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식

활성스님의 고요한 소리

수선님 2021. 8. 15. 12:53

활성스님의 고요한 소리

근본불교로 초지일관 수행하며 오직 한 길을 걸어오신 올 곧은 분이세요.

여전히 수행의 깊이 지적인 넓이 이런 것들이 남다르신 분이에요.

너무 맑으세요. 당신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것 때문에 고요하게 계신 게 아닌가? 그런데 드러내지 않는다고 해서 활동을 안 하시는 것이 아니라 정말 조용하게 전법활동을 꾸준히 하셨습니다.

 

고요한 소리 역경원

바람과 새들만 살 것 같은 곳. 이곳은 일반사찰이 아닌 스님의 개인 수행처이자 역경작업을 하는 공간임을 알려드립니다. 부처님 인사 올립니다. 머리를 조아려 자신을 한없이 낮추고 최상의 존경심으로 석례삼배. 운무에 휩싸여 강물처럼 흐르는 산. 깊은 고요함으로 모든 소리가 또렷해지는 이곳에 마음의 문을 지키고 선 노스님의 지팡이. 스님 정목이 왔습니다. 스님 정진하시는 데 소란스럽게 해드릴 텐데 감사 드립니다.

 

활성스님

<사>고요한 소리 회주. 1938년 출생. 1975년 통도사 경봉스님 문하에 출가. 통도사 극락암 아란야 해인사 봉암사 태백산 동암 축서사 등지에 수행정진. 현재 지리산 토굴에서 정진 중.

 

그 동안 어떻게 지내셨는지요?

나야 뭐 똑같지. 할 게 있나요? 아무 것도 안 하는 게 최상이지. 건들~건들 그냥 할 일 없이 뭐.

세상이 좀 평화로워지겠죠?

그래야 하는데 경쟁하고 추구하는 바가 너무 많아. 특히 돈. 돈 돈 돈! 아마 그러는 동안엔 세상이 안 편해지겠지요.

스님 일정은 어떻게 되시는지요?

나야 항상 매일 똑같지요. 나가서 포행도 하고… 건강을 유지하는 방법이죠. 나이 든 것 병을 혼자 앓는 것도 좋은데 남에게 피해를 끼치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운동을 열심히 해요. 앓아 눕지 않도록.

 

진달래 필 적에 스님 혼자 포행 하시면 기분이 어떠셔요? 꽃들하고 눈 좀 맞추시나요?

나는 그런 정서가 약해서. 지구 온난화 문제 사막화 문제 이런 것이 필요 이상으로 나에게 절박하게 느껴져 여기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대처해야 옳은가? 특히 스님들이 인류에게 살 길을 열어줘야죠. 누가 열겠어요? 苦의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의 길을 제시한 게 불교잖아요? 그러면 이 시대의 고를 해석해서 해결의 길을 여는 역할을 당연히 스님들이 맡아야죠.

 

활성스님께서는 법 이야기가 아닌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는 것으로 권고를 하시지요. 말씀을 하시면 에너지가 많이 나가는데도 불구하고 누가 물으면 지극정성으로 상대가 알아듣도록 말씀해 주세요.

 

스님과 나란히 걸으니 참 좋네요.

부처님께 가는 길은 모든 길이 좋지요.

 

부처님 말씀에 값을 매기지 마라.

스님께서는 소리 소문 없이 초기불교 역경사업을 해오셨습니다. 고요하게 불사를 해오신 이유는?

첫 번째로 한문 투성이다. 두 번째 오자 탈자 투성이다. 정확하게 번역해서 오자 탈자가 없도록 최선을 다해 책을 좀 반듯하게 만들겠다. 세 번째 비싼 책 값. 불교 책은 팔리지 않아 비쌀 수 밖에 없다고 해요. 그러나 불교 책은 제발 읽어 주십시요 해야 할 책이다. 부담 없이 독자 손에 넘겨주는 것도 우리가 해야 할 일중 하나라.

 

책값은 활성스님의 방침입니다. 부처님 말씀을 고루 함께 나누는 것이 목적이지 부처님 말씀에 값을 매기는 것은 내키지 않으셔서 앞으로도 책값을 올리지 말라고 당부를 하셨습니다.

불교에 이런 내용이 있나? 왠지 이대로 실천해 가면 거기 어디에 부처님이 계실 것 같은데? 아! 이게 붓다의 생생한 음성이구나 깨달으면서 굉장히 신선하게 느껴졌어요.

그때나 지금이나 천 원이 안 되는 가격인데 사서 보니까 진짜 달라 책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책은 한문 기반도 아니고 현대적인 언어로 아주 쉽게 쓰여 어려울 때마다 보게 되는 피난처 같아요.

고요한 소리는 한국불교사의 일대 사건이고 영원히 한국 불교사에 남을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고요한 소리 창립 30주년 중도포럼

출구를 못 찾겠더라고. 도대체가 처음 해보는 일이라. 30주년을 맞아 모처럼 모이신 분들에게 대단히 미안하지. 빚만 잔뜩 지고. 스님께서 법명을 내려주실 때 살 活 소리 聲 그때는 그 뜻을 잘 몰랐습니다. 그런데 중도가 이 시대에 할 일이 있겠다. 첫째 종교를 살려야 되겠다. 둘째 신을 살려야 되겠다. 세 번째 인간도 살리고 자연도 살려야 되겠다. 내가 그 일을 1/10 조금이라도 할 수만 있다면 부처님께서 두는 바둑의 장기 알로 그렇게 쓰여지는 게 내 역할일 것이다. 중도는 종교에 국한되지 않고 시대나 어떤 사상에 갇히지 않는 누구나 다 공감할 수 있는 주제라서…

 

큰 눈이 중도

부처님은 대기설법 이지요. 부처님 신통 중에서도 숙명통과 천안통은 3명에 넣었잖아요? 상대를 파악하고 거기에 맞추면서 이야기하시지요. 대상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다양한 경으로 발전한 부처님의 가르침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다 무수한 경전 속에는 시종 수미일관 되는 핵심이 있어요. 그것이 부처님 가르침의 기본이라고 봐요. 그 기본은 바로 8정도지요.

그리고 연기? 인과법이라고 하면 쉽잖아요? 우연 아니면 인과인데 우연을 어떻게 믿고 사노? 인과로 알면 우선 생각이 정리되고 마음도 편해지고 불안감이 줄어들잖아요. 사람들이 편안하게 살도록 해줘야 되겠다. 사람들이 사유를 좀 더 체계화 시키도록 도와준다면 다 합리적이 될 것이고 합리성의 기초를 인과에 두면 진리는 보편성을 얻지요. 그것이 부처님 지혜입니다.

 

종교는 인류가 의지하는 최고의 가치.

오늘날 인류는 어디에 서 있고 무엇을 향해서 가고 있는지 불교는 무엇을 해야 하느냐가 화두에요. 어쩌면 허황되게 큰 소리지요. 괜히. 그런데 불교라는 게 원래 그렇게 크다고 봐요. 진리니까. 진리는 어디에 가도 진리여야 진리잖아요? 그게 진리에요. 인류가 이 시대에 이렇게 고난과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역시 진리의 값을 해야 하는 거지요. 불교가 그런 진리의 값을 하기 위해서 부처님은 어떤 노력을 했고 지금 우리는 그 불교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자꾸 돌아보게 되죠.

 

큰 눈이 중도

극단은 편견이고 편견은 좁은 눈입니다. 갇히기를 거부하다 보면 자연히 중도가 되는 거예요. 큰 눈이 중도인 거에요. 치우친 것은 좁다. 인생은 고생살이 그 고생살이 하는 존재가 인류다. 어느 시대에나 인류에게 살 길을 열어주는 것이 중도다. 불교는 8정도고 8정도는 고를 해결하는 길이다. 어떤 종교 어떤 철학 어떤 가르침 치고 8정도처럼 인간에 밀착되어 있는 가르침은 없어요.

일상과 밀착되고 직결돼야 진리지요. 사람에게서 떨어져 가르치는 건 진리가 아니에요. 보통 진리들이 사람을 진리 당체로 보는 것이 아니고 진리를 가르쳐야 할 대상으로 보죠. 그럼 사람이 뭐냐? 내 인생에서 돌아보면 전부 후회스럽고 자책할 만한 일들밖에 없어요. 전부 실패고 실수고 어리석고 그런데 딱 하나 잘한 게 있어. 출가한 거.

281회. 정목스님 나무 아래 앉아서 특집. 활성스님의 고요한 소리 1부 중에서

 

 

 

소란한 세상 한 가운데서 나를 멈춰 세우는 물음들. 나는 어디에 존재하는가?

지금 여기. 고요히 멈추면 온전한 내가 보입니다.

 

왜 고요한 소리라고 했을까?

시끄럽게 소리 내지 않고 깊은 내면의 소리를 듣도록 하고 그 소리를 통해서 지금 여기에. 통찰과 자비로 어떻게 세상을 이끌어갈 것인가? 고요한 소리 Calm voice는 sound of silence 침묵의 소리지요. 요란스럽지 않게 조용하게 널리 널리 부처님의 원음을 전파한다는 뜻이지요. 고요 적정 평화로운 상태. 부처님 말씀을 따르면 오욕칠정의 세계 탐진치의 세계를 벗어나 사람다운 차원에 이르게 되면 고요해지는 것이 사람이 지향해야 할 길이라는 것이지요.

 

사람이 진리다.

심+의+식=마음의 세계

意가 무엇 때문에 중요하냐 하면 사람은 업을 짓는 당체<본체>가 되기 때문이지요. 심은 동물도 다 있겠지요. 그런데 동물이나 식물도 의를 가지고 있나? 인간은 심의식 중에 유별나게 튀어나오는 것이 意지요. 의의 대상은 법<Dharma>입니다. 인간은 진리를 알 수 있고 이해할 수 있고 실천할 수 있는 가능성 자체에요. 그것이 인간이지요. 그리고 인간으로 태어남의 의미도 크고 엄중한 일이지요.

 

사람으로 온다는 자체가 희망이라는 말씀이신가요?

인간은 가능성이니 희망이니 이런 차원을 넘어서요. 몰라서 그렇지 인간은 진리의 당체 구현체지요. 그래야 인간이지요. 그렇지 않으면 보물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 보물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중생이 되지요. 물론 우리도 불법을 만나기 전에는 이런 인간관이 없었죠. 사람? 그냥 뭐 돈 벌려고 아침 저녁으로 뛰는. 내가 그렇게 뛰었으니까.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할 줄 몰랐지요. 부처님 법을 만난 이후 다시 깨닫게 된 의미는 사람이 곧 진리다 이지요.

 

만일 신이 있다면 신보다 높은 게 사람이지요. 부처님은 인천의 스승이잖아요. 우리와 부처님과 무엇이 다른가요? 깨닫고 못 깨달았다는 차이지 똑같아요. 사람은 깨달았느냐<明> 못 깨달았느냐<無明> 無 자 한 자 차이에요. 무명이란 말 그 자체에 이미 명이 전제되어 있는 거에요. 그렇지 않다면 무명중생이 아니고 암흑중생이라고 해야지요. 우리는 본디 밝음으로 존재해요. 아직 인연 탓에 과거 업을 잘못 지은 탓에 부처님을 못 만난 탓에 법을 모르는 탓에 무명일 뿐이지 지금은 비록 무명일지라도 언젠가 만날 것이고 명 중생이 될 것이다.

 

근대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선승 경봉스님.

진리는 우리 몸에도 있고 삼라만상이 모두 다 가지고 있지만 한 생각이 미혹해 가지고 그걸 모르고 있단 말이야. 도를 알면 농사 짓고 장사하고 옷 입고 밥 먹고 온갖 것이 내 일이지 어디 딴 일이 있나? <극락호국선원법회 1968년>

 

30대 후반 경봉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활성스님.

큰 스님이 부산에서 온 신도 두 분하고 말씀하고 계시는데 들어가서 인사를 하게 되었어요. 그때 하시는 말씀이 한 生 안 난 셈 쳐라! 뭔가 길이 열릴 것 같은 그 말씀이 가슴에 와 닿았어요.

 

근본불교가 중요하다 라고 생각하신 계기와 이유를 여쭙고 싶습니다.

정통적 선사의 길이 아닌 새로운 길을 택한 활성스님. 조금 크게 보고 넓게 보는 버릇 때문이었지요. 불교 역시 관찰 대상이지요. 그때는 남방외도라는 따가운 시선을 받았어요. 그러나 한국불교계에 근본불교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참 힘든 일이었는데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어요. 초기 목표는 팔리어 불교를 한국에 소개하는 것이었어요. 전재성 박사와 대림스님 각묵스님 각각 4부 니까야 완역했어요. 한국불교의 힘찬 맥을 느끼게 하는 대작불사죠. 그게 이루어졌어요. 근본불교의 맥이 어디에 있느냐? 경전은 우리가 어떤 언어로 어떤 시대에 어떻게 엮어냈든 간에 다 엮은 것 아니겠습니까? 부처님은 그때그때 대기설법을 하신 거고 그 후세 사람들이 모은 거예요. 시대에 따라 불법을 이해하는 태도도 달라질 수 있어요. 부처님 가르침의 참뜻 진의를 헤아려야 해요. 부처님께서는 나는 고와 고의 해결을 이야기할 따름이라고 말씀하셨잖아요?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언어번역의 단계가 일단 이루어졌다고 보고 그 다음 단계인 뜻 번역의 단계로 나아가야 해요. 이것이 한국 불교계의 사명일 수 있어요. 뜻 번역을 하려면 불교해석의 전통에서 자유로워야 합니다. 후대인들이 부처님을 이해하고 어떤 위안을 찾았느냐 하는 것보다 원래 말씀하신 뜻을 해석해 내려는 노력이 필요하지요. 부처님의 대기설법은 전 인류를 향한 메시지예요. 그 시대뿐만 아니라 미래의 전 인류일 수도 있고 4차 산업혁명을 겪고 있는 지금의 우리일 수도 있어요. 부처님 본 뜻을 이해한다면 인류가 봉착하게 될 문제에 대한 부처님만의 답을 찾을 수 있다고 봐요. 부처님의 참뜻 이제는 경에서 그 해답을 찾아야 합니다.

 

고요한 소리

역경사업을 발원하면서 출발. 1992년 사단법인을 설립. 본격적인 경전번역을 위해 스리랑카 불자출판협회에서 근본불교의 소개를 위해 펴낸 출간물 중 부처님 가르침의 기초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만한 책들을 엄선해서 번역 출간해 왔다.

 

보리수 잎 시리즈 중에 영원한 올챙이 라고 하는 게 1권이에요. 80년 대 후반이니까 대승 불교권에서는 전혀 보지 못했던 내용이거든요. 내 피부로 직접 느껴지는 느낌 그리고 어디 다른 먼 곳에서의 소리가 아니라 내 삶에 직접적으로 와 닿는 말씀을 해주시는 아! 이게 붓다의 생생한 음성이구나 눈이 확 떠지는 그런 느낌이었지요.

고요한 소리의 모든 작업 사업 활동이 전적으로 자원봉사에 의해 이루어지고요 가장 중요한 사업은 출판 윤문인데 그것뿐만 아니라 실천수행도 진행하려고 합니다. 예를 들어 경전읽기 모임 스님께서 추천하는 염신경을 따라 명상 수행하기 등 여러 면에서 활동하려고 합니다.

 

사시불공을 알리는 명종

언제나 부처님 앞에 지극한 마음으로 두 손 모으고 몸과 마음을 바쳐 올리는 절. 자비롭고 위대한 스승 부처님을 향한 극진한 공경의 마음.

 

부처님은 사람의 완성자입니다. 부처님은 법을 주셨죠. 부처님은 아라한들은 내 발자취를 따라서 걷는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셨죠. 우리 인류는 부처님이 나오신 덕분에 사바세계에 살아요. 불법의 소중함을 만일 느낀다면 부처님 이상 더 누구에게 감사를 해야 합니까? 감사 감사 감사! 감사할 수밖에 없지요.

 

80이 넘으신 어르신께서 부처님께 절하시는 모습의 극진함과 하나도 흐트러짐 없이 예경하시는 공경심이 그대로 우러나시니까 지극정성으로 하시더라고요.

 

정념 8정도를 완벽한 지혜로 만들다.

이 공간에 있으면 마음챙김 Sati가 저절로 되는 것 같은 생각이 드는데 마음챙김 이라는 말은 고요한 소리에서 처음 번역하지 않았습니까? 마음챙김 이라는 것이 어떤 걸 얘기하는지 궁금합니다.

부처님이 출가해서 알라라 깔라마와 웃따까 라마뿟다 같은 당대의 최고 선지식을 찾아갔죠. 그러나 이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더 이상 가르침을 받을 곳이 없었던 부처님. 알라라 깔라마의 가르침과 부처님의 8정도의 차이는 뭘까요? 철두철미한 戒 누구보다 뛰어났던 定 그런데 지혜가 없었어요. 그들의 정을 무색계 정이라 하고 그건 심해탈의 영역으로 간주하죠. 어떻게 하면 지혜의 문을 열 수 있을까? 지혜를 얻는 길은 정념<Sati>이지요. 부처님은 정념을 추가해 8정도를 완벽한 지혜로 완성하셨어요.

 

Sati란 무엇인가?

Sati Sampajanna 정념 정지. 내가 호흡하고 있으면 호흡하고 있음을 걷고 있으면 걷고 있음을 아는 것 그것이 삼빠쟈냐 正知이다. Sati 정념은 신수심법이다.

身은 Rupa<色>이 아니고 Kaya<몸>이다. 남의 몸이 아니고 자기 몸이다. 자신의 몸으로 관점을 돌리는 것으로 신에 관한 Sati 에요. Rupa는 바깥 외경 외물이지요. 여태까지 밖을 향하던 시선을 안으로 돌리는 거죠. 몸 안에 무엇이 있고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를 살피는 것이지요.

Kayagata sati Sutta 신념처. 신념처란 몸을 관찰하는 동시에 신수심법 모두를 관찰하는 것을 포함하지요. 길게 들이쉰다 길게 내쉰다고 알고 짧게 들이쉰다 짧게 내쉰다고 아는 것이지요.

Sabbakaya Patisamvedeti 전신을 경험하면서 호흡한다. 전신의 의미에요. 첫째 남방불교 전통에서는 호흡의 시작부터 끝까지로 해석합니다. 둘째 말 그대로 호흡의 신이 아니라 몸 그대로 몸의 머리부터 발끝까지로 해석합니다. 이런 해석은 없는데 명신 색신을 모두 경험하면서 호흡한다.

名身<Namakaya> / 色身<Rupakaya>

 

Sati=수의<守意>/ 意=법을 아는 능력

Anapana sati 들숨 날숨에 대한 마음챙김. 중국에서는 안반수의경으로 번역. 守意 지킬 수. 의가 중요한 것이다. 意에 관점을 두고 호흡을 관찰하는 것이 Sati다. 의는 법을 아는 능력이다. 의를 지켜 법을 아는 것이 Sati다. 사띠 mindfulness 직역하면 마음 가득히. 그때의 마음 mind는 뭘까? 심일까 의일까 식일까? 意다. 법구경 제일 첫 구절에 나온다. Manopubbaangama dhamma 마노<Mano 마음>가 모든 법에 선행한다.

 

그러므로 마음에 의해서 온갖 행위는 지어진다. 만일 어떤 사람이 나쁜 마음으로 말하고 행동하면 반드시 고통이 뒤따른다. 마치 수레가 황소를 뒤따르듯이 <법구경 중에서>

 

마노를 지킴으로써 법을 지키고 법을 지킴으로써 부처님 법을 지키는 게 되고 부처님 법을 알게 되고 부처님 법을 알면 그것이 지혜가 되요. 지혜가 따로 있나요? 부처님 법 아는 것이 지혜지. Sati는 지혜를 닦는 첩경이자 바른 길. Sati가 빠지면 지혜가 없다. Sati가 갖추어지면 8정도는 저절로 구족되어서 마침내 진리가 진리다운 모습으로 확립된다.

282회. 정목스님 나무 아래 앉아서 특집. 활성스님의 고요한 소리 중에서

 

 

사람에게서 떨어져 가르치는 것은 진리가 아니에요.

진리를 알 수 있고 이해할 수 있고 실천할 수 있는 그 가능성 자체가 인간입니다. 인간은 진리의 당체 구현체지요. 우리하고 부처님하고 뭐가 달라요? 깨달았느냐 못 깨달았느냐의 차이지요. 즉 무명에 무 자가 붙었느냐 떨어졌느냐의 차이지.

스님의 말씀은 시작부터 끝까지 사람을 따라가는 것이더라고요. 그 절절함. 너 알겠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 속에서 이런 법을 알게 된 게 얼마나 진귀한 거니 너 이런 것 알아 하고 간절하게 바라보시는 모습에서 자비스러움 진정한 어른의 모습을 봤어요.

우리는 모두 뭔가 하려고 하는 사람 Doing mode지요. 그런데 Being mode로 있는 사람들은 그냥 존재함으로써 맑음과 향기로움 따스함과 훈훈함이 나오도록 하지요.

 

혼돈의 인류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은 어디입니까?

이렇게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제안. 사람이 사람다워지는 것 과거 현재 미래의 가장 중요한 점은 완성자지요. 완성된 사람이 부처고 아라한이지요. 우리가 나아갈 세상은 사람이 사람 구실하는 시대지요. 8정도를 걷는 것이 사람이 해야 할 일이죠. 8정도가 나아가야 할 길이지요.

사람들이 나아갈 길을 깨달을 때까지 얼마나 기다려야 할까요?

깨달을 때까지? 어떻게 보면 비관적일 수 있지요. 그런데 지금은 인류 역사상 이처럼 가장 교육을 많이 받은 시대는 없잖아요. 옳고 그름을 아는 생각의 힘이 점점 커져 빠르게 절망하는 풍조가 생겼어요. 이건 아닌데? 절망에 젖어있는 현대인. 사람의 의미를 돌아보자 고요. 과연 사람이 그렇게 값없는 존재일까요? 우리는 사람살이를 고생살이로 치부하는 버릇에 젖어 쉽게 절망해버려요. 반면 정보화 시대 4차 산업혁명 시대가 되면서 한편으론 새롭게 사람들 사이에 퍼져가는 것도 있어요. 명상의 세계로 다가서는 인류. 서구에서 주목 받는 트랜드 명상. 시대의 흐름을 감지할 수 있는 명백한 현상이지요.

 

스피릿 락 명상센터 <캘리포니아 우드케어>

현대문화의 혼란스러움 때문에 사람들은 마음의 고요함을 되찾고 마음의 평안을 가지고 어떻게 하면 더 현명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고민을 하지요 <잭 콘필드>

 

미로 위에서 요가 <Yoga on the labyrinth> 그레이스 대성당 샌프란시코

한국에서 마음챙김 Sati를 그렇게 강하게 중요시하고 강조했던 적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스님께서는 혜안으로 이 Sati가 제대로 번역되어야지 한국불교가 살아난다 계속 법문 때마다 강조를 하셨거든요. 수행의 세계화를 이루는 핵심 키워드 Mindfulness.

 

하필 왜 명상이 세계적으로 퍼져나가고 있느냐? 오히려 과학시대를 벗어나고자 하는 인류. 과학이 자세히 보면 말이요. 자본주의와 밀착되어 있어요. 개신교 자본주의 정통과학은 출발부터 아주 연관이 깊어요. 이 셋이 결국 지금까지 인류를 끌고 오늘의 상황을 연출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에게 체화된 막강한 자본주의의 위력.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힘은 소비문화에요. 자본주의는 인간의 탐욕에 바탕하고 있어 탐욕이 있는 한 자본주의는 절대로 안 무너집니다. 4차 산업시대 우리는 과학에 이끌려 맥없이 끌려들어갈 것인가?

 

변화의 시대 다시 생각해보는 불법.

해결의 길은 있다. 오늘날의 환경 이런 절망적 상황을 연출한 것도 결국은 자본주의. 자본주의가 추동하는 과학. 기술과학 위기에 처한 지구.

자본주의를 단죄하는 방식은 올바른 해결이 아니에요. 극복해야 할 일입니다. 실현 방법은 참 어려워요. 그래서 사람들이 절망하는 거예요. 환경문제도 모두 사람이 만든 거예요. 결국 해결책도 사람에게 있어요. 간단해요. 소비를 안 하면 돼! 소비를 안 하고 어떻게 사냐고요? 그건 극단이니까 가장 중도적인 소비의 길을 찾는 거죠. 소욕지족 적게 욕망하고 만족함을 알아야지요. 소욕지족만 잘 인식하고 교육하면 얼마든지 소비가 만들어낸 위기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요즘 소욕지족의 길을 찾기 위해 명상을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요?

명상뿐만 아니라 쓰레기 분리수거 같은 것도 소욕을 권장하는 흐름입니다. 단! 지족을 몰라. 만족하는 습관이 없어서 그래요. 충분히 만족할 만한 일을 겪고도 만족을 못한다고. 멈추는 법을 모르는 거예요. 아주 잊어버렸다고. 지족을 할 줄 모르고 지족의 가치를 인식하기를 거부하고 다다익선으로 자꾸 내달으니. 다다익선 많이 써라 많이 쓸수록 잘 산다. 이제는 스스로에게 근본적인 물음을 던져야 할 때에요. 내는 만족할 줄 아는가? 부처님은 전생에 도솔천에 머물렀어요.

 

도솔천

듀스타<Tusita>의 음역. 지족천이라고 한다. 이곳에 사는 무리들은 오욕을 만족하고 있음을 뜻한다.

욕계의 여섯 하늘 중 네 번째 하늘 도솔천. 족할 줄 알아라.

 

Piti 희열 기쁨/ Sukha 행복 편안함

속으로부터 즐거워하고 행복하고 기쁜 마음을 누리려면 족할 줄 알아야 해요. 욕계 육천이 설해진 이유가 있어요. 하나하나 걸어가야 할 길이기 때문이지요. 그게 계로 갈 수 있는 길이에요. 자본주의 힘과 과학 기술력이 합쳐 체계적으로 인류를 지배합니다. 태어나는 순간 욕망의 포로가 되는 사회 시스템 소위 자본주의적 인간이 되는 거에요.

지금 인류는 허우적거리고 있어요.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이 딴 생각할 여유가 있겠어요? 살아남기 바쁜데. 살아남는 노력을 인간들이 지금 하고 있잖아요. 새벽부터 뛰어 나가 돈 벌려고 모두가 다. 빠져 나오는 길 자체가 바로 옆 내 안에 있는데도 발견을 못하고 이용을 못하고 있는 거예요. 소욕지족 그 이야기 가지고 과연 해결이 되나? 누가 그래요. 실제로 자본주의가 무슨 힘이 있어요? 인간이 절제하기 시작하면 자본주의는 하루 아침에 무너지는 거예요. 자본주의도 환영에 불과해요. 습관적으로 물건을 보니 사고 싶고 사는 버릇은 익혀져 있고 절제하고 참는 버릇은 전혀 안 닦아졌고...

 

텅 빈 하늘 멈춰선 시간.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알게 되는 행복의 비밀.

만족을 알면 모든 것은 충분하고 바로 지금이 온전한 기쁨의 순간임을

 

일종식

밥을 만든 공덕이 얼마나 되며 이 음식이 온 곳을 깊이 헤아려

나의 수행이 공양을 받을만한가를 깊이 살펴 반성하며

탐욕에서 떠남을 근본으로 삼고 이 몸과 마음 다스리는 좋은 약 삼아

부처님의 위 없는 도를 이루기 위해 이 음식을 받아 먹으리다.

 

스님께서는 오랫동안 일종식을 하셨어요. 새벽예불까지 빠트리지 않으십니다. 365일 일년 내내 결제기간이라고 느껴질 만큼 수행을 하세요. 스님을 뵙게 되면 청정하신 모습이 마치 깊고 푸른 눈 정말 눈 푸른 납자라고 할 때 어떤 걸까? 생각했었는데 스님을 뵈면 느낄 수가 있었어요.

 

역경작업이 이루어지는 고요한 소리의 서재

30년 동안 부처님 원음을 전하기 위한 노력이 곳곳에 스며있는 곳. 미얀마 타이 스리랑카 삼장까지. 글로벌 시대의 역경사업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또 달라져야 되요.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불자는 부처님이 어떤 애기를 했는지 숙고해 봐야 되고 그 가르침에 따라 신행생활을 해야 되거든요. 그러한 점에서 이 고요한 소리 시리즈는 누가 뭐라 해도 1600년 한국 불교사의 일대 사건이고 영원히 우리 한국 불교사에 남을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고요한 소리는 부처님 말씀이고 근본불교라고 할 수 있는 부처님 원음을 발굴하고 천착하고 실천하고 많은 사람들이 나누도록 선양하는 것이 고요한 소리의 목표입니다.

지금은 디지털 문명 시대에요. 그래서 사람들이 디지털 쪽을 선호하는 문화로 너무 빨리 가고 있어요.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공존하는 시대가 훨씬 종교적인 시대지요. 어느 한 쪽만은 조화로움이 깨진다고 봐요. 그래서 이 책도 잘 보존해 가야 되고요. 그렇다고 디지털 문명을 도외시할 수는 없어요. 고요한 소리 이제는 조금 변화를 해야 되지 않을까요? 조금 변화해서 소통할 수 있는 기제를 자유롭게 쓰는 건 나쁘지 않다고 봐요. 본래의 입장을 저버리지 않는 소박함을 늘 간직하면서 접근성을 높여주는 건 꼭 필요하다고 봐요.

 

출가에서 열반까지

스님을 뵈면 지족하는 모습으로 보여서 그런지 굉장히 환하게 느껴져요. <갑작스런 칭찬에 어쩔 줄 몰라 하시는 스님. 늘 자신을 낮추시는 겸손함> 출가자가 뭔가 돌이켜 생각하면 소욕지족 지족의 기쁨을 아는 사람이 사람 가운데 주인이 아닐까요? 해마다 맞이하게 되는 출가 열반 정진기간. 부처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테마 열반. 부처님의 열반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부처님은 마지막까지 정념 정지를 놓지 않았어요. 사띠 삼빠쟈냐 사념처는 열반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고 경에 많이 나와요. 생로병사 부처님은 생과 사를 동격으로 보셨어요. 고성제와 도성제를 같은 위치에 두듯 생사일여는 불교의 유일한 특징이에요. 다른 종교에서 죽음은 끔찍한 것 혐오와 저주의 대상이지요. 아무도 죽음의 가치를 인정할 줄 몰라요. 불교는 죽음을 대단히 긍정해요. 죽음의 완성이 열반 아닙니까? 우리는 부처님 따라서 반 열반에 들기를 원하는 불자들이에요. 죽음을 완성하고 싶은 사람들이지 죽음을 피하려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늙음 병듦 죽음 모두 사람 만드는 결정적 요소예요. 만약 생노병사가 없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사람이라면 익어야 하고 익으려면 생로병사를 거쳐야 하지요.

 

왜 사람들은 생노병사를 몸부림치며 도망가고 싶어 할까요?

돈 몇 푼 잃어버려도 그런데 건강을 잃고 인생을 잃어버린다고 생각하면 끔찍하겠지요. 그러나 잃어버리는 게 아니에요. 경험하는 거죠. 老도 경험하고 病도 경험하고 死도 경험하고 윤회를 경험하는 거죠. 잃어버린다는 생각이 생로병사를 고통으로 만들어요. 사람은 창조주요 그 창조주인 사람이 뭘 잃어버려요? 그러니 생노병사도 편안하게 받아들이고 더할 수 없이 소중한 경험인데.

 

출가한지 40년 넘었지만 이런 순간에 부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 그래도 놓칠 때가 많거든요. 남은 생 동안 부처님 모시고 잘 걸어가야겠다 다짐해요. 긴 시간 피곤함도 무릅쓰고 소중한 말씀 전해주신 스님께 두 손 모읍니다. 스님! 감사합니다.

추운 겨울에도 변치 않는 소나무처럼 가슴을 울리는 올곧은 큰 스님의 말씀들. 흐르는 물처럼 인생의 모든 경험을 소중히 받아들이고 가장 아름다운 참사람의 꽃을 피워내라는 가르침. 스님의 말씀을 가슴에 품고 돌아서는 길. 가시지 않은 법향의 여운. 나를 깨우는 고요한 소리.

스스로에게 수행은 추상 같으신데 후학과 다른 사람을 대하시며 법에 대한 말씀을 풀어놓으실 때는 강물과 같이 유연하시구나.

 

아난다여!

그대 자신을 자기의 섬으로 삼을지니라. 그대 자신을 자기의 의지처로 삼을 지니라.

남을 의지처로 기대서는 안 되느니라. 법을 섬으로 삼고 굳게 붙들지니라.

법을 의지처로 삼고 굳게 붙들지니라. 다른 어떤 피난처에도 의지하려 들어서는 안 되느니라.

아난다여!

지금도 내가 간 다음에도

누구든지 자신을 섬으로 삼아야 할 것이며 자신을 의지처로 삼아야 할 것이며

어떤 바깥 피난처에도 의지하려 들어서는 안 되느니라.

아난다여!

이렇게 하는 사람들이 바로 내 제자 중에서도 가장 높은 경지에 이른 사람이 될 것이니라

다만 그들은 모름지기 향상하려는 의욕으로 충만해 있어야 하느니라 <그분 생애와 가르침 중에서>

283회. 정목스님 나무 아래 앉아서. 활성스님의 고요한 소리 3부 중에서

 

 

 

 

 

 

[출처] 262.활성스님의 고요한 소리|작성자 Inkf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