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왜 유럽으로 가지 않고 중국으로 갔을까?
모든 문화는 낮은 데로 흐른다. 당시 서구엔 로마가 있었다. 중국은 수당대가 최전성기였다. 그래서 모든 길은 장안으로 통했다. 장안을 따라 경주도 바둑판 모양의 도시를 건설했다.
중국인들이 생각하는 중국은 황하강 유역. 유목민들이 두려워 세운 것이 만리장성이었지만 쓸모가 없었다. 반면 대운하가 없었으면 동과 서로 나라가 쪼개졌을 것이다. 나라가 많으면 세금을 많이 내야 하는 문제가 있다. 그런데 통일되면 돈이 더 많이 들고 세금이 많아진다. 2,000년 전 만든 운하가 아직도 쓰이고 있다. 어느 나라든 통일되면 다시 분열되는 역사의 법칙이 있다.
불국토 안에서는 백제 사람도 없고 고구려 사람도 없다. 이런 갈등 때문에 지어진 것이 불국사다. 중국은 용광로다. 몽고 티벳 만주 모두 중국을 정복했지만 중국 문화에 동화되었다. 정복 당해야 오히려 땅을 넓힌 나라다. 중국불교와 인도불교는 전혀 다르다. 중국 주변 국가들 중에 직접 지배해 보지 못한 나라는 우리나라뿐이다.
구마라습<344~413>
383년 진왕이 여광을 시켜 구자국을 공략했을 때 여광은 구마라습을 데리고 양주로 갔으나 그 뒤 후진이 양주를 쳐서 후진왕 요흥이 401년 구마라습을 장안으로 데리고 가 국빈으로 대우하였다. 삼론 중관의 불교를 확립하였으며 오늘날 한국 중국 일본에서는 그를 삼론종의 조사로 부르고 있다.
현장
627년 불경을 구하러 인도로 떠났다. 그곳에서 공부하다 645년 당으로 돌아왔다. 664년 눈을 감기 전까지 그는 인도에서 가져온 불경을 번역하는 데 힘을 쏟았다. 그가 번역한 경전은 1,335권에 이른다. 서유기를 통해 널리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수문제 양견<541~604> – 581년 중국 수를 건국한 황제. 당나라 율령의 기초를 세웠다. 589년 남조의 진을 평정 남북조를 통일했다.
천태지자<538~597>
수나라 때 천태종의 조사. 그의 생애는 한 마디로 법화경 연구로 요약할 수 있다. 18세 때 상주 과원사 법서문하로 출가했던 지의는 법화삼부경으로 알려져 있는 무량의 경 법화경 보현관경을 독송하고 연구하여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23세 되던 해 그는 광주 대소산에 있는 혜사<당시 46세>를 방문하여 제자로 들어갔다. 이후 8년 동안을 혜사 밑에서 법화경을 수학하고 법화삼매를 실천했다. 그는 또 會三歸一 사상을 언급했다.
중국의 3대 盛世
1.문경치세<文景之治> – 한나라 문제와 경제 시절 선정을 베풀어 백성의 민심을 크게 안정시킨 치세.
2.정관치세<貞觀之治 627~649> – 당나라 2대 황제 태종 이세민의 치세를 일컫는 말. 중국 역사상 가장 번영했던 시대 가운데 하나로써 이때 태종을 보좌했던 재상으로 위징 방현령 장손무기 등이 있다.
3.강건성세<康乾盛世> – 청나라 최전성기로 제 4대 황제 강희제가 삼번의 난을 평정한 1681년부터 시작하여 제 5대 황제 옹정제를 거치고 제 6대 황제 건륭제 치세의 중반부까지 이른다. 이 시기에 청나라의 영토가 확장되고 문화 예술이 부흥하는 등 나라가 내외로 모두 안정되었다.
인도 나란다 대학 유적
인도 고대 대학. 서기 427년부터 1197년까지 팔라 제국 안의 불교학습 중심지. 세계 최초대학 중 하나.
승려 1만 명이 공부했다. 인도 전체 1등.
9회. 자현스님. 무릎을 탁 치는 중국불교 이야기 1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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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스님 무차대회에서 1등. 이세민은 고구려 정벌 중 현장의 서신을 받고 주작대로로 모시라고 한다.
주작대로<朱雀大路> – 각 방위의 수호신은 동 청룡 우 백호 북 현무 남 주작. 도시의 중심에서 남쪽으로 뻗어나간 도로이기 때문. 발해 수도 상경에 있는 큰 도로. 당의 장안성에 있는 도로를 모방하여 만들었다. 주작대로는 신화의 새 주작이 지킨다는 도성의 남문과 궁성을 남북으로 잇는 중심가로 황제는 이 길 양 옆에 관아를 끼고 남면하여 우주의 질서를 현세에 펼친다고 생각했다. 쉽게 말하면 황제 전용 대로였다. 당시 당나라는 외국인 차별이 없었다. 의상 대사도 장안으로 갔다.
대당서역기
중국 당의 구법승 현장의 서역인도여행기. 제자인 변기가 편찬한 것으로 646년에 이루어졌다. 629년 장안을 출발하여 나라의 법을 어기면서 구법여행을 나선 현장은 서역제국을 거쳐서 인도에 이르러 불교교학 연구와 불적을 순례했다. 그리고 대부의 경전을 가지고 645년에 귀국해서 조야의 환영을 받았다. 특히 정확무비 하다고 하는 본서는 여행기 중 백미이며 당시 인도와 중앙아시아의 역사 지리 불교사 언어사의 자료로 매우 귀중하다.
내가 스님을 늦게 만나 불교를 중흥시키지 못한 게 한입니다 <당태종>
마음이 일어나니 고로 법이 일어나고 마음이 멸하니 감실과 무덤이 둘이 아니라네 <원효>
수나라 – 천태지자 법화경 <이세민 – 아들 이치 & 측천무후>
당나라 – <현장법사 유가법상종 유가사지론/ 현수법장 화엄경/ 6조 혜능 선종 조계종 금강경>
현수법장<643~712>
중국 당나라 때 선승. 화엄종을 대성시킨 인물. 17살 때 화엄종 제2조 지엄이 운화사에서 화엄경 강론을 듣고 의상 등과 함께 제자가 되었다.
의상<625~702> – 화엄의 교종을 확립하는 데 힘썼다. 저서는 화엄일승법계도 등이 있다.
지엄선사<608~668> – 중국 당의 선승. 승속이 같이 공부.
법성게
신라 때 의상대사가 지은 시 화엄일승법계도에 수록되어 있으며 7언 30구의 한문으로 되어 있다. 불교에서의 법 즉 진리의 세계를 압축하여 표현하고 있는데 구체적으로 자기 자신의 수행완성에 관한 것과 남의 수행을 어떻게 이롭게 하느냐 하는 것과 마지막으로 수행방편과 공덕에 관해서 설하였다.
아버지란 명칭은 자식이 있을 때 비로소 생긴다. 자식이 없거나 죽으면 더 이상 아버지가 아니다. 모든 것은 이렇게 관계로 규정된다. 부족하든 넘치든 다 의미를 지닌다. 이 세상에 똑같은 색의 단풍은 없다. 그러나 다 같이 어울려 평등하게 하나 된다는 사상이 화엄이다.
백거이<772~846>
중국 중당기의 시인. 이백이 죽은 지 10년 두보가 죽은 지 2년 후에 태어났으며 같은 시대의 한유와 더불어 이두한백으로 병칭된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5세 때부터 시 짓는 법을 배웠으며 가난한 관리 집안에 태어났으나 800년 29세로 진사에 급제하였고 32세에 황제의 친시에 합격하였으며 그 무렵에 지은 長恨歌가 유명하다.
장한가 – 중국 당대의 시인 백거이가 젊은 시절에 지은 서사적인 장가 현종황제와 양귀비의 비련에 관한 것이며 4장으로 되어 있다. 유창하고 아름다운 가락으로 칠언으로 되어 있으며 행마다 리듬이 박동하고 때로는 각운을 바꾸어 가면서 장장 120행에 걸쳐 선율이 흐른다.
혜능스님<638~713>
모든 사람은 이미 부자다. 마음 한 번만 돌리면. 너 마음 있어? 마음이 있다면 너는 이미 부처다. 일상을 넘어 또 다른 부처는 존재하지 않는다. 너는 이미 행복하다. 행복은 수행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이미 네 마음이 행복하기 때문이다. 중국 선종의 제 6조. 24세 되던 해 어느 날 나무를 여관에 배달하는 길에 한 손님의 금강경 읽는 소리를 듣는다. 그 중에서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 라는 구절을 들었을 때 마음이 맑아져 깨닫는 바가 있었다.
9회. 자현스님. 무릎을 탁 치는 중국불교 이야기 1 중에서
[출처] 481.무릎을 탁 치는 중국불교 이야기|작성자 Inkf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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