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담빠 상계의 가르침
거룩한 진리에 자신의 몸과 입과 마음을 바치는 것이,
가장 높고 가장 좋은 직업이로다. 오 그대 띵리 사람들이여.
부귀와 재산은 환영이며 일시적 필요에 따라 차용한 것이니,
그것을 너무 좋아하거나 쌓아두지 마라, 띵리 사람들이여.
혈연 관계는 그럴듯한 환상이고 신기루이니,
인연을 끊고 감상의 매듭을 자르라, 오 띵리 사람들이여.
조국과 고향은 일시적이어서 유목민의 야영지와 같으니,
거기에 집착하지 말고 모든 것을 포기하라, 오 띵리 사람들이여.
생일날 아침에도 죽음의 징조가 보이나니,
항상 주의하고 경계하여 시간을 낭비하지 마라, 오 띵리 사람들이여.
마음을 집중하여 신성한 진리의 길에 일신을 바치라,
그것이 죽음의 순간에 그대를 인도할 것이니, 오 띵리 사람들이여.
인과율은 절대로 확실하니 항상 공정하고 분명하니,
어떤 사소한 악행도 저지르지 마라, 오 띵리 사람들이여.
아무리 올바르게 보일지라도 모든 활동은 꿈이니,
행위로부터 벗어나 참다운 지식을 찾으라, 오 띵리 사람들이여.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언제나 덧없어 모든 것이 변하고 사라지나니,
지금이라도 먼 길 떠날 채비를 갖추라, 오 띵리 사람들이여.
깊은 밀림 속의 코뿔소는 자신이 해를 당할 염려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보라, 정글이 불타고 있다. 그가 지금 안전한가, 띵리 사람들이여.
생로병사의 바다를 건너는 다리는 없으니,
지금이라도 그 바다를 건널 배를 건조하라, 오 띵리 사람들이여.
생과 사, 두려운 중유의 험로는 좁고,
오독은 그 길에서 기다리는 무장한 산적들처럼 수시로 달려드니,
존경할 만한 스승을 찾으라, 그가 그대를 안전하게 인도하리니, 띵리 사람들이여.
일단 찾으면 그 스승은 결코 잊혀지지 않나니,
머리 위에 그를 상상하고 예배하라, 오 띵리 사람들이여.
하려고만 한다면 그 스승은 어디든지 갈 수 있으니,
스승에 대한 그대의 믿음과 사랑을 굳게 간직하라, 띵리 사람들이여.
돈이 많을수록 탐욕도 자라기 쉬우니,
모든 사람에게 공평히 자선을 베풀라, 오 띵리 사람들이여.
힘이 클수록 악행도 많기 쉬우니,
세속적 권력을 동경하지 마라, 오 그대 띵리 사람들이여.
주저하거나 늑장부리지 마라, 목적을 이루는 데 실수가 없도록,
지금이라도 용기와 확신을 갖으라, 오 띵리 사람들이여.
무섭고 소름끼치는 적, 죽음이 언제 올지 아무도 모른다.
지금이라도 그가 올 것에 대비하라, 띵리 사람들이여.
죽음이 목숨을 빼앗은 후에는 아무도 돕지 못한다,
서둘러 나아가 항시 목표를 향하고 경주에서 승리하라, 오 띵리 사람들이여.
저녁의 그림자가 서서히 밤으로 가라앉듯 분명히,
무서운 죽음은 시시각각 잠시도 쉬지 않고 다가온다,
지금이라도 그를 꺾을 방법을 강구하라, 오 띵리 사람들이여.
여름 꽃은 아름다우나 가을에 시들어 죽나니,
이 덧없는 육체도 그처럼 피었다가 사라진다, 오 띵리 사람들이여.
생명의 빛이 빛날 때 이 육신은 찬란하지만,
죽을 때 그것의 모습은 마귀 떼처럼 두렵나니,
육신의 유혹은 언제나 우리를 배반하도다, 오 띵리 사람들이여.
사람들은 시장에서 만나고 모든 거래가 끝난 뒤 헤어진다,
친족과 친구들에게 그처럼 그대도 헤어지리라, 띵리 사람들이여.
흔들리는 환영의 건물은 무너질 것임을 분명히 알고,
지금이라도 유효한 안전장치를 강구하라, 오 그대 띵리 사람들이여.
마음의 독수리는 자유로운 날개로 날 것이니,
지금이라도 자유로이 날 수 있도록 자신을 훈련하라, 오 띵리 사람들이여.
육도의 모든 존재가 우리의 정다운 부모이니,
충실한 애정으로 그들 각각에 대해 명상하라, 오 띵리 사람들이여.
나쁜 사념이 일게 하는 해로운 적은 카르마가 만들어낸 환영이니,
복수와 해악과 증오의 사념들을 던져버리라, 오 띵리 사람들이여.
성지 순례와 참배 행위는 몸에서 결함을 씻어내나니,
세속적인 일은 접어두라, 그것은 끝이 없도다, 띵리 사람들이여.
보호의 기도문을 암송함으로써 입의 불결함이 사라지나니,
어리석은 대화로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기도문을 암송하라, 오 띵리 사람들이여.
겸허한 신념과 순수한 헌신은 마음에서 사악한 사념을 제거하나니,
머리 위에 자비로운 스승을 명상하라, 오 띵리 사람들이여.
뼈와 살은 함께 태어나도 결국은 분리되나니,
그대의 삶이 영속한다고 생각지 마라, 그것은 곧 끝이 난다, 띵리 사람들이여.
순수한 마음의 견고하고 안전한 참 상태를 찾아 굳게 지키라.
그것이 변함없는 불멸의 영속성이니, 띵리 사람들이여.
마음을 신성한 보배로, 인생의 가장 훌륭한 재산으로 알라,
그것만이 영속하는 보배이니, 오 그대 띵리 사람들이여.
명상의 신성한 감로를 찾아서 음미하라,
삼매를 일단 맛보면 배고픔이 사라진다, 띵리 사람들이여.
의식의 흐름의 神酒를 깊이 들이마시라,
서늘하고 순수한 그것은 사시사철 갈증을 달래주도다, 오 띵리 사람들이여.
영원히 아름다운 지혜의 아이를 그대의 아들로 알고 찾으라,
그것이 결코 죽지 않는 최상의 고귀한 자손이로다, 띵리 사람들이여.
이성의 창을 허공에 높이 휘두르라.
향상심에는 경계와 장애가 없으니, 띵리 사람들이여.
자유로움을 경계하고 혼란을 막고,
마음을 가라앉히되 게으르지 마라, 오 그대 띵리 사람들이여.
무애로부터 힘을 얻고 자연의 순리에 따르라,
억압과 무관심이 있어서는 안 되나니, 오 띵리 사람들이여.
그대 마음속에서 네 겹의 분리 불가능한 몸을 찾으라.
결과를 기대하지도 두려워하지도 말고, 오 띵리 사람들이여.
윤회와 열반은 한마음에서 비롯되지만,
그 마음은 형태도 내용도 없노라, 띵리 사람들이여.
좋고 싫음은 새들이 공중을 날 때와 같이 흔적을 남기지 않으니,
체험에 집착하지 마라, 그들은 항시 변화한다, 띵리 사람들이여.
태어난 적 없는 진리인 법신은 날을 밝히는 천체와 같아서,
그 광휘가 늘지도 줄지도 않도다, 띵리 사람들이여.
반항적인 사념들은 강도들이 어슬렁거리는 폐가이니,
그들은 그 안에서 숨겨진 황금을 찾지만 발견하지 못한다, 띵리 사람들이여.
쾌락은 호수의 잔물결처럼 항시 덧없으니,
덧없음을 찾지 마라, 그것은 착각이로다, 띵리 사람들이여.
기억된 욕망들은 무지갯빛처럼 사람을 유혹하지만,
거기에 집착할 필요가 없으니 약함을 보이지 마라, 띵리 사람들이여.
운전자는 구름에 가리지 않는 태양처럼 밝고 눈부시게 빛난다,
그대 자신의 마음을 믿지 마라, 오 띵리 사람들이여.
자유로운 마음은 산들바람과 같아서 어떤 사념에도 집착하지 않나니,
집착할 대상이 없으므로 약함을 초월하도다, 띵리 사람들이여.
실재의 체험은 벙어리의 꿈과 같아서,
타인에게 언어로 설명할 수 없노라, 띵리 사람들이여.
지혜의 서광은 처녀의 결혼 첫날밤처럼 행복하도다,
체험하기 전에는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하네, 오 띵리 사람들이여.
객관적 형상들과 공이 원래 하나임을 알라,
그들은 둘레도 없고 중심도 없도다, 띵리 사람들이여.
통제되지 않은 사념들은 미인이 거울을 응시함과 같아서,
영적인 통찰력으로 인도하지 않도다, 이 사실을 알라, 오 띵리 사람들이여.
현악기의 몸통에 실체가 없는 축복과 고통이 있듯이,
첫째 원인으로부터 둘째 원인이 생겨난다, 띵리 사람들이여.
안과 밖의 모든 창조는 자신의 마음속에 있나니,
얼음 속의 물처럼, 이것을 바르게 알려고 노력하라, 띵리 사람들이여.
무명의 바퀴는 초원의 습기와 같아서,
어떤 방법으로도 결코 막을 수 없네, 오 띵리 사람들이여.
인간으로 자유롭게 태어남은 커다란 은총이니,
목적 없이 인생을 낭비하는 자들은 가엾구나, 오 띵리 사람들이여.
진리의 큰길은 여의주와 같아서
모든 곳을 찾아도 발견하기 어렵노라, 오 띵리 사람들이여.
먹을 것과 입을 것은 어떤 식으로든 조달되나니,
오직 진리에 진실로 자신을 바치라, 띵리 사람들이여.
젊은 시절에 고행과 인내를 실천하라.
나이 들면 습관을 바꾸기 어려우니, 오 띵리 사람들이여.
어떤 격정이 생겨날 때 그를 위한 해독제를 찾으면,
모든 증상이 분명히 치유되리라, 오 띵리 사람들이여.
이 세상의 슬픔과 고통을 가슴 속에 영원히 간직하라,
그때 신념은 활기를 되찾고 등잔의 심지를 다듬는다, 오 띵리 사람들이여.
......
순수한 알아차림이라는 어린아이를 그대의 아이로 알고 찾으라.
이 아이는 태어난 적도 죽은 적도 없느니라.
파담빠 상계의 가르침 중에서
파담빠 상계는 카마라실라로 알려진 분으로 인도 출신 성취자로 전생에 부처님의 제자였던 분으로
인도에서 티벳으로 건너가 가르쳤습니다.
파담빠 상계는 티벳어로 부른 이름입니다.
[불교쟁론] 17. 삼예의 종론
깨달음 본질 탐구한 頓·漸의 세기적 논쟁
인도·중국불교 대립으로 행해진 御前논쟁
카마라실라 승리 漸修적 티베트불교 성립
티베트의 삼예 사원에서 거행된 〈삼예의 종론〉은 티베트 불교 전래 초기 인도불교와 중국불교가 대립되어 행해진 어전논쟁(御前論爭)으로, 티베트 불교의 향방을 결정한 중요한 논쟁이다.
티베트에 불교가 본격적으로 도입되어 국교로 정해지는 것은 티송데첸(742∼797)왕 때의 일이지만, 이미 송첸감포(581∼649)왕 시대에 불교는 전해진다. 불교의 전래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들은 송첸감포왕의 두 부인들로서 이들은 각기 중국과 네팔에서 맞아들인 부인들이다. 송첸감포왕은 그의 아들 궁송궁첸(621∼643)의 부인으로 당(唐)에서 문성공주(文成公主)를 맞이하지만 아들이 일찍 죽은 까닭에 후에 문성공주를 자신의 비로 맞이한다.
이 문성공주는 죽은 남편을 위해 라사에 라모체(小招寺)사를 건립하여 중국에서 가져온 불상을 안치하고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송첸감포왕의 또 다른 부인인 네팔계통의 티춘왕비도 남편인 송첸감포왕이 죽은 뒤 투르낭(大招寺)사를 건립하여 망부의 명복을 빌었다고 전해진다.
이와같이 전래된 불교가 새로운 계기를 맞이한 것은 약 반세기를 지나 중국에서 금성공주(金城公主)가 들어온 뒤부터이다. 열성적인 불교신자였던 그녀는 남편인 티데축첸(704∼754)왕을 설득해 라모체사와 투르낭사를 복구시키고 또한 새로운 절을 짓게하고 아울러 중국에서 승려를 초빙하여 머물게 하였다.
이러한 갑작스런 불교의 움직임에 대해 당시 본교도를 중심으로 한 반불교세력의 저항도 나타나지만, 왕비의 이와같은 노력은 티베트에 불교가 정착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티데축첸왕의 죽음으로 사정은 바뀌고, 실권을 잡은 반불교세력은 사원을 파괴하고 승려를 추방하는 등 불교 전래이전의 상황으로 되돌아가고자 하였다. 이러한 와중에 왕위에 오른 사람이 나이 어린 티송데첸왕으로, 후에 그에 의해 불교는 비로서 티베트 사회에 정착하게 된다.
티송데첸왕은 성년이 되자 권신들에 의한 파불정책을 배척하고 불교를 적극적으로 도입하고자 결심했다. 당시에 선왕인 티데축첸왕에 의해 중국에 파견되어 불교를 배워온 사람들이 여럿 있었으며, 특히 그 중 삼예의 종론 때 불교계의 최고지위에 오르는 펠양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펠양은 중국에서 귀국 도중 신라 출신의 정중사(淨衆寺) 무상(無相) 김화상(金和尙)을 만난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불교를 적극적으로 도입하고자 결심한 티송데첸왕은 신하로 하여금 당시 네팔에 체재하고 있던 나란다사원의 대학장인 샨타라크시타(725∼783)를 티베트에 초청하였다.
그러나 티베트에 들어간 샨타라크시타는 그다지 오랫동안 머물지는 못하고 다시 네팔로 돌아오게 되며, 후에 다시 왕의 초청으로 티베트에 들어가게 된다. 두번째로 티베트에 들어갈 때 샨타라크시타는 파드마삼바바를 동행하였으며, 이 파드마삼바바의 주술적 능력에 의해 당시의 반불교세력이 제압되었다고 전해진다.
이와같이하여 불교 도입의 틀이 형성된 티베트는 왕의 명령으로 삼예 대승원이 건립되고, 대본당이 완성된 779년에는 샨타라크시타가 계사(戒師)가 되어 최초로 티베트인에게 구족계가 주어져 티베트에 최초로 승단이 형성된다. 또한 티송데첸왕은 삼예 대본당에서 왕비와 고관들을 모아 숭불의 조칙에 서명케하고 불교를 정식으로 국교화시켰으며, 이로부터 범어불교경전의 번역 등이 시작되어 본격적인 불교문화가 전개되어 진다.
이와같이 티베트는 인도불교를 바탕으로 한 불교의 전개가 이루어지지만 중국과도 왕비의 혼인등 밀접한 관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관계는 당시 티베트가 대단히 강성하여 특히 786년경에는 돈황을 함락시켜 기세를 드높였던 것등에 연유하는 바가 크다. 이 돈황 함락을 계기로 티베트에 들어온 사람이 중국의 선승 마하연(摩訶衍)으로, 그의 〈불사불관(不思不觀)〉의 사상은 당시 티베트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당시 돈황에는 이미 다수의 선종이 유행하고 있어 마하연 또한 선종의 맥을 잇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티베트에 들어온 마하연은 왕비의 후원을 얻어 크게 세력을 떨쳤지만, 그러나 이미 형성된 인도불교에 바탕을 둔 승단의 비판으로 한때 금지령이 내려지기도 하였다. 하지만 선종 측의 강력한 항의와 자살하는 자가 나오는 등의 사태로 금지령은 해제되고, 이러한 사태를 계기로 인도불교와 중국불교의 갈등을 해소하고자 왕에 의해 시도된 것이 바로 〈삼예의 종론〉이다.
인도불교와 중국불교의 대립은 이미 샨타라크시타에 의해 예견되어진 일로서, 샨타라크시타는 유언으로 후에 그러한 논쟁이 일어나면 자신의 제자인 카말라실라(740∼797)를 부르도록 지시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샨타라크시타의 유언에 따라 티송데첸왕은 신하로 하여금 카말라실라를 부르도록 하고, 삼예 사원에서 논쟁을 시켜 진 쪽은 티베트를 떠나도록 명령하였던 것이다. 이 삼예 사원의 논쟁이 곧 〈삼예의 종론〉으로 이는 티베트 불교의 향방이 걸린 운명적인 대사건이었다.
이 논쟁은 티송데첸왕이 먼저 논쟁의 목적을 밝히고 그리고 이어서 마하연이 자신의 사상을 드러내고 그에 대해 카말라실라가 또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것으로 진행되고 있다.
마하연은 일체의 행위로서는 윤회로부터 벗어날 수 없으며, 오직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어떠한 관념도 떠나 분별의 경계를 벗어나는 것만이 무소득의 경지로 부처의 경계에 오르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곧 마하연은 〈불사불관(不思不觀)〉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 최고의 목적으로, 이는 선종의 돈오적 방법에 의해 가능한 것임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이에 대해 카말라실라는 소위 〈불사불관〉의 경지란 사람이 혼절한 상태와 동일하고, 더욱이 일체지의 획득에 필요한 〈개별관찰지(個別觀察智)〉조차 버리는 것이라고 비판하여 답하고 있다. 즉 카말라실라는 올바른 〈개별관찰지〉가 없으면 무분별의 경지에 오르는 방편도 없으며, 또한 일체법이 무자성임을 알 수도 없으며, 따라서 반야지의 획득은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곧 무분별의 경지란 단순히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일체법은 무자성이다"라는 명확한 언어표현을 동반한 공성의 지가 장기간의 수행을 통하여 얻어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카말라실라의 입장은 〈개별관찰지〉를 통해 마음을 한 단계씩 고양(高揚)시켜가는 소위 점수적인 입장을 보이는 것이다.
이와같이 삼예의 종론은 돈오적인 마하연과 점수적인 카말라실라의 사상적 대립으로, 불교의 본질적인 문제가 첨예하게 대립되어 나타난 중요한 논쟁이었다. 이 논쟁은 결국 카말라실라의 승리로 돌아가 마하연은 티베트에서 추방되지만 이 승리로 인해 티베트 불교는 인도불교적인 방향을 명확히 견지하게 되었고, 아울러 카말라실라가 남긴 《수습차제》3권은 후에 아티샤, 총카파에게도 영향을 주어 티베트 불교사상의 토대를 이루게 된다.
〈삼예의 종론〉은 티베트 불교의 향방을 결정한 중요한 사건으로 이는 인도불교와 중국불교의 대립, 점수와 돈오의 대립 등으로 달리 표현할 수 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방향을 확립한 티베트 불교는 이후 불교문헌의 번역과 연구등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져 불교국가로서 기틀을 확립시켜간다.
이태승 / 위덕대 불교학과
[출처 : 법보신문]
[출처] 파담빠 상계 카마라실라의 가르침,인도 불교•티벳 불교,대승불교|작성자 휴먼 레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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