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관사상

[스크랩] 10. 불과 장작을 관찰하는 장[觀燃可燃品] 16偈

수선님 2018. 3. 11. 12:38

10. 불과 장작을 관찰하는 장[觀燃可燃品] 16

 

[] 취착과 취착하는 자가 있다. 마치 불과 장작이 있듯이. 불은 취착하는 자이고 장작은 취착 즉 5[]이다.

[]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불과 장작이 모두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불과 장작이 한 법()으로 성립한다고 하든 두 법으로 성립한다고 하든 둘 다 성립하지 않는다.

[] 같음[一法]과 다름[異法]은 일단 제쳐놓더라도, 만약 불과 장작이 있지 않다면 이제 어떻게 같음[一相]과 다름[異相]으로 타파할 수 있겠는가? 마치 토끼의 뿔이나 거북이의 털은 있지 않기 때문에 타파될 수 없듯이. 세간에서 눈에 사물이 실재하는 것이 보여야 이후에 사유할 수 있는 것이다. 마치 금이 있고 난 이후에 달굴 수 있고 두드릴 수 있는 것처럼. 만약 불과 장작이 있지 않다면 같다거나 다르다고 사유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그대가 같음과 다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불과 장작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약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것은 이미 있다[已有]’는 것이다.

[] 세속의 법을 따라서 언설(言說)하는 것이니 과실이 있을 수 없다. 불과 장작이 같다고 말할 때도 다르다고 말할 때도 (그것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세속의 언설이 없이는 논증할 길이 없다. 불과 장작을 말하지 않고서 어떻게 (그것들의 있다는 것을) 타파할 수 있겠는가? 말하는 일이 없이 주장을 표명할 수는 없다. 가령 어떤 논자가 있음[]과 없음[]을 타파하려 한다면 반드시 있음과 없음을 말해야 한다. 있음과 없음을 언표했다고 해서 있음과 없음을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세간의 언설을 따르는 것이기에 과실이 없다. 만약 입으로 말했다고 해서 이것이 곧 인정하는 것이라면, 그대가 타파한다는 말을 하자마자 그 말이 타파되어야 할 것이다. 불과 장작도 이와 같다. (불과 장작이란) 말을 하더라도 (그것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같음[一法]과 다름[異法]으로 불과 장작을 사유한다면 둘 모두 성립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만약 불이 곧 장작이라면 행위와 행위자는 하나일 것이네.

만약 불이 장작과 다르다면 장작을 떠나서 불이 있을 것이네. (1)

 

불은 태우는 것[]이고 장작은 태워지는 것[可燃]이다. 짓는 자[作者]는 사람이고 지음[]은 행위[]이다. 만약 불과 장작이 하나라면 행위와 행위자도 하나일 것이다. 만약 행위와 행위자가 하나라면 도공과 도자기는 하나일 것이다. 행위자는 도공이고 행위는 도자기인데 어떻게 하나이겠는가? 그래서 행위와 행위자가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불과 장작도 하나가 아니다. 만약 하나일 수 없으니 다른 것이리라고 말한다면, 이것 또한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약 불과 장작이 다르다면 장작을 떠나서 따로 불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장작이다’, ‘이것은 불이다하고 분별하면 곳곳에 장작을 떠나 불이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다름 또한 있을 수 없다.

 

이와 같이 항상 타오를 것이네.

장작에 의존하지 않고서 생길 것이니

불을 지피는 노력이 없을 것이네.

또한 지음이 없는 불이라 해야 할 것이네. (2)

 

또 만약 불과 장작이 다르다면 불은 장작에 의존하지 않고서 항상 타오를 것이다. 만약 항상 타오른다면 스스로 그 본체에 머무는 것이 된다. 인연에 의지하지 않으니 사람의 노력이 공허할 것이다. 사람의 노력이란 불을 지켜서 타오르게 하는 것이다. 이 노력이 지금 분명히 있다. 그러므로 불이 장작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안다. 또 만약 불이 장작과 다르다면 불은 지음[]이 없을 것이다. 장작을 떠나 불은 어디에서 타오르겠는가? 만약 그렇다면 불은 지음이 없을 것이다. 지음이 없는 불은 있을 수 없다.

[] 왜 불이 인연에서 생기지 않을 때 사람의 노력도 공허하다고 하는가?

 

[] 불이 장작에 의존하지 않는다면 뭇 연()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네.

만약 불이 항상 타고 있다면 사람의 노력은 공허하게 될 것이네. (3)

 

만약 불과 장작이 다르다면 장작에 의존하지 않고서 불이 있을 것이다. 만약 장작에 의존하지 않고서 불이 있다면 서로 의존하는 법이 아니다. 그러므로 인연에서 생기지 않는다. 또 만약 불이 장작과 다르다면 항상 타고 있을 것이다. 만약 항상 타고 있다면 장작[可燃]을 떠나 따로 불이 있는 것이 보일 것이다. 다시 사람의 노력을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만약 지금 타고 있는 것을 장작이라 말한다면

그 때는 장작이 있을 뿐인데

어떤 것으로 장작을 태우겠는가? (4)

 

만약 먼저 장작이 있어서 지금 타고 있는 것을 장작이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만약 불을 떠나 따로 장작이 있다면 어떻게 지금 타고 있는 것을 장작이라 하겠는가?

 

만약 다르다면 다다르지[] 못하네.

다다르지 못한다면 타지 못하네.

타지 않으니 꺼지지 않네.

꺼지지 않으니 상주할 것이네. (5)

 

또 만약 불이 장작과 다르다면 불은 장작에 다다르지 못할 것이다. 왜 그러한가? 서로 의존하지 않고서 성립하기 때문이다. 만약 불이 의존하지 않고서 성립한다면 스스로 그 자체에 머무는 것이 된다. 그러니 어디에 장작을 쓰겠는가? 그러므로 다다르지 못한다. 다다르지 못한다면 장작을 태우지 못한다. 왜 그러한가? 다다르지 않고서 태우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타지 않으면 꺼지지 않으니 자체에 상주할 것이니, 이것은 옳지 않다.

 

[] 불은 장작과 다르니 장작에 다다를 수 있네.

마치 이 사람이 저 사람에게 다다르고

저 사람이 이 사람에게 다다르듯이. (6)

 

불은 장작과 다르기 때문에 장작에 다다를 수 있다.

마치 남자가 여자에게 다다르게 여자가 남자에게 다다르듯이.

[] 만약 불과 장작 둘이 모두 서로 떨어져 있다면

그렇다면 불은 저 장작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이네. (7)

 

만약 불을 떠나 장작이 있고 장작을 떠나 불이 있어서 독립적으로 성립하고 있다면 그렇다면 불이 장작에 다다를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왜 그러한가? 불을 떠나서 장작이 있지 않고 장작을 떠나서 불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남자를 떠나서 여자가 있고 여자를 떠나서 남자가 있다. 그러므로 그대의 비유는 잘못되었다. 비유가 성립하지 않으니 불은 장작에 다다르지 않는다.

[] 불과 장작은 서로 의존해서 있다. 장작에 의존해서 불이 있고 불에 의존해서 장작이 있다. 두 법은 서로 의존해서 성립한다.

 

[] 만약 장작에 의존해서 불이 있고 불에 의존해서 장작이 있다면

어느 것이 먼저 확정돼 있기에 불과 장작이 있는 것일까? (8)

 

만약 장작에 의존해서 불이 성립한다면 또한 불에 의존해서 장작이 성립할 것이다. 이 중에서 만약 장작이 먼저 확정돼 있다면 장작에 의존해서 불이 성립할 것이고, 만약 불이 먼저 확정돼 있다면 불에 의존해서 장작이 성립할 것이다. 이제 만약 장작에 의존해서 불이 성립한다면, 먼저 장작이 있은 이후에 불이 있을 것이니 불에 의존해서 장작이 있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장작이 전에 있고 불이 후에 있기 때문이다. 만약 불이 장작을 태우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장작이 성립하지 않는다. 또 장작은 다른 곳에 있어도 불을 떠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장작이 성립하지 않는다면 불도 성립하지 않는다. 만약 전에 불이 있고 후에 장작이 있다면 불 또한 이와 같은 과실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불과 장작은 두 가지 모두 성립하지 않는다.

 

만약 장작에 의존해서 불이 있다면

불은 성립하고 나서 다시 성립하는 것이네.

그렇다면 장작에 불이 없는 것이네. (9)

 

또 만약 장작에 의존해서 불이 성립한다고 주장한다면 불은 성립하고 나서 다시 성립하는 것이다. 왜 그러한가? 불은 불 속에 스스로 머문다. 만약 불은 그 자체에 스스로 머무는 것이기에 장작에 의지해서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 불은 장작에 의지해서 성립하는 것이다. 지금은 불이 성립하고 나서 다시 성립하는 것이니, 이와 같은 과실이 있다. 또 장작에 불이 없는 과실이 있다. 왜 그러한가? 장작이 불을 떠나 스스로 그 자체에 머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과 장작이 서로 의존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만약 어떤 법[]이 의존함을 성립시킨다면 이 법은 다시 의존함을 성립시키네.

지금은 의존함이 없으니 또한 성립하는 법이 없네. (10)

 

또 만약 어떤 법이 의존함을 성립시킨다면 이 법은 다시 본래의 의존함을 성립시킨다. 이와 같이 결정돼 있는 것이니 (의존하는) 두 법이 있지 않다. 예를 들어 장작에 의존해서 불이 성립하고 다시 불에 의존해서 장작이 성립한다. 그러니 둘 모두 확정된 것[]이 없다. 확정된 것이 없기 때문에 얻을 수가 없다. 왜 그러한가?

 

만약 어떤 법이 의존해서 성립한다면 아직 성립하지 않았을 때 어떻게 의존하겠는가?

만약 이미 성립한 것이 의존한다면 이미 성립한 것이 어떻게 의존하겠는가? (11)

 

만약 어떤 법이 의존해서 성립한다면 이 법은 아직 성립하지 않은 것이다. 성립하지 않은 것은 있지 않은 것이다. 있지 않은데 어떻게 의존하겠는가? 만약 이 법이 이미 성립했다면 이 성립한 것이 어떻게 의존하겠는가? 이 두 가지6)는 모두 의존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가 앞에서 불과 장작은 서로 의존해서 성립한다고 말했는데,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장작에 의존해서 불이 있는 것이 아니네.

의존하지 않고서 있는 것도 아니네.

불에 의존해서 장작이 있는 것이 아니네.

의존하지 않고서 장작이 있는 것이 아니네. (12)

 

또 이제 장작에 의존해서 불이 성립하는 것이 아니다. 장작에 의존해서 불이 성립하는 것도 아니다. 장작도 이와 같아서, 불에 의존하는 것과 불에 의존하지 않는 것 두 가지 모두 성립하지 않는다. 이 과실은 앞에서 말한 바 있다.

 

불은 다른 곳에서 오지 않네.

불이 타는 곳에도 불은 있지 않네.

장작도 이와 같네.

그 밖의 것은 감과 옴에서 말한 바와 같네. (13)

 

또 불은 다른 곳에서 와서 장작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장작 속에도 불은 있지 않다. 장작을 쪼개 불을 구해 보아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장작도 이와 같다. 다른 곳에서 와서 불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불 속에도 장작은 있지 않다. 가령 이미 탄 것은 타지 않고, 아직 타지 않은 것은 타지 않고, 지금 타고 있는 것은 타지 않는다. 이 이치는 감과 옴에서 말한 바 있다.

 

장작은 불이 아니네. 장작과 다른 곳에 불이 있는 것이 아니네.

불은 장작을 소유하지 않네. 불 속에 장작이 있는 것이 아니네.

장작 속에 불이 있는 것이 아니네. (14)

 

그러므로 장작은 불이 아니다. 왜 그러한가? 앞에서 이미 행위와 행위자가 하나일 때의 과실을 말했기 때문이다. 장작과 다른 곳에 불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항상 타는 등의 과실이 있기 때문이다. 불은 장작을 소유하지 않는다. 불 속에 장작이 있는 것이 아니다. 장작 속에 불이 있는 것이 아니다. 다름의 과실이 있기 때문에 세 가지7) 모두 성립하지 않는다.

[] 무엇 때문에 불과 장작을 말하는가?

[] 장작에 의존해서 불이 있듯이 취착에 의존해서 취착하는 자가 있다. ‘취착이란 5온을 말하고, ‘취착하는 자란 사람을 말한다. 불과 장작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취착과 취착하는 자도 성립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불과 장작에 의해서 취착과 취착하는 자를 말하고

물단지나 옷 등 모든 법들을 말하네. (15)

 

장작이 불이 아니듯이 취착은 취착하는 자가 아니다. 행위와 행위자가 하나라는 과실이 있기 때문이다. 또 취착을 떠나 취착하는 자가 있지 않다. 다름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다름의 과실이 있기 때문에 세 가지8) 모두 성립하지 않는다. 취착과 취착하는 자와 같이 바깥의 물단지나 옷 등의 모든 법들도 다 위와 같이 말할 수 있다. 발생이 없고 완전히 공하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의 있음과 법()들의 다름을 말한다면

이와 같은 사람은 부처님 가르침의 맛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하네. (16)

 

그러므로 모든 법은 본래 발생이 없고 완전히 적멸해 있다. 그래서 이 품() 끝에서 이 게송을 읊은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들이 []’를 말한다면, 가령 독자부(犢子部)의 무리들은 ()이 곧 라고 말할 수도 없고 색을 떠난 것이 라고 말할 수도 없다. ‘는 제5의 불가설장(不可說藏)에 있다고 말하고, 살바다부(薩婆多部:說一切有部)의 무리들은 모든 법에는 다름이 있다. ‘이것은 선()이다’, ‘이것은 불선(不善)이다’, ‘이것은 무기(無記)이다’, ‘이것은 유루이다’, ‘무루이다’, ‘이것은 유위이다’, ‘이것은 무위이다하는 등의 다름이다고 말하는 바와 같은데, 이와 같은 사람들은 모든 법의 적멸성(寂滅性)을 얻지 못한다. 부처님 말씀을 두고서 여러 가지 희론을 지었기 때문이다.


출처 : 청산백운
글쓴이 : mangu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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