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담대종사의 호국사상
목 차 Ⅰ. 들어가는 말 Ⅱ. 호국 사상의 배경 Ⅱ-1. 사상적 배경 Ⅱ-2 호국적 사실(史實) Ⅲ. 호국사상의 내용 Ⅲ-1. 국가관 Ⅲ-2. 자비무적 Ⅳ. 호국사상의 실천 Ⅳ-1. 호국참회원의 신축 Ⅳ-2. 참회기도 Ⅴ. 맺음말 |
Ⅰ. 들어가는 말
불교의 목적은 누구나 구족해 있는 불성(佛性)을 계발하여 고(苦, duḥkha)로부터 벗어나 열반(涅槃, nirvāṅa)을 얻어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생활을 하자는 것이다. 이타(利他)의 면에서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소아(小我)를 버리고 대아(大我)의 정신으로 사는 것을 호국(護國)이라 한다.
일찍이 청담대종사께서는 독립만세 사건을 목도 후 민족과 국가에 대한 생각은 남다른 것이 있었다. 스님은 불교적 가치관마저 항상 국가관에 바탕을 두고 추구했는데 스님의 『마음』에서,
개인의 길에서는 언제나 정진(精進)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함께 태어나 공존(共存)하고 있다는 인연 때문에 사해동포를 깨우쳐 주지 않으면 안된다. 아니 동체대비(同體大悲)의 시각에서 불교는 차라리 사해동포의 구제에 더 큰 뜻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석가세존도 성불한 다음 우루베라촌에서 내려왔고, 의상대사도 또한 구국의 의지로 고국으로 돌아왔다. 오늘 우리는 그분들이 내려왔고 왜 돌아왔을까라는 사실을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분들은 누구에게로 돌아왔는가. 그의 모국의 나라로 그의 사랑하는 동포와 형제들의 곁으로 돌아왔다. 우리가 이곳에 태어났다는 사실은 어떤 사실보다도 우선하고 바뀔 수 없는 분명한 사실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는 한국인이다. 빈곤과 질병과 무지와 불결 등 많은 사회악에 시달리는 우리 동포의 구제가 오늘의 한국불교의 역사적 사명이다.
라고 역설하여 투철한 애국정신의 함양과 불교의 좌표를 정립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시급하다고 강조하였다. 청담스님은 국가와 불교를 불이(不二, advaita)적 세계로 보고 우리 민족 속에 내재하고 있는 불심을 계발하여 호국으로 승화(昇華)시키고자 하였다. 청담스님은 도덕적 연대주의에 입각한 민족관을 세우는 것이 호국하는 길이라고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지난 날 민족정신의 사명이 민족의 정치적 독립이었다고 하면 오늘날에 와서는 사회적 정의를 세우는 것이 민족정신의 새로운 과제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과거 민족의 독립을 목적으로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빈부의 차별이나 귀천의 가림도 하지 않았다. 그런 까닭으로 우리는 물질생활이 서로 고르지 못한 것도 불평 없이 감당해 왔다. 이제 독립이 된 지도 벌써 성년이 훨씬 지났으니 우리는 완전히 하나가 되기 위해서도 사회정의를 세울 때가 온 것이다. 다시 말하면 민족 각자가 자발적으로 이 나라를 사랑하고 육성하기 위해서는 우리 사이에 차별을 추호도 있을 수 없다. 만일에 사회적 정의가 이 나라에 형성되지 않는다면 우리 민족은 언제나 분열되어 혼란에 빠질 가능성을 가지게 된다. 따라서 국민 각자가 자유로운 권리와 독립된 권리를 가지고 공통된 이념과 과거의 보편적인 도덕률의 발견과 실현이라는 공통 목표에 의하여 지배되는 조국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참된 자아가 실현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나의 불교적 국가관이다.
청담스님은 사회적 정의가 없는 곳에 민족의 단결이 없으며, 민족의 단결이 없는 곳에 어떻게 나라가 유지되어 발전할 수 있겠는가하고 그 특유의 호국관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국민의 열반(涅槃)계발을 통한 도덕관을 정립하여 호국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사상적 특징이 청담스님의 호국관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논자는 本稿에서 청담대종사의 호국사상 배경과 내용, 그리고 실천을 구명하고자 하는 것이 연구의 목적이다. 본 논문에서는 청담문도회에서 편집한 『청담대종사 전서(靑潭大宗師全書)』 권1-9와 대승경전 중 『불설인왕반야바라밀경(佛說仁王般若波羅蜜經)』과, 『금광명최승왕경(金光明最勝王經)』 그리고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등을 중심으로 청담 대종사의 호국사상을 고찰하면서 이 시대의 진정한 호국정신을 배우고 익히는 기회로 삼고자 한다.
Ⅱ. 호국 사상의 배경
Ⅱ-1. 사상적 배경
불교의 목적은 광의에 있어서는 일체중생, 협의에 있어서는 인류를 구제하는 것이다. 인류에게 현세적인 복리를 주기 위해서는 먼저 인류의 거처인 국가를 진호(鎭護)하는 데 있다. 불교의 경전 중 호국의 경전으로 존숭(尊崇)되어 온 경전은 ①『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7권 ②『금광명 최승왕경(金光明最勝王經)』 10권 ③『불설인왕반야바라밀다경(佛說仁王般若波羅蜜多經)』 2권을 꼽을 수 있다.
먼저 『불설인왕반야바라밀경』의 호국품 제5에 의하여 보면,
대왕이여! 汝等은 선청(善聽)하라. 내 이제 바르게 국토를 수호할 법을 설하리니 너는 마땅히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을 수지할지니라. 국토가 난(亂)하려하여 破壞劫燒하고 적이 와서 나라를 파괴하고자 할 때에 당하여 마땅히 백의 불상(佛像)과 백의 보살상과 백의 나한상을 청하여 백 비구중과 四大衆과 七衆이 함께 이 경을 듣되, 백의 법사를 청하여 함께 반야바라밀을 외우게 할지니라 …… 대왕이여 하루에 두 차례 이 경을 독송하라. 너의 국토 중에 백부의 귀신이 있고 이 一一部에 다시 백부가 있어서 거들이 이 경을 듣기를 즐기리라. 이 모든 귀신은 너의 나라를 수호하리라. 대왕이여, 국토가 亂할 시에는 먼저 귀신이 乱하며, 귀신이 乱하는 고로 만민이 乱하며, 적이 와서 나라를 劫하고 백성이 亡喪하며, 君과 臣, 太子와 百官이 함께 시비가 생기고 천지는 괴이하며, 二十八宿의 星道와 日月이 때를 잃고 度를 잃으며, 많은 적이 오리라. 대왕이여, 만약 火難·水難·風難 一切의 모든 乱에도 또한 마땅히 이 경을 독송하라.
이렇게 하면 국토를 수호할 뿐만 아니라 내지 복을 수복(守福)하며 중난(衆乱)을 면하게 된다는 국토를 수호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이 내용은 부처님께서 파사익왕(波斯匿王)에게 호국하는 방법을 가르쳐 ‘반야바라밀’을 수지(受持)하라 하셨다. 그러므로 이 ‘반야바라밀’은 이것이 제불보살과 일체 중생의 심식(心識)의 표본(標本)이요, 일체 국왕의 부모이며 또 여의주(如意珠)이며 호국주(護國珠)라는 것이다. 요컨대 호국을 기원하고자 하거든 인왕법회를 개최하는 것이 그 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그 다음에 『금광명최승왕경』에 나타난 호국사상의 전거는 「호국품」 제12에 의하여 보면,
만약 人王이 이 經을 들을 때, 隣國의 원적이 四兵를 갖추어서 그 나라를 파하려고 생각한다면 이 經의 威神力으로써 저지할 것이요 隣敵이 다시 異怨이 있어서 그 경계를 침요(侵擾)하면 그 나라에는 모든 災變이 많고 疫病이 유행하게 할 것입니다. 때에 王이 이것을 보고 四兵을 일으켜서 그 敵國을 향하여 討伐을 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 때에 마땅히 무량무변한 藥叉諸神의 권속들로 더불어 각자의 形體를 감추어 협조하되, 저 원적들로 하여금 자연으로 항복하여 그 국경에 오지도 못하게 하겠거던 어찌 兵戈로 相伐함이 있도록 하겠습니까?
라고 하여 이 經이 유포되는 곳에는 어떤 국토에든지 四天王이 찾아가서 이 경의 설법 듣기를 즐겨하고, 또 그 법사를 위하여 모든 편리를 아끼지 않는 왕이 있다면 그러한 왕을 두호(斗護)하는 동시에 이 경의 위신력에 의하여 그 적국(敵國)이 도리어 모든 재난이 일어나서 해(害)를 입게 된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불교에서 진호국가(鎭護國家)를 기원하고, 또 그 법회를 위해서 ‘인왕백고좌회(仁王百高座會)’와 ‘금광명경회(金光明經會)’를 행한 것은 이런 근거에서 한 것이다. 지금까지 고찰한 바와 같이 본론의 취의(趣意)는 정법(正法)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처님이 이 세상에 출현한 이유가 정법의 홍포에 있는 것은 말할 필요조차 없는 일이다. 이와 같이 정법(正法)을 행함으로써 국가와 국민이 수호된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또 ?법화경?과 같은 전체를 독송함으로써 그 공덕으로 국가가 수호된다는 것도 있다. 이상에서 열거한 것은 불교가 국가민족을 위한 근본 되는 근거를 일별해 본 것이다.
Ⅱ-2 호국적 사실(史實)
이러한 불교의 호국사상과 우리나라의 불교와의 관계를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간추려 보면, 우리 민족은 불교를 받아들인 이래 어느 민족보다 잘 이해하고 소화시켜 잘 활동하여 빛나는 민족문화를 생산하고 사상을 고도로 향상케 하였다. 따라서 호국사상으로 일관된 민족불교는 진흥왕 대에 혜량법사에 의해서 팔관회를 개설하여 위국충열(爲國忠烈)의 전몰장병을 위로했다. 신라는 진평왕(眞平王)때 고구려의 빈번한 공격을 받아 곤경에 빠졌다. 이 때, 왕명을 받들어 수(隋)에 원병(援兵)을 청하는 글(乞師表)을 지은 이는 당시의 고승 원광이었다. 스님은 그 글에서 “자신을 살리기 위해 남을 해치는 일은 승려로서 취할 바는 아니나 나라의 은혜를 저버릴 수 없다”라는 말을 하고 있다. 선덕여왕 때에 자장 율사가 황룡사에 9층 국방탑을 창건하여 삼국통일의 밑바탕을 굳건히 하여 9개국이 항복하였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문무왕 때 의상조사는 호국단성(護國丹誠)으로 당고종(唐高宗)의 내침할 뜻을 탐지하고, 중국 화엄종 제3조라는 명예를 헌신짝 같이 버리고 귀국하여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창건하고, 명랑(明郞)으로 하여금 밀인법(密印法)을 행하게 하여 오랑캐의 침략을 사전에 방지하였다.
고려 태조 왕건은 부처님의 가호로 건국하였음을 믿고 국교로서 대대손손 봉행할 것을 유훈으로 다짐하였다. 현종 때 글안병 내침과 고종 때 몽고병 내습에도 양차에 고려대장경 주조로 무난히 위기를 면하였다. 이것은 오로지 민족 전체가 적을 쳐부수어 없애겠다는 불타오르는 정신무장의 힘이었던 것이다. 고려 숙종 때는 수없이 덤비는 오랑캐 떼를 물리치기 위해서 항마군(降魔軍)이라는 승병(僧兵)의 상비제도가 창설되어 정규군으로써 호국의 선봉이 되었고, 고려 말에는 전선조병(戰線造兵)·조총사격수(鳥銃射擊手)·화약제조병 등 전문적인 기술병은 승군이 독점하였다.
조선조의 건국 이면에는 충성을 다한 신조(神照) 등의 승장(僧將)이 건국의 기반이 되었고, 여말선초(麗末鮮初)에 걸쳐 민족의 숙적이던 왜적을 몰아내는 주 역할을 담당하여 조선 초기부터 일관된 배불정책에도 불구하고 끈기 있게 호국사상의 전통을 길이 빛나게 했다.
선조 임진왜란 때는 서산대사가 영도한 의승군의 활동이 국운을 좌우하였고, 평화외교에도 사명대사가 큰 성과를 올린 것은 너무나 뚜렷한 것이다. 임진왜란에 이어 정묘호란 때의 허백(虛白) 명조(明照) 승장의 용맹과 애국심의 결정으로 청천강에서 오랑캐를 물리쳤고, 병자호란 때의 벽암(碧岩)선사의 단성(丹誠)은 온 겨레를 감동케 하였다. 숙종 이후 고종의 갑오경장까지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에서 수도 방위를 독점한 의승군의 진충보국(盡忠報國)은 눈물겨운 바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한국불교는 호국사상의 실천종교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국가 민족이 위기에 처하였을 때에는 신명을 초개같이 버리고, 군문에 나서서 육탄으로 대결한 것은 평소에 불교사상에 의한 정신무장이 공고한 까닭이다. 평화시대에도 팔관회, 연등회의 연중행사를 비롯하여 도량법회 등 의식으로부터 인경(印經), 사경(寫經), 간경(刊經) 등에 이르기까지 국가 민족을 위해 행하여 졌으며 부처님을 조상하는 것을 비롯하여 창사(創寺), 건탑(建塔), 주종(鑄鐘)에 이르기까지 모두 호국을 위주로 하였으며, 생산된 문화재를 보존하는 데 목숨을 돌보지 않았다.
1910년 일본의 조선합방은 우리 주권을 빼앗고 식민지로 삼아버린 가장 쓰라린 것이었다. 1919년 3월 1일 기해 한국 민족이 자주민임을 세계만방에 선포한 시위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지니 이것이 3·1 운동이다. 이 항일 투쟁의 주동 인물은 만해 한용운(1879~1944)스님이었다. 그는 그 뒤에도 문필을 통해, 또는 신간회(新幹會, 1927), 만당(卍堂, 1935)과 같은 단체를 통해 줄기차게 항일 투쟁을 계속하다가 해방을 1년 앞둔 1944년에 입적하였다. ‘님의 침묵’에서 읊고 있는 ‘님’은 단순한 ‘님’이 아니라, 그가 일생을 바쳐 그리던 잃어버린 조국을 가리키고 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한국불교는 호국사상을 실천한 종교이고, 철학이며, 예술의 원천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과거의 자취가 청담스님에게 흘러 들어가 그의 방식으로 채색(彩色)되고 구성되어 그의 호국사상이 형성되었다. 그럼 먼저 그의 국가관을 형성하는 과정과 내용을 알아보자.
Ⅲ. 호국사상의 내용
Ⅲ-1. 국가관
인간의 태어나기 전 시대적 상황은 태어날 사람의 삶에 대한 예언이며 동시에 삶의 예행(豫行)이다. 왜냐하면 태어나면 누구나 그 시대의 상황을 겪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스님은 1902년 경남 진주시 수정동에서 부친 이화식(李花植 )과 모친 고부용(高芙容)씨의 1남 3녀 중 장남으로 생을 받았다. 스님이 태어난 진주는 이름난 고도(古都)로서 임진왜란의 상흔을 간직한 도시이며 의기(義妓) 논개를 탄생시킨 고을이기도 하다.
우리나라는 갑신정변(1884)의 소용돌이로 고종이 일본군에게 맡겼다가 청군에게 맡겨지는 수난을 겪게 되었다. 거기에 따른 민란은 여기저기서 일어났고 1910년에 나라의 주권은 일본의 불법적인 수단에 의하여 강점된 뒤 1945년의 8·15 민족해방에 이르기까지 일제(日帝)의 식민지 지배하에 들어갔다.
청담스님은 9세에 진주 남강가의 봉련제(鳳輦齊)라는 한문서숙에서 『동몽선습(童蒙先習)』·『맹자(孟子)』, 『논어(論語)』 등의 한학(漢學) 수업을 하였다. 청담스님은 17세에(1918년) 서당에서 글공부를 포기하고 진주제일보통학교에 입학했다. 훈고학적 분위기를 떠난 청담스님은 학교생활에 빨리 적응되어 학교 성적도 반에서 항상 1등이었고 친구들을 놀려주는 개구쟁이 노릇도 하였다고 한다.
청담스님은 보통학교 시절 3·1운동에 가담한 심정의 소회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진주 재판소 앞에서 20여리쯤 나갔을 때였다. 우리 앞에는 칼을 차고 말을 탄 일본 헌병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닥치는 대로 칼질을 하였고 몽둥이질을 하였다. 시위는 삽시간에 신음소리와 울부짖음으로 가득 찬 피바다가 되었다. 아아, 나는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다.
태극기를 들고 맨 앞장섰던 나는 제일 먼저 붙잡혔고 당연히 감금당하고 고문을 받았다. …… 나는 까무러지고 물세례를 받아 깨어나기를 일주일 동안 거듭한 다음, 그들의 고문으로부터 풀려나왔었다. 나와서 안 일이지만 태극기를 들고 앞장섰던 내가 그렇게 빠른 시일에 풀려나올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진주에서 큰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던 황의치 씨가 동분서주한 덕이 있었다.
일주일 만에 일본 헌병대에서 풀려나온 청담스님은 학교를 찾았다. 학교에서는 항일 운동의 영웅처럼 자신을 높이 받들어 주었고, 그 사이에 자신도 모르게 유명해져 있었다고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저 애가 이번 감옥에 들어갔다 온 애래, 태극기를 들고, 조국의 해방을 달라고 외쳤대.
이런 분위기였으므로 담임선생은 청담스님을 불러 놓고 하는 말이 “공부를 열심히 하는 길이 독립하는 길이다”라고 타일렀다고 한다. 청담스님은 그 말이 진실이 있는 것 같아 더욱 열심히 책 속에 파묻혔다고 한다. 그 후 청담 스님의 학업 성적은 급우들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빼어났고 학급의 모든 일은 그의 주도 아래서 처리되었다고 한다.
스님은 1921년 2월에 진주제일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진주농업학교에 입학하려 하였으나 기미 3·1 운동에 앞장을 섰었다는 사실로 ‘불합격’이라는 통지를 받았었다고 한다. 그래서 청담스님은 그런 사실을 알고 교장선생을 다섯 번이나 찾아가 정당성을 주장하였다고 한다. 그 후 교장선생이 입학을 허락하여 진주 농업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는 그 당시의 느낀 심정을 다음과 같이 토로하고 있다.
일본인들과 친숙감을 맺어주기 보다는 오히려 배일사상과 독립에의 의지를 길러 주었고, 그것은 다시 불문(佛門)에 발 딛게까지 했었다.
학생운동으로 유명해진 청담스님은 입학 후 교내 학우단(學友団) 초대 회장으로 민족의식을 불어 넣어 주었고, 나라를 찾는 대열에 항상 앞장섰다. 그런 날들이 겹치고 어느 덧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다. 청담스님은 어느 날 서장대(西藏臺)의 기슭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중 목이 말라 호국사(護國寺)를 찾아가 물을 얻어 마셨다고 한다. 한참 꿀꺽꿀꺽 마시고 있는데 한 스님이 그 모습을 보고 있더니 다음과 같이 묻고 설법하였다고 한다.
왜 사람은 물을 마셔야 하느냐? 나는 미처 무어라고 대답할 말이 떠올라 오지 않았다. 그는 계속 ‘마음이 물을 마시고 싶다고 요구하기 때문이지. 왜 불이 뜨겁고 얼음이 찬 줄 아느냐? 마음이 뜨겁다고 생각하고 차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 만약 우리가 불이 뜨겁고 얼음이 차다는 관념을 털어버릴 수만 있다면 그것은 그저 아무 것도 아닌 저 돌멩이와 같은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 그러나 마음에서 나를 발견할 때 우리는 생사를 벗어버릴 수 있는 것이다. 불타(佛陀)란 다른 것이 아니라, 그 오욕을 벗어 버리고 마음을 찾는 일인 것이다 …… 나는 그의 말을 들은 뒤부터 ’마음‘이란 말에 중치가 막혀,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벙어리처럼 우두커니 서 있다가 토요일만 되면 다시 호국사로 그 ’마음‘을 들으러 갔었다.
위의 예문은 청담스님의 호국사에 놀러 갔다가 박포명(朴圃明) 스님으로부터 ‘마음’ 법문을 듣고 진정한 나라의 독립은 자성광명(自性光明)을 밝힘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註 10)에서와 같이 자각하고, 출가를 결행하려는 의지를 갖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바로 출가를 결심하고 해인사·백양사 등 고찰을 찾아다니며 만공스님을 뵈려 했으나 이때는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 가정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러나 한 번 뜻을 세운 청담스님은 친구인 화가 박생광(朴生光)의 주선으로 효고갠(兵庫縣) 송운사(松雲寺)로 출가하여 아끼모도 준까(秋元渟稚)스님 밑에서 행자 생활 2년 3개월을 하다 1926년 5월에 귀국하여, 마침내 1926년 5월 17일 경남 고성군 개천면 옥천사(玉泉寺)에서 석전 박영호 스님을 은사로 득도(得度)·수계(受戒)하였다. 법명은 순호(淳浩)였다.
수계 뒤 스님은 서울 개운사의 대원 불교전문강원에서 교계의 대강백인 박한영 스님으로부터 대교과(大敎科)를 공부하면서 당시 50여 명의 젊은 승려들과 함께 전국학인대회(全國學人大會)를 1928년 3.14~17 개최하여 당시 부패해 가는 승단의 기강을 바로 세울 것을 주장하며 아물러 한국불교를 왜곡화시키려는 일제의 종교정책을 규탄하였다. 그러나 이 운동은 일제의 관권에 의해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스님은 이후 주로 참선 수행 생활에 목숨을 건 인욕정진 끝에 견성을 인가받고 올연(兀然)이라는 불명을 당대 최고의 선지식인 만공선사로부터 전수받았다.(1934년).
당시 교단의 사정은 승려가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어 사찰 내에서 처자 권속을 거느리고 생활하며, 음주, 육식과 끽연에 구애가 없는데다, 사찰시설을 유람객을 상대로 하는 영업장으로 이용하는 것이 보편화되고 있었다. 이런 판국에 불교계의 사판 지도층에서는 이권과 명예욕의 아수라판을 벌리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것은 분명 정화의 수술이 시급한 중증(重症)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청담스님은 한국불교의 정통성을 확립하고 불조(佛祖)의 정법을 수호하기 위하여 오염된 교단을 청정하게 바로 세우자는 불퇴전의 원력으로 운허 용하(1872~1980. 11. 17)스님과 함께 선학원에서 유교(遺敎)법회를 1941년 2월 26일부터 10일 동안 개최하였다.
이 법회는 한국불교의 전통을 수호하려는 수좌들이 계율 수호, 전통 선맥의 계승을 위해 침체된 불교를 진흥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친일화 된 불교에 침잠한 당시 교무원 관계자들과 삼십일 본산 주지들이 적극 반대를 하고, 정통 불교로의 회귀를 바라지 않는 일제의 방침 때문에 스님은 법회 도중에도 여러 차례 종로 경찰서에 소환되어 법회를 중지할 것을 회유, 협박당하기도 했다. 스님은 불퇴전의 정법수호의 신념으로 꿋꿋이 이겨내어 만공 월면(1972~1946)·동산 혜일 등 40여 명의 스님들이 참여하여 성황을 이루어 한국불교의 법맥을 이어가는데 큰 힘이 되었다.
위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청담스님은 1928년부터 1945년 해방되기 까지 마음의 정화(淨化)로 敎團淨化하는데 보살행을 실천한 인욕보살이었다.
청담스님은 “1945년 8·15 해방은 우리 국민에게 신체의 해방은 되었으나 정신의 해방은 되지 못했다”면서 “누구나 한국의 정치적 독립과 경제적 자립을 외치며 그를 위하여 싸울 줄 알면서 어찌하여 그의 정신적인 밑받침이 될 사상적 자주를 위하여서는 그렇게도 무관심하단 말인가?” 개탄하면서 상실한 인간의 마음을 찾아 나서야 된다고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내」가 무엇인가를 모르는 데서 온갖 혼돈과 어리석음이 비쳐지니, 먼저 「나」를 찾아 「나」의 정체를 파악해야 한다. 진아(眞我)를 체득함으로써 만이 어떤 경지에 처해서도 확고부동한 인간 본연의 자세를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전 세계 시민들은 각자 마음으로부터 마신(魔神)을 추방하고 상실했던 본래의 「마음」을 찾아 올바른 자아를 발견해야 합니다. 자신이 만들어 놓은 기계문명과 물질만능의 예속에서 풀려나와 인생본연의 영원과 자유와 평화에로 전진자세를 가다듬어야 하겠습니다.
스님께서는 상실한 인간의 마음을 찾아 인간 본성을 회복하고 사회정의를 세워 균형 잡힌 발전을 위한 올바른 민주주의의 사회기풍을 조성하는 것이 스님의 불교적 국가관이다. 불교적으로 말하면 보살의 자아관으로 정립한 국가를 주창하는 것이다.
불교에서 본래적인 자아실현에 전념한다고 하여 ‘나’라는 개별적 자아를 고집하면서 나 밖의 다른 사람을 배격하거나 돌보지 않는 태도를 갖는 것은 아니다. 자아의 위치를 상관관계성(緣起)에서 인식하고, 나 이외의 다른 사람들도 나와 꼭 같이 보편적인 상관관계성(相關關係性)에 얽혀 있는 개체로 보는 것이다. 불성(佛性)의 논리로 보면, “모든 사람은 다 같이 한 몸(萬人一體觀)이다.”라는 관념이 떠오르게 된다. 각 개인은 모두 한 몸이기 때문에 서로 존중하고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기와 타인이 궁극적으로는 한 몸이라는 생각은 자타가 둘이 아니다(自他不二)는 사상으로 발전하게 된다. 자타가 동일하다면 이것은 萬人이 平等함을 의미한다.
진리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다. 그러므로 他人을 존경하고 모든 사람에게 자비의 마음으로 대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승불교에서는 보살의 이상이 자타평등사상을 실천하는데 있다고 강조한다. 모든 중생은 한 몸이기 때문에 나 스스로의 제도보다도 중생의 제도를 먼저 서둘러야겠다는 자비가 곧 휴머니스트의 상징인 보살의 근본정신이다. 이런 논리로 청담스님께서는 내 마음이 우주를 주재하는 유일한 주인공이라는 유심사상만이 참혹한 암흑에서 허덕이는 인류를 구원하는 참된 길이라고 고구정녕 강조하셨다. 맑고 밝은 마음만이 나와 나라를 지킬 수 있으며, 이 바탕이 정립될 때 사회정화, 국가통일, 세계평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스님은 자신과 국가를 불이(不二, advaita)로 보고 마음을 밝혀 호국하고자 하였다. 이것이 스님의 국가관이라고 할 수 있다. 스님은 호국하는 길을 ‘자비무적’에서 찾았다.
Ⅲ-2. 자비무적
스님은 간디가 ahiṃsā를 통하여 인도 독립운동을 하였던 것과 같이 ‘자비무적(慈悲無敵)’이란 신념으로 호국하고자 하였다. 스님은 항시 심청정시불(心淸淨是佛)을 주창하셨다. 내 마음이 깨끗하면 그것이 부처란 것이다. 그래서 스님은 자비를 내 것으로 만들어 놓기만 하면 이 세상에서 무서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慈悲無敵)고 하시면서 밝고 깨끗한 마음을 찾기 위해서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는 참회를 하라고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내가 부족해서 집이 망하고 나라가 망하고, 나 하나 잘못해서 이 나라가 혼란하다는 그런 태도로 참회하고 겸양해야 됩니다. 그래야 우리가 복을 받습니다. 이런 태도로 부부간에도 참회하고, 양보하고, 봉사해 주고, 참으로 위해 줘야 이것이 자비이고, 진정한 애정이고 행복의 문입니다. 불교의 이런 자비사상은 35억 인류에게까지 확대하여 35억을 나 혼자 살릴 수 있도록 나 혼자 일하자 하는 이런 정신으로 나가야 합니다.
공산당은 너도 나도 일하고 일 안하는 사람 죽이자! 이런 모토를 내세우면서 실제는 공산당원들이 일반인을 착취하고 있지만, 불교는 진실로 남을 위해서 일하자는 자비심입니다. 그러므로 불교는 자본주의나 공산주의 보다 훨씬 앞섰습니다.
세계 35억의 사람이 다 같이 남을 살리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세계는 지상 극락이 됩니다. 이렇게 남을 해치지 않고 서로 위해주며 사는, 자비 앞에는 적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상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스님의 호국실천 강령은 ‘자비무적’이다. 이런 호국사상은 대승불교의 보살 자아관에서 유래되었다고 생각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대승불교 운동자들은 자신의 이익뿐만 아니라 생사의 세계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모든 중생들을 이익되게 하는 이타행을 강조하는 행동주의적인 불교를 제창하고 나왔다. 이러한 대승의 이상을 가장 잘 표현해 주는 것이 보살의 개념이다. 『금강경』의 「대승정종분」에서는 보살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셨다. 모든 보살마하살(Bodhisattvamahāsattva)은 반드시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 받을지니라. 있는바 일체의 중생의 종류인 알에서 태어난 것(卵生), 어미 태 안에서 태어난 것(胎生), 습기로 태어난 것(濕生), 자체가 없으며 의탁한 데 없이 홀연히 생겨난 것(化生), 욕계와 색계에 사는 형상이 있는 것(有色), 순 정신적 존재인 세계의 형상이 없는 것(無色), 생각이 있는 것(有想), 생각이 없는 것(無想),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요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닌 것(非有想非無想), 이것들을 내가 무여열반(無餘涅槃, anupadhiśeṣa-nirvāṇa)에 들게 하여 제도하리라.
이와 같이 한량없고, 셀 수 없고, 가없는 중생들을 제도하였으나 실로 멸도(滅度)를 얻는 중생이 없느니라.
어떤 까닭인가?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아상(我相)과 인상(人相)과 중생상(衆生相)과 수자상(壽者相)이 있다고 한다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이와 같이 大乘의 이상을 잘 나타내 주는 것이 菩薩(Bodhisattva)의 개념이다. 대승의 이상주의적 핵심은 인간상의 초점을 아라한에서 보살로 옮긴 점에 있다. 보살은 부파불교와 대승불교의 근본적 차이를 보여주는 근거였다. 부파불교시대를 거쳐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혁신불교로서 나타난 대승불교운동은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菩薩(Bodhisattva)을 제시하고, 부파불교의 이상적 인간상인 阿羅漢(Arhat)을 自己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存在로 폄하하였다. 부파불교에서 보살은 석가모니부처님과 같은 특별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지위였고 凡夫衆生들로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이상적 경지였다.
하지만 대승불교지도자들은 이러한 보살의 이상을 보편화하여 누구든지 달성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스스로를 ‘깨달음(bodhi, 菩提)을 얻고자 하는 사람(sattva, 薩埵)’이란 뜻으로 ‘菩薩(bodhi-sattva, 菩提薩埵)’이라 칭했다.『금강경』에서는 보살을 단순히 보살이라고만 하지 않고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 Bodhisattva-mahāsattva)이라 하여 구별하였다. 『금강경』에서는 보살, 즉 ‘깨달음을 추구하는 者’는 自利의 완성을 향하여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이것은 성문(聲聞, Śravaka)이나 연각(緣覺, Pratyekabuddha)도 가능하므로 이들과 구별하기 위하여 利他에 대한 완성을 지향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위의 예문(註 17)에서와 같이 ‘보살마하살’로 표현한 것이다.
보살마하살은 일체의 중생을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게 하는 자비의 원력으로 활동한다는 것은 이미 위에서 살펴본 바 있다. 『금강경』의 보살마하살은 생사의 세계에서 고통받고 있는 모든 중생, 즉 구류중생(九類衆生)들을 제도한다고 하는 이타행을 강조하는 실천주의적 불교를 제창하고 있다. 이것은 나의 깨달음을 타인의 깨달음으로 회향시킨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일체제법의 공관에서 보면 제도하는 자와 제도받는 자가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을 위의 인용문(註 18)에서 설하고 있다. 이러한 사상은 소승 중에서도 說一切有部(Sarvāstivāda)라는 部派가 주장한 ‘我空法有’의 주장을 바로 잡으려는 시대적 사명을 가지고 있었다. 또 위의 예문(註 19)에서는 아상(ātman-saṃjnā) ․ 인상(pudgala-saṃjnā) ․ 중생상(sattva-saṃjnā) ․ 수자상(jiva-saṃjnā), 즉 四相의 부정이 보살(Bodhisattva)이라는 대승의 종지를 설하고 있다.『금강경』은 四相 을 부정하는 ‘無相’을 설함으로써 초기 불교의 무아관을 새롭게 해석하였다(第十七 究意無我分). 다시 말해 ‘無相’의 실천은 초기불교의 무아의 실천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대승불교운동은 ‘석존의 불교’라는 원래의 관점으로 되돌아가려는 운동이었다.
청담스님이 정화의 횃불을 든 시기부터(1928) 통합 종단이 탄생하기까지(1962)의 교단상황은 본사나 말사 중에도 재산이 많은 절의 주지들은 거의가 대지주처럼 부유했고 고관들처럼 권력이 따랐으며 그들 중에는 처첩을 거느리기도 하였다고 한다. 일제 말기에는 대부분의 일반 스님들까지도 속성명에 장가를 들었으며 절에서 목탁을 치고 가사 장삼을 입었을 때만 스님이지 일상생활은 재가자와 다름없었다. 이런 승려 俗化현상은 광복이후 더 심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청담스님은 정화는 당위이고 그것은 자기 구제이고 사원(寺園)을 사원(寺院)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청담스님은 근대 석학 박한영 스님으로부터 ‘敎’를 배우고 당대 선지식인 만공스님으로부터 禪家의 ‘敎外別傳’의 소식을 인가받고 염화실(拈花室) 주인으로 안주하지 않고 20세기의 보살로 보살도를 실천하신 것이다. 마치 대승불교의 운동자들이 부파불교의 출가승들이 자기 자신들만의 정신적 평안만을 추구하는 안일(安逸)한 삶의 경향에 반발하여 일체중생을 제도할 것을 목표로 삼는 것과 같이 청담스님은 일제 강점기의 잔재를 청산하고 1600여 년 한국불교 전통의 법등(法燈)을 지켜 이 시대의 중생과 함께하는 불교로 대중화, 현대화, 세계화에 선도적인 보살행을 보여준 인욕보살이었다.
스님은 “부처님 법대로 살자”·“중생제도를 위해 성불도 한 생 미루겠다”·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걷겠다”라는 청담스님의 원력은 우리 불자 모두의 이상적 모델이다. 이런 보살도 스님의 강령인 ‘자비무적’은 대승불교의 운동정신에서 그 연원을 찾은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스님의 마음 찾는 공부를 통하여 체득한 깨달음(萬古光明)이 자비무적(慈悲無敵)으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청담스님의 사상구조는 『金剛經』의 空思想의 인식은 ‘無住相布施’로 나타나는 것과 같은 內容構造를 갖고 있음도 인지된다.
필자가 동국대 1학년 때(1965년) 스님은 대학 선원에서 학교 구성원들에게 ‘자비무적’이라는 법문을 다음과 같이 하셨다.
세계평화를 위하여! 인류역사의 전진과 번영을 위하여! 우리가 당장 취할 길은 무기를 버리는 일입니다. 전쟁은 즉각 중지해야 합니다. 진정한 평화는「마음의 평화」에서 비로소 성취되는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기에 말입니다.
약육강식의 원초적(原初的) 생존 경쟁 수단을 본딴다는 것은 달을 정복한 현대문명인의 체모가 아닙니다. 자신이 무엇인지 모르고 혼미(昏迷) 속을 방황해온 20세기 문명인들은 이제 「나」의 의미를 올바로 찾읍시다. 각자의 마음으로부터 증오(憎惡)를 뿌리 뽑고 탐욕을 추방하여 공존과 제휴의 새로운 이념을 확립하도록 사상 무비(無比)의 인간혁명과 인류 전환의 일대 과단(果斷)을 촉구합시다. 또한 그러기 위해선 민족도 이데오로기도 넘어뛴 「마음」의 새 터전을 마련해야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여 둡니다.
청담스님은 법문 말미에 우리 불자 가운데 空사상을 인식하고 실천할 불자라면 이 시대의 화두인 남북통일의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된다고 하시면서 ‘108명 팬티 결사대’를 조직하여 3·8선을 넘어 김일성을 만나 ‘자비무적’의 정신을 일깨워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이런 ‘자비무적’의 청담스님 염원이 1998년도 정주영 현대회장이 5,00마리의 소떼를 몰고 3·8선을 넘어 남북교류의 물꼬를 튼 틀로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다.
Ⅳ. 호국사상의 실천
Ⅳ-1. 호국참회원의 신축
청담스님은 정화의 선봉장으로서 한국 불교 바로 세우기 인류평화, 중생제도를 위하여 도선사 주지로 1962년에 부임하셨다. 스님은 도선사가 한양 삼각산 전체에서 달걀 노른자 자리에 해당된다는 비유를 하시고 호국 참회불교를 제창하시면서 석불전의 참회기도 도량의 확보, 호국참회원의 신축 등과 더불어 호국참회 도량으로서의 면모를 일신시켰다. 스님께서는 호국참회원 건물을 구상하시면서 “이 건물은 불교문제를 비롯한 국가문제, 통일문제 등에 대해 전문 교수들의 연구실이 될 수 있도록 하고, 승려들의 수련원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고 한다(법천화상 증언). 스님께서는 ‘호국참회원’ 설립취지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서울 장안의 시민을 비롯하여 남·북한 전국민이 개개인의 신·구·의(身·口·意) 삼업의 업장을 일심으로 참회해야 한다. 참회를 통하여 우리 국민 개개인의 건강과 크고 작은 소원과 가정의 화평, 사회의 행복이 이루어지고, 분단된 남과 북의 조국이 하루 속히 평화통일을 실현시키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남북한의 전 국민이 일심으로 참회하지 않으면 잘 살 수 없고, 남북평화통일도 성취시킬 수 없다.
분단의 처절한 고통과 슬픔을 함께 절감하는 우리 국민 모두가 이런 불행을, 내 잘못, 내 탓으로 돌리는 자기 자신을 성찰하는 겸허한 정신적 자세에서 진심으로 참회해야 한다.
그리고 나아가 전세계 모든 인류가 이러한 참회결사운동에 적극 동참하여 성의 있고 진실된 참회를 함으로써 인류의 궁극적 최대 과제인 <잃어버린(상실한) 자아>를 찾을 수 있다. 그러므로 민주진영이니 공산진영이니 하는 세계의 양대 이념과 사상으로 물리적인 힘의 팽창과 대결로써 철저하게 경쟁하고 무장되어 있는 세계가, 대화합의 장으로 나갈 때 인류의 진정한 이상과 가치, 창조를 위하여 전쟁, 질병, 기아 등의 고통, 불행, 공포가 없는 인류의 평화, 행복을 실현시키는 지상낙원, 지상불국토를 건설할 수 있다.
이런 까닭으로 여기 한국 삼각산 도선사의 호국참회도량이 근식(根識)이 우둔한 말법시대 중생의 십악업(十惡業)을 참회하여 혁범성성하는 그 중추적 참회결사의 발원지가 되어 참회의 물결이 전국적으로 파급되고, 나아가 세계적으로 확산되기를 발원하는 것이다. “(법천화상 증언)
이런 광대무변한 큰스님의 원력은 사바세계에 보현보살의 행원을 그대로 실천 성취시키려는 서원이었다. 스님께서는 호국참회원의 건물 안에 불교계 내·외의 석학들이 연구할 수 있는 현대식 연구실을 만들 계획을 세우셨다. 또 3藏을 보다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불교학 연구를 할 수 있도록 영구적인 시설을 마련하기 위하여 현재의 호국참회원 3층 건물 학공식을 다음과 같은 취지로 하였다.(법천화상 증언)
호국참회원 건립 취지문
귀의 삼보하옵고
천혜의 이 강토에 부처님의 가르침이 전하여 진 지 어언 천육백여년, 그간 끊임없는 역사와 전통을 지켜온 이 나라에 신문명 과학화를 부르짖는 조국 근대화 과업에 전진함은 다같이 희구하며 누구나 합심하여 추진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때일수록 모든 문화의 주체인 올바른 그 정신적 뒷받침이 절실히 요구되며, 타락하는 중생심을 바로 잡고, 부지불식간에 짓는 죄악을 지극한 참회로써 소멸하고, 우리 민족의 주체의식이였던 화랑정신을 다시 불러일으키기 위하여 삼각산 제일 성지인 이곳 도선사 경내에 뜻깊은 참회원을 건립하고 온 겨레의 호국참회도량으로 삼고저 하는 바입니다.
특히 조국의 중대한 이 시점에 만 중생을 인도하는 성직자나 모든 국민들이 다같이 한 듯으로 몸과 마음을 가다듬어 미혹한 우리 중생들의 어버이시며 대자 대비하신 우리 부처님께서 가르쳐주신 진리의 큰 법등 아래 굳게 뭉쳐 매진하게끔 이끌어 갈 국가적인 호국 참회도량 건립을 완수함으로써 조국근대화 완수와 더불어 온 인류평화에 이바지하고저 하는 바입니다.
이 성스런 불사에 뜻 깊으신 여러분께서 많이 동참하시와 우리 자손 만대로 영겁에 무량한 복락을 누리게끔 다시금 앙원하오며 합장하나이다.
정미년(1967) 9월 10일
이 청담 합장
스님은 이곳에서 한국불교를 재흥시키려는 원력으로 실달학원을 설치하고 백팔참회도량 ‘호국참회원’을 1968년 11월 20일에 건립 낙성하였다. 스님께서는 호국참회원에서 불교중흥과 조국통일 성취를 위하여 참회를 통한 호국불교를 제창하는 대원력을 세우셨다.
Ⅳ-2. 참회기도
도선사를 백팔참회 도량으로 명명한 것은 불공(佛供)을 스스로 발원할 수 있는 법요의 하나로 일반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아침저녁의 예불시간에 백팔참회를 봉행하였으며, 모든 대중을 독려하기 위하여 스님은 한 시도 빠지지 않으시고 항상 모범을 보였다고 한다. 심지어 스님께서는 지방출장을 가시게 되어 어쩌다 여관에 주무시게 되는 경우에도 예불시간이 되면 도선사 석불전을 향해 백팔참회를 하셨다고 한다. 가정의 대소사 발원을 하고 싶은 신도들이나 불공을 드리는 신도들에게 3,000배로 불공기도를 하도록 교화하셨다. 스님 자신은 감기나 중풍도 참회기도로 극복하셨다(법천화상 증언).
스님의 일생은 참회와 정진이었다. 스님께서는 항시 정진 속에서 ‘마음 닦기’를 강조했다. 그래서 ‘마음’이 스님의 브랜드요 법문의 모든 것이었다. 스님은 마음이 곧 부처 마음이기 때문에 이 밝고 깨끗한 마음을 찾기 위해서 자기(중생)의 잘못을 뉘우치는 참회를 끊임없이 하라고 하셨다. 스님께서는 태양의 밝은 빛은 어떤 한 두 사람을 위해 비추는 것이 아닌 것처럼 부처님이 가르쳐 보이신 빛과 길은 모든 중생들이 다 같이 그 빛을 따라 밟고 가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이런 빛과 길을 따르기 위해서는 참회가 뒤따라야 한다고 설하셨다.
스님의 참회정진은 무엇일까? 중생의 흐린 마음, 어두운 마음에서 밝고 맑은 부처님의 마음으로 바꾸는 데는 참회가 최상의 영약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스님께서는 “지난세상 지은 바 모든 악업은 무시이래 탐심진심 어리석음이 몸과 말과 듯으로 지었음이라 내가 이제 남김없이 참회하며, 다시는 악한 업을 짓지 아니하고 항상 청정한 계행의 일체공덕에 머물러 있으오리다”고 발원하면서 기도하라고 당부하셨다.
Ⅴ. 맺음말
부처님의 정법이 현대에 이르러 스님의 대승적 보살행으로 우리의 마음에 각인되었고, 일본 식민지 정책에 의해 타락해 버린 한국불교가 스님의 정화운동으로 전통 복원되어 호국불교의 위상을 갖게 되었다.
스님은 20세기의 한국에 보살로서 화현하시어 신라의 통일불교, 고려의 호국불교, 조선의 구국불교에 일관된 것을 계승하여 정화불교로 꽃피운 인욕보살이었다. 스님의 보살도는 ‘자비무적’이었다. 스님의 보살도가 응병여약(應病與藥)으로 나라에 적용될 경우 호국으로 나타나 그 실천방안으로 ‘자비무적’을 제시하였다. 스님의 ‘자비무적’행은 ‘마음’찾는 공부를 통하여 체득한 깨달음(萬古光明)으로부터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스님의 호국사상은 ‘萬古光明’의 ‘慈悲無敵’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 불자는 스님의 사상을 통하여 자기 자신에 내재해 있는 ‘萬古光明’을 계발하여 중생의 이익과 안락을 위해 사는 삶을 실천하는 것이 當爲가 아닐까.
끝으로 이번 학술 세미나를 통해 대종사님의 호국행을 수행의 지표로 삼는 인연이 맺어지는 이마다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을 성취하시기를 합장 발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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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호 표
CD : 靑潭大宗師全書(卷數, 페이지數)
Gītā : The Bhagavadgītā
HB : 韓國佛敎全書(卷數, 페이지數, 段)
TD : 大正新修大藏經(卷數, 페이지數, 段)
요 약
불교에서는 이타(利他)의 면에서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소아(小我)를 버리고 대아(大我)의 정신으로 사는 것을 호국(護國)이라 한다. 청담스님(1902~1971)은 불교와 국가를 불이(不二, advait)적 세계로 보고 우리 민족 속에 내재하고 있는 불심(佛心)을 계발(啓發)하여 호국으로 승화(昇華)시키고자 하였다. 스님의 호국관은 국민의 마음속에 내재하고 있는 반야바라밀(prajnāpāramitā) 수지(受持)를 통한 도덕관을 정립하여 호국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스님의 사상형성은 호국삼부경인 『法華經』·『金光明經』·『仁王經』과 초기대승경전을 수지·독송한 영향이다.스님은 항시 심청정시불(心淸淨是佛)을 주창하셨다. 스님은 내 마음이 깨끗하면 그것이 부처란 것이다. 그래서 스님은 자비를 내 것으로 만들어 놓기만 하면 이 세상에서 무서운 것은 없다(慈悲無敵)고 하시면서 밝고 깨끗한 마음을 찾기 위해서 참회를 하라고 주장하셨다. 스님의 호국실천 강령은 ‘자비무적’이다. 이런 호국사상은 대승불교의 보살 자아관에서 유래되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스님의 마음 찾는 공부를 통해서 체득한 깨달음(萬古光明)이 자비무적(慈悲無敵)으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스님께서는 이런 호국사상을 실천하기 위하여 삼각산 도선사에 호국참회원을 건립하여 호국불교를 제창하는데 전력을 기울이셨다.
스님은 20세기의 한국의 보살로 화현하시어 신라의 통일불교, 고려의 호국불교, 조선이 구국불교에 일관된 것을 계승하여 정화불교로 꽃피운 인욕보살이었다. 우리 불자는 스님의 보살도를 통하여 자기 자신에 내재해 있는 ‘萬古光明’을 계발하여 ‘慈悲無敵’의 삶을 실천하는 것이 호국정신을 계승하는 길이라고 생각된다.
주제어: 호국, 이타행, 보살도, 만고광명(萬古光明, prajnā), 자비무적(慈悲無敵)
Abstract
In Buddhism, the meaning of defending one's own country(護國) refers to living in the spirit of the higher/absolute self(大我), sacrificing the lower/empirical self(小我) for the sake of one's country and people.Venerable Chung-dam(1902-1971), who perceived the Buddhism and his own country as a non-dualistic(不二, advait) entity, intended to develop buddha-minds of his people and sublimate it in the defense of the country. His philosophy of defending a country is assumed to be the one by establishing a moral sense through cultivation of prajnāparamita in our minds. Such a philosophy of his seems to be constituted by his constant reception and remeberance(受持) as well as reading and chanting(讀誦) of Sadharmapuṇḍarika Sūtra(The Lotus Sūtra, 法華經), Suvarṇaprabhāsa Sūtra(金光明經), and Inwang Sūtra(The Benevolent Kings Sūtra, 仁王經), which are called as three principal sūtras for the defense of one's country.Venerable Chung-dam advocated the notion that 'undefiled mind is Buddha'. He maintained, therefore, that you should deeply repent of your sins in order to find your clear and purified mind, saying if you take compassion within yourself, there is nothing to be afraid of(慈悲無敵). His main principle of defending his own country is that 'compassion has no enemy'. Such a philosophy of defense is thought to derive from bodhisattva's view on ātman in Mahāyāna Buddhism. We can assume that his enlightenment through his own inner cultivation on his mind is manifested as the notion of 'Compassion has no enemy(慈悲無敵)’. He was fully devoted to the construction of The Repentance Center for the Defense of the Country.Venerable Chung-dam, transformed into a bodhisattva in 20th century Korea, succeeded the integrated spirit found in Unified Buddhism in Shilla Dynasty, Defend-one's-own-Country Buddhism of Goryeo and Save-the-nation Buddhism in Joseon Dynasty. It may be the most appropriate way for us to develop the eternal enlightenment within ourselves, and to practice the life of 'compassion with no enemy(慈悲無敵)', through his way of bodhisattva.
Key words: Defense of one's own Country, Way of bodhisattva, Eternal enlightenment(萬古光明, prajnā), Compassion with no enemy(慈悲無敵)
[출처] 청담대종사의 호국사상|작성자 만남 창조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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