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전생을 보는 능력이 있다면, 전현수박사의 사마타와 위빠사나 강연을 듣고
윤회는 정말 있는 것일까? 부처님이 윤회가 있다고 하였음에도 불자들 중의 일부는 여전히 믿지 않는다. 특히 과학을 하는 학자들이 그렇다. 그들은 자신들의 감각적 인지와 과학적 사실을 들어 윤회의 허구성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 하지만 과학은 물질에 기반한 것이다. 인식론에 기반한 업과 과보, 그리고 내생과 윤회에 대하여 과학적 상식으로 재단하려 하는 것은 많은 무리수를 가져 온다.
전현수박사의 강연을 듣고자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지하 2층에 있는 전통문화예술 공연장에서 전현수박사의 강연을 들었다. 조계사 경내에 있고 총무원청사가 있는 건물의 지하에 위치하고 있다. 11월 20일 저녁 7시에 열린 이날 전현수 박사의 강연주제는 ‘전현수박사가 들려 주는 사마타-위빠사나 수행과 정신건강이야기’이었다.
전박사는 ‘수행이 정신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미얀마에서 수행하였다고 했다. 정신과 전문의로서 개업을 하여 활동하고 있는데 수행체험을 위하여 병원 문을 닫고 2년 가량 미얀마 파욱수행센터에서 보냈다고 하였다. 그런 전박사는 이미 2003년 미얀마에서 수행한 바가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번 두 번째 미얀마행에서는 좀 특별한 체험을 한 것 같다. 그것은 전생에 대한 이야기이다.
전현수박사의 강연을 듣고자 한 것은 어느 카페에서 스님의 글을 읽었기 때문이다. 그 스님은 전박사의 최근 책 ‘사마타-위빠사나’을 읽고 나서 전박사의 전생체험 이야기를 전하였다. 바로 이 전생이라는 말에 관심을 가졌다. 개인메일에 누군가 전박사의 강연을 알리는 광고성 메일을 보내 왔다. 이렇게 스님의 책소개와 광고성 메일을 접하자 강연을 들어 보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더구나 전현수박사는 불교TV에서 십여편의 강연을 하기도 하였다. 그런 강연을 소재로 하여 글을 쓰기도 하여 이미 익숙해져 있는 상태이기도 했다.
총무원청사 지하에 있는 공연장으로
11월도 말에 접어드는 20일 오후 전철을 탔다. 늘 그렇듯이 종각에서 내려 조계사로 향하였다. 6시 대이지만 해가 갈수록 짧아져서 어둑하다. 조계사에 도착하니 그다지 평화스런 분위기는 아니다. 주변에 경찰차가 있고 경찰들의 감시의 눈초리가 번득인다. 조계사에 시국관련 시위 주동자가 피신해 있기 때문이다.
총무원청사 지하에 있는 공연장으로 향하였다. 종종 세미나 등을 듣기 위해 찾는 곳이지만 지하에 있는 공연장은 처음이다. 입구에서 등록을 받고 있었다. 입장료 이만원을 내야 하는데 이는 책값에 해당된다. 책값은 16,000원이다. 식사를 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하여 간단한 다과도 준비 되어 있었다.
공연장 안으로 들어가니 마치 극장에 온 것 같다. 푹신한 의자에 몸을 묻으니 안온했다. 미리 이삼분전에 도착하여 느긎하게 공연을 기다렸다. 주변을 보니 스님들도 보였다. 흰머리가 있는 나이든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대체로 삼사십대 연령층이다. 그것도 여성들이 더 많다. 바로 앞좌석에는 교복을 입은 남자 고등학생 두 명이 앉았다.
윤회는 분명히 있다!
강연이 시작 되었다. 이미 TV에서 많이 보았기 때문에 모습과 목소리가 익숙하다. 경상도 억양이 있긴 하지만 그다지 세지 않고 목소리는 분명하고 또렷해서 듣기에 부담 없다. 더구나 경전을 근거로 하고 특히 아비담마에 근거해서 수행체험을 말하기 때문에 신뢰가 갔다. 그래서일까 청중들은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몰입된 모습이었다.
전현수박사는 강연을 시작하자 마자 윤회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다. 윤회는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이는 사실, 즉 실제를 보면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이 실제에 대하여 ‘빠라맛타(paramattha)’ 라 한다. 이렇게 본다면 실제를 보지 않은 자들이 윤회가 있는니 없느니 하는 것은 말할 처지가 못 된다.
신통을 믿지 못하는 자들이 있다. 윤회를 믿지 못하는 자들이 대체로 신통도 부정한다. 그런 자들은 “신통을 보여 줘봐! 그러면 믿을 게”라고 말한다. 이럴 때 그들에게 어떻게 말해 주어야 할까? 일묵스님의 강연에서 답을 찾았다. 일묵스님은 봉녕사 아비담마 강연에서 “신통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사선정이나 한번 닦아 보고 그런 말 하세요”라고 말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는 윤회를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윤회를 부정하려거든 사선정 체험이나 하고 말하세요.”라고.
윤회를 믿지 못하고 부정하는 자들이 있다. 그런 자들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은 실제를 보라는 것이다. 이는 전현수 박사의 말에 따르면 선정수행을 해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선정상태에서 광대한 지혜가 나오는데 그런 것 중에 하나가 전생을 보는 지혜라 하였다. 윤회를 믿지 못하는 자들은 말로만 부정만 할 것이 아니라 실제로 선정수행을 한다음에 부정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강연 전과정을 녹취하고
전현수박사의 강연을 녹음하였다. 스마트폰에 녹음기능이 있는데 이를 활용하면 매우 효과적이다. 그래서 강연 전과정을 녹취하였다. 본 강연 1시간 20분 가량과 질의응답 20여분이다. 그리고 강연을 스마트폰에다 메모 하였다. 스마트폰에 메모 기능이 있어서 강연내용 중에 핵심단어나 내영을 똑똑 처 넣으면 된다. 이렇게 스마트폰으로 녹음도 하고 메모도 하였다. 그리고 강연에 참가한 소감을 글로서 남긴다.
존재에서 벗어나라, 윤회에서 벗어나라
수 많은 법문을 들어 보지만 자신의 신변이야기 위주라 받아 적을 것이 없다. 그러나 전박사의 강연은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다. 그것은 철저하게 경전과 아비담마논장을 근거로 하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자신의 수행체험을 곁들인다. 또 하나 장점은 정신과 전문의로서 환자를 대했을 때 치료 이야기를 곁들인다는 것이다.
전현수박사의 1시간 20분 가량의 주옥 같은 강연을 글로서 다 표현할 수 없다. 다만 가장 관심을 가지고 들었던 윤회에 대한 이야기이다. 전박사는 윤회이야기를 하면서 부처님이 우리에게 전한 메시지는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이라 하였다. 이는 존재에서 벗어나는 것과 같다. 그런 윤회는 명백히 있다는 것이다.
마치 어제가 있으면 오늘이 있듯이 한 존재의 삶 역시 현생이 있는 것은 전생이 있기 때문이다. 전생의 원인에 의해서 현생의 내가 있게 되었고, 현생의 원인에 의해서 내생이 있게 될 것이라 하였다. 그런 윤회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존재에서 벗어나라. 윤회에서 벗아나라”라고 말할 수 있다.
“불교에서는 절대로 거짓말 하지 않습니다”
부처님 가르침 핵심은 윤회라 하였다. 이에 대하여 전현수 박사는 초기불교에 근거하여 윤회를 이렇게 말한다.
“부처님께서 가장 중요시 한 것은 사실입니다. 실제가 뭐냐 하는 겁니다. 실제 어떻게 되 있나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교에서 가장 경계하는 것이 거짓말입니다. 사실 아닌 것을 절대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실 아닌 것을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또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살아 가게 됩니다. 이는 다른 사람들에게 불확실한 것을 주는 것이 되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절대로 거짓말 하지 않습니다.
윤회도 있기 때문에 윤회가 있다고 예기 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 경전을 보면 ‘보시를 하면 이득이 있다’라고 하거든요. 이게 그렇게 다 원리로 돌아 가기 때문에 그런 것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니까야에는 사실 아닌 것은 없다고 보면 됩니다. 그런 것은 생각을 하거나 사유를 해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전부 다 관찰 하는 것입니다. 아인스타인도 이런 말 했습니다. ‘과학과 같이 갈 수 있는 종교는 불교이다.’이랬듯이, 제가 볼 때는 니까야에 있는 내용들은 다 증명됩니다.”
(전현수박사, 전현수원장이 들려주는 사마타-위빠사나 수행과 정신건강이야기, 전통문화예술공연장, 2015-11-20)
전현수박사에 따르면 니까야에 실려 있는 윤회이야기는 모두 사실이라 하였다. 이는 ‘실제’를 보았기 때문이라 하였다. 선정상태에서 물질과 정신의 실제에 대하여 관찰한 것이라 하였다. 이런 관찰은 마음이라는 현미경을 통하여 가능하다고 하였다.
선정은 마음의 현미경
물질을 관찰할 때 필요한 것이 현미경이듯이 마음의 현미경은 선정상태라 하였다. 선정에 들어 가면 미세한 마음의 작용을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삼매에 들어가 마음의 힘을 모은 다음, 그 힘으로 본질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덩어리가 아닌 궁극적 실제(빠라마따)를 본다는 것이다. 마치 현미경으로 세포를 보듯이 선정 상태에서 몸과 마음을 관찰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럼에도 물질에 기반한 과학을 근거로 하여 윤회가 있느니 없느니, 육도가 있느니 없느니 하는 것은 처음부터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이다.
선정에 들어 가는 순간에 대하여
윤회를 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 가장 먼저 선정에 들어 가야 할 것이다. 선정에 들어 가기 위해서는 몇 가지 과정을 거친다고 하였다. 먼저 삼매에 대한 것이다. 삼매에는 순간삼매, 근접삼매, 본삼매 이렇게 세 가지가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 선정이란 본삼매를 말한다.
본삼매에 들어 가기 위해서는 호흡관찰이 가장 좋다고 하였다. 경전에 쓰여 있는대로 네 가지 호흡을 관찰하는 것이다. 긴호흡, 짧은 호흡, 전체보기, 미세한 호흡이라 하였다. 이 중에 중요한 것은 ‘전체보기’라 한다.
전체보기는 호흡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보는 것이라 한다. 이렇게 호흡에 집중하다 보면 어느 순간 ‘호흡이 빛으로’ 바뀐다고 하였다. 이는 대상이 바뀌는 것이다. 이제까지는 호흡만을 관찰하였으나 빛(nimitta)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대상이 빛으로 바뀐 것이다.
선정에 진입할 때 니밋따가 일어나는 현상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에 대하여 전박사는 자연스런 현상이라 하였다. 또 보편적 현상이라 하였다. 왜 그런가? 그것은 업의 작용으로 본다. 마음에서 물질을 만들어 내는 것이기 때문이라 하였다. 빛은 마음이 만들어 내는 물질이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볼 수 있는 보편적 현상이라 하였다.
대상이 빛으로 바뀌었을 때 더 이상 호흡은 대상이 아니다. 이제 빛을 대상으로 하는 명상이 시작 되는 것이다. 그런데 전박사의 말에 따르면 강렬한 빛을 대상으로 하였을 때 나중에 빛이 ‘댕긴다.’라고 하였다. 이는 자신의 의지와 관련이 없다고 하였다. 빛을 대상으로 하면 빛이 댕긴다는 것이다. 바로 이때가 선정에 들어 가는 순간이라 하였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책에서는 다음과 같이 소개 되어 있다.
이렇게 빛을 보면 빛이 점점 강렬해진다. 마음이 다른 대상으로 흩어지지 않고 계속 한 대상에 집중하다 보면, 어느 순간 빛이 우리를 잡아 당기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그 전에는 네가 빛에 집중했다면 이제는 빛이 나를 집중하게 만든다. 이에 대해 파욱 사야도는 “당신이 니밋따를 보면 니밋따가 자석처럼 당신을 끌어 당길 것이다.”라고 말한다.
(전현수박사, 정신과 의사의 체험으로 보는 사마타와 위빠사나, 52쪽)
선정에 들기가 어렵다
전박사에 따르면 선정에 들기가 매우 어렵다고 하였다. 특별한 장소에서 집중수행을 하지 않는 한 체험하기 힘든 것이라 하였다. 최소한 집중수행 한달은 해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선정에서 보는 빛은 다른 빛과 다르다는 것이다. 명상중에 일어나는 밝은 느낌등과는 근본적으로 다름을 말한다. 이는 마음으로 만들어진 물질로 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선정에 들기가 왜 힘들까? 이는 낙수물의 원리로 설명된다.
똑똑 흘러내리는 낙수는 미약하다. 그러나 하루 이틀이 아닌 수년, 수백년, 수 천년 떨어지는 낙수는 바위를 뚫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마음 역시 단기간에 집중이 되지 않음을 말한다. 꾸준히 수행해야 니미따(빛, 心月)를 볼 수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일까 초기경전에서는 “세상에서 수행승이 숲으로 가고 나무 밑으로 가고 한가한 곳으로 가서 앉아 가부좌를 틀고 몸을 바로 세우고 얼굴 앞으로 새김을 확립하여 새김을 확립하여 숨을 들이 쉬고 새김을 확립하여 숨을 내쉰다.”(M118)라는 정형구가 있다.
그런데 선정상태는 현실을 살아 가는 사람들에게 이르기 힘든 것이라 하였다. 이에 대하여 전박사는 자신의 체험담을 이야기 해 준다. 전박사에 따르면 귀국해서 육개월 간은 집에서 홀로 앉아 있을 때 선정에 잘 들어 갔다고 했다. 그러나 육개월 후 사회생활을 하게 됨에 따라 점차 약화 되어 지금은 좀처럼 들어 가기 힘들다고 하였다. 별도의 공간에서 일주일간 집중해야만 가능할 것이라 한다. 이렇게 본다면 선정에 들어가는 것은 특정한 장소에서 그것도 몇 달간 마음을 집중해야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빠알리니까야는 손가락이 아니라 달 그 자체
전현수 박사는 1시간 20분 가량의 강연에서 많은 이야기를 쏟아 내었다. 이야기들이 책에 들어 있기는 하지만 책에서 못다한 이야기가 많다. 이렇게 직접 강연을 들으니 책으로 접하는 것 보다 훨씬 효과적이다. 수행론자들이 늘 말하는 경전보다 책이라는 말에 힘이 실린다.
수행론자들은 백날 경전을 보았자 알 수 없고 체험을 해 보야 알 수 있음을 말한다. 또 백날 이론으로 따져 보았자 체험을 통하여 아는 것만 못하다고 하였다. 극단적으로 선종에서는 말이나 문자에 의지하는 것에 대하여 손가락으로 보았다. 그래서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라’고 한다. 이는 수행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선종에서는 사교입선이라 하여 부처님의 진실한 가르침은 말이나 문자가 아니라 뜻과 마음에 있다고 하였다. 이런 가르침은 경전을 무시하는 결과가 되었다. 그래서 성철스님은 백일법문에서 “팔만대장경 속에서 불법을 찾으려고 하는 것은 얼음 속에서 불을 찾는 것과 같습니다.”라 하였다.
그러나 전현수박사의 강연에 따르면 부처님이 말씀 하신 팔만사천법문, 즉 빠알리니까야는 더 이상 손가락이 아니다. 달 그 체라 볼 수 있다. 왜 그런가? 수행을 통하여 팔만사천법문의 내용이 증명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의 원음이라 불리우는 빠알리니까야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아니라 달 그 자체 임에 틀림 없다.
선정상태는 엄청난 공덕을 짓는 것
전현수박사는 철저하게 경전을 근거로 강연한다. 특히 아비담마논장에 근거하여 강연한다. 그런데 강연을 듣다 보면 아비담마논장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체험하였다는 식으로 말한다. 인식과정 17단계가 대표적인 예이다. 특히 속행(자와나)에 대하여 “탁, 탁, 탁..”이라는 표현을 하며 설명한다. 인식과정에서 속행이 일곱번 일어 난 것을 표현한 것이다.
인식과정에서 속행이 일곱번 일어나는 것은 ‘같은 마음’에 대해서라고 하였다. 그런데 선정에서 속행이 일어 날 때는 일곱번 이상이 되는 것이다. 한시간 선정에 있었다면 같은 마음이 한시간 동안 유지 된 것이다. 한시간 동안 속행(자와나)이 일어나는 것이다. 선정은 원래 선한 것이기 때문에 한시간 동안 선정에 들어 갔다는 것은 ‘엄청난 선업공덕’을 짓는 것이라 하였다. 이런 선업 공덕은 착한 행위를 하여 얻는 공덕과 비교할 바가 아니라 하였다.
전박사의 말에 따르면 선정을 닦으면 미래가 보장된다고 하였다. 선정을 닦은 공덕으로 선정의 세계에 태어날 수 있음을 말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선정을 닦음으로 인한 지혜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법구경에서 “지혜가 없는 자에게 선정이 없고 선정이 없는 자에게 지혜가 없다.”(Dhp372) 라고 되어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흔히 불자들에게 잘못 알려진 것이 있다고 한다. 선정을 닦으면 번뇌가 그 때만 소멸 될 뿐이라는 것이다. 이런 말은 잘못 되었다고 한다. 선정에서 광대한 지혜가 나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정 닦는 것에 대하여 커다란 과보와 커다란 공덕이 있다고 하였다.
지혜의 눈에 대하여
전현수박사가 강조한 것은 ‘지혜의 눈’에 대한 것이다. 초전법륜경을 보면 “가르침을 설할 때에 존자 꼰당냐에게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라고 순수하고 때묻지 않은 진리의 눈이 생겨났다.”(S56.11) 라는 구절이 있다. 여기서 ‘진리의 눈(dhammacakkhu)’이 지혜의 눈이다. 이런 지혜의 눈은 수행하면 생겨나는 것이라 하였다.
선정에 들어 가면 실제로 지혜의 눈이 생겨난다고 하였다. 이렇게 지혜의 눈이 생겨나면 일반인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고 하였다. 그래서 천신도 볼 수 있고, 아귀도 볼 수 있다고 하였다. 육도윤회가 허구가 아니라 실제임을 말한다.
전박사에 따르면 선정체험 후에 천상의 존재, 아귀의 존재 등을 보았다고 하였다. 이처럼 보이는 능력이 생기는 것은 지혜의 힘이라 하였다. 이는 지혜의 눈이 생겨 났을 때 볼 수 있음을 말한다. 이렇게 보는 것에 대하여 ‘있는 그대로’ 보기 때문이라 하였다. 보이는 그대로 볼 수 있음을 말한다.
실마리와 흔적으로
전현수박사의 강연을 듣다 보면 다소 황당하게 들리기도 한다. 누군가 불교에 대하여 잘 모르는 사람이 전박사의 강연을 우연하게 접하였다면 ‘미친놈’ 소리 들을 것임에 틀림 없다. 일반인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빛을 보고, 또 초월적 존재를 보고, 더구나 자신의 전생까지 보았다고 한 것을 말한다. 그러나 선정상태에서는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는 마음의 힘을 계발하였기 때문이다.
마음을 집중하면 엄청난 힘이 생겨나고 특히 지혜가 생겨난다고 하였다. 그래서 니까야에 실려 있는 이야기가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고 아비담마논장에 실려 있는 이야기가 수행을 통하여 모두 확인 된다는 것이다. 특히 전생에 대한 이야기가 그렇다.
전박사는 전생에 대하여 어제와 같은 것이라 하였다. 오늘이 있는 것은 어제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과 같이 현생이 있는 것은 전생이 있기 때문이라 하였다. 이는 당연한 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전생을 알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실마리’와 ‘흔적’을 이야기 한다.
우리가 아무리 전생에 대한 기억이 없다고 하여도 아주 미세한 실마리는 있다는 것이다. 또 행위를 하면 과보를 남기듯이 누구나 흔적을 남긴다고 하였다. 전생의 흔적이 있을 수 있음을 말한다. 이런 전생의 실마리와 흔적은 수행으로 볼 수 있다고 하였다. 특히 선정에서 가능하다고 하였다.
“쫙 나옵니다. 굉장히 신기하더라구요”
그래서 전박사는 자신의 전생체험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과거생이나 미래생은 바깥에 있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선정에 들었다 나와서 의문에서 선정을 쳌크 합니다. 그다음에 이것이 밖에 있다고 생각하고 밖으로 보낸다는 느낌을 가지면 쫙 나옵니다. 굉장히 신기하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파욱사야도께 물어 보았어요. ‘이걸 어떯게 발견하였습니까?’ ‘경전에 다 있잖아요?’ 그런데 경전에 없거든요. 경전에 ‘안팍’이라는 말만 있어요. 그거 가지고 발견하신거에요. 대단하죠. 저는 주석서에 있나 이래 생각했어요. 그런데 준비 된 분은 글자 한 구절에 다. 안에서 보고 밖에 있다 생각하면 신기하게.. 정말 놀라운 경험하였습니다.
그 다음에 이선에서 나와서 또 해요. 무색계선정, 비상비비상처선정 계속해요. 그것을 충분히 하고 난 뒤에 어떤 걸 하느냐하면 내가 밖에 딱 있는 상태에서 ‘이 생에서 몸과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은 괴로움이다.’또 ‘이 몸과 마음이 어떤 원인으로 있게 되었을까?’ 라고 빠알리어로 ‘마나시까라’라 해요. 의식을 딱 기울이면 쫙 이동합니다. 이동해서 과거로 가는 거죠. 가다가 딱 스톱해요. 그 생이 보여요. 그 다음이 또 이동하고. 멈추면서 또 그 생이 보여요.
참 재미 있는게 생이 길면 길게 보여요. 예를 들어 천신으로서 삶은 엄청나게 길거든요. 짧은 생은 짧게 보여요. 그리고 그 다음 생이 안좋다면 가는데 좀 불안해요(웃음). 희안하더라구요. 저만 그런게 아니에요. 파옥에 있는 어떤 수행자가 연기수행 할 때 과거를 볼라면 겁이 나서 보지 못했대요. 너무너무 힘든데 어느 날 성공했대요. 지옥에서 보낸 생이에요. 그렇듯이 이상한 현상이에요. 말을 못하겠어요.”
(전현수박사, 전현수원장이 들려주는 사마타-위빠사나 수행과 정신건강이야기, 전통문화예술공연장, 2015-11-20)
이와 같은 전생이야기는 강연회에서만 들을 수 있다. 발간된 책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마치 화면에 쫘 펼치듯이 나타나는 전생을 보면 지어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전박사는 실제로 자신의 전생을 보았다고 했다. 그래서 ‘신기하다’ 또는 ‘놀랍다’라는 말을 하였다. 자신이 체험한 것에 대하여 자신도 믿을 수 없을 정도라는 것이다.
전생은 연기수행에서 가능하다고 하였다. 그런데 파욱사야도는 경전에서 ‘안팍’이라는 말에 주목하여 발견한 것이라 하였다. 이는 사띠빳타경(M10)에서 “몸에 대해 몸을 안팍으로 관찰한다.”라는 정형구에 따른 것이라 보여진다. 여기서 안팍이라 한 것은 주석에 따르면 “자신의 몸과 타인의 몸에서 일어나는 숨쉬기를 하는 것”(Pps.I.249) 라 설명되어 있다. 타인의 몸이라면 전생의 몸을 말할 것이다.
전현수 박사가 말하는 자신의 전생은?
전현수박사가 최근 출간한 ‘정신과 의사의 체험으로 보는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보면 전생이야기가 실려 있다. 전박사가 실제로 수행하면서 체험한 사례에 대한 이론적으로 설명해 놓은 것이다. 전생을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이론으로 설명한다.
이렇게 첫 번째 전생을 과거로 하고 이생을 현재로 하여 모든 인식과정에서 5가지 과거원인(무명, 갈애, 취착, 행, 업)과 5가지 현재 결과(식, 정신-물질, 6가지 감각장소, 접촉, 느낌)을 식별했다. 5가지 현재 결과는 5온으로 식별했다.
이제 두 번째 전생을 과거로 하고 첫 번째 전생을 현재로 하여 모든 인식과정에서 5가지 과거원인과 5가지 현재결과를 식별한다. 식별하는 방법은 첫 번째 전생을 과거로 하고 이 생을 현재로 하여 식별한 것과 똑같이 한다. 두 번째 전생의 5가지 원인인 무명, 갈애, 취착, 행, 업을 식별하여 첫 번째 전생의 인식과정의 5온에서 원인과 결과를 식별하면 된다.
먼저 두 번째 전생의 무명, 갈애, 취착, 행, 업을 식별한다. 나의 두 번째 전생은 개로서의 생이었다.
(전현수박사, 정신과 의사의 체험으로 보는 사마타와 위빠사나, 253쪽)
놀랍게도 전현수박사의 바로 이전 생은 ‘개’로서 삶이었다고 한다. 이는 십이연기에서 과거의 원인인 무명, 갈애, 취착, 행, 업을 식별한 것에 따른 것이다. 그렇다면 현생에서 어떻게 사람으로 태어나게 되었을까? 이에 대하여 “이 생의 무명, 갈애, 취착은 ‘사람이 되고 싶다.’였다. 사람이라는 무명을 바탕으로 사람이 되고 싶은 갈애와 취착이 있었다.”라 하였다. 그 결과 개로서의 임종시에 과거 생에 사람으로 수행했던 모습이 표상으로 나타났다고 하였다. 이 표상을 대상으로 하여 재생연결식이 일어나 사람으로 태어나게 되었다고 했다.
전현수박사의 전생이야기를 보면 황당하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이해할 만 하다. 이는 경전과 아비담마논서와 주석을 근거로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더 이전의 전생은 어떤 것이었을까? 이에 대하여 전박사는 개 이전의 세 번째 전생은 인도에서 거사로서의 삶이라 하였다. 네 번째 전생은 천신으로서의 생이고, 다섯 번째 전생은 네팔의 왕자이었다고 한다.
전생에 대한 정형구
자신의 전생을 본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특별한 경지에 오르지 않는 한 전생을 보기가 힘들다고 하였다. 경전에서는 부처님의 전생담이 있다. 유명한 자따카이다. 그런데 빠알리경전에는 전생에 대한 정형구가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수행승이 전생의 여러 가지 삶에 관하여 예를 들어 ‘한번 태어나고 두 번 태어나고 세 번 태어나고…천 번 태어나고 십만번 태어나고 수많은 파괴의 겁을 지나고 수많은 세계의 발생의 겁을 지나고 수많은 세계 파괴와 세계 발생의 겁을 지나면서, 당시에 나는 이러한 이름과 성을 지니고 이러한 용모를 지니고… 그곳에서 죽은 뒤에 여기에 태어났다.’라고 이와 같이 그는 그 자신의 전생의 여러 가지 삶의 형태를 구체적으로 상세히 기억한다. 이것이 첫 번째 명지의 증득이다. 방일 하지 않고 열심히 스스로 정진하는 자에게 그러하듯, 무명이 부서져 명지가 생겨나고, 어둠이 부서져 빛이 생겨난다.”(It.98)
부처님은 첫 번째 명지 숙명통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런 정형구는 초기경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전생을 기억하는 지혜가 생겨남으로 인하여 빛이 생겨난다고 하였다. 그래서 밝은 지혜, 보다 높은 지혜라는 의미로 윗자(vijjā)라 한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은 내세와 윤회를 인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윤회하는 중생의 삶을 기억하는 것이 깨달음의 조건이 되는 것이다.
미래생은 어떻게 볼까?
전현수박사의 책을 보면 전생에 대한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니다. 미래생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미래는 어떻게 보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전생을 보는 방법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하였다. 다만 미래생은 고정 되어 있지 않아, 현재상태가 달라지면 미래도 달라질 수 있다고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지금 여기에서 나의 상태를 기준으로 미래생이 전개 되어 간다고 볼 수 있다. 수행자로서 삶을 산다면 미래도 수행자로서 삶을 살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이다.
전현수박사는 미래생을 보기 위한 준비작업로서 이렇게 설명한다. “미래생을 보기 전에 아나빠나사띠, 까시나,. 무색계 선정을 모두 경험하고 각각의 선정에서 나와 의문에서 5온을 본 후, 앞에서 말한대로 자기 밖에서 5온을 본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하면 자기 밖에서도 자기 안에서와 똑같이 5온이 보인다고 하였다. 그런 다음 ‘현재 생이 원인과 결과의 관계로 미래 생에 어떻게 연결될까?’하고 주의를 기울이면 정신과 물질, 5온이 이동한다고 하였다.
전현수박사가 전하는 자신의 미래생
전현수박사는 자신의 미래생을 본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그래서 다른 방법을 썼다. 이 생에서 점진적으로 이동하여 이 생의 임종으로 이동했다. 이 생의 무명과 갈애, 취착은 다음 생에는 스님이 되겠다는 것이었다. 임종시의 표상은 수행자였고 마음, 마음부수는 희열과 지혜가 있는 34가지였다. 첫 번째 미래 생의 재생연결도 마찬가지로 표상이 수행자였고 마음, 마음부수는 희열과 지혜가 있는 34가지였다. 첫 번째 미래 생에서 일찍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다. 스님으로서 선정과 위빠사나 수행을 많이 했다. 수행 시 빛이 있었다. 임종시 표상은 천상이었다.
(전현수박사, 정신과 의사의 체험으로 보는 사마타와 위빠사나, 258쪽)
미래생에 대한 이야기가 황당한 것처럼 보이지만 부처님의 연기법에 따르면 당연한 것이다. 이는 현재의 갈애와 집착이 미래생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지금 수행자로서 삶을 산 자는 수행자로서 태어날 가능성이 많고, 지금 도둑질이나 음행만 일삼던 자들은 축생으로 태어날 가능성이 높다. 이는 임종시에 가장 무거운 업이나 자신의 의지와 관계 없이 표상으로 떠 올라 다음생에 적합한 세상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왜 항상 착하고 건전하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이유라 본다.
전현수박사가 본 미래생은 그다지 길지 않다. 첫 번째 미래생은 ‘인간’으로 태어나 스님이 되었고, 두 번째 미래생은 ‘천신’으로 긴 생을 살았다. 세 번째 미래생은 ‘범천’으로 생을 살았다. 네 번째 미래생은 없다. 이에 대하여 “니밋따가 빛이었고, 위빠사나 후 정신과 물질이 끝이 났다. 정신과 물질이 이동하던 것이 뚝 끊겨 없어졌다. 더 이상 존재가 없었다.”라고 하였다. 완전한 열반에 든 것이다.
두 번째 자유의지는 없다고
강연이 끝나고 질의응답시간이 있었다. 약 20분간 질의응답에서 여러 명이 질문하고 답을 하였다. 그 중에 어느 스님은 “자유의지가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생각합니까?”라며 자유의지에 대하여 물었다. 아마 강연에서 선정상태에서 자신의 의지에 관계 없이 빛에 이끌리어 가는 것과 책에서 미래생을 본 것에 대한 의문 때문으로 보인다. 이에 대하여 전박사는 이렇게 설명하였다.
전현수박사에 따르면 두 번째 자유의지는 없다고 하였다. 이는 무슨 말일까? 예를 들어 천상에 태어나고 싶다고 하는 것은 자유의지이다. 그러나 천상에 태어나고 나지 않는 것은 의지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조건에 따른 것이다. 보시하고 지계하고 착하고 건전하게 살았다면 그 과보로 천상에 태어나게 될 것이다. 이는 재생연결식에서 조건에 따라 다음 생이 결정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천상에 태어나고 싶다는 첫 번째 자유의지는 있을 수 있지만, 실제로 천상에 태어나게 하는 것은 조건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두 번째 자유의지는 없다고 하였을 것이다.
강연에 청중들은 몰입되고
금요일 저녁 모처럼 서울나들이 하여 전현수박사의 강좌를 들었다. 전생을 보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호기심에 참석한 면도 있지만 무엇 보다 전박사의 강좌에서 건질 것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스님들도 이야기 하지 않은 이야기를 초기경전과 논장을 근거로 하여 이야기하기 때문에 일부로 시간을 내서 그것도 돈 주고 들을만한 가치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경청하였다.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책값이 포함되어 있는 이만원이라는 돈이 아깝지 않았다. 책을 보았지만 강연만 못하다. 책에서 없는 내용이 강연에서 한시간 이십분동안 쉼 없기 계속되었다. 마치 빨려 들어 가듯이 들었다.
전현수박사의 강연에 청중들은 몰입하였다. 모두다 한 곳에 주의를 기울이며 듣는 모습이 매우 진지하였다. 옆에 앉아 있던 어느 삼십대로 보이는 여성은 가느다랗게 감동의 소리를 내었는데 소름이 돋았다.
불교는 궁극적 과학(Ultimate Science)
전현수박사의 전생이야기, 더구나 미래생 이야기를 들으면 어떤 이들은 황당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니까야와 논장에 근거한 이야기를 들으면 수긍이 간다. 이렇게 본다면 빠알리니까야에 실려 있는 부처님의 팔만사천 법문은 틀림 없는 사실일 것이다. 그래서 그 방대한 길이의 가르침을 암송하여 구전하여 왔고 또한 필사하여 오늘날까지 보전 하여 왔다.
빠알리니까야는 목숨을 걸고 보전해야 할 가치가 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전해져 왔을 것이다. 또 전승된 가르침을 근거로 하여 오늘날까지 맥이 이어져 온 것이다. 이는 꼰단냐에게 진리의 눈이 생겨난 순간에서 시작 된다.
초전법륜경에서 땅의 신은 “어떠한 수행자나 성직자나 신이나 악마나 하느님이나 세상의 어떤 사람도 멈출 수 없는, 위없는 가르침의 수레바퀴를 굴리셨다.’라고 소리쳤다.”(S56.11) 라고 하였다. 진리의 수레바퀴가 꼰단냐에게서 진리의 눈이 생겨 나는 순간 굴러 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쉼 없이 굴러 왔다. 이와 같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서양에서는 ‘궁극적 과학(Ultimate Science)’이라고 하였다. 이는 물질이 아닌 몸과 마음을 대상으로 한 과학인 것이다.
나에게 전생을 보는 능력이 있다면
전현수박사의 전생과 미래생 이야기를 접하면서 ‘나의 전생은 어떤 것일까?’ 하고 궁금하였다. 그러나 전생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보고 싶지 않다. 그것은 현생에서 지난 과거의 일을 보면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살아 오면서 그다지 내세울만한 것도 없이 부끄럽고 창피한 일들만 떠 오르기 때문이다.
만일 전생이 마치 영화관 스크린에 떠 오른다면 무척 괴로울 것 같다. 윤회하는 중생으로서 여러 삶이 있었을 것이고, 어떤 삶에서는 오계를 어기는 삶도 있었을 것이다.
상윳따니까야에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 없다.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점을 알 수 없다.”(S15.13) 라는 구절이 있다. 이와 같은 한량 없는 윤회에서 오계를 지키지 않아 목이 잘려 죽음을 맞았을 때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오랜 세월 도둑으로 살면서 마을을 약탈하다 사로잡혀 목이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S15.13) 라 하였다. 이런 피는 도둑질만 하다 흘린 것은 아니다. 윤회 과정에서 “타인의 아내를 겁탈하다가 사로잡혀 목이 잘려 흘리고 흘린피”도 많았을 것이다. 그래서 업에 대한 과보로 악처에 떨어져 고통을 겪었을 것이다.
우리들은 다시는 오계를 어기지 않겠노라고 눈물로 다짐을 하며 다시 인간으로 태어났다.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또 다시 살생, 도둑질, 음행, 거짓말, 음주 등 오계를 어기는 삶을 살고 있다. 과거생에 일어 났던 끔찍한 일을 새까맣게 잊어 버린 것이다. 만일 전생을 보는 능력이 생긴다면 너무 괴로워서 못 볼 것 같다.
이 상태로 급작스럽게 죽음을 맞는다면
한량 없는 윤회의 과정에 서 있다. 과거를 되돌아 보면 숨고 싶고 부끄럽고 창피한 일이 더 많듯이, 과거생 역시 마찬가지라 본다. 그래서 차마 과거생을 볼 용기가 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하여 현재 생에서 안심될까?
지금 이 상태로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한다면 미래생은 어떻게 될까? 선정수행한 자는 그 공덕으로 색계천상에 날 것이다. 한평생 보시하고 지계하고 착하고 건전하게 살았다면 천상에 날 것이다. 그런데 공덕을 쌓고 수행하는 것에 대하여 먼 훗날 일이라 하여차일피일 미루기만 하고 되는 대로 살았다면 어떻게 될까? 더구나 지금 이 상태로 급작스럽게 죽음을 맞는다면 어떻게 될까?
죽음이란 언제 닥칠지 알 수 없다. 기대수명까지 보장해 주지 않는다. 왜 젊었을 때 수행을 해야 하고, 젊었을 때 출가하는지에 대한 이유가 된다. 또 지금 여기에서 선업공덕을 쌓고 가르침을 실천해야 하는 이유가 되리라고 본다.
“일 겁의 세월만 윤회하더라도”
전현수박사는 강연 모두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윤회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라 하였다. 이는 매우 타당한 것이다. 사성제가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윤회에서 벗어나는 가르침이다. 이는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고 난 다음 “나는 흔들림 없는 마음에 의한 해탈을 이루었다. 이것이 최후의 태어남이며, 이제 다시 태어남은 없다.”(S56.11) 라고 선언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선언은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모두 적용된다. 마치 실험을 하여 결과를 얻었을 때 다른 것에 적용하였을 때도 똑 같은 결과를 얻었를 때 실험이 증명되는 것과 같다. 그런 부처님의 가르침의 궁극적 목적은 열반이고 이는 윤회의 종식이다.
[세존]
“일 겁의 세월만 윤회하더라도
한 사람이 남겨놓는 유골의 양은
그 더미가 큰 산과 같이 되리라고
위대한 선인께서는 말씀하셨네.
그런데 큰 산은 이처럼
베뿔라 산이라고 불리우니
깃자꾸따의 북서쪽에 놓여 있고
그곳에 마가다의 산성이 있네.
올바른 지혜를 가지고 거룩한 진리,
괴로움과 괴로움의 발생과
괴로움을 뛰어넘는 괴로움을 종식으로 이끄는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을 보는 자가 있으니.
그는 많이 잡아 일곱 번을
더 윤회하더라도
모든 속박을 부수고
괴로움을 소멸시킬 것이리.” (S15:10)
2015-11-21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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