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기신론

침묵 속에서 묵묵히 듣고 있는 그것 - 정화스님

수선님 2021. 7. 4. 11:22

침묵 속에서 묵묵히 듣고 있는 그것

 

 

..... 진여의 흐름은 잠시도 머묾 없는 무상 가운데 인연의 총상을 다 드러내기 때문에 기억된 대로 읽혀질 수 없습니다. 흐름을 이해하고 다음을 준비하는 기억은 생명이 살아가는 데는 너무나 중요한 요소였기에 대물림되었겠지만, 기억만으로 현재를 읽는 순간 현재의 무상과 어긋나므로 기억이 망념이 됩니다. 무상한 연기를 새롭게 읽어내지 못하게 하는 기억들의 집합인 업식과 그 활동이 망심이 되는 까닭입니다.

 

기억은 언어로 된 분별을 집착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의 단어는 다른 것과 상관없이 그 자체가 하나의 이미지나 형상과 상응한다고 여기면서, 그 이미지와 형상을 붙잡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망념의 기억은 실재라는 이미지를 갖는 기억입니다. 이러한 기억들의 모임이 스스로를 하나의 단일체로 여기면서, 알고 기억하는 주체로서 `나'를 세우고, 그 나를 다시 기억하고 대물림합니다. 업식의 활동과 기억에 일정한 패턴을 갖는 흐름이 형성된 것입니다. 이것을 `생겨났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인연이 달라짐에 따라 기억의 패턴과 행동 양상이 달라진다면 그때까지 갖고 있는 기억과 업식의 흐름이 달라지게 됩니다. 이것을 `없어졌다'고 합니다. 생겨난 것은 기억하여 갖고 있는 것이며, 없어진 것은 기억이 바뀐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니, 실제로 생겨나거나 없어진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마음의 본바탕은 연기의 총상에서 밝은 앎으로 인연의 어울림을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기억된 망념을 떠올려 알아차리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본래 자리는 망념이 없습니다. 진여인 마음은 모든 것을 그 모습 그대로 다 드러내는 밝은 광명과 같습니다. 대지혜광명의 공덕상입니다.

 

그렇다고 인연으로 나타난 어떤 것을 취해서 그것을 자신의 `봄[견]' 으로 삼는 것이 아닙니다. 무상한 인연의 흐름과 무아의 상호의존성이 진여의 본질이기 때문에 무엇으로 자신의 얼굴을 삼고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견해가 없기 때문에 누구의 이야기도 다 들어줄 수 있습니다. 침묵 속에서 묵묵히 듣고 있는 그것이 모든 도의 본질을 여지없이 드러냅니다.

 

여기에 관한 옛 선사의 고사가 전해집니다. 그 선사는 제자가 차를 줄 때는 차를 마시고 물을 줄 때는 물을 마시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제자가 " 왜 스님께서는 저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한 마디 말씀도 하지 않으십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스님께서는 "무슨 말이냐. 자네가 차를 줄 때는 차를 마시고 물을 줄 때는 물을 마시지 않았느냐, 그것보다 더한 이야기가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말씀에 제자는 깨달았다고 합니다.......

 

오면 오는 대로 알고 가면 가는대로 알 뿐 ....마음을 보되, 그것을 갖고 있지 않기에 `봄[견]'이 생겨난 것도 아니고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지 않는 것도 없습니다. 있는 자리에서 보면 언제나 한 가지 `봄[견]'이라 자리를 옮기지도 않고 온갖 `봄'이 다 이루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보지 않는[무견] 공덕이 가장 큰 공덕으로 마음이 갖는 `상의 큼[상대]'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앎으로 자신을 알리는 마음은 보려는 의지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파랑이 오면 파랑으로 알고 빨강이 오면 빨강으로 알고, 파랑이 가면 가는 것으로 알고 빨강이사라지면 사라지는 것으로 알지요. 파랑을 따라가는 것도 아니고 빨강을 따라가는 것도 아닙니다.

 

오면 오는 대로 알고 가면 가는대로 알 뿐, 한 번도 대상에 현혹되어 그것으로 알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상이 앎을 그것으로 알게 하는 것 같아 앎이 대상 따라 빨강 또는 파랑으로 아는 것 같지만 그냥 알 뿐, 빨강도 아니고 파랑도 아닙니다.

 

빨강일 때는 그것이 전부인 양 알고 파랑일 때도 그것이 전부인 양 알며, 아무런 대상이 없을 때는 침묵이 전부인 양 그렇게 있지요. 어느 것도 다 비추지만 어느 것에도 따르지 않는 것이 진여인 마음의 작용입니다. 자신이 색깔을 갖지 않기에 머물지도 않습니다.

 

앎에서 보면 빨강이 생겨난 것 같지만  빨강이라는 앎은 생겨나는 것이 아니며, 파랑이 오면 빨강이 사라진 것 같지만 사라진 그 자리가 파랑이 되니 앎이 사라진 것도 아닙니다. 침묵의 앎은 모든 색이 사라진 것 같지만 앎이되 침묵으로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앎은 한 번도 움직이지 않고서도 다 안다고 하였지요. 진여의 지혜를.

 

진여의 자리, 곧` 자성 없는 마음의 앎'을 제대로 자각한다면, 마음은 움직이지 않고도 삼계를 다 비추고, 알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알아차리게 되니, 갖가지 망념의 번뇌가 있을 수 없습니다. `취함이 없는 앎' 이야말로 모든 것과 어울린 무아로서 만나는 인연마다 청정한 공덕이 드러난 흐름입니다. 인연마다 공덕이 되므로 진여의 흐름은 갠지스강의 모래보다 많은 청정한 공덕을 갖춘 흐름입니다. 그래서 진여 자리가 갖는 공덕상을`크다[상대]'고 합니다.

 

마음이 주위를 기울여 무언가를 알아차리는 것이 분명하지만, 탐욕과 성냄 등의 내용을 갖고서 주의를 기울인다면 탐욕과 성냄으로 앎이 정해진 것과 같으며, 앎의 과정이 모두 탐심과 진심의 궤적이 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무엇을 아는 것이 분명하기는 하지만 결과는 늘 탐심과 진심을 남기는 것일 수밖에 없겠지요.

 

또는 탐심과 진심의 경향성이 너무나 강하기에 처음에는 있는 그대로를 봤다고 하더라도 곧 탐심과 진심과 어울려 마음의 방향이 탐심과 진심을 따라가겠지요. 아는 것이 아니라 탐심으로 아는 것이며, 진심으로 알 수밖에 없는 것이니 안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이렇게 아는 마음이 `움직이는 마음'이며, `생겨난 마음'입니다. 그렇게 되면 아는 것은 있는 그대로를 아는 것이 아닙니다. 늘 자신의 성향에 따라 그렇게밖에 알 수 없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보이고 들리는 것 하나하나가 갖고 있는 생명의 신비를 놓치고, 지극히 한정되고 좁은 삶을 사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가진 것이 많다하여도 가난할 수밖에 없습니다. 늘 채우려는 앎의 경향성은 자신을 가난하게 만들어, 보이고 들리는 것을 욕심내게 하면서 지친 삶을 살게 하지요. 너무나 답답한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울리는 마음은 자신의 울타리를 치우니 삶이 넓어지고, 이웃 생명들이 베푸는 것으로 자신이 살아가는 것을 분명히 아니 많은 것을 갖지 않아도 부자가 된 것과 같습니다. 이웃과 어울려 하나 된 마음으로 자신의 연기를 각성한 것입니다. 부족함이 없는 것이 자신의 본질임을 알아, 언제나 만족된 삶을 사니 부처님의 삶입니다. 감추어진 법신여래가 드러난 것이며, 한없는 공덕을 갖고 있는 법신여래가 본래부터 자신의 모습임을 아는 것입니다. 이처럼 마음[체]이 한없는 공덕[상]을 다 갖추고 있기에 `크다[대]'고 합니다.

 

 

 

 

 

 

 

 

[출처] 침묵 속에서 묵묵히 듣고 있는 그것 - 정화스님 -|작성자 정진연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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