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용어

불교용어 9

수선님 2021. 9. 21. 13:46

*기(機)---‘근기(根機)’란 말을 줄여서 기(機)라고 한다. 근기(根機)란 부처님의 교학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말할 때 쓰인다. 즉,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고 교화될 수 있는 소질과 능력, 개인이 타고난 그릇, 또는 가르침을 받아들일 역량을 말한다. 그런데 기는 반드시 무엇인가의 근성(根性 ; 근본이 되는 성질이나 자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근기(根機)라 하며 종류는 천차만별이다. 예를 들면,
     ① 소질과 능력의 고하에 따른 상ㆍ중ㆍ하근기로 나누고,
     ② 지니고 있는 품성에 따라 악 근기와 선 근기로 나누기도 하며,
     ③ 기질의 민첩성에 따라 돈(頓)근기와 점(漸)근기로 나누는 등 종류가 다양하다.
     ④불교교학에서 작용(機)이란 주관(能觀)적인 마음이고, 문제(事)는 객관(所觀)적인 경계로서 인간의 인식은 이 주관과 객관에 의해 이루어진다.---→근기(根機), 방편시설(方便施設) 참조.
         

*기기상응(機機相應) 구구상투(句句相投)---<벽암록(碧巖錄)> 제50칙에 나오는 말이다. 경계마다 대응하고 구절마다 투합한다는 말인데, 여기서 ‘기기(機機)’는 말이나 행동 등 모든 작용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 어떤 경계에도 알맞은 대응을 내놓고, 어떤 말에도 즉시 적합한 대답을 한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놓고 붙잡고 긍정하고 부정하는 데 걸림이 없는 경지를 보여줌을 말한다. 그리고 수행의 현장에 있어서는 스승의 기용(機用)이 제자의 심성(心性)과 상응하고, 서로 주고받는 언구(言句)가 서로 계합하는 것을 말한다.


*기도(祈禱)---기도란 빈다는 뜻이다. 불교사전에 의하면, “기도란 마음으로 소원하는 것을 빌어서 불ㆍ보살의 가피(加被)를 구하는 것. 흔히는 재앙을 없애며, 질병이 낫기를 비는 등 현세에 대한 행복을 구하기 위해 행하는 의식.”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런데 원칙적으로 ‘빈다’는 의미의 기도라는 말은 불교에서 성립되지 않는다고 한다. <팔만대장경>엔 ‘기도’란 말이 없다. ‘기도’라는 말은 원래 불교적 용어가 아니다. ‘기도’란 말은 근대 자본주의의 발달에 의한 개인주의의 발현과 기독교의 영향으로 근대에 와서 생긴 비불교적 말이다.
    불교에서는 신(神)이나 어떤 절대자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기도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만일 불교에서 절대자를 인정한다면 유신론(有神論)이 돼버린다. 그러므로 맹목적 ․ 무속적 ․ 미신적 기도는 불교의 본질 자체를 왜곡하는 것이므로 원론적인 측면에서 보면 기도는 불교에서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불교계에서 기도를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하고 있다.
   하나는 부처님이나 신에게 적극적으로 빌어 그 초자연적인 위신력을 기계적으로 구하는 것으로 현세 이익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기도, 자기 욕심을 구현하고자 하는 현세구복적인 기도이다.
   다른 하나는 부처님에 귀의해 믿음을 가지고 참회함으로써 죄를 소멸하고, 감사ㆍ보은ㆍ찬탄ㆍ숭앙 등을 위한 수행차원에서 행해지는 비공리적(非公利的)인 기도가 있다. 부처님을 향한 신앙에 장애가 오거나 자기 마음에 흐트러짐이 없도록 부처님을 향한 신앙심이 더욱 향상되도록 간절히 희구하는 수행자의 순수한 기도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뭐가 이루어지기를 비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달래고 안정시킬 목적으로 하는 기도를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첫 번째 기복적인 기도는 비판대상이지만, 두 번째 기도는 허용되는 경향이다. 오늘날 할머니 불자로 대표되는 많은 여성신자들이 부처님이나 보살을 신과 같은 존재로 인식하고, 그 앞에서 사사로운 복을 빈다. 이것은 명백히 불교교리에 어긋나는 잘못된 기복신앙이다. 그런데 두 번째 것은 일반적으로 대승불교에서 널리 행해지고 있는 신행방법이다. 다시 말해서 대승불교에서 하나의 수행법으로 받아들여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혼란스러운 것은 사찰에 따라, 그리고 스님에 따라 기복신앙 형태의 기도를 공공연히 권하고, 심지어 장사 속을 드러내는 일조차 빈다하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이론적인 정립이 부족하고 교의를 제대로 모르는 하열한 불자들로서는 어떻게 대처해 할지 막연하다.
   그런데 기도에 대한 위와 같은 비판적 시각을 가진다거나 기도에 대한 확고한 신념 없이 막연하게 생각하는 불자를 위한 다음과 같은 지침이 있다. 이는 불교에서 기도를 받아들이는 것이 옳고 그르다는 것이 아니라 이제 사찰에서도 수행차원에서 기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기도는 자신의 발원을 성취시키기 위한 수행방법 가운데 하나이다. 원래 불교의 복이란 중생이 바른 도리와 바른 이상을 향해 자신을 사심 없이 내던지는 마음가짐 속에서 근원적으로 자기구제가 열린다는 의식을 통해 성취되는 것이다. 흔히 기도는 불ㆍ보살의 가피에 의해 성취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기도의 성취원리는 자기의 정화를 통해 얻게 되는 자기발현(自己發顯) 혹은 자기계발(自己啓發)이다. 이와 같이 기도란 마음의 개혁이며, 그것이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영험이 있는 것은 불교적 가치의 상승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지, 물질주의와 결탁할 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기도를 이렇게 이해한다고 하면 기복신앙이 불교를 타락으로 이끌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기복에서의 기도가 이타적 실천의 맹세인 서원(誓願)으로 바뀔 때 기복불교는 대승 방편으로서 제자리를 찾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기도를 하는 것은 업장을 녹이고 번뇌를 끊어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겠다는 원을 세우는 그런 기도를 하는 것이다.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노력으로 기도를 하다 보면 사바세계를 헤쳐 나갈 수 있는 힘과 믿음이 생기게 된다. 기도가 잘 되지 않는 것은 삼독(三毒)의 장애로 인해 잡념이 생기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도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항상 자신의 죄업을 참회하고 모든 것에 감사하며 대원력(大願力)을 세우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이다.
   이러하므로 불교가 종교이므로 무조건 기도를 기복이라 폄하한다거나 신앙심보다 학문적으로 분석하고 논리적으로 접근하려는 방법도 지나친 일이다. 천주교나 기독교에서도 경건한 기도를 하고 있고, 불교에서도 한마음으로 불공드리는 나이든 할머니들을 무조건 기복신앙이라 폄하하는 건 잘못이다.
   기도는 자신을 참회하고 집중하며 발원하면서 그렇게 불교에 대한 신앙심이 생기고 깊어지는 가장 초기단계의 신행이라는 것이다. 성불은 멀고 내게 있어 가장 소중한 신행을 이루고자 하는 기도, 그리하여 법희선열(法喜禪悅)을 경험했다면 그것에서부터 신앙심이 나오고 신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예컨대, 영장을 받고 군 입대를 앞둔 신심 깊은 젊은이가 영장을 받아들고 부처님 앞에 나아가 기도를 드리되, “나를 편하게 근무할 수 있는 곳으로 배치시켜 주십시오.”라고 기도를 한다면, 그것은 기복불교에 해당되겠지만, “부처님 이제 저는 군에 입대하게 됐습니다. 낯모르는 제 또래의 젊은이들과 공동생활을 해야 하기에 자칫 계를 어기고 부처님을 향하는 마음에 흔들림이 있을지 두렵습니다. 제발 제 마음이 군 생활에서도 한결같이 흐트러짐이 없도록 보살펴 주십시오.”라며 간절히 기도한다고 하자다. 이런 기도조차도 비불교적이라고 욕한다면 그것은 편견일 따름이다.
   하지만 원칙적으로 불교에는 기도라는 말보다는 불공(佛供)이란 말이 바람직하다는 주장도 있다. ‘기도’란 말은 자칫 기독교 따라 하기 같다는 것이다.   
       
*기도발(祈禱發)---기도발(祈禱發)이란 무엇인가? 불ㆍ보살님이 중생들의 기도에 감응하시는 것을 기도발이라 한다. 부처님과 관세음보살님은 중생들의 간절한 염원의 기도에 외면하지 않는다. 한 중생이라도 사랑의 품으로 껴안으려 하신다. 기도발은 불ㆍ보살님의 본원력(本願力). 공덕력(功德力). 가피력(加被力)이다. 즉, 기도발은 부처님의 가피력이다. 부처님이 가엾은 중생들에게 무한한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데 이것을 기도발이라 한다.
   그리하여 부처님을 전지전능 하신 분이라 믿고, 그 은혜에 기대를 걸어, 탐ㆍ진ㆍ치 삼독심에 물든 욕망의 노예로 살아가는 군상들이 기도발 잘 듣는 사찰을 찾아, 그런 스님을 찾아 몰려다닌다.
  『그래서 중생은 기도발을 받아야 한다. 중생의 간절함과 부처님의 사랑이 기도발을 발생시킨다.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하듯이 절망과 아픔에 허덕이는 나약한 자에게 사랑의 보약을 투여한다. 이것이 기도발이다. 기도발은 기도의 영적 에너지의 원리를 설명한 용어이다. 기도의 힘. 기도 효험. 기도 성취가 그것이다. 기도발(祈禱發)이라 할 때 발(發)의 개념은 힘 내지는 강한 기운 즉 에너지이다.
   화투에는 끝발이 좋아야 하고. 술을 마시면 술발이 있어야 한다. 화장을 할 때는 화장발을 받아야 하고. 말을 할 때는 말발이 서야 한다. 약을 먹으면 약발을 받아야하고.… 중생은 선한 기운을 많이 받아야 한다. 하루에 세끼 식사를 하고, 밤이 되면 잠을 자야 하듯이 불ㆍ보살님의 수승한 기도발을 간단없이 받아야 한다. 유전생사에 헤매는 중생이 기도발을 받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광 스님
    오늘날 한국불교의 현주소를 말해주는 표현인 것 같아 씁쓸하다. 기도발이 잘 듣는 절을 찾아, 부처님을 찾아, 스님을 찾아가, 오로지 소원성취를 위해 일념인 불자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래서 종교인지 미신인지 구별이 안 된다.

        
             
*기독교와 불교---인간의 간절한 열망이 응집돼 그것이 종교로 발전한다. 그리하여 고통에서 해방을 희구하는 간절한 서민의 열망이 해탈을 지향하는 불교를 탄생시켰듯이, 그 500여년 뒤 인간사회의 끝없는 갈등을 극복하고자 하는 사랑에 대한 간절한 열망이 응집돼 기독교가 성립됐다.
    기독교가 형성된 AD 1세경은 인류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국제질서가 안정돼 여행이 자유롭던 시기였다. 유럽과 파레스타인 지방까지는 로마의 평화(Pax Romana)가 유지됐고, 중동지역은 파르티아에 의해 치안이 확보돼 있었다. 이 두 대국이 서로 대치상태에 있기는 했으나 피차 전쟁을 피하고 있었으므로 교역은 활발했고 여행은 자유로웠으며, 생활은 비교적 풍요로웠다.
    이러한 배경에 힘입어, 역사학자 케네스 스콧 라두렛(Kenneth Scott Latourette, 1884~1968)에 따르면, 예수가 태어난 시기에, "불교는 이미 인도, 실론(스리랑카), 중앙아시아, 중국에 널리 퍼져있었다."고 했다. 그런가 하면, 유명한 역사학자이자 저술가인 윌 듀런트(Will Durant, 1885~1981)는 아소카왕이 불교 선교사들을 인도의 모든 지역과 실론,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 그리스까지 보냈으며, 이들이 기독교 윤리학(ethics of Christ)을 만드는 데 도움을 주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즉, 기원전 270년경, 인도에서는 아소카왕이 집권했다. 집권 이후에 그는 불교를 정비해, 선교사들을 전 세계에 파견해서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전파했다. 그리하여 아소카왕은 그의 미션(mission)이 서방 국가들에게 우호적으로 수용됐다고 기록했다.
    그리하여 초기 비교종교학으로 유명한 학자인 막스 뮐러(Friedrich Max Müller, 1823~1900)는 그의 책 “India: What it can teach us”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불교와 기독교 사이에 깜짝 놀랄 만한 일치성이 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불교가 기독교 보다 최소한 4백년 이전에 존재했었다는 점 또한 인정해야만 한다. 만약 어떤 이가 불교가 초기 기독교에 영향을 준 역사적인 경로를 나에게 가르쳐 줄 수 있다면, 나는 매우 감사하게 여길 것이다.”
    그렇다면 가르쳐줄 수 있다. 그 비슷한 이유는 예수가 인도에 유학했기 때문이다. 그 안정된 세계 질서 속에 파레스타인 지방을 방문한 인도 선지식들이 예수의 총명함에 감복해 예수의 인도유학을 권유하자, 예수의 부모,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의 소원이 절실하기도 해서 당시 세계에서 가장 학문이 발당했던 인도로 안심하고 유학을 보냈다. 그리하여 인도에 유학 와서 불교에 심취했던 예수는 불교는 물론, 의학을 비롯한 오명(五明)을 익히고, 티베트까지 여행을 하며 견문을 넓혔다.
    진보적인 신학자들은 토마스 복음서와 나그 함마디 텍스트(Nag Hammadi texts)는 불교의 영향을 받았다고 믿고 있다. 이러한 이론들은 다음과 같은 책들에 의해 대중에게 알려졌다.
      • Elaine Pagel의 The Gnostic Gospels (1979)
      • Elaine Pagel의 Beyond Belief (2003)
      • Elmar R. Gruber와 Holger Kersten의 The Original Jesus (1995)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도 인도에 유학해서 불교를 공부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사상도 불교의 영향을 받은 한편, 변질된 유대교 일파인 에세네파(Essenes派)의 사상적 영향을 받아 성장했다. 따라서 예수의 사상 가운데는 불교적 색체가 배있는 부분이 많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와 기독교의 근본적 차이는 있다.

   기독교에서 예수는 전지전능하지만 석가모니는 전지전능하지도 않고 자연인의 한 사람일 뿐이다. 다만 훌륭한 분이었을 따름이다.
   기독교는 하느님의 천지창조를 주장하지만 불교는 일종의 진화론에 해당하는 연기론을 주장한다.
불교는 절대적인 창조신을 부정하는 무신론(無神論)의 입장에서 업과 행위를 말하고 있다. 인간과 세계는 조건에 의해 존재하고, 조건에 의해 소멸해가는 연기(緣起)의 법칙에 따라 흘러가고 있을 뿐이란 것이다.
   불교는 양극단을 버리고 중도를 취하라고 말한다.
   기독교는 무엇이든 둘로 나눈다. 선과 악, 하느님과 사탄, 구원과 지옥….
   불교는 각자 삶의 주인공은 본인이라 한다.
   기독교는 모든 사람의 삶은 피조물로서 신에게 예속돼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신은 처음 인간을 만들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같은 아담과 이브에게 ‘먹으면 반드시 죽을’ 그 위험한 선악과나무(그것이 상징적인 것이었다 할지라도)를 그들 곁에 심어둘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신이 진정으로 그의 자식과 같은 아담과 이브의 장래를 생각했다면 그런 나무는 아예 만들지 말았어야 했을 것이고, 그것을 만들지 않을 수 없는 어떤 사정이 있어 부득불 만들었다면 일이 잘못되고 난 뒤에 한 것처럼, 미리 아담과 이브가 그 나무에 접근 하지 못하게 무슨 장치를 설치해야 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설사 그들이 신의 뜻에 반해 그 과일을 따 먹었다 하더라도 신이 그들의 자애로운 부모와 같은 입장에 있었다면 옳고 그름(선악)조차도 모르는 상태의 아담과 이브에 대해 그렇게 가혹한 벌을 줄 수 없었을 것이다. 단 한 번의 회개의 기회도 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잘못에 대해 그 일과는 관계도 없는 그들의 후손들에게까지 영원한 벌을 내린 처사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한다. 게다가 더욱 납득이 되지 않는 일은 신 자신은 보호자로서의 책임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윤호진 
   
   불교는 스스로 깨달아 성불하라고 한다. 그리고 현실에서 증득할 수 있다고 한다. 기독교는 신에게 완전 복종해야만 구원될 수 있다고 한다.
    불교에서 해탈은 고와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속박을 벗어났다는 것은 자유를 얻었다는 뜻과 같다. 그래서 불교는 자유를 이야기하지 복종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기독교는 복종을 요구한다. 오직 복종을 통해서만 모든 것이 얻어지거나 이루어진다.
    “기독교에서 구원을 결정짓는 것은 선행을 통해 성취되는 공덕이 아니라 신에 대한 충성이기 때문에, 그 길에서는 선한 자일지라도 신을 믿지 않으면 버려지고, 악한 자일지라도 신을 믿으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
    그에 비해 불교는 부처님이나 불법에 대한 충성도가 높은 것만으로 높은 행복을 성취할 수는 없다고, 불제자 자신이 보다 많은 선행을 쌓고, 보다 높은 덕을 이루며, 마음을 보다 청정하게 할 때에만 행복의 차원이 향상될 수 있다고 가르친다.… 불법은 신자 자신이 주체가 돼 스스로를 향상시키는 길이라는 것을, 기독교는 구원을 경정하는 자가 신이라는 것, 즉 신자 자신이 주체가 되지 못하는 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바꿔 말해서, 기독교는 인간이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고 보는데 비해 불법은 인간이 자신을 완성할 수 있다고 본다.…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하지만 붓다는 “사랑하지 말라 또한 미워하지도 말라”고 말한다. 예수에게 사랑은 인간이 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마음이다. 그렇지만 붓다에게 사랑은 마음의 시소가 한쪽으로 기운 것을 의미하고, 시소가 한쪽으로 기울었다는 것은 언젠가 반동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조건을, 즉 미움이 일어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한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논리에 기초해, 붓다가 미음과 함께 사랑까지도 버리라고 말한 것이다.… 그래서 불교에선 공(空)을 최고의 진리로 말하고 있다.
    그리고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신자가 신(神) 자신에게 지은 죄에 대해서는 사면해 줄 수 있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그(신자)가 다른 사람에게 지은 죄까지 사면해 줄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 김정빈 <경> 참조.
    또한 행복이란 자유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지 복종을 통해서 얻어지는 게 아니다. 노예는 아무리 행복해도 노예일 뿐이다. 마치 복종이 행복인 것처럼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사실 인간이 가장 편한 것은 복종하는 거다. 복종하면 지시만 받고 행동하면 되니까. 자유라고 하는 것은 내가 선택해야 하기 때문에 조심스럽고 위험한 것이다. 실패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노예는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책임지지 않고, 그저 복종만 하면 된다. 거기에 진정한 행복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동질성이 많다.
    불교는 브라만교의 선민의식과 계급주의를 지양하고 만인평등을 주장했다.
    기독교는 유태교의 선민의식을 지양하기 위해 세계주의를 지향했다.
    그 외에도 막스 뮐러(F. Max Müller)의 주장처럼 비슷한 점이 너무도 많다.
    그런데 우리가 유의해야 할 점은, 이렇게 다른 점도 불교를 배운 예수가 불교 그대로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새로운 종교를 성립시킬 수 없었던 점도 있었을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어야 한다. 그 지방 나름의 특성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석가모니의 가르침이 후세에 변질된 것처럼 예수를 계승한 후세인들에 의해 변질됐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결국 <진리는 하나인데 - 기독교와 불교>라는 제목의 법정 스님 글을 보자.
    『나는 가끔 이런 대접을 받는다. 물건을 사기 위해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가게 주인은 정확한 발음으로, “우리는 예수를 믿습니다.”라고 한다. 물론 얻으러 온 탁발승으로 오인하고 한 말일 것이다. 태연하게 물건을 골라 돈을 치르고 나오면서 돌아보면 복잡한 표정이다.
혹은 기독교인들끼리 산사에 놀러와 어쩌다 찬송가라도 부를라치면 기를 쓰고 제지하는 산승들이 또한 없지 않다.
    이와 같은 씁쓸한 현상은 어디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일까. 자기가 믿고 있는 종교적인 신념에서라기보다, 이교도라면 무조건 적대시하려 드는 배타적인 감정에 이유가 있을 것이다. 자기가 믿고 있는 종교만이 유일한 것이고 그밖에 다른 종교는 일고의 가치조차 없는 미신으로 착각하고 있는 맹목에서일 것이다. 이렇듯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선민의식이 마치 자기의 신심을 두텁게 하는 일인 양 알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의 시야를 가리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단견(短見)들이 읽는 경전이나 성경의 해석 또한 지극히 위태로운 것이 아닐 수 없다. 글이나 말 뒤에 들어 있는 뜻을 망각하고 하나의 비유에 지나지 않는 표면적인 언어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종교가 존재하고 있는 한 어떤 종교든지 그 나름의 독자적인 상징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 상징이 맹목적인 숭배물로 되거나 혹은 다른 종교에 대해 우월을 증명하는 도구로 쓰인다면 그것은 무의미하다.
    모든 오해는 이해 이전의 상태이다. 따라서 올바른 비판은 올바른 인식을 통해서만 내려질 수 있다. 그런데 그릇된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일부 종교인들은 성급하게도 인식을 거치지 않고 비판부터 하려 든다. 물론 인식이 없는 비판이란 건전한 비판일 수 없는 것이지만. 우리들이 진정으로 자기 종교의 본질을 알게 된다면 저절로 타종교의 본질도 알게 될 것이다. 언제나 역사발전을 저해하는 세력은 원리주의와 근본주의에 매몰된 자들이다. 이러한 광신도들이 오히려 타종교와의 관계뿐만 아니라 자기네 종교조차도 황폐하게 한다.
    이전까지 기독교도와 불교도 사이에 바람직한 대화의 길이 트이지 못한 그 원인을 찾는다면, 상호간에 독선적인 아집으로 인한 오해에 있었을 것이다. 출세간적(出世間的)인 사랑은 편애가 아니고 보편적인 것이다. 보편적인 사랑은 이교도를 포함한 모든 이웃에 미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즐겨 읽는 <요한의 첫째 편지>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을 ‘부처님’으로 바꿔 놓으면 사이비 불교도들에게 해당될 적절한 말씀이다.』---→‘예수 인도에 유학하다’ 참조.
        ※에세네파(Essenes派)---그리스도 시대의 유대교의 일파. 신비적인 금욕주의를 부르짖으며, 하느님과의 보다 완전한 일치를 추구해 사해(死海) 주변에 종교적 공동생활권을 만들고 공동생활을 했다. 재산은 공유이며, 예배와 독서와 공동식사를 중요한 행사로 삼았다. 그 대부분은 결혼을 사양한 것 같으며, 그리스도에게 세례를 준 세례자 요한이 이 파에 속했을 것으로 본다. 그리고 금세기 최대의 발견(1945)의 하나인 <사해문서(死海文書)>의 소유자였던 쿰란 교단이 이 파라고 하는 설은 매우 유력하다. 이 쿰란동굴에서 발견된 문서들은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의 중간기의 성서역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됐다. 이 파는 1세기말 경 소멸됐다.
        
*기리마난다경(빠알리어 Girimānanda sutta)---앙굿따라 니까야(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에 실려 있는 경이다. 이 경은 열 가지 산냐(인식) 수행에 대한 가르침이다. 이 경은 부처님께서 병을 앓고 있는 기리마난다 장로를 위해 설한 가르침이며, 부처님의 예언대로 기리마난다 장로가 이 경을 듣자마자 병에서 회복한 기적이 일어났다. 그래서 요즈음도 병석에 누워있는 환자에게 보호주(빠릿따)로 이 경을 낭송하곤 한다.
    한때 부처님께서 사왓티의 제따 숲 아나타핀디카 사원에 머무셨다. 그때 기리마난다 장로가 병에 걸려 심한 고통을 겪고 있었으므로, 아난다 장로가 부처님께 가서 삼배를 올리고 한쪽에 앉아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부처님이시여, 기리마난다 장로가 병에 걸려 심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그에 대한 연민심으로 기리마난다 장로를 방문하시면 좋겠습니다.”
    “아난다여, 그대가 기리마난다 장로에게 가서 열 가지 인식(샨냐)에 대해 말해주면 그가 열 가지 인식을 들을 때 병이 가라앉을 것이다.”라고 하셨다.
   열 가지 인식이란 무상에 대한 인식(Aniccasaññā), 무아에 대한 인식(anattasaññā), 부정(不淨)에 대한 인식(asubhasaññā), 위험에 대한 인식(ādinavasaññā), 버림에 대한 인식(pahānasaññā), 탐욕 없음에 대한 인식(virāgasaññā), 소멸에 대한 인식(nirodhasaññā), 세상이 다 즐겁지 않다는 인식(sabbaloke anabhiratasaññā), 모든 상카라들이 무상하다는 인식(sabbasankharesu aniccasaññā),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ānāpānasati)이다.
         
*기바(耆婆, 祇婆, 지와까, 지바카/Jīvaka)---붓다 재세 시에 의왕(醫王)이라 불릴 만큼 뛰어난 의술로 이름 높았던 명의(名醫)로서 붓다 주치의였다. 본명이 지와까 꼬마라밧짜(Jīvaka Komārabhacca)이다.
   아버지는 알 수 없고, 어머니는 왕사성(王舍城) 창녀 암라팔리(Amrapali) 혹은 살라바티(sālavati)라는 말이 있다. 그녀는 자기 인기가 떨어질까봐 아들을 낳아 쓰레기 더미에 버렸는데, 마가다국(摩揭陀國, Magadha) 빈비사라(bimbisāra)왕의 아들이며, 아사세태자의 이복형제인 아바야(abhaya)왕자가 데려다 양육했다. 성장한 기바는 펀자브(Punjab) 북쪽 지역에 있던 건타라국(乾陀羅國) 탁샤실라(takṣaśila-덕차시라국)에 가서 그곳의 명의였던 빈가라에게 7년 동안 사사받은 뒤 본국으로 돌아와, 왕사성에 머물면서 치료했다. 불법에 귀의해 깊은 신심을 지녔다. 그는 부처님 풍병을 고쳐서 의왕(醫王)이라고까지 칭송됐다. 그래서 빈비사라왕과 궁중의 주치의로 임명됐고 부처님과 승가의 주치의 역할도 했다. 아버지 빈비사라왕을 시해하고 왕위를 찬탈한 아사세왕도 가바를 주치의로 삼았다고 한다.
   지와까는 수다원과를 증득한 뒤 하루에 두 번씩 부처님께 인사드리러 갔으며 부처님께서 머무는 왕사성의 죽림정사(Veḷuvana)가 너무 멀어서 그가 소유하고 있던 망고 숲을 승가에 기증했다고 한다. 그래서 경전에 망고 동산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특히 아사세왕이 태자였을 때 아버지 빈비사라왕을 시해한 뒤 왕위에 올랐으나 그 후 크게 뉘우치는 모습을 보고, 아사세왕을 부처님께 귀의시킨 사람이 기바였다.

   
*기반경(基盤經, 빠알리어 upanisā-sutta)---<상윳따 니까야(Samyutta Nikaya - 상응부아함(相應部阿含)> 제23경을 말한다. 이 <기반경>에서는 연기법으로 괴로움이 일어나는 과정과, 괴로움이 사라지는 과정(해탈 열반의 과정)을 함께 설명하고 있으며, 수행체계와 관련된 설명을 하고 있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
    <기반경>에서는, 오온의 일어나고 사라짐을 알고 보는 자에게 번뇌가 멸진(滅盡)하고, 번뇌가 멸진하는 지혜는 해탈(解脫)을 기반으로 하고, 해탈은 이탐(離貪)을 기반으로 하고, 이탐은 염오(厭惡)를 기반으로 하고, 염오는 여실지견(如實知見)을 기반으로 하고, 여실지견은 삼매(三昧)를 기반으로 하고, 삼매는 행복(幸福)을 기반으로 하고, 행복은 경안(輕安, Passaddhi)을 기반으로 하고, 경안은 희열(喜悅)을 기반으로 하고, 희열은 환희(歡喜)를 기반으로 하고, 환희는 믿음을 기반으로 하고, 믿음은 괴로움을 기반으로 하고, 괴로움(dukkha)은 태어남(生)을 기반으로 하고, 태어남은 바와(有)를 기반으로 하고, 바와는 취착(取)을 기반으로 하고, 취착은 갈애(渴愛)를 기반으로 하고, 갈애는 느낌(受)을 기반으로 하고, 느낌은 촉(觸)을 기반으로 하고, 촉은 육입(六入)을 기반으로 하고, 육입은 명색(名色)을 기반으로 하고, 명색은 식(識)을 기반으로 하고, 식은 행(行)을 기반으로 하고, 행은 무명(無明)을 기반으로 한다고 설해져 있다.---→‘괴로움(苦, 빠알리어 dukkha)의 극복’ 참조. 



*기복불교(祈福佛敎)---개인이 자기만의 이익을 위해 복을 구하거나 비는 모습을 기복불교라 한다. 불교가 민간신앙을 흡수해 대중화되는 과정에서 생겼다. 복을 얻고자 하는 행위나 복을 구하고자 하는 생각은 종교의 본질적인 것이라 할 수 있으나, ‘기복(祈福)’이라는 말을 종교 앞에 붙인 경우에는 좋지 않은 뜻으로 쓰인다.
   특히 ‘기복(祈福)’이란 단어는 불교사전에서도 찾을 수 없다. 이는 교리와 부합하지 않을 뿐더러 불교 신행 속에 ‘기복’을 인정하지 않음을 반증한다. 다만 1998년 홍법원에서 나온 <불교대사전> 개정판에 ‘기복불교’란 용어가 처음 등장하는데, 여기에 기복불교 정의는 다음과 같다.
   “복을 비는 불교란 뜻으로 경전에는 없는 말이다. 중생의 미혹한 마음을 깨달아 참 부처가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불교에서 오직 개인이나 가족의 안녕과 복만을 빌기 위해 기도하는 것을 기복불교라 한다.”고 했다.
   이와 같이 기복불교를 설명하고 있으나 ‘경전에 없는 말’임을 분명히 적시하고 있다. 반면 ‘수복(修福)’에 대해선 “많은 선행을 실천하는 것, 여러 가지 선근을 닦는 것”으로 뜻풀이를 분명히 하고 있다. 이와 비슷한 뜻으로 ‘작선(作善)’이 언급된다. 작선에서 또 ‘득복(得福)’이란 말이 결합돼 ‘작선득복(作善得福)’이란 말도 나온다. 그러나 ‘선을 행한 과보로서의 복’이란 뜻풀이로 미루어 경전에서 말하는 ‘복 짓기’로서 ‘작복’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인다. 작선득복의 좋은 예는 부처님이 시각장애를 가진 제자 ‘아니룻다’의 헤진 옷을 꿰매주는 장면에서도 확인된다. 이때에도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복 짓는 행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일러주셨다.
   부처님은 복이 있고 없음에 따라 즐거움과 괴로움이 뒤따른다는 점을 분명히 하셨다. ‘복된 업을 닦는[修福] 이’라거나 ‘복짓기[作福]를 싫어하지 말라’는 말씀은,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하면 복을 지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렇듯 경전에서는 ‘수복’과 ‘작복’에 대해 곳곳에서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신이나 부처님에게 기도해야 복을 받는다는 ‘기복’의 출전 예는 어디에도 없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찰에는 기복불교로 여길 수 있는 신앙대상이 너무 많다. 산신이나 칠성신 등에서 아들 낳기를 기원한다거나 사업성공, 대학입시합격, 승진, 영전, 당선 등과 관련된 신앙대상을 찾는 미신에 가까운 불교가 기복불교이다. 이 같은 기복신앙은 불교 가치를 잊게 하는 표층신앙(表層信仰)이어서 자칫 불교 본래의 이타적 성격을 도외시할 우려가 있다. 더구나 이런 형상이 젊은 신자들에게 그대로 전수돼 전반적인 흐름 자체가 기복으로 흘러가는데 어려움이 있다.
   따라서 “신행을 수행으로 바꿔야 한다. 수행의 결과로서 원력을 세우는 것이지 수행 없는 원력은 모순이다. 예컨대 뭘 바라고 빌기 전에 수행이 앞서야 하고, 그럴 때 기복하고 바라는 신행은 수행으로 전환돼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 수불스님
   헌데 “한국의 괜찮은 사찰에 가면 전국구 보살, 왕 보살님 등등이 계신다. 30~40년 절에 다니신 분들이다. 하지만 이 분들의 두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눈빛을 보면… 솔직히 실망을 느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분들이 사찰을 찾아가면… ”왜 왔어? 누구냐? …“ 이런 식으로 쳐다본다. 혹 스님이라도 뵈려고 하면 찬바람이 씽씽 분다. ”왜 내 스님 찾아… ?“ 라고 하면서… 시기심으로 뭉쳐져 있는 보살들이 많다. 특히 절에 오래 다니신 분들이 더한 것 같다. 이것이 모두 다 기복불교의 민낯일 것이다. 나만 복을 받아야 하고 나만 잘 돼야 하는데… 남이 끼어들까봐… 혹시 내 복 가로챌까봐… 낯선 사람들에게 쌀쌀하고 퉁명스럽게 대한다.” - 실론섬
   이런 유의 왕보살들이 ’치마불교=여성불교=기복불교’로 등식화하는 장본인들이다. 따라서 불교 발전의 입장에서도 이런 풍토는 없어져야 하는데, 이런 인사들에게 기대는 승려들에게도 문제가 있다. 이와 같이 기복신앙 문제는 한국불교의 해묵은 과제다. 불교를 어떻게 이해하고 신행할 것인가, 이상과 현실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들이 큰 숙제로 남아 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불교를 교리적 측면에서 말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비판적 입장에 선다. 반면 신앙적 측면에 서 있는 사람은 어떻게 하든 조화를 이루려 노력하는 입장이다.
   불교가 종교인 이상 머리로만 이해할 수는 없다. 실천이 뒤따르지 않는 지식불교는 남의 소를 헤아리는 것처럼 무의미하다. 그러나 바른 목표를 정하지 않고 엉뚱한 방향으로 치닫고 있는 기복불교를 무작정 옹호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무리 대중적 요구가 있다고 해서 교리 자체를 왜곡하고 이에 바탕한 신행을 부추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문제는 우리나라 불교가 교리와 신행이 따로따로 움직이는 데에 있다. 교리는 지혜를 강조하는데 신행은 무명을 지향하고 있다. 간극이 커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 문제는 다른 나라의 불교, 혹은 다른 종교도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그렇다고 기복불교 옹호는 어떤 이유를 내세우든 곤란하다. 누구나 행복해지고 싶은 것이 인간의 심리다. 그러나 ‘복을 받기 위해 복을 비는 행위’인 기복(祈福)이 문제다.
   헌데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고도성장의 결과, 어려운 시기를 살아 제대로 배우지 못한 노인들은 이론불교에 어두워 기복밖에 할 줄 모른다. 그런 이들에게 고도한 불법수행을 요구할 수도 없다. 어쩌면 “(가족을 위해 기도하는) 여성들의 기복 행위에서 더 순수한 불교 정신을 볼 수도 있다” 즉, 이런 노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초월적 존재의 구원만 기다리는 수동적이고 객체적 존재가 아니라 가족에 대한 ‘책임과 희생’을 다하는 주체적이고 이타적인 존재이다. 기복불교는 그 하나의 방법일 뿐이다.”라고 하는 분들도 있다.
   그러다가 보니, 교계 일부 스님들은 방편론을 내세워 기복불교 수용을 주장하기도 한다. “(기복을) 고치려고 하다가는 대중적 신행력의 원동력을 약화시킬 우려가 있기 때문에 우선은 기복의 방법을 불사 위주에서 자비의 실천, 중생에 대한 희사 등으로 바꾸어 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기복도 공덕 짓기의 한 방편이다’라는 주장이다.
   또한 “기복을 없애자는 것은 편협한 것으로 빈대 잡으려고 초가삼간 태우는 격”이라거나 “기초신행으로 기복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있다. 심지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복적인 면에서 절을 찾는다. (중략) 물질적 어려움이나 정신적 불안에 대한 해결을 얻고자 부처님께 복을 구하고자 절을 찾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변화와 변질은 분명 엄격한 차이점을 갖고 있다. 시대와 환경에 따라 종교의 변화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가르침을 보다 효율적 또는 효과적으로 전파하기 위해선 시대에 맞는 조건에 따라 변화가 수반돼야 할 것이다. 그러나 변질은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이다. 기복은 불교를 타락시키고 변질시키는 최대 요인이다. 가르침마저 왜곡돼 기복과 작복의 개념이 혼란스러워지고 있다.
   하지만 부처님이 그토록 비판하고 배격한 주술주의, 기복주의, 의례주의, 물질주의가 점점 확장되고 있는 것이 오늘날 세계 거의 모든 불교계가 겪고 있는 난관이다. 방편이 지나치다가 보니, 무엇이 불교적인 것이고 무엇이 비불교적인 것인지 구분하지 못할 지경에 와 있음을 경계하는 성찰의 대목이다.
   “한국불교가 정체성을 찾아 부처님의 말씀대로 중생들에게 구원의 종교로 보다 넓고 가까이 다가서려면 기복불교부터 극복해야 한다. 기복은 불교라는 간판을 달고 그 내용은 기독교나 힌두교를 하자는 것과 다르지 않다. 특히 현실론을 들어 기복을 옹호하는 주장은 지양해야 한다. 그것은 불교 스스로의 변화를 외면하는 행위다. 뼈를 깎는 자정과 쇄신이 있을 때 훌륭한 불교의 미래를 견인할 개혁가와 불교운동가가 배출될 것이다. 무엇보다 타락과 변질의 요인이 제거되지 않으면 그것은 불교를 망치는 해악과 독이 된다는 것을 먼저 깨달을 일이다.” - 김종만
   그런데 노인네들이 절에 가서 기복불교를 하는 것보다 더 큰 문제는 ‘기도’를 방편이 아니라 불교 본연의 모습처럼 공공연히 선전(?)을 하고, “기돗발… 운운”하는 말을 불교방송에 나와서조차 거리낌 없이 되뇌는 스님들이 많다는 것이다. 불교방송국의 정규 프로그램에서 오히려 이런 분들이 더 힘을 쓰는 형국이다.
   거기에다가 지방 소규모 사찰을 운영하는 대부분의 스님들의 경우, 오히려 기복불교를 부추기고, 기복불교를 통해, ― 예컨대 천도재를 비롯해, 온갖 명목의 기도 날을 정해 신자들을 불러들이고 있으며, 심지어 부적까지도 만들어 파는 등 상업행위를 하고 있다. 이와 같이 승려들이 기복불교에 앞장 서는 일이 더 큰 문제다. 그런 일이 없다면 늙은 여인네들이 절에 가서 올리는 기도쯤이야 연민의 마음으로 이해할 수도 있는 일이다. 부처님의 큰마음, 그 포용의 마음을 제대로 헤아리자. 대자대비하신 부처님께서는 못 배워 무식한 아낙네들이 행하는 신행이면, 그 형태야 어떻든 신행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고 웃으실 것이다.
   그러나 외롭고 가난하고 굶주린 이웃을 위해, 그들에게 부처님의 청복(淸福)이 돌아가게 발원하는 것이야말로 불자의 바른 길일 것이다.
   부처님이 바보 주리반트카(Cudapanthaka)에게 빗자루를 주며, 단지 “먼지를 털고 때를 닦자”라는 말을 외우게 하셨다. 그런데 노인네들은 그래도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정도는 외울 수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주리반트카보다는 낫지 않은가. 스님들이 먼저 타락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면 그 반듯한 모습의 영향을 받아 기복불교도 차츰 시정돼갈 것이다.---→기도(祈禱) 참조.

              

*기사굴산(耆闍崛山, 산스크리트어 그리다라쿠타/Gṛdhrakūṭa)---영축산(靈鷲山)의 산스크리트어 이름이 그리다라쿠타라서 이를 소리 번역해서 기사굴산이라 했다. 고대 중인도에 있던 마가다국(摩竭陀國, magadha國)의 도읍지인 라자그리하(왕사성/王舍城, 현재의 비하르주 라지기르)에서 동북쪽 약 3㎞ 지점에 있는 산으로 붓다와 인연이 깊은 산이다. 부처님이 도심 근처에 있는 죽림정사에 자주 머무시다가 번잡하면 기사굴산에 올라가 머무셨다고 한다.
    그리고 부처님 수제자인 가섭(迦葉) 존자는 여러 제자들과 함께 기사굴산에서 선정을 닦고 있었는데, 갑자기 천지가 어두워지고 해와 달빛이 없어졌으며 동시에 새와 짐승들이 슬프게 울고 있었다. 가섭 존자는 이러한 광경을 보고 이것은 부처님께서 몸이 쇠약해서 입적을 알리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승불교에서는 부처님이 기사굴산에서 <법화경>을 설했다고 한다. ---→영축산(靈鷲山) 참조.
    


*기세간(器世間)---기세계(器世界)라고도 한다.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와 같은 말이다. 2종 세간, 3종 세간 중 하나. 중생이 살고 있는 세상으로서, 산하(山河), 대지(大地), 초목(草木) 등을 포함한 세계 전체를 가리킴. 기계(器界), 기세계(器世界). 유정세간(有情世間), 중생세계(衆生世界)이 다 같은 말이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산하대지 등을 포함한 세계(지구) 전체를 가리킨다. 넓게는 생물들이 거주하는 자연환경과 물질세계 모두를 포함하는 우주를 말한다.
     
   
*기세경(起世經)---6세기 말 수(隋)나라시대에 인도출신 학승 사나굴다(闍那崛多) 등이 번역했다. 총 10권 12품으로 구성된 이 경은 세계의 다양한 모습과 여러 가지 변화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세상은 무상한 것이며, 이 무상한 세상을 벗어나 안락한 불도의 세계를 세우기 위해서는 부처님 말씀대로 불도를 지키고 온갖 악을 없애야 한다는 것을 설하고 있다.
    즉, 부처님께서 코살라국(Kosala)의 수도 사위성(舍衛城)의 가리라(迦利羅) 석실(石室)에 계실 적에 여러 비구에게 세계와 국토의 조직ㆍ기원ㆍ성립ㆍ파괴 등의 까닭과 그 과정을 말한 것이다. 이역본으로 <기세인본경(起世因本經)>ㆍ<장아함경>의 제4분에 있는 <세기경(世記經)>이 있다.
     
*기신론(起信論)---→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참조.
      
*기신론소(起信論疏)---<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의 줄인 말.---→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 참조.
       
*기야(祇夜)---산스크리트어 geya, 빠알리어 geyya의 음사. 중송(重頌)과 같은 말임.---→중송(重頌), 게송(偈頌) 참조.
     
*기어(綺語)---공교롭게 꾸며서 겉과 속이 다른 말. 마음속에는 남을 해치고 속일 뜻을 품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달콤한 거짓말로 남을 속이는 말을 일컫는다. 그러므로 큰 악업(惡業)이 되는 언행이므로 ‘10악(十惡)’의 하나에 든다.
    말이란 그 사람의 성품을 드러내는 것이다. 한마디 말로서도 그 사람의 외적으로 드러나는 현재의 성품(복)은 물론 내면에 잠재돼 있는 성품(덕)까지도 보고 알 수 있다. 흔히 세간에서도 말이란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이 있다. 말을 신중히 해야 한다는 뜻이다. 하물며 마음을 닦는 공부인이라면, 어찌 말 한마디라도 가벼이 여겨 함부로 할 수 없음을 절감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응당 정견하려는 행자라면 기어, 망어, 양설, 악구에 드는 말을 하지 않도록 더욱 열심히 마음을 닦아야 할 것이다.
     

*기연(機緣)---계기, 동기와 비슷한 말. 깨달음을 얻게 된 동기, 깨닫게 된 계기를 말한다. 수행하겠다고 어느 회상에 들어와서 꾸준히 자기 나름대로 공부를 했지만 공부가 덜 됐을 뿐더러 또 성숙됐다 하더라도 깨달음의 순간을 열어줄만한 조건들이 갖춰지지 아니하면,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
    <육조단경>에 이르기를, 법달(法達) 스님이라는 이는 <법화경>을 그 동안 3000번이나 외웠다고 했는데, 즉 3000독(讀)을 했다고 하는데, 그 정도로 많이 읽었다면 그만큼 신심이 장하고, 또 망상이 없고, 청정한 어떤 정신세계를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깨달음을 이룰만한 계기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작은 계기가 있어서 비로소 깨달음을 이루게 된 것, 그런 것들을 기연(機緣)이라 한다.
    석가모니 같은 이는 6년 고행 끝에 보리수 아래 앉아서 일주일간 선정에 들어 있는데, 어느 날 아침에 샛별을 보는 순간 깨달음을 이뤘다고 한다. 샛별은 매일 아침 떴을 것이고, 매일 아침 봤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날, 부처님의 공부가 완전히 성숙한 그런 순간이었고, 그러다보니까 그 샛별 떠오르는 것이 특별한 계기가 돼서 깨닫게 됐다.
    어떤 이는 낮에 닭 우는 소리를 듣고 깨닫기도 하고, 또 일하다가 돌이 경사진 길을 굴러 내려가서 대나무를 딱 치는 순간, 그 소리를 듣고 불현듯 깨닫게 됐고, 또 북송(北宋)의 혜홍 각범(慧洪覺範, 1071∼1128) 스님이 찬술한 <임간록(林間錄)>에 이르기를, 영운(靈雲志勤) 스님 같은 이는 매년 복숭아꽃이 피는 것을 봐왔지만, 어느 해 복숭아꽃이 피는 모습을 보는 순간 문득 깨닫게 됐다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다 기연이다.
    그 깨닫는 계기는 어떻게 보면 참 하찮은 일이지만 그 순간 인연이 또 맞고, 또 그만큼 그 사람의 공부가 성숙이 됐기 때문에 기연이 빛을 발한 것이다.

      
*기오개(棄五蓋)---선법(善法)을 할 수 없게 하는 마음을 덮고 있는 탐(貪)ㆍ진(瞋)ㆍ도거(掉擧)ㆍ혼침(昏沈)ㆍ의(疑) 등 중요한 다섯 가지 번뇌가 있다. 즉, 탐욕이 마음을 덮는 탐욕개(貪慾蓋), 분노가 마음을 덮는 진에개(瞋恚蓋), 마음이 들뜨고 불안 근심이 생기는 도회개(掉悔蓋), 마음이 흐려지는 수면개(睡眠蓋), 법에 대한 확신이 없이 부처의 가르침을 의심하는 의법개(疑法蓋)이다. 이 다섯 가지 번뇌가 일으키는 장애를 오개라 한다. 그리고 이 다섯 가지 번뇌가 일으키는 장애를 버리는 것을 기오개라 한다. 구체적인 내용은 아래와 같다.
     ①탐욕개(貪慾蓋) ― 다섯 가지 감각적 탐욕을 비롯해 모든 욕망의 근원은 ‘나’라는 환상과 ‘내 것’이라는 집착, 그리고 자신에 대한 무조건적이고 필사적인 애착에서 비롯된다. 그리하여 단정하게 앉아서 선정을 닦다가도 마음에 욕각(欲覺)이 생겨 부질없는 생각이 계속 이어지므로, 이 탐욕을 그치지 않으면 마침내 근심이 생기는 데까지 이르므로 이를 버려야 한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부정관(不淨觀)을 닦는 것이 도움이 된다.
     ②진에개(瞋恚蓋) ― 자신의 뜻에 거슬리는 일에 대해 성내는 마음을 갖는 것을 말한다. 탐욕 다음에 경계해야 할 것이 성냄이다. 이것을 이기기 위해서는 자비관(慈悲觀)을 배우는 것이 도움이 된다.
     ③도회개(掉悔蓋) ― 돌아다니기 좋아하고, 유희에 빠지는 것을 몸의 들뜸이라 한다. 그리고 읊고 노래하는 것을 즐기고, 시비 가리는 것을 좋아하며, 이익 없는 담론을 장황하게 설하는 것을 입의 들뜸이라 한다. 이러한 들뜸과 회한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계율을 준수해야 하며, 산란한 마음을 극복하는 대처법으로 호흡관(呼吸觀)이 있다.---→도회개(掉悔蓋) 참조.
     ④수면개(睡眠蓋) ― 마음이 흐리고 몸이 무거움으로써 자유롭지 못하게 심성을 가리는 번뇌, 속마음이 어둡고 산란한 것을 면(眠)이라고 하고, 오욕(五慾) 칠정(七情)이 어둡게 가려서 지절(支節)을 방자하게 놀리며 자리에 누워 깊이 잠이 든 것을 수(睡)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정신적 해이와 육체적 졸음이 수행에 큰 장애다. 특히 참선 중에 애를 먹는 부분 중의 하나가 졸음이다. 수마(睡魔)라고 할 정도로 위력적으로 덤벼든다. 다른 개는 감정이 깨달아서 없앨 수 있지만 잠이란 죽은 사람과 같아서 촉감을 느끼지 못하고 느낌이 없는 까닭에 제거해 없애기가 어렵다. 이에 대한 극복방법은 사수념(死隨念-죽음에 대한 이미지 트레이닝)이라 해서 죽음에 대해 생각하거나 모든 것은 무상함을 관하면, 정신이 번뜩 들 것이다.
           ※지절(支節)---마디마디가 생긴 상태, 중생의 번뇌 구조를 말한다.
     ⑤의법개(疑法蓋) ― 의심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이것은 도(道)에 가장 장애가 되는 것이다. 첫째 자신을 의심하는 것이요, 둘째 스승을 의심하는 것이며, 셋째 법을 의심하는 것이다. 의심의 해로움을 자각하고 스스로를 믿고, 스승을 믿으며, 법을 믿는 마음을 굳건히 하면 흔들림 없이 정진할 수 있을 것이다.



*기원전 500년---인류역사에 있어서 기원전 500년은 참으로 의미 깊은 시기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미욱한 원시세계에서 비로소 인류문명에 세련된 지성(知性)이라는 고도의 정신문화가 성립된 시기이기 때문이다. 서양에서는 그리스 문명이 형성돼 오늘날의 서구문화의 싹이 텄고, 인도에서는 브라만교와 불교를 비롯한 소위 육사외도(六師外道) 등이 흥기했고, 중국에서는 유교를 비롯한 제자백가가 성행했다. 이리하여 기원전 500년은 인류문명의 축이 형성된 시기로 편가 받고 있다. 그리하여 이 시대를 축(軸)의 시대(Axial Age)라 한다.---→축(軸)의 시대(Axial Age) 참조. 
       

*기원정사(祇園精舍, 산스크리트어 Jetavana)---붓다께서 마가다국 왕사성 죽림정사(竹林精舍)에 계셨을 때 서북인도 사위국(코살라국;舍衛國) 장자이자 재상인 수닷다(sudatta, 수달타/須達多)가 마가다국 왕사성에 볼일이 있어 갔다가 부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부처님을 뵈려고 새벽같이 성문을 나와 죽림정사로 갔다. 부처님은 수잣타를 위해 사성제와 갖가지 설법을 해주셨다. 수잣타는 그 자리에서 삼귀의를 하고 우바새가 됐다. 그리고 부처님께 자기네 나라인 사위국에 가서도 설법을 해 달라고 부탁하면서 정사를 지어드리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부처님이 정사가 완성되면 가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리고 사리풋타 당신을 공사감독으로 보내주셨습니다.  
    수닷타는 원래 배화교 신자였다가 부처님 제자가 됐는데, 그의 집은 큰 부자로서 재보가 한량없었고, 어려운 이에게 항상 옷과 음식을 베풀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는 ‘고독한 사람에게 먹을 것을 아낌없이 나누어 주는 자’라는 의미의 산스크리트어 아나다 핀다다(빠알리어 아나타핀디카/Anāthapiṇḍika)라는 별명을 얻었다. 한역으로는 급고독(給孤獨)이라 한다.
    부처님께 약속을 하고 귀국한 급고독이 정사를 지을 곳을 물색한 결과 그가 택한 곳이 사위성(舍衛城:시라바스티) 남쪽 1.6 km 지점에 있는 곳인데, 그곳이 사위국 기타태자(祇陀太子)의 땅이었다. 그 땅을 흥정하다가 기타태자와도 뜻이 맞아 함께 정사를 지어드리게 됐다. 그래서 정사 이름이 두 사람 이름을 합친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祇園精舍)이라 했다.
    이후 부처님께서는 이 기수급고독원(기원정사)에 오래 머물며 교화를 했고, 우기(雨期) 안거를 자주 이곳에서 행했다고 전해진다. <금강경> 등 수많은 경전을 설하시고 25안거를 지내신 곳이다. 부처님은 다른 교단 수행자들과 신통력을 겨룬 사위성의 신변(神變), 즉 쌍신변(雙神變)과 천불화현(千佛化現)의 기적으로 보이신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일화는 후일 수많은 불교미술의 모티브가 됐다.

    그 당시 사위국 파사닉왕(波斯匿;파사세나디/Prasenajit)도 부처님 제자였다. 현재의 우타르프라데시주(州) 북부에 있는 옛 시라바스티(舍衛城)의 유적 마헤트(Maheth) 남문 밖의 사헤트(Saheth) 유적이 기원정사 터라고 한다.---→아나타핀디카(빠알리어 Anāthapindika) 참조. 
    
*기타 태자(祇陀太子, 산스크리트어, 빠알리어 Jeta)---기원전 5~6세기경 부처님 생존 시 사위국 급고독(給孤獨) 장자와 더불어 부처님께 기원정사(祇園精舍)를 지어드린 서북인도 사위국(舍衛國, 코살라국) 파사익왕의 태자이다. 그러나 왕위에 올랐다는 기록은 없다.
    그런데 그 파사익(파세나디, 波斯匿王)왕 부인 이름이 말리카(말리, 末利)이다. 말리카는 원래 사위성(舍衛城, 시라바스티)에 사는 한 브라만의 제스민 동산을 손질하던 하녀로 원래 이름은 카필라였으나, 제스민 동산에서 한 사문을 정성껏 공양한 바 있다. 그런 착한 마음씨의 카필라는 제스민을 뜻하는 말리카(Mallika)라는 이름을 얻었고, 결국 파사익왕의 왕비로 간택됐다고 한다.
왕비가 된 뒤 자신이 공양했던 사문이 바로 석가모니 부처님임을 알고 기원정사(祈園精舍)에 머물고 있는 부처님을 찾아가 가르침을 듣고 귀의했으며, 파사익왕도 부처님 제자가 되게 했다고 한다.
    그 말리카에게 태어난 아들이 바로 부처님께 기원정사를 지을 땅을 기증한 기타태자이고, 딸은 훗날 아유타야(아유타, 阿踰陀)국왕과 결혼한 스리말리부인(승만부인, 勝鬘夫人)이다. 승만부인은 부처님으로부터 장차 보광여래(연등불)가 될 것이라는 수기(授記)를 받은 바 있고, 대승경전 가운데 여래장(如來藏)사상을 천명하는 대표적인 경전인 <승만경>의 주인공이다. 승만부인이 기타태자의 누이이다.

  
*기학(氣學)---기학은 대자연의 순수철학이며 대자연의 움직임을 과학적인 측면에서 면밀히 분석한 학문으로, 이를 사람들이 살아나가는 인본주의에 적용한 학문이다. 그러므로 기학은 대자연학을 다루는 과학이며 사람들의 삶에 삶의 지침을 가르쳐주는 학문이기도 하다. 1857년 최한기(崔漢綺)가 저술한 <기학(氣學)>이라는 철학서가 있다.
    역사적으로 기학의 시발점은 우리 민족의 최대경전인 <천부경(天符經)>의 이론에서부터 시작한다고 볼 수 있다.
    기학에서는 오늘날의 보수주의, 진보주의, 중도주의를 어떻게 분석하고 해석할까. 이러한 정치적인 이념들을 기학적인 측면으로 살펴보자. 기학은 관점은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기(氣) 에너지의 기화성(氣化性)에서부터 출발한다. 우리는 우주에 기화하는 기(氣) 에너지의 움직임을 기도(氣道)라 하며 현대 물리학에서, 이 기도는 주기성(週期性)을 갖고 움직인다고 표현한다. 즉,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기(氣) 에너지의 원소들은 모두 일정한 법칙에 따라 변화한다는 주기성을 갖고 있다.
    이와 같은 기(氣) 에너지의 움직임을 수학적으로 표현할 때 주기함수로 표현한다. 주기함수(periodic function)란 기(氣) 에너지가 일정한 간격을 기준으로 계속해서 반복되는 함수를 말한다. 그리고 이 주기함수의 반복성은 원(圓)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기(氣) 에너지는 기본적으로 주기적 반복성을 특징으로 한다.


          
*긴나라(緊那羅, 산스크리트어 Kiṃnara)---인도신화에 나오는 음악의 신. 진타라(眞陀羅), 견타라(甄陀羅) 등으로 음역하고, 불법을 수호하는 팔부중(八部衆)의 하나이다. 의인(擬人) 혹은 인비인(人非人), 가신(歌神), 악신(樂神)으로 한역되며 사람인지 짐승인지 분명치 않다. 사람을 닮았으나 사람이 아닌 데서 유래한 말로서 나중에 이 말이 주는 인상 때문에 사람의 도리를 벗어난 짓을 하는 자를 가리키는 말이 되기도 했다. 긴나라는 사람과 비슷한데 다만 말머리 형상의 머리 위에 한 개의 뿔이 달려 있고, 제석천이 노래와 춤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를 위해 음악을 연주한다고 한다.
         ※팔부신중(八部神衆)이란 천계를 지키는 수호신 천(天), 물속을 지키며 바람과 비를 관장하는 용(龍), 사람을 도와주는 야차(夜叉), 병을 고쳐주는 건달바(乾闥婆), 여러 개의 얼굴과 팔을 지닌 아수라(阿修羅), 새 형상의 가루라(迦樓羅), 긴나라(緊那羅), 그리고 마후라가(摩羅迦)를 가리킨다. 마후라가는 그림 속에서는 주로 머리에 뱀 모양의 모자를 쓰고 있으며, 조각상일 경우에는 한 손에 뱀을 잡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석굴암의 마후라가상은 오른손에 칼을 든 모습이다.
              
*길상(吉祥, 산스크리트어 śrī/수리)---‘길사유상(吉事有祥)’이라는 말을 줄인 말이고, 산스크리트어 śrī의 의역으로서 ‘경사스러움’, ‘번영’, ‘행운’, ‘아름답고 착한 징조’라는 뜻으로 좋은 일이 있을 조짐을 나타내는 말이다. 즉, 인간이 살면서 이루어지길 소망하는 모든 것들이 잘 될 것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남을 위해 축원해주고 찬탄을 하는 것이 길상의 진정한 의미이다. 상대방을 칭찬하고 축원하는 말이면 모두 ‘수리’의 뜻이다. “행복하십시오, 훌륭하십니다, 장하십니다, 성공할 것입니다, 잘 될 것입니다, 성불하십시오.” 등 칭찬과 찬탄과 상대방을 향한 긍정적인 격려의 표현은 모두 ‘수리’ 속에 포함된다. 관련단어 길상선사(吉祥善事)는 더할 수 없이 기쁘고 경사스러운 일이란 말이다. 문수보살을 산스크리트어로 만주슈리(Manjusri)이라 하는데, 그 이름에 ‘sri‘란 말이 들어 있어서 ‘묘길상(妙吉祥)이라고 표기하기도 하며, 따라서 ’길상‘은 문수보살를 뜻하기도 한다.


*길상승리게(吉祥勝利偈)----부처님 당시 밧지국의 ‘베살리(빠알리어 Vēsalῑ)’라는 부유한 상업도시엔 대림정사(大林精舍)가 있었고, 그 안에 유명한 중각강당重閣講堂)이 있었다. 당시 부처님과 자이나교도 삿짜까(Saccaka)와의 대론(對論)도 중각강당에서 이루어졌다. 부처님은 삿짜까와의 대론에서 승리하셨다. 이는 다름 아닌 자이나교와의 승리이기도 하다. 그날 오백 명이 이 대론을 지켜봤다고 한다. 당대 최고 논사 삿짜까를 무아(無我)의 가르침으로 제압한 것이다. 이와 같은 부처님의 승리는 게송으로도 전해져 온다. 그 게송을 한역으로 길상승리게(吉祥勝利偈)라고 하고, 우리말로는 ‘승리와 축복의 게송’이라 한다.
    <길상승리게>
    교만한 삿짜까가 진리를 무시하고
    진리를 벗어난 논쟁에 깃발을 들고
    맹목적으로 뛰어들었을 때
    성자들의 제왕은 지혜의 불을 밝혀 섭수했사오니
    이 위신력으로 승리의 축복이 제게(그대에게) 임하소서.”---→베살리(빠알리어 Vēsalῑ) 참조.

  

*길상존(吉祥尊)---산스크리트어 ‘수리=길상(吉祥)’한 존자(尊者)라는 뜻이다. 따라서 ‘좋은 조짐을 주실 존자이시여’라는 뜻이고, 결국 부처님이나 문수보살 혹은 관세음보살을 뜻한다고 하는데, 문수보살의 산스크리트어 이름이 만주슈리(Manjusri)이고, 그 이름에 ‘sri‘란 말이 들어 있어서 길상존은 주로 문수보살을 지칭할 때 쓴다.
        
*길상천(吉祥天)---산스크리트어 쉬리마하데비(sri-maha-devi:행복의 여신이라는 뜻)의 역어로서, 길상천녀(吉祥天女) 또는 공덕천(功德天)이라고도 한다. 원래 인도신화에서는 비쉬누신(神)의 아내이고, 애욕의 신 카마(Kama)의 어머니이며, 행복을 주관하는 여신이었다. 실리마하제비(實利摩訶提毘)ㆍ마하실리(摩訶實利) 등으로 음역하기도 한다.
    불교에 수용된 후로는 복덕을 주는 여신이 돼, 이 천녀(天女)에게 공양을 하면 누구나 복을 받는다고 한다. 또한 밀교에서는 비사문천(毘沙門天)의 비(妃)로서 북방에 살고 있다고 하는데, 그 형상은 일정하지 않으나 아름다운 얼굴에 천의(天衣)를 걸치고, 왼손에는 여의주를 들고 있는 모습이 많다.


*길 없는 길---선(禪)은 서로 상반되는 용어들을 사용한다. 즉, 선은 언제나 모순되는 언어를 사용한다. 깨달음으로 가는 과정은 직선적인 것이 아니라 변증법적이라는 것을 암시하기 위해서이다. 문 없는 문(대도무문), 노력 없는 노력. 답 없는 답, 방법 없는 방법, 그리하여 길 없는 길을 찾는 나그네 길은 끝이 없다.선(禪)은 반대 극단을 부정하지 않고 포괄한다. 반대 극단은 배척당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반대 극단을 배척하면 그것은 무거운 짐처럼 항상 우리를 따라다닐 것이다. 반대 극단을 사용하지 않으면 우리는 많은 것을 놓칠 것이다. 반대 극단이 흡수돼야 한다. 그러면 변증법적인 과정이 이루어진다.
   「길 없는 길이란 말길이 끊어진 길이다. 생각의 한계를 벗어난 길, 대자유의 길이다. 그러나 대자유니, 생각의 한계니 말의 흔적이 있으면 이미 길 없는 길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옛 스승들은 말길을 끊어주고 마음길이 멸(滅)하게 하기 위해 길 없는 길을 할(喝)과 방(棒)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본마음에서 보면, 나의 모든 단점과 못된 성질까지도 모두 내 마음 본질에서 일어나는 파장일 뿐이요, 습관 일뿐이다. 자기 단점이라는 물거품은 싫어할수록 더 강해진다. 바닷물을 휘저으면 물거품이 더 일어나는 이치와 같다.」 - 혜국 스님


         
*길장(吉藏, 549~623)---남북조시대에서 수 ․ 당시대에 걸쳐 활동한 고승. 중국 삼론종(三論宗)의 중흥조(中興祖)로 추앙받는다. 중관사상(中觀思想) 대가로서 가상대사(嘉祥大師)라고도 불리며, 안식국(安息國-파르티아) 사람 안세고(安世高)의 후손이다.
    즉, 안식국(지금의 이란) 출신의 아버지와 금릉(지금의 남경)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길장의 다양한 저술들을 일관하는 사상은 무득정관(無得正觀)이다. 이는 반야ㆍ삼론에 근거한 것으로 ‘그 어떤 것에도 고착되지 않는 중도에 대한 바른 조망’을 의미한다. 즉, 무득정관이란 공(空)에도 유(有)에도 구애되지 않은 팔부중도(八不中道)를 보는 것을 말한다. 무득정관의 조망을 통해 이질적이고 다양한 대승불전들을 일미의 가르침으로 엮어내고자 했다는 점에서 길장은 회통사상의 개척자라고 불릴 수 있다.  
   그는 진제(眞諦三藏, 499~569)를 만나 길장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하며, 비슷한 시기에 천태종엔 지의(智顗, 538~597) 대사가 있었다.
    남북조시대 사회적 혼란과 전란 속에서도 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그중에서도 삼론종의 근본문헌들에 대한 주석서 〈삼론현의(三論玄義)>를 저술해 삼론종(三論宗) 교리를 대성했으며, 특히 <중관론소(中觀論疏)>는 중론연구의 궤범이 되는 획기적 저서이다. 그 외에 <대승현론(大乘玄論)>ㆍ<이제의(二諦義)>ㆍ<법화현론(法華玄論)>ㆍ<유마경의소(維摩經義疏)> 등 40여 부가 있다.
그는 수(隋) 양제(煬帝)에 의해 수도인 장안(長安)으로 초청을 받아 그곳에서 많은 승려와 일반 신도들을 위해 강론을 하기도 했다.
     
*김교각(金喬覺, 697~794)---중국에서 지장(地藏) 신앙 성지로 이름난 곳이 내륙 산악지대인 안휘성 청양현에 위치한 구화산(九華山)이다. 그곳에서 신라왕자 출신 김교각 스님이 철저한 두타행을 닦아 중국인들로부터 지장보살의 화현이라 불리었다. 스님은 99세 나이로 좌탈입망 했는데, 그 후 3년이 지나도록 시신이 썩지 않고 고스란히 남아 있자, 그가 열반하기 전 유언대로 그 육신에 개금해 육신보살(肉身菩薩)로서 김지장(金地藏)으로 모시게 됐다.
    김교각 스님의 속명은 김중경(金重慶)이고, 697년 신라 제32대 효소왕 4년에 서라벌 궁궐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제33대 성덕왕이고, 그의 이복동생 두 사람은 제34대 효성왕과 제35대 경덕왕이다.---→구화산(九華山) 참조.



*까따왓투(Kathāvatthu)---한역해서 논사(論事)라 한다. 현재 남방 상좌부에 전하는 빠알리어 논장(論藏; Abhidhamma-piṭaka)에는 7론(七論)이 유명한데, 그 가운데 하나가 <논사(論事)>이다.---→‘논사(論事, 까따왓투/Kathāvatthu)’ 참조. 
        
*까비르(Kabir, 1440~1518)---까비르는 1440년경 인도 비하르州 베나레스에서 가난한 과부의 사생아로 태어나서 일찍 어머니에게 버림을 받았다. 그는 베 짜는 직조공이었던 회교도 집안에서 자라서 평생 베를 짜며 평범한 삶을 살다 갔지만 위대한 영혼의 소유자였다. 인도 민중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그는 글을 배우지 않아 단 한 줄의 시(詩)도 손수 글로 쓰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남긴 영혼의 말들은 그를 따르던 제자들에 의해서 구전으로 전해져서 인도 신비주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존경받고 있다. 그리하여 시성이라 일컫는 타골과 마하트마 간디의 정신적 스승이기도 했다. 까비르의 시는 타고르에 의해서 세상에 널리 퍼졌다.
   그의 생애는 그저 베 짜고 물 긷고 시장에 가는 것이 전부로 보였을 정도이지만 신(神)을 향한 헌신과 사랑의 노래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까비르의 신(神)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유일의 초월신도 아니요, 범신론(汎神論)도 아니다. 추상적이거나 맹목적인 존재가 아닌 그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각성된 영혼의 상태로서 신(神)을 말하고 있다. 그의 신(神)에 대한 사랑은 현세에서 생활하는 매 순간순간의 체험을 통해 구체화 할 수 있는 그런 사랑과 절대적 헌신이다.
   그는 형식적인 모든 종교와 명상마저 거부한다. 종교라는 이름아래 행해지고 있는 어떤 형태의 조직이나 권위, 그리고 물질적 타락을 거부한 채 신(神)에 대한 순수한 사랑과 헌신만을 강조한다.
   작금 이 지구상에서도 종교라는 이름 속에서 얼마나 어리석은 일들이 많이 벌어지고 있는가. 종교간 다툼이 문명의 충돌로 비쳐져 세계의 종말을 가져올 수도 있다는 경고까지 있는 현실을 보면 인류는 미래에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일찍 부처님께서도 진리는 결코 말할 수 없는 것이라 가르쳤다. <유마경>에서도 전해지는 무설설(無說說) 침묵의 소리를, 영혼의 교감을 통해서만 체득이 가능하리라. 자연 앞에 경건한 마음으로 서서 꽃이 피고, 새가 울고, 바람 불고, 물 흐르는 가운데 전해져 오는 진리의 소식에 감사해야 한다.
   욕심을 채우기 위해 온갖 비리와 범죄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후안무치한 행위를 멈추고 순수한 영혼의 떨림에 응답해야 한다.
   까비르의 죽음도 의미심장하다. 시신을 두고 다툴 힌두교 제자들과 회교 제자들을 위해 죽은 뒤 일정기간 천으로 덮어둘 것을 당부한 그 마음에 이르면 그야말로 신비하다. 나중에 천을 들어보니 몸은 어디로 가고 꽃 몇 송이만이 남아있었다는 거룩한 죽음. 힌두교 제자들은 그 꽃을 화장해 강가에 뿌리고, 회교 제자들은 땅에 묻어 묘지를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까시나(kasina) 수행---까시나는 수행대상을 말한다. 사마타(samatha) 수행은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집중시키는 훈련이므로, 먼저 마음을 집중시킬 대상을 선택해야 한다. 상좌부불교의 이론서인 <청정도론>에는 사마타 수행의 대상으로 모두 40가지가 열거돼 있다. 그 중 네 가지는 무색계선의 대상이고, 나머지는 색계선의 대상이다.
    전자는 후자를 성취한 다음 수행할 수 있는 것이므로, 처음 수행하는 사람은 나머지 36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여기에는, 붓고, 검푸르고, 문드러진 등의 더러운 모습[부정상(不淨相)] 열 가지,
불ㆍ법ㆍ승ㆍ죽음ㆍ호흡 등 계속해서 생각할 대상 열 가지,
    다른 것이 섞이지 않고 하나의 대상만이 두루 가득한 까시나(kasina, 遍處, 遍滿) 열 가지.
     ---지ㆍ수ㆍ화ㆍ풍(地水火風)의 네 가지,
     ---근본 물질, 청ㆍ황ㆍ적ㆍ백(靑黃赤白)의 네 가지 색깔,
     ---광명, 허공, 이상 열 가지이다.
    수행자가 집중할 대상은 수행자의 기질에 따라 적합하고 적합하지 않은 것이 있다고 한다.
<청정도론>에는 수행자의 기질에 탐하는 기질, 성내는 기질, 어리석은 기질, 믿는 기질, 지적인 기질, 사색적인 기질의 여섯 가지가 있다고 하고, 그 기질에 맞는 대상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구사론>에서는 오직 더러운 모습을 관찰하는 것[不淨觀]과 호흡을 관찰하는 것[持息念]의 두 가지 문(門)만이 있을 뿐이라고 단언하면서 전자는 탐하는 기질[貪]에게 적합하고, 후자는 이지적인 기질[尋]에게 적합하다고 단순화하고 있다. 
    이와 같은 설명을 보면 수행자가 어떠한 대상을 선택해 수행하는가에 따라 성취가 빠르기도 하고 어렵기도 함을 알 수 있다. 경전에도 대상의 선택이 잘못돼 수행의 성취를 보지 못하는 사례가 언급돼 있다. 이 점은 간화선에서 화두(話頭)를 선택하는 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화두를 자신의 기질을 알아볼 수 있는 스승에게서 받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한다. - 실론섬 주해모음
    까시나 수행에서 물을 까시나로 이용할 경우, 수행자는 먼저 대야에 물을 떠 놓고 눈을 뜬 상태에서 그것을 바라보아 표상(表象-마음에 추상적인 사물이나 개념을 나타냄)을 얻는다. 그 다음, 눈을 감고 얻어진 표상을 주시해 표상이 흩어지지 않고 잘 유지되게 한다. 다시 그다음, 그 표상을 조금씩 확장해 온 우주를 가득 채운다. 까시나 수행을 통해 수행자는 높은 선정, 또는 신통력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으로써 깨달음을 성취할 수는 없다. 깨달음은 객체(대상, 까시나)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심신, 또는 객체를 표상하는 마음작용을 통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김정빈 <경> --→쌍신변(雙神變, 빠알리어 Yamaka-pātihāriya) 참조.

    
*깔라마경(Kalama sutta - A3:65)---<깔라마경>은 남방 빠알리어 삼장에는 앙굿따라니까야에 속하며, 한역 경전에는 중아함경 제3권-16에 <가람경(伽藍經)>이란 이름으로 실려 있다. 내용은 부처님께서 깔라마(Kalama)족 사람들에게 들려준 유명한 권고의 말씀이다. 불법(Dhamma)이 깨달음으로 가는 모든 단계에서 신중히 검토해보는 자세를 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볼 때 부처님의 가르침은 매우 합리적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불교학 연구에 있어서 방법론의 시야를 넓히는데 크게 도움이 된다. 경의 내용 일부는 아래와 같다.
  『부처님께서 비구들과 함께 코살라국(Kosala-伽覽國) 케사푸타(Kesaputta, 코사풋타) 마을을 지나시다가, 일행이 마을 북쪽에 있는 싱사파 동산(시섭화림/尸攝和林)에 머물렀을 때였다. 케사푸타 마을의 깔라마인들은 다음과 같은 소식을 들었다.
   “석가족의 아들 사문 고타마 존자가 코살라에서 유행하시다가 케사푸타에 이르셨다. 그리고 저 세존 고타마에 대한 좋은 명성이 이와 같이 퍼지고 있다. 그 분 세존께선 바로 아라한(應供)이시며, 완전히 깨달으신 분(正等覺者)이시며, 지혜와 실천이 구족하신 분(明行足)이시며, 피안으로 잘 가신 분(善逝)이시며, 세간을 잘 알고 계신 분(世間解)이시며, 가장 높으신 분(無上士)이시며, 사람을 잘 길들이시는 분(調御丈夫)이시며, 하늘과 인간의 스승(天人師)이시며, 깨달으신 분(覺者, 佛)이시며,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신 분(世尊)이시다.
   세존께서는 이 세간의 모든 중생들, 즉 마라들(maaras), 범천들, 축생들, 사문들, 바라문들, 천신들 및 인간들에게 당신 스스로 직접 깨달아 분명히 파악하신 것을 널리 알리고 계시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아라한을 뵙는 것은 실로 훌륭한 일이다.”
   그래서 케사푸타의 깔라마인들은 세존께서 머물고 계신 곳으로 찾아갔다. 그 곳에 도착하자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한쪽 편에 앉았다. 한쪽 편에 앉은 케사푸타의 깔라마인들은 세존께 이렇게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이곳 케사푸타를 방문하는 바라문이나 다른 수행자들은 오직 자기들만의 가르침을 설명하고 가르치면서 다른 사람들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헐뜯고 비방합니다. 또 다른 바라문이나 수행자들도 오면 그들 역시 자기들만의 가르침만을 자랑스럽게 가르치고 다른 이들의 가르침은 헐뜯고 있어서 저희들은 도대체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 알 수가 없나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깔라마인들이여, 그대들이 의심하고 혼란스러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의심스러운 것을 대하면 그대들의 마음속에 혼란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대 깔라마인들여, 거듭 들어서 얻어진 지식이라 해서, 전통이 그러하다고 해서, 소문이 그렇다고 해서, 성전에 써 있다고 해서, 추측이 그렇다고 해서, 일반적 원칙에 의한 것이라 해서, 그럴싸한 추리에 의한 것이라 해서, 곰곰이 궁리해낸 견해이기에 그것에 대해 갖게 되는 편견 때문에, 다른 사람의 그럴듯한 능력 때문에 그대로 따르지는 말라.
     그대 깔라마인들이여, 스스로 `이들은 나쁜 것이고, 이들은 비난받을 일이며, 이들은 지혜로운 이에게 책망 받을 일이고, 이들이 행해져 그대로 가면 해롭고 괴롭게 된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것들을 버리도록 하라.”…
   “그대 깔라마인들이여, 거듭 들어서 얻어진 지식이라 해서, 전통이 그러하다고 해서, 소문에 그렇다고 해서, 성전에 써 있다고 해서, 추측이 그렇다고 해서, 일반적 원칙에 의한 것이라 해서, 그럴싸한 추리에 의한 것이라 해서, 곰곰이 궁리해낸 견해이기에 그것에 대해 갖게 되는 편견 때문에, 다른 사람의 그럴듯한 능력 때문에, 혹은 `이 사문은 우리의 스승이시다' 라는 생각 때문에, 그대로 따르지는 말라.
    그대 깔라마인들이여, 스스로 `이들은 좋은 것이고, 이들은 비난받지 않을 것이고, 이들은 지혜로운 이에 의해 칭찬받을 일이고, 이들이 행해져 그대로 가면 이롭고 행복하게 된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대 칼라마인들이여, 그대로 받아들여 살도록 하라.”
   「<깔라마경>은 의문이 일어날 때는 자유롭게 탐구해 보도록 권장하신 경이다. 이 경의 참뜻은 광신, 완고함, 독단, 편협함을 벗어난 가르침을 드러내 보이는 데에 있다. 모든 현상은 불법의 영역 속에서 바르게 이해돼야 하므로 통찰력은 처음부터 끝까지 중요한 구실을 한다. 이 경에서 통찰력은 나쁜 방법은 버리고 좋은 방법은 받아들이게 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진리를 찾는 구도자들이 따라야 할 원칙을 제시해주고 사물판단의 기준을 담고 있는 이 깔라마경은 부처님 가르침의 뼈대부분에 속한다.」 - 실론섬



*깔라빠(산스크리트어 kalāpa)---깔라빠(kalāpa)는 무리, 더미, 무더기, 적집이란 뜻으로 아비담마에서 물질의 무리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마음이 항상 마음의 작용들과 함께 일어나고 함께 멸하는 것처럼 모든 물질도 단독으로 일어나지 못하고 항상 무리지어서 일어나고 멸하는데 이런 무리를 깔라빠라고 한다. 이 깔라빠는 지(地, 땅, pathavī)ㆍ수(水, 물, āpo)ㆍ화(火, 불, tejo)ㆍ풍(風, 바람, vāyo)ㆍ색(色, 물질, rūpa)ㆍ향(香, 냄새, gandha)ㆍ미(味, 맛, rasa)ㆍ양(養, 영양분, ojā)의 8가지가 있다.
    이 8가지는 물질의 무리를 이루는 최소의 구성요소로 더 이상 분리할 수 없는 것이란 뜻인 아위닙보가(avinibbhoga)라고 한다. 그래서 8가지로만 구성된 깔라빠를 ‘순수한 8원소(suddhaṭṭhaka)’라고 표현하고 있다. 모든 깔라빠는 이들 여덟 가지를 기본으로 하고 그 깔라빠의 특성에 따라 다른 물질을 더 가지고 있다. 그래서 여기에다 다른 하나가 더 붙으면 9원소(navaka)가 되고 다시 하나가 더 붙으면 10원소(dasaka)가 되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생명의 9원소는 8가지 아위닙보가에다 생명기능(命根)이라는 물질이 하나 더 붙어서 9원소가 된다.
    이 아위닙보가는 물질의 무리인 깔라빠를 이해하는 가장 기초가 되는 개념이므로 반드시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 위빠사나에서 깔라빠가 중요한 이유는 <청정도론(18장 후반부와 19장 전반부)>에 깔라빠를 명상하는 것이 위빠사나의 시작이라고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최소단위로서의 법으로 존재를 살피지 않고 개념으로서만 존재를 파악한다. 그러므로 법의 무상ㆍ고ㆍ무아를 통찰하는 것이라 정의하는 위빠사나는 반드시 이러한 개념적 존재를 분석해서 법으로 환원해서 살펴야한다. 그리고 물질은 정신적 현상(受ㆍ想ㆍ行ㆍ識)보다 거칠고 그래서 살피기가 상대적으로 쉽다. 그러다 보니 위빠사나의 시작도 바로 이러한 물질의 깔라빠를 살피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깔라빠를 관찰하거나 명상한다함은 이러한 물질을 개념으로 파악하는 우리의 잘못된 습관을 떨쳐내고 땅, 물, 불, 바람, 물질, 냄새, 맛, 영양분 등의 적집으로 본다는 것이다.
    위빠사나 중에도 우리는 이러한 무수한 개념으로 무의식 중에 자신을 살펴보고 있다. 이러한 개념을 버리고 법의 조합으로 보기 시작하는 것이 깔라빠를 명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몸을 깔라빠로 보지 못하면 그것은 아무리 깊은 수행일지라도 개념을 대상으로 하는 사마타거나 아니면 다른 엉뚱한 현상에 놀아나면서 그것을 수행이라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는 깔라빠를 명상하는 것이 위빠사나의 시작이라고 단정 짓고 있다. -실론섬 주해모음
   
   
*깜마 웨가(빠알리어 Kamma-vega)---‘업력(業力)의 작용’이라 번역한다. 불교에 의하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다시 말해 어머니 자궁 안에서 태아로 형성되려면 세 가지 요소가 있어야 한다고 한다. 그 세 가지란 여성의 난자, 남성의 정자, 그리고 깜마 웨가(Kamma-vega)라고 하는 업력(Kamma-energy)인데, 경에서는 이것을 은유적으로 혼(魂)이라는 의미를 가진 간답바(gandhabba, 건달바/乾達婆)로 표현하고 있다.
   이 업력은 임종하는 사람의 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 방출된다고 한다. 부모는 단지 태아의 몸을 구성하는 데 필요한 육체적 요소만을 제공해 줄 뿐이다. 태아 속에 잠재해 있는 성격상 특성, 성향과 능력들에 관해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
   죽어가는 사람은 온 힘을 다해 삶에 매달리다가 죽는 순간에 업력을 방출하는데, 이 업력(Kamma-vega)은 수태 준비가 된 새 어머니의 자궁에 전광석화처럼 찾아든다. 업의 힘이 난자와 정자에 충격을 주면서 거기에서 하나의 응결체로서 소위 원생세포가 생겨난다. 이 과정은 말을 할 때 생기는 공기진동의 작용에 비교될 수 있다. 공기진동은 다른 사람의 청각 기관에 부딪쳐 순전히 주관적 느낌인 소리를 생겨나게 하는 것이다. 이 경우 소리 감각이 옮겨간 것이 아니라 단지 공기진동이라는 힘의 이동만이 일어났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죽어가는 사람이 방출한 업력은 부모가 마련해 준 질료에 작용해 새로운 태아를 잉태해낸다. 그런데 이 경우에도, 어떤 실체나 영혼이 옮겨간 것이 아니라 단지 업 에너지(Kamma-vega)가 전달된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삶(uppatti-bhava)은 과거의 업(kamma-bhava)에 상응해 나타난 것이며, 미래의 삶은 현재의 업에 상응해 나타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한 생에서 다음 생으로 옮겨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른바 자아(自我)라는 것은 세세생생 순간순간 끊임없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무수한 변화의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흡사 파도가 얼핏 보기에는 바다 위에서 밀려왔다 밀려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끊임없이 순간순간 에너지를 전달받으며 물이 제자리에서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에 불과하듯이, 엄밀히 생각해보면 궁극적 의미에서는 윤회의 바다를 옮겨 다니는 영구적인 자아(自我)라는 실체는 없다. 단지 거듭거듭 살고자 하는 충동과 의지에 휘말린 육체적, 정신적 현상의 과정만 있을 뿐이다.
   헌데 오늘날 뇌 과학이 발달하고, 심지어 투명 뇌 기술이 미국에서 한국인 학자(정광훈 MIT大교수)에 의해 개발된 실정인데, 이러한 이론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여도 되는 것인지?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각광을 받고 있는 남방불교이론은 얼핏 보기엔 힌두이즘의 아트만(atman)을 부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 <청정도론>을 비롯한 남방 상좌부불교의 논서들 역시 아비담마의 이론을 담고 있어 부처님의 원음(근본불교)에서 상당히 비약한, 오히려 힌두적인 것이 많으므로 과학적 검증에 무리가 있음을 유념할 일이다.---→업력(業力-깜마 웨가/Kamma-vega) 참조.

     


                       

*깨달음에 대한 논쟁---붓다의 깨달음에 대한 이해에 갑론을박이 있다. 이를 통해 붓다의 깨달음에 접근해보자. 깨달음이 무엇인지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현응 스님 - 「깨달음은 원래 붓다와의 문답과 기억의 억념(憶念-마음에 깊이 새김)을 뜻하는 사띠(sati)로 연기(緣起)와 공(空)을 ‘이해하는 깨달음’이었지 궁극적 완성의 ‘이루는 깨달음’이 아니었다. 조사선과 간화선을 봐도 기억을 뜻하는 사띠와 마찬가지로 깨달은 이야기들을 기억하고 반추해서 ‘이해하는 깨달음’이다. 후기로 갈수록 사띠에 위빠사나, 삼매, 선정들이 결합돼서 ‘이해하는 깨달음’이 ‘이루는 깨달음’으로 고준해지고 연금술처럼 신비화됐지만, 오늘날은 깨달음에 스마트 폰, 다양한 분야의 책들만 봐도 연기와 공의 이해가 가능하다. 독서와 사유야말로 이 현대시대의 사띠이자 간화선이다. 그러니 ‘이해하는 깨달음’은 가능하고 실천의 영역인 역사(사트바, 자비보살행)를 실천하지 못해도 깨달음은 훼손되지 않으며, ‘이루는 깨달음’은 자신도 중생도 구제하지만 그런 사람을 보지 못했다.…
   부처님은 고행을 통해서도 아니요, 선정을 통해서도 아닌 논리적인 사유와 성찰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었다. 깨달음은 이해의 영역이었기 때문에 설법, 토론, 대화를 통해 얻을 수 있었다. 깨달음은 선정(禪定) 수행을 통해 이루는 몸과 마음의 높은 경지, 즉 신비로운 경지가 아니다.
부처님은 가르침을 청할 때 삼매와 선정을 통해 수련하라고 지도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선정이나 삼매 없이도 충분히 깨달음이 가능하다.」
   이상과 같이 현응 스님은 “선정이나 삼매 없이도 깨달을 수 있다”며 “불교의 요체는 ‘이루는 깨달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는 깨달음’에 있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펼치며, 조계종의 간화선(看話禪) 수행에 근본적인 의문을 던진 셈이다.
    계속해서 현응 스님의 주장이다.
    현재 한국의 조계종에서 깨달음을 위한 수행은 평생에 걸친 과업이다. 깨달음을 위한 노력은 3개월, 6개월 정도로는 언급조차 할 수 없고, 여러 해가 지나고 수십 년 이상을 참선 수행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수십 년을 투자해도 현실적으로는 깨달았다고 하는 사람이 보기 힘들어 돈오(頓悟)라는 말이 민망할 정도이다.…
    깨달음은 불교도에게 선결과제이자 기본요건이기 때문에 깨달음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다른 문제에는 진지한 관심을 기울이기 힘들다.…
    한국불교에서의 깨달음이란 ‘몸과 마음의 완성된 경지이자 모든 번뇌를 끊고 고매한 인격을 이룬 높은 경지’로서 ‘깨달음’ ‘확철대오’ 등으로 표현한다. 이렇게 정의하는 깨달음은 대단히 추상적으로, 깨달음이란 것을 이렇게 모호하게 설정해서는 이를 얻기 위한 노력의 방법도 불분명하고, 깨달음의 성취 또한 어느 수준의 어떤 것을 말하는지 제대로 알 수 없다. 평생을 노력해도 깨달음을 얻지 못하는 까닭도 깨달음이라는 내용을 잘못 설정했기 때문이다.
     현응 스님은 깨달음이란 "모든 번뇌를 끊고 고매한 인격을 이룬 높은 경지"가 아니라, "세상을 연기(緣起)의 관점으로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깨달음만큼이나 자비와 실천을 강조한다. 깨달은 사람이 깨달음에 만족하지 않고 실천에 나서는 것은 "존재에 대한 사랑과 연민 때문"이며 "자비야말로 역사적 행위의 원동력으로서 깨달음과 역사를 묶어내는 고리"라는 것이다.
    현응 스님은 시종일관 사띠와 간화선 모두 대화를 기억하고 잘 성찰해, 이해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맑음과 밝음은 스스로 아는 작용이 비추는 보너스다. ‘간화선은 참구(參句)해야지 참의(參意)해서는 안 된다’는 선사들의 가르침에도 어긋난다. 모두 체험을 강조한 수행법들이다.
중국 선불교의 탄생은 인도 승 달마의 도래를 계기로 중국 교학 불교의 이해에 치중한 이론적 천착이나 지적 이해에 갇힌 사변적 불교를 붓다의 깨달음, 실천정신으로 다시 돌이키자는 성찰적 심자각(心自覺)에서 비롯됐다.」

    그렇다면, 먼저 깨달음이 무엇인가에 대해 살펴본다.
    유경 스님 - 「붓다는 책에서 볼 수 있는 것들, 의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을 이해하기 위해 출가한 것이 아니다. 어떤 문헌에서도, 어떤 의식의 이해로도 알 수가 없는 문제, 즉 인간이 나고 늙고 병들고 죽어야만 하는 가장 근원적 연유를 밝히기 위해서 출가했다. 붓다는 홀로 깊은 선정과 사유 중에 모든 것은 변해간다는 무상(無常)을 깨달았다. 무상한 중에 인무아(人無我)와 법무아(法無我)도 깨달았다. 의식의 이해 차원을 벗어난 깊은 선정 중에 12연기로 생사의 세계를 통찰했으며, 고(苦)의 원인과 처방을 밝힌 4성제(四聖諦),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중도(中道), 중도로 가는 8가지 바른 길(八正道)을 밝혔다. 붓다의 수행이었던, 사띠(sati)는 37조도품뿐만 아니라, 대승불교의 지관(止觀) 정혜(定慧) 수행, 심지어 다른 종교의 명상수행에도 관통하는 키워드로, 이해(undetstand)가 아니라 마음집중(mindfulness), 깊은 알아차림(awareness)을 뜻했다. 이것은 몸의 감각과 마음의 의식, 무의식이 다 동원된 상태지, 그저 머리로 알아듣고 이해하고 통찰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붓다가 행하던 호흡명상 수행법을 전한 중국 후한시대 안세고의 <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은 제목이 ‘아나바나(anapana, 들숨날숨) 사띠(sati, 念, 알아차림awarenesss, 마음집중mindfulness, 마음을 지킴-守意)’의 경전이다. 붓다는 수시로 숲속에 들어 호흡명상을 했으며, 그 명상의 주요 수행법이 사띠(sati,念)인 것이다. 붓다가 호흡을 지켜보면서 선정에 들었다면 간화선자는 화두를 들고 선정에 든다. 호흡이든 화두든 사마타(止)든 위빠사나(觀)든 선정(定)이든 지혜(慧)든 좌선이든 행선이든 알아차리기(사띠)는 모든 관찰, 통찰, 수행, 명상을 관통하는 기저이다. 이 사띠를, 가르침을 외워 기억해 ‘이해하는 깨달음’의 차원에서 해석하는 것은 붓다의 말씀에도 어긋난다. 붓다는 “내가 한 말이라도 그냥 믿지 말고 꼭 스스로 확인해 보라.” 하지 않았는가. 나아가 붓다는 물질의 영역을 관찰하고 비물질의 영역을 관찰해서 소멸의 영역에 이른 이들은 생사윤회에서 벗어난다[수타니파타]고 했다. 물질의 영역은 감각의 영역이고, 비물질의 영역은 정신의 영역이며, 소멸의 영역은 물질과 몸, 정신과 마음의 장애를 모두 벗어난 영역이다. 이것을 어찌 가르쳐서 외우고 전달해서 이해로 깨달을 수 있겠는가.  붓다의 제자들 중 붓다의 말씀을 누구보다 잘 듣고 잘 기억해 다문제일(多聞第一)이라던 아난이 깨닫지 못해 오백나한이 모인 결집에도 참석하지 못할 처지라 낙담한 채 베개를 베고 돌아눕다가 깨우쳐서 가까스로 아라한의 결집에 참여할 수 있었다는 일화와, 잘 외운 아난보다는 지혜제일인 사리자에게 법을 부촉했다는 고대 경전인 <수타니파타>의 기록, 그리고 꽃을 들어 보이자(拈花) 미소로 화답한 가섭에게 마음을 부촉했다는 <오등회원(五燈會元)>의 기록의 의미는 무엇이겠는가? 깨달음은 이해가 아니라 체험, 체득이다. 깨달음은 새가 알을 깨고 나온 것과 같기 때문에 절대 다시 달걀 속으로 돌아 갈 수 없다. 중생의 고통을 듣는 관세음보살과 중생의 고통을 건지러 간 지장보살이 어떻게 이해의 차원에 머무르면서 중생들을 구제하지 못해도 나의 ‘이해의 깨달음은 훼손되지 않는다’ 하겠는가. ‘이해하는 깨달음’과 ‘이루는 깨달음’이라는 용어는 형태상 기왕의 해오(解悟)와 증오(證悟)를 풀이한 듯하다. 하나의 삼매를 제대로 이루면 백 천 삼매가 가능해지듯, 참으로 이해한 깨달음이라면 이루는 깨달음으로 변해가는 게 아니다. 자비보살행으로 확장될 뿐이다.

    이번에는 현응 스님에 대한 수불 스님의 논박이다.
    수불 스님 - 「진리란 ‘잘 이해하는’ 대상이 아니라 ‘보고 얻고 알고 깨우쳐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의심을 뛰어넘고, 의혹을 제거하고, 두려움 없음을 얻을 수 있다. 이해하는 것만으로 안 된다는 것은 수행을 조금이라도 해본 사람이라면 너무나 잘 안다. 이해하는 것만으로 인생의 문제가 해결된다면 전세계 불교학자들마다 깨달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깨달음이 이해라는 주장은 수행자들을 모두 바보로 만드는 희론이자 책상물림의 말이다.
   무명(無明)이 사라지면 순차적으로 결국 노사(老死)도 사라져서 괴로움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지만, ‘실제로 무명이 소멸되려면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은 언어로 전달될 수 없는 것이다. 말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체득해야만 실제로 무명이 소멸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명만 소멸되면 순차적으로 노사까지도 소멸될 것은 분명하지만, 과연 ‘어떻게 해야 무명이 소멸될 것인가?’ 하는 것은 너무도 현실적인 문제이다. ‘잘 이해하는 것’으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다.
   현응 스님은 연기법을 잘 이해하기만 하면 만사형통인 것처럼 말하지만, 깨닫기 전에는 연기법의 진면목을 바로 알기 어렵다. ‘중도(中道)’는 사무치고 사무쳐서 끝내 통해야 하는 것이지, 이해로서는 도저히 그 실상을 파악할 도리가 없다. ‘깨달음’은 불이법(不二法)에 속하고, ‘이해’는 이법(二法)에 속하는 것이다. ‘깨달음이란 이해하는 것이다’는 말은 곧 ‘상을 여읜 것(깨달음)은 상을 가진 것(이해)이다’라는 무의미하고 모순된 주장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상대적인 ‘이법’의 논리로 중도의 ‘불이법’을 재단하려는 모든 시도는 ‘장님 코끼리 만지기’와 같다. 그렇게 되면 ‘범주오류’에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까지 더하게 된다. 분별망상으로 불이법을 더듬다가 ‘마음’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 수 없다고 현애상(懸崖相)을 내어서, 하급의 차원으로 퇴타해 ‘깨달음은 이해의 영역’ 운운하는 것을 고봉 화상은 <선요(禪要)>에서 ‘원숭이가 장대로 달을 따려한다’고 경책했다.」- 불교닷컴에서

    다음은 이재열 원장과 김재성 교수의 논박이다.
    이제열 불교경전연구원장은 초기경전인 상윳따니까야의 내용을 언급한 뒤, “연기를 깨달았다는 것은 이해가 아닌 체험이고, 그 체험은 선정 수행을 통해 실현된다”며, “깨달음은 이해의 영역을 포함하지만 더 나아가 체험적으로 증득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경전에도 부처님은 무색계 사선정과 멸진정에 이르러 연기를 사유하고 새벽에 도를 깨쳤다고 명시돼 있다”며 “현응 스님은 경전의 근거를 무시하고 개인적인 사견으로 연기와 깨달음을 오도하고 있다는 의구심을 떨치기 어렵다”고 말했다.
    김재성 능인불교대학원대 교수는 “오비구가 부처님의 대화로만 깨달은 것이 아니라 선정을 통해 깨달았음이 경전에 분명히 나와 있다고 지적하고, “아난 존자가 기억력이 탁월했지만 아라한과를 얻지 못해 처음 결집에 참여하지 못했던 점도 간과돼서는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

    위와 같이 깨달음에 대해 갑론을박하면서도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들은 주로 남방 상좌부불교를 공부하는 사람들인데, 그들의 주장을 좀 더 들어보자.
    불교에서는 깨달음이란 없다. 성불에 이르는 모든 길은 붓다께서 6년의 수행 끝에 모두 다 발견하고 깨달아 놓았다. 그것은 바로 팔정도와 바라밀이 바로 그것이다. 팔정도와 바라밀은 불교적 윤리이며 도덕적 지침이자 그 자체가 도덕적 인간의 완성이다. 팔정도와 바라밀은 성불에 이르는 길이며, 그리고 성불로 가는 인간들이 살아가야 하는 모습이기도 하다. 우리들은 붓다가 발견해 놓은 그 진리를 믿고 그대로 불도를 걸어가면 된다.
    선불교는 무엇을 더 깨닫겠다는 것인가? 깨닫는다는 말은 다른 말로 이야기 하면 모르는 것을 알게 된다, 또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다는 등으로 이해될 수 있다. 선불교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럼 붓다는 거짓말쟁이가 된다. 즉, 붓다가 발견해 놓은 성불에 이르는 여러 길들이 있는데, 그중 많은 부분을 숨겼거나 아니면 붓다가 발견해 놓은 길 말고 성불에 이르는 다른 길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그 길을 찾고자 한다는 뜻으로밖에 해석이 안 된다. 붓다가 발견해 놓은 길 이외에 또 다른 길이 있다면, 그리고 그러한 길로 간다면 결코 그것은 불교가 아니다. 그러기에 깨달음을 추구하는 선불교는 불교가 아닌 것이다.
     선불교가 추구하는 길이 올바른 길일 수도 있고, 붓다가 깨달아 놓은 진리보다 더 좋은 진리일 수 도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달마교나 혜능교 또는 선교라고 하면 된다. 불교라는 이름을 덧붙이면 안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시시비비가 일어날 필요도 없다. 불교는 불교대로 선교는 선교대로 각자의 길을 가면 되기 때문이다. 굳이 선교가 불교라는 이름 속에 파 묻혀서 붓다를 들먹이거나 붓다의 진리를 도용하거나 할 필요가 없다. 지금부터라도 달마교 혜능교 간화교 선교 뭐 이런 이름으로 바꾸면 된다.

    다음은 김나미 교수의 주장이다.
    “오늘 한국불교의 문제점 하나를 끄집어 들었다. 우리 불교는 깨달음과 이것에 기인한 수행 풍토로 인해 정도(正道)의 길을 잃었다. 한국불교는 깨달음이라는 묘원한 환상에서 벗어날 때도 됐다. 한마디로 하자면 깨달음 대신 열반이 모든 수행의 목적이 돼야 한다. 깨달음에는 연기법에 대한 통찰이 요구되는 반면 열반은 팔정도 수행이 필요하다. 깨달음은 단지 열반의 선행 조건일 뿐이며 깨달음의 단계부터 시작, 이것을 기반으로 최종의 궁극적 목표인 열반으로 나아가는 구도가 돼야 한다. 그러므로 수행을 한다면 그 수행이 목표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하고 목표 설정을 다시 해야 한다. 열반이 수행의 최종적이자 궁극적인 목적이다. 깨달음만을 수행의 목적으로 삼는 한, 수단과 목적이 전도된 채 삼독에 물든 중생으로 남을 것이다.…
    우리 불교가 불음(佛音)의 핵심을 놓치고 있다고 보는 것은 깨달음으로 인해 수단과 목적이 전도(顚倒)된 채 수행의 핀트가 잘못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수단과 목적으로서의 깨달음과 열반의 자리가 뒤바뀐 혼란에서 오는 문제이다. 여기서 둘의 상관관계를 말하는 것은 바로 둘의 원위치를 회복시키기 위함이다. 결론적으로 보자면 깨달음은 수단이고 열반은 목적이다. 그런데 우리 불교는 수단이어야 할 깨달음을 목적이라고 하고 있으며 목적인 열반은 설 자리조차 없다. 게다가 간혹 깨달음과 열반을 대등한 것이나 동의어라 하여 ‘열반이 깨달음이다.’ ‘깨달음이 열반이다.’라고도 한다.“

    다음은 이태승 교수의 깨달음에 대한 주장이다.
    “‘깨달음’을 불교 수행의 목적이라고 하는 데는 이의가 없지만, 불교의 근본 성격을 지칭하는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불교를 ‘깨달음의 종교’라고 정의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지혜의 종교’라고 정의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곧 불교의 근본성격은 깨달음을 통한 지혜의 증득이며, 또한 지혜로운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깨달음의 종교체험을 통해 심신의 인격이 변화돼, 몸과 말과 정신적인 행위의 일체가 더 이상 번뇌에 사로잡힘이 없는 지혜로운 삶을 영위하는 것, 이것이 지혜를 강조하는 불교의 근본목적이 아닐까? 붓다가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어 지혜의 눈으로 세상을 본 후 많은 사람들에게 가르친 것은 더 이상 번뇌가 없는 완전한 인간의 삶이 가능하다는 메시지였다. 그리고 그러한 지혜로운 삶을 위해 중생들로 하여금 수행을 통한 깨달음의 과정이 필요하다고 역설한 것이다. 따라서 깨달음과 수행의 문제는 ‘지혜로운 삶’의 근본성격과 일치가 될 때 비로소 그 의미가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입장에서 깨달음은 지혜를 일으키는 종교체험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깨달음의 종교체험은 인간의 깊은 의식의 세계와 관계한 의식의 내적 전환, 인격의 변화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이 내면의 의식 세계를 통찰하는 방법이 선정으로, 이 선정을 통해 깨달음을 체험함으로써 지혜의 증득이 이루어진다.“

    다음은 각묵 스님의 주장이다.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해서 깨달을 것인가. 이것이 불교의 핵심이다. 초기경전에서는 깨달음을 사성제, 팔정도, 연기, 오온의 무상ㆍ고ㆍ무아의 네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많이 언급되고 있는 것이 사성제이다. 사성제(四聖諦)란 고(苦) 집(集) 멸(滅) 도(道)의 네 가지 진리를 말한다. 초기경전을 보면 부처님은 사성제를 깨달았기 때문에 부처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숫타니파타> 558번째 게송에 “나는 알아야할 바를 알았고, 닦아야 할 것을 닦았고, 버려야 할 것을 버렸다”는 부처님 말씀이 있다. 알아야할 것을 알았다는 것은 고성제(苦聖諦)고, 닦아야 할 것을 닦았다는 것은 도성제(道聖諦)를 말한다. 버려야할 것을 버렸다는 것은 집성제(集聖諦)다. 부처님께서는 사성제를 꿰뚫어 알았기 때문에 자신을 부처라고 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성제를 꿰뚫어 아는 것이 바로 깨달음인 것이다.“

    다음은 다른 분들의 주장이다.
    “현응스님께서 조계종에서 하안거 동안거 등 그 수많은 세월의 수행기간 동안 사실상 깨달았다고 하는 자를 본 적이 없다고 말씀하시며, 어쩌면 깨달음은 올바른 이해를 통해 얻는 게 아닐까 라고 설하신 이유가 바로 이것이 아닌가 싶다. 한국불교에서의 깨달음은 실로 공허한 그들만의 꿈이 된지 오래이다.” - 길을걸으며
    “흔히 선불교에서는 깨달음이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면서 굉장히 신비화시키고 있는데 이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깨달음을 스스로 알아서 그것을 언어로 필설로 표현하지 못한다면 그건 분명히 잘못된 깨달음이거나 불교적인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절대적인 진리는 우리의 상상 생각 사고의 범위 밖에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언어로 표현이 가능한 것입니다. 붓다의 45년 설법이 그것을 웅변적으로 대변하고 있습니다. 붓다는 절대적 진리를 깨달았지만 그것을 유효적절하게 중생들을 위해서 언설로 표현했습니다. 물론 중국의 조사들이나 성철스님도 많은 설법과 책들을 펴냈습니다. 모두 다 깨달음을 자신 나름대로의 언설로 표현을 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승들이 깨달음은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한다는 것은 자가당착이며 자기모순이고 궤변입니다.… 불교의 가르침이란 어느 특정인이나 출가승들만의 전유물이 절대로 아닙니다. 어려운 교리일수록 쉽게 풀어서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하고, 들으면 바로 바로 이해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오히려 진리를 비비꼬아서 어렵게 하고 신비화시켜서 어느 특정인들만의 전유물인양 호도하고 왜곡하는 것은 절대로 불교의 참모습이 아닙니다.“ - 실론섬  

*깨달음의 단계---불교에서 ‘깨달음’(覺, ssk. bodhi)을 이르는 단계는 다양하다. 보리수 아래에서 고타마 싯다르타께서 체득했던 ‘최상의 바른 깨달음(無上正等正覺)에서부터 대승보살의 서원인 발보리심(發菩提心)으로서의 ‘깨달음’, <화엄경>의 보살수행 52위, 유식에서의 보살수도 5위, 그리고 <대승기신론>에서 수행과정의 단계적 깨달음을 말한, 시각(始覺)의 네 단계[四覺]로서 범부각(凡夫覺), 상사각(相似覺), 수분각(隨分覺), 구경각(究竟覺)과 같은 깨달음도 있다.
이와 같이 깨달음이란 열반 혹은 해탈과 동의어로서 최종적인 깨달음을 의미하는 경우가 있고, 또 시각(始覺)의 네 단계에서처럼 수행과정을 의미하는 경우도 있어서 깨달음에도 단계가 있다.---→사각(四覺) 참조.

*깨달음의 모순---<금강경> 제17분 ‘구경무아분(究竟無我分)’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약유인언(若有人言) 여래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如來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수보리(須菩提) 실무유법(實無有法) 불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佛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수보리(須菩提) 여래소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如來所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어시중(於是中) 무실무허(無實無虛)」- 만약 어떤 사람이 있어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한다면, 수보리야, 그는 거짓을 말하는 것이며, 사실이 아닌 것에 집착해 나를 비방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깨달았다고 할 그 어떤 법도 없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여래가 얻은 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실다움도 없고 헛됨도 없다. - 대략 이런 말이다.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으신 분이라고. 즉,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말할 것이다. 물론 그것도 맞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금강경>에서는 이 당연한 말까지도 위와 같이 부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으신 분’이라거나 ‘여래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는 말에 어떤 모순이 있는가.
   과연 여래는 깨달음을 얻으신 분인가. 그렇지 않다. 깨달음을 얻은 여래 혹은 부처란 없다. 깨달음을 얻은 ‘나’가 있다거나, 깨달음을 얻은 부처가 있다고 한다면 그건 벌써 상대성에 빠진 생각이다. 깨달은 부처가 있고, 깨닫지 못한 중생이 있어서 어리석은 중생이 깨달은 부처님 세계로 나가기 위해 수행을 한다는 생각은 벌써 부처와 중생을 둘로 나누어놓은 생각이다. 부처는 그 어떤 분별의 세계에도 몸을 담고 있지 않다. 생사와 열반, 중생과 부처라는 두 가지 극단 어디에도 부처는 없다. 부처는 어디에 있어야 한다거나, 어떤 상태로 있어야 한다거나 하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깨달은 자리라는 어떤 존재적인 틀에 부처를 가둘 수는 없다.
   부처는 깨달은 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깨어 있음’을 의미한다. 깨달았다는 것은 완전히 무아(無我)를 깨달았다는 뜻이다. 즉, ‘내가 없음’을 온전히 자각한 것, 구경무아(究竟無我)인 것이다. 무아가 곧 깨달음일진대, 어디에 깨달은 ‘나’를 붙일 수 있을 것인가. 무아, 내가 없는데, 어디에 깨달은 ‘나’를 내세울 수 있는가. 깨달음이라는 것은 어떤 존재에게 오고 말고 하는 문제가 아니다. 누구든 깨어있는 순간 바로 부처인 것이다. 깨어있는 순간, 오직 깨어있음의 빛만이 있을 뿐, 나와 너라는 상대개념도 사라지고, 생사, 중생과 부처라는 분별 또한 사라진다. 바로 그 것, 깨어있음, 그것이 바로 부처다. 그러므로 ‘깨달으신 부처님’이라는 별도의 실체를 상정한다면 그것은 무아도 아니요, 깨달은 부처, 깨닫지 못한 부처라는 분별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만약 스스로 ‘나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면 그는 깨달음을 얻은 ‘나’에 갇혀있기 때문에 깨달았다고 할 수 없다. ‘나’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 ‘아(我)’는 깨닫지 못한다. 무아(無我)만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무아는 말 그대로 무아, 내가 없음이며 텅 비어 있음이고 무상(無常)과 무아(無我), 무자성(無自性)과 공(空)이기 때문에 주체를 내세울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깨달았다’는 말이 얼마나 큰 모순인가. 깨달을 내가 없음을 아는 것이 깨달음일진대 스스로를 깨달음의 주체로 생각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그것은 스스로의 무명을 드러내는 일일 뿐이다.
   그러니 어떤 사람이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한다면 그는 거짓을 말하는 것이다. 여래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수 없다. 여래라는 주체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그 어떤 깨달음의 상태를 얻어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여래’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 ‘얻음’도 없다. 그렇기에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는 말은 완전히 거짓이다. 언어 자체에 큰 모순이 담겨 있는 표현이다. 그렇게 말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깨달음’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며, ‘깨달은 자’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고, ‘얻음’에 집착해 있는 것이다. 사실이 아닌 것에 집착해 여래를 비방하는 것과 같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어떤 사람이 있다면 그는 여래가 아니다. 그런데 만약 어떤 사람이 ‘여래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여래를 비방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런 여래는 없다. 또한 여래가 얻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그 어떤 법도 없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어떤 특정한 법이 아니다.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할 만한 그 어떤 법이 없다. 여래가 얻은 법이라는 것은 실다움도 없고 헛됨도 없는 것이다. 여래가 어떤 법을 얻었다면 그것이 참된 것, 실다운 것이라는 말인데, 여래가 얻은 법은 실다운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헛된 것 또한 아니다. 실다운 법에 집착해서도 안 되고 헛된 법에 집착해서도 안 된다.
   누구나 말할 것이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으신 분이라고, 그러나 얻을 깨달음이 없다. 깨달음이라는 것을 어떤 실체적인 것, 진리다운 어떤 것으로 생각지 말라. ‘어떤 것’으로 고정지어 생각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깨달음이 아니며 진리도 아니다. - 법상 스님
   이는 ‘깨달음’이라는 어떤 상을 설정해두고 그 깨달음을 얻기 위해 집착하는 오류를 경계해서 한 말이다. 열심히 정진해서 늘 깨어 있으면 저절로 깨달음의 경지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지 ‘깨달음’이라는 정해진 그 어떤 것은 없다는 말이다.  

         
*깨달음이란---‘깨달음’이란 불교역사 2600여년 가운데 가장 많은 질문이고, 가장 답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불교 용어 중에 ‘깨달음’이라는 말만은 유독 우리말이다. ‘부처님 오신 날’처럼 아름다운 우리말이다. 하지만 참으로 애매한 추상적인 말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꿈(미망)에서 깨어나 본래의 상태(진실)를 회복한다거나 그릇된 견해나 편견 선입견 등을 깨트려 본래의 참된 면목을 드러낸다는 뜻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무엇에 대해 무엇을 깨달은 것인지 깨달음의 대상과 내용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 지혜의 종교라고 한다.
   ‘붓다(buddha)-불타(佛陀)’는 말 그대로 ‘깨달은 자’라는 뜻이다. 불교도의 이상인 열반(혹은 해탈)은 절대자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에 의해 성취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깨달아야 하는가? 그런데 문제는, 붓다의 깨달음은 다른 유일신교의 종교와 달리 지역과 시대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해석되고 변용돼 왔다는 사실이다. 2천 6백여 년에 걸친 불교사상사는 바로 무엇을, 어떻게 깨달을 것인가에 대한 치열한 탐구와 해석의 도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권오민
    불교에서 ‘깨달음’을 표현하는 말에는, 깨달음, 열반, 해탈, 대오, 혜오, 증오, 증득, 돈오, 돈증, 대각, 정각, 도피안, 득도, 달도, 견성, 성불, 등각, 무상정등각, 구경각, 묘각,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원돈, 원각, 원적, 적멸, 멸도, 적정, 한소식… 등 수십 개가 있다. 이러한 현상은 단 한 마디로 ‘깨달음’을 표현하기가 힘들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깨달음을 얻은 상황에 따라 그 표현하는 방법도 달라짐을 나타내기도 한다.
    깨달음, 해탈이란 탐(貪)ㆍ진(瞋)ㆍ치(癡)의 소멸이고, 괴로움에서 벗어남이며, 그것은 곧 불교의 핵심 가치인 무상(無常) ․ 무아(無我) ․ 공(空)에 대한 이해를 깨쳤음을 의미하기도 하고, 특히 선불교에서 깨달음은 궁극적 완성을 이루는 것을 의미해서 ‘몸과 마음의 완성된 경지이자 모든 번뇌를 끊고 고매한 인격을 이룬 높은 경지’로서 ‘확철대오’해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것을 뜻한다. 즉, 깨달음은 이해가 아니라 체험, 체득이고, 깨달음은 이해의 영역을 포함하지만 더 나아가 자기초월을 체험적으로 증득해야 함을 말하게 됐다.
      그런데 <수타니파타(경집/經集)>에서 붓다는 왜 자신이 깨달은 사람인가 하는 것을 다음과 같이 밝히신 바 있다. “나는 알아야 할 바(苦聖諦)를 알았고, 닦아야 할 바(道聖諦)를 닦았고, 버려야 할 것(滅聖諦)을 버렸다. 바라문이여, 그래서 나는 붓다(깨달은 사람)이다.-수타니파타 558게” 이는 곧 깨달음은 ‘사성제를 철견(徹見)’하는 것이란 뜻이다.
    그리고 <대품반야경(大品般若經)> 등에서 붓다는 연기법을 통해서 정각을 이루셨다고 적고 있다. 그러므로 깨달음이란 ‘연기법을 깨달은 것’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다. 그리고 연기의 가르침은 무아(無我)와 같은 말이다.
    이와 같이 깨달음을 일컫는 용어도 다양하고, 이를 정의하는 것도 쉽지 않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깨달음의 특징들을 통해 깨달음의 정의에 접근해야 하겠다.
     ① 위의 내용들을 종합해볼 때, 일단 불교에서 깨달음이란 ‘사성제 ·연기·무아를 깨달아 탐 ․ 진 ․ 치, 그리고 고(苦)에서 벗어나는 것’이라 정의할 수 있겠다.
     ②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또 하나는 ‘깨닫는다’는 것은 무엇을 새로 말들어낸다는 창조적인 행위가 아니라, 이미 있어온 진리에 대한 발견이라는 점이다. 붓다는 연기법을 설명하면서, “연기법은 내가 지은 것도 아니요, 다른 사람이 지은 것도 아니다. 여래가 세상에 나오건 나오지 않건 간에 이 법은 존재의 이법(理法)으로서 존재와 더불어 있어 온 것이다.”라고 하셨다. 여래는 다만 이 법을 자각해서 바른 깨달음을 이루었을 뿐이란 말이다.
     ③ 이와 같이 초기불교에서 깨달음이란 ‘진리에 대한 눈뜸’이었다.
     ④ 그러던 것이 대승불교, 특히 선종(禪宗)에 와서는 ‘자기 자신의 본성을 바로 봄으로써 부처가 된다[견성성불(見性成佛)]’는 개념으로 바뀌었다. 깨달음이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에 답할 ‘자기 자신의 발견’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불성(佛性)을 깨달아 자기 자신이 본래 부처였음을 깨치게 되면 그대로 부처가 된다는 것이다. 이 ‘견성성불’은 자기 마음을 바르게 가져, 자기 자신이 곧 부처임을 깨쳐야 한다는 선종(禪宗)의 이치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말이다.
     ⑤ 그리고 깨달음이라는 것은 마음의 전환을 뜻한다. 즉, 깨달음이란 해탈(解脫)을 의미하며, 해탈은 온갖 번뇌와 고(苦)로부터 벗어나서 자유로워진, 해방과 자유의 개념을 나타낸 말이다. 이는 마음 상태가 바뀐, 자기초월을 의미하며, 불교수행과 실천의 궁극적인 목표이다.
     ⑥ 깨달음은 윤리도덕을 초월한다. 왜냐면 깨달음은 윤리나 도덕과 같은 그런 관념하고는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분명히 해 둘 것은, 깨달음은 윤리도덕을 초월하지만, 깨달은 인간은 윤리도덕 안에 있다. 깨달은 인간은 가장 윤리도덕적인 인간이란 말이다. 때문에 깨달음이라고 하는 경지는 윤리도덕을 초월하지만 깨달은 인간은 윤리도덕 안에 있다. 그것이 열반의 상태이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나라 불교의 문제점 중 하나는 인간이 지켜야 될 근본도리를 지키지 않고 마치 깨달음이 따로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다. 그리하여 윤리도덕을 파괴하는 것을 깨달음처럼 생각해서 그것을 마치 깨달은 자의 매력처럼 이야기 한다. 그러나 이것은 극히 잘못된 모순이다. 가장 윤리도덕적인 사람이 깨달음을 얻은 자이지, 깨달음과 윤리도덕의 파괴는 전혀 관련이 없다.
     ⑦ 깨달음이란 ‘내가 추구하고 탐구하고자 하는 궁극의 진리를 확연히 깨친 것’을 말한다. 즉, 참선을 하든, 간경을 하든, 염불을 하든, 나를 비롯한 이 우주에 있는 모든 존재는 어떤 원리로 존재하는 가를 확철대오(廓徹大悟) 함을 깨달음이라 한다.
     ⑧ 그런데 불교라는 종교적 입장에서는 깨달음을 얻는 과정에도 단계가 있다.
         그 첫 번째는 지적 단계이다.
         두 번째는 정서적 단계이다.
         마지막은 행동적 단계이다.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 중에 머리로는 알겠는데, 가슴이 그렇게 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는 지적단계의 깨달음은 있으나 정서적 단계의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것을 말한다. 뿐만 아니라 붓다는 ‘깨달음 지상주의자’가 아니다. 오로지 깨달음의 결과로서 자비심이라고 할 수 있는 보리심의 참된 보살의 실천, 즉 보리행을 강조한 분이라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니 ‘깨달음’이란 것을 단순히 학문적으로 연구하고 설명한다는 것은 온당치 않다. 그렇게 되면 미국에 가보지 않은 사람이 영화에서 미국을 본 것을 가지고 미국 전문가인 것처럼 행세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⑨ 깨달음이란 부처님도 알려줄 수 없고, 스승도 알려줄 수 있는 게 아니다. 오직 본인만이 수행과정을 통해 스스로 체험하고 체득해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불교에서 깨달음이란 용어가 다방면에 쓰이기 때문에 혼란을 겪는다.
     ⑩ 원래 깨달음이란 붓다 수준의 정각(正覺)을 말하고, 그 외에 소소한 알음알이가 타파되는 과정을 견처(見處)라 하고, 한 소식했다, 초견성했다고 하는 것이 온당한 표현일 것이다.
     ⑪ 깨달음은 탐ㆍ진ㆍ치의 번뇌가 소멸되는 것이다. 다만 수행과정에서 수행자의 업장(業障)이 소멸될수록 많은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된다. 이때 그런 과정을 점검하고 바른 수행의 길을 제시할 수 있는 스승이 있다면 수행자는 옆길로 새지 않고 바른 수행의 길로 빠르게 갈 수 있다. 그러한 조건을 갖추지 모한 수행자는 소소한 자신의 체험을 깨달음으로 착각하고 스스로 높여서 남의 스승 노릇을 해, 마구니의 길로 인도한다. 그리하여 눈 먼 자가 눈 먼 자를 이끌어서 같이 구렁텅이에 빠지듯이 스승과 제자가 함께 마구니 함정에 빠진다.
     ⑫ 특히 수행자가 조심해야 할 경우는 견처, 한 소식, 초견성의 경지가 올 때이다. 이때는 어지간한 경전(經典)을 해석할 수 있게 되며, 조사어록(祖師語錄)도 무슨 뜻인지 알게 되고, 모든 사물을 볼 때마다 그 이치를 알기 때문에 그 이치를 표현하는 게송(偈頌)이 저절로 튀어나오므로 게송을 입에 달고 산다. 그리하여 모든 사회규범이 우습게 보이므로 방탕해질 수도 있고, 어린 아이처럼 순수해지기 때문에 애처럼 행동하기도 한다. 또는 미친 사람처럼 쏘다니기도 한다. 이는 수행자 자신이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관념이 모두 깨져버렸기 때문이다. 이때가 수행자에겐 가장 위험한 시기이다. 이때 올바른 스승이 바로 잡아주지 않으면 수행자는 자칫 마구니의 길로 빠져버릴 수 있다. 흔히 막행막식 하는 현상은 그래서 생긴다.
     ⑬ 깨달음의 본질은 앎이다. 다만 깨달음은 앎은 앎이되 일반적인 앎과는 다른 특별한 앎이다. 여느 앎이 사성제(四聖諦)라는 틀 밖에서 얻어지는 앎인데 비해 깨달음은 사성제라는 틀 안에서 얻어지는 앎이요, 여느 앎이 타인ㆍ타물을 대상으로 추구해 얻는 앎인데 비해 깨달음은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추구해 얻는 앎이며, 여느 앎이 점진적으로 얻어지는 이지적(理智的)인 앎인데 비해 깨달음은 훌쩍 뛰어오르듯이 비약적으로 성취되는 직관적(直觀的)인 앎이다. 정리해서 말하면, 깨달음을 통해 드러나는 진실은 이런저런 논란이 붙을 수 없는 자명한 진실이다. - 김정빈 <경> 
    이와 같이 깨달음이란 우리가 아는 일상에서 쓰는 뜻하고는 완전히 다르다. 일상에서 깨닫는다는 말은 문득 알았다는 뜻이지만 불교에서 깨달았다는 말은 알기는 안 것이지만 의식으로 안 것이 아니고 무의식마저 다 없어져서 만법의 본질을 요달했다는 뜻이다. 그래서 실지로 스님들은 깨닫는다는 말보다는 견성(見性)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 깨달으면 바로 영원한 자유인인 것이다. 곧바로 붓다 행이다. 일초직입 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라 한다.

    다음은 깨달음에 대한 조성택 교수의 글이다. 요약이지만 많은 시사점이 있다.
    “깨달음의 역사는 인종적ㆍ문화적 경계를 넘어 확산된다. 대승불교는 동아시아에서 다시 진화해 선불교를 낳았다. 선불교에서는 불ㆍ보살(佛菩薩) 외에 조사(祖師, master)라는 존재가 ‘깨달음의 존재’로서 등장한다. 조사들은 깨달음이란 ‘멀리서’ 혹은 ‘오랜 세월에 걸쳐’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당장’ ‘지금 여기에서’ 얻어지는 것이라고 한다. 조사들은 ‘마음이 곧 부처요(心卽佛)’, ‘자신의 본성을 보는 것이 곧 깨달음(見性卽佛)’이라고 가르친다. 스승으로부터 제자로 이어지는, 사자상승(師資相承)하는 선종(禪宗)의 역사는 깨달음의 전승에 관한 기록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한국불교에서 출ㆍ재가를 막론하고, 깨달음이라는 ‘체험’을 불교의 요체라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확철대오(廓徹大悟)의 최종적 깨달음만을 유효한 불교수행의 목표라 생각하고, 이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난 보람이라고 여기는 ‘깨달음 지상주의자(至上主義者)’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의 많은 불교인들은 - 출ㆍ재가를 막론하고 또 직접 수행을 직하든 하지 않든 간에 - 근기나 수행의 방식을 따지거나 우선순위를 논할 뿐 ‘깨달음’은 여전히 중요하고 불교의 중심이며 요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깨달음을 ‘체험’이라고 하거나 혹은 ‘체험된 깨달음’만을 유효한 깨달음이라고 한다면 불교라는 종교는 불가피하게 개인화, 밀실화 될 것이며, 깨달음은 소수 선택된 자들의 ‘특권’이 되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근대이후 한국불교 전통에서 소위 ‘깨달은 자’의 말과 행위에 있어 역사적ㆍ사회적 타당성은 중요하지 않다. 어떤 행위를 하든 어떤 법문을 하든 그것들은 전적으로 ‘깨달음의 표현’이다. 그 표현과 내용이 용납되지 않고 이해되지 않는 것은 우리가 어리석은 중생이라서 그럴 뿐이다. 때로 세간에서 깨달았다고 믿고 있는 어떤 선지식의 ‘깨달음’이 유효한 지에 대해 의심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수행의 정도가 낮은 자가 판단할 수 없는 문제로 유보하는 경우가 많다.
    지금 한국불교에서 깨달음은 소수의 선택된 자들만이 체험할 수 있는 영역으로 ‘특권화’ 돼 있다. 그리고 그 특권화 된 영역을 거론하는 것은 오늘날 한국불교계에서 금기시 된다. 강제에 의한 것이 아니라 불교인들 스스로가 언설로써 평하기를 거부하는 ‘금기의 영역’이다. 종단에 비판적인 재가지식인들이나 활동가들조차도 종단의 ‘권력’과 ‘금력’에 대한 비판은 서슴지 않으면서, ‘깨달음의 영역’에 대한 의심과 비판은 ‘스스로’ 삼가하고 있다.
    사실 이 문제의 폐해는 출가 스님의 경우보다 재가자들의 경우가 오히려 더 심각하다. 가장 큰 문제는 “깨닫지 못한 내가 뭘 할 수 있겠나”라고 하는 낮은 자존감이다. 낮은 자존감을 가진 불교인들에게 ‘세속’은 수행의 현장이 아니라 수행의 ‘걸림돌’로 여겨진다. “선방에서 몇 철을 수행해도 깨달을까 말까인데 세속에서 사는 내가 뭘 할 수 있겠나”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많은 재가불자들이 수행의 주체가 아니라 출가자들의 수행을 지켜보고 관전평을 하는 ‘관중’이 되고 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어느 스님이 깨달았다더라” 혹은 “못 깨달았다더라” “A 스님보다 B 스님의 깨달음이 더 크다” 등의 관전평도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깨달음은 신비한 ‘무엇’이 돼버리기도 하고 일상적 체험으로는 가늠할 수 없는 신비의 경지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리고 은연중에 깨달음을 스님들에게 기대하고 심지어 요구하기도 한다. 또한 깨달음의 문제는 소통의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한국의 많은 재가신자들은 스님의 말씀을 이 지상의 언어가 아니라 ‘깨달음’의 초월적인 언어로 받아들이고 싶어 한다. 소위 큰 스님의 말씀일수록 그런 기대감이 더 두드러진다. 뭔가 특별한 메시지를 고대한다. 불행한 일이다. 일상적 소통과 대화가 불가능한 지경이다.
    이러한 상황을 적절하게 활용하는 알쏭달쏭한 법문이 때로 더 큰 대중적 반향을 일으키는 것이 현대 한국불교의 한 진경(眞景)이다. 못 알아듣는 것은 듣는 이의 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때로 고개를 주억이며 알아듣는다고 믿게 하거나 스스로 믿는 수밖에 없다. 오늘날 한국불교는 어쩌면 이런 불통의 상황 속에 스스로 은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니면 이런 불통의 상황을 적절히 신비화해 오히려 자신을 숨기는 은폐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염려가 된다.
    그렇다면 과연 불교의 깨달음이 일종의 ‘체험’이며 이 체험이 불교의 요체인가? 이 물음에 답하기에 앞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깨달음이 단지 종교적 체험으로만 머문다면 불교는 개인의 문제를 해결하는 종교라는 덫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개인의 문제 - 때로 불교전통에서 말하는 생사의 문제 - 가 결코 작은 문제이거나 사소한 문제인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개인은 개체로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며 사회와 결코 무관한 존재가 아니라는 점에서 불교라는 종교가 개인의 생사문제에만 국한된다고 하는 것은, 스스로 제도적 종교로서의 존립근거를 없애는 일이며 연기와 무아를 핵심으로 하는 불교의 세계관과도 맞지 않는 일이다.”

    이상과 같은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니나 깨달음은 여전히 불교 수행자의 이상이요 목표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부처님 이래 대승불교에 이르기까지 불교전통에서 ‘깨달음’은 단지 어떤 경지에서 경험하게 되는 특수한 체험만을 의미하지 않으며, 그에 이르는 '수행의 전 과정'을 포괄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음에 자기초월이 이루어지고, 그것이 행으로 이어지는 것까지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냉난자지(冷暖自知)’라고 했다. 즉 깨달음의 세계는 자신이 직접 체험해 봐야 안다는 뜻이다. 불법(佛法)은 남에게 배워서 깨닫는 것이 아니라 몸소 체험해야 깨닫는다는 말이다.
    “깨달음을 과학이라고 말하는 것은 진리의 변하지 않는 존재성과 연기적으로 펼쳐지는 모양이 너무도 정확하고 명백하기 때문에 이를 가리키는 말이다. 의식의 관점에서 깨달음을 얻지 않고 추상적으로 진리를 생각으로만 그려내는 불확실한 존재성을 직접 경험하게 함으로써 존재의 진실을 올바로 알리기 위해서이다. 깨달음은 진리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이다. 의식을 넘어선 직접적인 앎이다. 직접 스스로의 마음으로 스스로의 마음을 보는 것이다. 법(法)을 지접 맛을 보는 것이다.- 카페 ‘言下大悟’에서

    다음은 <깨달음의 문제>에 대한 강병조 교수의 글이다.
    우리나라 선(禪) 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중시한다. 무엇을 깨달을 것이며 깨닫고 나면 어떻게 되는가? . 먼저 깨달은 상태에 대해서 간단히 논하고자 한다.
    선사들은 참선하는 동안에 나타나는 시공간 개념을 초월한 몸의 상태나, 작은 물소리도 크게 들리는 지각의 변화나, 화두의 의문이 풀리는 어떤 해답을 깨달음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이러한 생리적 또는 심리적 현상은 오랜 참선 후에 생길 수 있는 뇌의 상태에 불과한 것이라고 현대 의학은 말한다.
    한 예를 여기 소개한다. <뉴스위크>에 실린 ‘신경 신학(neuro-theology)’이란 제목의 내용 일부이다. 제임스 오스틴(James Austin) 박사는 미국 보스턴에 사는 신경과 교수이다. 그는 참선을 오래했으며 이날도 참선하면서 영국 템스 강가에 서 있다가 이상한 경험을 했다. 오스틴은 갑자기 그가 지금까지 경험한 것과 다른 어떤 깨침(enlightenment)의 느낌을 받았다. 주위의 물리적인 세계와 구분된 그의 개인 존재(individual existence)의 느낌은 밝은 새벽에 아침 이슬처럼 증발돼버렸다. 그는 '사물이 있는 그대로(as they really are)' 보였다고 말한다. '나, 나에게, 나의 것(I, me, mine)'의 감각은 사라졌다는 것이다. '시간은 존재하지 않았고, 나는 영원한 존재라는 느낌이 들었다. 오래된 동경, 혐오, 죽음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나 자신을 불어넣으려는 생각은 사라졌다. 나는 사물의 종국적인 성질(the ultimate nature of things)을 이해함으로써 아름다워졌다고 그는 말했다.
    오스틴 박사가 신경과 의사가 아니었다면 아마 그 순간을 불교에서 말하는 깨침의 순간으로 생각했거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비스러운 경험으로 해석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고 자기가 경험한 것을 뇌 회로로 설명했다. 위협감을 모니터하고 공포심을 등록하는 편도체(amygdala)의 활동이 감소해야만 한다. 공간 지남력(指南力)을 담당하고, 자신과 세계를 분명하게 구별하게 하는 두정엽 회로는 조용해져야만 한다. 시간 지남력을 담당하고 자의식(self-awareness)을 느끼게 하는 전두엽과 측두엽의 회로는 분리돼야만 한다. 개인(selfhood)의 고등기능으로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잠깐 중단되거나, 용해되거나, 의식에서 삭제되는 것 같다.
   오스틴의 이 논문은 1998년 MIT출판사가 <선(禪)과 뇌(Zen and the Brain)>라는 책으로 출간했다. <불교신문> 2008년 10월 22일자에는 부산 해운정사 조실 진제 스님이 용맹정진에 참가한 사부대중에게 "부모에게 나기 전에 어떤 것이 참 나던고?"라는 화두를 내렸다는 기사가 실렸다. 진아(眞我)를 찾으라는 이 화두를 여래장이나 불성처럼 불변하는 실체가 상주한다는 여래장사상을 따라 존재의 배후에 있는 그 무엇을 찾으라는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어불성설(語不成說)에 불과할 것이다. 불변하는 실체는 없는 것이다.
    필자는 '석가모니가 깨달은 것'을 우리 불자들이 다시 깨달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욕심 때문에 생기는 고통을 없애려면, 자연이 기능하는 원리(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원리)를 깨달아 욕심을 적게 부리며 편안한 마음을 가지고 살면 된다고 생각한다. 깨달음이란 자연법칙을 제대로 아는 것을 말하고, 무지에 의한 고통에서 해방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죽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편안히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상태가 바로 해탈이요 열반이며, 이런 상태가 깨달은 상태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생자필멸(生者必滅)의 진리를 미리 알고 바르게 살아서, 편안히 자기 죽음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난 해탈이요 열반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불교는 종교인 동시에 철학이요, 과학이며, 심리학이고 정신수양의 도(道)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인간 싯다르타는 생존 당시 연기(緣起), 무아(無我), 사성제(四聖諦), 삼법인(三法印), 팔정도(八正道), 공(空)사상, 중도(中道) 등 아주 과학적인 깨달음을 얻었다. 현대 과학에 맞지 않는 교리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석가모니의 과학정신을 현대과학으로 재해석하면 큰 문제는 없다고 생각된다. 원래의 석가모니의 과학정신으로 돌아가는 것이 한국불교 개혁의 가장 시급한 과제이다. 한국불교는 이제 위에 열거한 비불교적인 요소를 제거하고 석가모니의 깨침과 근본 가르침 즉 연기, 무아, 사성제, 삼법인, 팔정도, 공사상, 중도사상 등으로 돌아가야 한다. 혹시 석가모니의 가르침이 현대과학에 맞지 않는 교리가 있다면 석가모니의 과학정신을 받아들여 현대과학에 맞게 재해석하면 된다. 이와 같은 개혁은 석가모니의 원래의 가르침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지 결코 개혁이 아니다.

   이어서 다음은 각묵 스님의 깨달음에 대한 반론이다.

   “깨달음의 경지도 정확한 언어표현으로 표현돼야 한다. 비불교적인 언표를 사용하면서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대승이라느니 최상승이라느니 하는 것은 단지 감언이설일 뿐이다. 오히려 깨달음을 신비화하고 절대화하는 모순을 범하게 된다. 깨달음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느니 깨달아봐야 스스로 안다느니 하는 것도 깨달음을 호도하는 무지몽매한 말이라고 생각된다. 부처님께서는 불교의 창시자며 불자들의 스승이고 사표인 분이다. 그분 부처님께서는 결코 애매한 언표나 존재론적인 실체를 상정하는 어떤 언어표현도 사용하지 않으셨다.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은 사성제를 철견하는 것, 팔정도를 실현하는 것, 오온ㆍ12처ㆍ18계의 무상ㆍ고ㆍ무아를 통찰하는 것, 12연기를 순관ㆍ역관하는 것 등으로 명쾌하게 말씀하셨다. 부디 <대승기신론>과 같은 후대의 논서를 절대시해서, 그것을 바탕으로 초기불교를 잘못이해하거나 폄하하거나 깨달음을 절대화하는 듯한 태도는 버리기 바란다.”

   다음은 김나미 교수의 주장이다.
   “오늘 한국불교의 문제점 하나를 끄집어 들었다. 우리 불교는 깨달음과 이것에 기인한 수행 풍토로 인해 정도(正道)의 길을 잃었다. 한국불교는 깨달음이라는 묘원한 환상에서 벗어날 때도 됐다. 한마디로 하자면 깨달음 대신 열반이 모든 수행의 목적이 돼야 한다는 점이다. 깨달음에는 연기법에 대한 통찰이 요구되는 반면 열반은 팔정도 수행이 필요하다. 깨달음은 단지 열반의 선행 조건일 뿐이며, 깨달음의 단계부터 시작, 이것을 기반으로 최종의 궁극적 목표인 열반으로 나아가는 구도가 돼야 한다. 그러므로 수행을 한다면 그 수행이 목표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하고 목표 설정을 다시 해야 한다. 열반이 수행의 최종적이자 궁극적인 목적이다. 깨달음만을 수행의 목적으로 삼는 한, 수단과 목적이 전도된 채 삼독에 물든 중생으로 남을 것이다 .”
      



*꼬삼비(kosambi) 비구 사건---부처님이 성도하신 후 10 안거 때 인도 북부 꼬삼비 지역에서 승가의 분쟁이 일어났던 사건이다. 꼬삼비 지방의 고시따 수도원에는 각기 오백 명의 제자들을 거느린 학식과 덕망이 높은 두 비구가 살고 있었다. 이 두 스승 비구 중 한 비구는 계를 가르치는 율사였고, 다른 한 비구는 경을 가르치는 강사(講師)였다. 그런데 이 둘 사이에 사소한 문제로 시작된 분쟁은 두 비구 집단 사이의 분쟁으로 확대됐고, 부처님의 만류조차 듣지 않았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분쟁하는 비구들에게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훈계하셨다. ― 맛찌마 니까야 <수번뇌경(隨煩惱經)>
    『다툼을 일삼는 자들은 여러 목소리를 내면서 아무도 자신이 어리석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승가가 분열할 때도 아무도 자신의 허물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현명한 대화는 잊어버리고 말꼬리만 물고 늘어진다. 입이 움직이는 대로 마음대로 지껄여 무엇에 이끌려 그러는지 그것을 모른다.
     “나를 욕했다, 나를 때렸다, 나를 이겼다, 내 것을 훔쳤다.”라는 이런 생각을 품은 자, 그들의 원한은 끝나지 않는다. 
     “나를 욕했다, 나를 때렸다, 나를 이겼다, 내 것을 훔쳤다.”라는 이런 생각을 품지 않는 자, 그들의 원한은 영원히 멈추리.
      참으로 이 세상 어디에서나 원한은 원한으로 결코 그치지 않는 법, 원한은 원한을 비움으로 그치게 되는 것이 만고의 진리이다. 여기서 우리가 제어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하니 이것을 아는 자들은 그 분쟁을 그만둘 것이다.
      뼈를 부수고, 생명을 빼앗고, 소와 말과 재물도 약탈하고, 왕국을 침략하는 그런 자들도 화합하는데, 어째서 그대들은 그러지 못하는가.
     만일 그대 믿는 지혜로운 벗과 현명한 도반을 만나거든 모든 위험을 극복하고 그와 함께 만족하고 마음챙기며 길을 가라.
     만일 그대 믿는 지혜로운 벗과 현명한 도반을 만나지 못하거든 왕이 정복한 영토를 버리고 떠나듯 홀로 가라. 마치 숲 속을 거니는 코끼리처럼. 차라리 혼자 갈지언정 어리석은 자와 함께하지 말고 혼자서 가라. 악행을 하지 마라. 마치 초연하게 숲 속을 거니는 코끼리처럼.』
    이 게송을 남기신 뒤 부처님은 홀로 꼬삼비를 떠나 빠릴레이야까(Parileyyaka)숲으로 들어가셨다. 그러자 부처님의 충고도 듣지 않는 스님들의 행동에 분개한 재가자들이 석 달 안거 동안 꼬삼비 승가에 대한 공양을 거절했고, 석 달 동안 고생을 한 비구들은 안거 후 부처님을 찾아가 사죄를 하게 된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다음의 게송을 읊으셨다.
    “만일 진실하고 지혜로우며 덕 높은 벗을 만나거든 그와 함께 즐겁게 살며,
     마음 집중을 잘 수행해 삶의 모든 위험으로부터 벗어나라.
    그러나 만일 진실하고 지혜로우며 덕 높은 벗을 만나지 못하거든 마치 왕이 한번 점령한 땅을 미련 없이 포기하듯 홀로 자유로이 살아가라 …
    그럴 때는 차라리 홀로 살아가라. 어리석은 자와는 벗이 될 수 없느니라. 다만 홀로 살아갈지니 악행을 범함이 없이 자유로이 숲속을 거니는 저 코끼리처럼.“
      
*꼰단냐(빠알리어 안나 콘단냐/Aññā Koṇḍañña)---카운딘야(Kauṇḍīnya)라고도 하며, 한역해서 교진여(憍陣如) 혹은 아야교진여(阿若憍陳如), 구린(拘隣)이라 하기도 한다. 부유한 바라문 가문 출신으로 관상학의 대가였던 그는 태자가 정등각자가 될 것을 예견하고 출가하기를 기다렸다가 다른 네 명과 함께 출가했으며, 이들을 다섯 비구라고 한다. 즉, 석가모니가 출가한 뒤 정반왕(淨飯王)이 석가모니의 소식을 알기 위해 밀파한 다섯 사람, 석가모니를 수행해서 함께 고행을 했던 다섯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다.
    부처님 초전법륜(初轉法輪) 당시 다섯 비구 중 최초로 깨달음을 증득한 사람이다. 당시 부처님은 “꼰단냐는 깨달았다-완전하게 알았다(aññasi vata bho koṇḍañño)”라고 두 번이나 외치셨다고 하며, 그래서 그는 안냐꼰단냐(완전하게 안 꼰단냐)로 불리게 됐다. 그리고 5일 뒤에 <무아상경(無我相經, Anattalakkhaṇa-sutta)-S22i59>을 듣고 아라한이 됐다고 하며,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첫 번째 비구이기도 하다.

    그래서 <앙굿따라 니까야> 일집(AⅠ:14:1-1)에서 ‘구참 비구 제자들 가운데서 으뜸’으로 불리고 있다. 꼰단냐 존자는 혼자 한거하기를 좋아해 대중처소에는 아주 드물게 나타났으며, 부처님보다 먼저 히말라야의 찻단따숲(chaddanta-bhavana)에서 반열반에 들었다고 한다.---→초전법륜(初轉法輪, Dhamma-cakka-pavattana), 다섯 비구(五比丘) 참조.
       
*꿈반다(Kumbhanda)---부단나(富單那)라 한역한다. 초기경전에 나오는 불교를 수호하는 천신의 일종으로 프레타(Preta)와 더불어 수미산 남쪽에 거주하며, 남섬부주(南贍浮洲)와 사찰의 남쪽을 지키는 증장천왕(增長天王)의 권속이다. 수미산 남쪽에서 증장천왕의 통치를 받는 꿈반다는 숲이나 산에 감추어진 보물을 관리하는 천신으로 큰 위신력을 지니고 있어, 우리가 건강하고 행복하도록 보호해 준다고 한다. 원래 꿈반다(Kumbhanda)는 배가 부른 모습을 하고 욕심이 매우 많은 아귀로서 사람의 정기를 빨아먹는 귀신이었으나 불교에 귀의해 증장천왕 부하의 천신이 됐다.
        
*끽다거(喫茶去)---‘차나 한 잔 마시라’는 말이다. ‘끽다(喫茶)’는 차를 마시라는 말이고, 거(去)는 명령형 조사이다. 당나라 때 ‘무(無)’자 화두로 유명한 조주 종심(趙州從諗, 778~897) 선사가 차(茶)를 선(禪)의 경지로 끌어올리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선문답에 유래된 말이다. 그리하여 끽다거(喫茶去)는 다선일미(茶禪一味), 다선일여(茶禪一如)의 극치를 보여주는 꽤 까다로운 공안으로 유명하다.
     「봄에는 아름다운 온갖 꽃이 만발하고 가을에는 밝은 달이 비추네.
        여름에는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고 겨울에는 흰 눈이 날리도다.
       쓸데없는 생각만 마음에 품지 않으면 이때가 인간세상의 좋은 시절이로다.
       春有百花秋有月 夏有凉風冬有雪
       若無閑事掛心頭 便是人間好時節」
    조주 선사의 오도송(悟道頌)이다. 깨달음을 얻게 되면 형식이나 절차에 구애받지 않는 법이다. 따라서 문답도 격식이나 예상을 뛰어넘는다.
    조주 선사가 나이 80에서 120세에 입적할 때까지 관음원(觀音院)에 머물던 때의 일이다. 어떤 수행승 두 사람이 그를 찾아와 절을 올리며 이렇게 물었다.
     “불법의 큰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에 조주 선사는 대답 없이 되물었다.
     “전에 이곳에 온 일이 있었는가?” 하시니, 한 수좌가 대답하되,
     “와 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하니, 선사께서 말씀하시되,
     “그럼 끽다거(喫茶去) - 차나 한 잔 마시게”라 하셨다. 그리고 옆에 같이 온 수행승에게 물었다.
     “그대는 이곳에 와 본 적이 있는가?” 그러니 그 수행승은 답했다.
     “예, 전에 한번 와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자 선사는 또 말했다.
     “그럼 자네도 차 한 잔 들게나(喫茶去).”라고 했다.
    그러자 그 선문답을 듣고 있던 원주(院主)가 의아해 하며 선사께 여쭈었다. “스님께서는 와 본 적이 있다는 수행자에게도 차를 권하고, 와 본 적이 없다는 수행자에게도 똑같이 차를 권하시니 어인 일입니까?” 그러자 원주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선사가 큰 소리로 원주! 하고 불렀다. 이에 놀란 원주가 엉겁결에 예! 하고 대답을 하니, 선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원주, 그대도 차 한 잔 들게나(喫茶去).” 그러자 이번에는 옆에 있던 시자(侍子)가 말했다.
     “스님께서는 누가 무엇을 물어도 끽다거 하시는데, 도대체 요령이 통하지 않는 그런 말이 어디 있습니까?” 이에 조주 선사는 말했다.
     “옳도다. 너도 끽다거(喫茶去)!” 그 순간 시자는 문득 활연대오(豁然大悟) 득도(得道)했다고 한다. 곧 넓게 트인 골짜기처럼 마음이 활짝 열리고 큰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이다.
    한 잔의 차를 마시는 것은 같을지라도 마시는 사람에 따라서 그 찻잔을 만지는 따스함도 느끼는 차맛도 즐기는 차향도 약간씩은 다르듯이 깨달음도 스스로 깨우치라고 조주 선사가 끽다거(喫茶去) 한 것이다.
    이와 같이 조주 선사가 ‘차나 한 잔 마시라’고 한 것은 수행승들에게 주는 공안으로서, 일체의 관념과 분별을 다 여의고, 일체를 다 내려놓고, 쓸데없이 이런 저런 걸 묻지 말고, 차나 한 잔 마시고 가라. 네가 묻고 싶고, 듣고 싶은 말은 너 속에 다 들어있는데, 엉뚱한 곳에 와서 뭘 묻고 찾으려 하느냐 하는 말인 듯하다. 그러니‘너의 주인공은 어디에 두었느냐, 정신 차려라’ 하는 뜻이기도 하다.

 

 

 

 

 

 

 

 

 

 

불교용어 9

*기(機)---‘근기(根機)’란 말을 줄여서 기(機)라고 한다. 근기(根機)란 부처님의 교학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말할 때 쓰인다. 즉,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고 교화될 수 있는 소질과 능력, 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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