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법사부터 혜능스님 때까지가 중국불교의 최대 황금기다.
현장법사는 당나라에서 불교적 위상 체계를 정립하신 분이다. 현장법사<법상종> 천태지자대사<천태종> 현수법장스님<화엄종> 육조혜능대사<선종>만 알면 중국불교는 끝이다. 현장스님은 머리도 좋고 인물도 좋고 모든 것을 다 갖춘 사람이었다. 중국불교사 전체를 통틀어서 살았을 때 유일하게 신격화된 사람이 현장법사다.
현장법사<602~664> – 당나라 초기 고승이자 번역가. 현장삼장으로 불린다.
현장스님은 체력도 좋아 파미르 고원을 누비옷 입고 2번이나 넘어갔다. 전문 산악인도 불가능한 일이다. 고도의 구도심이 이루어 낸 결과다. 서유기는 현장법사가 西天取經의 역사적 사실을 제재로 한 장편소설이다. 인도불교에서 가장 인물 좋은 사람은 아난존자 중국불교로 보면 현장법사다. 身言書判은 중국 당대의 관리 전선의 4가지 표준인 1.인물 2.말 3.글 4.판단력을 이른 말이다. 인물이 좋으면 설득력이 있다. 현장스님은 續高僧傳에 보면 60대 초반에 열반에 드셨다. 대당서역기에 보면 땅을 파도 얼음 밖에 없고 팔 수도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慈恩傳> 대당서역기 속고승전은 현장스님에 대한 3대 기록서다. 慈恩傳은 중국 당나라의 渡竺求法한 현장법사의 전기로 사적인 개인 기록이다. 大唐西域記는 현장법사가 장안을 떠나 서역과 인도를 주유하고 오기까지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것으로 객관적 공적인 자료다. 당나라가 세계경영을 하기 위해서 당 태종 이세민이 현장법사에게 부탁한 책이다. 당시 서역 원정에 큰 공을 세웠으나 Talas 전투에서 패한 고구려 출신 당 나라 장수 고선지가 있다. Talas 전투는 동아시아 중심의 패권이 서쪽으로 문명이 흘러가는 계기가 된 싸움이었다.
Talas 전투 – 사라센 제국 군대가 중국 당나라 군대를 Talas강 가에서 물리친 싸움
Talas전투에서 패해 포로가 된 2만 명의 당나라 군대 가운데 제지 기술자도 포함되었는데 이 기술자들에 의해 제지소가 생겨 사마르칸트紙란 이름의 양질의 종이가 만들어졌다. 西域은 중국 서쪽에 있던 나라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넓게는 중앙아시아 서부아시아 인도를 포함하지만 좁게는 지금의 신장웨이우얼 자치구를 말한다. 서역 밑 서장은 티베트를 말한다. 티베트는 Suez운하 같이 통행세<이집트 전체수입의 1/10>만 받아도 되는 교통의 요지였다.
당 태종은 경영력 전투력 판단력이 훌륭한 황제였다. 그는 항상 창업보다 수성이 어렵다. 백성은 물과 같고 위정자는 배와 같다고 말했다. 배는 물보다 위에 있지만 여차 하면 물에 뒤집어진다. 겸손의 리더십을 가진 황제였다. 이런 자기 조절 능력이 있다는 것이 성군의 기질이다. 당 태종 이세민은 당나라가 세계로 뻗어 나가는데 있어서 현장법사를 가장 중요한 인물로 생각했다. 현장스님은 16년간 110개국을 답사하고 20개국을 전해 들었다. 현장법사의 자료는 당나라가 세계 1등국가가 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자료였다.
현장스님이 돌아왔을 때 당 태종은 고구려 정벌로 없었다. 당시 스님은 계엄령을 어기고 나갔기 때문에 죄인이었다. 당 태종은 당시 현무문의 변으로 왕위에 오르니 계엄령을 선포해 국경을 봉쇄한 것이다. 당 태종은 현장이 돌아왔다는 보고를 받고 제국에 도움이 되는 사람인지 먼저 판단하고 현장을 대우한 것이다.
Alaska는 원래 러시아 땅이었는데 1867년 미국에 불과 720만 불에 팔았다. 당시 러시아는 유럽 여러 나라에도 얘기했지만 다 거절했다. 그래서 미국인들은 쓸 데 없는 대형냉장고를 샀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Alaska는 미국이 한 선택 중 최고의 선택이 되었다. 남한 면적이 10만Km2 라면 Alaska는 171만 Km2 크기다. 사우디아라비아가 지금처럼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유전이 늦게 개발됐기 때문이다. 중국은 역사적으로 서역 패권을 놓치면서 기운다.
大唐西域記 12권은 변기스님의 綴文을 거쳐 완성되었다. 변기스님은 황궁을 출입하며 현장스님을 인터뷰하다 공주와 눈이 맞아 연애하다 걸려 사형당한다. 大唐西域記는 황제의 요청에 의해 만들어진 가장 공식적인 책이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와 함께 세계 3대 기행문이다. 혜초스님의 왕오천축국전 일본 엔닌스님의 입당구법순례행기는 아시아의 유명한 여행기다. 왕오천축국전은 인도를 다 돌아본 스토리다.
慈恩寺는 현장스님이 주로 계셨던 절이다. 중국은 크고 좋은 절에는 다 大 자를 붙인다. 大慈恩寺는 당 고조 이치가 모후인 문덕황후의 명복을 위해 세운 절이다. 당 고조는 아들을 위해서는 西明寺도 지어준다. 慈恩은 현장스님을 가리키는 말이다. 續高僧傳은 도선율사가 쓴 책이다. 고승전 속고승전 송고승전으로 발전한다. 도선율사는 불교의 중흥을 위해 열심히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왕조국가에서 황제를 만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황제는 늘 바쁘기 때문이다. 원측스님은 현장스님 제자였다. 서명사 주지는 도선율사가 된다.
圓測스님 – 신라 왕족으로 경주 모량부 출신. 3세 출가 15세<627년>에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 효소왕 5년<696년>에 84세로 당나라에서 입적했다.
續高僧傳엔 현장스님이 당나라에서 들어와서 하신 얘기가 추가된다. 의상대사는 화엄종의 개조로 당나라에서 화엄종을 연구하고 돌아와 10개의 사찰을 건립하고 화엄의 교종을 확립한다. 아마 서명사에서 도선율사를 만났을 것으로 추정한다. 도선율사는 우리나라 자장율사도 만난 분이다. 도선율사는 戒壇을 만들고 싶어했다. 자장율사는 신라의 율사로서 위상을 가지고 도선율사와 교류한 것이지 제자가 아니다. 자장율사는 도선율사보다 21년 먼저 통도사에 금강계단을 만들었다.
106회. 자현스님. 현장스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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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藏법사의 3장은 經律論을 뜻한다. 하나에 능통하면 1장법사 둘에 능통하면 2장법사 셋에 능통하면 3장법사가 된다. 주로 경전을 번역하신 분들에게 쓰이는 호칭이다. 학문하는 스님에 대한 최고의 존칭이다. 자현스님 책 표지에 그려진 그림은 현장取經圖다.
현장스님은 떠나자 마자 털렸다. 慈恩傳엔 더 리얼하게 그려져 있다. 大唐西域記는 공식 문건이라 재미가 없다. 이 책에는 나이가 당시 700세라는 사람도 만났다는 진귀한 이야기들이 많다. 인간의 기억을 넘어선 내용으로 보아 아마 단계석으로 만든 벼루인 端溪硯으로 틈틈이 기록했을 것이다. 답사를 다니며 붓으로 메모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인간의 기억은 정확하지 않다. 인간은 스스로 왜곡하기 때문이다. 如是我聞 나는 이렇게 들었다. 이 말도 보면 나<=아난>가 문제가 된다. 진짜 이랬다가 아닌데 사람들은 100% 확실한 부처님 말씀으로 믿는다.
현장스님은 13살에 낙양 정토사에서 출가했다. 형이 스님이라 11살때부터 형 따라 절을 다녔다. 너무 총명해서 저 나이에 어떻게 저런 걸 다 알지 하며 스님들이 좋아했다. 20대에 이미 당나라에 더 이상 배울 스승이 없었다. 그래서 인도로 떠난 것이다. 먼저 중국 남서부 양자강 상류에 있는 四川省으로 간다. 이 곳은 티베트와 통하는 지형이 폐쇄적이고 산이 많으며 애니미즘과 토테미즘이 발달한 곳이다. 불교 전래 이전 티베트의 토착 주술신앙엔 Bon교가 있었다. 티베트는 당나라 때 불교가 전래된다. 티베트는 고지대라 산소 밀도도 낮고 먹고 살 것도 볼 만한 것도 별로 없다. 그래서 수행하다 감각차단에서 일어나는 착시현상을 많이 겪는다.
반면 사천은 먹고 살기 좋고 기후가 따뜻한 곳이다. 주술과 도교색이 강한 지방이다. 그래서 지장전 또는 명부전에서 지장보살을 모시고 지옥의 일을 각각 나누어 관장하는 10명의 왕인 十王신앙이 나오는 곳이다. 또 한무제 때 동서교역로로 이용되던 실크로드보다 200년 앞서 형성된 인류 최초의 교역로였던 茶馬古道의 땅이다. 현장스님은 사천성에 가서 정보도 얻고 교류도 하며 준비를 했던 것 같다. 지금 유학 가는 것과 비교하면 안 된다. 사천성에서 고름이 나오는 거지를 만나 치료해주다 천축국에 가려면 비방으로 반야심경을 수지하라고 알려준다.
현장스님은 반야심경의 영험을 보았다고 생각하고 반야심경을 퍼뜨리는 바람에 티베트부터 일본까지 반야심경이 폭 넓게 전해지게 된다. 천수경은 중국은 안 하고 우리만 하는 경이다. 반면 반야심경은 북방불교에서는 모두 다 한다. 600권 대반야경을 압축한 제일 중요한 반야심경을 유행시킨 이가 바로 현장스님이다.
현장스님은 629년 당 태종 4년 28세 때 옥문관에서 출발한다. 현장스님이 정말 배우고 싶었던 경전은 유가를 행하는 자의 수행단계를 자세히 서술하고 유식학의 중요한 용어와 경전에 나오는 여러 용어를 풀이한 瑜伽師地論 100권이었다. 반야심경의 주인공은 관자재보살이지만 현장스님의 신앙대상은 미륵불이었다. 유가사지론은 미륵과 관련된 論書들이다. 인도불교의 2대 조류는 中觀과 유식이다. 유식학파의 시조가 미륵이다.
이 유식론을 근거로 세워진 종파가 慈恩宗<=瑜伽宗 法相宗>이다. 교종 중엔 華嚴宗과 法相宗 선종 중에는 禪宗과 天台宗이 최고다. 그 외 모든 종파와 관련된 淨土宗이 있다. 우리나라 유식 종파는 금산사 彌勒殿나 법주사를 생각하면 된다. 眞表律師는 경덕왕 때 유가론과 유식론을 중심 교학으로 하여 연구 체계화한 法相宗을 금산사에서 개종한 분이다. 유식학파의 최고 경전은 유가사지론이다. 머리를 아프게 하는 경전이다.
天梯道樹 Sankasia와 Buddha Gaya를 참배한다. 부다가야는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으신 곳으로 道樹는 보리수 잎을 뜻한다. 신통유적지로 Sankasia는 부처님께서 어머니 마야부인을 위해 도리천에 올라가 법을 설하고 33천에 불법을 편 후 다시 세상으로 내려오신 곳이다. 현장스님 방문 시 계단이 3개 남아 있었다는 기록도 있고 없다는 기록도 있다. 5세기 초 중국의 學僧 법현스님이 자신의 인도여행에 대해 쓴 高僧法顯傳에 보면 7개의 계단이 남아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계단을 만들어 내려왔다는 뜻이 뭘까?
티베트나 부탄 쪽 사원은 모두 중앙에 큰 사원을 중심으로 사방에 작은 사원을 배치한 구조로 되어 있다. 앙코르 와트 구조가 그렇다. 부처님을 모신 자리가 須彌壇 須彌座다. 고려시대 寶篋印다라니경을 넣어두는 4각형 寶篋印석탑이나 석굴암 사천왕상 중 북방다문천이 든 탑과 똑 같은 모양이다. 수미산을 상징한 것이다. 산치 대탑처럼 무덤형 탑도 있고 수미산 정상 형태로 만든 寶篋印탑도 있다. 불교는 인간 중심 특히 나 중심적이다. 아미타 부처님 같은 경우 서방으로 10만억 국토를 지난 너무 먼 극락에서 가르침을 펴신다. 그래서 그보다 가까운 곳이 관세음보살의 성지 남인도 보타락가산이다. 현장스님은 이곳에 가셨다.
불교는 아미타 신앙은 죽어서 가면 좋고 살아서는 같은 연결 공간에 있는 관세음보살이나 16나한이 좋다는 식이다. 입시에 붙여주겠다 했는데 너무 멀어 기도접수가 안 된 채 시험이 끝날 수 있기 때문에 응답하는 분이 가까이 있어야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衆生心이지만 인간의 마음엔 다 그런 측면이 있다. 지장보살도 원래는 현세 신앙이었다 나중에 변한 개념이다. 사람들은 살아서는 관세음 죽어서는 지장보살의 구원 아래 극락으로 간다는 이기적인 생각을 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지금 좀 희생하면 죽어 천국으로 보상을 받는다는 구조이지만 불교는 지금도 보상을 받고 천국에 가서는 또 받는 구조다. 집에 불 나면 중요한 건 바닷물 한강물이 아니고 내 욕조에 물이 얼마나 있느냐가 중요하다고 불교는 보는 것이다. Sankasias는 부처님의 존엄성과 동시에 멀지 않은 곳에 계신 곳이다. 天梯<Sankasia>道樹<Buddha Gaya>란 하늘에 이르는 계단과 진리의 나무 즉 보리수를 말한다.
현장법사는 629년 나이 28세 때 옥문관을 출발한다. 만리장성 끝 동쪽 山海關은 만주 방면으로 통하는 연안 및 육상교역로의 관문이자 요새이다. 옥문관을 나가면 실크로드가 시작된다. 그런데 당시 계엄령이 선포되어 출국이 어렵게 됐다. 점을 보니 당신은 붉은 비루 먹은 말을 타고 나간다 해서 그런 말을 샀는데 이 말이 현장스님을 살린다.
107회. 자현스님. 현장법사2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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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스님은 여정을 시작하자 마자 죽은 이를 극락으로 인도한다는 引路王 보살인 줄 알았던 가이드에게 다 털리는 위기를 맞는다. 산은 끝간 데를 모르고 귀신 소리가 들렸다고 했다. 아마 명사산의 모래가 바람에 공명을 울리는 소리였을 것이다. 중국 신장웨이우얼 자치부 서부에 있는 타클라마칸 사막은 오아시스가 전혀 없어 한 번 들어가면 죽어 나오는 곳이다. 반야심경을 늘 외우니 붉은 비루 먹은 말이 오아시스 국가로 현장스님을 데려다 준다. 서유기에서는 붉은 비루 먹은 말이 용이 변신한 흰 말로 각색되어 등장한다. 말이 저 살려고 찾아가는 것이다.
鳴沙山 – 둔황시에서 남쪽 방향 5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모래와 암반으로 이루어진 모래가 우는 산
현장스님은 머리 좋고 체력 좋고 인물 좋은 스님이었다. 어학 뿐만 아니라 문화 학습능력도 뛰어나 전체 종교논쟁에서 늘 1위를 했다. 외국인으론 불가능한 일이다. 국문태 왕은 현장스님을 좋아해 눌러 살기를 바랬다. 그러자 나를 풀어주지 않으면 굶어 죽겠다고 단식 농성을 벌인다. 국문태 왕은 현장스님의 구법여행 비용을 전부 지원한다. 이때 따라붙은 지원팀이 悟空 悟能 悟淨 悟慧다. 대신 떠나기 전에 나를 위해 법을 베풀어 달라고 간청해서 몇 개월간 고문태 왕의 등을 밟고 법좌에 올라가 설법을 했다. 현장이 28살의 초자 스님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참 대단한 일이다. 국문태 왕은 현장스님이 인도에서 돌아오면 배운 것을 나에게 가르쳐 달라고 부탁하고 보내준다.
국문태<623~640> – 당나라 고창국의 왕. 타클라마칸 북동쪽 지금의 Turpan 동쪽에 인접한 고대국가
현장스님은 인도에서 돌아오기까지 16년이 걸렸다. 돌아올 당시는 해로가 막 열렸을 때라 육상보다는 돌아오기가 훨씬 수월했지만 국문태와의 약속 때문에 육로로 돌아온다. 현장스님은 인더스강을 건너다 잡혀 나무에 묶여 화형을 당할 뻔하기도 한다. 이때 관세음보살을 외우니 기상이변이 일어나 살아난다. 인도로 가면서 현장스님은 Balkh에서 불교 역사상 최초의 신자인 제위와 파리의 탑을 본다. 미얀마 파고다 대탑의 부처님 머리카락은 제위와 파리가 가지고 온 것이라 말하지만 구라다. 인도 무역은 북서쪽이지 미얀마 쪽이 아니었다. 일단 미얀마 쪽으로는 길이 없다. Balkh엔 현재 이슬람 유적지밖엔 없다.
Balkh – 아프가니스탄 북부 발흐 주 북부의 오아시스 도시
3년간 각고 끝에 인도에 도착한 현장스님은 부처님 보리수도 참배하고 석가족 나라도 가보고 상카시아와 바이살리의 아쇼카대왕 석주도 가본다. 石柱를 닦으면 전생이 보인다는 기록도 나온다. 감녀서 본 바미얀 석불 이야기도 나온다. 아프가니스탄 바미얀 주의 힌두쿠시 산맥의 절벽 한 면을 파서 세워진 바미얀 석굴은 안타깝게 2001년 이슬람 원리주의를 내세운 Taliban정권에 의해 로켓탄으로 파괴되었다.
간다라 지역의 사천왕상은 옷을 안 입고 있다. 武服을 입고 창을 잡고 있는 모습은 중국화된 모습이다. 우리도 수원화성행차도 같은 그림을 보면 임금은 전쟁 때 입는 무거운 갑옷 대신 화살이 닿지 않는 거리를 두고 뒤에 떨어져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戎服을 입는다. 그래서 무인 복장 패턴도 바뀐다. 우리도 창과 탑을 잡고 있는 사천왕상이 있는데 北方毘沙門天王으로 볼 것인지 東方持國天王으로 볼 것인지 논쟁이 많다. 미술사적 보고다. 경전도 한문경전을 번역하면 뜻이 왜곡되지 않지만 영어경전을 번역하면 뜻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인접언어의 강점이 그래서 번역에 좋다.
戎服 – 임금이 봄 가을에 사냥하는 강우 때 악사와 악공이 모두 융복을 착용한다.
630년 현장스님은 Nalanda대학에 이르러 계현스님에게 瑜伽師地論과 여러 논서를 배운다. 당시 계현스님은 106세<?>였다. Nalanda대학은 크기가 지금이 거의 10Km에 이르는 도시 급 규모로 1만 명의 스님들이 머물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런던의 인구가 5만 정도였다. 계현스님은 3년 전 몸이 아파서 입적하려 했는데 명상 중에 문수보살이 나타나 네 제자가 지금 중국에서 출발했다는 말을 듣고 현장스님을 기다렸다는 말을 듣는다.
중국에 건너가 達磨多羅禪經 大盤泥洹徑 등을 번역한 불타발타라<각현> 스님은 계현스님 조카다. 동석했던 조카에게 이런 스토리를 말하게 하고 언제 출발했냐고 묻자 3년 전이라고 답한다. 의상스님도 비슷한 스토리가 있지만 후대 쓴 내용이라 다 믿을 수 없다. 현장스님도 본인 진술 뿐이니 맹점이 있다. 당시 시대 상황이나 유물 등이 정확히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거짓은 아닌 것 같다. 현장스님은 살았을 때 신격화된 유일한 사람이다. 현장스님은 임금과 최고 고승들만 먹었던 향이 나는 쌀을 먹었다. 수행비서만 30명에 전용 말과 코끼리가 제공되는 최고 대우를 받았다. 그리고 유가사지론을 배운다.
1779년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 때 나일강 하구 로제타 마을에서 비석조각을 발견한다. Rossetta stone은 문자가 가득 새겨진 가로 72cm 높이 114cm 두께 30cm의 화강섬록암이다. 1809년 그로노플 대학 역사학 교수로 있으면서 오랫동안 이집트어를 연구한 Jean Francois Champollion이 1822년 비문 해석에 성공한다. 샹폴리옹은 어학천재로 하나의 어학을 익히는데 3개월이 걸렸다고 한다. 지금 같으면 판독이 쉬웠을 것이다. 고대 언어는 양이 많은 글자의 규칙성을 발견해서 판독한다. 그래서 인더스 문명은 글자 양이 많지 않아 지금도 판독을 못하고 있는 것이다. Rosetta석엔 똑같은 문장을 상형문자 그리스 아랍문자 3언어로 쓴 비석이다.
중세 기독교는 아담과 이브부터 성경의 족보를 계산한 결과 천지창조는 기원전 4004년이라고 말했다. 이집트에 너무나 가고 싶었던 샹폴리옹은 이집트에 천지창조 이전의 유물이 있다는 말을 듣는다. 문자를 해독할 수 있기 때문에 직접 증거를 발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주교는 샹폴리옹이 이집트에 가지 못하게 계속 막다 당신이 그걸 발견해도 공개하지 않는 조건의 각서를 쓰면 용인해 주겠다고 말한 뒤 보내준다. 이집트에서 유물을 발견한 샹폴리옹은 풍토병으로 죽을 때까지 유물을 공개하지 않았다. 현장스님은 샹폴리옹보다 어학이 훨씬 뛰어난 사람이다.
왕오천축국전의 혜초스님은 Nalanda대학을 지나갔지만 기록이 없다. 아마 외국인 특별전형이 없었던 모양이다. 문제는 언어 능력과 그들의 문화를 읽을 수 있는 이해력에 달려 있다. 문화란 우리가 미국 개그를 이해 못하는 것과 같다. 현장스님은 3년 동안 가면서 배웠기 때문에 어느 정도 문화에 대해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공부도 중요하지만 중생과 나눌 수 있는 포교도 중요하다. 가서 너희 나라를 교화하라! 라는 스승의 말을 듣고 현장스님은 중국으로 돌아간다.
108.자현스님. 현장법사3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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