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쇼 라즈니쉬도 극찬한 유럽의 달마대사 '구르지예프'
http://blog.naver.com/eyeskyssh/80120823818
구르지예프는 이 시대에 가장 중요한 스승 중의 하나이다.
그는 여러 면에서 매우 독특하다.
현대에서는 구르지예프처럼 말한 사람을 찾아 볼 수 없다.
그의 말은 굉장히 불합리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인간의식의 자유에 관한 심오한 사유를 던져 준다.
그런 점에서 구르지예프는 달마 대사나 장자와 비견될 수 있다.
-오쇼 라즈니쉬-
아르메니아 출생. 유물론적 오컬트 교의(敎義)를 창시, 20세기 초엽의 신비사상과 1960년대 히피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지금도 그 후계자들의 활동은 주목을 받고 있다. 젊어서 인도 ·티베트 ·아랍 국가의 여러 지역들을 방랑하며, 러시아 특무기관원 노릇을 하기도 하면서 20년간에 걸쳐 비교(秘敎) ·점술 등에 관한 연구를 하였다.
1912년부터는 러시아에서 자신의 비교 조직을 구축하고 유럽으로 건너가자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그는 인간을 구속하는 낡은 사고와 감정을 벗어난 영적 자유의 달성을 추구하였는데, 이를 실현하기 위해 ‘워크(work)’라는 시스템을 제시했다. 중력(重力)과 누습(陋習)으로부터 육체와 정신을 해방시켜 가는 수행법(修行法)이 포함되며, 전체적으로는 현대 정신의학에서 말하는 집단요법 ·예술요법을 추가한 서양적인 선법(禪法)이 강조되었다.
20세기 신비주의 운동가로서 슈타이너와 쌍벽을 이룬다. 주요저서에 우주론적 우화집인 《베르제부브가 손자에게 주는 이야기》(1950), 자서전 《주목할만한 사람들과의 만남》(1964) 등이 있다.
내가 현존할 때 삶은 실재한다 동양의 비의적 가르침에 근거해 독특한 사고체계를 확립한 구제프(George Gurdjieff). (보통 구르지예프라고 표기하지만 이 기사에서는 구제프라고 했음)
존재와 에고에 대한 일체의 환상을 깨뜨림으로써 본성으로 회귀할 것을 강조한 구제프는 고행과 금욕, 아쉬람 없이도 차원 높은 의식에 도달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이것이 의심스러운 사람은 구제프의 말에 귀 기울일지니, “ 네 스스로 사고하고 검증하라!”
“제 4의 길에 따르면,
우리는 결코 ‘나’를 갖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나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1927년의 원고「단상집 서문」에서 P. D. 오스펜스키는 이렇게 쓰고 있다. “두려움이 내 안의 지배적인 감정이었다. 나를 잃을 것 같은, 미지의 땅에서 사라져 버릴 것 같은 두려움…. 당시에 내가 썼던 편지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나는 지금 당신께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음번에 편지를 써서 내 이름으로 서명을 할 사람이 누구일지 나는 모릅니다. ’두려움이란 바로 이런 것이었다.”
오스펜스키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시스템’‘워크walk’혹은‘제4의길(the fourth way)’의 영향력이었다. 이 비의적인 가르침은 개인의 강도 높은 노력을 요구하는 수행법으로, 자신을 앎으로써 보다 높은 의식 상태를 획득, 실재에 대해 완벽히 새로운 경험을 하도록 만드는 데에 그 목적이 있었다.
감성과 본능, 지성을 통합한 수행법 동양의 오랜 비의적 원천들을 토대로 위와 같이 강력한 개념들을 만들어 서양에 전수한 게오르그 이바노비치 구제프G.I.Gurdjieff. 이십 세기 위대한 스승 가운데 한 명인 그는 심오한 심리적 통찰부터 개인과 우주를 연결하는 웅대한 우주론까지 아우르는 독특한 사고 체계를 확립하여, 이를 서양인의 사고에 맞게 구성, 그들에게 실제적인 가르침과 수행법을 통합시켜 전파했다.
이 가르침을 제4의 길이라 칭한 이유는 의식을 변화시키는 다른 방법들 (승려의 길, 고행승의 길, 요기의 길)과 이를 구분하기 위해서였다. 각각의 고전적인 방법들이 감성과 본능, 지성이라는 측면 중 어느 하나에만 초점을 맞춘데 비해, 제4의 길은 이 모든 차원을 동시에 다룸으로써 일상적인 삶의 한가운데에서 내적인 변화를 꾀할 수 있는, 보다 조화로운 개인을 만들어내는데 목적을 두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4의 길에는 수도원이나 아쉬람, 신체적인 금욕주의 같은 것들이 필요하지 않다. 그럼에도 보통 수련 장소에서 행해지는 훈련방법 못지않게 제4의 길은 강도 높고 절박한 개인의 노력을 요구한다. 요컨대 구제프 워크는 전적으로 내면을 향해있고, 눈에 보이지 않으며, 또 개인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구제프는 아주 극적인 방식으로 제자들을 가르친 스승이었다. 그는 충격적인 행위와 욕설로 제자들을 압도했으며, 외부세계에는 알려지지 않은 공동체에서 고대의 춤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의 제자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로 러시아의 철학자인 오스펜스키를 들 수 있는데, 그는 후에 스승 구제프를 떠나 영국에서 보다 지적인 방식으로 이 행법을 가르쳤다. 오스펜스키의 강의는 언어도단적인 구제프의 글에 비해 훨씬 이해하기 쉽고 분명하며 매혹적이었다. 현대의 많은 신비주의학자들은 로드니콜린Rodney Collin과 모리스 니콜Maurice Nicoll 같은 구제프 제자들의 워크와 오스펜스키의 워크를 결합하여, 진리에 목말라하는 구도자들에게 제 4의 길을 재해석해주고 있다.
너 자신이 자동인형임을 자각하라 먼저『인간 진화의 심리학(The Psychology of Man’s Possible Evolution)』에 실린 오스펜스키의 강연내용을 보면, 그는 심리학이 그 근원과 진정성에서 멀어졌다는 말로 시작하고 있다. 그는 또한 심리학이 인류에게 알려진 가장 오래되고 본질적인 학문이며 역사상 요즘처럼 이렇게 많은 심리학이론들이 등장했던 시기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심리학은 이미 잊혀진 학문 가운데 하나가 되어 버렸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는 심리학 이론을 크게 두 개의 카테고리로 나누었는데, 첫째는 현재상태가 어떠할 것이라는 이해와 상상에 근거하여 개인을 연구하는 체계로, 오스펜스키는 바로 이 체계에 입각해야만 심리학의 잊혀진 기원과 의미를 설명 할 수있다고 강조했다. 오스펜스키의 말에 따르면 심리학은 ‘인간의 진화에 대한 원리와 법칙, 사실들을 연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기본전제는 인간이 결코 완성된 존재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오스펜스키는 이렇게 말한다. 자연은 인간을 어느 일정한 단계까지만 발전시키며, 그다음 발전을 도모하고 진전시킬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인간 개개인의 노력뿐이라고. 또한 그는 “현재 인간 안에 내재한 가능성의 대부분은 개발되지 않은 채로 있으며 아울러 자기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개발할 수 없는 인간 내면의 특질과 개성들이 존재하는데, 바로 이를 끌어올리고 개발시키는 것이 진화입니다.”라고 말했다.
흔히 의식의 진화는 개인의 노력에 달린 문제라고 여기는 시각 때문에 인류 사이에서는 이를 논외로 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오스펜스키는 자신의 주장에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는 사람들을 향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각성을 원치 않는데, 그 이유는 오랜 동안의 절실한 바람과 필수적인 노력 없이는 무언가 다른 존재로 진화 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오스펜스키가 다른 많은 사람들의 의식 상태를 꿰뚫어 보았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사람들은 자기에게 없는 특질을 이미 갖고 있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제 4의 길이 내적진화를 이루기 위한 첫걸음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진정한 자각을 강조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인간은 많은 기계들을 고안해냈습니다. 때문에 아주 복잡한 기계를 다루기 위해서는 몇 년간의 세심한 공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요. 그러나 정작 인간은 이런 깨달음을 자기 자신에게는 적용시키지 않고 있습니다. 인간자신이야말로 인간이 만들어낸 그 어떤 기계보다도 훨씬 더 복잡한 기계인데 말이죠.”
여기에서 ‘기계(machine)’는 외부적인 힘에 의해 움직이는 것을 말한다. 모든 행위와 생각, 감정들이 말하자면 외부적 사건에 대한 반응이라는 것이다. 구제프와 오스펜스키에 따르면 이런 기계적 인간(사실 인류전체가 이에 포함된다)은 자신의 진정한 조건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결코 변화할 수 없다. ‘인간은 사실 이전의 경험들에 대한 기억과 일정량의 에너지를 저장하고 있는 자동인형이나 마찬가지’라는 게 바로 오스펜스키의 말이다. 사실 인간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보이지 않는 끈에 의해 인형이 조종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런 현상을 인지할 수 있기만 하면 모든 것들이 인간을 위해 변화할 수 있다고 오스펜스키는 생각했다. 인간은 외적자극에 반응하는 기계이지만, 나아가 자신이 기계라는 것을 아는 기계이므로! 이를 깨닫는 순간 인간은 단순한 반응체로 존재하기를 멈춘다는 의미이다.
서로 다른 ‘나들’로 이루어진 나 제4의 길에서 주장하는 또 하나의 핵심 사상은 개인이 결코 하나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에겐 결코 영구적인‘나’가 없으며, 우리가 흔히 나라고 믿는 것이 사실은 생각과 감정, 감각, 욕망들일 뿐이라는 것. 그러나 우리가 ‘나’라고 여기는 것들 중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은 하나도 없으며, 제각각 외부적인 환경변화에 의지하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이 각각의 ‘나’ 사이에는 서로를 분리시키는 견고한 방어벽이 존재하는데, 완충물(buffer)’이라 부르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구제프는 우리가 흔히 갖고 있는 통일성에 대한 환상이야말로 가장 심각한 오해 가운데 하나라고 지적하며 이렇게 덧붙였다.
“평범한 사람들의 ‘나’는 그의 생각과 감정, 기분이 변화하는 것만큼이나 빠르게 변화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항상 같은 사람이며 통일된 하나라는 생각은 중대한 오해지요. 실제로 인간은 매순간 다른 존재입니다. 한 순간 전의 자신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각각의 생각과 욕망들은 전체적인 나와는 독립적으로 따로 존재한다. 구제프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는 수천의 분리된 ‘나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서로 잘 알지도 못하고 배타적이며 심지어는 적대적이기까지 한 수천의 ‘나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인간은 하나의 복수체(aplurality)입니다. 인간의 이름은 복수이지요.“라고 구제프가 말한 것도 그런 의미에서다. 우연적으로 작용하는 외부 요인들이 이런 ‘나들’을 교체하고 조정한다. 그러나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 ‘나들’의 변화를 조정할 수 없다. 그리하여 낱낱의 개별인 ‘나’는 자신을 완전한 하나의 인격으로 호명하며 그 이름으로 행동한다. 사람들이 어떤 결정을 내리고도 정작 그것을 실천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만약 조금만이라도 자기 자신을 관찰해본다면, 자기 스스로가 내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자각하지도 못한 채 단지 자신에게 부과되는 자극에 따라 생각하고 느끼고 움직이고 반응한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될 것이다.
제4의 길에서 요구하는 가장 실제적인 노력은 자기관찰이다. 누구든 배우는 사람들은‘관찰하는 나(observing)’를 만들어서 자신의 내적인 활동을 객관적으로 관찰해야한다. 물론 아무런 판단 없이 주시할 수 있는 객관적인 공간을 만들어낸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알아야 한다. 깨어 있되 자고 있는 상태와 기계적인 행동에서 벗어날 수 있는 첫 번째 돌파구가 바로 자기 관찰이라는 사실을.
어린 시절부터 구제프 워크를 받았던 저명한 심리학자 캐슬린 스피스는 구제프와 오스펜스키가 가르친 것이 결국은 에고의 다양한 파편들을 자각함으로써 완충물의 작용을 점차적으로 감소시키고 한 개인 속에 존재하는 여러 개의 ‘나들’이 서로 친숙해지도록 만드는 심리치료법이나 마찬가지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제4의 길이 인간을 대하는 관점의 배경에는 또 다른 요소가 있으며, 그것은 의식의 개념을 어떻게 정의하는가와 관련 있다.
오스펜스키는 정신의 활동이 곧 의식이라는 개념을 무시한다. 대신 그는 한순간 우리가 존재하는 곳, 즉 존재의 가장 깊은 차원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에 관한 특별한 종류의 인식을 의식이라 여겼다. 따라서 의식은 결코 똑같은 상태로 존재하지 않지만, 특별한 노력과 공부를 통하면 의식을 연속적으로 이어나가고 조절 가능한 것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잠든 자는 존재할 수 없다 구제프 워크에서는 의식의 상태를 네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다. ‘ 수면상태(sleep)’와 ‘깨어 있는 상태(waking sleep:깨어 있으나 잠든 상태)’ ‘자기의식 상태(self-consciousness)’ ‘객관의식 상태(objective consciousness)’가 그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이것 중 세 번째인 자기의식을 스스로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드물게 일어나는 각성의 순간에만 자기 자신을 의식할 수 있다. 이런 순간적인 자기의식은 예외적인 상황, 즉 고도로 감정적이거나 위기가 고조된 상황, 전혀 뜻하지 않은 새로운 상황에 처했을 다가온다. 때문에 우리는 이것이 가고 오는 것을 결코 스스로 통제할 수 없다. 이를 가리켜 오스펜스키는 “일상적인 의식 상태에서 우리가 얼마나 잘못된 관찰을 하고, 잘못된 이론과 잘못된 결론을 믿으며, 잘못된 추측을 내리는 경우가 많은지를 안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더 이상 믿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스피스는 그녀의 책『구제프 워크The Gurdjieff Work』에서 이렇게 강조했다“. 우리가 진정한 자기의식을 갖는 순간이 거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람들은, 자신이 관찰당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헤벌어진 입과 멍한 시선을 연구해볼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보다 차원 높은 의식 상태로 존재함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무엇인가. 제 4의 길에서는 그 중심적인 장애물이 바로 ‘동일시(Identifica-tion)’현상이라고 한다. 오스펜스키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 상태에서 인간은 개별적인 인식을 갖지 못합니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 우연히 다가온 행위와 감정, 생각에 함몰되어 버리고 마는거죠. 자기 자신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함몰되어 빠져 있기 때문에, 이런 상태는 깨어 있으되 잠든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일시 상태에서는 우리의 의식이 외부를 향해 집중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만다. 그러나 자기의식은 자기 자신을 인식한 상태이기 때문에 더 이상 외부 사건들에 휘둘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자기의식에서 한 차원 높은, 도달해야 할 보다 높은 의식 상태가 있는데, 구제프 워크에서는 이를 ‘객관 의식 상태(objective consciousness)’라 부른다. 이 상태에서 우리는 오감에 의해 단절되어 있는 실재의 세계를 접하게 된다.
심리학자 중에는 차원 높은 의식 상태를 일종의 몽상 상태로 여기며 무시하는 이들도 있다. 일례로 무의식의 영역에서 그토록 많은 것을 발견해낸 프로이드가 인간의 일상적인 의식 상태보다 낮거나 높은 상태의 의식을 상정하지 않은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의식의 보다 고요한 영역은 분명 존재하며, 구제프 워크에서는 이를 ‘고차원적 센터(thehigher center)’라 부른다. 그런데 이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삶의 많은 시간을 바치고 있는 마음의 소란스러운 영역을 넘어서야 한다.
여러 문화권에서 발견되는 명상이나 참선 등의 종교적인 수행법은 이런 차원 높은 의식 상태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데, 이는 물론 매우 어렵다. 우리의 의식은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망상들에 붙들려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이 끊긴 순수한 의식 상태에 이르는 것, 진리가 우리 앞에 말없이 곧바로 드러나는 순수한 의식의 상태를 받아들이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참 본성으로 회귀하는 법 제4의 길에서는 심리적인 왜곡의 뿌리를 좀 더 분명히 파악할 수 있도록 개인의 두 가지 측면, 즉 에센스(essence)와 퍼스낼리티(personality)를 분리해서 설명한다. 에센스가 인간이 본래 갖고 태어나는 것이라면, 퍼스낼리티는 후천적으로 습득되는 것이다. 후천적으로 습득한 좋고 싫음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익힌 모든 것들과 모방이 개인의 외면적인 부분을 구성하는데, 이는 외부환경에 따라 변화한다. 이런 퍼스낼리티는 필요한 것이긴 하지만, 이 퍼스낼리티가 에센스를 지배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 퍼스낼리티가 에센스를 지배할 경우, 자신의 참된 본성과 멀어진 부조화된 인간이 되기 때문이다.
“이는 곧 퍼스낼리티가 어린 나이에 급히 형성될 경우, 에센스의 발현이 어릴 적부터 멈출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결과 외형은 성인이지만, 에센스는 열 살 혹은 열두 살 수준에서 멈추게 되는 것이죠.” 그러나 ‘자기 상기(self-remembering)’ 훈련을 하면, 어린 시절부터 우리를 묶어놓은 가장과 모방에서 벗어나 자신의 진정한 에센스를 회복할 수 있다. 그리고 이처럼 자기본성으로 회귀하는 시점에는 그 어느 때와도 견줄 수 없는 자유의 감정이 동반한다.
자신의 진정한 본성대로 존재하는 것이 자기 계발은 물론 보다 높은 의식 상태를 획득하기 위한 첫 관문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오스펜스키의 수제자로, 후에 멕시코에서 제 4의 길 학교를 연 로드니 콜린은 “인간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퍼스낼리티와 에센스 사이의 괴리에 있다”고 말했다. 이는 우리가 본래 자기의 모습을 보다 정확히 알면 알수록, 그 만큼 지혜에 가까워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바꾸어 말하면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이 본래 모습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점점 더 비정상적인 사람이 되어버린다는 뜻이 된다.
“먼저 자기 자신을 알지 않으면, 자신의 본성과 운명을 파악하지 못하고 그 본성과 운명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결국 모든 노력과 성취는 퍼스낼리티라는 모래 위에 세운 사상누각이 되고 맙니다. 그러면 커다란 충격에 구조전체가 무너져 내리고, 그것이 와해되는 속에서 자기 자신까지 파괴돼 버리고 말죠.”
로드니 콜린에게 개인의 영혼이란 일생 동안 맞이하는 자기 인식 순간들의 총화이다. 그러나 이런 자기 인식의 순간들은 엄청난 스트레스나 기쁨, 고통, 인고의 시기에 극히 드물게 다가오며, 혹 왔다가도 금방 지나가버리고 만다. 그리고 이는 집중력을 의식적으로 발휘하는 것이 자기 인식의 순간들을 붙잡는 데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다시금 되새기게 한다.
내면의 작용에 관한 가장 실제적이고도 세밀한 연구서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역작 “구제프와 오스펜스키의 가르침에 대한 심리학적인 논평(Psychological Commentaries on the Teaching of Gurdjieff andOuspensky)”을 쓴 모리스 니콜 역시 “워크가 진행됨에 따라 지금까지 나 자신이라고 여겨 붙들고 있던 것들이 저 멀리 내 아래 골짜기에 있는 작은 감옥처럼 보이기 시작했다”고 고백한 바 있다. 이는 의식의 세 번째 상태, 즉 ‘자기상기’ 상태에 대한 생생한 표현이다. 보다 차원 높은 이런 의식을 획득하면 어수선한 외부 상황 속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고 모든 부정성에서 깨끗하게 벗어날 수 있는데, 이는 현재에 뿌리를 내린 고양된 각성상태를 유지하고자 하는 각고의 노력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우연한 순간에 찾아오는 섬광 학생들이 외부적인 자극에 자동적으로 반응하지 않는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불평과 오래된 습관, 자기기만 등에 끊임없이 대항해야만 한다. 여기서 문제는 자기 자신을 화나게 만드는 무언가에 대해 분노로 대응하지 않는 자제력을 가지는 것이다. 에너지를 감정의 폭발로 허비하지 않고 축적하면, 강력한 의식, 즉 평화와 기쁨과 심원한 자유가 물밀듯이 밀려드는 순간에 이 에너지를 사용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런 귀하고도 흔치 않은 순간들은 매우 불합리한 사건과 함께 온다. 밤이 깊어 가장 어두울 때 갑자기 나타난 한 줄기 빛이 그 어둠을 깨뜨리는 것처럼.
또한 자기 상기가 자기에 대한 객관적인 통찰과 결합될 경우엔, 타고난 본성이나 후천적으로 습득한 습관에 전적으로 휘둘리지 않는, 균형 있는 개인을 만들어내는데 도움을 준다. 그러나 우리가 감성적이고 본능적인 부분을 배제한 채 순전히 지성의 지배만 받을 경우, 실재를 보다 폭넓게 느끼는 일은 불가능하며, 이는 그 반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기계를 올바르게 작동하기 위해서는 여러 해 동안 계속된 오작동의 경험이 전제되어야 하고, 그 속에서 굳어진 태도와 행동을 변화시키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오스펜스키는 삶이 우리를 어딘지 모르는 곳으로 데려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에서야 비로소 삶이 의미를 갖기 시작한다고 제자들에게 말했다. 이는 결코 철학이 아니다. 우리 자신과 우리를 둘러싼 세계에 대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놓을 수 있는 실제적인 깨달음이다.
또한 모리스 니콜은 그의 저서『심리학적인 논평』을 통해 실제적인 변화가 가져다준 처음 상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쉽게 화내고 성내는 의례적인‘나’에게서 에너지를 거두어들이면 점차 폭넓고 새로운 느낌이 다가온다. 마치 내가 훨씬 더 큰 장소에서 살고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 이는 마치 새로운 문명, 다른 삶의 형태로 인도되는 것과 같다.”
그는 자기 관찰의 내적인 카메라를 사용하면 마음이 감각으로 점철된 정신의 상태를 넘어서게 된다고 말한다. 제4의 길에서 심리적인 경험이 종교적인 성격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이에 대해 로드니 콜린은『빛의 거울(The Mirror of Light)』이라는 작은 책을 통해 “행위 하는 것이 우리 자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 자신은 곧 도구이며 우리를 통해 행해질 수 있는 일에 제한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고 말했다.
따라서 자기 상기는 일상적인 자아감에서 벗어나 오랫동안 명상 수련을 한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는, 그 순수한 초월의 공간속으로 들어가 고양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한 가지 다른 점은 제4의 길에서는 거리를 걷거나 쓰레기를 버리는 동안에도 이 새로운 의식의 탄생을 경험할 수 있다고 말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워크가 이렇게 실제적인 태도로 접근함에도, 자기 상기는 여전히 다른 모든 영적인 수행법처럼 만질 수없는 역설적인 것으로 남아 있다. 로드니 콜린도 제자들에게 우리 자신을 잊어버리지 않는 한 결코 자신을 기억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는데, 이는 선禪수행의 공안을 떠올리게 한다. 게다가 인식의 힘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그는 제 4의 길과 시공간을 초월하는 모든 지혜를 결합시켰다.
그리고는“아름다움을 느끼는 것, 진리를 느끼는 것, 그것이 바로 자기 상기입니다. 자기 상기는 신의 현존에 대한 자각이지요.”라고 강조했다.
혼돈과 타락은 어디에서 시작되나 우리가 비록 반 몽상 상태 속에서 살고 있지만 거기서 깨어날 수 있다는 진리의 언설은 우리에게 완전히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다. 그것은 마치 우리 자신에 대한 환상이 밝은 의식의 불빛 아래 녹아내림과 동시에 우리를 자유롭게 만들어주는 새로운 차원의 실재에 눈뜨는 것과 같다. 이런 상태가 되면 우리는 어떤 방어벽이 나가면, 혹은 인간 상호작용에 영향을 미치는 혼돈 없이도 주변의 세계와 관계 맺을 수 있다. 그리고 마침내 새로운 종류의 연민을 품을 수 있게 된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임종의 자리에서 구제프는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지금 상당한 혼란 속에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말이 예언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이 1949년 그의 사후 드러나기 시작했다. 제 4의 길에서 제시한 개념과 가르침들이 그토록 강력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그룹을 형성할 때 생기는 사회적인 문제점을 그들 역시 피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각각의 학교들이 모두 나름의 장단점을 갖고 있었지만, 그들 자신이 극복하려 했던 그 ‘기계성(mechanicalness)’으로 인해 그들 역시 유사한 문제들을 겪어야 했다.
필자도 근 사년동안 구제프워크를 수행하는 학교 중 한군데서 학생으로 지낸 적이 있었고 그때의 경험이 필자의 인생을 크게 변화시킨 것은 물론 사실이다. 그러나 그 놀라운 격동의 시기가 끝날 무렵에 필자가 얻은 중요한 깨달음 가운데 하나는, 그 학교에서 내가 체험한 놀라운 일들이 그 학교를 떠나고 있다는 점이었다.
구제프는 제자들에게 생각만큼 그렇게 분명하지 않은 주장들에 대해서는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한다고 누누이 강조했다. ‘ 모든 것을 입증하라’는 것이 그의 가르침을 관통하는 모토였던 것이다. 때문에 그는 맹목적인 믿음이나 그 자신에 대한 숭배를 참을 수 없어했다. 나아가 구제프는 그를 사랑하고 양떼처럼 따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제자들에게 깨우쳐주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 기울였다.
불행하게도, 이제 구제프와 같은 스승을 찾아보기는 어렵게 되었다. 스스로 고차원적인 의식 상태에 이르렀다고 주장하며 염력을 실연해 보이는 사람들은 많지만, 이들조차 권력을 갈망하는 편협한 에고의 횡포에 휘둘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욱 나쁜 것은, 신적인 혹은 그에 가까운 존재처럼 보이는 자의 멍청한 하인이 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심지어는 영혼까지 팔려고 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는 점이다.
물론 구제프-- 오스펜스키워크를 책임져온 사람들의 대부분은 제4의길 학교에서만은 그러한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으리라 확신했다. 우리들 중에는 의사나 변호사, 심리학자 등 온갖 분야의 전문가들이 포진해 있었고, 우리는 에너지가 보다 차원 높은 의식으로 전이될 수 있는 것처럼 외부 세계에서 전해지는 인상들 역시 오감을 통해 받아들여진다는 가르침을 진지하게 다루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인류 문명이 일구어낸 최상의 것, 위대한 그림과 음악은 물론 모든 시대에 걸쳐 전수된 철학적 성찰 등, 우리의 차원 높은 센터를 보다 풍요롭게 해줄 수 있는 것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리고 그 덕분에 우리는 텔레비전과 인스턴트식품에 의해 성장한 미국인에서 시와 고전음악, 인간의 사고에 대한 최고의 통찰력을 지닌 사람으로 변화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환경 속에서도 유치한 컬트(어떤 대상을 숭배하는 그룹)에서 발생하는 것과 똑같은 문제들이 생겨났다. 돌이켜 생각해보건대 스승이 추종자들을 끌어 모을 경우에는 언제나 이런 문제들이 발생하는 것 같다.
폐쇄적인 집단 내에서 서로 다른 개성들이 충돌하여 발생하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누구나 잘 알고 있을 것이다. 1970~80년대 사이에 다양한 컬트 집단들이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붕괴한 것을 목도한 경우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들은 권력 게임을 벌이며 우두머리를 숭배하고 서로 속였으며, 멤버들 사이에서는 학대와 강간과 성적 추행 등의 일이 반복되었다. 수준 높은 이념과 수행법을 실천하는 제4의 길에서도 이런 타락상은 나타났는데, 이는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기르고, 동기를 순수하게 만들며, 편협한 에고의 충족보다 고차원적인 것을 추구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러한 문제점은 구제프가 죽기 전부터 씨앗을 내포하고 있었고,1924년 미국을 방문한 구제프는 자신의 사상이 오해, 오용되고 있다고 이미 경고한바있다. 마지막 저서인『‘내가 현존’할 때, 오로지 그때만 삶은 실재한다(Life is real only then, when‘ I am’)』에서 구제프는 특별히 자기 상기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자기 상기가 학생들로 하여금 영적 경험을 정화하는 일에 뛰어들도록 만드는 대신, 심리적인 트릭정도로 축소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는 의식진화의 다음 단계와 관련해서 구제프와 오스펜스키가 충분히 설명하지 않은 탓도 있다. 이로 인해 많은 학생들이 ‘자기 관찰과는 분리된 집중’이라는, 중요하지만 과도적인 단계에 고착되어 있는 경향이 종종 있으며, 보다 차원 높은 의식을 향한 돌파구를 만들어내지 못할 경우, 과도한 자기집중은 사람을 질식하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비의적 차원을 떠난 제 4의 길이 개인적인 힘의 과시와 비인간적인 태도를 부채질하는 것으로 격하될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기계성과 통일성에 대한 환상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워진 사람은 아직 완전하게 각성되지 않은 의식의 횡포에 갇혀 있는 사람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는 금언은 과거에는 물론 지금 시대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할 수 있다.
비의적 가르침의 진정한 의미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위험한 것은 ‘객관 의식’으로 인해 자신은 물론 세계와의 관계를 차갑게 분리된 것으로 경험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일례로 필자가 잠시 몸담았던 학교의 어느 선생님은 워크를 통해 후천적으로 습득된 퍼스낼러티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워지고 타인의 심리를 깊이 이해하는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딸을 가리켜 진화된 의식의 빛없이 자극에 반응하는 단순한 기계, 봉제인형과 같다는 말을 서슴지 않았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것은 그런 사람이 과거에는 물론 지금도 변함없이 존경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 사람과 제자들의 관계는 마치 왕과 양떼의 관계 같다.
가르치는 자들이 학교에 몸담은 개인들의 욕구에 대해 매우 매정하며, 이런 사악한 태도들이 종종 왜곡된 가르침에 의해 정당화된다는 점도 큰 문제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구제프는 행동이 다소 직설적이긴 했어도 근본적으로는 선하고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비의적인 가르침이란 삶을 변화시킴으로써 모든 인류에게 본래 모습을 되찾아주고 신적인 사랑의 빛의 통로가 되게 하려함이지, 모든 인간적인 것을 거부하는 길로 인도하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워크는 분명 인간의 심리에 강한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따라서 학생들을 그 스승과 수행법의 노예로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제4의 길의 본래 목적은 그 모든 가능한 문제를 피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인도하는 것이다.
우리를 우리 안에 있는 진정한 스승에게 인도함으로써 워크 자체가 지닌 놀라운 사상체계까지도 초월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또한 제4의 길은 학생들 스스로 보다 차원 높은 의식을 발견하는 것을 중시한다. 때문에 스스로 깨어 있음으로써 그 보물을 받아들일 노력을 하라고, 언제나 지속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려는 그보다 높은 의식을 경험하라고, 일러준다.
-데일리 경인 김광충 기자-
[출처] 오쇼 라즈니쉬도 극찬한 유럽의 달마대사 '구르지예프' |작성자 정진연하경
'기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불상의 머리는 왜 곱슬인가? - 여진스님 (0) | 2021.07.18 |
---|---|
이 또한 지나가리라 (0) | 2021.07.18 |
무릎을 탁 치는 중국불교 이야기 (0) | 2021.07.04 |
현장스님 (0) | 2021.07.04 |
달마대사와 그림에 대하여 (0) | 2021.06.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