 서암종정 불신임 결의  ② 서의현 원장 공직박탈 결의  ③ 개혁회의 출범선언  ④ 개혁회의 의장에 월하스님 선출 등이 이루어졌고 곧 이어 총무원 접수를 시도했으나 경찰은 다시 이를 불법집회로 간주하고 스님및 재가불자들을 강제연행하였다. 이에 원로스님 6명이 단식농성에 돌입하고 4월 11일 원로회의는 조계종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개혁회의는 3.29, 4.10법난을 책임지고 김영삼 정부 퇴진, 최형우 내무장관 구속을 촉구하였다. 4월 13일에는 공권력이 철수하였고 개혁회의는 총무원을 접수하였으며 이어 새벽 5시에는 서의현 원장이 사퇴성명을 발표하였다. 이날 오후 2시 조계사에서는 1만여명의 대중이 참가하여 범불교도 대회를 개최하였고 개혁회의 현판식이 이루어졌다. 원로회의는 4월 10일의 전국승려대회의 결정을 추인함으로써 서의현 반대투쟁은 승리로 결론지어졌다.

 

    2) 종단개혁투쟁의 전개  -  개혁회의의 출범과 개혁작업

  개혁회의는  ① 불교의 근본정신 회복및 승단 위계질서 확립  ② 교단의 자주성 확립 및 불교관련 악법폐지  ③ 교단의 민주적 운영과 재산공개  ④ 여법한 주지인사 실시 및 무분별한 불사 지양  ⑤ 파벌적 문중의식 타파 및 승가 후생복지 증대  ⑥ 승가교육제도 정립  ⑦ 의식,법복,의제 정비 및 통일  ⑧ 포교활성화 및 사회복지사업 추진  ⑨ 재가불자 종단 참여모색  ⑩ 인권,환경 등 사회역할 증대 등 10가지 공약을 제시하면서 출범하였다.(1994.4.13)
  개혁회의의 출범은 개혁의 완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개혁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물론 서의현 반대투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개혁의 토대를 일정부분 이루어 놓았으며 개혁의 물꼬를 튼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서의현으로 상징되는 기득권 세력의 몰락 그 자체가 불교개혁의 완수일 수 없을 뿐더러 서의현 반대투쟁의 승리 이후에도 여전히 보수기득권세력이 그 모습을 달리하면서 종권에 도전하는가 하면 일부는 시기를 노리며 잠복하고 있는 실정이기에 불교개혁은 너무나 멀고 험난한 길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서의현 반대투쟁을 촉발로 전개 된 불교개혁투쟁은 종단 권력구조의 개편이라는 차원에서 머무르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한국불교 1600년 동안 축적되어온 모순의 총체적 해체와 그를 통한 한국불교중흥이라는 불자대중의 염원을 실현시키는 일련의 지속적이고 조직적인 운동이 되어야한다. 그러하기에 개혁은 총체적일 수 밖에 없다. 그 총체성은 제도개혁, 인적 청산 ,의식개혁 등 모든 개혁의 내용과 대상을 포함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임무를 자기 임무로 설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이 바로 개혁회의였고 개혁의 총체성은 개혁회의의 임무임을 예고했는지도 모른다.
  개혁회의는 출범 이후 6월말까지  ① 개혁회의의 존립근거를 마련해 줄 개혁회의법 마련  ② 월하스님을 종정으로 추대  ③ 훼종조사 특별위원회를 열어서 기간의 부패승려에 대한 조사와 사찰에 대한 감사실시  ④ 대체 권력체계에 대한 법안 마련과 공청회 개최  ⑤ 재적 본사별 승적 재정비  ⑥ 법난 책임을 물어 김영삼 대통령의 사과와 최형우 내무장관의 해임요구 운동 전개  ⑦ 동화사,은해사,선본사,보문사 등의 기존의 반개혁세력이 잔존하고 있는 사찰에 대한 직할사찰 운영 등의 일들을 해 왔었다.
  개혁회의는 분명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불자대중과 국민들에게 보여 줌으로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개혁종단의 출범을 머리 속에 그려보게 만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개혁회의는 1차부터 마지막까지 공개회의의 원칙을 지켰으며 방청을 원하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방청하게 한 것이며 법제화의 과정에서 각종 공청회의 개최를 통하여 불자대중의 참여를 유도한 것과 '열린마당'을 통하여 종도들의 의견을 수렴한 것, 그리고 개혁회의의 진행과정을 '개혁회의 뉴스', '불교신문' 등의 지면을 통해 공개하여 의견을 수렴한 것 등은 분명 이전의 모습과는 다른 것이었다. 또한 개혁회의는 산하에 '법난 대책위'를 설치하여 법난에 대한 대 정권 규탄투쟁을 멈추지 않으며 '불교 자주화'의 당위를 지속적으로 천명하였다.
  그러나 개혁회의의 개혁작업들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개혁회의는 시간이 지나면서 '개혁은 물 건너갔다'는 등의 비아냥을 받아야 했으며 이는 잠복해 있던 보수세력의 결집이라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개혁작업이 중도에서 표류하게 된 원인들은 여러가지가 있겠으며 그것은 개혁완수를 반드시 극복해야할 과제인 것이다. 개혁표류의 원인은 종단개혁투쟁에 참여했던 진보세력이 종권을 얻어내면서 변절을 시작했고 재가불자들의 고립이 결국 대중이 아닌 소수세력에 의한 종단 운영을 유도하였으며 진정한 개혁에 대한 의식결여 등등의 개혁회의의 자체적인 원인과 외부적인 원인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나 세부적인 평가들은 이후로 미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그 경위들을 먼저 살펴보자.
  개혁회의가 다각도로 개혁을 추진하긴 하였으나 개혁의 구체적인 비젼을 제시하지 못하였던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반개혁세력은 자신들의 복권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개혁회의가 반개혁세력이 온존하며 그들의 물적토대가 되고 있는 사찰을 직영사찰로 하여 새로운 주지를 발령한 것에 대해 반개혁세력이 집단적인 소송을 전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기에다 우여곡절 끝에 개혁회의에서 통과된 종헌이 (1994.8.11) 원로회의에 의해서 인준이 보류(1994.8.23)되면서 위기감은 고조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출범하면서 기존 종회를 끌어안기 위해서 기존 종회의원 39명을 포함함으로 인해서 내부적 진통에 시달리던 개혁회의가 외부적 도전까지도 받는 상황에서 원로회의의 개혁회의 입안 종헌에 대한 인준거부는 개혁회의의 입지를 위축시킨 결과로 작용하였다.

 

    3) 개혁종단의 출범

  내. 외적 요인으로 인해 결정적 위기를 맞은 개혁회의는 9월 1일 개최된 원로회의가 제안한 내용을 9월 3일 , 제 8차 개혁회의의 본회의를 개최하여 수용함으로 인해 위기를 일정부분 벗어나게 되었다. 이어 9월 27일에는 제 9차  개혁회의의 본회의가 개최되어 개정종헌이 심의, 의결되었으며 9월 29일에는 원로회의에 의해 개정종헌이 인준되고 개혁회의 의장은 개정종헌을 선포하였
다. 새 종헌 ,종법에 의해 11월 7일에는 11대 중앙종회의원 55인이 각 교구별로 직접 선출되고 8일에는 직능별 중앙종회의원이 직능선출위에서 선출되었으며 11월 14일에는 각 교구별로 총무원장 선거인단 240명이 선출되었다. 이어 11월 21일에는 총무원장 선출을 위한 319명의 선거인단에 의해 새로운 총무원장이 선출(월주스님)되었고, 개혁회의의 뒤를 이어 개혁작업을 수행해 나갈 개혁종단이 출범하였다.

 

2. 종단개혁투쟁의 성과와 한계

  서의현 반대투쟁으로 촉발되어 개혁회의의 출범에서부터 어려운 과정을 거치면서 마침내 개혁종단의 출범에까지 이르는 종단개혁투쟁은 여러 성과에도 불구하고 그 전개과정에서 많은 한계와 오류들을 드러내었다. 이제 그 성과와 오류, 한계를 명확히 짚어냄으로서 여전히 미완인 개혁의 방향을 가늠해 보고자 한다.
  서의현 반대투쟁이 촉발될 당시 국민대중뿐만 아니라 일부 불교대중들의 눈에도 종단개혁투쟁은 새로운 종권다툼의 모습으로 비춰졌고 따라서 그들의 눈에 서의현 반대투쟁에 결집한 세력들(보수, 기득권이나 진보를 막론하고)은 곱지 않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아 놓았던 것은 광범위한 대중들의 참여였으며 미리 개혁을 모색한 개혁, 진보세력들의 주도면밀함으로 인해 획득되어진 명분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서의현 반대투쟁은 서의현 독재체제의 해체라는 직접적인 성과를 가져다주었으며 개혁회의를 출범시킴으로서 개혁의 지속적 추진을 가능케 했다. 개혁회의의 지속적인 개혁작업의 추진은  ① 제도개혁을 일정부분 이루어 냄으로서 이후 종단운영의 여하에 따라 제도개혁의 큰 틀을 만들 수 있는 시안을 마련하였다는 점  ② 불자대중의 불교개혁에 대한 염원과 열의가 가히 폭발적이었음을 확인했다는 점  ③ 불자대중의 개혁에 관한 관심과 염원은 향후 불교중흥의 인적토대를 이룰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한 점  ④ 개혁과정에서 개혁은 불교의 자주화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현실적으로 확인함으로서 불자대중의 정치적 각성이 이루어졌다는 점  ⑤ 개혁과정에서 개혁적, 진보적 승려들이 종단 내로 대거 진출함으로서 개혁세력의 원내 교두보를 확보함은 물론, 전체 승가의 세력재편이 진보적으로 이룰 소지를 제공한 점 등의 성과를 남겼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개혁회의가 개혁작업을 추진해 나가는 과정에서 몇몇 오류와 한계점을 드러냈는 바,  ① 개혁 초기 주도세력이 분열함으로서 제도개혁의 불완전(총무원장 직선제 관철 실패)을  가져다주었을 뿐만 아니라 개혁의 진전에 차질을 가져다 주었으며 개혁회의가 또 다른 이해관계에 의한 집단으로 오인 받기도 했다는 점  ② 구종회의원 39명을 개혁회의에 끌어안은 것은 끝끝내 개혁회의의 부담으로 작용하여 일정부분 개혁의 주도권을 그들에게 내줘야 했던 점  ③ 개혁세력의 물적토대의 부족  ④ 불교개혁투쟁이 폭발적으로 고양된 것은 불교대중의 광범위한 지지에 힘입은 바였음에도 불구하고 불교대중의 종단운영참여를 배제했던 점(재가대중과 비구니 스님들의 배제는 앞으로 개혁회의의 한계로 집중적으로 비판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⑤ 그로 인하여 출가비구대중들에 대한 불신을 증폭시켰던 점등이 바로 그것이다.

 


90년대말 불교와 2000년대의 비전
 

90년대는 94년을 기점으로 전후가 뚜렷하게 대비된다. 이미 1983년에 ‘비상종단’을 통해 한번 제기된 바 있는 ‘개혁’이 종단의 첨예한 화두로 대두하게 된 것이다. 서의현 원장의 3선 연임 시도를 계기로 촉발된 개혁운동은 공권력의 일방적 편들기를 이겨내어 개혁회의를 출범시키게 된다.

개혁회의는 종단의 민주화, 자주화 등 4대 과제를 제시하고 제도 정비를 통해 총무원장을 선출한 후 평화적으로 종권을 이양한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개혁종단이라는 송월주 총무원장 체제하에서도 크고 작은 이권 다툼은 쉬지 않았고, 불교방송 공금횡령사건, 여의도 불교문화센터 등을 둘러싼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종권 소외세력의 불만은 98년 총무원장 선거를 둘러싸고 폭발하였다.

송월주 총무원장의 3선 저지를 위해 모였던 반대 세력중 일부 세력이 총무원 청사를 점거한 조계사 폭력사태가 발발한 것이다. 점거측은 종정의 교시를 무기로 ‘정화개혁회의’를 출범시켰지만 중앙종회와 집행부측은 승려대회를 통해 종정을 불신임하고 선거일정을 진행하였고 사태는 1개월 만에 공권력 투입으로 점거세력이 강제 해산됨으로써 종식되었다.

선거에서는 고산 스님이 총무원장으로 당선되었다. 당시 이 분쟁에는 종정 권한 강화를 도모하는 측, 종권 소외 세력의 종권확보 기도, 멸빈, 제적 등 중징계자의 사면요구, 총무원 권한 약화를 바라는 일부 본사의 움직임 등 다양한 세력이 얽혀 사태를 극한까지 몰고갔다. 99년 총무원장 선거과정에 대한 법원 판결로 종단 분규가 재연될 조짐을 보이자 고산 총무원장은 1년여 만에 중도 사퇴하고 선거를 통해 정대 스님이 총무원장에 취임하였다.

 

 한국불교근대사

고구려 소수림왕 2년에 들어온 불교는 많은 혼란과 번창을 반복하면서, 근세를 맞이하게 된 불교계는 1988년 5월 불교재산관리법이 폐지되고 그 대안으로 전통사찰관리법이 발효되면서 어느 정도 관권의 예속으로부터 자립의 모양을 갖추게 되었다. 이해 12월 말에는 10/27법란에 대한 국무총리의 사과를 받아 내게 되는데 이는 사회의 민주화 바람과 불교계 내부의 응집된 대응의 결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조선조의 참혹한 배불정책과 일제치하에서의 사찰령이 이 땅의 불교를 말살하려는 시도였다면 1954년5월 "대처승은 사찰에서 물러나라"는 이승만의 유시로 점화된 소위 불교정화정책의 회오리는 다시 한번 관권이 불교계를 유린하도록 하는 빌미를 주게 되었고, 그 여파는 불교재산관리법이 폐지되는 1988년까지 이어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는 불교계가 자립의 분수령을 이루는 불교재산관리법이 폐지되고 전통사찰관리법이 발효된 직후인 1989년부터 1997년 까지의 불교계 흐름을 논하기로 한다.

 

불교방송의 시작

이 시기에 일어난 불교계의 가장 큰 변화는 불교방송,불교T.V개국, 성철스님의 입적, 서의현 스님체제의 총무행정의 붕괴와 개혁종단의 출범을 들 수 있다.그리고 또 다른 관건의 불교편향정책과 이에 따른 훼불사건 등이 대종을 이룬다. 1990년 5월 이땅의 불자들이 그토록 염원하던 불교방송이 개국을 하고 첫 방송을 하게 되니 동토에 전래된 이후 가장 큰 경사가 되었다.초기의 가청권은 서울과 그 인접지역에 국한되었다. 그러나 이제 부산,광주,대구,청주의 지방 방송국이 잇따라 설립되어 전국을 가청권으로 하는 전국방송망 시대가 된 것이다. 이제 불자들은 가정에서 방송을 통하여 조석으로 예불을 하고, 고승대덕의 설법과 저명한 법사,교수의 불교학 강의를 앉아서 공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불교방송국의 대작불사를 이룩해 낼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이 땅의 모든 불자들이 원력이 하나로 결집되었기 때문이며 또한 조계종을 비롯한 많은 종단과 불교진흥원이 한마음 한뜻으로 화합을 이루어 냈기 때문이다. 즉 방송의 의결기구인 이사회의 이사장은 승려중에서 보하고 방송경영의 책임자인 사장의 추천권은 불교진흥원이 가진다는 원칙을 합의해 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승단과 재가가 조화롭게 의결기구의 수장과 경영의 책임을 양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제 불교방송이 개국을 한 지도 10여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다. 불교방송은 그 동안 교리강좌,법회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하여 불자의 신앙심 고취는 물론 교육의 질을 높이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해 왔음이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경제적 자립기반이 취약한 것이다. 사실 방송국은 개국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불교진흥원으로부터 매년 5억원 내지 10억원의 지원금을 받고 있음이 사실이다. 시설투자비까지 합하면 70억원 이상의 지원을 받은 셈이다. 불교방송국이 경제적 자립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임직원 전체가 스스로 주인의식을 가지고 자정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불교방송이 음성만을 전달하는 라디오 매체인 데 비하여 1995년3월 개국한 불교T,V 방송국은 영상매체라는 점에서 크게 대조를 이룬다. 통도사와 각급 본사 그리고 많은 종단이 참여하여 자본금38억원의 주식회사로 출범한 불교T,V 는 수차에 걸친 주식공모를 통하여 170억원의 자본금을 확보한 것이다.개국특별프로그램으로 종정스님과 특별대담,한국사회와 불교의 역할에 대한 특별좌담회 등의 방영을 시작함으로써 하루10시간씩의 정규방송에 들어갔다. 불교텔레비젼은 가톨릭, 기독교와 동시에 케이블T,V로서 채널을 허가받았으나,현재 불교T,V는 타 종교보다 시청률면에서 앞설 뿐 아니라 30여개 일반 채널 중에서도 우수방송으로 평가된다. 이와 같이 불교T,V가 우수한 영상물을 방영하고 시청자들로부터 높은 호응을 얻어낸 것은 사실이지만 역시 경영부문에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이는 초기 케이블T,V 각급 채널의 인,허가와 설립과정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케이블T,V는 유선방송이므로 각 가정에 케이블이 설치되어야 수신이 가능한 데도 불구하고 정부가 치밀한 계획없이 허가 설립에 대한 일정을 앞당겨 놓은 것이다. 케이블T,V는 이러한 당국의 오판으로 인하여 헤아릴 수 없는 경제적 손실을 떠맡게 되었고 불교T,V도 예외없이 자금의 압박을 받게 된 것이다. 최저200만 가구 이상의 유료 시청자가 확보되어야 수지를 맞출 수 있다는 케이블T,V프로덕션의 입장에서는 97년말 현재 유료시청자 80여만 가구로서는 경제적 자립을 감당할 수 없음이 자명한 이치라 할 수 있다. 불교T,V는 케이블T,V프로덕션 연합회와 연대하여 정부를 상대로 계속 이러한 난제를 풀어가고 있지만 구조적인 적자요인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은 아직 나오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려 지고 있다. 어쨌든 불교방송과 불교T,V가 각각 음성과 영상을 통하여 전국의 불자가정을 찾아 법음을 전하고 있음은 교계의 큰 경사가 아닐 수 없다. 불교방송과 불교T,V가 현재 제반 경영상의 어려움을 겪고 있음은 사실이지만 불교계의 전 사부대중이 지혜와 힘을 모아 위법망구의 자세로 임한다면 1600년 불교역사에 우뚝한 초공간의 법당이 더욱 큰 광명을 발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성철스님의 열반

1993년 11월4일 살아 있는 부처님으로 추앙을 받아 온 조계종 종정 성철 큰스님이 열반에 드셨다. 스님의 열반은 불교계 뿐 아니라 전 국민의 비통을 몰고 왔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1981년 조계종 종정직을 수락하고 추대식장에는 모습조차 보이지 않으신 채 사자후한 이 법어는 당시는 물론 오늘에 이르기까지 전 국민의 가슴 속에 화두로 남아 있다. 스님은 1912년 경남산청에서 태어났다. 속명은 이영주, 1030년 진주중학을 졸업한 뒤 일제하 젊은 시절을 사상적 방황기로 보냈다. 이 시기 스님은 승찬대사의 "신심명"과 영가대사의 "증도가"를 읽고 캄캄한 밤중에 태양을 만난 듯 환희하고 생가에서 멀지 않은 지리산 대원사를 찾아 평생수행의 외로운 길에 들어선다. 불가의 예법을 잘 모르던 스님이 속복을 입은 채 대원사 방 한칸을 차지하고 수행에 들어가자 본사인 해인사에서는 이인이 나타났다는 공론이 돌고 결국 스님은 해인사에서 하동산 스님을 은사로 득도하게 된다. 당시 해인사에는 백용성, 송만공 스님등 선지식들이 계셔서 훌륭한 지도를 받을 수 있었다고 본다.

성철 큰스님은 1935년 인연을 맺은 해인사 백련암에서 말년을 보냈다. 스님은 10여년간의 장좌불와, 묵언 등의 수행에 추호의 빈틈이 없었으며 기존 불서의 해석은 물론 영,독,일,중국어 등 5개 국어에 능통하여 현대물리학,심리학,심령학 등 외전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스님은 수행하는 일 외에는 사람들은 잘 만나지 않는 특징 있는 삶을 사셨다. 성철스님을 친견하려면 3천배를 해야 했다. 정계나 재계의 거물급 인사도 예외는 없었다. 이렇게 스님은 승속간에  신화적인 존재로 인식되었다. 스님은 이따금 "산은 산,물은 물" 등의 법어를 내림으로써 국민정서를 깨우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스님은 저서 "선문정로"에서 돈오돈수를 강조함으로써 후학들에게 자신의 수행관을 제시하였다. 이로 인하여 돈오돈수와 돈오점수의 수행법을 둘러싼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불교계에 공부하는 분위기를 일신시키기도 했다. 스님이 조계종 제6대 종정으로 추대된 것은 1981년1월 바로 전해 불교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사건으로 꼽히는 10/27법란의 여파가 채 가시지 않은 시절이었다. 5공을 출범시킨 신군부가 정통성 확보의 수단으로 불교를 탄압한 10/27법란은 불교계에 회복하기 어려운 깊은 상처를 남겼다. 스님은 이런 와중에 종정으로 추대되어 실추된 불교의 위상을 회복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사회 일각에서는 스님이 깨달음을 사회에 환원하는데 너무 소극적이지 않았으냐는 지적이 있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스님은 종정에 취임하던 해에 종단의 간부들에게 "출가자에게는 출가자의 본분이 있다. 치열한 구도정신을 가지고 견성성불하여 자신의 내부에서 자신을 실현하라. 그리고 올해부터는 싸움을 하지 마라. 싸움으로 인하여 타율적인 정화를 당하게 된 것 자체가 잘못이다. 출가자에게 가장 큰 문제는 일대사 인연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일이다....."라고 밝힌 견해는 그러한 세간의 오해를 씻어 주고 있다고 본다. 영결식에서 당시 원로회의 의장 서암 스님은 추도사를 통하여 "스님은 병든 세상에 조각으로 기운 누더기 한벌로 몸을 가리고 장좌불와와 묵언정진으로 뼈를 저미는 수행자의 생활로 일관했다. "고 추모했다. 또 이민섭 문화체육부장관은 정부를 대표해 "스님은 한국불교계의 큰 별이었으며, 이땅과 겨레의 위대한 정신적 스승이었다. 스님은 우리 시대의 뛰어난 선승으로서 국민의 정신적 귀의처로서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고 추도했다. 이날 영결식장에서는 전국 3천여명의 스님과 10만 여명의 신도들이 운집했고, 정계,재계,주한외교사절,종교계 등의 대표인사들이 줄을 이었다. 법구는 영결식장에서 3Km 떨어진 다비장으로 운구되었고 곧 바로 다비식이 거행되었다. 스님은 110과의 오색 투명한 사리를 남겼다. 성철스님의 열반은 각종 매스컴의 유래없는 취재경쟁을 촉발하였고,이런 여파는 비디오계와 서점가를 강타하기도 했다. 비디오계에는 스님의 생애,입적,다비 등의 장면을 영상다큐로 제작하여 다투어 출시했고,서점가의 대형 매장들은 성철스님 코너를 신설,발빠른 상업성을 보이기도 했다. 스님은 가셨으나 스님의 치열했던 구도난행과 일의일발의 승가상은 오늘을 사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귀감이 된 것이다.

 

종단의 분규

큰 스님을 잃은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1993년3월 종권을 둘러싼 종단의 분규가 일기 시작했다. 총무원장 3선을 둘러싼 서의현 총무원장과 이를 결사반대하는 실천승가회,선우도량,중앙승가대,전승련 등 8개 단체가 결성한 범승가종단개혁추진위원회가 힘겨루기에 들어갔다. 이 사건의 발단은 표면적으로는 종헌에 명시된 "총무원장이 임기는 4년이며 중임할 수 있다."는 자구의 해석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서원장측은 중임을 단2번이 아니라 거듭할 수 있다는 뜻으로 결론짓고 3월30일 경찰 병력의 보호속에서 임시중앙종회를 개최,서원장의 3선을 의결했다. 이에 앞서 범종추등 재야불교에서는 조계사에서 단식과 비폭력 구종농성에 들어갔고,집행부측은 이를 해산하기 위하여 폭력배를 동원 농성중인 스님들을 무차별 공격했다.이를 빌미로 경찰병력이 투입되어 범종추 소속 승려,신도 등 476명이 연행되었고 연행과정에서 도각 스님등 20여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폭력배 동원과 경찰병력 투입등의 초강수를 쓴 서원장측의 악수로 말미암아 모든 불교도는 범종추의 대열에 합류케 되었다. 이 사건은 결과적으로 서원장의 사퇴로 일단락되었고 4월15일 제113회 임시중앙종회는 10대 종회를 해산하고 전권을 종단개혁회의에 일임한다. 존단개혁회의(월하스님)는 서원장이 사퇴성명을 발표하기 사흘전인 4월10일 조계사에서 열린 전국승려대회에서 결성되었는데 이 대회는 서원장 공직박탈과 동대회의 개최를 반대한 서암 종정 스님에 대한 불신임을 결의했다. 서원장측과 범종추측의 대결은 결국 종단개혁회의를 탄생시키는 것으로 귀결되었으나 이 사건은 2가지의 문제를 남기게 된다. 하나는 부당한 공권력이 또 한번 불교계를 탄압한 사례를 더했고 또 하나는 전국승려대회가 현직 종정 스님을 불신임한 선례를 만든 점이라 하겠다. 사건이 마무리된 후 종단개혁회의는 정법종단의 구현,불교자주화의 실현,종단운영의 민주화,청정교단의 구현,불교의 사회역할 확대라는 5대 지표를 설정하고 8개월 동안 차기 종단구성을 위한 준비작업에 착수한다. 1994년 11월21일 조계종은 316명의 선거인단에 의하여 제28대 총무원장으로 송월주 스님을 선출하고 이보다 앞선 11월16일에는 제11대 중앙종회가 개원되어 설정 스님이 의장에 선임된다. 종단개혁회의가 8개월간의 작업끝에 마련한 새로운 종단 출범에서 가장 크게 달라진 것은 종단의 권력구조라 할 수 있다. 서 전원장 체제으 큰 문제점으로 지적된 총무원장의 종권 독점이 원천적으로 봉쇄되고 총무원, 포교원, 교육원의 3원이 각각 독자적 기능을 수행하는 집행부서로서 업무를 분장하게 된다. 또한 총무원장과 종회의원 등 주요 직책은 겸직이 금지되었다. 어쨌든 1994년11월 조계종단은 과거의 권위주의와 독선적 운영형태를 지양하고 제도개혁등의 새로운 과제를 안고 출범하게 된다.개혁종단은 출범과 동시에 중앙신도회의 구성과 중앙승가대학 정규대 승격 및 학사이전,그리고 선학원,대각회 등 문제해결과 태고종과의 분규사찰문제 해결을 제일의 과제로 삼았다. 그러나 이러한 목표는 현재 뚜렸한 변화를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중앙신도회 결성에 대한 문제는 2~3차례나 그 결성시기를 늦추어 왔다.재가 신행단체에서는 신종헌 종법에서 규정한 중앙신도회법이 신도들의 자율성을 배제하였을 뿐 아니라 승단과 재가의 관계를 종속적으로 만든 악법임을 문제점으로 제기하였다. 또한 지난 40년간 종단의 실질적 외호세력으로 관계를 종단이 일방적으로 끊어 버린 것도 전통과의 단절이라는 면에서 부정적으로 비쳐지고 있다.

중앙승가대학은 종단과 대학의 여러 가지 노력 끝에 정규대학으로 승격하였으나 학사 이전문제는 몇차례의 번의와 진통 끝에 김포 금정사 부지로 이전할 것을 결론 지은 외에 더 이상 진전이 없다. 승가대학의 이전을 위하여는 무엇보다도 예산확보가 급선무인데 종단은 '94년에 20억원, 96년에 50억원을 예산 책정하였으나 실제 확보된 금액은 미달이라는게 주위의 시각이다.

또한 선학원 등의 문제도 별 진전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이는 조계종단이 형님된 입장에서 크게 포용하는 입장을 취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선학원 이사에 대한 징계를 결의하는 등 초 강경책을 고수한 데 따른 반작용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한편 태고종과의 분규사찰 해결에 대한 노력도 원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잇다. 개혁종단은 과거의 개인적 독선적인 경영방법을 탈피, 대화와 인내로 제문제를 해결해 나가겠다는 본래의 의지와는 달리 앞서 지적한 문제들에 대해 너무나 일방적이고 고압적인 자세로 일관하지 않았느냐는 비판을 면치 못하고 있다.또한 청정한 계율을 생명으로 삼는 종단의 승풍이 벼랑 끝에 와있음을 인식한 안목있는 스님들이 중앙종회를 통하여 승풍쇄신을 주창하기도 했으나 이마저 한계에 부딪혀 있다고 보여진다.

 

한국의 종단 협의회

28개 종단으로 구성되어 있는 한국불교종단협의회는 이제까지 전 불교계를 대표하는 연합기구였는데 1996년7월 드디어 분열이 징후가 보이기 시작했다. 즉 조계종단과 이에 동조하는 소수의 종단에 대항하여 다수의 종단이 종단진흥회라는 이름으로 간판을 바꿔 단 것이다. 종단진흥회가 창립을 선언하고 기자회견에서 조계종단의 독선을 비판하고 나선 것으로 보아 한국불교종단협의회의 분열은 조계종의 포용력이 너무 적지 않았느냐는 풀이가 가능하다고 하겠다. 어쨌든 조계종 개혁종단은 출범 이후 개혁의 의지를 달성하는데 한계를 드러냈다고 보여진다.

 

문민정부의 탄압

한편 문민정부를 자칭하고 나선 김영삼 정부(1993~1996)는 출범 이후 역사 바로 세우기 등 세인이 납득할 수 없는 억지논리를 전개,일신교적 흑백사상으로 민족의 뿌리를 송두리째 뒤흔드는 누를 범했다. 단군성조이래 5천년 역사를 싸잡아서 비난 매도하는가 하면 연꽃이 불교를 상징하는 꽃이라 하여 곳곳에서 죄없는 연꽃이 뽑혀 나가는 수난을 당하고,이 시대에 편승하여 일부 몰지각한 종교단체들이, 각급 학교교정에 홍익인간의 교육이념으로 세워진 우리민족의 뿌리이자 근원인 단군상을 파괴하고,훼손하는 등의 민족성이 의문되는 어이없는 일들을 저질렀다.

 1993년1월4일 육군 제17사단 전차부대장이 불교가 자신이 신앙하는 종교가 아니라는 이유로 부대 내 법당을 폐쇄하고 불상을 유기한 사건이 발생하였으며, 동년 5월에는 경남지사가 부임 직후 관사에 모셔져 있던 미륵반가상을 창고에 폐기처분하는 사태가 발생하였고, 이 달에 공보처장관은 김영삼 대통령이 대선공약으로 내세운 5개소의 불교방송 지방국 설립 약속을 깨고 2개소의 지방국 신설만을 허가했다.

1995년 12월에는 김영삼 씨가 국방부 중앙교회에서 예배를 보며 인접해 있는 중앙법당의 불자들에 대하여는 경호상 문제라 하여 출입통제를 하는 등 상식 밖의 일들이 벌어졌다.

1996년 4월에는 수유동 소재 삼성암과 본원정사가 이교도의 소행으로 보이는 방화로 인하여 대웅전,나한전,범종각이 전소된 데 이어 이웃에 위치한 화계사 대웅전이 전소되는 사태가 발생하는 등 계속하여 불교를 말살하려는 의도적인 사건들이 터져 나왔다. 이러한 정부의 불교편향정책과 이에 따른 훼불사건들은 위정자의 일신교적인 뱉타사상이 작용한 것으로 풀이되며 여기에 반사작욕이 가세함으로써 기독교 광신자들의 사찰방화사건 같은 끔찍한 사건이 계속 일어났다고 보여진다. 이 시기에는 "내 종교가 소중하면 남의 종교도 소중하다"른 일반 상식을 뛰어넘어 정권의 수장이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타종교를 박해할 수 있다는 사례를 만들어 냈으며 또 한번 불교계는 관권으로부터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된 것이다.

 

불교의 대중화

1970년대 초반에 일반 불자들의 교육기관으로 대원불교교양대학이 첫 출범을 한 이후 '80년대에는 40여개의 불교교양대학으로 늘어났고, 96년말 현재로 보면 1백수십여개에 달하는 교양대학이 생겨 학인들을 교육하고 있다. 이들 불교교양대학은 교리와 의식은 물론 설법실수 범패 등 전문분야까지 교육하고 있으며 이로 인하여 일반불자들의 불교이해수준은 전례없이 높아졌다고 하겠다.

1992년2월에는 불교진흥원이 불교문화센타를 개원하여 다도,꽃꽂이,건강강좌 등 40여 강좌를 개설함으로써 불교교리만 아니라, 생활강좌 등으로 그 폭을 넓히기에 이르렀다. 초기의 교양대학 개설른 신행단체 등이 주축을 이루었으나 90년대 들어서는 도심포교원인 강남포교원,은평포교원,능인선원,구룡사 등이 합세하여 불자교육의 상당부분을 떠맡게 된다. 이 시기에 "불교 장의는 불자의 손으로"라는 슬로건 아래 광주의 능인상조회, 서울의 연화상조회 등이 뿌리를 내리고 불교문화센타에서는 염습을 포함한 장의 교육을 무료로 시작하게 된다. 불교계의 수련장은 주로 일반 사찰에서 이루어졌으나 80년대 초기 직지사 수련원이 개원을 한 이후 화성군 소재 신흥사 청소년수련원,불교진흥원이 설립한 괴산의 다보수련원 등이 명실상부한 불교수련도량으로 일익을 담당하기 시작한다.또 이 시기에는 송광사,해인사,통도사 등이 일반 불자들이 수련을 직접 유치하여 사찰마다 가지고 있는 독특한 수행방법을 활용,적극적인 자세로 겨울과 여름 수련대회를 개최하기 시작하였다. 때에 따라서는 한 사찰이 한 철에 5~6차례 수련대회를 개최하기도 하는 등 일반 불자들의 호응이 높았다.

 

불교단체

1994년7월에는 한국불교재가연합회가 창립되어 개혁종단과는 수레의 양바퀴 같은 역할이 기대되기도 하였다. 한상범교수,안동일변호사,이문옥 전 감사관 등의 주도로 이루어진 재가연합은 종단이 중앙신도회를 조계종 예속단체로 별도 설립하겠다는 뜻에 대하여 반대의 입장을 제시하는 등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초창기 창립의도와는 달리 독자성을 잃게 된다.

다음해인 1995년 1월에는 교계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새로운 재가 신행단체인 한국불교재가회의가 공식출범한다. 서돈각 불교진흥원 이사장,이기영 한국불교연구원장,이윤근 금정학원 이사,김종서 한국교육개발원 이사,고은 시인 등 교계의 거물급 인사들이 공동대표로 선임된 이 모임은 순수 재가 신행단체임을 표방하고 이 시대의 안일한 불교계를 대승적 현실참여의 불교로 이끌어 올리자는 취지하에 창립되었다. 재가회의 사업 중 특기할 만한 일은 경주고속전철 도심통과 반대운동이라 할 수 있다. 끝내 이 운동은 전국민의 절대적인지지 속에서 고속전철 경주진입을 막아내는데 성공을 이루었다. 이보다 앞선 1993년 7월에는 실천불교승가회, 경제정의 실천불교운동연합회,조국평화통일불교연합회 등 17개 단체가 연대하여 전국불교운동연합이 탄생된다. 전불련은 승가와 재가 및 시민운동단체를 포괄하고 불교 사회운동의 적극적인 활성화를 도모하면서 이 시대의 아픔인 인권 노동 통일 등 다방면의 시민운동에 선도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이 단체는 개혁종단의 출범에도 적지 않은 기여를 하게 된다.이 시기에 소설 우담바라의 작가 남지심 씨와 서강대학 박광서 교수가 공동대표로 창립한 신행단체 우리는 선우가 신선한 신행운동을 표방,불교계에 뛰어 들었고 불자가수회,기사불자회,보이스카우트불자회 등 이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사)한국불교법사회,교사불자회 등이 전국조직으로 발돋움을 시작한 것도 이 때를 전후한다.

이 시기에 사회를 향하여 참으로 신선한 충격을 던져준 불사가 있으니 이는 무소유의 상징 법정 스님이 제창하고 전 불교계가 호응한 맑고 향기롭게 운동이라하겠다. 이 운동은 우리의 마음과 세상,자연을 본래 모습대로 맑고 향기롭게 가꾸며 살자는 순수시민운동으로 연꽃스티커의 대량보급,소식지 맑고 향기롭게 등의 확산을 통하여 97년말 현재3천여명의 회원이 이 일에 봉사하고 있다.

1996년 1월 불교진흥원과 청년회,우리는 선우,재가회의 등 7개 단체가 연대하여 시작한 깨끗한 마음 깨끗한 세상운동 또한 순수 사회정화운동의 차원에서 이루어진 참신한 불사라 할 수 있다. 96,97 두해 동안,부산,광주 등 전국10여개 도시 순회강연회를 비롯한 기타의 행사는 많은 시민들로부터 호응을 얻었으며 이 운동의 실질적 대표인 청정운동연합회 서돈각총재은 이 불사를 계속 사업으로 할 것임을 분명히 한 바 있다.

한편 1995년 개혁종단은 거국종단적으로 깨달음의 사회화운동을 제창하고 각종 이벤트 등의 대사회운동을 전개하였다. 깨사운동본부는 2년 동안 8억여원의 기금을 조성하여 구호사업에 1억원,단체운영지원 등에 3억5천만원,연구비,인건비 등 7천만원이 쓰여졌다.짧은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조성된 기금과 쓰여진 사업비의 규모가 엄청난 것은 개혁종단의 새로운 의지를지지하는 불자들이 많았음을 반증했다고 볼 수 있다.또한 승풍진작을 기치로 내걸고 1990년 출범한 소장 및 중진 승려들의 승가결사단체인 실상사의 선우도량은 서둘지 않는 가운데 종단 내외의 문제점에 대한 진단과 처방법을 연구,대안제시 등에 주력하고 있다. 선우도량은 그 동안 개혁종단에 대한 평가와 종단의 방향모색,현대문명의 흐름과 불가의 대응방안,승단질서의 축을 이루는 계율문제 등에 대하여 심도 있는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특히 계율문제에 대하여는 현실에 맞는 새로운 청규 제정을 서둘러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 청규의 범위는 계율을 근간으로 하되 환경문제에 대한 실천규범,향락,소비문화에 대한 불교적 처방과 대책,소유에 대한 불교의 입장,남녀평등 관계 등 광범위한 부분이 포함되어야 한다는 중론이다.

1992년 2월 조국평화통일추진불교인연합회(평불협)가 내외의 관심 속에 창립되어 초대 회장에 송월주 스님이 선임되었다. 평불협은 산발적으로 이루어지던 대북 불교활동을 조직적으로 운영하고자 하는 취지와 불교적 통일이념의 발굴 및 보급,성지순례와 문화재교류 등 사업목표를 설정하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꾸준한 활동을 하고 있다. 이보다 1년 앞서 북한을 수차례 방문한 바 있는 신법타스님의 중재로 남북의 불교계 대표들이 분단 47년만에 미국의 워싱턴과 로스앤젤레스에서 첫 대좌를 하게 된다.1991년10월29일 남쪽의 대표로는 송월주,전운덕,서의현,도안 스님등이 동참하고 북측 대표로서는 조선불교도연맹 중앙위원장인 박태호선사와 조불련고문,황화두선사,심상연 조불련서기장,리동철 조불련 평양시지부장 등이 참석했다.

1996년5월에는 중국베이징에서 두 번째 남북한 불교계 대표들의 모임이 성사되었다.3년 반만에 송월주 스님과 박태호위원장이 다시 만난 것이다. 평불협은 설립 이후 북한과 관련한 각종 세미나와 공청회를 개최함으로써 통일에 대한 이념 정립에 상당한 진전을 보였고 협회 회원간의 유대 강화를 위하여 정기간행물을 발간 보급하는가 하면 북한불교의 자료수집 등을 위하여 산하에 북한불교연구소를 설립,단행본 "북한의 사찰"을 발간하기도 했다.

1992년 신법타 스님이 검찰에 구속 기소되는 사건이 있었으나 재판결과 무죄가 확정되는 넌센스가 있기도 했다.

김영삼정부 출범을 전후한 이 시기에 남북문제는 정책의 일관성 상실로 수많은 시행착오를 범하게 되었으나 불교계는 평불협이라는 하나의 기구를 통하여 의연한 대응을 해왔다고 보여진다.

1996년말 북한 기근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범종교계의 합의가 있은 후 불교계는 북한 쌀 보내기운동본부를 설립,소기의 성과를 거두고 있다.이 운동은 법륜스님의 원력이 큰 힘으로 작용했음이 사실이다.

 

해외포교

한국불교의 해외포교는 1996년 재일본 홍법원의 설립으로부터 시작된다. 이후 질적 양적인 면에서 적지 않은 발전을 이루었다고 하나 조직적인 면에서는 많은 문제점을 노출하고 있다. 스님이나,법사,개인이 현지와 인연이 되어 자신의 안목과 역량에 따라 포교당을 세우고 포교활동을 시작하는 것이 일반적인 추세라 할 수 있다. 물론 독자적인 개척이므로 어려움은 그만큼 클 수밖에 없다. 어쨌든 이러한 노력들이 쌓여 이제는 세계각국 곳곳에 한국사찰이 세워졌고 최근에 이르러서는 부처님 성지인 인도에 까지 그 힘이 미치고 있다. 네팔 품비니 국제사원지역에 대성석가사(도문스님),사르나트의 녹야원(도웅스님),부다가야의 고려사(월우스님),쿠시나가라의 대한사(성관스님) 등이 이미 세워졌거나 한창 공정 중에 있다.또한 영국,독일, 등 서유렵 일대는 불교계가 꾸준히 늘어 1천여개의 불교단체와 3백만명을 육박하는 불교신도가 있다는 것이 현지소식이다. 기존의 미주지역 불교계 또한 양적인 성장을거듭하고 있으며 최근의 특기할 사항은 미주한국불교방송(담오스님)과 한미불교방송이 전파를 통한 포교활동에 들어갔고,캐나다 토론토에서도 불교방송이 전파를 발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밖에 중국,러시아 등 폐쇄 사회주의국가에도 적지 않은 한국사찰이 건립되어 교류가 진행되고 있다. 천태종,진각종,한마음선원의 중국 등 해외포교 진출 또한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독도영유권 문제,정신대할머니들에 대한 보상문제 등으로 계속 갈등을 빚고 있는 한,일관계에 대하여 불교계는 재일본 고려사와 연계하여 한일과거청산범국민운동본부(태연스님)를 발족, 각종 세미나 등을 개최하고 정부와 일본에 공식입장을 표명하는 등 현실문제에 직접 나서고 있다. 기존의 한일불교문화교류협의회(홍파스님) 또한 1981년 이후 한,일 공동관심사에 대한 학술발표회 등을 통하여 양국의 이해도를 높여 가고 있다.

 

세계학술교류

1995년 5월 창립된 삼국불교우호교류회의도 한,중,일 동양 삼국의 상호 이해와 우호 증진에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국제기구로 가장 잘 알려진 세계불교우의회(W,F,B) 한국본부는 1989년5월 서울에서 제17차 대회를 마친 후 이렇다 할 변화를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나라의 해외포교 역사는 숭산스님이 1996년 도쿄에 재일본 홍법원을 설립하면서 부터이다. 숭산스님은 지금까지 세계32개국 112곳에 선원을 개설하고 현지인을 대상으로 한국불교를 전파했다. 스님으로 부처 인가를 받은 외국인 납자,법사가 1천명에 이르고 세계 도처에 5만여 불자가 한국식 참선 수행을 하고 있다. 1996년6월 숭산스님의 해외포교30년을 결산하는 기념대법회가 성황을 이룬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하겠다. 지금도 화계사 내에 위치한 국제선원에는 벽안의 납자들이 '이 뭣꼬'의 화두를 틀고 면벽에 열중하고 있다. 이 시기에 한국불교학계는 큰별 불연 이기영박사를 잃게 된다.1996년11월9일 오전 이기영 박사는 불교진흥원이 주최하고 자신이 주관하는 국제학술세미나장에서 기조연설을 마친 후 선사의 좌탈입망같이 홀연히 떠났다. 그는 불교에 미치고 원효에 미친 분이었다. 누가 뭐라해도 이 시대 이 땅의 불교학연구에 새 지평을 개척한 분이다. 문헌학 위주의 불교학에 역사적 방법을 도입하였던 것이다. 해박한 산스크리트어,프랑스어,일어,영어,한문 실력은 사상 정립에 밑거름이 되었고 비교종교라는 관점에서 동서양을 넘나든 학문적 혜안의 경지는 이 땅에 우뚝했다. 그는 원효의 귀일심원,요익중생그리고 화쟁의 화두를 들고 한평생을 미친 듯이 살았다.  학자로서 학문에 우뚝했고,불교대중화운동에 남다른 열정을 보여 신행단체 구도회와 원효학당에 신명을 바쳤으며 말년에는 재가불자회의 공동대표로서 누구를 이끌고 경주고속전철 도심통과반대를 외치며 이의 관철을 주도하기도 한다. 불연 이기영박사의 타계는 불교계의 크나큰 손실이었으나 후학들에게는 그들의 안일함을 꾸짖는 더없는 경종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

1993년10월에는 해인사에서 주최한 국제학술회의장에서 한국의 서여 민영규박사와 전 일본 교토대학교수 야나기타 세이잔 박사가 만났다. 한,일 두 원로 라이벌은 각자의 스승들에 의해 반세기 전에 촉발했던 논쟁 '초기 선종사의 계보'문제로 다시 부딪쳤다. 중국의 호적과 일본의 스즈끼 다이세쓰 사이에 벌어진 국제적학술논쟁이 재연된 것이다. 그러나 이 만남에서도 서로의 입장이 차이를 좁힐 수 없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이 시기에는 학술분야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다. 해인사 팔만대장경의 보존과 전산화를 위한 장경연구소의 설립, 지관스님의 가산불교문화연구원의 설립은 특기할 사항이다.

1993년3월 제1회 입학식을 가진 진각종의 위덕대학개교는 불교계의 큰 수확이라 할 수 있다.위덕대학은 불교학과를 신설함으로써 능력있는 불교계 소장학자를 활용한다는 부수적 효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지난 64년부터 팔만대장경 역경사업을 추진해 온 동국역경원은 한동안의 부진을 씻고 1994년 정부의 지원재개를 계기로 다시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국고지원12억원과 자체조달14억원 합계26억의 예산으로 4년간에 걸쳐 매년26권씩 114권을 간행 총250권의 국역 팔만대장경을 마무리 짓게 된 것이다.93년말 역경원 제4대 원장으로 월운스님은 재임 중에 이 모든 불사를 회향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바있어 기대되는 바가 크다할 것이다.

 

출판/문화사업

1990년대의 불교출판계는 역경원의 역경사업 활성화와 함께 다방면에서 발전을 이룬 시기라 할 수 있다. 불교방송 인기프로인 고승열전시리즈10권 완간,불교진흥원 발행의 통일불교성전,청소년불교성전,설법자료집 그리고 해방후 처음으로 펴내진 한국불교총람,학술정보지 계단 다보 등은 특기할 사실이다. 불교학술 전문출판사로 이미지를 구축해 온 민족사는 깨달음 돈오점수인가,돈오돈수인가를 펴냄으로 불서 단행본 1백권 출간을 기록하기도 했다. 송광사 학인스님들과 보조사상연구원을 중심으로 펴낸 아함경,법구경,해인사 무비스님과 김무두씨가 펴낸 화엄경 그리고 성보문화재연구원이 펴내기 시작한 화보집 한국의 불화,미술사학회 최완수씨가 펴낸 명찰순례,김호성끼의 천수경이야기,일타스님의 백일법문집 등은 큰 수확이라 여겨진다. 이 시기에 현대불교가 주간지로 창간되었고 국내유일의 어린이 월간지인 동쪽나가가 폐간을 맞는다. 어린이 포교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열정을 가지고 사비를 바쳐 가며 애써 온 발행인 김형균 불지사 실장은 수억원을 빚진채 두손을 들고 말았다. 96년 폐간을 전후하여 이를 살리고자 하는 그의 몸부림은 주위불자들의 눈시울을 달구기도 했으나 끝내 불교계는 어린이 유일의 포교지인 동쪽나라의 폐간을 외면하고 말았다. 이 시기에 소설에세이로는 석용산스님의 '여보게 저승갈 때 월 가지고 가지. 법정스님의 ' 버리고 떠나기,최인호씨의 '길없는 길. 고은씨의 '화엄경,남지심씨의 '우담바라'등이 서점가의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고 번역서인 환생,전생요법 등 윤회사상과 밀접한 책들이 일반인의 호응을 얻어냈다. 1994년 북한사회과학원 민족고전연구소가 번역하고 사회과학출판사가 간행한 팔만대장경해제(전15권)가 중국을 거쳐 국내에 시판된 것 또한 주목할 만한 일이라 하겠다.

1995년 불교방송국이 주최하고 삼성문화재단이 후원한 세계불교문화대전이 9개월 동안 용인자연농원에서 많은 사람들이 호응을 받기도 했다.이 전시회에는 동남아 각국의 국보급 불교유물이 전시되었을 뿐 아니라 72년 인도정부에 의해 공식 발견되고 공표된 바 있는 부처님 진신사리가 국내 첫 공개되는 계기가 되었다.96년 호암아트홀에서 열린 신라승 김교각 스님의 유품전시회도 주목을 끈 행사였다.

1991년 경주군 소재 기림사 문화재전시관의 개관을 전후하여 양산통도사,밀양표충사,보은법주사,김천직지사,영주부석사 등의 성보전시관이 문을 열었으며 개인 박찬수씨가 여주에 목아박물관을 건립 일반에 공개한 것은 또 다른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96년 충북진천에 건립된 보탑사(지광스님)는 1천년만에 재현한 목탑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문화재전문위원인 신영훈씨가 5년여 동안 심혈을 기울여 우리의 것을 되살린 것이다.

1995년말 세계적인 작곡자 윤이상씨가 독일의 베를린자택에서 별세했다. 생전에는 알지 못하던 그이 불교적 삶이 재조명되나 불교계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49재등 추모의식을 주도했다. 이 시기에 가장 두드러진 문화적 쾌거로는 세계문화유산위원회가  종표를 포함하여 불국사와 석굴암 그리고 팔만대장경판 및 판고를 유네스코의 세계유산목록에 공식 등록한 것이라 하겠다. 세계문화유산위원회는 날로 훼손되고 사라져가는 문화 자연유산 등을 보호하기 위해 유네스코가 설립한 국제기구로서 등록유산에는 많은 혜택이 주어지게 된다. 영구보존을 위한 전문가의 기술지원과 상당하는 재정지원이 뒤따른다. 이웃의 중국,일본 등에 비하면 늦은 감이 있으나 불교계는 이를 계기로 용의 주도한 문화외교와 유적보존차원의 자체정비를 서둘러야 할 것이다. 같은 시기 송광사에 모셔진 고려조 16국사 영정(국보56호)도난 사건은 너무나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우리나라 문화유산의 대종을 이루고 있는 불교계 문화유산이 이토록 허술하게 관리되고 있음은 비단 어제 오늘의 이야기는 아니나,어찌하여 이런 불상사가 있을 수 있는가 아연해 하지 않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환경적인 문제

한편 골프장,대형아파트군,위락시설 등이 천년고찰 경내까지 진출하는 사례가 빈번하여 불교계가 몸살을 앓고 있는 것도 간과할 수 없는 사건이라 하겠다. 물론 불교계가 이들 이권단체들과 맞서 힘든 투쟁을 벌이고는 있으나 정작 이를 보호해야 할 관권은 뒷짐을 지고 방관하느 태로를 일관함으로써 불교계를 자극하고 있는 것이다. 해인사 경내지의 골프장 건설,범어사 입구의 고층아파트 건설, 봉은사 옆 터의 초고층빌딩건설 등의 위협이 아직도 해결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불교예술/사회복지 문제

불교연극,불교음악계는 꾸준한 발전을 보여왔다. 민예극단,극단둥지,온누리극단,어울림극단,치악무대 등이 공연을 이어가는가 하면 음악은 불교방송합창단을 필두로 박범훈,정옥녀,연정숙,김성국 씨 등의 리더가 각급단체의 합창단을 맡아 수시 발표회를 개최하고 있다.또한 봉원사에서는 옛소리를 살리자는 취지아래 영산재 등을 재현,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90년대 들어서 불교계의 복지 부분이 특별히 눈에 띄게 신장세를 이룬다. 양양에 건립된 사회복지업인 보리수마을은 360가구가 입주할 수 있는 유로양로원으로 입주가 시작되었다. 가평의 성라실버타운(법성스님)또한 100가구의 입주가 시작된다. 능인종합사회복지관(지광스님) 또한 청소년,노인 장애자들을 위한 메머드회관이 준공되고 봉사활동에 들어갔다. 도선사가 20년간 운영해 오던 시흥의 혜명양로원과 보육원도 면모를 일신하고 청담종합사회복지관으로 규모도 커졌다. 서울 길음동의 길음복지관,예천 연꽃마을이 건립한 희망의 집, 통도사 자비원,목동 청소년회관,양천구민체육회관,삼전종합복지관,합동마을복지관 등 가히 종합복지관 러시를 이룬다. 불교계는 이들 종합복지관 외에도 소규모의 단위 고아원,양로원,수화,점자교실,요양원이 늘어나게 되었고, 자비의 전화 등 상담기관,봉사단체가 급격한 증가추세를 이루었다. 종단의 원로 석주스님이 평생의 원력을 모아 온양에 양로원 불사를 시작한 것도 기억할 일이다.청주,성남 등 7개처의 무료불교병원을 개설하고 용인의 연꽃마을을 운영하고 있는 각현 스님의 봉사활동 또한 주목할 대상이다.2차대전 당시 일본군에 강제징집되어 고통받던 정신대할머니들의 안식처이인 나눔의 집 개관 또한 역사의 아픔을 우리 모두의 아픔으로 받아들인 불교계의 큰 보람이라 할 것이다.

하지만 호사다마라 했던가. 이 시기에 원주 소쩍새마을 원장의 원생 성추행사건이 돌발하여 교계의 뜻있는 이들의 마음을 우울하게 하는 일이 발생한다. 그러나 이 사건은 소쩍새마을을 중앙승가대학이 인수 운영함으로써 실추된 위상을 회복한다.

 

납골당/생명문제

한편 사회적 문제로 대두된 묘지난 해소문제를 둘러싸고 교계는 화장장려,납골제도 활성화방안 등에 대한 대안제시를 위하여, 십수차례의 공청회와 세미나 등을 개최하였고, 음성,군포 등지에 납골시설이 자리잡는다. 불교교리상 주검이 헌옷을 벗는 것이라 한다면 매장고수와 호화장례 호화분묘를 구태여 고집할 이유가 없으며 기왕 놓고 갈 육신 깨끗이 화장하여 작은 공간에 안치하자는 일련의 운동은 많은 불자의 호응을 얻기 시작했고 납골시설의 확대로 이어진다. 뿐만 아니라 이 육신을 살아 고통받고 있는 이들에게 나누어 주자는 뜻에서 각막 및 장기기증본부가 설립된다.이어서 생명공양실천본부가 활동에 들어간다. 감로심장재단의 출범도 이런 맥락에서 이어졌다고 보여진다. 이 시기 보육사교육,간병인교육 등 각종 단위교육과 실제적인 봉사활동이 크게 일어났으며,재소자를 위한 연합기구가 발족되어 활발한 움직임을 보인다.

또한 외국인 노동자들의 인권보호와 복지 등을 위한 외국인 노동자마을의 활동도 돋보였던 시기가. 복지분야에 좀처럼 눈을 돌리지 않던 불교계가 이처럼 능동적으로 이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직접 사회참여를 시작하게 괸 것은 90년대 일반 시민단체와 타 종교단체 등의 활동에 자극을 받은 바도 적지 않겠으나 그보다도 불교인들 스스로 불교의 이상인 차방정토사상 즉 예토인 이 땅을 바로 불국정토화 해야겠다는 의지들이 공감대를 이룬 것으로 풀이된다.

 

추록

이상 개괄적으로 1989년부터 1997년 말까지의 불교계 흐름을 약술해 보았거니와 불교계 전반이 이 시기에는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도약을 이루지는 못했다 할 지라도 뜻있는 이들의 원력과 신심에 의하여 불교 본래의 모습을 찾아가는 큰 흐름을 보였다고 하겠다.

개혁종단의 출범이 그러하고 순수신행운동이 곳곳에서 일어난 것 또한 긍정적이라 하겠다.

조선조의 지독한 배불의 시대와 일제치하에서의 민족정기말살이라는 암울한시대를 지나 갑자기 맞이하게 된 광복,그리고 이와 함께 몰아닥친 외래사조에 불교계는 그 대응력을 잃고 표류한 것은 사실이다. 그라나 광복50년을 전후하여 이 땅의 불가는 한가지 한가지씩 제몫을 챙기는 일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이다.

불교정화의 회오리도 지났고,법란의 상처도 그런대로 잊을 만한 시간이 지났다. 승단은 선우도량이 지적하는 바 그대로 새로운 청규를 이 시대에 맞도록 정비 개선해 나가고, 재가는 자발적인 신행과 봉사활동을 통하여 승단을 외호함으로써 승단과 재가가 새의 양날개처럼 상호 보완관계를 유지해 나갈 때 이 땅의 불가는 찬란했던 옛 모습을 다시 회복하리라 본다.(자료:한국불교총람)


4. 일본불교사


  * 불교의 전래
일본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정사(正史)인  <일본서기(日本書記)>에 의하면 흠명천황  13년(서기 552년)이다.  물론 이것은 공식기록에 의한 것이고,  그 이전에 이미  백제로부터 건너간 이민들에 의해 불교가 널리 신봉되어졌다.
  흠명천황 시절은 백제의 성왕(523-553) 때로 백제에서  불상과 경전을  보낸 사실을  <일본서기>는 공식기록으로  남기고 있을 뿐이다.
일본불교의 초석을 다진 인물은  이로부터 50여년 뒤  '성덕'태자(574-622)에 의해서다. 그는  스승이었던 고구려  스님 '혜자'의 가르침에 따라 국가체계를 정비하고 불교를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채택했다. 그가 제정한 17조의 헌법은   불교의 이념을 근간으로 한 것으로써 삼보에 귀의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그는 또 스스로 불교를 열심히 배워 법화 승만 유마경에 대한 주석인 <삼경의소>를 저작했다고 전한다. 뒷날 일본에서는 성덕태자를 '일본불교의 교조(교조)'로  평가하면서 일본에서는 태자를 존중하는 신앙으로까지 발전했다.일본은 이후 한국으로 뿐만이 아니라 중국으로 직접 유학승을 파견, 대륙불교를 받아들이고 국가적인 힘을  기우려 대사원을 건립했다. 또 한편으로는 일본고대의 종교와  습속을 지키려는 세력과의 타협책으로 '본지수적설'을 내세웠다.
'본기수적설'이란 일본재래의 제신(제신)들이 인도불교의 제불보살의 화현으로 설명하는 것이었다. 이 같은 신불습합(神佛습합)은 이후에도 일본불교의  가장 큰  특색 중 하나로 계승되었다.
일본불교는 나라시대(719-784)에 국가의 보호아래  번영하면서 토착화됐다. 교학적인 측면에서는 중국과 한국의 학적 성과를 흡수해 수입경로에 따른 종파를  성립시켰다. 이를 남도6종(남도육종)이라 한다.
남도 6종의 첫  번째는 '삼론종'으로  고구려의 혜관에  의해 성덕태자 시절에 전해졌다.  혜관은 원흥사에  머물며 '삼론'을 가르쳤으며, 많은 학자를 배출했다. 두 번째는 '성실종'으로 백제의 도장(도장)이 712년 일본에 와 <성실론>을 가르침으로써 비롯됐으며, 나중에는 삼론종에 통합됐다. 세번째는 '법상종'으로 당나라에 유학한  도소(도소 : 629-700)가  전래해 온 것이 최초인데 이후 일본 유학승과 신라 승려가 4차례에 걸쳐 교의(敎義)를 전했다.  흥복사를 중심으로  법륭사(法隆寺),  약사사 등에서 학풍을 떨쳤다. 네 번째는 '구사종'이다. 법상종의 유식학과 쌍벽을 이룬 구사학은 오랬동안 불교학의 중심을 이루었으나 법상종에 통합됐다. 다섯 번째는  '화엄종'으로 신라의 심상(심상)이 동대사(동대사)에서 <화엄경>을  강설함으로써 비롯됐다. 이때 낭변(낭변  : 689-773)은  그의 제자가  되었으며 일본화엄을 확립했다. 이후 '동대사'를 중심으로 발전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여섯번째   율종(律宗)은 당나라   감진(감진  : 687-763)의 입국으로 성립됐다. 감진은 다섯 차례나 도입할 뜻을 냈다가 좌절하고,  여섯번째로 성공해  <사분율(四分律)>에 의한 계단을 설립했다. 이로써 일본의 승려들은 수계의식에 의한 득도(득도)가 이루어졌다.
나라시대에는 매년 득도하려는 승려의  수를 국가에서 통제해야할 만큼 불교가 융성했다. 국가의 보호와  관리 아래서 승려들은 직접 민중을 포교하는  공익사업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특히 국분사 불사를 대대적으로 벌였으나  이로 인해 민생(民生)은 대단히 어려움을 겪었다. 또  권력을 등에 업은 승려들의 부패들도 큰 문제가 되기도 했다.


* 천태종과 진언종

'헤이안'(平安 : 784-1185)시대에  들어서면서 일본에는 새로운 불교가 도입됐다. 전교대사(전교대사) 최징(최징 : 768-822)과 흥법대사(흥법대사) 공해(공해  : 773-835)가  중국으로부터 천태교학과 밀교를 수입한 것이다.
최징은 중국(중국)에 유학하여  천태교학을 배워  귀국한 뒤 타락한 남도불교를 비판하고  새로운 승풍  진작을 위해  경도 동북쪽 '비예산'에 '연력산'을  세우고, <법화삼부경>과  <천태사교의>를 강의했다. 그는  천태교학의 바탕위에 정토의  염불과 밀교를 혼합시킨 독특한 일본 천태종의  개창자가 됐다. 특히 '비예산'은 남도 불교가 소승의 구족계를 받은  데 비해, 원행을 강조하는 일본독자의 출가의식을  성립시킨 점은 일본불교사에서 획기적이 일이었다.
공해는 최징과 같이 유학했으면서도  장안에 머물면서 불공(佛供)한 이후 '비예산'은  학문을 중심으로 많은  승려가 모여 '가마꾸라'시대 새로운 종파탄생의 모태가 됐다. 장의 제자 '혜과'로부터 '진언 밀교'를 전수받아 귀국한 이후 '고야산'에 새로운 도량을 세웠다. 그러나 공해는 최징과  달리 남도불교와 대립하거나 새로운 계단을 세우지는  않았으며 계율도 구족계를 받도록 했다.
천태종과 진언종은 교리상 상호영향을 주고받았다. 천태종의 경우 최징의 제자 '원인'이 당에 들어가 밀교를 받아들여, 천태교학에 접목시켰다. 이를 태밀(태밀)이라 한다. 이에 비해 진언종은 경도의  교왕호국사(교왕호국사)를 중심으로  발전하면서 천태교학을 어느 정도  수용했는데 이를  동밀(동밀)이라 부른다. 하지만 '천태'와 '밀교'는 나중에 교단조직을 확립하면서 서로 다른 것을  용납하지 않음으로써  일본종파 불교의  원형이 됐다.
'헤이안' 시대 중기가 되자  일본은 전통적인 토지제도가  붕괴되고 귀족의 장원이 출현했으며  지방호족과 무사계급의 쟁투가 일어났다. 이런 상황에서   법연(法然 : 1132-1212)이 나타나 왕생을 위해 다른 잡행(雜行)을 버리고 오로지 염불할 할 것을 제창했다. 그는 천태종에서 공부했으나  독립을 선언하고 정토종(淨土宗)을   세웠다.   또   그의   제자   친란(친란   : 1137-1262)은 아미타불의 자비에 의해서만 왕생이 이루어진다고 주장하여 타력보은의 염불을  강조했다. 그는  다시 정토종으로부터 독립하여 새로운 종파를 세웠다. 이것이 오늘날 일본 최대의 종파가 된 정토진종(淨土眞宗)이다.
법연과 친란은 중국의 담란·도작·선도의 가르침을 계승하되 이를 새롭게 해석하여 독특한 정토교의를 확립했다. 이들의 주장은 처음에 '비예산'에 의해 이단으로 규정되어 조정으로부터 탄압을 받았으나 민중사이에는  뿌리를 깊게 심어갔다.  '정토종'과 '정토진종'의 개종은 종래의 귀족불교가  민중의  불교로 전환하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가마꾸라'시대(1185-1333)에 더욱  확대했다. 제종(제종)의 성립과 유행정토교의 성행과  더불어 '가마꾸라'시대를 빛낸  것은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선종이다.  선종은 이전까지 최징에  의한 '天台'의  지관법(지관법)이 기본이었으나, '헤이안'시대 말기 송(宋)과의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중국으로부터 선종이 수입되어 새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영서(영서 : 1141-1203)는 중국에 건너가  임제선 계통의 선법을 배워 귀국한 후 건인사(건인사)를 세우고  본격적인 선종을 개창했다. 또 많은 중국 승려도 일본으로 건너와 일본에 선불교를 일으켰다.
한편 도원(도원:1200-1254)은 처음에는  '비예산'으로 출가해 천태를 배웠으나 나중에 건인사로 옮겨  선을 배운 뒤 중국으로 유학하여 조동종 계통인 여정(여정)의 심인을  얻어 귀국했다. 그는 조동종이나 선종이란 이름 대신에  불심종(불심종)이라는 이름으로 선법을 폈으나 그의 후계자는 다시 조동종으로 종명을 채택하고 독립교단을 세웠다. 그의  저서로는 본증묘수(본증묘수)·수증일여(수증일여)를 설파한   유명한 <정법안장(정법안장)>이 있다.
이에 비해 '임제종' 계통은  중국의 전통적 공안선을  중시하여 공안에 의한 경성오도를 강조했다. 이 파는 '가마꾸라'와 교또를 중심으로 한 장군과 중앙의  무사귀족의 귀의를 받아 크게 번창했다. 이것은 '禪'의 자기단련과  간결한 교리체계가 행동적인 무사계급에게 인기가 있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선(禪)'은 또 다(茶)와 함께  일본인들의 기호에 맞아  떨어져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면서 건축과 회화, 시문(詩文)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가마꾸라'시대 새로운 불교운동의 최후를 장식한 것은 일련(日蓮 : 서기 1222-1282)에  의한 법화종(日連宗)의 개교(開敎)다. 일련도 다른 종파의 조사(祖師)들처럼 처음에는 '비예산'에서 공부했으나,《법화경》하나만을 의지하는  것을 종지(宗指)로 세우고 독립을 선언했다. 일련은 독특한  주장과 타협할 줄 모르는 성격에 의해 막부(幕府)의 박해를 받아 한때 유배를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련종'의 교의는  간결한데다 일본의 神들을 불교의 수호신으로 존중하는 등 민족주의적인 색채가 강해 가장 일본적인 불교종파로 발전했다.
이밖에도 '가마꾸라'시대에는  여러 가지   새로운 불교운동이 일어났지만 그 교의의 중심은 염불과 선, 또는《법화경》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었다. 이는 과거의 불교가  국가주의 또는 귀족주의였던 것과 달리 개인의 종교로  출발해 민중 사이에 교단의 기초를 확립한 것이 공통적인 특색이다.


* 단가제(檀家制)의 확립

'무로마찌'시대(1392∼1477)의 불교는 교학적으로  뚜렷한 특성이 보이지  않고 '가마꾸라'시대의 연장이  계속됐다. 그러나 사회경제적으로는 장원제도(莊園制度)의 붕괴로,  여기에 경제적 기반을 두고 있던  '나라'나 '교또'의 사찰들은 매우  곤궁해졌다. 이런 궁핍상을 타개하기 위해 불교계는 가지기도(加持祈禱)가 유행하면서 밀교화(密敎化)로 치달았다.
이 시대에 크게  번창한 종파는  연여(蓮如 :  1415∼1499)에 의한 진종(眞宗)으로 일본재래의 조상숭배 신앙과 습합해 세력면에서 봉건영주나  다름없었다. 이들은  누구나  행하기 쉬운 '칭명 염불'을 제창했으며,  교단은 비승비속(非僧非俗)의  세속적인 혈연에 의해 상속되는 가장  일본적인 형태의 불교로 정착케 됐다.
그러나 다음시대인 에도(江戶 : 1598∼1867)  시대에 이르면, '가마꾸라' 시대이래 서민화되었던 불교가 다시 국가불교 체제로 바뀌게된다. 이때의 불교는 새로운 봉건체제 안에서만 활동이 가능했다. '에도'시대의  '도꾸가와(德川)' 막부는 사찰이  강대한 힘을 가지고 농민들과 결속해  체제에 대항하는 것을 근원적으로 봉쇄하기 위해 사찰을 무장해제 시켰다.  그 결과 그때까지 봉건영주화되어 강력한 사병을  보유하고 있던 불교는 무력을 잃고 국가체제에 예속됐다.
'도꾸가와' 막부는 불교의  자유로운 포교, 사원건립,  출가득
도 등에 대한 제한을 가하는 한편 국가권력에 의한 본말사(本末寺)의 행정체계를 확립했다. 막부의 명령은 본산(本山)을  통해 곧바로 말사(末寺)까지 전달됐으며, 각 종파는 행정의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졌다. 국가가 공인한 종파의  본산에 소속되지 않은 사찰은 모두 폐쇄됐다.
막부는 주지의 임명권까지 장악했다. 승려들은  주지가 되기 위해서는 국가에서 실시하는 시험에 합격해야 했고, 이것은 결과적으로 종학(宗學)을  발전시키는 요소로  작용했다.  막부는 또 그리스도교의 금지를 위해 불교를 이용했다. 기독교를 믿는 사람은 반드시 불교로 개종하여 사원에 신자로 등록을 하도록 했고, 그 증거로 사찰에서 증명서를 발급하도록 했다. 이런 일은 기독교도뿐만 아니라 점차 일반국민에게도  적용되어 혼인, 여행, 이사 등에도  반드시 사찰이 발급하는  증명서를 가져야 했다. 이것은 일종의 호적제도로서 사찰이  그것을 관리함으로써 일본국민은 누구나 어느 사찰에 소속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 제도는 나중에 일본불교의 큰 특색 중 하나인 '단가제(檀家制)'를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불교는 이  단가제도로 승려의 사회적 지위가 크게  향상됐으나 한편으로는 체제순응적으로 만들어 승려의 관료화와 이에  따른 안일과 타락이 일게 됐다.


* 현대 일본불교

1867년 명치유신(明治維新)이 일어나자 불교는 배불론자들에 의해 폐불훼석(廢佛毁釋)의  운명을 맞는다.  명치초기  일본의 국학자들은 '신도'에 의한  교육추진을 선포하고  신불(神佛)을 분리하는 정책을 폈다.
정치권력으로부터 외면을  받게된 불교는   자위책의 하나로 더욱 '신불일치'를 강조하는 한편  천황과 군국주의에 대한  충성을 강조했다. 일본  군국주의가 저지른 이른바  '대동아(大東亞)전쟁'을 온 세상을 한집으로 만드는 성전(聖戰)으로  찬양하는가 하면, 천황에게  신권(神權)을 부여하고,  불교적 성왕(聖王)인 전륜성왕과 동일시하여  정복전쟁을 정당화하는데  앞장섰다.
그러나 일부 양심적인 불교도는 이러한 그릇된 작태를 비판하고 신앙쇄신운동을 일으켜 불교정신 회복에  앞장섰다. 1932년 '일련종'의 매미의랑(妹尾義郞 : 1883∼1961)이 주도했던 신흥불교청년동맹이 그 대표적인 예다.
일본불교의 역사적 특색 가운데 하나는  엄격한 종파불교다. 일본의 종파불교는  '가마꾸라'  시대부터 시작되어  '무로마찌' 시대에 완전히 확립됐는데, 취징을  조사로 하는 천태종,  공해의 진언종, 법연의 정토종,  친란의 정토신종, 도원의 선종,  일련의 일련종 등이 대표적이다.
일본에서는 종파가 다르면 본존불이 다른  것은 물론이고, 가람배치 양식,  가사의 색깔과 모양, 심지어는 독경의 음률까지 틀린다. 이 같은 종파는 1945년 이전까지는  13종 56파로 나누어져 있었다.
13종은 법상종·천태종·임제종·조동종·황벽종·일련종·시종(時宗) 등이다. 그런데  종전(終戰) 이후에는 화종(和宗)·아함종 등 신흥종파가 더 생겨났다.
일본의《종교총감≫에 의하면 현재  일본의 불교종파는 7개 계통의 1백 8파에 이르고 있다. 천태계가 20파, 진언계가 43파, 정토계가 25파, 선종계가 23파,  일련(法華)계가 36파, 기타  33개파 등이다. 이중 전국에  4천개 이상의 말사를  가지고 있는 종파는 천태·진언·일련·임제·정토진종등 8개 종파로 알려지고 있다.
일본불교를 말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불교학에  대한 연구 열의와 성과다. '에도'시대 이후 종학(宗學)불교의 발달을 바탕으로 각 종파가 세운 4년제 대학은 10여개가 넘고 있으며 2년제 단기대학도 상당한 숫자에 이르고 있다.  불교학자의 숫자도 많아 대학의 강사급  이상으로 구성된 인도학·불교학회  회원은 3천 명에 육박하고 있다.

 

 

 

 

 

 

 

 

 

 

 

 

 

 

 

 

 

 

5. 티베트 불교사

티베트가 남쪽에 히말라야, 북쪽에 곤륜 산맥, 서쪽에 파미르, 동쪽에 중국의 사천성이 둘러싼 해발평균 3천m의 고원지대다. 기후는 전형적인 내륙성으로 자연환경이 험하다. 주민은 수도 라사를 중심으로 창포강 유역에 가장 많고 그 밖에 캄(동티베트), 암도(청해지방), 찬탄고원 등지에서 농경과 유목생활을 하고 있다.
티베트란 말은 중국에서 이 지방을 토번이라고 부른데서 유래한 것이다. 중국에서는 이 지방을 토번 외에도 <서쪽의 보물창고>라는 뜻으로 <서장>이라고도 불렀다. 이곳에서는 오래 전부터 여러 부족이 탕창강. 등지. 백란. 당항. 강. 백랑. 다미. 아란. 여국 등의 부족국가를 형성하고 있다가, 7세기초 송첸캄포왕 시대에 통일국가가 형성됐다. 송첸캄포는 중국의 사천에까지 진격하여 문성공주를 항가(降嫁)시켰으며, 또 네팔에도 세력을 뻗쳐 네팔왕 앙슈바르만의 왕녀와도 결혼하였고, 톤미삼포타를 인도에 파견하여 불교와 인도문화를 배워서 티베트문자와 문법책을 짓게 하였다.
8세기 후반 체데송첸왕 시대에 티베트에서는 인도계 불교인 점오설(漸悟說)과 중국계 선종의 돈오설(頓悟說)의 대립이 점차 심하여져 토론이 수차례 행하여졌다.
760년경 차데송첸의 초청으로 인도에서 온 날란다의 유명한 학승 산타라크시타, 파드마삼바바에 의하여 중국계 불교는 탄압되었다. 이후 티베트불교는 완전히 인도불교의 영향아래 놓이게 되었다. 또 치데송첸은 마가다(인도)의 오단타푸리사(寺)를 모방하여, 수도인 라사 동남쪽 삼예에 불교사원을 건립하였고, 이 시기에 최초로 티베트인의 출가가 이루어 졌다.
티베트에는 원래 신령을 숭배하는 샤먼적 본교(本敎)가 있어서 불교가 들어가기 전까지 압도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파드마삼바바가 밀교를 들여와 본교와 투쟁하는 동안 이들은 서로 혼융하여 라마교라고 하는 독특한 불교가 만들어졌다. 원시불교로부터 분파된 밀교의 주문이나 진언은 냉철한 이론보다도 자연숭배의 신앙을 가진 티베트인들에게는 매우 합당한 것이었다. 파드마삼바바로부터 비롯된 티베트 초기 불교를 닝마파라 한다. 9세기 전반, 치데송첸과 그의 아들 르파찬은 티베트불교를 가장 보호하던 왕이다. 이 시대에 티베트어로 번역된 불전의 용어를 통일하고, 사전도 편찬됐으며, 많은 경전을 번역하여 불교교의를 순화시겼다.
티베트어 불전은 산스크리트어 원전의 자구(字句)의 원뜻에 충실하는 축자역이 특징인데, 이것은 이 시대에 확립된 전통이다. 그러나, 르파찬은 841년에 암살되고 본교도인 그의 동생 란다르마가 즉위하여 불교를 크게 탄압하였다. 이 때문에 불교는 큰 타격을 입었고, 란다르마 자신도 격분한 불교도에게 암살되고 말았다. 이때부터 티베트왕가는 분열되고 군웅할거시대로 들어갔다. 11세기가 되어 불교개혁을 바라는 서티베트왕 예세헤의 초청을 받아 1042년 비크라마시라사의 학두(學頭) 아티샤가 티베트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의 교학은 밀교의 금강승이었기 때문에 과연 닝마파의 입장이 어느 정도 개혁되는지는 의문이다.
이 아티샤 계통을 카담파라고 부른다. 또한 1073년에 코촉게포가 사카사(寺)를 건립하고 사카파를 성립시켰다. 11세기 중엽에는 마르파가 인도의 비크라마시라사에 들어가 나로파에게 금강승을 배우고 귀국하여 새로 카규파를 열었다. 이로써 티베트불교는 토번시대의 닝마파와 함께 4개의 종파가 분립케 됐다.
13세기 중엽, 사카파는 중국 원조(元祖)와 깊은 관계를 가지며 티베트의 정치. 종교 양권을 장악하였다. 원조의 광적인 티베트의 불교 숭배는 타락한 티베트불교를 더욱 타락시켰다. 이에 14세기 후반에 쫑카파라는 걸출한 인물이 등장하여 타락한 티베트불교를 개혁시켰다. 그는 라마승의 독신생활과 계율주의를 주장하면서, 불교개혁을 지도했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황색모자를 쓰고 흑색모자를 쓰는 본교와 구별했다. 이들을 [황모파]라 하며 쫑카파의 법통을 잇는 승정(僧正)을 달라이라마라고 한다. 제5대 달라이라마는 티베트를 재통일하는 데 성공하여 정교양권(政敎兩權)을 다시 장악했으며, 7대 때인 1750년에는 청조(淸祖)의 보호에 들어갔다가 최근에 이르기까지 달라이 법왕국(法王國)의 전통이 계승되고 있다.
1957년 중공은 티베트를 강제합병했다. 이에 항거하여 달라이라마 14세는 인도로 망명했다. 이후 티베트불교는 중공에 의해 철저히 파괴됐다. 특히 1960년대 후반부터 중공을 휩쓴 문화혁명으로 3천 700개나 되던 사찰은 13개만 남고 몽땅 파괴되었다. 어떤 사찰은 지방정부에서 나무가 필요하다는 이유만으로 뜯겨지기도 했다. 또 한때 40만 명에 이르던 라마승들은 무참히 처형되나 투옥되었다.
그러나, 1965년 9월 티베트가 중공의 자치구로 발족하고, 사인방(四人幇)이 물러간 후 티베트의 불교는 다시 소생하고 있다. 최근 이 지역을 방문한 여행자들에 따르면 라마승은 1천 300여 명이 있으며, 중공당국이 관광목적이기는 하지만 문화혁명 기간중 파괴된 사원의 복구에 힘쓰고 있다는 소식이다. 이로 말미암아 티베트불교는 어느 정도 소생의 기미를 보이고 있다.
그 좋은 예가 1986년 2월 18일부터 열흘간 라사(티베트의 수도)의 대소사에서 열린 [불교대법회]다. 대소사의 불교대법회는 500년의 전통을 가진 티베트불교 최대의 행사다. 1986년 법회는 티베트가 중공에 합병된 지 20년만에 재현됐는데, 여기에는 많은 외국인 관광객과 티베트 사람들이 참가했으며, 이 법회의 법주(法主) 판첸라마는 연일 수천 명의 참가자들에게 [면재증복(免災增福)]의 축복을 내렸다. 이 법회에는 중공의 티베트위원회 오정화 제1서기도 참가해 판첸라마에게 보시를 전했으며, 또 법회에 필요한 우양육(牛羊肉). 다엽(茶葉). 연료. 종교용구 등 일체를 정부가 지원했다. 증공의 관영 [인민일보]는 이 사실과 함께 법회가 열리는 열흘간의 소식을 대대적으로 보도, 중공의 종교정책이 변화했음을 대내외적으로 선전했다. 또 법회에 참가하고 있던 영국. 미국. 일본 등의 외국인 여행자에 대해서는 중공불교협회 서장분회(西藏分會)에서 중공의 종교정책과 대법회의 내용, 역사 등을 설명했다. 이에 대해 홍콩의 신문들은 [법회를 이용해 북경당국은 중공이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설명하려는 의도]라고 분석했다.
한편, 이 법회는 1959년 중공이 티베트를 침공하자 달라이라마를 따라 국외로 탈출했던 10명의 라마승들이 참가해 주목을 모았다. 이 법회는 원래 달라이라마도 귀국하게 되어 있었으나 그가 귀국하는데 대해 북경측이 도중에 조건을 변경함으로써 실현되지 않았다. 달라이라마의 귀국여행이 실현되지 않자, 곤경에 빠진 북경 당국은 친공적(親共的)인 판첸라마를 티베트에 오게 하여 대 법회를 주관케 했다. 그러나, 판첸라마는 [공산당에의 협력]을 호소할 것이라는 당초의 예상과는 달리 [우리의 고향을 복구하는데 동참하자]는 호소를 하는데 그쳤다. 서방의 전문가들은 이를 두고 판첸라마가 중공의 부탁을 거부한 것으로 해석했다. 그렇지만, 달라이라마를 추종하던 라마승의 귀국과 함께 이 대법회에는 연일 티베트 전역(全域)과 중공의 청해. 감숙. 운남. 사천 등 여러 곳에 거주하는 수천의 티베트인들이 이 법회에 참가한 것은 티베트불교의 앞날을 예상케 하는 [상서로운 징조]라고 할 수 있다.
인민일보는 이러한 선전재료를 놓치지 않고 [이 법회에는 매일 4천명 이상이 참가했으며, 하루동안 모이는 보시금은 12만원(원: 한화로 약 3억원)이 넘고 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라사의 대법회가 끝난 뒤, 1986년 5월 판첸라마는 최초로 해외나들이를 해 주목을 모았다. 이 여행 기간중 판첸라마는 [전국인민대표자대회(全人代)대표단]의 부단장 자격으로 오스트레일리아를 방문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그 동안 망명중인 달라이라마에 대해 동정적이었으며, 티베트인(달라이라마 추종자)을 받아들이고 있는 나라다. 1982년 달라이라마가 방문했을 때,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국가원수로서 대우했다. 이에 대해 북경당국은 강력한 항의를 했지만,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는 묵살하고 말았다. 판첸라마의 오스크레일리아 방문은 이 같은 배경에서 달라이라마 추종자 또는 지지자의 기반을 무너뜨리기 위한 것으로 분석됐다.
판첸라마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에 사는 테베트인에 대한 축복(祝福)의식을 접전하고, [티베트의 최근변화]와 [중국공산당의 종교정책의 공정함]을 강조하는 연설을 오스트레일리아 종교지도자를 대상으로 했다.
그러나, 판첸라마의 호주발언은 극히 미묘한 뉘앙스를 지닌 것이었다. 표면상으로는 중공의 티베트정책을 찬양하는 듯하면서도, 내면적으로는 통렬한 비판이 담겨 있었다는 평이다. 예를 들어 티베트의 최근 정세에 대해 [진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변화]라고 표현했으며 [근래 2년]이라고 표현함으로써 그 이전의 상황은 아주 나빴음을 암시했다.
이 무렵 중공의 실력자 호요방은 티베트의 장기망명지도자 달라이라마가 [통치자로서가 아닌 개인자격으로, 그리고 우선 중공에 일시 체류한 다음 티베트를 방문하려 한다면]이라는 단서를 붙여 티베트 방문을 허용하겠다고 말했다. 호요방은 이때 영국을 방문하고 있었는데, 티베트의 인권상황을 묻는 기자들에게 [그가 떠나 있는 27년 동안 새로운 세대가 지도자로 부상하는 등 상황이 바뀌었기 때문에 상황인식을 돕기 위한 배려]에서 라고 설명했다.
달라이라마는 티베트에서 절대적인 정치 및 종교지도자로 중공이 티베트를 점령한 1957년 고국을 탈출, 주로 인도와 유럽지역에서 망명생활을 해 왔다. 어째거나, 티베트는 중공과의 합병 이후 심한 억압을 받았으나, 최근의 완화된 종교정책으로 어느정도 생기를 되찾고 있는 것만은 사실로 보인다. 하지만, 이를 가지고 마치 티베트에서 불교가 재흥되는 것으로 보는 것은 지나치게 성급한 기대다. 아직은 더 관망이 필요하다.
티베트불교의 최대의 자랑은 흔히 서장대장경으로 불리우는 티베트대장경이다. 티베트대장경은 크게 칸주르와 탄주르러 나누는데, 칸주르는 계율부 등 7종, 탄주르는 주석부등 15종류로 세분된다. 칸주르는 약 100질에 800부, 탄주르는 224질에 3천 400부로 구성돼 있다.
여기에는 한역경전에도 남아있는 경론이 약500부 정도 있으며, 특히 밀교부의 방대한 문헌은 티베트대장경에만 보이는 것이다. 이 대장경을 번역하는 일은 7세기 송첸캄포왕 때부터 16세기 무렵까지 약 900년간 계속되었는데, 9세기 중엽 란다르마왕의 파불을 경계로 전전과 후전으로 나누어진다.
전전시대에서 역경이 가장 왕성한 때는 치데송첸과 르파찬왕 시대다. 이때 인도인인 실렌드라보디와 티베트인인 예세헤 등 유명한 번역가가 활약하였고, 유부율과 현교경전의 대부분, 그리고 순밀경전등이 역출됐으며, 또한 대승론서도 그 반수 이상이 이 시대에 번역됐다.
후전시대의 유명한 번역가는 린첸삼포로 10세기말의 인물이다. 후전시대에는 동인도 벵갈 지방의 금강승. 시륜승의 영향을 받았고, 특히 이슬람의 침입을 받은 비크라마시라사 조직이나 많은 전적등이 티베트에 전해져 티베트대장경의 근간을 이루는 탄트라부를 형성했다. 티베트대장경은 14세기초 나르탄사에서 개판되고부터 10종 가량의 판본이 전해지고 있다.
티베트의 불교예술은 그리 뛰어난 것은 없으나, 탕카류는 주목할 만하다. 탕카란 베 또는 종이로 만든 족자 비슷한 것으로, 그림을 걸어 놓고 사람들에게 보이면서 설교하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이에는 일축으로 된 것과 여러 축으로 된 것이 있다. 원래는 만다라와는 별개의 것이었으나, 후에는 혼동되어 만다라양식으로 그려진 것도 있다. 그림의 소재는 부처님의 생애나 전생담. 제불보살. 16나한. 쫑카파를 비롯한 고승 등을 그린 것이 많다.
6. 동남아시아 불교사
                                                              최 광 일

목차

1.동남아시아의 역사적 배경
2.동남아시아의 불교사
     1>스리랑카
     2>버어마
     3>타이
     4>캄보디아
     5>베트남
3.현재의 불교적 모색

 

 

  동남아시아지역 불교를 남방불교라 지칭하는 경우가 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방불교를 소승불교와 동일시하고 이 지역의 불교를 모두 같다고 생각하는등 동남아시아에 대한 인식이 무지의 극치를 달린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사실상 자료의 빈곤과 관점의 편협성으로 많은 문제점이 제기될 것이나 남방불교에 대한 무지의 극복을 조금이라도 이루는데 이 글의 목표가 있으며 동남아시아지역 불교의 성격과 이 지역 대중들이 현재 어떠한 관점으로 생활하는가에 중점을 두고 진행시키고자 하는 것을 먼저 밝혀 둔다.
  우리는 먼저 동남아시아지역에 대한 고찰을 해봐야 한다. 동남아시아지역은 인도차이나반도와 인도네시아지역, 그리고 스리랑카(샤일론섬)까지도 포함하는 일정치 않은 경계를 가지고 있다. 인도차이나반도와 말레이반도를 자세히 보면 마치 남성의 성기와 같은 모양인데 양옆으로 들어오는 인도 문화와 중국문화가 서로 부딪히는 문화국경선으로 크게 중국의 지배적 영향을 받은 지역과 인도의 지배적 영향을 받은 지역으로 나뉘어질 수 있다.  물론 근대에 여러 유럽국가들에 의해 식민지화되어 필리핀에서처럼 기독교의 전파를 통한 서양화되고 불교적,민족적 성향이 무너져 내린 곳도 있지만 이들 지역은 불교를 빼놓고 역사를 말할 수 없을 정도의 불교국가들의 지역이다. 현재 동남아시아지역은 경제적으로 개발도상국이고 식민지였다는 이유로 세계사에서조차 등한시되고 외면되는 지역이며 이것은 불교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오랜 식민지로 강대국에 의해 수탈당하면서 불교적 민족주의사관,불교적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국가들이 존재하는데 앞에서 말했듯이 남성의 성기처럼 힘찬 기상들이 웅비하는 곳이다.


  동남아시아의 불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지역의 역사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부득이하게 불교사와 약간 동떨어진듯한 역사적 서술을 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 지역의 역사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불교의 역사라 할 수 있으므로 우리가 동남아시아의 불교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믿으며 간략한 역사적 배경을 서술한다.
  동남아시아지역을 먼저 지리적인 요건으로 살펴보자. 이 지역의 나라로는 버어마 연방사회주의공화국,라오스 인민민주주의 공화국,타이왕국,민주 캄보디아,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말레이지아,인도네시아 공화국,필리핀 공화국,싱가폴 공화국,그리고 스리랑카까지만 이 글에서는 포함하는 것으로 한다. 지형별로 나눈다면 인도차이나반도와 말레이반도, 인도네시아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말레이반도와 인도네시아 지역은 이슬람교도와 서양의 침입에 의해 불교권이 소멸했으며 이 사실은 민족적 전통성이 많은 부분 변화했음을 의미한다. 또한 인도차이나반도는 대승불교권과 소승불교권으로 나뉘어지는데 이런 다양한 종교 현황을 볼 때 수 많은 외래 종교와 문화가 범람하는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이 지역에서도 얼마나 많은 대중들의 고통이 있었고 자신들의 고유한 문화를 지켜나가는데 엄청난 희생의 대가를 치루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지역적 요건속에서 그들은 어떠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자. 일찌기 인도인들에 의해 황금의 땅이라 하여 정복되면서 동남아시아 지역의 개방은 시작되었다. 그 속에서 인도의 불교와 힌두교등을 포함한 인도의 발전된 문명이 들어온다. 이러한 흔적으로 3세기 전반 중국의 오(吳)나라는 메콩강 유역에서 세력을 떨친 부남(扶南,현재 캄보디아 지역에 해당)에 사신을 보내는데 그들은 [부남은 여자를 首長으로 하는 나체의 야만족이었는데 남쪽에서 상선을 타고 온 인도인에 의해 굴복되고 그 여왕을 아내로 삼아 인도의 풍속과 관습을 강요했다]는 기록을 남겼으며 캄보디아의 전설에도 이와 흡사한 내용이 전해지는 것으로 봐서 해상 교통에 의해 인도문화가 메콩강 하류지대까지 파급된 역사적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 지역의 문자에서도 인도문화의 영향을 알 수 있는데 중세 이슬람교와 함께 퍼진 아라비아 문자를 제외하고는 거의가 남인도의 그란다(Grantha)문자에 근거를 둔다. 뿐만 아니라 현재 사용되고 있는 타이 문자,버어마 문자,수마트라의 바탁크 문자,발리 섬의 문자 등이 모두 그란다 문자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러한 인도의 막강한 경제적,문화적,군사적 침입속에서 동남아시아에 비해 그 당시 엄청나게 발달한 인도문화에 융화되어 힌두교등의 문화와 함께 들어온 불교를 받아들이게 되므로 사실상 이때부터 불교가 시작되었다고 분리할 수 있는 시기의 구분은 상당히 어렵다. 또한 인도차이나반도의 동쪽 중국의 잦은 침입을 받았던 월남만큼은 지속적인 중국의 침입과 지배를 받아 유 불 선 혼합형태의 중국식 대승불교가 전파되는등 중국문화가 지배적으로 전파되었는데, 본래 월남이란 말은 중국의 월나라의 멸망으로 남쪽으로 이동한 부족들이 정착하여 나라를 구성한데서 비롯한 말이다.이 지역은 천여년정도의 중국의 지배속에 있으면서 중국문화의 지배적 영향을 받았던 곳으로 다른 동남아시아지역과 역사적 출발점에서는 분리되는 곳이지만 본격적인 역사의 발전이 시작되면서 다른 동남아시아국가들과 비슷한 운명을 걷게 된다. 이후 근대에 들어서면서 서구의 제국주의 국가인 영국,프랑스등의 열강들에 의해 타이를 제외한 모든 국가들이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는데 오랜 기간의 식민지 생활은 이들 국가의 국민들로 하여금 강한 반제국주의적 사고를 가지게 만들었다. 이러한 현상을 비슷한 시기에 해방한 우리나라와 비교해 본다면 민족의 자존심을 미국과 일본에 팔고 있는 우리는 부끄러울뿐이다. 이들은 과거 제국주의였던 나라가 가지고 있는 자본주의에 대해서도 배타적이며 그 영향으로 사회주의 특히 불교적 사회주의에 대한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있는 국가가 많다. 이러한 현상은 동남아시아지역의 불교 교리가 현실과 떨어진 신앙이 아니라 바로 현실을 풀어 나갈 수 있는 생활 그 자체라는 것을 말하며 이러한 바탕속에서 암울했던 식민지 시대에도 불교를 통해 민중이 통일되었고 서양에서 물밀듯이 몰아치는 문화적 충격을 완충시켜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먼저 동남아시아 불교사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들이 알아 두어야 할 것이 있다. 먼저 대승불교가 최고이고 상좌부 불교는 소승불교라는 잘못된 관점을 과감히 깨뜨려야 한다. 또 한가지는 이 지역에 속한 많은 나라의 불교역사를 이 작은 지면 위에 옮긴다는 자체가 어렵다는 것을 이 글을 읽는 대불련인은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국가별로 불교와 그 나라의 구성원들과의 세부적인 반응에 대해서는 간략하거나 배제하는 것으로 하겠다. 또한 자바섬과 수마트라섬,보르네오섬등으로 나뉘어지는 인도네시아지역과 라오스 인민민주주의 공화국에 대해서는 자료의 절대부족으로 생략한다

  처음으로 스리랑카의 불교부터 살펴본다면, 이 나라는 인도 남단에 자리한 샤일론 섬에 있는 국가이다. 이 곳에 불교의 전래는 다양한 전설이 있지만 대체로 석존의 입멸 후 서서히 전해졌으리라 여겨지고 본격적인 전도는 인도의 아쇼카왕의 아들(혹은 동생이라고도 함) 마힌다에 의해서이다. 마힌다 일행이 스리랑카로 온 경로에 대해서는 확실치 않으며 이들은 서부 인도지역의 팔리어를 사용하는 상가(승가)로서 이 상가는 상좌부파였다. 이 당시 스리랑카의 국왕은 데바낭피아티사(재위 BC 250-210)로 이들에게 수도인 아누라다에 최초의 사원인 마하메가바나(大雲林)를 기중하였고 이것이 정비되어  마하비하라(大寺)라는 사원이 되었는데 이 사실로 미루어 봐서 스리랑카에도 자이나교를 비롯한 다른 종교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불교가 우대받았다는 것은 스리랑카에 벌써 불교가 어느 정도 알려진 상태이거나 건국신화에 인도에서 건너온 것으로 되어있는 왕족의 권위를 높이는 수단으로 역시 대륙에서 건너온 불교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여하튼 스리랑카에서는 불교가 별다른 저항없이 처음부터 왕실의 지원으로 정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밧타가마니아바아(재위 BC 43-17)왕이 자이나교사원을 부수고 아바야기리비하라(Abhayagirivihara,無畏山寺)라는 사원을 세워 마하티사 장로에게 기증하는데 이 장로에게는 기존의 상가 입장으로 봤을 때 문제점이 있었다. 그것은   출가자이면서 일반 가정에 출입이 잦았으며 이 장로와 함께 있는 승려들도 왕의 신임을 믿고 오만한 행동을 하였는데 이러한 점이 강하게 비판되면서 상가에서 추방을 당한다. 그러나 이 사실은 어쩌면 왕실의 신임을 얻기 위한 불교집안내 권력싸움에서 마하티사 장로가 밀려난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이때 그는 동조자와 함께 아바야기리비하라(無畏山寺)를 근거로 새로운 상가를 조직한다. 이것은 스리랑카의 불교사에서 중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전통과 계율을 중시하는 大寺派와 자유주의적 색채가 강하고 계율을 중시하지 않는 無畏山寺派로 나뉘어지게 되는 것으로 대사파의 경우 정법의 맥이 흔들린다는 위기감 형성과 그 당시 외부의 침입과 기아로 발생한 시대적 불안감이 결합되어 불교사상 최초로 최대 편찬사업의 출발점이 되기 때문이다.그것은 5백의 비구가 암송으로만 전해지던 부처님의 교법을 문자로 옮기는 작업으로 경 율 논 세가지를 집성하고 주석까지 달아 아루비하라석굴에 보관하였다.이것은 10여년의 기근과 전란속에서 왕실의 후원도 없이 행한 자주적 결속으로 비록 차이는 있으나 우리의 팔만대장경을 연상케하는 대사업이다. 그리고 암송으로만 전하던 교리를 문자로 옮긴 대대적 사업이라는 점도 시대적 변혁으로 받아들일만하며 스리랑카의 중요한 보물인 것이다. 그럼 여기서 이왕 보물 이야기가 나왔으니 스리랑카의 불교보물에 대해서 몇가지 소개할까 한다. 먼저 전도사 마힌다의 여동생 상가미타가 부다가야의 보리수 남쪽 가지를 꺽어와 심은 보리수 나무이다. 이것은 서민의 불교수용에 지대한 영향을 발휘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지금도 숭배의 대상이 되고 있다. 다음은 스리랑카에서 목숨처럼 아끼는 보물로서 바로 부처님의 왼쪽 송곳니이다. 이것을 왕궁의 담마차카라는 곳에 안치하고 일년에 한번 무외산사로 옮겨 성대한 <불치제(佛齒祭)>라는 행사를 베푸는데 불치보호장관이 있을 정도로 관리에 힘을 쏟고 있으며 몇개의 모조품을 만들어 과거 외국의 침입과 약탈속에서도 진품만은 지켜올 수 있었다. 이렇게 독실한 불교국가인 스리랑카에 상좌부만 전래된 것은 아니다. 공(空)사상을 강조하는 대승계열의 방광부(方廣部)가 전래되지만(3세기초) 이단으로 간주되고 배척 받는다. 계율과 전통을 중시하는 상좌부에게는 모든 것이 空이고 필요없다는 식으로 공사상은 이해 되었을 것이다. 또 7세기말경의 남인도 키스트나강 유역에서 성립된 밀교의 한 흐름이 스리랑카에서 행해지는데 한때 밀교의 중심지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그러나 밀교의 신비주의는 결국 종교계를 혼돈의 상태에 빠지게 하고 무지한 이들이 믿는 가르침이라 하여 거센 비판을 받는다. 이리하여 비자야바후 1세(재위 1059-1113)가 버어마의 상좌부 장로를 초청해와 어지럽던 스리랑카 불교의 법통을 다시 잇게 한다. 스리랑카와 버어마등은 서로 자국의 불교가 쇠퇴하면 이웃나라의 장로를 초청하여 법통을 잇는데 이것은 같은 상좌부 불교로 원형에 가깝고자 노력하는 부파이므로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이처럼 국가의 차원을 떠나 그 만큼 불교의 법통을 중시하였기에 붓다고사(Buddhaghosa)가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붓다고사는 인도에서 태어나 출가한 후 마하나왕(재위 409-431)때 스리랑카로 들어오게 되는데 처음에는 그 당시 번창하던 무외산사에 있었으나 대사쪽에 순수한 법통이 있음을 알고 그곳으로 옮겨 여러 곳에 산재해 있던 싱할라어의 주석서(註釋書)를 수집하여 삼장에 대한 완전한 주석서를 편찬했는데 이것은 대중들이 이해하기 쉽고 기억이 용이하면서 시적인 정서를 느끼도록 노력한 하나의 작품으로 그의 업적은 대승불교에서의 나가르주나(龍樹)에 버금가는 칭송을 받고 있다.

  다음은 버어마로 가 보자. 버어마는 버어마족과 카친족,카렌족,산족,몬족등 다양한 종족이 모여 있으며 동남아시아지역에서 인도와 가장 가까운 국가이다. 지형상으로 말레이반도까지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는데 상부와 하부로 나뉘어진다. 버어마족은 상부 평원지역에 있으면서 북인도지역에서 넘어온 대승불교의 영향을 받았으며 하부지역은 인도의 아쇼카왕시대 전도사인 (기원전 3세기경) 소나와 유타라 라는 전도사에 의해 불교를 받아들인 몬족이 국가를 건설하고 발전하였다. 11세기초 버어마족의 영웅 아노라타왕(재위 1044-1077)이 버어마지역의 대부분을 통일시키고 몬을 공격했다. 몬을 공격했던 이유는 청정 비구와 팔리어 성전을 보내달라고 그 당시 몬의 왕이었던 마누하왕에게 요구한 것이 거절당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불교를 이용해서 전쟁을 일으키는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으로 추측된다. 아노라타왕은 1057년에 몬을 멸망시키고 팔리어의 삼장과 주석서들을 가져왔으며 비구 500여명을 자신의 파간왕국으로 데리고 왔다.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때부터 대승계열의 범어 성전 대신 팔리어 성전을 통일적으로 사용케한 것으로 이것은 통일된 버어마에 본격적으로 상좌부가 수립됨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후 파간에 완전한 상좌부 불교의 상가가 생기자 외국의 상가와 빈번한 교섭을 가지게 되는데 앞에 이야기 된 스리랑카에 비구들을 파견한 것도 11세기 후반인 이때의 일이다.그러나 이 파간 왕국도 몽고군의 침입으로 1287년에 멸망하고 이백여년의 혼란 속에서 두개의 국가로 정리되는데 이 중 페구를 수도로 하는 라만냐데사의 왕 담마체디(재위 1472-1492)가 1475년 스리랑카에 대규모 파견단을 보내 새롭게 불교의 융성을 꾀하고자 하였고 스리랑카에서 돌아온 장로들에게 켈레니아 도량을 마련하여 주었는데 이후로 스리랑카의 대사파에게서 전승해 온 순수한 작법으로 통일시켜 라만냐데사의 수계작법이 확립되었으며 이것이 남방불교에서의 라만냐파 불교의 기원이 된다.

  이번에는 타이를 살펴보자. 타이는 인도차이나반도에서도 중심부에 있는 국가이다. 타이족이란 그 중심세력을 이루고 있는 샴 족과 라오 족을 지칭하는 말인데 처음에는 중국 남쪽에 위치하며 대승불교권에 속했으나 차츰 남쪽으로 이주하면서 크메르족의 영향권으로 들어가게 되고 현재의 위치에 자리잡게 된다. 크메르족은 이미 고도의 문화를 가지고 있었으며 타이족은 이들의 영향 아래서 상좌부 불교를 신봉하게 되었으리라 추측된다. 이들도 국가를 세우고 14-16세기에 걸쳐 전성기를 누렸으나 1766-1767년에 그 동안 침공해 오던 버어마가 대군을 동원하면서 침략해 와 멸망하게 되고 대부분의 사원이 파괴되어 정확한 역사의 파악이 어려운게 사실이다. 그러나 한창 이름을 날렸던 아유티아 왕조때 시리스리야반사라마왕은 1361년 스리랑카 대사파의 가르침을 사신으로 하여금 받아오게 하여 국가적 가르침으로 삼았고 이후의 모든 왕들도 불교를 신봉하였다. 버어마에 의해 멸망한 후 많은 혼란기 속에서 1782년 방콕왕조가 들어선다.이 방콕왕조는 몽구트왕(재위1851-1868)때 근대화가 되는데 그는 비구 생활의 경험이 있었으며 각종 개혁을 단행한다. 이 사실은 불교가 우리나라에서는 수구세력이고 미신적이고 전근대적으로 인식되어지는 반면 이 지역에서는 새로운 사고를 추구할 수 있는 능동성과 근대적인 사고를 보여주는 것으로 사회적 배경이 자리잡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캄보디아는 인도차이나반도 남부에 있는 조그만 나라이다. 캄보디아인은 이 지역에서 비교적 오래된 크메르족의 후예로 약 75%를 차지하고 있는데 전술된 동남아시아의 역사적 배경에서 나온 내용중 부남에 관한 전설이 바로 현재 캄보디아의 지역에서 전하는 내용이다. 전설의 내용처럼 이 지역은 일찍부터 인도의 영향을 크게 받았는데 부남시대에는 불교가 바라문교와 함께 서민들에게 깊이 침투하여 눈부신 발전을 했으며 중국의 구법승 義淨(635-713)의 동남아시아 여행기인 <남해기귀내법전(南海寄歸內法傳)>권 1에는 [옛날에 부남국이라고 불렀던 나라가 있는데 이곳 사람들은 천신을 모셨으며 뒤에 불교가 왕성해졌다. 현재는 나쁜 왕이 불교를 멸망시키고 승려도 없다. 지금은 불교 이외의 여러가지 종교가 성행하고 있다] 여기서 나쁜 왕이란 부남을 멸망시킨 진랍왕 바바바르만 1세로 추정된다. 진랍은 부남의 속국이었는데 독립을 쟁취하였다가 6세기 중엽 부남을 멸망시켰다. 이 당시(6세기경)에 관세음보살에 대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봐서 대승불교가 유포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역시 상좌부불교와 바라문교도 성행하고 있었다. 이후 야쇼바르만 1세 (재위 889-900)때 크메르는 인도차이나반도의 태반을 지배할 정도로 발전하는데 이 시대에 대승불교는 정식으로 인정받게 된다. 하지만 1357년,1394년,1420년에 걸친 타이족의 침략으로 그들의 수도인 앙코르 톰을 포기하고 로베크로 새 도읍을 옮기면서 화려했던 시기도 막을 내렸다. 결국 1593년 샴(타이의 옛 이름)의 공격으로 완전히 멸망하게 되는데 타이족의 영향은 결국 상좌부불교를 제외한 대승불교와 바라문의 쇠퇴및 멸망을 가져왔다.

  베트남을 월남(越南)이라고 하는 기원에 대해 전술한 바 있다. 월남은 중국과 끊임없는 연결속에서 비교적 상세한 역사자료들이 많이 남아있다. 월남은 경제,정치,문화등 다양한 부분에서 중국의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反중국적 경향이 짙은 것이 특색이다. 기원전 111년 한무제에게 토벌되어 10세기까지 천여년동안 중국의 지배를 받는다. 물론 이 사이에 대규모의 반란이 있었지만 실패로 돌아간다. 그러나 정작 월남의 민중들이 스스로를 피지배자로 인식하고 월남이 중국의 일부라는 생각이 사라진 것은 수나라의 지배를 받기전 6세기경 잠깐 동안의 독립기를 거치면서 부터이다. 이후 10세기경 당의 멸망을 틈타 독립을 쟁취하면서 자신들의 문화를 꽃 피운다. 베트남의 불교사에서 최초로 불교를 전한 이는 後漢 末에 중국의 정치적 혼란을 피해 남하한 인물 가운데 모자(牟子)라는 학자라고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이 기록은 추측에 의해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 2-3 세기경 인도차이나반도의 모든 곳에 퍼져가던 인도의 승려와 상인들에 의해 불교는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 당시 국경의 남단이었던 교주에 상당수 인도 문화권의 사람들이 漢인과 베트남인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준것만 봐도 이해될 수 있다. 이 교주라는 곳은 베트남에서 불교의 번영을 대변해 주는 도시로 불교문화의 중심지가 된다. 중국의 삼국 위 진 남북조 시대의 왕성한 불교의 발전은 이 당시까지만 해도 월남이 중국의 일부라고 생각하는 월남인에게 자연스럽게 영향을 주었다. 580년 교주의 법운사에서 인도의 선을 전한 남천축의 바라문 출신인 비니다류지가 이 시기에 활동하게 되는데 이후 비니다류지파의 선은 9세기경 無言通에 의해 시작된 무언통파와 쌍벽을 이루면서 베트남의 李朝 말기까지 법맥을 유지한다. 그러나 제 4조 청변 사이의 조사 이름이 확실치 않고 7세기 이후에야 일파로서 구체적 모양을 갖춘 것으로 보인다. 이 시대의 베트남 불교는 중국 문화의 강력한 침투로 사실상 중국풍의 불교였다. 무언통파는 육조 혜능으로부터 따져 4대째인 백장(百丈)에게서 남종선을 이어 받은 무언통이 [어디에서나 생활에 충실하면 그것이 선]이라는 백장의 가
르침을 전하는데 무언통의 제자 감성을 제 1조로 하여 무언통파를 확립했다. 이름에서도 풍기듯이 비나다류지파는 인도의 선을 시작으로 한 파이고 무언통파는 중국의 선을 시작으로 한 것이다. 이것만 봐도 교주를 중심으로 베트남의 불교가 중국과 인도의 사이에서 중심역할과 전달역할을 하면서 얼마만큼 불교 선진국을 이루었는지 알 수 있다. 이 무언통파는 비니다류지파보다 백년 더 법맥을 잇다가 진조(陳朝) 聖宗(재위 1258-1278)에 의해 생긴 죽림파에게 이어졌는데 죽림파는 중국식 불교를 베트남식 불교로 바꾸는데 일익을 담당했다. 독립후 초기 왕조인 정조(丁朝),(전)여조(前黎朝)의 짧은 기간을 지난 후 李朝를 거치면서 승려의 정치 참여가 아주 두드러지는데 마치 우리나라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 국사가 있었듯이 이들 국가에서도 정책자문 이상의 대우를 받았다. 이것은 중국의 영향이나 인재 등용의 문제를 불교만이 해결할 수 있었던 점도 있겠지만 얼마만큼 이 지역에서 불교의 세력이 정권에게 필요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불교의 정치참여 속에 이루어진 발전은 이조의 멸망뒤에 이어 생긴 진조때도 마찬가지였다. 이 당시 왕이었던 인종이 무언통파 제17대 혜충(慧忠)을 스승으로 출가하는데 이 인종이라는 인물은 왕이었을때 몽고의 세차례에 걸친 원정을 물리친 시대의 영웅이라는 이유만으로도 그의 죽림파는 대중들에게 쉽고 빠르게 퍼졌으며 몽고의 침입으로 더욱 발전한 민족의식은 죽림파를 베트남식 불교로 만들어냈던 것이다. 그러나 지칠 줄 모르고 발전하던 불교도 끊임없는 유교의 도입과 중국식 관직개편의 시대적 변화속에서 서서히 왕족과 중앙정치세력에서 밀려 나오게 된다. 진조시대부터 이 같은 징후는 보이기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불교는 그 대상을 귀족이 아닌 일반 백성에게로 돌려야 했고 서민들의 생활 깊숙히 잠식해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왜 불교가 밀려나게 되었는가? 그것은 우리나라의 고려시대까지 우대받아 오던 불교의 타락상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국교로서 존중받는 종교는 어떤 종교를 막론하고 타락하기 마련이고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종교로서의 청정성을 잃기 마련이며 더 이상의 국가 이념으로서의 매력을 잃기 때문이다. 여하튼 이러한 속에서 진조가 망하고 중국의 명나라에 의해 1406년 월남지역은 또다시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다. 명은 베트남의 불교서적을 약탈해 가고 정토경전들을 유포시키는데 이는 불교를 통한 식민지정책중에 일환일 것이다. 하지만 서민들속에 살아 움직이던 불교는 베트남의 독립을 꿈꾸는 민족주의자로 둔갑하여 활동하게 된다. 이후 격렬한 투쟁속에서 다시 독립을 쟁취한 국가는 후여(後黎)인데 이 국가는 유교의 적극적 정치도입을 강력하게 하여 불교는 더욱 정치와 멀어지게 되고 서민들의 삶속으로 빠져든다. 17세기를 거치면서 서민속으로 들어간 죽림파 불교는 겉으로는 임제선을 주장하지만 염불과 밀교의식, 베트남 민간신앙인 신도(神道)를 혼합하여 정토교 계통의 연종(蓮宗)으로 성립된다. 이때부터 불교는 후에 완조(阮朝)시대를 거쳐 프랑스 식민시대까지 정치권의 비판세력으로, 제국주의 국가로부터 베트남의 독립을 외치는 민족종교로 그 모습을 변모시켜 나간다.


  우리는 간략하게나마 동남아시아불교의 전래와 발전부분을 살펴보았다. 이 속에서 상좌부불교와 대승불교의 공통점을 찾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역사의 흐름속에서 최초 석존의 가르침이 수 없이 변화하고 시대에 적응하여 발전하면서 마침내는 대중들 속으로 파고들 수 밖에 없는 불교라는 하나의 종교 모습이다. 아무리 권력의 보호속에서 발전하더라도 결국 무지한 대중들을 버리고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종교일 것이다. 그 중에서 결국 불교가 사라져 버린 곳도 있고 아직도 건재하게 살아 남아 시대를 고민하고 있는 지역도 있다. 그렇다면 불교가 이 곳, 동남아시아지역의 국가들이 근대화를 이루어 나가는 동안에 어떠한 모습으로 움직였고 어떤 방향점을 대중들에게 지시하고 있는가 ? 경전대로라면 불기 2500년 이후는 불교의 쇠퇴를 의미하는 시기이다. 그러나 동남아시아에서는 불기 2500년 이후에 위대한 종교개혁과 불법의 선양이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특히 스리랑카에서는 불기 2500년에 불교국가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강한 믿음은 결국 불교국가 수립에 크나큰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또한 불교문화속에서 살아온 그들은 가능한 모든 물자를 완전히 개발해 버리는 서구의 경제 생활방식보다 훨씬 소박한 경제목표를 가지고 있다. 그렇기때문에 결코 그들을 서구화된 우리의 자본주의적 관점으로 그들의 경제를 비판해서는 안될 것이다. 물론 그들도 불교 해석의 오류인 허무주의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교리의 엄격한 생활실천을 하는 그들은 불교가 사라진 지역에 비해 훨씬 더 근면한 생활을 해 나가고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문제가 있다. 과거 제국주의가 할퀴고 간 상처를 완벽하게 청산하고 지속적으로 다가오는 수 많은 시련에 대한 극복이다. 이러한 것들을 그들은 불교적 관점에서 풀고자 하는 것이다. 1961년 버어마의 불교 국교화작업을 시작한 우누 수상도 그런 사람중에 하나였을 것이다. 전후 어지러운 민심을 불교로서 다스리려 하고 타이와의 불편한 관계도 불교라는 공동 문화권으로 인식을 유도하여 풀어보고자 했다. 하지만 그는 실패하고 만다. 우선 기독교와 이슬람교등 다른 종교를 가진 소수민족에 대한 문제 미해결과 불교도의 독선적이고 거만한 사고, 그리고 근본적으로 불교를 미래 지향적 방법으로서가 아닌 신왕정주의의 방법으로 사용하는 시대역행적인 착오를 범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트남의 경우는 불교 11개파가 미국의 후원으로 선 사이공 정부의 독재와 폭압정치에  반대하며 통합하여 [통일 불교회]를 결성하였고 월남전이 종결될 때까지 정부와 대립하였다. 베트남의 해방이후 친외세의 세력들이(대체로 기독교세력) 정권을 장악하면서 또 다시 민족주의자의 탄압은 시작되는데 이것은 우리나라의 해방 당시 김구선생님의 암살을 대표로 하는 민족주의자 탄압정책과 비슷한 것이다. 이 속에서 스님의 분신자살등의 극단적인 방법까지 나오게 된 것이다. 그것은 불교가 하나의 민족의 지도 이념임을 나타내는 모습이다. 또한 타이의 경우는 붓다다사라는 비구를 중심으로 신불교운동을 펴고 있는데 그는 불교에 대한 새로운 시각으로의 비판을 유도해 내고 늙어빠진 보수적 불교를 새롭게 탄생시키고자 한다. 또 인텔리 계층의 불교청년회의 결성으로 사회봉사활동에 열중하는 새로운 타이불교의 분위기 조성에 앞장서고 있다. 이 사실 또한 산중불교인 우리의 입장에서 청년불자인 우리 대불련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주는 것이다.        
  이제 돌이켜 전체적인 것을 살펴보자. 물론 상좌부불교가 개인의 수행을 우선시 하는 부분이 크며 포교와 사회복지에 관한 부분에 불교의 활동이 적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대승불교라는 우리나라의 모습도 결코 나을 것은 없다.오히려 상좌부불교가 비합리적 경향을 타파하려는 경향이 강하여 각 지역에 있는 미신적 생활을 개선하는데 앞장 서고 있으며 빈민가의 사람들이 무료교육을 받을 수 있는 혜택을 마련해 주고 정신적 지주로서 침략자에게 시달리는 국민들의 정서를 하나로 묶어 외래문화의 강력한 충격으로부터 보호하여 주었고 상당한 포교사업과 사회복지사업도 실시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경우는 어떠한가 ? 해방이후 물밀듯이 밀어닥치는 외부의 문화적 충격에 한국불교는 집안 싸움만 하고 있었고 역사적으로 봐서 대체로 소멸되기 직전에 나타나는 밀교적 성향이 강해지면서(우리나라가 티벳처럼 처음부터 밀교를 받아들였다면 또 다른 해석이 필요하겠지만) 오늘날 통불교라는 이름下에서 한국불교는 떠돌고 있다. 또한 대승불교라는 한국불교는 승가의 특권의식으로 재가신자들은 철저한 고립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이제껏 동남아시아의 불교를 살펴본 것은 바로 이러한 우리 불교의 문제점들을 비판하고 개선해 나아가야 할 방법을 찾고자 하는 의지라는 것을 알리면서 이 글을 읽는 대불련 또한 강한 책임감과 주체성을 가져주길 당부하는 바이다.

 

 

 

 

 

 


7. 서양의 불교현황 - 진우기
  


- 목 차 -

1. 서양 불교의 특징
2. 프랑스의 플럼 빌리지와 틱냣한 스님
3. 영국의 칫타비베카 숲속 승가
4. 직업을 통해 다르마를 실천하는 영국의 서구 불교종의 친구들
5. 독일의 붓다 하우스와 아야 케마
6. 미국의 샌프란시스코 선센터와 스즈키 순류 스님
7. 미국의 샴발라 승원과 트룽파 린포체
8. 미국의 ZPO와 버나드 글래스맨 선사
9. 니폰잔 묘호지(日本山 妙法寺)와 후지 니치다쓰 스님
10. 앙굴리마라의 후예들을 불법으로 이끄는 조동종의 스님들
11. 해외에서 활약하고 있는 한국의 스님들
12. 맺는 글

 

 

 1. 서양 불교의 특징

서양으로 간 불교는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모습으로 변하여 이국의 풍토에 자리잡고 있을까? 크게 분류한다면 두 가지 전통을 들 수 있다.

첫째, 이식되기 이전 불교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전파된 불교가 있는데, 이민자들이 고향에서 믿던 종교를 그대로 믿고자 절을 짓고 스님을 모신 경우이다. 이런 불교를 일러 서양에서는 ‘수하물 불교(Baggage Buddhism)’라 하는데, 새 지역의 문화에 맞게 전파하려는 노력을 보이지 않기에 발전이 미미하다. 둘째는 ‘백인 불교(White Convert Buddhism)’라 하여 동양인이 아니라 자국민이 불교를 배워 스님이나 법사가 된 후 가르침을 펴는 경우이다.

서양에서 불교 발전을 주도하고 있는 것은 후자이다. 수많은 저술이나 연구도 당연히 후자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서양 불교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생활 불교’이다. 역사적으로 선불교의 전통에 젖어 있던 우리 나라에선 세간에 관여하지 않는 불교, 세간과 떨어진 불교가 주축을 이루었던 게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불교가 점점 어렵고 현학적이 되고, 민중의 삶에 직접적인 답을 주지도 못하고, 현대의 삶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그런 종교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더욱이 어린이·청소년에 대한 교육과 포교를 등한시하다보니 새로운 인적 자원이 충원되지 못했고, 노보살들만이 불교를 지키는 파수꾼이 되었다. 이들은 오랜 습성대로 불교를 오직 기복신앙으로만 아는 면이 많아 문제가 되고 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서양인들이 불교에 적극적인 관심을 갖게 된 때는 1970년대였으며, 그 계기 또한 우리와는 다르다. 70년대에 한국인들이 서양인들의 삶의 수치적 지표, 즉 높은 GNP 숫자, 외부적 가치를 따라잡기 위해 질주할 때 이들은 이미 가던 길에서 완전히 유턴을 하고 있었다.

이제까지의 문화와 가치관에 전반적인 의문을 제기하고 적극적으로 대안을 찾고 있었다. 60년대 히피족으로 표현된 반문화, 반지성주의가 계속되고 있었고, 대안 의학, 대안 교육 등 이른바 기존의 문화, 삶에 대한 대안이 적극적으로 모색되고, 발전되고 있었다.

서양인들이 이러한 상황에 처하게 된 사회적, 문화적 조건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불교의 어떠한 면모가 서양인이 당면했던 문제와 사고방식에 특히 어필했던 것일까? 첫째, 서양 문명의 가장 중요한 개념이었던 개인주의와 자본주의가 한계에 부딪친 것이다. ‘나 세대(Me Generation)’라고 해서 모든 것을 ‘나’를 중심으로 살다보니 그 ‘나’가 주체할 수 없는 골치 아픈 것이 된 것이다. 또한 물질적으로 더 나은 것을 더 많이 가지면 행복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쌓인 물건에 오히려 소유당한 듯한 삶이 되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정신적으로는 사유(思惟)의 끝을 본 것이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하여 물질과 정신을 이원화하고 생각과 이성을 인간의 상위 개념으로 놓은 이후부터 지성에 더 중점을 두고 학문과 철학이 발전해왔고, 전문화·분석화·환원주의로 학문과 사상이 발전했는데 그 한계를 확실히 본 것이다.

둘째, 물리학의 발달, 특히 양자역학의 발달로 인해 이성적, 합리적인 사고로도 불교의 공(空)·불이(不二)의 원리를 이해할 수 있는 바탕이 정립되었던 것이다. 사실 양자역학이 발달되기 이전부터 이미 빛은 파동이기도 하고 입자이기도 하다는 불이의 이론이 정립되어 있었다. 이후 아인슈타인이 물질과 에너지는 대립개념이 아니라 상호 변환할 수 있는 것, 즉 물질은 에너지로 변할 수 있고 에너지는 물질로 변할 수 있다는 불이의 개념을 다시 확인해 주었다. 여기서 더 나아가 모든 것은 에너지로 표현될 수 있다, 공간은 에너지가 희박하게 존재하는 것이고, 고체는 에너지가 더 긴밀히 응축된 것이라는 설까지 발전했다.

이는 불교에서 모든 것은 공(空)하다는 가르침과 너무나 흡사한 설명이다. 이를 더욱 뒷받침해주는 연구는 노벨물리학 수상자 겔만(Murray Gellmann)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는 원자보다 더 하위 개념의 입자인 쿼크(quark)를 발견했고, 쿼크의 단순성(simplicity)과 가장 발달된 생명체 중 하나인 재규어(jaguar)의 복잡성(complexity)이 다른 것이 아니라, 쿼크 속에서 재규어가 보이는 것임을 그의 저서 《쿼크와 재규어》에서 밝혔다. 즉 《화엄경》에서 말하는 하나(一)는 모든 것(多)으로 통하고 모든 것은 하나로 통한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셋째, 사람들의 스트레스 수위가 다른 어떤 것으로도 극복할 수 없을 만큼 높아졌다는 것이다. 인간의 생활권이 점점 더 흙과 멀어져가고 직업 역시 세분화되다 보니 인간의 소외가 가속화되고 몸 따로, 마음 따로의 경향이 극에 달했다. 더구나 세상이 변하는 속도가 너무나 빠르다 보니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불안해하고 괴로워하는 사람도 속출했다. 70년대에 들어 불교 명상이 기공과 함께 스트레스 치료와 예방에 효과적임이 판명되면서 불교에 대한 관심이 가속화됐다.

넷째, 불교가 창조주가 있다고 믿지 않는다는 것이 서양의 무신론자, 불가지론자에게 어필됐다. 과학이 발달하면서 기독교의 교리가 과학적, 합리적 논리와 모순된다는 점이 밝혀진 데다가 근본주의 기독교도들의 극단적이고 편협한 신앙 행위 때문에 사람들은 많이 지쳐 있었다. 더 이상 내리누르는 신, 억압적인 신을 모시고 싶지 않은 마음이 팽배해 있었다. 그런데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외친 붓다를 본 것이다.

그리고 불교의 업설(業說)에서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의미를 발견하였다. 전생에서 지은 업이 현세에 영향을 미친다는 업설을 해석하는 관점이 두 가지로 나타나는데, 이는 컵에 물이 반이 있을 때 이를 ‘반이 있다’고 보느냐 아니면 ‘반이 없다’고 보느냐 하는 것으로 비유될 수 있겠다. 한국에서는 ‘반이 없다’고 보는 편이 우세해 불교가 허무적이고 세상을 등지고 초연하게 사는 것으로 많이 인식되었음에 반하여, 서구에서는 이를 오히려 적극적으로 해석하였다.

‘반이 있다’는 것은 내가 내 운명을 적극적으로 개척해 나갈 수 있다는 뜻이다. 서양인들은 자신의 의지와 노력에 의해 운명, 삶을 향상시킬 수 있다는 것을 불교의 업설에서 발견한 것이다. 달라이 라마는 바로 서양인의 이런 마음을 꿰뚫고 있기 때문에 불교는 일종의 무신주의이며 동시에 뭇생명을 고루 소중히 여기는 일종의 휴머니즘이라고 말한다.

다섯째, 불교의 융통성과 포용성이다. 불교는 문학과 예술로 전해질 수도 있고 철학으로 전해질 수도 있다. 독일에서는 쇼펜하우어, 하이데거가 철학으로, 막스 베버가 (비록 부정적이기는 하지만) 학문으로, 이후 1950년대에 헤르만 헤세가 《싯다르타》라는 소설을 써서 전세계에 불교를 알리는 역할을 했다. 미국 대중에게 불교를 전한 사람들은 잭 캐루악, 앨런 와츠, 앨런 긴즈버그, 게리 스나이더 같은 비트(Beat)의 문인들이었다. 선불교가 서양에 전해질 때는 참선만이 아니라 다도·검도·합기도·꽃꽂이·서예 등이 선의 일부로 전해져서 어필됐다.

티베트 불교는 탕카 같은 화려한 미술과 신들린 것 같은 역동적인 의식으로 서양인에게 처음 알려지기 시작했다. 영화 쿤둔을 보았다면, 가장 인상적으로 되풀이된 것이 아름다운 만달라와 신관의 접신의식이었음을 기억할 것이다. 부처님은 법으로 들어가는 문이 8만4천 개가 있다고 말씀하셨고 틱닉한 스님은 오늘을 사는 우리는 계속해서 더 많은 문을 발견해 후세에 전해야 한다고 했다. 단적으로 말해서 불교에서는 교조주의가 없다. 불교 내에서도 각 종파간의 포용성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질 뿐만 아니라 타종교에게도 불교만큼 포용성을 보이는 종교는 없다. 불교의 이러한 포용성은 오늘날 서양에서 매우 신선한 장점으로 부각되고 있다. 종교간 화합회의를 주재하는 것도 불교 쪽이 많이 하고 있다.

여섯째, 티베트와 동남아 일대의 정치적 불안으로 수많은 불교 지도자들이 유럽과 미국으로 가서 활동을 편 것이 서양에서 불교가 발전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 베트남의 틱?한 스님은 조국에 돌아갈 수 없는 몸이 되어 해외에서 적극적이고 모범적인 포교활동을 했다. 그런가 하면 타일랜드의 아잔 차, 슐락 시바락사 박사, 캄보디아의 간디라 불리는 마하 고사난다, 미얀마의 아웅산 수지, 스리랑카의 아리야라트네 박사, 인도의 암베드카 박사 등은 자국 내에 불교단체를 건립해서 불교를 배우고자 하는 서양인들에게 큰 감화를 주었다.

이들은 해외에 지부를 설치하여 활동영역을 확대하기도 했다. 일곱째, 불교의 변신이다. 위의 아시아권 스님들과 이분들이 키워낸 서양인 제자들은 불교를 전하는 데 기존의 전통적 방식을 고집하지 않았다. 이들의 노력에 의해 서양인들이 불교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고, 불교는 ‘아시아의 옷(Asian garb)’을 벗고 서양의 땅에서 자랄 수 있게 되었으며, 변형된 모습에도 불구하고 불교의 정수는 그대로 전해질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다양한 방면에서 불교 인구의 저변이 확대되었다.

1990년대 중반을 기준으로 보면 미국의 불교도는 3백만∼4백만 명으로 총인구의 1.6%를 차지하고 있다. 2위는 1백만 명으로 총인구의 0.7%를 차지하는 러시아이고, 3위는 65만 명으로 총인구의 1.15%를 차지하는 프랑스이다. 4위는 18만 명으로 총인구의 0.3%를 차지하는 영국이고, 5위는 15만 명으로 총인구의 0.2%를 차지하는 독일이다.

총인구 중 불교도가 차지하는 비율로 보면 미국이 1위, 프랑스가 2위이며 비록 불교도의 수는 1만4천명밖에 안되지만 총인구의 0.8%를 차지하는 오스트레일리아가 3위를 차지한다. 불교 단체의 수는 어떠한가? 영국에서는 79년에 75개이던 불교단체가 97년 340개로 약 5배 증가했고, 독일에서는 75년에 40개이던 것이 97년엔 400개로 늘어 일약 10배로 증가하는 비약적인 발전을 보였다.

불교도의 수로 보나 비율로 보나 단연 압도적인 1위를 차지하는 미국에서는 90%의 단체나 수행센터가 모두 70년대와 80년대에 생겨났다고 한다. 미국은 이제 불교를 이해하기 위해 외국어를 배우고 이질적으로 다른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 공부하던 초기단계를 넘어서서 미국불교의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사람을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그 무엇보다도 사람이다. 문화적으로 매우 이질적인 서양에서 불교가 이만큼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은 강렬한 카리스마를 가진 불교계의 큰스님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달라이 라마, 틱?한 스님, 87년 작고한 트룽파 린포체는 세계 불교계에 길이 빛날 큰별들이다. 이 큰스님들이 주최하는 강연회와 명상수련회에는 불교신도만이 아니라 비신자의 참여도 아주 활발하다. 또한 이분들은 한 종파의 불교도만 따르는 것이 아니라 종파를 초월한 모든 불교도들도 많이 따른다는 게 특징이다. 이 세분의 공통점은 첫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강렬한 개인적 매력, 그냥 거기 있기만 해도 사람을 끌어들이는 흡인력을 가졌다는 것이다.

둘째, 이분들은 가르침의 매개체인 언어에 능통한 분들이다. 달라이 라마는 본래 자국에서 집중적인 영어 교육을 받았으며, 틱?한 스님은 미국의 프린스턴 대학에서 수학했고 컬럼비아 대학에서 강의도 하였다. 트룽파 린포체는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에서 비교종교학을 공부했다. 이분들은 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했을 뿐만 아니라 어려운 불교를 쉽게 전달하기 위해 전통적인 불교 용어를 떠나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새로이 창조했다.

틱?한 스님은 인간이 ‘연기적(緣起的) 존재’라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연결된 존재(interbeing)’라는 말을 만들었고 ‘삶이 바로 불교’라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참여불교(engaged buddhism)’라는 말을 만들었다. 달라이 라마는 ‘보리심’ 대신 ‘보편적 책임감(universal responsibility)’이라는 말을 쓰고, ‘불교’라는 말 대신 ‘사랑과 자비가 내 종교’라고 하고 있다. 트룽파 린포체는 티베트 불교 특유의 원색적인 맛을 창조적인 언어로 표현해 수많은 사람들을 기쁘게도 하고 경악하게도 한 사람이다.

그가 아니면 누가 ‘광기 속의 지혜(crazy wisdom)’ ‘영적 물질주의(spiritual materialism)’ ‘부정적인 부정성(negative negativity)’ 같은 말을 만들겠는가? 셋째, 이분들은 아무리 많은 사람들을 대할지라도 모두를 마치 처음 만나는 사람처럼 신선하게 환영해주는 자비로움을 가지고 있다. 일례로 달라이 라마는 73년 인도의 부다가야에서 열렸던 칼라챠크라 입문식 후 개인적 축복을 받으려고 줄을 선 15만 명의 사람들에게 며칠 동안이나 처음과 같은 미소와 따스함으로 대했고, 틱닉한 스님은 누가 차를 대접하든지 늘 ‘세상에서 처음 맛보는 차’ 인 듯이 그렇게 마셨다.

우리는 흔히 불교는 단순히 철학이나 종교가 아니라 ‘삶의 기술’이라고 얘기하면서도 실제로 그렇게 실천하지는 못하는 게 사실이다. 불교가 일상의 삶 속에서 구현되는 것이라는 것을 다각도로 보여주고 있는 것은 서양인들이다. 그들은 아직 원숙미를 기대할 수는 없지만 의욕과 실험정신이 풍부하다. 바로 그렇게 어린아이와 같은 신선한 눈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고 그 안에서 경이를 발견하고 그 안에서 온전히 머물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닐까. 실천이 없는 사상은 이론이고 철학일 뿐이다.

삶 속에서 불교의 진리를 실천하고 수행함으로써 이원화되었던 삶, 지성과 이성, 직업과 취미 등 양극으로 갈라졌던 삶을 이제 치유하고 하나로 일치시키는 데 서양인들은 아주 적극적이다. 그러므로 이들이 가꾸고 키워나가는 수행단체를 봄에 있어서 전통적인 한국적 개념의 선방만을 찾는다면 그것은 공정하지 못할 것이다. 본고에서는 부처님이 펴신 삼학의 수행에서 다만 정(定)만이 아닌 계와 혜를 수행하는 단체도 살펴볼 것이며, 더 나아가서 사회와 자연을 치유할 수 있도록 돕는 보살들의 수행단체와 바르게 사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이상을 실천하는 불교단체도 살펴보려 한다.

 

2. 프랑스의 플럼 빌리지와 틱냣한 스님

프랑스의 남서쪽 지중해의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해바라기가 노랗게 익어가는 드넓은 평원에 전통을 자랑하는 보르도 포도주의 고향이 있다. 바로 이 보르도 지방에 틱?한 스님의 플럼 빌리지가 있다. 플럼 빌리지의 동쪽은 해바라기 그림으로 유명한 화가 고호가 살았던 프로방스이다. 플럼 빌리지는 ‘자두 마을’이란 뜻이다. 이곳엔 정말 자두가 있을까? 있다. 1,250그루의 자두나무에서 나온 자두는 이곳의 수입원 중 하나다.

1982년 스님은 수십년간 키워온 꿈을 이루기 위해, 영적인 오아시스를 마련했다. 현대인에게 알맞은 불교를 전해주기 위해 임제종(臨濟宗)의 분파인 접현종(接現宗)을 창설하고, 또 승가와 재가가 고루 수행할 수 있는 수행센터를 설립한 것이다. 이곳 플럼 빌리지에 매년 찾아드는 1000여 명의 방문객 중 반은 베트남인이고 반은 서양인이다. 플럼 빌리지에는 ‘빨리 빨리’도 없고 ‘많이 많이’도 없다. 처음 이곳에 온 사람들은 TV와 오락이 없고, 말도 많이 하지 않고, 하루 중 묵언을 몇 시간씩 해야 하고, 특히 식사 때 묵언을 하는 것에 당황한다고 한다. 집중적으로 명상을 많이 시키지도 않고 법회를 많이 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곳에선 무엇을 배우는가? 바로 팔정도의 하나인 정념(正念), 자신이 하는 모든 것을 깨어 있는 눈으로 보고 깨어 있는 마음으로 아는 정념을 24시간 실천하는 습관을 붙이는 것이다. ‘밥 먹을 때 밥 먹는다는 것을 알고, 잠잘 때 잠잔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틱?한 스님은 플럼 빌리지에 있을 때 가끔 공양간에 가서는 일하고 있는 사람에게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묻는다고 한다. 스님이 그것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 사람에게 정념을 일깨워 주기 위해서다. 이곳에서는 농사를 친자연적으로 짓는다. 화학비료나 살충제를 전혀 쓰지 않는다. 자두나무 잎이나 양배추를 먹는 민달팽이를 제거하기 위해 이곳 사람들은 민달팽이를 잡아 깡통에 넣어서는 다른 야산에 옮겨준다고 한다.6)  6) 틱냑한 외 지음, 《조화의 여섯 가지 원칙, 육화법》(애너벨 레이티, 양문출판사, 2000), p.254. “이 세상은 나의 사랑이며 또한 나다.”

방문자는 나무와 채소와 풀이 많은 이곳의 유유하고 친자연적인 환경에 자연스럽게 젖어들어 몸과 마음을 쉰다. 행선(行禪)을 위해 만든 오솔길 입구에는 “…… 그대 발걸음마다 서늘한 바람이 일고, 그대 발걸음마다 아름다운 꽃이 피네……”라고 쓰여 있다. 흙과 지구, 즉 자연과 인간의 만남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깨닫게 해주고 있는 것이다. 가족과 어린이를 중시하는 스님의 배려가 가장 돋보이는 것은 한 달 동안 지속되는 여름 수련회이다. 여름 수련회에서 아이들은 명상·다도·법회 등 모든 행사에 참여할 기회가 있다. 스님은 처음 10분간은 아이들을 대상으로 말씀을 한다.

10분이 지나면 아이들은 자유롭게 밖에 나가 뛰어놀 수 있다. 틱?한 스님은 어린 왕자와 시인과 관세음보살을 합쳐놓은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스님은 물론 비구이지만 스님에게선 깊은 여성성이 느껴진다. 괴테가 파우스트에서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구원하리라.” 했을 때 그 여성적인 것이란 외형적인 것이 아니라, 만물을 끌어안아 포용하고 키워주는 그러한 여성성이었으리라. 바로 그러한 것이 스님에게서 느껴진다. 틱?한 스님은 참여불교(Engaged Buddhism)라는 말을 처음 만들고 ‘행’하는 불교를 주창한 분이다.

참여불교의 특징은 첫째, 정념(正念), 깨어 있음으로 삶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고 듣는 것이다. 둘째, 나와 이 세상이 깊은 차원에서 하나라는 것이다. 셋째, 일단 제대로 본 후에는 상응하는 ‘행’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스님은 아마도 현재 세계적으로 활동중인 큰스님들 중에서 사회변화를 위한 조직적 활동에 가장 경험과 조예가 풍부한 사람일 것이다. 1960년대 베트남전에서 죽어가는 베트남 국민을 살리기 위해 공산측도 자유측도 전쟁을 중지하라는 평화운동을 펼쳤다. 그러다가 60년대 중반 미국으로 가서 강연회를 통해 평화를 호소했다.

미국에서 70년대에 불교 붐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그 터를 일구었던 사람이 바로 틱닉한 스님이다. “불교는 세상의 모든 것에 관련되어 있다(All Buddhism is engaged).”는 것이 틱?한 스님의 생각이다. 접현종의 주축을 이루는 교리에는 여섯 가지가 있다.

첫째, 불교는 이미 참여하고 있는 불교이다. 아무런 관련 없이, 참여하지 않고 있다면 그건 이미 불교가 아니다. 둘째, 나는 연결된 존재라는 지혜, 즉 나는 개별적인 나가 아니라 개별적 나가 공(空)하다는 지혜와 무상함은 참여불교의 수행과 평화창조의 근본이다. 셋째, 사회적으로 참여하는 불교 수행에는 깨어 있음의 수행과 사회봉사와, 불의를 줄이고 멈추기 위한 비당파적인 지지가 포함되어야 한다. 넷째, 참여불교는 우리가 삶을 사는 법이다. 평화란 단지 전쟁이 없는 것이 아니다. 평화란 우리 일상생활의 모든 행(行)에 포함되어야 한다. 다섯째, 가르침과 수행은 시대와 지역에 합당해야 한다. 여섯째, 우리는 쉬지 않고 모든 것으로부터 배운다.

1995년 스님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그리스도교 여성해방 신학자인 정현경 교수가 새 종파를 세운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스님은 자신이 임제종의 스님으로서 전통을 지속해 나가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접현종은 새 종파가 아니라 다만 임제종이라는 고목에서 뻗어나온 새 가지일 뿐이라고 대답했다. 이 새 가지는 재가신자와 스님들 사이에 중요한 다리가 될 것이며 현 시대의 어려움과 괴로움을 잘 대처해 나갈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더불어 일부 사회운동가들이 ‘신은 가난한 자의 편’이라고 주장하는 데 대해 스님은 “부자도 고통이 있다. 신은 어느 편을 드는 것이 아니라 모두를 포용한다. 고통의 근원을 찾아 그 상황을 일신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 이분법적인 사고는 오직 고통만을 낳을 뿐이며 오직 사랑과 이해만이 최상의 무기이다.”고 대답했다.

1982년 플럼 빌리지를 설립한 이후 이곳은 계속 성장해 98년에는 5개의 건물과 상주 인구가 100여 명인 단체로 컸다. 평소 플럼 빌리지를 주축으로 하는 핵심 멤버는 승가와 재가를 합쳐 500여 명에 달한다. 98년 현재 접현종의 법사와 스님은 75명이고 전세계에 퍼져 있는 수행 승가는 300여 개가 되었다.

90년대에는 미국 버몬트 주에 단풍림 승원(Maple Forest Monastery)을 설립하고 인근에 그린마운틴 수행원(Green Mountain Dharma Center)을 세워 승가와 재가를 공히 교육하고 수행하도록 하고 있다.

 

3. 영국의 칫타비베카 숲속 승가

1992년 작고한 아잔 차는 부처님 당시처럼 숲속 생활을 하는 태국의 큰스님이다. 부처님 당시 사문들이 했던 그대로 마을에서 탁발하고 숲에서 참선하는 이들은 숲속 수행자라고 불린다. 아잔(Ajahn)은 태국어로 스님이라는 존칭이기에 따로 스님의 호칭을 생략한다.

그는 늘 혼자서 숲속에 들어가 명상하고 고행을 했고, 그렇게 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도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일단 승가로 돌아와서 며칠만 지나면 다른 사람과 함께 지내는 것이 너무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중에는 어려운 것을 더 많이 공부해야겠다 싶어 승가에 더 오래 머물러 수행했다. 후에 그는 제자들을 가르칠 때 승원에 모아놓고 단체로 사는 훈련을 집중적으로 시켰다.

혹자는 아잔 차의 제자들이 명상을 별로 하지 않는다느니, 들에서 일만 한다느니 하고 비난했지만 아잔 차는 그 방법을 고수했다. 승가 공동체의 단체 생활에서 계율을 지키며 생활하는 것 자체가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며, 진정한 수행은 생활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숨쉴 시간이 있다면 명상할 시간도 있는 것이다. 걸을 때도 숨쉬고 서 있을 때도 숨쉬고 누워 있을 때도 숨쉬지 않는가? 그렇게 하면 된다.” 아잔 차는 숭산 스님과 교류도 하고 그의 저서에 숭산 스님이 서문을 쓸 정도로 친분이 있던 사이다. 아잔 차는 체구도 크고 호방했으며 짧고 힘있는 말로 법을 전달해 서양인 제자가 많았다. 일례를 하나 들어보자. 한번은 아잔 차가 제자들에게 지팡이를 보여주며 물었다. “지팡이 크기가 어떠한가?”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자 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이 지팡이가 사용되는 곳에 따라 달라지지 않겠는가. 더 큰 지팡이가 필요하다면 이 지팡이는 작게 여겨질 것이요, 작은 지팡이가 필요하다면 이 지팡이는 크다고 여겨질 것이다. 따라서 지팡이는 크지도 작지도 않다. 크기가 어떠한가는 인간의 욕망의 산물이다. 번뇌는 이렇게 해서 일어나는 것이다.” 1977년 아잔 차는 영국 승가 후원회(English Sangha Trust)의 초청으로 영국에 왔다. 이때 10년간 아잔 차의 지도를 받은 영국인 수제자 아잔 수메도를 동행했다.

아잔 차는 곧 귀국했지만 영국에서 다르마를 구하는 열기가 뜨거운 것을 보고 아잔 수메도를 불교도가 보시한 아파트인 헴스테드 승원(Hempstead Vihara)에 남기고 갔다. 법을 전하되 태국에서 숲속 수행자들이 하던 그대로 전하라는 스승의 명을 받고 아잔 수메도는 아침 저녁으로 명상을 지도했다. 그리고 매일 아침 아파트를 나와 인근의 공원으로 탁발을 나갔다. 불교를 전혀 모르고 탁발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이곳에서도 꼭 탁발을 나가야 하느냐고 묻자 스승은 대답했다.

“그밖에 다른 어떤 방법으로 법을 전할 수 있단 말이냐?” 아무도 공양을 주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수메도는 매일 아파트 주변과 공원으로 탁발을 나갔다. 그렇게 몇 달을 반복하던 어느 날 한 노인이 공원에서 물었다. “도대체 매일 그렇게 나와서 무엇을 하시는 거요?” “예, 저는 불교의 사문으로서 이렇게 아침마다 주변을 돌며 주민들도 만나고 부처님 말씀을 전하고 주민들이 부처님께 공양을 올릴 수 있는 기회도 만들고 있습니다.” 그렇게 얘기를 주고 받다가 노인은 이들이 제대로 수행을 하려면 숲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흔쾌히 숲을 기증했다.

그렇게 해서 영국 남부에 있는 웨스트 서섹스(West Sussex)에 위치한 오염되지 않은 아름다운 해머우드(Hammerwood) 숲속 108에이커의 땅에 숲속 승가(Forest Sangha) 최초의 승원인 칫타비베카(Chittaviveka, ‘고요한 마음’이라는 뜻) 승원이 건립되었다. 1984년에는 두번째 승원인 아마라바티(Amaravati, ‘不死界’라는 뜻)를 설립하고 아잔 수메도가 승원장이 되었다. 이어 영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 승원이 늘어났다. 영국에 노섬버랜드(Northumberland) 승원과 드본(Devon) 승원, 스위스에 칸데르스탁(Kanderstag) 승원, 이태리에 세자로마노(Sezza-Romano) 승원, 뉴질랜드에 웰링턴(Wellington) 승원, 오스트레일리아에 서펜틴(Serpentine) 승원 등이 설립되었다. 미국에는 캘리포니아의 멘도치노 카운티(Mendocino County)에 소재한 래드우드 밸리(Redwood Valley)에 120에이커의 숲을 기증받았다.

숲속 승가의 스님들은 오늘도 전세계에서 그 개조(開祖) 아잔 차의 단순하고 솔직하고 직접적인 동시에 생활과 밀접히 연결된 가르침을 펴며 법을 전하고 있다. 아잔 아마로는 명상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명상 수련회나 선방에 장기간 있는 것도 좋지만 이것의 단점은 명상과 생활을 분리시킨다는 것이다. 명상은 마음 안에 여유 공간을 만들고 이를 광대하게 넓히는 것과 같다. 좀더 쉽게 말하면 실내 사격장에 가서 오리를 쏘아 넘어뜨리는 것과 같다. 다만 명상에서 쏘아 넘어뜨리는 것은 단순한 오리가 아니라 ‘생각’이라는 오리와 ‘감정’이라는 오리인 것이다.”

“명상수련회에서만 명상을 하고 평소 생활에서 하지 않는 것의 단점은 거리에서 사격전을 벌여 적을 소탕하는 것과 같다.사격이 끝난 후 거리는 깨끗해 보이지만 실은 게릴라들이 복병으로 숨어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수련회에선 마음이 깨끗해진 듯 하지만 세상 속으로 나오면 다시 마찬가지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아잔 차가 늘 강조했듯이 같은 공동체에서 탁발도 하고 울력도 하며, 즉 몸에 흙을 묻히며 수행을 실천해야만 진정한 평화가 온다.”

 

4. 직업을 통해 다르마를 실천하는 영국의 서구 불교종의 친구들

‘서구 불교종의 친구들(The Friends of the Western Buddhist Order: FWBO)’은 불교가 서양으로 가서 그 모습을 바꾼 가장 전형적인 예이며, 서양인에게 맞는 불교를 새로 창조했다는 칭송이 자자한 단체이다. 부처님이 설하신 팔정도 중에서 정명(正命) 즉 바른 직업으로 생계를 삼는 것은 생활 불교가 별로 발달되지 않는 한국과 동양에서는 별로 연구되거나 주목받지 못했다. FWBO는 바른 직업을 통해 새로운 이상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단체이다. FWBO는 불교 센터(수행의 장), 거주 공동체(쉼의 장), 협동조합(일의 장)이라는 세 지부가 한 곳에 모여 서구 산업사회에서의 불교 사회를 축소판으로 보여주고 있으며,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살아 있는 모델 역할을 하고 있다.

FWBO는 1967년 영국의 상가락시타(Sangharakshita) 스님이 세웠다. 1925년 데니스 링우드라는 이름으로 노동 계급의 부모에게서 태어난 스님은 1950년 사미계를 받았다. 그는 인도 다질링 구역에서 〈마하 보디 저널(Mahaa Bodhi Journal)〉의 공동 편집장을 맡으면서 티베트 인들에게 금강승도 배우고 암베드카 박사의 불가촉천민 불교 개종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렇게 인도에서 20년간 불교 운동을 한 후 67년 영국으로 온 상가락시타 스님은 큰 꿈을 품게 된다.“서구 문명의 상황에 맞는 정신 운동을 펼치자. 고도로 산업화되고 도시화된 상황에 맞는 현대적 불교를 창조하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스님은 여러 불교 종파의 이론과 방법을 차용했으며 동시에 서구문학과 철학의 거장들인 윌리엄 블레이크·괴테·니체 등의 작품도 사용했다. 다르마의 이해를 돕기 위해 불교 밖에서도 영감의 원천을 두루 찾으려 한 것이다.

FWBO의 목적은 “진정한 개인의 성장을 돕는 것”이며 동시에 “옛것 속에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다. 이러한 혁신적인 이상이 오늘날에도 공감을 얻을 수 있을까? 이들이 주장하던 환경문제는 이미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가적 차원의 문제로 인정되었다는 사실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FWBO 회원들은 어떻게 정명을 실천하고 있을까? 소극적으로는 특정의 해로운 직업을 갖지 않도록 조심하기도 하지만 보다 적극적으로는 일하는 시간을 자신의 영적 발전을 위해 건설적으로 쓰고자 한다.

첫째, 청정한 직업이란 불교적 견지에서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건강하고 유익하며 기술적인(kusala) 직업을 말한다. 유익하지 않은 직업에는 경박한 사치품이나 불량품을 만들거나 파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또한 광고계에 종사하는 것도 별로 건설적이지 못한 것으로 본다. 의미 있고 유용한 직업, 개인의 영적 발전과 사회에 공히 유익한 직업, 기본적이고 유용한 상품이나 서비스를 고수준으로 제공하는 직업을 중시한다. 둘째, 가능하면 어떤 생산이나 서비스 활동은 혼자 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같은 이상을 가진 그룹 내에서 서로 격려하고 영감을 주며 활동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다. 또한 권위적 서열체계 없이 행동하고 관리하는 법을 배우고 책임을 지고 결정을 내리는 법도 배운다. 협동조합이라는 체제와 원칙 하에서 일을 하면 자연히 긍정적 근로 환경이 조성되어 즐겁지 않은 일조차도 웃음지으며 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팀 단위로 결성한 것이 건강식품 가게, 채식전문 식당, 인쇄소, 보험사, 조경사이다. FWBO의 주력산업은 캠브리지에 소재한 윈드호스 무역사(Windhorse Trading)이다.

선물가게를 도매, 소매로 운영하는 이 무역사는 92년에 성장률 37%를 기록해 신속성장 100대기업에 속했고, 96년에는 매출 37% 신장, 이윤 101% 신장률을 보였다. 97년에는 영국, 아일랜드, 스페인에 18개의 선물가게를 두고 불교도 170명을 전업직원으로 고용했다. 윈드호스 출판사는 영국에 본사, 미국·호주에 지사를 두고 불교와 관련 분야의 출판 사업을 하고 있다. 셋째, 협동조합에서 하는 작업은 효율적이어야 한다. 따라서 근로자를 착취하여 지치게 하지 말아야 하며, 동시에 근로자가 생활을 영위하고 다른 불교 복지사업을 도울 수 있도록 돈을 벌어들여야 한다.

보시와 소득에 대한 FWBO의 원칙은 “줄 수 있는 만큼 주고, 필요한 만큼 가져가라.”이다. 런던의 한 불교 식당에서 9년간 일해온 회원, 수바드라마티의 말을 들어보자. “매주 모든 사람은 일정한 주급을 받아요. 먹고 살 수는 있지만 저축할 만큼은 아닌 그런 정도죠. 어떤 사람이 좀더 돈이 필요하다면 팀 내에서 의논을 해서 지급해요. 저는 여태까지 돈을 더 달라고 하지 않는 것을 제 미덕으로 알고 살았어요. 거짓 없이 온 마음을 다해서 산 삶이에요.” 넷째, 정명의 원칙에 따라 사는 삶은 그 형태나 내용면에서만이 아니라 목적에서도 차이가 있다. FWBO 회원에게 있어서 자신이 불교도라는 것은 개인적으로 명상이나 가르침을 받아 영적 발전을 하고, 일을 하면서도 자신과 사회의 발전에 기여하는 동시에 정치사회적 활동을 하는 것도 포함한다. 대승에서 말하는 보살행이 바로 여기에 표현되어 있는 것이다.

서구 사회에서 다르마를 수행하기에 더 나은 조건을 만드는 것이 바로 정치사회적 참여로 해석되는 보살의 이타행인 것이다. 협동조합은 속되고 탐욕스런 환경과 FWBO 회원들의 영적 세계 사이를 잇는 다리인 것이다. 동시에 협동조합은 외부인들을 불교의 가르침으로 이끌고 그들에게 불교를 알리는 가교 역할도 한다.

다섯째, 가장 중요한 것은 정명에 따라 행하는 사업 덕분에 FWBO는 자급자족할 수 있고 따라서 이들이 바꾸려고 하는 ‘구(舊)사회’에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즉 켄 존스가 지적했듯이 정부의 정치체제나 경제기구에 재정을 의존하는 취약성 때문에 기껏해야 정치적 의의가 없는 보수노선 정도밖에 표명하지 못하는 아시아의 승가 같은 처지는 되지 않겠다는 것이다.

FWBO는 1970년대 말부터 해외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1978년에는 서부 인도에 암베드카가 이끄는 신불교도를 지원하기 위해 카루나 자선재단, 협동조합, 공예품 산업공장을 설립하였다. 이 단체들에는 FWBO 회원이 수천 명 있다. 8,90년대에는 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말레이시아·스리랑카·네팔·북아메리카·남아메리카·유럽 각국에 FWBO 프로젝트가 진행되었다.

전세계의 서구 불교종 회원은 82년에 187명, 97년에 700명으로 추정된다. FWBO의 후원자와 친구들은 10만 명 정도 된다. 97년 현재 영국에는 50개의 FWBO 도시 센터가 있고, 15개의 수련장이 있으며 다양한 정명(正命) 협동조합이 있다. 윈드호스(Windhorse: 타루초(經幡))라는 출판사를 설립해 왕성한 불교 출판 활동도 벌이고 있다. 서구 불교종의 회원들은 남녀, 기혼, 미혼 등 다양하다. 스님들처럼 금욕을 지키며 사는 사람도 있고, 직장을 가진 사람도 있으며, 종단 내에서 시간제나 전업으로 일하는 사람도 있다. 회원들 중 다수가 FWBO 센터 근처에 있는 거주 공동체에서 산다.

상가락시타 스님은 1997년 FWBO 종정 자리를 내놓고 대신 13명의 원로 지도자로 구성된 ‘지도 위원회(Preceptor’s College Council)’에 수계(授戒)와 종단의 지도를 의뢰했다. 설립자가 부재한 경우에나 사후에도 종단이 제대로 운영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5. 독일의 붓다 하우스와 아야 케마

“나의 철학을 진리의 기준으로 삼는다면 세계의 종교에서 가장 뛰어난 것이 불교라고 나는 생각한다.” 19세기의 위대한 철학자 쇼펜하우어(1788∼1860)가 한 말이다. 인도철학과 불교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던 그의 사상은 이후 니체 같은 철학자, 토마스 만 같은 문학가, 바그너 같은 음악가에 영향을 미쳤다.

다른 철학가들이 모든 것을 포용하는 조화를 이야기하고 있을 때 그는 홀로 존재론적 차원에서 인간의 고통과 생의 딜레마를 깊게 숙고했으며, 융이 지적했듯이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적나라한 고통과 그로 인한 인간의 혼란, 열정, 악을 이야기할 수 있었던 용기 있는 사람이다.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불교를 ‘내세 중심의 고행주의’라고 보았고 ‘이 세상에 대해 무관심한’ 종교이며 ‘외부세계로부터 물러난’ 종교이며 ‘행동하지 않는 윤리’를 중시한다고 했다. 베버 덕분에 서구에서는 불교를 이 세상에 관련된 행동을 하지 않는 허무주의로 보는 시각이 퍼졌고 오늘날까지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1951년 헤르만 헤세는 소설 《싯다르타》를 써서 불교와 힌두교 사상을 다시 한번 독일과 세계에 전하였다. 쇼펜하우어는 집안에 불상을 모셔 놓았고 하이데거는 말년에 일본식 선(禪)에 심취해 흑림(黑林) 속에 일본식 다실(茶室)을 닮은 은둔처를 지어놓고 일본의 대선사들을 초대했다. 이로 인해 하이데거는 본국에서보다 일본에서 훨씬 인기가 있고 인정을 받는 사람이 되었다.

불과 150년밖에 안되는 서양 불교의 역사에서 독일이 차지하는 위치는 특이하다. 일찍부터 불교와 접하여 불교를 철학, 역사, 학문, 예술로 전하는 개척자와 전달자 역할을 맡았던 긍정적인 면과 그들이 전한 불교의 이미지가 왜곡되어 있었다는 부정적인 면이 엇비슷하게 존재한다. 그러면서도 독일이라는 땅에 뿌리박고 불교를 수행하며 전하는 사람은 별로 없어 현재도 불교도가 서양에서 5위이며 이중 반은 베트남 이민들이라고 한다. 독일에는 티베트 불교의 승원, 미국의 피스메이커 오더, 틱?한 스님의 접현종에서 모두 지부를 설립했지만 독일을 중심으로 성장하여 세계로 뻗어나간 수행단체는 아직 찾지 못했다.

고빈다 라마(1898∼1986)는 인도의 타고르 대학에서 공부하면서 불교에 심취해, 원래 독일의 음악가였다가 미얀마로 들어가 스님이 된 니안틸로카의 제자가 되어 계를 받았다. 이후 티베트로 들어가 토모 게세 린포체의 제자가 되어 티베트 불교로 전향했다. 고빈다 라마는 그러나 독일이 아닌 인도에 아리야 마이트레야 만달라 불교종파를 세웠다. 화가이며 시인이었던 그는 각 지방을 돌아다니며 불교 강연과 전시회를 가지며 동양과 서양을 잇는 가교역할을 했다. 《구루의 땅》이라는 저술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베를린 동쪽 교외에 베를린 최대의 불교사찰인 ‘불교의 집’이 있다. 1917년 파울 달케 박사(1865∼1945)에 의해 창설된 이곳은 독일 불교의 역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기념비적인 곳이다.

여기서는 불교 강연회, 법회, 불교 관계 전시회가 연중무휴로 열린다. 본당 왼쪽에 증축된 도서관에는 수천 권의 불교 장서가 가득 차 있다. 스리랑카 스님들이 상주하고 있지만 모든 종파에 문호가 개방되어 있다. 독일인으로서 스리랑카에서 계를 받아 비구니가 된 아야 케마(Ayya Khema: Ayya는 스님이라는 뜻)의 일생을 보면 드라마보다 더 극적이다. 나치가 득세를 하던 시절에 유태인의 딸로 태어나 1938년 15세 때 200명의 어린이 피난단에 섞여 영국으로 떠나게 된다.

2년 후 상하이로 피난가 있는 부모와 합류하지만 2차대전의 발발로 인해 가족들은 다시 일본인의 포로 수용소에 갇히고 여기서 아버지와 사별을 한다. 미군이 진주하여 포로들이 해방되면서 4년 후 미국으로 이민, 결혼하여 1남1녀를 둔 아야 케마는 60년대에 남편과 함께 히말라야를 포함한 아시아 각국을 다니게 되고 여기서 명상을 배워 70년대에는 유럽 각국에 명상을 가르쳤다.

1979년 55세의 나이에 출가를 하게 된 스님은 스리랑카에서 니안포니카의 제자가 되었다.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에서 차로 2시간을 달리면 다라그 국립공원이 있는데 이곳에 숲속 승가의 승원인 왓 붓다 담마(Wat Buddha-Dhamma)를 설립했고, 1989년 독일에 붓다 하우스를 설립해 원장이 되었으며, 97년에는 독일 최초의 숲속 승가인 멧타 비하라(Metta Vihara)를 뮌헨에 설립하여 독일어로 비구계를 수계한 최초의 스님을 배출하였다. 스님은 많은 비구니 제자를 키웠고 여성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1987년에는 세계 최초의 비구니 국제 대회를 주관하여 열었다.

그로 인해 세계 여성 불교 단체 샤카디타(Sakyadhita: ‘붓다의 딸들’이라는 뜻)가 탄생했다. 87년 비구니로서는 최초로 유엔에 초청되어 불교와 세계평화에 대해 강연을 하였다. 쉽고 아름다운 말과 문체로 사람들의 가슴에 다가간 아야 케마는 영어와 독일어 저술이 25종에 이르며, 이중 일부는 7개 국어로 번역되었다. 우리 나라에는 스님의 자전적 일대기인 《이 생명 다 바쳐서》가 번역되어 있다. 《아무도 아닌 사람이 되어, 아무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 삶(Being Nobody, Going Nowhere)》은 크리스마스 험프리상을 받았다. 수년 동안 암과 투병하며 몇 차례의 수술을 받으면서도 에너지를 잃지 않고 활동을 하던 스님은 97년 자신이 설립한 독일의 붓다 하우스에서 입적하였다.

자신의 삶은 모든 것을 ‘놓아 버리는’ 하나의 커다란 과정이었다고 말하는 스님.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자신의 삶 구비구비에서 맞닥뜨린 어려운 일들은 바로 자신을 가르치는 자애로운 스승이었다는 뜻일 게다.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정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놓아 버릴’ 수 있음을 스님은 출가하기 전 아들이 말에서 떨어지는 일을 겪으면서 깨달았다고 한다.

2000년대를 맞아 불교계에서는 불교 페미니즘이 거세게 일고 있다. 불교가 서양에서 융성하기 때문에 그러하고, 또한 70년대에 불교를 수용한 세대 중 다수가 대학 졸업자 내지 대학원 졸업자 등 엘리트이고, 그러다 보니 더욱더 불교가 페미니즘에 기여할 수 있는 바가 무엇인지 고민하는 여성불자들이 많다. 그러나 현재 이 분야의 스승과 비구니 스님이 많이 부족하다고 한다. 아야 케마는 세계 최초로 비구니 스님을 단결시켰고 수많은 차세대 비구니 스님을 키워 불교 페미니즘의 초석을 놓았다는 면에서 중요한 공헌을 한 분이다. 남들이 은퇴하여 안락한 삶을 꿈꾸고 손자 볼 생각을 할 55세라는 나이에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했던 스님이 늘상 일러주었던 수행이란 어떤 것일까? “수행은 무언가 특별한 것이 아니다. 그저 자신의 온 몸과 온 마음일 뿐이다. 조금도 특별한 것이 아니다. 그냥 자신일 뿐이다.”

 

6. 미국의 샌프란시스코 선센터와 스즈키 순류 스님

캘리포니아의 소노마 산(山) 속 깊은 곳에 위치한 소노마 산 선(禪)센터에는 너무나 다른 분위기의 두 개의 부도탑이 있다. 첫번째 탑은 조용한 오솔길, 나무로 둘러싸인 아늑한 곳에 있다. 작은 돌을 원형으로 배치해 가장자리를 두르고 그 안에 아주 작은 정원을 꾸몄는데 그 한가운데 타사자라 강에서 끌어올린 커다란 황금빛 돌이 있다. 스즈키 순류 스님이 생전에 손수 골라놓은 돌인데 스님이 입적하자 탑으로 쓴 것이다. 이 돌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돌이라기보다는 좌선을 하고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곳을 방문한 사람들은 이곳의 아늑하고 조용한 분위기가 마치 스님을 친견하는 것 같다고 한다. 그리고 그 돌에 물을 붓고 《반야심경》을 욀 때 스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하다고 한다. “나를 보고 싶으면 이곳으로 오라. 그리고 좌선하라. 좌선하는 그곳에 나는 언제나 있느니. 고요히 바위처럼 그렇게 앉아 있으라.”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 사방이 탁 트인 곳에 화려한 붉은 빛의 목탑이 있다. 스즈키 스님의 탑과는 아주 다른 분위기의 밝고 역동적인 모습이다. 그 안의 그림을 보면 트룽파 린포체의 모습이 보인다.

선불교의 승원에 웬 티베트 스님의 탑이며, 왜 일본식 가사를 입고 있는 것일까? 트룽파 린포체의 부도가 여기 있는 것은 스즈키 스님과의 남다른 우정에 기인한 것이다. 이 부도를 세울 때 숭산 스님이 해박한 풍수 지식을 활용하여 그 자리를 잡아주었다 한다. 뿐만 아니라 일본의 일급 목수, 티베트의 최고 탕가 화가, 멕시코의 원주민 무당 등이 힘을 합치는 등 트룽파 린포체의 부도를 세우는 일은 글자 그대로 국제적 프로젝트였다. 1969년 스즈키 스님과 트룽파 린포체의 첫 만남을 한 목격자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샌프란시스코 선센터로 스님을 뵈러 온 트룽파 린포체가 스님에게 다가왔다. 린포체의 눈에는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수없이 많은 전생에 만나 같은 일을 해온 동지끼리 이 생에서 만나는 행운을 누리는 것처럼, 이들은 서로를 알아보았고 밀물처럼 다가오는 과거의 기억에 눈물이 터진 것이었다.”이후 71년 스즈키 스님이 입적할 때까지 두 사람은 짧지만 모든 것을 나누는 깊은 우정을 나누게 된다.

그리고 트룽파 린포체는 스즈키 스님에게 ‘법의 사자(Lion of Dharma)’라는 이름을 드리고 스즈키 스님은 트룽파 린포체에게 발우를 남겼다. 두 사람은 이 생에서도 서로간에 깊은 연대감을 느꼈다. 트룽파 린포체는 조국에서 망명한 사람이고 스즈키 스님은 57세라는 노령에 일본에서의 명망과 안락한 지위를 버리고 불법을 전하기 위해 미국으로 온 사람이다. 두 사람은 마치 미국 불교를 일으키는 사명을 두 어깨에 떠맡은 듯이 일을 했다. 미국의 불교도들은 말한다.

미국 불교라는 밭을 일군 사람은 스즈키 스님이다. 그러나 트룽파 린포체가 와서야 그 밭에서 눈에 보이는 수확을 거둘 수 있었다고. 두 사람을 보면 참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요소가 많이 있다. 스즈키 스님은 일본 조동종(曹洞宗)의 선승이고, 트룽파 린포체는 티베트 불교의 카규파-닝마파의 승려이다. 스즈키 스님은 가늘고 작은 체구이고 트룽파 린포체는 몸집이 큰 역사형이다. 스즈키 스님은 가능하면 말을 쓰지 않고 가르치는 방법을 택한 반면, 트룽파 린포체는 화려하고 역동적이고 역설적인 말을 난사했고 가르치는 방식 역시 변화무쌍했다.

한 사람이 아폴론적이라면 또 한 사람은 디오니소스적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를 보완하며 운명적인 동지의식을 느끼며 서로 도왔다. 실제로 두 사람은 같이 술을 마시며 대취한 적이 몇 번 있었다고 앨런 긴즈버그는 말한다. 스즈키 스님의 다비식 때 관 위에 티베트의 하얀 스카프를 올려놓은 후 큰 소리로 울부짖는 트룽파 린포체의 모습이 너무나 인간적이었다고 한다.

1965년 마리안 더비의 거실에서 몇 명이 좌선을 하는 것으로 시작한 하이쿠 선방은 큰 단체로 자라났다. 샌프란시스코 선센터, 산타 로사 시에 있는 소노마 산(山) 선센터, 산속에 위치한 수행 전문기관이며 아시아 밖에 처음 설립된 전문 승원인 타사자라, 유기농 농장과 명상 수련회, 일반인 교육을 하는 그린걸치 농원 선센터, 버클리 선센터, 카논도 선방, 도심 안에 위치한 초심사(初心寺) 등이 생겼다. 그린걸치 농원 선센터에서는 유기농 강의와 다도 강의도 하고 일반인들에게 불교강의도 한다.

또 엘더호스텔(Elderhostel)이라고 55세 이상의 장년층을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을 연중 수 차례 개최하는 것이 돋보인다. 5일간의 명상 수련회 동안 참가자는 참선, 불교 공부 외에도 선센터의 부엌과 농장에서 일을 하게 되며 이곳 거주 수행자와 비슷한 일과를 보내게 된다. 그린 걸치에는 유기농 수련생 제도가 있다. 이곳 8에이커의 농장에서 이들 수련생들은 4월부터 10월까지 6개월 간 공부, 실습, 참선을 고루 조합한 훈련을 받게 된다.

1주 30시간 일하고 5시간 수업 받고, 매일 참선하고, 2일간 계속되는 참선정진을 6개월에 한 번 하는 대신 이들은 숙식을 제공받고 약간의 용돈을 받는다. 봄·가을에 개최되는 7주간 참선에 참여하면 학점을 더 많이 취득할 수 있다. 수련은 농사 짓는 기술, 퇴비 만드는 법, 수확하는 법에서 파는 법까지 두루 가르친다. 농장의 일손도 덜고 학생들은 좋은 기술과 불교도 배우는 호혜적인 제도 같다.

샌프란시스코 선센터는 스님 사후에 리처드 베이커가 승원장을 맡고 있으며 2000년에는 새천년을 맞아 다달이 불교계의 기라성 같은 스님과 강사들을 모셔와 강연회를 열었다. 그 명단을 보면 피스메이커 오더를 이끄는 버나드 글래스맨 스님, 불교 명상을 스트레스 치료에 사용하는 의사 존 카밧진, 라마 수리야 다스, 송광사에서 스님으로 10년 수행하다 속인이 되어 영국으로 가서 가이아 하우스를 운영하는 스티븐 베철러, 참여불교의 맥신홍 킹스턴 스님, 저명한 불교 저자 실비아 부어스틴, 하와이의 다이아몬드 승가 원장 로버트 아이트켄, 피스메이커 오더의 존 핼리팩스 등이 있다.

“초심자의 마음에는 수많은 가능성이 있지만 전문가의 마음에는 별 가능성이 없다.” 스즈키 스님이 늘 하신 말씀이다. 좌선에 들어갈 때 늘 초심을 가져야 하며 그 초심으로 일상생활의 모든 행을 하라는 가르침이다. 스즈키 선사의 대표적 저서인 《선심 초심(Zen Mind, Beginner’s Mind)》은 스님이 매일 아침 15분 정도 말씀한 짤막한 강연을 마리안이 녹음하여 후에 출판한 것으로 미국의 선불교도들에게 고전과도 같은 책이다. 트룽파 린포체의 샴발라 인스티튜트에서 학생들에게 권유하는 독서목록에 티베트 스님들 것이 아닌 유일한 저술로 끼어 있는 책이다.

 

7. 미국의 샴발라 승원과 트룽파 린포체

트룽파 린포체는 티베트의 카규파와 닝마파의 11번째 활불(活佛)이다. 스루망 승원의 최고위 승원장으로서 18세라는 어린 나이에 신학과 철학의 박사학위에 해당되는 켄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천재적 언어 감각과 대담하고 격식이 없는 행동, 때로는 정상을 벗어난 행동으로 사람들을 당황하게 했다.

전통적인 비구나 스승의 이미지에 맞추기를 단연코 거부했으며 아시아와 미국의 문화를 창조적으로 혼합하여 사용했다는 트룽파 린포체. 그는 분명 괴각이었으며 아마도 한국에서는 경허 스님에 비유할 만 할 것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그가 왔기에 미국의 불교가 사방에서 쑥쑥 자라고 눈에 띄게 되었다고. 제자들을 가르침에 있어서도 단호했고 예측 불허하여 페마 최된 스님은 은사인 트룽파 린포체를 아무리 애써도 사랑할 수가 없어서 울었던 시절이 있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린포체는 어떤 틀에 매이는 것을 제일 싫어했던 것 같다.

예불법이나 어떤 의식을 가르치고 난 후 제자들이 그것에 익숙해질 때쯤 되면 린포체는 앞서 가르쳐준 것은 다 틀린 것이니 지금부터 가르쳐준 방식으로 하라고 했다고 한다. 황당하지만 스승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없는 제자들이 다시 두번째 방식에 익숙해질 때쯤 린포체는 다시 또 방법을 바꾼다. 그렇게 되풀이하다 보면 어느덧 제자들은 알게 된다고 한다. 아무것도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없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것을.

“자신을 창피하게 여기지 말라. 그것은 자신이 인간임을 부끄러워함과 같다.” 이렇게 말하면서 대중 앞에서 최악의 행동을 스스로 해보였던 린포체는 좋지 않은 생각이나 행동을 했을 때 그냥 좋지 않은 생각이나 행동이라고 하면 그뿐인데 그런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것은 진정 부정적인 것이라고 했다.

이를 트룽파 린포체는 ‘부정적 부정성’이라고 했고 아야 케마는 ‘이중고(double dukka)’라고 했다. 미술가, 시인이기도 했던 스님은 《광기 속의 지혜(Crazy Wisdom)》 《영적 물질주의를 헤치며 나아가기(Cutting Through Spiritual Materialism)》 등 총 17권에 달하는 저술을 했고, 번역서도 많이 내었다. 훌륭한 제자들도 많이 배출해 릭 필드(Rick Field)는 7권의 책을 냈고, 페마 최된 스님은 5권을 내었으며 그 밖에도 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크리스토퍼 퀸은 참여불교의 지도자들이 두 가지 특징이 있다고 했다. 첫째, 동양과 서양을 잘 조화시킬 줄 알며 둘째, 문화쇄신, 사회변화, 초종파적 세계 불교를 이루기 위해 싸운 운동가라는 것이다.

트룽파 린포체는 이 두 가지 조건을 완벽히 갖춘 사람이다.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비교종교학을 공부하고 1967년 스코틀랜드에 삼예링 명상센터를 설립한다. 그는 이때 승가를 떠나 결혼을 한다. 1970년 미국으로 온 린포체는 100여 개의 명상센터를 전세계에 세우고 콜로라도 주 불더 시에 서양 최초로 인가받은 불교대학인 나로파 불교대학과 샴발라 센터를 설립하고 격월간지인 〈샴발라 선〉을 발간한다. 샴발라 센터에서는 명상뿐만 아니라 불교 정신이 배어 있는 다도, 꽃꽂이도 가르친다.

또한 가장 중요한 샴발라 교육을 실시한다. 샴발라 교육은 트룽파 린포체가 개발한 것으로 종교라는 틀을 거치지 않아도 깨달은 사회를 만들 수 있도록 ‘깨달은 사람을 만드는 프로그램’이다. 샴발라 교육은 현시를 통해 그에게 내려진 ‘테르마’ 즉 숨겨진 비밀의 책에서 나온 것이다. 린포체는 그 책에 설명을 덧붙여 이를 5단계의 교육과정으로 만들었다.

이 과정을 마치면 이 사회에 만연한 지배의 정치학, 지배 중심의 인간관계에서 명료함, 온화함, 사랑, 건강한 정신에 바탕을 둔 인간관계로 변화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 교육은 세 가지 기본적 신조에 토대를 두고 있다. 첫째, 인간은 기본적으로 선하다. 둘째, 이 세상은 기본적으로 성스럽다. 셋째, 이 세상의 종교 전통은 사회적 문제를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 그는 이런 이상을 그의 저서 《샴발라:영적 전사의 성스러운 길(Shambhala:The Sacred Path of the Warrior)》에서 자세히 펼치고 있다.

나로파 불교대학은 1974년 콜로라도 주 불더 시에 설립되었다. 처음에는 여름 동안만 열기로 계획하여 강사진으로는 투룽파 린포체, 비트의 문인 앨런 긴즈버그, 심층 생태학의 그레고리 베이트슨, 하버드 교수였다가 구루가 된 램 다스 등을 확보했다. 과목으로는 명상·기공·탕카·다도·티베트 어·산스크리트 어·중관철학·심리학 등이 있었고, 밤에는 시낭송회·공연·토론·세미나 등을 하기로 했다.

200명 정도의 학생을 예상했던 그해 여름, 그러나 2000명이 몰려들었다. 릭 필드는 이것을 ‘의식의 우드스탁 축제’라고 불렀다. 이로부터 2년 후 나로파는 일년 내내 클래스를 열게 되었다. 약 23년이 지난 후에는 정식대학으로 인가를 받아 학사학위와 석사학위를 수여하게 되었다. 나로파 대학의 여름 글쓰기 교실은 국제적 명성을 얻고 있다. 비트의 문인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나로파의 문학 프로그램은 늘 성황을 이루고 있다. 나로파의 석사 학위는 불교학·글쓰기·노인학·참여불교·명상적 심리치료의 분야에서 주어진다. 모든 나로파의 학생들은 필수 명상과 선택 명상을 해야 한다.

그리고 주변도시의 병원, 양로원, 말기환자 보호소 등에서 실습을 하며 학점을 따도록 해 원리를 현장과 삶에 적용하는 교육을 병행하고 있다. 개인적인 자비심을 일구는 데 목적을 둔 이런 교육 프로그램들의 결과는 졸업생들의 활동을 통해서 확실히 성공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개인과 사회의 변화를 위해 이론과 실천을 하나로 묶어주는 나로파의 명상 중심 교육 프로그램은 참여교육이며, 대안교육으로서 미국 문화에 깊숙이 스며들고 있다.

 

8. 미국의 ZPO와 버나드 글래스맨 선사

1992년 1월 2일 미국 월스트리트 저널의 기업체 면에는 다음과 같은 헤드라인이 눈길을 끌었다. “선(禪)과 사람을 사랑하는 제빵 기술을 혼합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살 곳과 일자리를 제공하면서도 이익을 남기는 불교 선사” 그리고 기사에는 이런 말이 있다. “뉴욕 주 용커스 시에서 최고급 제과를 부자에게 매출하여 가난한 사람을 먹이는 스님. 그는 빈자에게 집을 제공하고 그들의 십대 자녀들의 문제를 상담해주며 유아를 위해 탁아소 서비스도 제공하고 있다. ‘모두가 연결된 세상을 만드는 것’이 제 소망입니다.” 서양 불교계에서 가장 독창적인 인물 중 하나로 손꼽히는 버나드 데쓰겐 글래스맨 스님.

1939년 뉴욕 브룩클린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그러나 공부를 잘해 UCLA에서 응용수학으로 박사학위를 딴 후 미국 유수의 국방산업체인 맥도널 더글러스에서 화성 스페이스셔틀 프로젝트의 팀장을 맡았었다. 출세가도를 달리며 남부러울 것이 없었던 그는 그러나 최고의 학벌과 중역의 자리를 버리고 미국에서 태어난 미국인으로서는 최초의 조동종 스님이 된다.

그리고 젠 피스메이커 오더(Zen Peacemaker Order, ZPO)라는 종파를 설립한다.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사회운동가, 종교지도자들이 있는 피스메이커 오더에는 이들이 꼭 믿고 지켜야 할 세 가지 교의가 있다. 첫째, 아무것도 모르며 고정관념과 편견을 버린다. 둘째, 이 세상의 고통과 기쁨을 제대로 본다. 셋째, 자신과 우주의 뭇생명을 치유한다. 제1교의인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은 불교계의 몇몇 거장들이 설파해온 불가지론이다. 이는 틱?한 스님이 설립한 접현종의 제1계인 “이 세상에 불법을 포함하여 어떤 교리도 우상화하지 말라.”는 것과 맥이 통하며 동시에 숭산 스님의 “오직 모를 뿐, 모르겠다는 그 마음이 바로 너 자신이다.”라는 것과도 공통점이 있다.

또한 스즈키 순류 선사 역시 “아무것도 믿지 않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엇을 믿든지 그것에 집착하게 되는 순간 자기 중심적이 되고 만다.”고 말하여 불가지론을 폈다. 스티븐 배철러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불교의 불가지론은 알고 싶지 않은 마음, 탐구하는 것을 거부하는 마음과는 다르다고 했다. 또한 ‘제멋대로의 소비주의를 합리화하는’ 지적인 수동성과도 같은 것이 아니며 매스컴이 이끄는 대로 아무런 성찰 없이 따라가는 눈먼 동조주의와도 같지 않다고 했다.

80년대가 되면서 나이 40줄에 들어선 글래스맨 선사가 구겨진 옷과 반백의 수염을 기른 채 1주일씩 ‘길거리 참선(street retreat)’을 이끌고 있는 모습이 자주 매스컴에 보도되었다. 왜 그런 모습으로 있는 것일까? 자기가 도우려는 사람을 제대로 도우려면 그 사람과 같은 생활을 하며 그 고통을 체험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런 행위를 ‘그대로 보기(bearing witness)’라고 부른다. 이 세상의 고통을 직접 보고 증언하겠다는 것이다. 뉴욕 용커스의 황폐한 동네에 살고 있는 빈민들을 돕기 위해 이익을 내는 사업과 비영리단체를 고루 갖춘 ‘그레이스톤 만달라’를 세운 그는 뉴딜정책을 기획한 자유주의자와 60년대의 혁신주의자들만이 꿀 수 있었던 꿈, 즉 인간 계발과 사회 변화의 비전을 가지고 있다.

그가 사람들을 대하고 다르마를 전하는 방식은 너무나 미국적이다. 스님들에게 으레 갖추는 예의도 거부하고 그는 자신을 그냥 버니(Bernie, 그의 이름 ‘버나드’의 애칭)라고 부르기를 원한다. 강연을 할 때는 장난기가 가득하고 유머감각 또한 풍부하다. 97년 1월 거창한 타이틀을 여러 개 나열하며 그를 열띠게 소개하는 사회자와 너무나 대조적으로 그는 강연을 이렇게 시작했다. “제 이름은 버니입니다. 그리고 저는 중독자예요. 저 자신에게 중독된 거죠. 이 방에 계신 모든 분들이 아마 같은 증세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40년쯤 전에 저는 선(禪)이라는 회복 프로그램을 만났어요. 그렇지만 몇 년이 지난 후 저는 알게 되었어요. 저의 중독증이 아주 사라지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그는 은사 스님들에게서 철저히 교육받은 화두선(話頭禪)과 사회운동과 봉사에서 오는 혜택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연관된 것이라고 말한다. “화두를 참구할 때는 내 자신이 그 상황이 된다. 그리고 답은 ‘말로서가 아니라 나의 존재 자체로서’ 제시한다.

ZPO가 하는 일은 사회가 돌보지 않는 상황으로 들어가서 그 상황을 ‘화두’로 삼고 일을 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기존관념은 모두 버리고 미지의 것을 꿰뚫어서 그대로 보는 것이다.” 글래스맨에게 있어 ‘그대로 보기’는 좌선을 그 나름으로 해석, 실천하는 것이며 ‘삶의 전일성’에 마음을 여는 것이며, 자연발생적으로 ‘나와 남을 치유하려는’ 마음이 솟아나는 것이며, ‘평화를 이루는 것’이다. 글래스맨 선사는 현대인에게 가장 심각한 병이 ‘아귀’의 문제라고 본다.

그가 말하는 아귀는 단지 식욕으로만 고통받고 있는 것이 아니다. 명예가 부족해서, 권력이 모자라서, 재산이 고파서, 사랑에 목말라서 이들은 아무리 가져도 만족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배고픈 아귀가 되었다. 더욱 슬픈 것은 불교도를 비롯한 구도자들이 깨달음을 쫓는 아귀가 되었다는 것이다.16)  16) Bernard Glassman & Rick Fields, Instrutions to the Cook: A Zen Master’s Lessons in Living a Life That Matters (Bell Tower, 1996), p.12.

무서운 의지와 열성으로 공부를 하던 그는 계속 정진했더라면 한소식 전해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고통이 너무 심한 것을 보고 그는 기다릴 수가 없었다. 온몸으로 부딪쳐서 불교를 삶과 사회에 실천했던 그는 말한다. 좌선만이 길은 아니라고. “깨달은 사회를 건설하는 데 있어 좌선만이 길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좌선을 아무리 해도 깨달음이 없는 사람이 있고 반면 좌선을 한번도 해보지 않았어도 그 마음과 행이 이미 깨달은 사람이 있다.”

 

9. 니폰잔 묘호지(日本山 妙法寺)와 후지 니치다쓰 스님

부처님은 80세에 입적하실 때까지 맨발로 걸어다니면서 가르침을 피셨다. 제트기와 우주선 시대에 그렇게 이 땅을 두발로 걸어다니면서 불법을 펴는 단체가 니폰잔 묘호지이다. ‘평화의 행보(peace walk)’라는 이름으로 이들이 지금까지 고통받은 사람들이 걸은 길을 따라 걸은 길이를 합친다면 천문학적 수치가 될 것이다. 미국에서 불법을 전하는 단체 중에 인디언의 고통과 흑인들의 고통을 가장 잘 이해하고 이들과 협력을 하는 것이 바로 니폰잔 묘호지이다.

부처님의 가르침과 간디의 비폭력에 근거한 문명 사회를 건설하자는 취지로 니폰잔 묘호지를 설립한 사람이 바로 후지 니치다쓰 스님이다. 1885년 일본에서 태어나 처음에는 임제종의 스님이 되었다가 후에 일련종으로 바꾼 후지 스님을 제자와 주변 사람들은 ‘구루지’라 부른다. 스님에게 구루지(‘영적 스승’이라는 뜻)라는 이름을 준 것은 마하트마 간디였다. 후지 스님은 1931년에서 38년까지 인도를 두루 여행하다가 간디의 와르다 아쉬람에 머무르게 된다. 거기서 스님은 간디에게 ‘나무묘호렝게교’를 염송하며 기도하는 것을 전했고 간디는 스님에게 비폭력 저항 정신을 심어준다.

1938년 일본으로 돌아와 열심히 활동하던 후지 스님은 1945년 세수 60세 되던 해 히로시마에 있었고 거기서 원자폭탄의 피해를 생생히 목격하게 된다. 이후 100세로 입적할 때까지 그는 핵무기 사용 근절, 평화의 탑 건립에 생을 바친다. 오늘날 전 세계에 약 80개의 니폰잔 묘호지의 평화탑이 있다. 흰색으로 빛나는 거대한 콘크리트 탑 안에는 부처님의 성스러운 유물이 내장되어 있고 그 주변에는 일본식 정원이 놓여져 있다. 그 탑은 마치 종교와 믿음에 상관 없이 모든 사람들이 느끼는 삶의 성스러움이 기도로 표현되어 솟아난 것과 같이 보인다고 한다.

부처님이 입적하신 후 한동안 사원 건립은 없었고 대신 탑을 세우고 그를 부처님 보듯 하던 초기불교 시대의 마음을 니폰잔 묘호지는 평화탑을 건립하면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1968년 83세의 나이로 스님은 미국에 왔다. 그리고 74년 미국의 월남전 개입을 반대하는 의미로 수도 워싱턴에 니폰잔 묘호지 미국 최초의 사원을 세운다. 1978년 미국 인디언이 조직한 평화의 행보를 후원하기 위해 스님은 종단의 스님들을 파견한다. 그 행보의 이름은 ‘최장의 행보: 알카트레즈에서 워싱턴 DC까지’였다. 그리고 이 협력관계가 자라나 제2의 평화탑은 인디언들의 후원과 축복 속에 건립되었다.

후지 스님은 평화를 구하는 니포잔 묘호지가 감사한 마음과 기도로 일상생활을 하는 인디언들과 굳은 결속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니폰잔 묘호지는 반핵시위, 평화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비폭력의 원칙을 철저히 고수했고, 자칫 격렬해질 수도 있는 운동에 깊은 정신적 힘과 고요함을 보태주었다. 후지 스님은 1984년 매서츠세츠 주 서부의 레버렛이라는 도시에 35에이커의 땅을 기증받았다. 1982년 니폰잔 묘호지와 함께 세계평화행진을 했던 한 젊은 사람이 보시한 것이다.

이곳에 전세계 수많은 종파와 계층이 1년 반 동안 두루 참여해 완성을 본 것이 미국 최초의 평화탑 건설이었다. 일본 스님들, 서양 스님들, 뉴에이지 추종자들, 그리스도교도와 유태인들, 페미니스트와 히피, 레스비언과 게이들이 와서는 힘 닿는 대 로 도와주다 갔기 때문에 작업 담당조는 언제나 그 숫자와 구성원이 변했다. 진정 이렇게 다양한 계층과 인종과 종파의 사람들이 합심해 평화를 원하는 마음으로 건설했기에 이 평화탑이 의미하는 바는 진실로 크다 하겠다. 그 탑의 제막식에는 3,000명의 인파가 몰렸다. 1997년 니폰잔 묘호지는 해리엣 터브맨(Harriet Tubman)의 ‘지하철도(Underground Railroad)’를 따라 걷는 평화의 행보를 했다.

그 행보의 의미는 노예라는 족쇄를 차고 미국에서 고통을 받았던 사람들을 위한 기도였다. 동시에 미래 세대에게 노예제도의 잔인함을 알리고 다시는 그런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게 하기 위한 의미도 있었다. 미국 흑인의 역사에서 해리엣 터브맨이라는 여성이 차지하는 위치는 자못 크다. 남부의 노예들이 자유를 얻는 길은 오직 북으로 탈출하는 것이었고 이는 목숨을 건 일이었다.

이들의 탈출을 돕기 위해 비밀의 거점이 확보되었고 이 거점을 ‘기차역(station)’, 이 거점에서 활동한 3,000명의 비밀조직원을 ‘기차 차장(conductor)’이라 불렀으며, 이 비밀의 탈출로를 ‘지하철도(underground railroad)’라 불렀다. ‘남북전쟁의 모세’라고 불리는 터브맨은 노예로 태어났지만 북으로 탈출했고, 그리고는 자신의 안위에 만족하지 않고 다른 노예들에게 자유를 안겨주기 위해 수없이 여러 번 남부로 돌아갔다.

그렇게 지하철도라고 불리던 비밀 탈출로에서 노예 구출하는 일에 맹활약을 하다 1913년 사망하였다. 지하철도를 통해 피신한 흑인은 10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세계 평화를 위해 100세로 입적할 때까지 정진했던 후지 스님은 어떤 문명을 건설하고 싶어 했을까? “문명은 전기가 들어온다거나 비행기를 탄다거나 원자폭탄을 만드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인간을 죽이고 사물을 파괴하며 전쟁을 일으키는 것과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문명이란 바로 서로를 사랑하고 존중하는 것이다.”

 

10. 앙굴리마라의 후예들을 불법으로 이끄는 조동종의 스님들

1) 미국 정토종의 후지모토 스님

1898년 캘리포니아에 세운 정토종의 사원들은 일본 이민자들을 위해 지은 것이다. 1942년 일본과 미국이 적국이 되자 11만 명이 넘는 일본인들이 준감옥에 해당하는 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44년 12월에 풀려난다. 이러한 진흙과 같은 현실에서 샌프란시스코에 본원을 둔 미국 불교원(Buddhist Churches of America, BCA)의 후지모토 호겐 스님이 연꽃을 피운다. 그는 사무실에서 홀로 전국 수백 명의 수감자와 서신을 주고 받고, 이들이 출옥한 후에는 정신적 힘이 되어 주는가 하면 직장을 구하는 것도 도왔다.

1967년 텍사스에 수감되어 있던 프레드 크루즈(Fred A. Cruz)는 후지모토 스님에게 불교에 대해 알고 싶다는 편지를 쓴다. 아미타 부처님과 서방정토에 관한 정보를 받고 그는 너무나 기뻤지만 그 때문에 하루에 빵 두 쪽만 주는 깜깜한 독방에 들어갔다 나갔다 몇 개월을 반복하게 된다. 그는 화장실 휴지에 쓴 글로 소송을 제기했고 결국 6년 후 대법원은 그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로 인해 감옥에서 불법을 자유롭게 전할 수 있게 되었다.

2) 영국의 앙굴리마라

영국에서는 아잔 케마다모가 수년간 감옥을 방문하여 불법을 전하다가 1984년 ‘앙굴리마라’를 설립하였다. 앙굴리마라는 영국을 방문하는 불자들이 자주 찾는 곳이고 미국에서도 이를 모델로 해서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이들은 방문할 법사들을 모집하여 교육시키고 자문을 맡고 있다. 또한 출옥 후에도 계속 보살펴 주면서 자문 역할을 한다. 현재 55명의 법사가 100개 감옥을 담당하고 있다. 또한 자원방문자 교육도 하고 감옥 내에 불당을 설치하기도 하며 통신을 통한 불교교육과 테이프를 대여하는 일도 한다.

3) 미국의 연꽃 선방

미국 뉴욕주 그린해븐에는 중형자 수감소가 있다. 이곳의 수감자가 인근의 선산(禪山) 승원(Zen Mountain Monastery)의 루리 원장에게 편지를 보냈다. 루리 원장은 감옥을 방문하고 원하는 사람들을 모아 좌선을 하려 하였으나 불교는 쿵푸 같은 무술이라고 알고 있던 교도소측으로부터 거절당하였다. 수감자는 이를 뉴욕법원에 호소했고 1년 후 판결에서 ‘불교는 뉴욕 주 감옥 내에서 인정받는 시스템’이라고 했다. 그래서 이 감옥에 연꽃선방(Lotus Flower Zendo)이 생겼다. 이런 인연으로 선산 승원은 뉴욕 주에 있는 모든 감옥들에 대해 불교 수행 그룹을 만들고 불교에 관한 한 모든 자문역을 맡게 되었다. 연꽃 선방 회원 두 명이 출옥 후 선산 승원으로 들어가 1년을 지냈던 것은 앞으로 개발되어야 할 출옥 후 관리의 좋은 원형이라고 볼 수 있다.

4) 미국의 불교평화우의회

수감자 프로젝트 불교평화우의회(Buddhist Peace Fellowship, BPF)는 전세계에서 불교와 평화를 위해 일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가장 적합한 곳에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단체이다. 이곳의 분과인 수감자 프로젝트의 사명선언서(mission statement)는 그 요지가 다음과 같다. “부처님은 오직 한 가지를 가르치셨다. 바로 자유이다. 우리의 사명은 수감자와 그들의 가족과 다른 신앙단체와 일반대중과 협력하여 수감시설 안에 체제적으로 존재하는 폭력을 해결하고, 봉사, 교육, 단체조직을 통해 자비행을 실천하는 것이다.”

BPF의 계간지 〈돌아가는 법륜(Turning Wheel)〉은 수감자에게 무료로 제공된다. 이곳에서는 감옥 자원 봉사자에게 도움이 되는 기사와 정보도 자주 나온다. BPF는 명상 네트워크를 조직하여 감옥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한 달에 한번 샌프란시스코 선센터에 모이게 해서 재충전을 하도록 한다.

 

11. 해외에서 활약하고 있는 한국의 스님들

1) 숭산 스님과 관음종

72년 46세의 나이에 미국으로 가신 숭산 스님은 이미 떠나기 전에 미국의 청년들에게 불교를 전파해야겠다는 확실한 포교대상을 잡은 것 같다. 미국 젊은이들이 몰두해 있던 히피운동을 듣고 불교 전파 가능성을 본 스님은 미국에 도착한 후 초심으로 돌아가 로드아일랜드의 프로비던스 근처에 방을 얻고 세탁소에 들어가 일하면서 영어를 배우고 포교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근처 브라운 대학에서 동양문명사를 가르치는 리오 프루덴(Leo Pruden) 교수가 세탁소에 손님으로 왔다가 스님을 알아보게 되어, 그때부터 학생층과 접하게 된다. 숭산 스님이 이민자들을 위한 ‘수하물 불교’ 차원을 넘어서 미국 사회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이렇게 초심을 가지기 쉬운 학생들을 먼저 불자로 만들고 그를 바탕으로 선원을 구성한 후에 한국 이민자들이 그 선원에 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숭산 스님은 국제적으로 많은 추종자를 가진 다른 스님들에 비해 영어가 그리 유창한 편은 아니다. 그러나 불교는 마음 공부라고 했고 선은 이심전심으로 전한다 했다.

어린아이와 같은 천진한 얼굴로 보여주는 본래 마음과 그 마음을 강하게 전달하는 주장자와 할이 있으므로 문법과 어순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단어 나열 영어’ 만으로도 스님은 사람들의 가슴을 적시고 울리며 칠 수 있었다. 스님의 법회를 하버드에서 처음 본 김용옥 교수는 그 감동을 이렇게 전한다. “제가 하도 조르는 바람에 케임브리지 선원 한구석에 앉아 숭산의 법문을 듣는 순간, 나는 언어를 잃어 버렸다. …… 그의 얼굴에는 동네 골목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땅꼬마’가 들어 있었고 ……그의 법문은 정말 가관이었다. 방망이 하나 들고 앉아서 가끔 톡톡 치며 내뱉는 말들은 주어, 동사가 마구 도치되는가 하면 형용사, 명사, 구분이 없고 전치사란 전치사는 다 빼먹는 정말 희한한 콩글리시였다. 그러나 나는 그 콩글리시가 너무 재미있어 딴전 볼 새 없이 빨려 들어갔으니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언어의 파워와 원초적 마력을 과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직 모를 뿐(Only Don’t Know)》이라는 책을 펴내 ‘모른다는 것’은 숭산 스님만의 법어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실은 이는 아주 오래 전부터 동서양에 다 존재하던 것이다. 이는 노자와 장자의 사상과도 멀지 않고, 유태교 신비주의와 수피 신비주의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에서도 설파한 것이며, 미국 인디언의 믿음과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의 드리밍(Dreaming) 창조신화에도 보이는 것이다. 동시에 서양 불교사회에서는 스즈키 순류 선사도 이를 주창하였고, 버나드 글래스맨 선사 또한 젠 피스메이커 오더(ZPO)의 제1교의로 강조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숭산 스님의 ‘모른다’와 ‘그냥 하라(Just do it)’는 현대 미국의 젊은이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갔을까? ‘그냥’이라는 말은 현대 미국에서 각광을 받는 말인 것 같다. 나이키 회사의 광고에서도 ‘그냥 하라(Just do it)’를 오랫동안 사용했고, 또 낸시 레이건은 마약퇴치 운동을 이끌면서 마약을 권하는 사람에게는 “그냥 ‘노’하라(Just say no)”고 말하여 국민의 호응을 얻은 바 있다.

현대를 왜 미니멀리즘(minimalism, 단순주의, 최소화주의)의 시대라고 하는가? 너무 복잡해진 사고와 사회에 사람들이 지쳐 있기 때문이다. 생각이 생각으로 꼬리를 물고, ‘이런 경우가 생기면 어떻게 대처할까(What if?)’라고 늘 생기지도 않은 일을 미리 분석하는 현대인에게 숭산 스님은 그 생각을 끊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모른다고 할 때는 더 이상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냥 하면 된다. 그렇게 하다가 보면 자연발생적이고 즉발적으로 지혜도 나온다는 것이다.

반면 늘 생각하고 분석하는 마음에는 지혜가 들어설 여지가 없다. 이는 배움과 지식을 부정하는 말은 아니다. 마음 자세를 설명하는 말일 뿐이다. 그렇게 모른다는 마음으로 초심으로 돌아가서 온 마음을 다해 주어진 일을 하다 보면 이전에 배우고 습득하여 내 안에 있던 것들이 전혀 예기치 못한 방향과 창조적인 방식으로 쓰일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일찍부터 예술가들이 불교 애호가 내지는 수행자가 되었다. 선을 응용하여 글을 쓰고, 음악을 만드는 것에서 시작하여 농구와 골프까지 마음의 평정과 창조력이 필요한 것이면 다 그에 대한 저서와 수련 프로그램이 수없이 쏟아져 나왔다.

숭산 스님은 또 서양에서 스님처럼 불교를 보급하는 사람들과 서로 협조하며 연대관계를 잘 이루었다. 아잔 차의 책 《고요한 숲의 물(Still Forest Pool)》에 스님이 서문을 썼고 트룽파 린포체의 부도를 세울 때는 그 위치를 잡아주었다. 또 출판활동도 활발하여 《부처님 머리에 재를 털면(Dropping Ashes on the Buddha)》은 인터넷 서점 아마존에서 18,000위대, 《선의 컴퍼스(Compass of Zen)》는 22,000위대, 《오직 모를 뿐(Only Don’t Know)》은 43,000위대에 있다.

불교계에도 달라이 라마의 《행복의 기술(The Art of Happiness)》 같은 것이 415위까지 오르긴 했지만 그만하면 숭산 스님의 책은 불교서적으로서 대중에게 많이 읽힌 책으로 손꼽힐 수 있다. 진 스미스의 《365일 선(365 Zen: daily reading)》은 현대의 선불교 선사들이 펴낸 책 중에서 에센스를 골라 매일 한 가지씩 읽고 음미할 수 있도록 엮은 책인데, 총 365편의 글 중에서 숭산 스님이 하신 말씀이 18편 수록되어 있다.

또한 다른 한국 선사들의 일화와 법문도 수록되어 있는데 경허 스님 2편, 원효 스님 2편, 서산 대사 2편, 무학 대사 1편, 지눌 대사 1편이 들어 있다. 이 책이 대중의 호응을 꽤 많이 받았던 것을 생각하면 영어권에 한국 불교가 크게 소개된 셈이라고 할 수 있다.

숭산 스님은 1972년 미국에서 포교를 시작하여 관음종을 설립하고 32개 나라에 130개가 넘는 포교센터를 세웠다. 미국에는 50여 개의 선원이 있는데 미국 동부 로드아일랜드에 있는, 프로비던스 선원(Providence Zen Center)을 비롯하여 공문(空門) 선원(Empty Gate Zen Center), 모하비사막 선원(Mojave Desert Zen Center) 등이 있다. 체코에도 프라하와 클라드노 시에 관음회가 결성되어 있다. 폴란드의 바르샤바에도 80년 이후로 관음회가 있다.

또한 숭산 스님이 하신 것은 아니지만 헝가리의 평화사(寺), 폴란드의 조계선 불교회 등은 다 한국의 조계종 스님들이 설립한 것이다. 아프리카의 남아프리카 공화국에도 관음회가 네 곳이 있다. 또한 관음종에서는 프라이머리 포인트 출판사(Primary Point Press)를 설립했다. 지금까지 스님에게 ‘깨달음’을 인가받아 법을 물려받은 이는 7명이며 모두 외국인이다. 엘리트 불교가 주류를 이룬다는 미국답게 모두가 명문대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사회운동 내지는 삶의 근본적인 고민을 했던 사람들이다.

숭산 스님 역시 다른 국제적 스님들과 마찬가지로 다른 종교를 인정, 포용하고 공존, 공조를 추구한다. 그는 말한다. “기독교나 불교나 다 본체로 돌아가 무엇을 할 것이냐 하는 공부이다. 본체로 돌아가면 대우주와 내가 하나가 되고 그러면 아랫배에 센터가 생긴다. 움직이지 않는 마음이 생긴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게 다 진리 아닌 게 없게 된다. 진리를 깨달아 대자연과 하나 되는 공부, 그것을 수도라고도 하고 신앙이라고도 한다.” 무엇을 하든 그저 모른다는 마음으로 일심으로 하면 된다는 다음과 같은 말씀은 정말 파격적이다.

“불경을 독송하든 성경을 독송하든 아니면 ‘코카콜라’를 되풀이 읊조리든 다 괜찮아. 그 마음이 중요하니까.” 수도의 목적은 보살행이요 봉사이며, 2000년대를 맞아 종교가 해야 할 일은 인간성 회복이라고 말씀하는 숭산 스님. 미국인들은 스님이 하시는 말씀이 쉽고, 단순하고, 너무나 재미있으며 배꼽 잡게 웃기지만 동시에 정곡을 찌르며, 가식을 벗기며, 마음을 잠근 빗장을 부수어 버리는 꿰뚫는 지혜가 있어 좋다고 한다.

2) 삼우 스님과 자혜 선원

시카고에서 14만부를 발행하는 주간지 시카고 리더(Chicago Reader)는 99년 1월 15일 삼우스님을 소개하며 그 헤드라인에 “망치를 들면 하고자 하는 일이 사방에 알려진다.(Have Hammer, Will Travel)”라고 썼다.

1967년 미국으로 건너간 삼우 스님은 스님도 징병을 한다는 바람에 속인이 되었다가 일본으로 갔고 거기서 다시 미국으로 가게 된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독립군이 되어 만주로 가고 어머니는 4남매와 식당일, 밭일을 하며 힘들게 살다가 몸과 마음을 너무 혹사하여 거의 미친 상태가 되어 돌아가셨고 스님은 고아가 되었다.

67년 뉴욕에 도착하여 맨하탄에 방 1개짜리 아파트를 얻고 UPS에서 일하며 탁발을 해보았지만 통하지 않았다. 1년 후 비자가 만기가 되자 캐나다의 몬트리올로 가서 4년간 살고 다시 토론토로 가서 토론토 대학 근처에 방을 얻고 우체국 직원이 되었다.

스님의 미국에서의 포교생활은 이때부터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 73년부터 그의 지하실 방에는 참선을 배우겠다는 사람들이 오기 시작했고 76년에는 15명의 제자가 생겨, 이들과 함께 다 쓰러져 가는 집을 인수해 보수에 들어간다. 그때부터 스님에게는 망치가 신심의 도구가 되고 아무리 피곤해도 몸으로 행하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제자들과 합심해 보수한 집이 79년 완공되었다. 81년에는 미국 미시건 주 앤아버에 자혜 선원(Buddhist Soceity for Compassionate Wisdom)을 설립하여 현재는 메일링 리스트가 5,000명으로 늘었고 하주(Linda Murray) 스님이 선원장으로 있다. 91년에는 시카고에 선원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멕시코의 멕시코시티에도 선원(Centro Zen Budista)을 설립했다.

그리고 86년 시카고에 미륵승가대학(Mait-reya Buddhist Seminary)을 설립하여 불법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을 양성하는 데 일조했다. 학생들은 이곳에서 숙식을 하며 배울 수도 있고 외부에서 다닐 수도 있으며 과정은 3년이다. 또 불교 종단 내부와 다른 종교와의 교류 협력을 위해 86년 최초의 선불교 교사진의 모임인 ‘북미의 선불교(Zen Buddhism in North America)’를 주관했고, 87년에는 ‘북미 세계 종교회의’를 8일간 개최했다. 스님은 100불짜리 인쇄기를 사놓고 뉴스레터도 만들었고 계간지 〈교차로의 불교(Buddhism at the Crossroads)〉도 발행한다. 삼우 스님의 제자 중 파랑 스님은 ‘게리 라킨(Geri Larkin)’이란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비구니이다. 이미 《깨달음과의 우연한 조우(Stumbling into Enlightenment)》와 《선의 탭댄스(Tap Dance in Zen)》를 베스트셀러에 올려놓았고 요즈음은 정명(正命)의 원리로 경영하는 기업에 관해 자문도 하고 강연도 하고 있다.

파랑 스님은 원래 연봉 10만불을 넘게 받는 기업 자문가였다. 그러다가 눈에 경련이 와서 잘 낫지 않자 주치의가 명상을 해보라고 권유하여 시작한 것이 삼우 스님과의 인연이 되었고 후에 비구니계까지 받게 된 것이다. 98년 4월 미시건 대학에서 MBA 학생들에게 파랑스님은 정명 기업에 대해 강연을 하였다.

“정명 기업은 벤처 기업과 반대 개념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고속 성장을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붓는 벤처와는 달리 정명 기업은 자연스러운 성장을 원합니다. 더하여 정명 기업은 부처님의 계를 지키고 균형을 중시합니다.” 〈보더스 닷컴(Border.com)〉이라는 온라인 잡지에서 크리스틴 캐리그넌과 한 인터뷰를 보면 스님은 한국에 순례를 갔고, 승복 한 벌로 30일을 버텨야 했던 이야기며 산속의 스님들이 너무나 자애롭게 맞아주었다는 얘기, 그리고 80대의 위안부 할머니들이 산속에 살다가 목요일이면 일본대사관 앞에 가서 데모를 한다는 등의 이야기를 했다. 한 할머니는 파랑스님에게 일본군이 빼앗아간 내 딸이 되어달라고 했다는 얘기도 했다. 스님의 한국 순례기가 책으로 되어 나올 날을 기대해본다.

 

12. 맺는 글

서양에서 불교가 놀랍게 발전을 하고는 있지만 아시아의 오랜 역사와 승가에 비하면 이제 초기단계라고 할 수 있다. 불교가 늘 그래왔듯이 서양이라는 새로운 곳에서 그곳의 풍토와 문화에 맞게 변신하면서도 본질은 그대로 지니는 그러한 과정을 거치리라 본다. 1890년대에 미국에 불교붐이 불었다가 불과 20∼30년 만에 사라진 그러한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불교가 해야 할 과제는 무엇일까? 미국 인디애나 대학의 종교학 교수이며 94년 해인사에서 열린 전자경전 추진회의에도 참석한 바 있는 잰 내티어(Jan Nattier)는 불교도 1위 국가인 미국불교가 계속 발전하기 위해서는 불교가 개인 차원이 아닌 가족 차원의 수행으로 발전해야 하며 사회 체제 안에 구체적으로 연결되어야 한다고 했다.

또한 자기들 수행만이 옳고 다른 그룹이 하는 것은 옳지 않거나 진정한 불교가 아니라고 무시하거나 낮추어보는 태도를 시정해야 한다고 했다. 또 같은 승원이나 선센터 안에서도 아시아계 불자와 백인 불자들은 서로가 섞이거나 공감하는 바가 없는 병렬 구조(parallel congregations)를 이루고 있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를 위해 내티어 교수는 구체적으로 세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첫째 엘리트 불교층, 백인 불교도의 수행이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차원을 넘어서 불교가 가족과 사회 안에 탄탄히 유기적으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수하물 불교에서 그 강점을 배워야 한다.

둘째 튼튼한 구조가 체제를 받쳐준다. 오랜 시간 비바람을 견디려면 구조의 건강함이 필수이며 그런 면에서 포교 불교(SGI처럼 적극적으로 포교하는 불교)의 강점을 배워야 한다.

셋째 다양한 인종, 계층, 문화가 섞여 있어야 탄탄한 집단이 되므로 엘리트 불교층처럼 단일문화를 고집해서는 안 된다.” 또한 입맛에 맞는 스승을 찾아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비교해보는 구루 쇼핑(guru shopping)은 소비자 지상주의와 서비스 문화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그 또한 익숙한 일이므로 각 수행단체와 스승들은 이를 나쁘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많은 것을 오픈해 놓고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도록 배려해주는 것도 필요하리라 본다.

누구나 처음부터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한 번에 찾을 수는 없는 것이므로 ‘실수할 수 있는 자유’를 인정해주고 ‘다른 선택을 할 자유’도 인정해주자는 것이다. 깨달음(enlightenment)이라는 말은 이미 18세기에 서양에서 ‘계몽주의’라는 말로 한 시대를 구분지었던 말이다. 그 깨달음을 삶에서 구현하려는 열풍이 이제 20세기 후반에 다시 강렬히 일어나 21세기로 넘어간 지금 깨달음이 진정 가족과 사회와 민중의 차원에서 전세계에 정립되기를 바라며 지면관계상 중요한 수행단체를 제대로 다 소개하지 못했음을 양해바라며 글을 맺는다.
 
 

진우기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Texas A&M University에서 평생교육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불교문화센터와 신구대학에서 강의를 하며 인터넷 불교대학(www.Buddhistweb.com)의 기획실장을 맡고 있다. 역서로 《이 세상은 나의 사랑이며 또한 나다》와 《일곱 봉지 속의 지혜》가 있다. 

 

 

 

 

 

 

 

 

 

 

 

 

 

출처 : http://cafe.naver.com/seereligion.ca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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