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는 미워해도 왜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될까?
이 세상에 원한 없는 사람 있을까? 누구에게나 한명쯤은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원한의 마음을 가지고 살 수 없다. 원한의 마음을 내면 낼수록 악업만 증장된다. 어떻게 해야 원한의 마음을 제거할 수 있을까?
두번째로 독송한 경에서
10월 첫번째 금요니까야강독모임에서 두번째로 독송한 경이 있다. 그것은 ‘어떤 사람에 대한 원한을 제거하는 방법’에 대한 것이다. 이 경은 앙굿따라니까야 ‘원한의 제거에 대한 경1’(A5.161)을 말한다. 경에서는 다섯 가지 원한의 제거방법이 설명되어 있다. 요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그 사람에 대하여 자애를 닦아야 한다.
둘째, 그 사람에 대하여 연민을 닦아야 한다.
셋째, 그 사람에 대하여 평정을 닦아야 한다.
넷째, 그 사람에 대하여 새김을 놓아버리고 정신활동을 기울이지 않는다.
다섯째, 그 사람에 대하여 행위가 주인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이것이 그 사람에 대한 원한을 제거하는 방법이다. 사무량심 중에 세 개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기쁨이 빠져 있다. 왜 빠졌을까?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분노가 상대되는 사람을 향해서 아직 제거되지 않아 기쁨(mudita)이 없기 때문이다.”(Mrp.III.294)라고 했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원한 맺힌 자에게 기쁨이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정신활동을 기울이지 않는 것(asatiamanasikāra)
여기 원한 맺힌 자가 있다. 내돈을 떼먹고 달아난 자일수도 있고 나를 버리고 도망간 자일수도 있다. 그 사람, 그 인간의 얼굴이나 이름만 보아도 분노의 마음이 일어난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 부처님은 다섯 가지 처방을 내렸다. 원수같은 그 사람에게 자애(mettā), 연민(karuṇā), 평정(upekkhā), 정신활동을 기울이지 않는 것(asatiamanasikāro), 행위가 주인(kammassakatā)이라는 마음을 내야 한다는 것이다.
다섯 가지 중에서 ‘정신활동을 기울이지 않는 것’ 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 말은 빠알리어 아사띠마나시까라(asatiamanasikāra)를 번역한 말이다. 한마디로 ‘신경쓰지 말라’는 말과 같다.
원한 맺힌 자를 생각하지 하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다. 왜 그런가? 이는 마나시까라(manasikāra)라는 말이 영어로 ‘attention’의 뜻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사띠(asati: 無念)하라고 했는데 이는 주의를 기울이지 말라는 것이다. 그 사람에 대하여 주의 기울이지 않는 것이다.
행위가 주인이라는 사실을
원한 맺힌 자를 어떻게 해야 할까? 원수를 생각하면 할수록 분노의 마음만 일어날 것이다. 그래도 생각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수행승들이여, 어떠한 사람에 대하여 원한이 생겨나면, 그 사람에 대하여 행위가 주인이라는 사실을 이와 같이 ‘이 사람에게 행위가 주인이고. 행위가 상속자이고, 행위가 모태이고, 행위가 친족이고, 행위가 의지처이다. 선하거나 악한 행위를 하면, 그것의 상속자가 될 것이다.’라고 인식해야 한다. 이와 같이 하면, 그 사람에 대한 원한은 제거된다.”(A5.161)
다섯 가지 원한제거 수단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나온 것이다. 자애부터 시작하여 연민, 평정, 정신활동을 기울이지 않음을 해도 되지 않는다면 최후로 업이 자신의 주인임을 반조할 수 있음을 말한다. 이와 같이 업이 자신의 주인임을 반조하는 것은 자애의 마음을 내는 것 보다 더 강력하다고 볼 수 있다.
원한을 제거하려면 먼저 자애의 마음을 내는 것부터 닦아야 한다. 어떻게 자애의 마음을 닦아야 할까? 청정도론 자애수행편을 보면 자애수행은 단계적으로 설명해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자애수행 아홉 단계를 보면
자애수행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것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자신을 사랑하는 자가 남도 사랑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고통을 여의고 행복하기를!”라거나 “내가 원한 없이, 악의 없이, 근심 없이, 나 자신을 수호하기를!”(Vism.9.3)라며 자신에게 먼저 자애의 마음을 내야 한다.
자신에게 자애의 마음을 내면 원수도 사랑할 수 있다. 그러나 자애의 마음을 낸다고 하여 누그러지는 것은 아니다. 그럴 경우 단계적 자애수행을 해야 한다. 청정도론 자애수행편에서는 다음과 같이 아홉 단계로 설명되어 있다,
첫째, 화를 화로써 앙갚음하지 않는다.
둘째, 연민을 통해 적개심을 가라 않는다.
셋째, 자신을 훈계하여야 한다.
넷째, 업이 각자 자기의 주인임을 반조한다.
다섯째, 부처님이 전생에 인욕수행한 덕을 반조해야 한다
여섯째, 일체중생에 대하여 나를 한번쯤 낳아준 어머니로 생각한다.
일곱째, 자애수행의 열한가지 이익에 대하여 생각한다
여덟째, 존재를 나(我)나 나의 것이 아닌 오온, 12처, 18계의 요소로 본다.
아홉째, 보시를 통하여 성냄을 제거한다.
아홉 가지 중에서 네 번째 ‘업이 각자 자기의 주인임을 반조한다’라는 항목이 있다. 이를 ‘업자성정견(kammassakatādiṭṭhi)’이라고 한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 ‘원한의 제거에 대한 경’(A5.161)에서 다섯 번째 항목인 ‘업이 자신이 주인임을 반조하는 것’과 일치한다. 행위를 하면 반드시 과보가 따름을 말한다.
원한 맺힌 자에게 분노하면
원한 맺힌 자에게 분노의 마음을 내면 자신만 손해일 수 있다. 왜 그런가? 분노는 불선업이기 때문에 악업이 되어서 악업의 과보를 받을 수 있다. 이는 손해나는 행위에 해당된다. 손해나는 행위를 해서는 안된다.
내가 분노한다고 하여 상대방을 타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을까?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해법을 제시한다. 바로 그것이 자애수행 넷째에 해당되는 업이 각자 자기의 주인임을 반조하는 것이다. 그래서 “만약에 그가 이와 같이 자신에게 충고하더라도 분노가 그치지 않으면, 그렇다면 자신과 타인이 업의 주인임을 관찰해야 한다.”(Vism.9.23)라고 했다.
업이 자신의 주인임을 관찰하기 위해서는 자신과 타인의 업을 관찰해야 한다. 상대방의 업뿐만 아니라 나의 업도 관찰해야 함을 말한다. 먼저 나의 업에 대한 것이다.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이보게, 그대가 그에게 분노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 그대의 분노에 의한 업이 불익을 가져오지 않겠는가? 그대는 행위(業)의 주인이며 행위의 상속자이며 행위를 모태로 하는 자이며 행위를 친지로 하는 자이며 행위를 의지처로 하는 자이다. 그대는 그대가 행할 행위의 상속자가 될 것이다. 이 행위는 그대에게 결코 올바른 원만한 깨달음, 연각의 깨달음, 제자의 지평, 하느님, 제석천, 전륜왕, 지역왕 등의 지위 가운데 어떠한 지위도 성취할 수 없다. 단지 교단에서 떠나게 하고 음식찌꺼기나 먹는 축생 등의 상태에 이르게 하고 지옥에 태어나게 하는 등의 갖가지 고통을 겪게 하는 것이 행위이다. 그대는 이것을 행할 때, 양 손에 화염이 없는 숯불이나 똥을 쥐고서 타인에게 던지려고 하는 자처럼, 먼저 자신을 불태울 뿐만 아니라 악취나게 한다.”(Vism.9.23)
원한 맺힌 자에게 분노의 마음을 내거나 복수하는 것은 손해임을 말한다. 그 악한 마음으로 인하여 악업을 짓게 되어 악처에 떨어질 수 있음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화를 화로 갚는다든가 복수를 해서는 안될 것이다.
분노의 밥상은 받지 말아야
원한 맺힌 자에게 화를 내거나 복수하는 것은 악업을 짓는 행위가 된다. 이에 대하여 “숯불이나 똥을 쥐고서 타인에게 던지려고 하는 자”라고 했다. 이는 무슨 뜻일까? 숯불을 던지려 하지만 그가 받지 않는다면 내 손만 타 들어 갈 것이다. 그가 똥을 받지 않는다면 내 손에 든 똥으로 인하여 구린내가 날 것이다.
분노의 밥상은 받지 말아야 한다. 상대방이 분노한다고 하여 함께 분노하면 분노의 밥상을 받는 것과 같다. 상대방에게 분노의 타격을 가하지 못했을 때 고스란히 내가 받게 된다. 설령 상대방에게 복수의 타격을 가했다고 하더라도 악업이 되어서 내가 받게 된다면 나만 손해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원한 맺힌 자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원한 맺힌 자에게 분노하거나 복수하면 나만 손해난다. 그럴 경우 원한 맺힌 자의 업을 생각해야 한다. “이 사람에게 행위가 주인이고. 행위가 상속자이고, 행위가 모태이고, 행위가 친족이고, 행위가 의지처이다. 선하거나 악한 행위를 하면, 그것의 상속자가 될 것이다.”(A5.161)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업보는 있지만 작자는 없다(有業報而無作者)
다섯 가지 원한제거 방법이 있다. 전재성 선생에 따르면 자애, 연민, 평정 이렇게 세 가지는 선정적 차원에 대한 해법이고, 정신활동을 기울이지 않는 것과 행위가 주인임을 반조하는 것에 대해서는 지혜적 차원의 해법이라고 했다.
다섯 가지 방법중에서 깜마쌋까따(kammassakatā)가 가장 강력한 원한 제거 방법일 것이다. 행위가 자신의 주인이고, 자신은 행위의 상속자로 보는 것이야말로 원한을 제거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보는 것이다. 왜 그런가? 가장 지혜로운 방식이기 때문이다. 이는 행위와 행위자는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 원한 맺힌 자가 있다. 나는 그 사람에 대하여 원한을 갖는다. 그러나 그 사람에 대하여 원한을 갖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왜 그런가? 악행을 한 자는 없기 때문이다. 다만 있다면 행위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 사람을 미워하지 말고 죄를 미워하라고 했다.
대승경전 잡아함경에 제일의공경(第一義空經, 잡아함 13권 335경)이 있다. 제일의공경에서 핵심적인 구절은 “업보는 있지만 작자는 없다. (有業報而無作者)”라는 말이다. 이 말은 행위와 행위자가 일치하지 않음을 말한다. 연기법적으로 본다면 당연한 것이다.
연기법에서는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있어서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조건발생의 연속이기 때문에 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행위는 분명히 있다. 행위에 대한 과보가 상속됨으로 인하여 연속성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업보는 있지만 작자는 없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청정도론에도 유업보이무작자(有業報而無作者)론과 유사한 내용이 있다. 이는 “원인 이외에 행위자를 발견하지 못하고 이숙의 생성 이외에 이숙의 향수자를 발견하지 못한다.”(Vism.19.19)라고 말로 알 수 있다. 행위는 있지만 행위자가 없음을 말한다. 그래서 이런 게송이 있다.
“행위의 행위자는 없고, 또한
이숙의 향수자도 없다.
단지 사실만이 일어난다.
그것만이 올바른 봄이다.”(Vism.19.20)
행위와 행위자도 없고 이숙의 향수자도 없다고 했다. 이는 니까야를 근거로 한 게송이다. 상윳따니까야 ‘아쩰라 깟싸빠의 경’(S12.17)에 따르면, 행위하는 자와 경험하는 자가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라고 했다. 만약 같은 것으로 본다면 영원주의가 되고, 다른 것으로 본다면 허무주의가 된다고 했다. 이는 양극단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양극단을 떠나 중도를 설한다고 했다. 이는 연기법으로 나타난다.
분노하거나 복수해서는 안되는 이유
흔히 불교를 무아의 종교라고 말한다. 이는 연기법적으로 가능한 것이다. 조건발생하기 때문에 나라라고 할 만한 것이 없어서 무아인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그 어떤 존재도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반드시 관계로 존재함을 말한다. 이는 연기송 정형구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겨나므로 저것이 생겨난다.”라는 전송으로도 알 수 있다.
연기법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라는 ‘상호의존적 연기’와 ‘이것이 생겨나므로 저것이 생겨난다’는 ‘조건발생적 연기’로 구성되어 있다. 이와 같은 연기법에서는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있다면 관습적으로 부르는 개념화된 나는 있을 것이다.
니까에서는 행위자와 향수자는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라고 했다. 이는 우리가 연기적 존재임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대승경전 잡아함경 제일공의경에서는 유업보이무작자(有業報而無作者)라 하여 “업보는 있지만 작자는 없다.”라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원한은 있지만 원한 맺힌 자는 없는 것이 된다.
원한은 분명히 있다. 이는 다름 아닌 행위인 것이다. 그러나 행위자는 없다는 것이다. 있다면 그때 행위한 자는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 자가 지금의 그 자라고 볼 수 없다. 그 자는 옛날의 그 조건일 때 그 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한 맺힌 자에게 분노하거나 복수해서는 안된다.
죄는 미워해도 사람을 미워해서는
있지도 않은 자에게 분노할 수 없다. 행위만 남아 있고 행위자는 없는데 어떻게분노하거나 복수할 수 있을까? 만약 원한 맺힌 자에게 분노한다면 아마도 허깨비에게 분노하는 것과 같이 된다. 연기법에 따르면 행위는 있지만 작자는 없기 때문이다.
지혜 있는 자라면 행위의 과보를 생각해야 한다. 행위가 그 사람의 주인이고, 그 사람은 행위의 상속자라고 보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행위는 있지만 작자는 없게 된다. 결국 행위의 상속자가 과보를 받게 될 것이다.
그가 과거에 악행을 했다면 악행에 대한 과보를 받을 것이다. 굳이 미워하거나 분노하거나 복수하지 않아도 악행에 대한 과보는 받게 되어 있다. 그래서 죄는 미워해도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된다고 했나보다.
2021-10-17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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