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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응용과 실천의 원리] 행복 창출과 고통 제거 / 김성철 교수

수선님 2021. 12. 26. 13:10

 

화엄의 법계 연기1

통찰 심화될 때 ‘하나’ 속에 내재하는 ‘무한’ 알게 돼

/ 김성철 교수

 

하나의 사건에 무한 가능성 내재  
창의력의 원천 - 화엄의 법계 연기
통찰 심화될 때 ‘하나’ 속에 내재하는 ‘무한’ 알게 돼

 

화엄사상의 핵심을 210자로 요약한 의상스님의 법성게(法性偈)를 보면 ‘일중일체다중일 일즉일체다즉일(一中一切多中一 一卽一切多卽一)’이라는 구절이 있다.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하나 속에 모든 것이 있고 여럿 속에 하나가 있으며, 하나가 곧 모든 것이고 여럿이 그대로 하나다”가 되겠지만, 그 참뜻을 되살려 다시 번역하면 “하나 속에 무한이 있고 무한 속에 하나가 있으며, 하나가 곧 무한이고 무한이 그대로 하나다”가 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여럿(多)’ 역시 ‘무한(無限)’에 다름 아니다. 자구(字句)를 맞추기 위해서 ‘다(多)’라는 글자를 썼을 뿐이다. ‘일중일체 다중일’이라는 앞 구절에서는 하나와 무한이 서로 내포한다는 상입(相入)을 노래하고, ‘일즉일체 다즉일’이라는 뒤 구절에서는 하나와 무한이 그대로 일치한다는 상즉(相卽)을 노래한다.

하나와 무한은 상즉상입(相卽相入)한다. 하나 속에 무한이 있기도 하지만, 하나가 그대로 무한이기도 하며, 무한 속에 하나가 있으면서 무한이 그대로 하나이기도 하다. 우리가 체험하는 세상만사의 참모습에 대한 궁극적인 통찰이다. ‘법성게’의 법성은 존재(法)의 참 모습(性)을 의미한다. 이를 법계연기(法界緣起)라고 부른다. 참으로 오묘한 가르침으로 연기의 다양한 면모 가운데 정상을 점한다.

예를 들어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교수’이기도 하지만, 집에 가면 아이들의 ‘아빠’이기도 하고, 아내에게는 ‘남편’이 된다. 부모에게는 ‘아들’이며, 조카에게는 ‘삼촌’이고, 손자에게는 ‘할아버지’이지만 지나가던 행인은 그냥 ‘아저씨’라고 부른다.
아프리카 밀림에 버려져서 만난 사자가 볼 때는 군침을 돌게 하는 ‘고기 덩어리’이고 우리 집 부엌 바닥의 바퀴벌레가 볼 때는 위협적인 ‘괴물’이며 … 전쟁터에 동원되면 온 몸을 ‘무기’로 사용한다.

이 가운데 그 어떤 것도 나의 본래이름이 아니지만, 상황에 따라 이 모든 것이 내가 되기도 한다. 나는 교수이고, 아빠이고, 남편이고, 아들이고, 삼촌이고, 할아버지이고, 아저씨이고, 고기 덩어리이고, 괴물이며 … 무기다. 나 ‘하나(一)’에 이 ‘모든 것(一切)’이 내재하며 나 ‘하나’는 이 모든 것이기도 하다. 일중일체(一中一切)이고 일즉일체(一卽一切)다.

‘나’뿐만이 아니다. 이 세상의 모든 물건, 모든 사건, 모든 사태는 그 어떤 것이든 무한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고 무한한 용도를 갖는다. 책상 위에 놓인 ‘컵’에 꽃을 꽂으면 ‘화병’이 되고, 남을 향해 던지면 ‘무기’가 되며, 적당히 물을 넣어서 박자에 맞추어 두드리면 ‘악기’로 변신하고, 어린아이의 소변을 받는 ‘오줌통’으로 쓸 수도 있고, 미술관에 전시하면 ‘작품’이 되며 … 엎어서 밀가루반죽에 찍으면 만두피 만드는 ‘기구’가 되기도 한다. 하나의 ‘컵’에 ‘화병’, ‘무기’, ‘악기’, ‘오줌통’, ‘작품’ … ‘기구’의 가능성이 모두 내재한다. 하나 속에 무한한 용도가 들어있다. 일중일체이고 일즉일체다.

그런데 이 모두 연기(緣起)에 근거한 천(千)의 얼굴들이다. 하나의 물건, 하나의 사건, 하나의 사태에 무한한 가능성이 내재하지만, 특정 상황 속에서는 한 가지 의미만 발생한다. ‘나’는 원래 ‘모든 것’이 될 수 있지만, ‘학생’에 대해서 ‘교수’일 뿐이고, ‘아들’에 대해서 ‘아빠’일 뿐이다. 특수한 연기다.

이런 특수연기들의 총체인 법계연기의 통찰이 심화될 때 우리는 ‘하나’ 속에 내재하는 무한을 알게 되고, 어떤 상황에서든 무한 속에서 창의적인 ‘최선의 판단’을 고안할 수 있다. 법계연기는 ‘묘관찰(妙觀察)의 분별’인 창의적 판단의 원천이다.

 

불교 응용과 실천의 원리

 

연기(緣起)의 법칙 - 연기법에 근거해 삶 속에서 행복 창출하고 고통 제거

 

불교는 연역(演繹)의 종교다.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연기의 법칙’에서 불교의 이론과 실천 모두가 도출된다. 불교의 종교관, 가치관, 실천법 등 모든 것이 연기의 법칙에 근거한다.

물리학자 뉴턴은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하였다. 존재하는 모든 것(萬有)에는 잡아끄는 힘(引力)이 있다는 물리법칙이다. 지금도 대포알의 착지점이나 로켓의 궤도를 예측할 때, 뉴턴물리학만으로도 충분하다.

아인슈타인은 빛의 속도가 불변이라는 관측결과에 토대를 두고서, ‘중력’과 같은 거시적인 힘을 ‘가속도’라는 ‘시공의 함수’로 치환함으로써, 뉴턴물리학에서는 몰랐던 많은 현상을 예측하였다. 상대성 원리다.

1980년대를 전후하여 ‘거시적인 상대성 이론’과 ‘미시세계의 양자역학’을 하나의 공식으로 해명하는 ‘초(超)끈이론’이 고안되었다. 물질의 최소단위는 ‘끈’과 같다는 이론으로 수학적으로 10차원을 도입하여 상대성 원리와 양자역학 이론의 상충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최근에는 ‘초끈이론’에 차원 하나를 더 보탠 ‘M이론’이 출현했다.

‘M이론’에서는 물질의 최소단위가 1차원적인 ‘끈’이 아니라 2차원적인 ‘면(面)’이라고 본다. ‘M이론’의 ‘M’은 면(Membrane)이기도 하지만 신비(Mystery), 마술(Magic) 또는 어머니(Mother)를 의미한다. 상대성 원리까지는 입증이 가능하지만, 초끈이론이나 M이론의 경우 이론상으로만 정합적일 뿐 실험을 통해서 증명할 수가 없기에 ‘물리학이 축조한 신화(Myth)’에 다름 아니다. ‘M’은 ‘Myth’이기도 하다.

만유인력의 법칙이든, 상대성 원리든, 초끈이론이든, M이론이든 ‘물질세계’를 지배하는 법칙일 뿐이다.

그런데 물질은 물론이고 우리의 마음을 포함하여 생명의 탄생과 죽음까지 지배하는 법칙이 있다. 부처님께서 발견하신 연기(緣起)의 법칙이다. 연기는 의존성(依存性)이라고 풀이된다.

우리의 앎도 의존적으로 발생하고, 행복과 고통도 의존적으로 발생하며, 종교적 철학적 고민 역시 의존적으로 발생한다. 예를 들어 어떤 방을 보고서 ‘큰 방’이라는 판단을 하려면, 생각 속에서 ‘작은 방’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 때 내 눈 앞의 ‘큰 방’과 생각 속의 ‘작은 방’은 서로 의존해 있다. 의존적 앎이다.

또, 내가 선행이나 악행을 통해서 남에게 준 고통이나 행복은 미래에 언젠가 나에게 고통이나 행복으로 체험된다. 원인인 선악의 행위에 의존하여 결과인 고락의 체험이 발생한다는 인과응보의 법칙이다. 또, 죽음에 대해서 번민했지만, “죽음이 있다”는 생각은 “내가 살아 있다”는 착각에 의존해서 발생한 허구라는 사실을 자각할 때, 죽음에 대한 지적(知的)인 공포가 사라진다. 연기의 종교성이다.

‘큰 방과 작은 방’, ‘나와 남’, ‘삶과 죽음’의 분별 모두 의존적으로 발생한다. 이 세상에 원래 있는 것이 아니라 연기(緣起)한 것들이다. 이런 과정을 통찰할 때, 우리는 ‘큰 방’이나 ‘작은 방’, ‘나’와 ‘남’, ‘삶’과 ‘죽음’이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자각하게 된다.

분별을 타파하는 공성(空性)에 대한 자각이다. 탈이분법(脫二分法)의 자각이다. ‘중도(中道)를 깨달음’이다. 중도인 불성(佛性)을 보는 것이다. 견성(見性)이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임을 아는 것이다.

이러한 연기법에 근거하여 불교를 우리의 삶 속에서 응용하고, 실천하려고 할 때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행복을 창출해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통을 제거하는 것이다. 연기의 원리를 투철하게 알 때, 우리는 ‘의존성’을 적용하여 갖가지 행복을 만들어 낼 수 있고, ‘공성’의 자각을 통해서 온갖 번민에서 해방될 수 있다. 연기와 공의 실천적 활용이다.

/ 김성철 교수

 

 

 

 

 

 

 

 

 

 

[불교 응용과 실천의 원리] 행복 창출과 고통 제거 / 김성철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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