小乘 大乘 最上大乘
누구나 깨달음을 추구하는 마음이 있다. 그런데 깨달음이 집착의 대상이란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성스러움도 마찬가지다. 세상의 대부분의 종교들은 악에서 선을 지향하는 가치기준을 갖고 있다. 그러나 불교는 아무리 좋은 가치라도 집착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기준을 설정하지 않는다. 이런 점 때문에 대승이 소승을 비판하는 것이다. 깨달음 한 소식 전부 다 소승 불교적 생각이다. 선과 악 성과 범의 상대적 세계를 모두 초월해야 완전한 해탈이 된다는 가르침이 대승이다. 완전한 해탈이 반야 지혜다. 그래서 제일 처음 육조단경에 등장하는 말이 마하반야바라밀 법이다.
最上承 법문은 금강경에 나온다. 육조단경은 남종의 소의경전인 금강경의 형식을 많이 취하고 있다. 화엄 법화 열반 정토 유식 등 모든 대승사상과 윤리 도덕의 유교와 자연철학의 노장사상을 모두 수용하여 중국인들의 풍토에 맞는 불교를 제시하고 있다. 인도 불교에서 전래된 대승이 있는데 왜 최상대승이란 말을 쓸까? 여기서 최상대승이란 남종 돈교에서 제시하고 있는 법문을 말한다. 그러면 최상대승의 반야 지혜를 구족한 사람<人>은 누구인가? 衆生心을 갖춘 사람과 佛心을 갖춘 사람을 말한다. 반야 지혜를 갖춘 사람이 불심을 갖춘 사람이다. 반야 지혜를 실현시키는 주체가 불심이다.
돈교의 내용 – 頓悟. 頓悟見性. 直了性
남종돈교 최상의 가르침인 마하반야바라밀경과 6조 혜능대사가 소주 대범사의 계단에서 베푸시는 설법집 한 권.
大乘과 最上承의 차이
대승은 대승보살이 보시바라밀을 행할 때 三輪淸淨<三事> 함을 觀하고 5바라밀도 이와 같이 실행하는 것이다. 최상승은 本性이 공적하여 三事의 자성이 空함을 알고 또 다시 觀한다는 생각도 일으키지 않으며 또한 6바라밀 역시 이와 같이 실행하는 것이다. 수행도 이렇게 실천하여 만행을 모두 갖추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淸淨=空. 주는 사람은 뭘 주었다는 의식 받은 사람은 뭘 받았다는 대상에 대한 의식이 없는 것을 말한다. 그래야 모두 편안하기 때문이다. 대상을 의식하면 돌려 받을 기대감이나 목적의식 같은 부담이 따라 온다. 이는 올바른 실천 지혜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런 생각들은 항상 業으로 남아 작용하기 때문이다. 3業 淸淨心으로 주고 받고 끝내는 것이 대승이라면 최상승은 그 내용까지 모두 無心한 경지를 말한다. 妄心 희로애락 5욕 3독심 분별심 목적의식 모두 중생심이다. 그래서 의식을 갖고 참선하면 안 되는 것이다. 혜능이 말하는 최상승 법문이란 무엇인가?
금강경과 법화경은 공덕경이다. 경전의 수지독송 문구 때문이다. 이 말은 책을 대량으로 인쇄 보급하지 못했던 당시 사경에 큰 의미를 두고 설해진 일종의 방편법문이었다. 사경해서 집에 보관하라는 것이 아니다. 최상승 법문을 통해 반야 지혜를 깨달아 많은 사람들에게 법을 설하는 공덕을 말하는 것이다. 모양이나 음성으로 구하지 못하는 여래를 어떻게 체득할 것인가? 자신의 법성을 깨닫고 반야지혜로 살지 못하면 금강경 평생 외우고 읽어야 아무 소용도 없다. 금강경은 비록 짧은 경전이지만 반야지혜를 가르치는 핵심사상이 함축된 공덕경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읽는 것이다.
북종선은 능가경을 남종선은 금강경을 중요시한다. 능가경은 유식과 불성을 통합한 책으로 깨달음의 작용을 중요시하는 데 반해 금강경은 반야의 지혜작용을 더 중요시 한다. 이 불성사상과 반야사상을 하나로 통합시킨 것이 남종 최상대승의 법문이다. 그래서 남종돈교는 돈오견성과 현지를 골격으로 한다. 각자 자신이 스스로 깨달아 반야 지혜의 생활로 전환시키는 것이 핵심이다.
노자의 上善若水나 최상승은 같은 말이다. 최상의 지혜와 인연은 물과 같다. 항상 시절인연에 따른다. 삶이란 시간과 공간의 시절인연을 벗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서 최상은 무엇인가? 정보란 공기와 같은 것이다. 누구나 다 함께 할 수 있다. 부처님 가르침이 많지만 돈 내고 가져가라 안 하신다. 이것이 대승최상승 법문이다. 그러나 이런 법문도 구도정신이 없으면 시절인연을 맺기 어렵다. 최선의 인연을 맺어주는 사람이 바로 혜능이라는 선지식이다.
善知識 – 범어 Kalyana mitra 좋은 친구. 정법을 설하고 중생들을 불법에 들게 하며 해탈케 하는 사람 혹은 불도의 인연을 맺어주고 심어주는 선각자.
아무리 좋은 인연이라도 나의 믿음이 없으면 안 된다. 최상승 법문은 불심의 작용이기 때문에 不可思議 하다. 思議는 중생심이다. 믿지 못하는 것은 중생심의 분별적 사고 때문이다. 信은 좋은 사람과 연결하는 힘이다. 때문에 최상승법문인 지혜를 실현할 수 없다.
現量 比量 聖敎量
現量은 모든 사물을 바로 보고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분필이라고 사량분별하지 않고 보고 바로 인식하는 직관적 지혜다. 체험이 완전히 뒷받침되어 있기 때문에 분별의식 없이 파악하는 지혜다. 比量은 사물이 눈 앞에 나타나진 않지만 경험을 통해 인식하는 세계를 말한다. 산 넘어 연기가 나면 거기 불이 났다는 사실을 아는 것과 같다. 현량 비량은 사물을 인식하는 기준이다. 聖敎量은 성인의 말씀이다. 성인의 말씀은 내가 아직 배우거나 경험하지도 않았지만 바로 믿어도 되는 것이다. 그래서 보살이 쓴 것은 論<주석서>이지 經이라 하지 않는다.
돈황본 단경에서는 6조혜능을 부처와 보살과 같이 불교의 이상적 인격으로서 성스러운 지위의 조사임을 강조하고 있다.
반야심경을 매일 독송하고 외우면서 대승의 마하반야바라밀 의미를 모른다면 공부를 잘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대승의 마하반야바라밀을 완전히 이해하고 지혜로 생활할 수 있어야 한다. 참선은 왜 하나? 지혜와 인격으로 보살도의 삶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구도는 출가승만 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특정한 장소에서 실현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여기 자기 일을 통해 실행하는 것이다. 육조단경은 대승을 모두 압축한 법문이라 최상승 법문이라 말하는 것이다.
韶州 大梵寺 – 소주는 현재 중국 江西省 曲江縣 지방을 말함. 대범사라는 사찰은 역사적인 자료에 언급된 기록은 없으며 단경의 작자가 임의로 만들어 낸 혜능의 활동무대가 되는 사찰로 간주된다.
육조단경의 주연은 혜능이다. 홍인 신수 등 일부 역사적 사실을 제외하고 장소나 일자 모두 작가가 의도적으로 설정한 것이니 사실 여부를 따지지 말자. 누구 말에 떨어져 내용을 너무 맹신하면 전도몽상 착각으로 혼란스러워지고 스스로의 통찰과 지혜를 잃어버린다. 새로운 시대적 조사상이 요구되던 시대임을 알고 단경을 이해하자.
3강. 성본스님 선불교 특강. 육조단경의 편찬과 혜능출현의 의미 중에서
[출처] 513.육조단경의 편찬과 혜능출현의 의미|작성자 Inkf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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