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베트 사자의 서>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오, 고귀한 집안에 태어난 아무개여! “죽음”이라 불리는 것에 이제 이르렀으니, 이런 태도를 취하도록 하자.
'나는 죽음의 순간에 이르렀다.
그러니 이제 죽음을 통해서, 깨달은 마음의 상태, 다정한 사랑과 자비 넘치는 태도만을 취할 것이고,
끝없는 공간처럼 무수한 모든 중생을 위해 완벽한 깨달음에 도달하겠다.”
최근에 내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찾아와 말했다.
“제 친구는 겨우 스물다섯 살입니다.
그는 고통받으면서 백혈병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는 이미 몹시 겁에 질려 있습니다.
그가 비통함에 빠져 죽을까 봐 두렵습니다.
그는 내게 계속 묻습니다.
‘이처럼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소름 끼치는 고통을 어떻게 견뎌내지?’ ”
내 마음은 그녀와 그녀의 친구를 향해 달려갔다.
아마도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이 아무짝에도 쓸모 없다고 믿는 것처럼 괴로운 일은 없으리라.
비록 그녀의 친구가 커다란 고통을 겪고 있지만
지금이라도 자신의 죽음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이 있노라고 나는 제자에게 말했다.
그것은 그가 온 마음으로 죽어감의 고통과 자기의 죽음 자체를
다른 사람의 이익과 궁극적인 행복을 위해 바치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전하라고 그녀에게 말했다.
“그대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나는 알고 있다.
이제 세상에서 당신과 똑같이 또는 더욱 심하게 고통을 겪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상상해 보라.
그들을 위해 마음을 자비심으로 가득 채워라.
그리고 그대가 믿는 누구에게든지 기도하고 그대의 고통으로 인해 그들의 고통이 경감되도록 청하라.
계속해서 그들이 겪는 고통의 경감을 위해 자신의 고통을 헌정하라.
그러면 그대는 자기 자신 안에서 지금까지 발견할 수 없었던 새로운 힘의 근원, 자비를 발견하게 될 것이고,
자신의 고통이 소모적이지 않을 뿐더러 놀라운 의미를 함축한다는 확신도 발견하게 되리라.”
내가 제가에게 전한 것은 사실 통렌 수행이었는데, 나는 이것에 대해 이미 독자에게 얘기한 적 있다.
통렌 수행은 어떤 사람이 시한부 생명이거나 죽어가고 있을 때에 아주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만일 자신이 암이나 에이즈 같은 질병에 걸렸다면, 세상에서 똑같은 질병에 걸린 다른 모든 사람을 상상해 보라.
깊은 자비심을 일으켜 자신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러한 시한부 질병을 앓는 모든 사람의 고통을 제가 떠맡게 하옵소서.
그들이 이 재앙으로부터, 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옵소서.”
그러고 나서 그들의 병과 악성 종양이 그들의 몸으로부터 연기의 형태로 떠나서 당신의 병과 악성 종양으로 녹아들어 간다고 상상하라. 당신이 숨을 들이켤 때 그들의 온갖 고통을 들이마시고, 숨을 내쉴 때 그들의 완전한 치유와 건강을 내쉰다. 이렇게 수행을 닦을 때마다 그들이 치유되고 있다고 확신하라.
당신이 죽음에 가까이 다가갈 때, 계속해서 이렇게 생각하라.
“죽어가고 있거나 죽게 될 모든 존재의 고통, 두려움, 외로움을 저에게 맡겨주시옵소서.
그들 모두가 고통과 혼란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시옵소서.
그들 모두가 위안과 마음의 평화를 발견하게 하시옵소서.
제가 지금 견디고 있고 앞으로 견디게 될 모든 고통으로 인해서
그들이 좀 더 좋은 곳에 다시 태어나 궁극적인 깨달음을 지향하게끔 하시옵소서.”
나는 에이즈로 죽어가고 있는 뉴욕의 한 예술가를 알고 있었다.
냉소적인 성격을 지닌 그는 제도 종교를 혐오했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은 그가 스스로 인정하는 것보다 훨씬 영적인 호기심을 지니지 않았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친구들이 그를 설득해 티베트의 스승을 만나라고 권했다.
그의 좌절과 고통의 가장 큰 근원은 자신의 고통이 자기 자신이나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실에 있음을 티베트의 스승은 바로 알아차렸다.
따라서 티베트의 스승은 그에게 단 한가지 통렌 수행만을 가르쳤다.
처음엔 회의적인 생각이 들었으나 그는 그것을 수행했다.
그리고 그의 모든 친구들은 그가 특별한 변모를 겪는 것을 목격했다.
통렌 수행을 통해, 이전에 무의미하고 무섭기만 했던 고통이 이젠 거의 영광스러운 목적을 띠게 되었다고 그는 많은 친구에게 말했다. 그를 알고 있었던 사람들은 이러한 새로운 의미의 차원이 그의 죽음을 어떻게 바꾸었는지 직접 경험하게 되었다.
그는 평온하게, 자기 자신과 자신의 고통과 화해하면서 죽었다.
만일 다른 사람의 고통을 떠맡는 수행에 의해 이전에 거의 수행을 닦은 적이 없는 사람마저도 바뀔 수 있다면,
위대한 스승의 경우 어떤 권능을 지니게 될지 한번 상상해 보자.
걀왕 카르마파가 1981년 시카고에서 죽었을 때, 그의 티베트인 제자 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그를 보았을 즈음에, 그는 이미 여러 번 수술을 받아 육신의 일부가 제거되고 새로운 장기가 주입되고 피를 수혈받고 등등의 상황 속에 있었다.
세상의 모든 병이 그의 육신 안에 자리잡기라도 하는 양 날마다 의사는 새로운 병의 징후를 발견했다.
그 다음날이면 그 징후가 사라지고 또 다른 병의 조짐이 나타났다.
두 달 동안 그는 딱딱한 음식을 섭취하지 못했고, 마침내 의사는 희망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그가 산다는 것은 불가능했고 의사는 생명 유지 장치를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카르마파는 말했다.
“아니에요. 나는 계속 살렵니다. 생명 유지 장치를 그대로 두세요.”
그는 의사를 놀라게 하면서,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도 사람들이 보기에 편안히 머물면서 계속 삶을 영위했다.
자신의 몸이 겪는 모든 것을 즐기기라도 하듯 그는 유머스럽고, 명랑했고, 미소를 지었다.
그때 나는 아주 분명하게 확신했다.
카르마파는 모든 것의 중단을 받아들이며 온갖 병이 깃들인 자신의 육신을 있는 그대로 수용했고, 매우 의도적이면서도 자발적으로 영양분 공급의 차단도 받아들였다.
그는 다가오고 있는 전쟁, 질병, 기근의 고통이 최소화되도록 돕기 위해 모든 질병을 침착하게 겪고 있었던 것이다. 또 이런 방식으로 이처럼 어두운 시대의 무서운 고통을 막기 위해 그는 사려 깊게 작업하고 있었다.
그 자리에 임석했던 우리 모두에게 그의 죽음은 잊을 수 없는 감화였다.
그는 죽음을 통해 다르마의 효험과 깨달음이 실제로 성취될 수 있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의미심장한 방식으로 제시했다.
이 지구의 어느 누구도 증오와 쓰라림 속에서 죽을 필요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떤 지독한 괴로움도 그것이 만일 다른 중생의 고통이 경감되도록 헌정되기만 한다면,
의미 있는 것이며 그럴 수밖에 없다.
우리들에게는 통렌 수행으로 삶과 죽음을 일관했던 위대한 자비의 스승들이 있다.
그들은 일생 동안 일관되게, 자신의 마지막 호흡에 이르기까지 숨을 들이켤 때마다 모든 중생의 고통을 떠맡고,
숨을 내쉴 때마다 전세계의 중생을 위한 치유력을 뿜어냈다.
그들의 자비심은 너무나 끝없고 강력해서,
그들은 죽음의 순간에 곧장 붓다의 세계에서 다시 태어나게 된다고 가르침은 전한다.
우리가 살아 있을 때 그리고 우리가 죽어갈 때에 우리 각자가 샨티데바와 모든 자비의 화신과 함께 이렇게 기도할 수만 있다면, 세상과 우리의 삶이 얼마나 변하겠는가!
보호받지 못하는 중생을 위해
여행을 하거나, 배를 타거나, 다리를 건너거나,
항해를 떠나는 저 해안으로 나아가려는 중생을 위해 저로 하여금 보호자, 안내자가 되게 하소서.
모든 살아 있는 중생의 고통이
남김 없이 걷히게 하옵소서.
세상의 병든 중생을 위해
제가 의사, 약이 되게 하시옵고
또 저로 하여금 간호사가 되게 하소서.
모든 중생이 치유될 그날까지.
우주 공간처럼
위대한 대지처럼
한량없이 무수한 중생의 삶을
제가 언제나 뒷받침할 수 있게 하옵소서.
중생들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때까지
제가 또한 삶의 근원이 되게 하옵소서.
우주 공간 저 끝까지 가득 채우고 있는
다양한 중생들의 온갖 세계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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