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 세계

홍인은 신수를 인가하지 않음

수선님 2021. 7. 4. 11:18

신수상좌는 깨달음의 노래를 적어놓고 곧 자기의 방으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5조화상은 이튿날 아침 드디어 화가인 변상도를 그리도록 하려 하였다. 5조화상은 문득 게송이 적혀 있음을 보고 읽어 보았다. 그리고는 화가 노봉공에게 말했다.

나는 공봉에게 돈 3만 냥을 드리어 이렇게 멀리 오시게 한 수고에 보답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능가경의 변상도는 그리지 않도록 하겠소. 금강경에도 무릇 모양이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한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소.

 

능가경의 變相圖의 相은 모양이다. 그림으로 불법의 본질을 표현코자 했지만 일체 모양을 부정하는 금강경의 핵심사상인 無相 無住에 반하기 때문에 그리기를 포기한다. 무상 무주란 결국 자기 마음 안에 머문 모양이 없다는 뜻이다. 불법은 心法이지 마음 밖의 법을 말하지 않는다. 세상에 바꿀 수 있는 것은 자기 마음밖에 없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자기 마음에 모양이 없도록 할 수 있나? 일체 모양을 비우는 것<空>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비우는 공부가 금강경의 頓悟見性 공부다. 마음을 비우면 나오는 힘이 지혜다. 여기서 홍인은 북종선에서 남종선으로 전환하는 중계역할을 하고 있다.

 

일체 모든 相은 허망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無相의 경지를 체득한다. 왜냐하면 모든 相은 인연으로 이뤄진 것이기 때문이다. 인연법은 전부 無常에 의지한다. 무상을 체득한 것이 佛心이고 불심을 체득한 것이 如來<永遠>다. 불법은 무상에서 영원으로 자신을 변화시키는 공부다. 고통의 현상세계에서 영원의 불심세계를 깨달아 불생불멸의 경지를 체득하는 것이다. 금강경의 여래를 보라는 육조단경의 견성이다. 중생심은 생노병사 우비고뇌 인연법을 따르는 무상한 존재다. 반면 불심은 이런 중생심을 초월한 경지이기 때문에 영원하다.

 

여기 이 게송을 그대로 두고 미혹한 사람들이 모두 외우도록 하고 이 게송을 의지해서 수행하도록 하여 三惡道에 타락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오히려 낫겠소. 法을 의지해 수행하는 사람은 크게 이익이 있을 것이요. 대사는 드디어 수행자들을 불러 모이게 하였다. 그리고 신수가 적어 놓은 게송 앞에 향을 사르고 대중들이 이 게송을 보고 모두 공경심을 일으키도록 하였다. 그리고 대사는 말했다.

그대들이 모두 이 게송을 외우면 반드시 견성하게 되며 이 게송에 의지해서 수행하면 삼악도에 떨어지지 않는다. 수행자들이 모두 이 게송을 외우고 한결같이 공경심을 일으키면서 야! 훌륭하다 라고 소리쳤다. 5조화상은 드디어 신수상좌를 조사당 안으로 불러서 물었다.

이 게송은 그대가 지은 것인가? 만약 이 게송을 그대가 지은 것이라면 응당히 나의 법을 전해 받을 것이다. 신수상좌가 말했다. 죄송합니다. 사실 이 게송은 제가 지은 것입니다. 그러나 감히 조사의 지위를 넘보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화상께서는 자비를 베푸시어 제자에게 약간의 지혜가 있어 불법의 대의를 파악할 수 있는 식견이 있는지 살펴봐 주시기를 원할 뿐입니다.          

 

聖意 聖位 祖位 이 배후엔 범부심이 자리하고 있다. 이런 말을 하는 신수의 마음은 중생심이다. 그러니 중생심으로 게를 지은 것이다. 안목 있는 사람만이 신수의 마음을 파악할 수 있다. 신수는 제가 감히 하며 아직 중생심에 매인 자신이 없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지혜는 체험을 통해 얻은 힘이기 때문에 확신이 있어 검증 받을 필요가 없다. 지혜로운 대화가 되면 자동적으로 안목이 드러나게 되어 있다.    

 

5조화상은 말했다. 그대가 지은 이 게송의 견해는 단지 깨달음의 문전에 이르렀을 뿐 아직 문 안으로 들어서지는 못했다. 범부는 이 게송을 의지해서 수행하면 타락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게송의 견해로는 위가 없는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기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이 게송의 게송으로는 위가 없는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기란 불가능한 것이다.

만약에 깨달음의 문 안으로 들어가기를 바란다면 자기의 본성을 깨달아야 한다. 그대는 돌아가서 한 이틀 동안에 잘 사유하여 다시 게송을 한 수 지어 가지고 나에게 제시하도록 하라! 만약에 깨달음의 문 안으로 문 안으로 들어와 자기의 본성을 깨닫게 되면 마땅히 그대에게 가사와 불법<依法>을 부촉하리라. 신수상좌는 며칠이 지나도 깨달음의 노래를 짓지 못했다.  

 

入門 미혹한 망념은 중생심이다. 미혹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하고 망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본심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그래서 지혜와 본심은 불법의 대의가 된다. 대의를 체득했으면 남에게 인정 받을 필요가 없고 바로 入門이 되는 것이다. 佛心에 드는 方向과 方法은 알고 있지만 아직 自己化시키지 못했다는 소리다. 그래야 부처의 지혜로운 삶을 만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힘이 없다 보니 門前에서 항상 맴돌기만 한다. 大道無門 고정된 문이 없어 空이다. 허공은 고정된 문이 없다. 그래서 공의 법문을 체득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네 스승은 어디 갔느냐? 산중에 약을 캐러 갔습니다. 그런데 구름이 너무 깊어 어디 계신지 모릅니다. 道도 마찬가지다. 일체처가 문인데 그 경지를 어떻게 체득하나? 하나라 말하니 하나에만 빠진다. 하나를 알기 위해서는 일체를 알아야 한다. 一心의 법을 깨닫기 위해서는 일체 心法을 모두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無門을 알아야 무문을 통과할 수 있다. 신수의 게송대로 하면 바른 방향의 수행은 할 수 있지만 아직 안목이 없어 확신할 수 없다는 말이다.     

 

고정된 법은 한계가 있다. 수없이 많은 중생의 병 때문에 현대적인 치료법도 개발해야 한다. 이것이 끊임없는 상구보리의 정신이다. 위가 있다면 한정이 있는 것으로 더 이상 발전이 없다. 공간적 시간적으로 상하좌우의 한계가 없어야 한다. 영원한 시간과 공간 속에 살아 시방삼세다. 시방삼세는 나와 다른 삶이 아니고 내 身心과 항상 함께 하는 삶이다.   

依法修行 법에 의지한 수행. 나도 올바른 방향을 잡지 못하고 세월을 헛되이 보낸 아쉬움이 있다. 그래서 선지식이 중요하다. 법을 깨달은 사람이 부처요 부처가 깨달은 내용이 법이다. 불교는 법을 중심으로 교화하는 종교이다. 모든 것은 법에 의해 이뤄지기 때문이다. 법을 모르면 부처의 삶을 살 수 없고 중생을 교화할 수 없다.

 

불법의 핵심=佛性 & 반야지혜

불성은 반야지혜다. 불성과 반야지혜는 둘이 아니고 하나다. 견성의 경지가 불심이다. 중생심을 초월한 경지다. 세속의 지혜는 상대적 지혜라 완전한 지혜라 할 수 없다. 반야지혜는 공의 실천을 통해 이뤄진다. 일체 차별적 생각 고정관념 편견 분별심 착각 전도몽상 번뇌망념을 비워야<空> 반야지혜가 드러난다. 금강경은 이를 無住 無相 두 마디로 요약했다. 佛心의 이런 지혜작용을 육조단경은 見性成佛로 표현했다.

열반경은 佛性 반야경은 반야지혜 남종선은 見性成佛 조사선은 無心이나 平常心是道로 표현했다. 시대에 따라 표현이 조금씩 표현이 다를 뿐이다. 인도적 언어에서 중국적 언어로 바뀌고 있다. 이런 역사를 알아야 언어의 혼란에서 벗어난다. 이런 정확한 언어에 대한 이해 없이 스님들의 법문 한 구절만 듣고 그대로 따라 반복한다면 불법을 배울 이유가 없다. 그래서 법에 의거하지 사람에 의거하지 말라고 열반경은 말하는 것이다.

 

법은 지혜를 체득하는 힘이다. 지식은 중생심의 작용이다. 경전이나 어록을 읽는 看經 看話는 그냥 지식이다. 看을 글자 읽는 것으로 착각하니 문제가 생긴다. 글자 안에 담긴 부처님의 지혜를 체득하는 것이다. 그래서 행간을 읽으라는 것이다. 看은 지혜의 눈이다. 그래서 지식은 아무리 익혀도 사유 참구하지 않으면 지혜는 없는 것이다. 정보만 많이 갖고 있다 해서 회사가 잘 되는 것이 아니다. 그 정보를 가지고 조합 응용해서 독창적인 상품을 만들어야 돈을 벌 수 있는 힘이 되는 것이다.             

 

내 말을 기억하지 말라<마조> 내 말에 의지하지 말라<부처님> 내 말에 끄달려 짊어지고 다니지 말라는 뜻이다. 得法 법을 체득한 경지란 어떤 것이냐? 入門과 같은 말이다. 불법의 대의를 체득한 것을 말한다. 여산의 안개 낀 운무와 절강의 조수를 구경하지 못한 사람은 정말 恨이 남을 것이다. 구경을 해도 운무와 조수는 그대로다. 바뀐 것이 없다. 그래서 산은 더 이상 산이 아니지만 여전히 그 산 그대로 산이며 물은 물이 아니지만 여전히 그 물 그대로 물인 것이다. 운무와 조수를 나는 바꾸지 못한다. 내가 바꾼다 생각하니 착각이다. 이는 불법을 모르는 사람이다. 변화의 주체는 자기 마음밖에 없다.

 

恨은 의심이며 불안이다. 확신하지 못하니 미련이 남는다. 이런 의심과 궁금증이 자신을 불안하게 만든다. 그러나 한 번 구경하고 나면 갈등이 다 해소된다. 法을 얻는 경지도 마찬가지다. 見性의 見은 직접 확인하는 것이다. 왜 가보다 먹어보다 해보다 라고 보다라는 말을 넣어 쓸까? 직접 체험하면 중생심인 의심과 미혹 미련과 한을 전부 극복하는 힘을 갖기 때문이다.     

 

한 동자가 방앗간 옆을 지나면서 신수가 지은 이 게송을 큰 소리로 외웠다. 나는 이 게송을 듣는 그 순간 이 게송은 아직 견성하지 못한 사람의 견해로 불법의 큰 뜻<大意>을 완전히 체득하지 못한 경지에서 지은 것임을 알았다. 나는 동자에게 물었다. 지금 외운 것은 무슨 게송인가? 동자는 대답했다. 당신은 아직 모릅니까? 홍신대사께서 말씀하시기를 生死는 큰 일이다 하시고 가사와 법을 전하려고 하시면서 문인들에게 각각 깨달음의 노래 심게를 한 수씩 지어서 나에게 보이라고 지시하였지요. 불법의 대의를 깨달은 사람에게 가사와 불법을 부촉하고 품승케하여 제 6대의 조사로 삼으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신수상좌라는 사람이 남쪽 복도에 無相偈 한 수를 적어 놓았습니다. 5조화상은 여러 수행자들에게 모두 이 게송을 외우도록 지시하였습니다. 이 게송의 의미를 깨달은 사람은 곧 자기의 본성을 볼 것이며 이 게송을 의지하여 수행하면 곧 3계의 고해를 벗어나 해탈을 얻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나는 말했다. 나는 여기서 8개월이 넘도록 방아를 찧고 지냈지만 아직 한 번도 5조화상이 계시는 조사당 앞에는 가본 적이 없소. 바라건대 그대는 나를 남쪽 복도에 데리고 가서 이 게송을 친견하고 예배할 수 있도록 해주시오. 또한 바라건대 나도 이 게송을 외워서 내생에 좋은 인연을 맺고 부처님의 나라에 태어날 수 있는 소원을 드리고 싶소.

 

오도송을 보면 지은 이의 경지가 그대로 드러난다. 無相偈<心偈>는 깨달음의 노래다. 모두 금강경에 토대를 둔 말들이다. 경전에 등장하는 선재 문수 남승 같은 많은 동자와 십우도에 소를 찾아 나서는 동자는 일체 중생심으로 오염되지 않은 천진불을 상징한다. 동자를 통해 일자무식 혜능의 순수성을 부각시키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가 보인다. 순수성이 없으면 구도정신이 결여된다. 신수의 지식이 오히려 장애물로 혜능과 대조된다. 동자의 여기저기 왔다갔다 하는 천진성으로 안내자 역할을 한다. 8개월 동안 조사당 앞에 한 번도 가보지 못하고 오직 일에만 몰두하는 혜능의 순수한 구도자적 자세가 보인다.        

8강. 성본스님 선불교 특강. 홍인은 신수를 인가하지 않음 법문 중에서

 

 

 

 

 

 

 

 

[출처] 507.홍인은 신수를 인가하지 않음|작성자 Inkf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