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보와 마음 (이중표 교수 근본불교에서 발췌)
세존은 업業이 반드시 보報를 가져온다고 생각했다. 자이나교에서는 그러한 업을 괴로운 결과를 필연적으로 야기하는 물질적 실체로 보았다. 그러나 세존은 업을 마음에서 일어나 마음을 형성하는 우리의 삶으로 보았다. <중아함 사경思經>에서 세존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그 때 세존께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했다. "만약 고의로 지은 업業이 있으면, 현세에 받든 혹은 내세에 받든, 그는 반드시 그 보報를 받는다고 나는 말한다. 만약 고의로 지은 업이 아니면 그는 보報를 받지 않는다고 나는 말한다."
업은 인간의 행위, 즉 삶이다. 우리는 의도 없이 다른 생명을 죽일 수도 있다. 만약 업이 실체성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가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부지불식간에 행한 악업에 의해서 괴로움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업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業의 결과 즉, 報는 마음의 상태로 나타난다. 우리의 삶은 마음에서 비롯되며, 삶을 통해 마음은 항상 새롭게 형성되고 있다. 이렇게 마음에서 비롯된 삶이 업이고, 삶을 통해 새롭게 형성된 마음이 報이다. 세존이 이야기하는 업보는 삶을 통해 끊임없이 변화해 가는 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마음이 업에 따라 형성되는 것을 연기한다고 말하고, 실체성이 없기 때문에 무아無我라고 말한다. 이러한 마음은 결코 바라문교의 '아트만'도 아니고 자이나교의 '명아(Jiva)'도 아니며, 우리가 생각하는 '영혼'도 아니다. 지금 여기 살아 움직이는 우리의 삶이 곧 마음이다. 이 마음에서 갖가지 중생의 세계도 일어나고, 부처의 세계도 나타난다.
우리가 착하게 살아야 하는 까닭은 착한 삶을 통해 즐거운 마음이 형성되기 때문이며, 악한 삶을 살아서는 안되는 까닭은 악한 삶을 통해 괴로운 마음이 형성되기 때문이다.세존이 '고의로 업을 지은면 반드시 그 보를 받는다'고 이야기한 것은 업을 지어서 그 보를 받는 불변하는 실체가 있어서 업을 짓고 보를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비롯된 업을 지으면 그 결과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마음의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이것이 세존이 이야기하는 자업자득이다.
<중아함 염유경>에서는 이러한 마음의 변화를 다음과 같은 비유로 보여 준다.
그 때 세존꼐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했다. "사람은 지은 業에 따라 그 報를 받는다. 그래서 범행梵行을 실천하지 않으면 괴로움을 없앨 수 없고, 범행을 수행하면 곧 괴로움을 없앨 수 있다." ... 중략...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적은 양의 물 속에 한 냥의 소금을 넣어서 물을 마실 수 없이 짜게 하려 한다고 하자. 이 한 냥의 소금이 적은 양의 물을 마실 수 없이 짜게 할 수 있겠느냐?"
대답하여 말했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소금은 많고, 물은 적기 때문에 마실 수 없이 짜게 할 수 있나이다."
"이와 같이 착하지 않은 업을 지으면 반드시 괴로운 과果를 받되 지옥의 보報를 받는 사람이 있다. 어떤 것을 착하지 않은 업을 지으면 반드시 괴로운 果를 받되 지옥의 보를 받는 사람이 있다고 하는 것인가? 몸을 닦지 않고, 계戒를 닦지 않고, 마음을 닦지 않고, 지혜를 닦지 않은 사람이 (악업을 지어) 수명이 극히 짧으면, 이 사람은 착하지 않은 업을 지어 반드시 괴로운 과를 받되 지옥의 보를 받는다고 하는 것이다." ...중략...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한 냥의 소금을 갠지스 강물 속에 넣어서 물을 마실 수 없이 짜게 하려 한다고 하자. 이 한 냥의 소금이 많은 양의 물을 마실 수 없이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요. 왜냐하면 갠지스 강물은 많고, 한 냥의 소금은 적기 때문에 마실 수 없이 짜게 할 수 없나이다. "
"이와 같이 착하지 않은 업을 지으면 반드시 괴로운 과를 받되 현법現法(현세)의 보를 받는 사람이 있다. 어떤 것을 착하지 않은 업을 지으면 반드시 괴로운 과를 받되 현법의 보를 받는 사람이 있다고 하는 것인가? 몸은 닦고, 계를 닦고, 마음 닦고, 지혜를 닦은 사람이 (악업을 지어도) 수명이 극히 길면, 이 사람은 착하지 않은 업을 지어 반드시 괴로운 과를 받되 현법의 보를 받는다고 하는 것이다. "
이 경에서 물은 마음에 비유한 것이고 소금은 업에 비유한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평소에 닦은 선행으로 충만해 있으면 조그만 악행은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악행으로 가득 차 있으면 조그만 악행도 큰 괴로움을 일으키게 된다. 이와 같이 업은 그 자체가 어떤 결정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에 따라 각기 다른 결과로 나타난다는 것이 이 경의 요지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업은 마음에서 비롯되어 새로운 마음을 형성시킨다. 業은 마음에서 일어나고 그 報로서 새로운 마음이 형성되므로 업보는 곧 마음이다. 대승불교의 유식사상은 이러한 업설을 계승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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