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해가 바뀌었습니다, 세월이 금이 그어져 낡은 것과 새것이 있는 건 아니지만,
거듭거듭 향상과 형성의 길로 나아가야 하기 때문에 해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결의를 다지게 됩니다.
그래서 시작도 끝도 없는 시간을 쪼개어 날을 만들고 달을 만들며 해를 만들어 놓은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요즘 세상은 현기증이 날 만큼 복잡하고 다양하게 격변해가고 있습니다.
제정신을 차리지 않고는 내가 내 인생을 자주적으로 꾸려가기 어려울 지경입니다,
불쑥불쑥 예고 없이 닥치는 일들을 대처하고 극복하는 데에 번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 길인지, 어떤 선택이 지혜로운 결단인지 제대로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돌아가 의지할 곳이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바른 믿음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가치 판단의기준이 있으면 크게 흔들리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지요.
불자란, 더 말할 것도 없이 부처님의 제자란 뜻입니다.
불.법.승 삼보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 험난하고 어지러운 세상에서 부처님과 같은 성인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게 된 것은 생각 할수록
참으로 고맙고 다행 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은 어짜피 무엇인가 믿고 의지해 살아가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존재인데,
인류 역사상 뛰어난 성인의 가르침을 만나게 된 것이 어찌 고맙고 다행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경전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 몸 받기 어렵고 , 불법 만나기 어렵고, 정법 만나기 어렵다."
우리가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이 지구에는 수없이 많은 생물이 있습니다. 그 전체 생물 가운데서 사람은 극히 적은 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45억 이나 되는데도 그렇다는 말이지요. 그 가운데 하나가 '나'라는 사람이니 얼마는 아슬아슬한 비율입니다.
모기나 파리, 개미나 벌레 , 새나 짐승으로 태어나지 않고 사람의 몸을 받았으니 얼마나 고맙고 다행한 일입니까.
인관관계로 보아 , 일찍이 우리는 사람의 업을 익혀 지금 사람 몸을 받은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람답게 살지 않으면 이 다음에는 사람으로 태어날 기약이 없습니다.
생각하면 무서운 일이지요.
2.
또 이 세상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가르침과 종교가 있습니다.
그 많은 가르침과 종교 중에서 불교를 믿고 의지 하는 사람만은 그 일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는 불교만이 가장 뛰어난 종교라고는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 대한 자각을 불교처럼 투철히 가르친 종교는 없습니다.
마음이 곧 부처이고, 부처란 곧 마음이란고 합니다.
마음 밖에서 찾지말라는 것입니다.
외부에 절대적인 존재를 가설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이 이미 이루어진 부처이니 순간순간 부처답게 살라는 것 아닙니까.
부처란 밝은 마음이고 깨어 있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눈을 뜬 사람이 어째서 다시 눈을 감으려고 하고 , 밝은 마음을 가지고 왜 어두운 짓을 하려고 하는가,
이것이 부처님과 조사들의 한결같은 가르침입니다.
이같이 명쾌하고 당당한 가르침을 만나기란 결코 작은 인연이 아닙니다.
이런 불법을 만나게 된 인연에 나는 거듭거듭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불법 만나기가 어렵다고 했지만 정법 만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물론 불법과 정법이 같은 뜻이요,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흔히 불교에 그릇 안주하기 쉽기 때문에 따로 정법을 강조한 것입니다.
다른 나라의 일은 그만두라고라도 우리 나라의 경우 불교 신자는 전체 종교 인구의 37.4 퍼센트인 1천 113 만명이나 됩니다.
이 통계는 1982년 1월 1일 현재 정부의 직속기관인 사회정화위원회가 조사한 자료에 의한 것입니다.
천백만이 넘는다니 어마어마한 숫자입니다.
그런데 이 많은 불교 신자 (물론 출가 승려도 포함해서) 가운데서 부처님의 '정법'을 믿고 따르는 신자는 과연 얼마나 될까요?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그 10분의 1 이나 될는지요.
그러면 정법이란 무엇일까요.
한마디로 말한다면 "자기 자신을 등불 삼고 법을 등불 삼으며, 자기 자신에 의지하고 법에 의지 하라"는 가르침 아니겠습니까.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기 전에 남기신 저 유명한 "자등명 법등명, 자귀의 법귀의" 의 법문입니다.
여기서 말한 자기 자신이란 분수 밖의 것을 탐하고 걸핏하면 화내고 남을 미워하거나 시기하며,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할 만큼 콕 막혀 있는 어리석은 일상의 내가 아니라, 본래부터 청정하고 신령스런 그 '나'를 가리킵니다.
앞에서 말한 밝은 마음과 깨어 있는 자신입니다.
그런 자기 자신에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또, 법을 등불 삼고 법에 의지 하라는 그 법이란 진리이고, 도리이고, 부처님이 가르친 교법을 말합니다.
우리들이 때때로 경험 하듯이 무엇이 허망 하니 덧 없느니 해도 사람처럼 허망하고 덧없는 존재가 또 어디에 있습니까.
변화 무상한 것이 우리들의 마음이고 그 마음의 탈을 쓴 사람입니다.
설사 부처님이라 할지라도 그는 덧없고 허망한 존재입니다.
결국은 내가 아닌 타인입니다. 또한 자기 자신이 몸소 부처의 구실을 해야 합니다.
경전마다 한결같이 "법에 의지하고 사람에게 의지하지 마라" 는 가르침도 바로 그런 소식입니다.
영원한 진리에 의지할 것이지, 변덕 많고 예측할 수 없고 처음과 끝이 한결 같지 않은 사람에게 의지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3.
우리가 정법을 믿고 의지 한다는 것은 방금 말한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청정한 자성을 등지고 무엇에 의지한다거나 또는 법답지 않는 일에 얽혀든다면 그는 정법에서 벗어난 사이비 불자입니다.
누구나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불교에 귀의한 지 오래된 사람 가운데는 스님이나 신도를 가릴 것 없이,
부처님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먼 저마다 "자기식 불교" 를 만들어 가지고 그 속에 갇혀서 사는 일이 많습니다.
절에서 흔히 불사의 이름으로 열리는 그 많은 행사도 속이 빤히 들여다 보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신도들을 교화하더라도 부처님의 정법에 의지해 법답게 떳떳하게 교화해야 합니다.
정법에 귀의한 불자들은 이런 일에 더 속아서는 안 됩니다.
그릇된 일에 동참하는 것은 그릇된 일을 함께 거드는 공범자입니다.
불자란 앞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청정한 삼보에 귀의하여 부처님의 올바른 가르침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삼보에 귀의한 불자에게는 "내 스님" "네 스님" 이 있을 수 없고,
"내 신도" "네 신도" 도 있을 수 없습니다.
어떤 스님의 가르침을 인연으로 불교에 귀의 했다 할지라도 그 스님은 내 스님이 아니고 삼보 중의 하나인 승보입니다.
승보는 만인의 승보이지 어떤 특정한 개인의 것이 아닙니다.
또 어떤 절 어떤 스님이 어떤 신도를 교화한다고 해서 그 신도가 그 스님의 신도는 아닙니다.
다 같이 평등한 불교 신도요, 불자일 뿐이지요.
내 스님 네스님 하다가는 허망한 꼴을 당하기 일쑤이고, 내 신도 네 신도 하다가는 망신 당한 경우 또한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불자는 법에 의지 하지 사람에게 의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친김에 한 가지 더 말하지요.
신도들은 법다운 집회 외에는 일 없이 절에 자주 나오지 않는 게 피차 이로운 일입니다.
집안 살림살이도 바쁘고 어려울 텐데 절 살림까지 참견할 필요는 없습니다. 굶어 죽었다는 스님 보았습니까,
공연히 절에 자주 드나들기 때문에 볼 것 안 볼 것, 들을 소리 안 들을 소리 들으면서 없는 신심 떨어지기 알맞습니다.
스님들도 생업과 가사에 바쁜 신도들에게 일 없이 전화질 해서는 안 됩니다.
한 때라도 온갖 반연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을 철저히 응시하고 점검할 수 있는 시간도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수행자로서 빛이 바래 자신이나 타인에게 이로울게 하나도 없습니다.
부처님의 법을 만났으면 그 가르침대로 살아야 합니다,
사는 일이 곧 정진입니다.
정진은 저마다 자기가 몸담고 있는 그 자리에서 해야 합니다.
삶을 개선해 가면서, 그 질을 높이는 것이 참 정진입니다.
일상생활 밖에서 정진할 데가 어디 따로 있습니까.
사람이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향상의 길로 나아갈 때를 말합니다.
청정한 자기 자신에 의지하고 , 올바른 가르침인 정법에 따라 떳떳하게 사는 사람만이 진실한 불자입니다.
새해에는 우리 모두가 정법 안에서 끝없이 향상하기를 빕니다.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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