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이라마 · 보리심 수행

달라이 라마 법문 (4) - 무상, 고통, 화, 수행

수선님 2021. 12. 26. 13:03

무상(無常)에는 두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만물의 연속체에 대해 생각하는 무상은 예로 들면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고,

연속체의 흐름이 끊어진다는 의미에서의 거친 차원의 무상을 의미합니다.

 

또 다른 무상은 미세한 차원에서의 무상입니다.

 

무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로 미세한 차원의 무상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미세한 차원의 무상이란 순간순간 만물은 점점 사라져 간다는 의미의 무상입니다.

 

여기서는 우선 만물의 연속체를 생각하는 거친 차원에서의 무상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만물은 영원불변이라고 생각하여,

예를 들면 내 인생이 끝나려면 아직 멀었다는 생각으로

현생만 생각하고 현생만을 위해 자신의 힘과 재산을 쏟아붓고 있다가

어느날 갑자기 죽음이 찾아오면 아아...어떡하지? 하고 당황하게 됩니다.

 

그래서 무상한 것을 영원불변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마음을 조금씩 없애기 위해,

만물의 연속체를 생각하는 무상, 죽음을 생각하는 무상에 대해 명상해야 합니다.

 

 

다음은 고통을 행복으로 받아들이는 전도된 마음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이 그릇된 마음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주로 편재된 고통(행고)에 대해 생각해야 하고,

편재적 고통에 대해 생각할 경우에는 미세한 차원의 무상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미세한 차원의 무상, 즉 만물은 순간순간마다 계속 사라져간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외계와 내면에 존재하는 모든 현상은 한순간도 머물러 있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것은 순간순간마다 생겨나는 동시에 사라져 갑니다.

이것은 생겨나고 머물고 사라지는 단계적 과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물의 연속체라는 관점에서 말하면 처음에는 생겨나고 다음에는 머물고 마지막으로 소멸해가는 것이지만,

미세한 차원의 무상에서는 만물이 생겨난 그 순간부터 이미 사라져가는 본질을 가진 상태로 성립되어 있고,

생겨나자마자 벌써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거친 차원에서의 무상이라는 관점에서 말하면, 생겨난다는 것은 거기서부터 시작한다는 뜻이고

사라진다는 것은 거기서부터 없어진다는 것 입니다.

 

따라서 생겨나는 것과 사라지는 것은 서로 용납치 않는 이율배반적인 현상입니다.

 

그런데 미세한 차원의 무상에서는 생겨났을 때 이미 사라져가는 본질을 가진 상태로 성립되어 있기 때문에

생겨난 순간부터 사라지기 시작하니까 생성과 소멸이 동시에 존재해 있다는 얘기가 됩니다.

 

이처럼 생겨난 순간부터 사라져가는 본질을 가진 상태로 성립되는 것은 무엇때문인가 하면,

소멸은 다른 외적인 원인에 의존하지 않고

생성과 소멸의 원인 자체가 원래 소멸하는 본질을 가진 것으로서 생겨나 성립해 있기 때문입니다.

 

만물을 성립시킨 원인 자체가 원래 사라져가는 본질을 갖추고 있는 것 입니다.

 

이것은 아주 미세한 차원의 무상에 대한 해석이고

다른데서는 볼 수 없는 불교의 독특한 견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 미세한 차원의 무상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명상하면,

고통을 행복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잘못된 것이고,

모든 것은 고통의 본질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겪는 고통에 대해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일반적으로 고통에는 세가지 차원,

즉 고통스러운 고통(고고), 변화의 고통(변고), 윤회에 의한 보편적인 고통(행고)가 있습니다.

 

고통의 세번째 차원, 즉 윤회에 의한 보편적인 고통은 다른 두 유형의 근원이며,

또 우리 존재의 본질이 오염된 마음과 몸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행고는 윤회하는 모든 존재에게 다 적용되고

또한 현재의 고통의 기초가 되고 미래의 고통을 유발하도록 조건지어져 있습니다.

 

이 세번째 차원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끝없는 윤회의 고리를 끝내는 길 밖에 방법이 없습니다.

 

이러한 고통의 원인은 바로 카르마와 번뇌입니다.

이것이 사성제의 두번째(집성제)인 고통의 참된 원인입니다.

 

카르마 혹은 행동은 몸과 말과 마음으로 짓는 악행을 말합니다.

 

본성 혹은 실재의 관점에서 행위는 유덕한 행위, 부덕한 행위, 중립적인 행위의 세가지 유형으로 나뉩니다.

유덕한 행위는 기쁘고 좋은 결과를 낳는 행동을 말합니다.

부덕한 행위는 고통이나 나쁜 결과를 낳는 행동을 말합니다.

 

세가지 주요 번뇌로는 무지, 탐욕, 그리고 미움이 있습니다.(탐진치)

이 세가지 번뇌는 질투나 적의와 같은 다른 많은 번뇌를 유발합니다.

 

고통의 원인인 카르마나 업을 중단하려면, 업의 원인인 이러한 번뇌를 끊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카르마와 번뇌에서 고통의 주된 원인은 번뇌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번뇌를 없앨 수 있는지 묻는다면,

그 때는 사성제의 세 번째인 멸성제와 관계가 있습니다.

 

만일 번뇌가 마음의 본성 속에 실재한다면, 그 번뇌를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 입니다.

마찬가지로 증오가 마음의 본성 속에 실재한다면, 우리가 의식하는 한 언제나 증오심만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분명히 없습니다.

애착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로써 마음의 참 본성이 더러운 요소로 오염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더러운 요소는 제거될 수 있고 근본 마음에서 분리 될 수 있습니다.

 

수행을 통해 고통의 원인을 점차 제거할 수 있습니다.

고통의 원인을 완전히 없앤 것이 멸성제 입니다.

 

이것이 궁극적인 해방이지요. 영원한 평화이자, 해탈입니다.

 

그러면 고통의 소멸의 단계를 이루기 위해 어떤 수행을 해야 할까요?

 

잘못이 주로 마음에서 나오므로,

그 해독제도 반드시 마음에서 나와야 합니다.

 

여러분은 모든 현상의 궁극적인 실재를 알아야 하지만,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의 궁극적인 상태를 아는 것 입니다.

 

 

# 12연기법에서 위의 설명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12연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무명, 행, 식, 명색, 육입, 촉, 수, 애, 취, 유, 생, 노사>

 

# 카르마 : 행(行), 유(有)

# 번   뇌 : 무명(無明), 애(愛), 취(取)
# 고   통 : 식, 명색, 육입, 촉, 수, 생, 노사

 

# 또한 이 12연기를 전생/현생/내생으로 구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전생 : 무명, 행
# 현생 : 식, 명색, 육입, 촉, 수, 애, 취, 유

# 내생 : 생, 노사 

 

# 위 내용은 용수보살의 대지도론을 그대로 인용한 것 입니다.



화를 참아야 하는가?

서양 심리학에서는 분노같은 우리를 힘들게 하는 감정일지라도,
일단 느낌이나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출하기를 권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과거에 깊은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정말 많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 아픈 상처가 계속 억압되어 있으면 심리적인 질병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티벳에서는 이런 말을 합니다.
"조개 껍데기가 막혔을 때 그것을 깨끗하게 하는 최선의 방법은 그 속을 후벼파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마음공부를 하는 사람에게는
분노, 집착, 질투 따위의 격한 감정들에 대항하고 자제력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격한 감정이 일어날 때마다 우리는 그것에 휩쓸리지 말고,
그쪽으로 기울어지려는 성향을 약화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화가 났을 때와 마음이 평온할 때, 어느 쪽이 더 행복하냐고 자신에게 물어보세요.
대답은 뻔하지요?
 
고통스러운 감정들의 열매라 할 수 있는 어지러운 정신 상태는,
곧장 내면의 평정을 깨트리고 결국 우리로 하여금 불행과 불안에 빠지게 만듭니다.
 
행복을 추구함에 있어서 우리의 중심 목적은 바로 이런 감정들과 싸우는 것 입니다.
 
이는 오랜 세월에 걸쳐 꾸준히 노력해야만 하는 일 입니다.
불자들에게 있어서 이 과정은 여러 겁(劫)에 걸친 수련을 뜻 합니다.
 
정신의 괴로움은 결코 저절로 없어지지 않습니다.
세월이 흐르면 사라지는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의 뿌리를 드러내고 그 힘을 약화시키고
마침내 그것들을 제거하는 의식적인 노력의 결과로 끝장나는 것 입니다.



현상은 어떤 것에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인 나름의 존재로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다른 현상에 의존해서 존재할 뿐 입니다.
 
분노와 애착이 생길 때, 분노와 애착의 대상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굳건한 것처럼 보여집니다.
 
강한 분노나 강한 애착이 생길 때,
대상은 독립적이고 백퍼센트 부정적이거나 긍정적인 것으로 보이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분노와 집착이 감소되거나 사라지면,
같은 사람이라고 해도 감정이 달라지게 되지요.
 
예를 들어, 어느 커플이 결혼을 한다고 합시다.
 
양쪽 모두 상대방이 백퍼센트 아름답고 좋게 보입니다.
이것은 집착으로 인한 투사 때문입니다.
 
둘 사이에 안좋은 문제가 생기면,
아름답고 좋게 보았던 그런 강한 감정은 줄어들게 됩니다.
 
하지만 고민이나 분노가 사라지면,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부정적인 마음이 생길 때,
그 뿌리가 현상을 잘못 이해한 방식에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현상을 보여지는 대로 실체가 있다고 이해하는 것과,
현상에는 진정한 실체가 없다는 점을 인식하는 이해 방식은 서로 모순 됩니다.
 
이 두가지 의식은 같은 대상을 향하지만, 이해 양식은 전혀 다릅니다.
그러므로 이 두 이해방식은 서로 반대 됩니다.
 
진정한 독립적인 실체의 부재를 인식하는 의식은 든든한 지원과 기반을 갖춘 반면,
다른 이해방식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이 두 가지 이해방식의 차이입니다.
 
부정적인 마음은 모두 제거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명상이 깊어지면서 분석적인 명상(위빠사나)을 하게 되면,
부정적인 감정과 생각은 제거 될 수 있습니다.
 
부정적인 감정을 완전히 제거한 마음 상태를 우리는 "니르바나", "해탈", "적멸"이라고 부릅니다.
 
해탈이나 적멸은 의식이나 자기 자신이 해체되고 완전히 사라져 소멸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부정적인 감정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의미합니다.
 
해탈은 마음이 완전히 정화된 상태입니다.



수행 명상의 과정

우리는 모두 행복하기를 바라고 비참한 현실을 극복하려고 하지만 여전히 아픔과 괴로움을 겪고 있습니다.왜 그럴까요?
 
불교에서는 우리가 스스로 불행을 낳는 원인과 조건을 만들어내면서
좀 더 오래 지속되는 행복을 가져올 만한 일은 회피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강한 힘을 지닌 생각과 감정의 지배를 받고 있으며
또다시 그런 생각과 감정들이 마음을 부정적인 상태로 이끌어갑니다.
 
우리가 자신의 불행뿐 아니라

타인의 불행까지도 끊임없이 지어내는 까닭은 바로 이 악순환 때문이지요. 
우리는 이러한 성향을 거스르는 자리에서 그것들을 새로운 습관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이 말씀은 탐심과 진심이 일어났을 때 바로 그 즉시 이걸 제어하는 습관을 들이라는 의미입니다.) 
 
늙은 나무의 그루터기에서 돋아나 옛 나무의 생명을 먹고 새 나무로 자라나는 가지처럼
신중하게 덕스러운 품행을 수련함으로써 새로운 성향을 길러야 합니다.
 
이것이 명상 수련의 참된 의미요, 목적인 것입니다.
 
본래 괴로움 자체인 인생을 자세히 살펴보고,
비참한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을 성찰하는 것이 명상의 한 형태입니다.
 
삶에 대해 굳어 있는 자세를 바꾸고,
오직 자신의 욕망만을 채우고 불편한 것을 피하려는 마음을 상태를 고쳐나가는 과정.....
그것을 가리켜 우리는 명상이라고 하는 것 입니다.
 
우리에게는 자기 마음에 지배당하고,
그것의 자기 중심적 성향을 쫓고자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명상은 자기 마음을 스스로 지배하고 이끌어, 좀 더 덕스러운 방향으로 이끌어 나가는 과정입니다.
 
낡은 생각과 습성을 버리고 새로운 생각과 습성을 키워내는 기술,
그것을 일컬어 명상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우리를 괴롭히는 잘못된 마음, 말 행동에 더 이상 말려들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게 됩니다.
 
마음 공부를 하는 사람이라면,
이와같은 명상법을 열심히 수행해야 합니다.
 
연주자가 손을 훈련하고,
운동선수가 근육을 단련하고,
언어학자가 귀를,
철학자가 사고력을 단련하듯이,
그렇게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닦아나가는 것 입니다.
 
 
# 위의 설법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 명상 또는 수행의 목적과 결과가 무엇인지 아주 명확하게 설명해주시기 때문입니다.
 
# 이기심은 무명때문에 발생합니다. 그로 인해 탐심과 진심이 발생합니다.
# 탐심은 애착으로 드러나고, 진심은 증오(분노)로 드러납니다.
 
# 위의 말씀은 애착과 증오를 버리라는 말씀이지요.
#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좋고 싫음, 이 두가지에 얽매여 삽니다.
# 좋고 싫음이 곧 탐심과 진심입니다.
 
# 무명으로 인해 나라는게 있다고 여기고, 또 그로 인해 나의 것이 있다고 여기며
# 나에게 이득이 올꺼 같으면 애착하고, 나에게 손해가 올거 같으면 증오합니다.
 
# 이런 애착과 분노가 무한히 반복되기 때문에 중생은 언제나 고통에서 벗어지 못합니다.
# 모든 죄라는게 바로 이 애착과 분노에서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 이와 같이 일상적으로 겪는 애착(탐심)과 혐오(진심)를 없애는 새로운 습관을 들이는 것이 목적입니다.
# 이러한 것은 실제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실천하고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 그러므로 일상생활 자체가 곧 수행입니다.
# 앉아서 하는 수행은 어쩌면 워밍업이고, 실제 생활하면서 겪을 때가 진짜 수행일 수 있습니다.
 
# 무명(無明)이란 밝지 않다는 것을 뜻 합니다. 곧 지혜없음을 의미합니다.
# 이것은 나 자신과 우리가 보는 모든 사물의 실체에 대해서 제대로 모르는 것을 뜻 합니다.
 
# 우리는 나 자신과 우리가 보는 모든 사물에 독립적인 영원한 실체가 있는 줄 여깁니다.
# 그로 인해 집착하지요. 그 집착이 좌절되면 화를 냅니다.
 
# 그러나 잘 관찰해 보면,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독립적인 영원한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그러므로 모든 것이 변해갈 수 밖에 없습니다.
 
# 문제는 뭔가 하면, 그냥 우리가 눈으로 보기에는 무엇이든 전혀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진다는데 있습니다.
# 그래서 속지요. 속으므로 집착합니다.
 
# 나 자신이나 우리가 보는 사물에는 독립적인 영원한 실체, 즉 자성이 없는데
# 내 마음속에서만 실체/자성이 있다고 여기는 것 입니다. 그래서 일체유심조인거죠.
 
# 내 마음속에서만 실체가 있다고 여기고, 모든 문제를 만들어 냅니다.
# 따지고 보면 모든 정신적인 고통은 그 누구의 탓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의 탓이지요.
 
# 모든게 진짜처럼 실체가 있는 것처럼 보여지지만, 거기에는 영원한 실체가 없습니다.
# 그러므로 외양과 실체는 다릅니다.
 
# 이런 이유로 모든 것이 환영/허깨비라고 설명합니다.
# 눈으로는 명확하게 보여지되, 거기에는 실체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신기루와 같습니다.
# 신기루는 눈으로 봤을 때 진짜와 똑같이 보여지지만, 그것은 결국 가짜입니다.



마음 수행 집중 명상법


불교적인 견해에 따르면 세속적인 마음의 본질은 광명이고,
따라서 그 본성상 더러움이 머물수는 없습니다.
 
더러움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며, 일시적인 것이므로 없앨 수 있습니다.
 
마음의 궁극적인 본질은
고유한 실체 없음....즉 무자성(無自性)입니다.
 
증오와 같은 번뇌가 마음의 본질이라면, 처음부터 마음은 항상 화를 냈을 것 입니다.
증오가 마음의 본질이니까요.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이 명백합니다.
특정한 상황에 처할 때만 우리는 화를 냅니다.
 
화를 낼 상황이 아니면 증오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증오의 본질이 마음의 본질과 서로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 입니다.
 
보다 깊은 의미에서는 비록 분노와 마음이 둘 다 의식의 일종이고,
따라서 광명과 앎이라는 본질을 지니고 있지만 말입니다.
 
마음의 본성은 빛과 앎이기 때문에 마음을 훈련의 바탕으로 삼는다면
단계적인 수행을 통해 익숙해짐으로써 착한 마음가짐을 무한하게 늘리는 것이 가능합니다.
 
우리는 많은 양의 기억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단순히 거친 차원의 의식만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좀 더 미세한 차원의 의식을 이용할 수 있다면, 기억력은 한층 더 향상될 것 입니다.
 
마음의 덕성은 무한하게 늘릴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은 본질적으로 빛과 앎이기 때문에
부처님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근원적이고 참된 성질을 지니고 있습니다.
 
마음은 본질적으로 빛과 앎이고,
그 본성에 의해 마음은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하는 것이 불교의 기본적인 입장입니다.
 
일상 수행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빛과 앎이라는 마음의 세속적인 본질을 인식하고 거기에 의식을 집중하는 것은 큰 도움이 됩니다.
 
마음의 본질을 알기 어려운 까닭은
마음의 본질이 우리 자신의 개념적 사고(생각)에 가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선 과거에 일어났던 일에 대해 걱정하지 말아야 하고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예측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어떠한 개념에도 덮이지 않은 채로 마음이 저절로 흐르게 하십시요.
 
마음이 그 본연의 상태에 머물게 한 다음, 그것을 관찰해 보십시요.
 
이러한 수행에 익숙하지 않은 초기에는 그리하기가 어렵겠지만,
자주 하다보면 맑은 물처럼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그 상태로 어떠한 개념(생각)도 생겨지 않도록 해서 무작위적인, 즉 순수한 마음의 상태에 머무르도록 하십시요.
 
이러한 명상은 이른 아침에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 전날에는 과식하거나 너무 오래 잠자지 않도록 하십시요.
그래야 다음날 아침 마음이 가볍고 명민해집니다.
 
이러한 명상을 하게 되면,
마음은 점차로 안정되고 주의력과 기억력도 향상될 것 입니다.
 
이처럼 내면의 한 대상에 흐트러진 마음을 집중시키는 명상을 매일 조금씩이라도 할 수 있다면,
여러분에게 큰 도움이 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끊임없이 생각하느라
쉴 수 없었던 생각들이 휴식을 취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어떠한 생각도 하지 않은 상태를 조성해서 쉴 수 있는 시간을 주는 것 입니다.
 
 
 
# 끊임없이 생각하느라 우리의 마음은 쉬지 못합니다.
# 위의 달라이라마의 설법 내용은 그 마음을 쉬게 하는 명상에 대한 내용입니다.
 
# 명상의 대상이 많습니다만, 위의 명상법은 곧 텅빈 마음 자체가 대상입니다.
 
# 이것을 하려면 과거나 미래를 생각하지 말아야 하고, 또 현재 뭘하고 있나 이것도 살피지 말아야 합니다.
# 생각은 주로 과거에 대한 생각, 또 미래에 대한 생각이 주류를 이룹니다.
 
# 마음이 쉬게 하려면, 생각을 멈춰야 합니다.# 하지만 쉽지 않습니다. 끈임없이 생각이 치밀어 오릅니다.
 
# 그래서 이러한 명상을 할 때 짧게 짧게 자주 하라고 달라이라마께서는 권하십니다.
# 위의 명상은 사마타와 위빠사나 중에서 사마타쪽에 해당합니다.
 
# 이러한 사마타 수행은 15분 안쪽으로 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주하는게 좋습니다.
# 온갖 망상에 빠져서 1시간 동안 망상에 빠져 있고 또한 그 버릇이 들어버리면 매우 안좋습니다.
 
# 마음이 수행하는데 질려버리면 더이상 진척이 없게 됩니다.
# 그러므로 수행 시간은 짧게 자주하는게 좋습니다. 물론 서서히 시간을 늘려야겠지요.
 
# 50분간 수행을 하는데, 마치 5분 지나간것 같이 느껴진다면 이것은 수행이 잘된다는 증거입니다.
# 그러나 50분 수행을 하는데 마치 3년 처럼 느껴진다면 그땐 수행시간을 대폭 줄여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