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한자경
출판 예문서원
발매 2000.12.20
- ‘唯識無境, 유식 불교에서의 인식과 존재’ -
붓다께서 설파하신 佛法이 시대를 거쳐 전파되는 과정에서 많은 분파와 갈래가 생겨났는데 크게 보면 小乘과 大乘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소승은 남방의 부파불교로 대표되고, 대승은 북방 즉, 중국 한국 일본에 뿌리내린 不二의 가르침을 宗으로 삼는 中觀, 唯識, 禪으로 대표된다.
계명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한자경의 저서 ‘唯識無境’은 대승의 큰 줄기 중 하나인 유식사상에 대한 개괄적이고 핵심적인 考察이다. 서양철학을 전공한 사람답게 논리적이고 치밀한 이해와 분석이 매끄럽지만 유식사상의 정확한 파악에는 역시 학자의 개념적 이해라는 한계가 군데군데 엿보인다. 그러나 유식을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도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 본문의 논리 전개는 분명 유식 전반을 이해하는데 좋은 길잡이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다.
유식사상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唯識無境’ 즉, 오로지 識만 있고 境은 없다는 말이다. 이는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식일 뿐이고, 식을 떠난 경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말이 진실이라면 눈앞의 세계는 실체성이 모두 부정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세계는 나타나 있고 또 사라질 것 같아 보이진 않는다. 또 우리가 대상이라 여기는 시공간상의 모든 사물이 實有性이 없다면 나타난 모든 존재와 우주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런 의문에 대해 유식은, 色法이 실유가 아니라고 말할 때 그것은 색법의 존재성을 단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며, 단지 색법이 식을 떠나서 따로 존재하는 독립적 실재가 아니라 식이 轉變된 것으로 보는 것이라 말한다.
먼저, 대상 세계를 분별하는 우리의 감각과 인식은 하나의 所與된 인지적 구조, 곧 주어진 조건의 범주 내에서만 작용하는 도구이자 틀로서 기능하는 假의 영역이다. 이는 보이는 세계의 모습과 속성은 인식의 테두리를 결코 벗어날 수 없고, 단지 우리 자신의 視點 속에서만 의미를 가지는 假로서 시설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는 확실성을 갖춘 것은 인식하는 나와 인식된 것으로서의 대상을 포괄하는 식 그 자체일 뿐이며, 식을 넘어서 식 바깥에 실재하는 어떤 무엇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포괄적 식의 자명성을 떠나 인식의 확실성을 구할 곳은 없다. 인식하는 나와 인식된 것을 포함하는 공동의 근거가 二元化 이전의 동일한 식 자체이며, 결국 인식이란 불가피한 이원화의 진행일 수밖에 없다.
그러면 인간의 이러한 인식의 준거는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유식은 그 場을 인간 의식의 深層에 자리 잡은 아뢰야식으로 보고 있다.
아뢰야식은 藏識이라 불리며 깊이 잠재된 식으로, 우리가 흔히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는 ‘마음’이다. 유식에서 이 마음은 轉變하여 개인적 신체와 외부세계를 형성하는 기반으로 파악된다. 이러한 전변을 낳는 원인은 ‘마음 안의 業 또는 種字’이며, 이는 자아와 세계로 變現하는 정신적 힘, 우주적 에너지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마음의 업 또는 종자는 인식과 존재를 형성하는 본질적 원인으로 기능한다고 볼 수 있다.
유식은 아뢰야식 내의 업을 구분하여 개인적 업은 개인적 신체에, 공동의 업은 외부세계 형성에 작용한다고 설명한다. 이는 인간과 우주의 始原에 대한 불교적 존재론 또는 우주론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유식에서는 生死流轉하는 주체인 마음의 업 또는 종자 그 자체의 始原은 부정되고 철학의 제1원인, 기독교의 신의 존재처럼 시작이 없는 정신적 업을 이야기할 뿐이다. 이 시작이 없는 정신적 업의 개념과 마찬가지로 유식은 아뢰야식이 어떤 방식으로 개체와 전체의 배타적 근원으로 성립되는지에 대해서도 역시 함구한다.
사실 이런 유식의 설명을 개념적으로 이해하려고 들면, 개인적 신체는 아뢰야식 내의 개인적 업이 전변하여 나타난 것으로 납득 가능하지만, 외부세계가 아뢰야식 내의 공동의 업이 同一處로 변현하기 때문에 나타난다는 유식의 논리는 모호하기 그지없어서 근거를 찾기가 매우 어려워진다.
이 부분은 나와 외부세계가 모두 궁극적 실재가 나투어진 한바탕의 緣起的 존재임을 꿰뚫어보고, 그 실재가 유식에서 이야기하는 識의 근원임을 깨달아야만 알 수 있는 실증적 문제이다.
따라서 유식적 가르침의 핵심을 식의 自覺性으로 파악하여 나를 포함한 대상세계의 연기적 존재성을 깊이 자각한다면, 극단적 관념론이나 극단적 실재론 양 극단 모두를 벗어난 中道가 그 자리에서 바로 여실히 드러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원적 개념에 기반한 인식구조의 허상을 직시하여 그 基底에 있는 순수의식을 자각한다면, 그 통찰과 이해로 인해 자아와 세계의 연기적 實相을 보게 되고 눈앞을 흐리는 모든 경계를 넘어설 수 있는 ‘초월적 앎’으로의 飛躍이 가능한 處女地가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이런 ‘앎’으로서의 해탈을 유식에서는 번뇌와 무명으로부터 열반과 지혜로 전환하는 轉依로 설명한다. 전의의 의미는 識의 實性을, 현상으로 변현하는 식의 自性인 依他起性과 그런 현상을 집착 분별하는 식의 자성인 遍計所執性으로 설명한 후, 식에서 후자를 배제함으로써 남겨지는 圓成實性을 解脫的 식의 자성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결국 유식에서의 전의란 변계소집성의 비실체성을 直視하여 허망한 자아의 의지와 정체성의 탈락을 가져옴으로써 식이 스스로 般若(지혜)로 다시 깨어나며 원성실성을 문득 재발견함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실질적으로 의타기성과 변계소집성은 간단히 구분되고 나뉠 수 있는 것인가? 유식은 아뢰야식에서 그 둘은 순환적 상호규정이 반복되기 때문에 분명한 선을 그을 수 없다고 본다. 따라서 의타기성에 있어 원성실성 자각을 위한 染汚와 淸淨의 구분은 의식 상태의 차이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즉, 자아와 세계에 대한 원인인 아뢰야식의 의타기적 변현과정 자체를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다면 원만하고 성취된 모든 법의 참다운 성품인 원성실성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유식성의 자각이란 이처럼 의식의 근원을 확인하는 깨달음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무한한 마음인 一心을 밝히는 이러한 내적 탐구와 활동으로 인하여 깨어난 마음이 곧 眞如心이다. 그 마음 안에서 나와 세계, 주관과 객관, 식과 경의 관계는 둘도 아니요 하나도 아닌 妙의 관계가 된다.
결국 ‘유식무경’이라는 가르침을 통해 붓다의 맥을 이은 대승의 傳法者들이 전하고자 하는 것은 머릿속을 유령처럼 떠도는 분별망상의 비실체성을 알아 본래 있는 마음을 밝히는 지혜를 발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유식이 지향하는 지혜는 二分法的 알음알이가 아니라, 오직 마음뿐임을 깨달음으로써 드러나는 不二의 ‘앎’인 中道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緣起中道를 깨달으면, 三界唯心-萬法唯識-唯識無境의 가르침이 하나로 會通되어 禪에서 直指하는 무형상의 궁극적 실재인 ‘이것’ 즉, 本來面目을 밝힐 수 있다는 것을 이처럼 논리적이고 사변적으로 인식과 존재의 측면에서 장황하게 방편적으로 설명한 것이 바로 유식사상이다. 따라서 유식, 중관, 선이 각기 다른 가르침이 아니라 ‘이것’ 하나를 가리키고 있는 똑 같은 방편이니, 어떤 경전을 보거나 가르침을 듣더라도 지혜를 밝혀 圓融自在한 삶을 살게 하려는 것이 목적이다. 유식을 설파한 覺者들도 이것을 기대하고 한 자 한 자 적어 내려갔겠지만 알아듣는 이가 많지 않음이 애석할 따름이다.
[출처] 唯識無境, 유식 불교에서의 인식과 존재|작성자 아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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