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칭보살께서는 『입중론(入中論)』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공을 깨닫지 못한 채 보살의 육바라밀을 행하는 것보다 공성을 아는 공덕이 더 크다.”
또 『금강경』에서도 항하사의 모래알보다 더 큰 공덕을 짓더라도 그것보다 공성을 설하는 게송을 듣고 설명(受持讀誦)하는 공덕이 더 크다고 가르칩니다. 『여래장경』에서는 “공성을 배우는 사람은 아귀, 축생, 지옥의 삼악도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설합니다.
다른 경전에서도 “공성에 대해 배우면 오역죄(五逆罪)와 같은 큰 죄가 소멸된다”고 가르칩니다.
공성에 대해 배울 경우 공덕은 쌓이고 업장은 소멸됩니다.
아리야제바보살께서는 “복이 없는 자는 공성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바 있고
『사백론』에서도 “공성에 대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윤회를 없앤다”고 설하신 바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중론(中論)』 제15장 「관유무품(觀有無品)」의 마지막 두 게송을 통해 공성에 대해 설명해보겠습니다.
“있다(有)고 하는 것은 영원함에 대한 집착이고,
없다(無)는 것은 단멸의 견해이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자는 유(有)나 무(無)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만일 자성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상주함’이라는 오류에 빠지고,
이전에 존재하던 것이 지금은 사라졌다면 ‘단멸(斷滅)함’이라는 오류에 빠진다.”
앞의 게송에서 말하는 ‘있음(有)’은 ‘일반적인 있음’이 아니라 ‘실체로서 존재함’을 의미합니다.
또 ‘없음(無)’은 ‘일반적인 없음’이 아니라 ‘완전히 없음’이란 의미입니다.
티베트에서는 중관(中觀)을 우마(dBu Ma)라고 부르고 공성(空性)을 똥바니(sTong Pa Nyid)라고 부르는데, 양자는 같은 의미로 “실제로 있는 것도 아니고, 완전히 없는 것도 아니다”를 뜻합니다.
만일 무언가가 실제로 있다면 영원하다는 말이 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 가운데 ‘무상(無常)’은 이런 ‘영원함’에 대한 비판입니다.
부처님께서도 공성의 가르침 이전에
먼저 무상에 대해서 설하셨습니다.
공성을 알기 위해서는 논리를 이용해야 합니다.
앎을 얻는 방법에는 감각적 지각인 현량(現量)과 논리적 추리인 비량(比量)의 두 가지가 있는데,
공성은 이 가운데 비량을 통해 파악됩니다.
논리에 토대를 두지 않으면 공성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우선 무상에 대해 설명해 보겠습니다.
무상의 정의는 ‘찰나 찰나 변화함’입니다.
무상의 종류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봄, 여름, 가을, 겨울로 구성된 일 년의 변화는 ‘거친() 무상’으로 우리에게 쉽게 파악됩니다. 1달, 1주, 1시간, 1초로 시간단위가 점점 짧아지면 찰나에 이르는데, 찰나적 무상과 같은 ‘미세한(細) 무상’은 논리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찰나적 무상에 대해 현대의 과학자들 역시 불교와 똑같이 얘기합니다.
공덕 쌓여야 공성 제대로 이해
무상에 대한 정의는 ‘찰나변화’입니다.
따라서 무상을 알기 위해서는 찰나변화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이와 반대로 찰나변화의 정의가 무상인 것은 아닙니다.
이런 정의를 검토하는 8가지 방법이 있는데, 무상의 경우 다음과 같이 묻습니다.
“①무상이라면 찰나변화인가?
②찰나변화라면 무상인가?
③무상이 있다면 찰나변화가 있는가?
④찰나변화가 있다면 무상이 있는가?
⑤무상이 아니라면 찰나변화가 아닌가?
⑥찰나변화가 아니라면 무상이 아닌가?
⑦무상이 없다면 찰나변화가 없는가? ⑧찰나변화가 없다면 무상이 없는가?”
이런 검토에 의거할 때 우리는 무상의 정의가 찰나변화이지,
찰나변화의 정의가 무상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공성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무상을 알아야 하고,
불전에서는 무상을 ‘찰나변화’라고 정의내립니다.
공을 깨달으려면 첫째, 복(福)이 있어야 합니다.
복이 없으면 공에 대해 생각조차 하려 하지 않습니다.
둘째, ‘문·사·수’의 과정을 통해 공부해야 합니다.
셋째, 계율을 잘 지켜야 합니다.
한 가지 더 얘기한다면 공에 대해 배울 경우 공사상의 역사 따위를 먼저 배우려 해서는 안 됩니다.
용수보살의 『중론』에서 가르치듯이 논리를 바탕으로 공에 대해 깨우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농사를 지으려면 흙, 물, 비료 등등 여러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반야의 지혜가 일어나려면 여러 가지 조건이 필요한데 그 가운데 하나가 복덕입니다.
‘나’라고 할 때 ‘나’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의미합니다.
몸이 병들면 치료해야 하듯이, 마음에 아픔이 있으면 치료해야 하는데, ‘
마음의 아픔’은 탐, 진, 치의 삼독심이며 이런 삼독심의 병을 고치는 가장 좋은 약은 ‘반야지혜’입니다.
이런 반야지혜가 일어나려면 복덕이 있어야 하는데,
월칭보살의 『입중론』에서는 세속에서 복덕을 쌓는 방법으로
계율을 지키는 것,
가난한 자에게 보시하는 것,
인욕하는 것의 세 가지를 듭니다.
이런 공덕이 쌓여야 공성에 대해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중론』 제24장 강의에 들어가겠습니다.
앞에서 제15장에 대해 강의할 때 중관에 대해 설명하면서,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는데
이는 “자기 스스로 독립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의미입니다.
(크게 웃으며) 저 역시 자기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에 아까 이 강의실에 들어오다가 넘어졌습니다.(정리자 註: 스님께서는 강의실에 들어오다가 발을 헛디뎌 넘어진 적이 있음) 저 역시 자기 힘으로 설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은 “서로 의지함으로써 존재한다”는 의미입니다.
나무 막대기 세 개가 서로 기대어 있는데, 하나가 무너지면 모두 쓰러집니다.
우리가 고통 받는 이유는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이 서로서로 의지해 있다는 점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제24장의 첫 게송은 다음과 같습니다.
“만일 모든 것이 공하다면 생(生)도 없고 멸(滅)도 없다. 그렇다면 사성제의 법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오류에 빠진다.” 불교에는 여러 학파가 있는데, 이 게송은 설일체유부라는 학파에서 공의 가르침을 비판하는 내용입니다. 사성제가 없다면 성불도 없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성제는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후 처음 가르치신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사성제는 고, 집, 멸, 도이며 이에 대한 각 학파의 설명이 대체로 비슷하지만 가장 자세하게 설명하는 학파가 바로 중관학파입니다. 그러면 먼저 사성제 가운데 고(苦)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고(苦)란 ‘업의 힘으로 인한 고통’을 의미합니다.
모든 것이 무상하기 때문에 고통입니다.
일시적으로 행복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고통으로 변합니다.
또 탄생하는 것 그 자체가 고통입니다.
고에는 고고(苦苦)와 괴고(壞苦)와 행고(行苦)의 세 가지가 있습니다.
고고는 몸과 마음이 아픈 것을 의미합니다.
괴고는 ‘행복을 인식하는 감정’을 통해 느껴지는 고통입니다.
무루(無漏)가 아니라 유루(有漏)의 행복의 경우 언젠가 무너지고(壞) 나중에 고통으로 변합니다.
행고는 욕계, 색계, 무색계의 삼계 속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계속 태어나야 하는 고통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고통이라는 점은 불교수행론에서 견도(見道) 이상의 성자(聖者)가 되어야 비로소 나타나 보이기에 성지(聖智)라고 부릅니다.
모든 게 무상하기에 ‘고통’
그러면 이러한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족, 친구, 친지에 대해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것이 변하기 때문입니다.
무상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도 나중에 원수가 될 수 있기에 절대적으로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
공항이나 기차역에서 사람들이 만나기도 하고 헤어지듯이
가족, 친구, 친지 모두 우리가 만났다가 언젠가 헤어질 사람들입니다.
또 재물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향을 피우면 다 타서 없어지듯이, 재물 역시 언젠가 다 없어집니다.
또 몸에 대해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몸은 물거품처럼 피어있지만 언젠가 사라집니다. 무상하기 때문입니다.
또 태어남 그 자체가 고통입니다.
태어나면 반드시 죽는 고통이 따릅니다. 태어나는 것은 사라짐의 원인입니다.
아는 사람에게 들은 얘긴데 군인들이 낙하산을 타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하늘 높이 올라가는데 비행기에서 떨어질 때 처음에 기억이 아득해진다고 합니다. 그때 다른 것은 다 잊어도 스승이었던 교관의 말은 기억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줄을 당겨서 낙하산을 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낙하산을 펴고서 안전하게 땅에 내려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죽어가는 순간에 스승께서 가르치신 요의법에 귀의해야 하며
요의법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공성의 가르침입니다.
살아있을 때 공성에 대해 듣고 배운 적이 있다면 죽는 순간에 공성을 생각해야 합니다.
아집을 완전히 없애기 위해서는 공성에 대한 이해가 중요합니다.
쫑카바 대사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하신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가르침을 베푸신 것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 연기(緣起)와 공성이 하나라고 하신 것이 최고의 가르침이다. 따라서 연기와 공성을 하나라고 생각하면서 부처님께 귀의해야 한다.”
무명의 상대 개념은 공성
부처나 아라한이 되기 위해 도(道)를 닦는 과정은 다섯 단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자량도(資糧道), 가행도(加行道), 견도(見道), 수도(修道), 무학도(無學道)의 다섯입니다.
그리고 성문, 연각, 대승의 3승 각각에 이런 다섯 단계의 수행도가 있기에
합산하여 총 15가지 수행도가 있습니다.
성문, 연각, 대승의 3승 각각의 보리를 얻고자 하는 마음이 진심으로 일어나고, 공성에 대해 문(聞), 사(思), 수(修) 하고자 하는 마음이 처음으로 일어나는 것이 자량도입니다.
그런데 이런 자량도를 닦기 전에 먼저 출리심(出離心)을 얻어야 합니다.
윤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이 출리심입니다.
출리심이 없으면 3승의 자량은 결코 얻어지지 않습니다.
부산에서 서울로 갈 때 버스나 기차나 비행기를 타고 가듯이, 성문, 연각, 대승의 자량도는 다릅니다.
대승의 자량도를 얻은 분은 일체 중생을 돕겠다는 마음에서 진심으로 성불하고자 합니다.
자량도에서 가행도로 넘어갈 때 대승은 물론이고 성문 연각 모두 무아의 견해를 닦아야 합니다.
3승 간에 견해의 차이는 없습니다.
공성에 대해 지관쌍운(止觀?運)하는 것이 가행도인데 지(止), 즉 사마타 수행까지는 모두 대승의 자량도일 뿐입니다. 비파사나[觀] 수행이 있어야 가행도가 됩니다.
공성에 대해 듣고(聞), 생각하고(思), 닦아야(修) 합니다.
문(聞)이란 스승에게 듣고서 대강 이해한 단계입니다.
문, 사, 수를 통해 눈으로 보듯이 공성을 보게 되는데 이를 견도라고 합니다.
견도(見道) 역시 성문의 견도, 연각의 견도, 대승의 견도가 다릅니다.
대승의 견도란 대승의 가르침에 토대를 두고 공성을 보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견도까지 얻은 분들은 아집에서 자유롭습니다.
견도 이후에 수도는 아홉 단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남은 미세한 번뇌까지 없애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이런 아홉 가지 수도를 다 닦으면 마지막의 무학도(無學道)를 얻게 됩니다.
무학도 역시 삼승이 각각 다릅니다. 성문의 무학도를 이루면 성문의 아라한이 되고, 연각의 무학도를 이루면 연각의 아라한이 되며, 대승의 무학도를 이루면 ‘대승의 아라한’인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이상과 같이 사성제와 수행이 불교의 핵심인데 『중론』 제24장에서 논적은 모든 것이 공하다면 이상에서 설명한 사성제와 수행론 등등이 모두 모두 파괴된다고 공성의 가르침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이런 공격에 대해 용수보살께서는 “공성을 가르치는 이유를 제대로 알지 못해 그런 의문을 내는 것이다.”라고 대답합니다. 논적은 공성을 ‘아예 없음’으로 착각하기에 그런 의문을 던지는 것이란 말입니다.
공성을 제대로 알면 삼보, 인과, 사성제 등을 다 받아들이게 됩니다.
공성에 대해 바르게 이해할 경우 큰 이익이 있지만,
옳지 못하게 이해하면 잘못 잡은 뱀이나, 잘못된 주술의 비유에서 보듯이 큰 손해를 보게 됩니다.
『중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공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여 어리석은 자는 자신을 해친다. 잘못 잡은 뱀이나 잘못된 주술과 같이.”(M.K. 24-11) 밀교의 주술 중에 칼을 이용하여 신통력을 얻는 방법이 있습니다.
공성 오해하면 오히려 독
칼이 움직일 때 제대로 잡으면 신통을 얻을 수 있지만 잘못 잡으면 자신을 해칩니다.
독사나 신통력의 칼을 조심스럽게 잡아야 하듯이, 우리는 공성을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자신을 해칩니다.
그런데 쫑카바 대사의 경우 이 게송을 독특하게 해석하셨습니다.
뱀과 주술을 이어지게 번역을 하여 ‘뱀을 잡을 때 외우는 주술로 해석하셨습니다.
이상의 가르침을 요약하면, 선정(禪定)을 통해 공을 닦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정을 통해 공을 닦지 못하면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쫑카바 대사의 기도문 가운데 “지혜로운 사람이 공에 대해 사유할 때, 여러 가지 불전들을 참조하여 닦게 하소서.”라는 기도문이 있습니다. 따라서 처음에는 공에 대해 들음으로써 대강 이해해야 하고, 다음에는 네 가지 논리에 바탕을 두고서 공에 대해 사유해야 하고, 최종적으로 고요한 곳에 앉아서 공에 대해 닦아야 합니다.
인도에서도 자립논증적 중관파나 유식학파등의 스승들은 용수보살께서 가르치신 공에 대해 바르게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분들은 타파해야 할 것의 궁극을 알지 못했기에 자기 나름대로의 논리를 만들어 공성을 규명하고자 했습니다.
자립논증파의 경우 오온(五蘊) 가운데 ‘식온(識蘊)’을 나라고 보았던 반면,
귀류논증파에서는 그런 ‘식온’ 역시 나의 일부분일 뿐 진정한 나는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자립논증적 중관파나 유식학파 등 하위의 학파에서 ‘식온’을 ‘자아’라고 생각한 이유는 풀이나 나무에는 식온이 없기에 무정물이듯이 ‘식온’의 유무에 따라 유정물과 무정물이 구별되기 때문입니다.
또 사람이 죽을 때 식온이 떠나가면 시체가 되고, 아직 식온이 붙어 있으면 살아있는 것으로 봅니다.
그래서 자립논증적 중관파 이하의 학파에서 ‘식온’을 자아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귀류논증적 중관파에서는 궁극적으로 볼 때 ‘식온’은 나의 일부분일 뿐이라고 비판합니다.
오온 전체를 나라고 보아야지 일부를 나라고 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귀류논증파에서는 ‘나의 마음’이라고 할 때 ‘나’와 ‘마음(識?)’을 따로 구분하고 있기 때문에 식온이 ‘나’일 수는 없다고 논증합니다. 불전에서는 마차의 어느 한 부분이 마차일 수 없다는 비유를 사용하여 이에 대해 설명하기도 합니다.
공성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연기(緣起)를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나, 너, 그’와 같은 말들은 서로 연기관계에 있습니다.
나가 너가 되고 너가 그가 되며 그가 나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3층은 2층에 대해서는 위층이지만, 4층에 대해서는 아래층이 됩니다.
동일한 음식이 배고플 때는 맛있게 느껴지지만, 배부를 때에는 맛없게 느껴집니다.
여러 색깔들이 모여서 무지개가 생기듯이 지, 수, 화, 풍, 공, 식이 모여 ‘나’가 생깁니다.
물에 달그림자가 비치는 경우에도 여러 인연이 모여야 합니다.
이상과 같이 연기에 대해 숙고해 봄으로써 공성에 대해 이해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연기를 바탕으로 공을 이해해야 합니다.
공성 알려면 연기 이해해야
연기법에도 거친 것이 있고 미세한 것이 있습니다.
거친 연기법에 대해 생각함으로써 우리 마음속의 집착이나 분노 등을 줄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화를 내는 것은 상대방을 완전히 나쁜 사람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의 모든 행동을 나쁘게 보기에 크게 화가 나는 것입니다.
만일 연기적 조망으로 그를 보게 되면 어떤 면에서는 그에게 장점이 있다는 점을 알게 되어서
화가 줄어들 수 있습니다.
탐심과 같은 집착이 생기는 것도 그 이유는 상대방을 완전히 예쁘게 보기 때문입니다.
예쁨에 자성이 있는 것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이런 탐욕 역시 연기적으로 방식으로 허무하게 조망함으로써 줄일 수 있습니다.
제 경험을 하나 예로 들겠습니다.
1984년 인도네시아에 다녀올 때 싱가포르 공항에서 비행기를 갈아타기 위해 기다리다가 가게에 있는 깜찍한 소형 칼라 TV를 보고서 사고 싶은 탐욕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친구의 부친께서 “너무 작아서 보이는 게 없다.”고 말씀하는 것을 듣고서 그 TV의 허물을 알게 되어 큰 탐심이 금방 사라졌습니다.
지금까지의 강의를 간추리면 “연기법의 바탕 위에서 공성을 알아야 하고, 공성의 바탕 위에서 연기법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연기와 공성이라는 두 가지 조망의 도움으로 우리는 중도를 알게 됩니다.
빨덴 닥빠 스님 법문, 정리=김성철 동국대 교수 madhyama@chol.com
[출처] 복이 없는 자는 공성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작성자 whitecha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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