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緣起)의 실천적 의의
/ 안 양 규 (동국대학교 불교문화대학 불교학과 교수)
▒ 목 차 ▒
Ⅰ. 서언
Ⅱ. 붓다 당시의 제사상; 연기설과 대조하여
1. 존우론 (Issaranimmāna-hetu-vāda)
2. 숙작인론(宿作因論, Pubbekatahetu-vāda)
3. 우연론(Ahetu-apaccayā-vāda)
Ⅲ. 연기론
1. 연기(緣起)의 기본개념
2. 연기 공식의 고찰
3. 연기 원리의 적용
Ⅳ. 결어
Ⅰ. 서언
연기는 붓다의 가르침 중 가장 핵심 교리 중의 하나이다. 어떤 경전에 의하면 붓다는 12연기를 통하여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며 또 어떤 경전에 의하면 12연기가 붓다의 정각 내용이라고 한다. ?대본경?에선 석가모니 붓다를 비롯해 과거의 모든 붓다도 12연기를 통해 정각을 이루었다고 전하고 있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적어도 훗날 불제자들에겐 연기는 붓다의 정각과 바로 직결되는 것으로 여겨진 것이다. 초기불교의 연기는 부파불교, 대승불교에 이르면 다양하게 해석되어 각종 연기설이 발달하게 된다. 연기는 불교 사상사에서 주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연기론은 불교의 가장 근본적인 교리로서 전불교사를 통하여 설일체유부의 업감연기론, 유가행파의 아뢰아식연기론, 법상종의 진여연기론, 화엄종의 법계연기론, 밀교의 육대연기론으로 전개되었다.)
연기는 사물 내지 현상의 상관관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그 가르침은 심오하고 방대하여, 그 적용범위도 또한 다양하다. 그러므로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되고 응용될 수 있다. 인간 외부에 존재하는 물리적인 세계에도 적용될 수 도 있고 인간 내부의 심리적인 현상을 다루고 있기도 한다. 붓다가 연기를 통해 가르치고자 한 것은 우리가 직면한 괴로움(苦)은 그 자체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원인을 제거한다면 고통이라는 심리 현상은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붓다의 출가 동기가 단지 지적인 욕구에서 출발하여 영원불변하고 보편타당한 진리를 추구하는데 있지 않았다. 오히려 현실에서 시시각각으로 느껴야만 하는 고통의 해결에 있었던 것이다. 고통의 해결이라는 대전제는 붓다의 정각 내용을 규정하게 되는 것이다. 많은 경전들이 붓다는 연기 법칙을 정각함으로써, 고를 해결하여 열반을 증득할 수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붓다가 연기를 설하는 목적은 다양한 현실세계의 현상관계를 규명하려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하면 고통을 제거하여 상락의 이상경에 도달할 수 있을까? 라고 하는 종교적인 실천 수행에 있다.
본고에서는 초기불교의 연기설을 고찰하여, 다른 종교 및 철학 사상에 보이지 않는 연기설 고유의 특징 및 장점을 밝힐 것이다. 그리고 연기설이, 고에서 벗어나 무상 안온한 열반에 이르는데 뗏목과 같은 실천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음을 살필 것이다. 본고의 이러한 목적을 위해, 다음 장에서는 붓다의 연기설이 일어나기 직전 인도의 종교ㆍ철학을 살필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붓다의 연기설이, 전래의 바라문, 사문의 어떠한 점을 비판하고 지양하고,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게 하는 단초가 될 것이다.
Ⅱ. 붓다 당시의 제사상; 연기설과 대조하여
붓다 제세시의 인도 사상계는 정통 바라문과 거기에 반대하는 사문 사상으로 크게 양분되어 다투고 있었다. 이러한 다양한 제사상은 「범망경」에서는 육십이견으로 자이나교 문헌에서는 363견으로 언급되어 있다. 이들 사상가들이 가장 중대시한 것은 선악의 행위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일까? 라고 하는 업보의 문제로 윤리 및 종교 수행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었다.
붓다의 연기설에 대조되는 사상으로서 문제 삼을 수 있는 것은 삼종의 외도 즉, 존우론(尊佑論), 숙명론(宿命論), 우연론(偶然論)이다.
1. 존우론 (Issaranimmāna-hetu-vāda)
존우론이라는 말은 원래 Issaranimmāna-hetu-vāda에 대한 한역어로, 모든 것이 자재신의 화작(化作)에 의거한다는 사상이다. 다른 한역어로 자재신화작론(自在神化作論)이라고도 한다. 신의설(神意說)이라고도 할 수 있는 존우론은 정통 바라문계의 유신론(有神論)으로 세상을 창조하고 지배하는 절재적인 유일신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 세계도 인간의 운명도 모두 범천(梵天)이나 자재천(自在天) 등의 최고신이 화작창조(化作創造)하였다고 하는 것으로, 모든 것은 신의 의지에 좌우된다고 하는 주장이다.
(『중아함경』(『대정장』I p.444上.). 계급인설(階級因說)은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계급으로 구별되어 있어, 그 계급에 따라 인간의 성격, 지혜, 환경, 가계 등이 결정된다고 하는 운명론으로 브라흐마 창조설과 연계되어 있어 존우론에 소속 시킬 수 있다.)
“Issara”라는 말은 창조주(Creator), 군주(Lord), 통치자(Ruler)라는 의미로 초기경전에서 창조주로서 다루어질 때는 남성인격신으로서의 Brahmā이었고, 또 이 남성인격신 Brahmā는 초기경전에서 대범(大梵), 자재신(自在神)으로 불리어졌다. 범천이라는 자재신은 만물의 창조주이고 일체의 지배자이다. 베다 문헌의 말기에 창조신 개념이 형성되어 여러 신들의 이름이 나타나고 신앙되다가 점차 단일신으로 정리되고 마침내 우파니사드에선 브라흐마 신이 최고신으로 여겨진 것이다. 브라흐마 주재신(Issara)에 의해 세계가 창조되고 그에 의해 통치된다고 믿었던 것이다.
(베다의 창조신들의 이름이 초기 불교경전에 언급되고 있다. 즉 Indra, Soma, Varuṇa, Isāna, Pajāpati, Mahiddhi, Yama 등 신의 이름이 등장하지만 초기불교 경전에선 이들은 과거의 신으로 취급되고 브라흐마에 대한 언급이 압도적으로 많다. 안양규, “창조주 브라흐마(Brahmā) 신에 대한 붓다의 비판” 불교학보 40 p.158.)
전지전능한 이 자재신은, 인간이 당면하는 모든 고(苦), 락(樂 ), 비고비락(非苦非樂도)을 자신의 의지에 따라 만들어 낸다. 따라서 인간이 감수하는 모든 행복과 불행은 궁극적으로 인간 그 자신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신의 의지에 달려있는 셈이 된다.
일체의 생류가 브라흐만 곧 자재신에 의해 생성되고 전개된다는 존우론에 대해 붓다는 두 가지 측면에서 비판한다. 현실의 고락(苦樂)의 감수가 모두 신의 의지에 의존하고, 신의 화작에 달려 있다면 첫째, 신 자신에 대한 모순을 야기하고, 둘째, 인간의 노력, 수행을 불필요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만약 모든 것을 총괄하는 신이 있다면 중생이 느끼는 고락도 주재신(主宰神)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주재신은 사악한 존재이다. 결국 신의 전능은 그가 만든 세계에 만연한 악과 모순되므로 신의 전능이라는 믿음은 잘못된 것이라고 결론 내려야 할 것이다. 이것이 창조신의 전능에 대한 붓다의 첫 번째 비판이다.
붓다가 신의 전능을 부정하는 근본 이유는 인간의 도덕적 자유의지와 그 책임을 무용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그의 비판은 윤리적 행위에 근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형이상학적인 측면에서나 영지주의와 같이 신비적인 입장에서 신의 전능을 논의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사회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행위와 그 책임을 염두에 둔 것이다. 만약 모든 행위를 신의 전능으로 돌린다면 윤리는 성립될 수 없다. “살인자들은 살인을 하도록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 마찬가지로 도둑놈도, 음탕한 자도, 사기꾼도, 험담자도, 꾸짖는 자도, 어리석게 말하는 자도, 악의를 품고 있는 자도, 미워하는 자도, 사견을 가진 자도, 누구든지 그들은 그렇게 창조되어진 것이다.” 이렇게 신의 창조 능력에 그 책임을 돌리면 종교적 노력이나 수행은 무의미하게 되고 말 것이다. “(신의) 창조를 믿으면 의지, 인내, 해야할 일과 하지 않아야 할 일에 대한 분별이 없게 될 것이다.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게 되어 정념(正念)이 성립되지 못하여 자신을 보존하지 못하게 된다.” 결국 종교 수행이라는 것은 성립될 수 없게 된다. 붓다는 지금 감수하는 행복과 불행이 모두 과거의 업에 기인한다는 숙명론이나 모든 것은 원인 없이 우연히 발생한다는 무인론(無因論)과 마찬가지로 존우론(尊祐論)도 인간의 자유의지와 노력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사견이라고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창조신이 전능(全能)ㆍ전선(全善)하다면, 그가 만든 이 세상은 왜 이렇게 고통과 죄악으로 가득 찼느냐고 비판할 수 있는 것은 창조신의 전선을 문제 삼는 경우이다. 그리고 창조신의 전능과 관련하여, 신의 의지와 인간의 자유의지와의 양립할 수 없는 갈등이다. 모든 것이 신의 의지라면 인간의 노력이나 정진은 무용하게 된다. 따라서 종교적인 수행이나, 도덕적 책임은 설 자리가 없게 된다.
인간의 고의 문제해결을 스스로의 내면에서 구했던 붓다는 “고(苦)는 타작(他作)이 아니다”라고 비판한다.
2. 숙작인론(宿作因論, Pubbekatahetu-vāda)
숙작인론은 인간이 감수하는 고(苦)ㆍ락(樂)ㆍ비고비락은 모두 과거에 행한 행위의 결과라고 하는 것이다. 곧,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감수하는 행복, 불행의 운명은 모두 우리가 과거세에 행한 선업, 악업의 결과로서 얻어진 것이며, 우리가 태어날 때, 이미 결정되어진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노력을 계속하더라도, 그것은 내세의 운명을 결정하는 원인은 될 수 있겠지만 현세의 운명은 그것에 의해 절대로 고쳐 질 수 없다는 숙명론이다. 불교에서는 이 숙작인설을 자이나(Jaina) 교의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붓다는 자이나교의 숙명론을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첫째 자이나교도들은 과보의 시기를 늦추거나 앞당길 수 없다. 자신의 의지에 따라 내세에 받아야 할 과보를 현세에 받게 하거나 현세에 받아야할 과보를 내세에 받게 미룰 수 없다. 둘째 과보의 종류를 바꿀 수 없다. 고통의 과보를 쾌락의 과보를 변경시키거나 반대로 쾌락의 과보를 고통의 과보로 바꿀 수 없다. 셋째 과보의 총량을 조절할 수 없다. 많이 받게끔 되어 있는 과보를 적게 하거나 반대로 적은 과보를 많은 과보로 조절하지 못한다. 넷째 과보를 피할 수 없다.
결합인설(結合因說)도 일종의 숙작인설로 볼 수 있다. 결합인설은 이 세계 인생의 모든 것은 지수화풍 등의 몇 가지 요소의 결합에 의해 발생하고 그 결합 상태의 좋고 나쁨에 의해 인간의 길흉화복이 정해진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이 결합상태는 우리가 태어난 때에 이미 확정되어 그것이 한평생 일정불변하게 존속하기 때문에 금세의 우리의 노력에 의해 운명을 변화시킬 여지는 전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결합인설도 일종의 숙명론이라고 할 수 있다. 육사외도 가운데, 맠칼리 고살라와 파쿠다 카차야나(Pakudha Kacayana)도 숙작인론에 포함시킬 수 있다.
인간의 생존 및 일체의 행위가 전세에 지은 선악업의 인과에 의해 결정된다는 숙작인론은 정통 바라문의 신의설(神意說)의 불합리를 비판하고 자기 자신에게 현세의 길흉ㆍ화복의 책임을 놓았다는 점에서 새로운 사상 비판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붓다가 비판하듯이, 모든 것이 과거에 지은 업에 결정되므로, 현재의 살생ㆍ투도ㆍ사음 등은 현세의 인간의 자발적인 행위가 아니고,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인간이 책임질 필요가 없게 된다. 따라서 이것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하고 사회윤리를 파괴하여 도덕을 무시하게 된다. 숙작인론에서는 존우론에서의 신 대신에, 숙업을 주장함으로써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하게 되어 윤리나 종교적인 수행을 무용하게 만드는 것이다.
3. 우연론(Ahetu-apaccayā-vāda)
이 사상은 모든 존재는 특정한 인(因)도 없고 연(緣)도 없이 생기한다는 것으로, 인간의 행위에 관해서도 인연의 존재를 무시하고 있다. 무인무연(無因無緣)설은 우연인설(偶然因說)이라고도 하는데, 이 설에 의하면 사회, 인생의 운명은 인과업보의 법칙에 지배되는 것이 아니며 또 신의 은총이나 징벌에 의한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길흉화복은 일정한 원인이나 이유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완전히 우연한 기회에 의해 일어나는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육사외도 가운데에는 아지타 케사캄발린(Ajita Kesakambalin), 푸라나 캇사파(Pūrana Kassapa) 및 순세파의 일부가 이 범주에 속한다. 아지타 케사캄발린은 보시, 공회, 제사의 효력을 부정하고 선악업의 과보를 인정하지 않았다. 단지 바라문의 제사, 공회를 부정한 것뿐만 아니라, 그 사상 근거에는 업 그 자체를 부정하고 있어, 선악의 인과응보 사상을 거부하고 있다. 따라서 이것은 무인무연론의 범주에 속하게 된다. 푸라나 캇사파도 아지타 케사캄발린과 마찬가지로 보시, 제사의 공덕을 부정한다. 그는 선업이 반드시 성과를, 악업이 반드시 악과를 초래하지는 않는다하여 사회윤리를 무시하고 인간도덕을 인정하지 않는다.
숙작인론의 한 사람인 맠칼리 고살라(Makkhali Gosala)는 유정의 번뇌나 청정은 인이나 연이 없다고 주장하므로 무인무연론에 넣을 수 있다. 또한 세간의 생성과 발전에 있어 인도 없고 연도 없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고 할 때는 극단적인 회의론으로써 산자야(Sanjaya)도 이 부류에 속할 수 있을 것이다.
무인무연론에 대한 붓다의 비판은 상술한 이종의 비판과 유사하다. 즉, 무인무연에 의지하기 때문에 인간의 노력이나 정진은 불필요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언급한 삼종외도에 대한 공통적인 붓다 비판을 살펴보면, 첫째, 존우론은 신을 숙작인론은 숙작을 제일 원인으로 상정하고, 무인무연론은 인과응보 그 자체를 부정하여 인간의 자유의지나 노력ㆍ정진을 부정한다는 것이다. 둘째, 이러한 인간의 의지 부정은 종교적인 수행 실천과 사회 윤리를 부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붓다를 업론자ㆍ유작용론ㆍ노력론자로 묘사하고 있는 경전이 있다. 여기서 불교는 인간의 자유 의지나 노력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AN. Ⅰ. p.287. 업론자라고 했을 때 그것은 자이나교 식의 숙명적인 업론은 아니다. 불교에 있어 업은 현세의 인간이 감수하는 감정의 주요한 하나의 원인이지 전부는 아니다.)
붓다는 존우론, 숙명론, 우연론을 순서대로 비판하고 나서 고락의 감정이 어떻게 발생하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6계가 화합하여 모태가 발생한다. 6계로 인하여 6처가 있다. 6처로 인하여 갱락이 있다. 갱락을 인하여 각(覺)이 있다. 각자(覺者)는 고를 있는 그대로 알고, 고의 원인을, 고의 소멸을, 고의 멸도를 있는 그대로 안다.” 12지 연기 중에서 식, 명색, 육입, 촉, 수의 인과 관계가 제시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결국 삼종외도에 대한 붓다의 비판의 근저에는 연기설이 내재하고 있다.
인간의 고통에 대해서 존우론은 신을, 숙작인론은 숙업을 제시하고, 무인무연론은 인과를 부정했지만 붓다는 연기론에 근거하여 고의 근원을 무명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고는 자작도 아니고 타작도 아니고, 무인생도 아니다.” 라는 붓다의 교설을 삼종외도에 대한 종합적인 비판이며, 이 교설 속에서 연기론에 근거하여 고의 근원을 찾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하, 붓다 당대의 외도 사상과는 구별되는 붓다 고유의 연기론을 종합적으로 고찰하면서 인간의 노력에 따라 고를 제거할 수 있다는 연기의 실천적 주장을 찾을 것이다. 외도의 사견을 비판하고 나서 붓다는 고의 해결과 관련하여 두 가지 종류의 바른 노력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 단호한 의지력에 의한 수행을 하는 것이다. 금욕적인 수행이 대표적이다. 둘째 평정한 마음을 유지하여 심신의 현상과 그 본질을 관찰하는 것이다.
Ⅲ. 연기론
존우론이 신을 제일 원인으로 내세운데 비해, 숙작인론이 전세의 숙업을, 인간의 고의 결정 인자로 본 데는 진일보한 발전의 측면이 보인다. 붓다는 더 나아가 삼종외도와는 달리 인간의 주체적인 노력과 정진을 통하여 고를 제거할 수 있음을 밝혔다. 이것이 곧 연기론이 지니고 있는 실천적 의의이다.
모든 현상은 무수한 원인(因:hetu)과 조건(緣:paccaya)이 상호 관계하여 성립되므로, 독립·자존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모든 조건·원인이 없으면 결과(果:phala)도 없다는 교설로 일체현상의 생기소멸(生起消滅)의 법칙을 연기라고 한다. 붓다의 연기 교설은 당시 인도의 고통받는 중생들에게 자신의 문제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정형으로서 제시한 것이다.
1. 연기(緣起)의 기본개념
1) 연기의 어의
연기 (Pāli 어. Paticcasamuppāda) 라는 말은 불교 독자의 용어이지만, 원시경전 중에는 그 어의의 해설은 찾아 볼 수 없다. 이것은 ‘연기’라는 말이 일종의 추상적인 사상용어로서는 아니고, 늘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교설로서, 일반에게 이해되어 질 수 있는 형태로 설해진 것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한 사물이 다른 사물과 연관 없이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사실은 서로서로 인과관계로 얽혀 있다고 가르치는 것이 연기이다. 연기란 ‘...때문에 태어나는 것’, ‘...을 말미암아 생기는 것’ 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모든 존재는 그것을 성립시키는 여러 가지 “원인이나 조건 때문에 생기는 것”이고, “원인이나 조건을 말미암아서 형성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연기에 해당하는 팔리어(Pali), ‘Paticca-sam-uppāda‘는, 연하여 (paticca)」함께 (sam), 일어남(uppāda)으로 분석된다. 부언하면, 갑을 원인(또는 조건)하여, (결과인) 을이 생기(또는 성립) 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 연기라는 말 속에는 이미 인과의 관념이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Paticca와 동의어로서 ‘원인’을 나타내는 말로는 paccaya, nidāna, upanissāya pabhava, jātippabhava, sambhaya, hetu, samudaya, jātika 등이 초기경전 속에서 사용된다. 이들 동의어 중 nidāna를 주의깊게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병리학을 인도에서는 일반적으로 nidāna, nidānasthāna, nidānaśāstra라고 하는데, 이 nidāna라는 말은 연기론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연(paticca)의 동의어로 쓰인 nidāna는 이처럼 인간의 고를 실천적으로 해결하려는 연기의 일면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이상에서 본 것처럼 원인을 나타내는 말이 다양하게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고 정형화된 연기설에서는 paccaya가 주로 사용되고, 연기의 술어로서는 paticca가 채용되어 점차 불교 고유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2) 연기와 인과관계
초기경전에서, 원인을 나타내는 용어를 다양하게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초기불교에서는 연기법을 인과관계로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불교에서의 인과응보설은 원인과 결과의 기계적인 관계를 말하지 않는다. 현재의 경험이 전적으로 과거에 지은 업인이 가져온 결과로 보지 않는다. 과거에 지은 숙업은 중요한 요소들 중의 하나이고, 그 외에도 행위를 저지른 사람의 본성과 행위가 이루어진 환경 등의 인자에 의해 과보가 결정된다. 이 점에서 자이나교의 운명론적인 업론과는 달리, 인간의 주체적 수행ㆍ노력을 인정한 진취적인 연기론의 업론을 찾아 볼 수 있다.
3) 연기와 연이생법(paticcasamuppanā dhamma)
연기라는 용어 자체는 존재의 생성 과정 내지 발생 과정에 역점이 있는 것이고, 연이생법(緣已生法)은 인연에 의해 생하여진 법을 의미한다. 따라서 연기를 「능생(能生)의 인연」으로, 연이생법을 ‘소생(所生)의 법’으로 볼 수 있다. ?중아함경?의 한 경전에선 인연기(因緣起)와 인연기소생법(因緣起所生法)으로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다. ?구사론?에서는 제지의 인분을 연기라 하고 제지의 과분을 연이생법이라고 한다.
연기와 연이생법의 관계는 오온의 행(行, saṃkhāra)과 유위(有爲, saṃkhata)와의 관계와 유사하다. 행이 인간의 의지와 관련 되는데 비해 연이생법은 인과적으로 조건지워진 모든 것을 말하여 행보다 범주가 넓다. 연이생법은 유위법을 의미하여 현상적인 모든 것을 의미한다.
4) Idappaccayatā(此緣性)와 연기
idappaccayatā라는 말은 차연성(이것을 연으로 하는 것)이라는 의미로 십이지 연기의 순관의 각지와 결부되어진 형으로 설해진다. 이 말은 연기와 동의어로 쓰이는 것 외에도 연기의 한 특성을 나타내는 데도 사용된다. 이 용어를 우정(宇井)박사가 ‘상의성(相依性)’이라고 번역한 것에 대해 많은 학자들이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실정이다. 즉, 이 술어는 일방적인 조건 부여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고 제지의 ‘상의성’의 관념은 읽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술어의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는, 이렇게 주장할 수 있겠지만 12지 중 ‘식(識)과 명색(名色)’은 상호 의존관계로 설하여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조건 부여의 일방적인 관계를 보여 주는 차연성과 제지의 상호 의존 관계를 보여 주는 ‘상호성’을 포괄할 수 있는, 상관성이라는 술어가 적당할 것 같다.
2. 연기 공식의 고찰
십이지 연기가 설해지기 직전에 거의 대개 다음과 같은 연기의 공식이 먼저 시설된다. 이 기본적 공식을 응용하여 만들어진 것이 십이지 연기임을 보이는 것이며 동시에 12지 연기 이외에 다양한 지수(支數)의 연기설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1) 첫 번째 유형
차유고피유(此有故彼有) 차무고피무(此無故彼無)
: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다.
차기고피기(此起故彼起) 차멸고피멸(此滅故彼滅)
: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난다. 이것이 사라지므로 저것이 사라진다.
2) 두번째 유형
약유차즉유피(若有此則有彼), 약무차즉무피(若無此則無彼)
: 이것이 있으면 즉 저것이 있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다.
약생차즉생피(若生此則生彼), 약멸차즉멸피(若滅此則滅彼)
: 이것이 일어나면 즉 저것이 일어난다. 이것이 멸하면 저것이 멸한다.
첫 번째 유형은 차와 피가 시간적 선후 관계로 이해할 수 있는데 비해 두 번째 유형은 무시간적, 논리적 관계로 해석할 수 있다. 이상의 연기 공식에서 우리는 몇 가지 사항을 고찰할 수 있다. 첫째, 모든 사물의 동시성과 상호의존성을 찾아 볼 수 있다. 즉, 제법은 연기하여 독립적으로 자존하지 않는 것이다. 서로 연결되어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다른 존재와 일시적으로 구별되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상호상관성의 관계는 십이지 연기에서 ‘식과 명색’의 관계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둘째, 차(此)와 피(彼)는 상호의존의 관계는 아니고 차는 조건을 부여하는 입장이고, 피는 조건 지워지는 입장이다. 이 조건 부여의 관계는 일방적이고, 가역적인 것은 아니다. 셋째, 차는 단수가 아니고 복수라는 점이다. 여러 원인들이 모여 어떤 결과를 산출하는 것이다. 따라서 십이지 연기의 첫머리에 나오는 무명도 여러 조건들이 모여 이루어져 있는 연이생법 중의 하나이다.
이상에서 연기의 공식 중에는 제법의 상호의존성과 조건과 결과라는 인과관계가 있음을 보았다. 어느 것이나 고를 인간의 자유 의지를 넘어서는 신이나 숙업에 두지 않고 인간 그 자체에서 해결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러한 연기법의 특징을 4가지로 분별 할 수 있다. 경전에서는 ① 법여법이(法如法爾) ② 법불리여(法不離如) ③ 법불이여(法不異如) ④ 수순연기(隨順緣起)를 들고 있다. 첫째, 법여법이는 객관적 법칙을 의미한다. 연기는 객관적으로 타당한 것으로, 설사 붓다가 출세, 미출세에 관계없이, 영원히 보편타당한 진리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한 경전에서는 잊혀진 옛 궁전을 찾는 것을 연기 법칙을 찾는 것으로 비유하고 있다. 연기법이 단지 관념의 산물이 아니라 사실세계에 상응하는 정확한 객관적 법칙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법불이여’는 필연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연기법은 모든 것에 적용되어 예외가 없음을 말한다. 셋째, ‘법불이여’는 ‘불변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연기법은 일시적인 가변의 진리가 아니라 영원한 불변의 진리임을 뜻하고 있다. 넷째, 수순연기는 ‘조건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앞에서 다루었던 idappaccayatā의 역어이다.
엄격한 결정론에서 보이는 무조건적인 기계적 운명관과 무연무인론의 무조건적인 자의성의 양단을 극복한 것이 연기법의 조건성이다. 이러한 조건성에서 우리 인간의 주체적이고도 자유로운 의지와 수행이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것이다.
3. 연기 원리의 적용
제법 사이에 얽혀 있는 복잡한 관계, 즉 인과 관계에 대한 자각내용이 연기법임을 살폈다. 이상에서는 이러한 연기의 원리를 응용한 교리를 몇 개를 간략히 고찰하여 고를 해결하려는 연기법의 실천적 의의를 재확인 하고자 한다.
1) 중도
붓다가 처음으로 정각한 직후에 다섯 비구에게 최초로 설법한 것이 중도이다. 고행과 쾌락의 양극단을 버리고 비고비락(非苦非樂)의 중도를 설한 것이니 이것이 곧 팔정도이다. 이 팔정도는 초기불교에 있어 가장 중요한 실천수행법으로 행하여진다. 상견과 단견을 비판하고 나서 중도가 바른 견해임을 천명한다. 그리고 곧이어 중도의 구체적인 내용으로 12지 연기가 설명되고 있다. 무아(無我)와 유아(有我)의 양극단적인 견헤를 비판하고 나서 붓다는 중도를 설명하고 있다. 중도를 설한 직후에 바로 연기의 공식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곧 우주와 인생의 실상은 비일비이(非一非異), 불상부단(不常不斷)하다고 설하는 중도의 배후에는 이와 같이 연기의 원리가 내재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2) 사성제
연기가 자내증의 법문이라면, 사성제는 붓다의 정각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한 교화용 교설이라고 할 수 있다. 사성제는 연기 원리의 대표적인 적용 예라고 할 수 있다. 사제의 체계에는 연기의 원리가 적용되고 있다. 사성제가 연기의 인과관계로 이해할 수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은 집성제에서 집을 뜻하는 “samudaya”라는 말이다. 이 용어는 연기에서 연(paticca)의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사성제는 유전(流轉)연기와 환멸(還滅)연기를 동시에 설하고 있다. 고성제와 집성제는 각각생사 유전하는 고와 그 원인을 가리키고 있으므로 유전연기를 나타내고 있는데 반해, 멸성제와 도제는 유전하는 세계를 벗어난 무고안온의 열반과 그 이상에 도달할 수 있는 수행 방법을 보여 주고 있으므로 환멸연기라고 할 수 있다. 고성제와 집성제는 각각 결과와 원인을 보여 주며 멸성제와 도성제는 각각 결과와 원인에 배대시킬 수 있다.
십이지 연기가 유전연기의 견지에서 고의 발생, 원인 내지 조건을 추구하는데 초점이 맞추어 졌다고 한다면 사성제는 유전 연기와 환멸 연기가 동시에 설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3) 사법인
사법인이란 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의 삼법인에 일체개고를 더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여기에서 법인이라고 하는 것은 ‘불법의 표’, ‘불교의 거’라는 의미로 제행무상 등 세 가지 또는 네 가지 조건이 갖추어 지면 그 설은 올바른 불교로 인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중국 불교에서 경전의 진위를 판정하는 표준으로서 이 삼법인이 채용되어진 것도 이 때문이다.
이처럼 다른 종교 사상과 구별 지어주는 사법인에도 연기의 원리가 내재하고 있다. 첫째, 제행무상이란 만들어진 모든 현상은 생멸 변화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유동적인 입장의 제행무상은 연기 공식 중에 차무고피무, 차멸고피멸을 적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모든 존재는 그것을 형성시키는 원인과 조건에 의해서만 그리고 상호관계에 의해서만 존재하기도 하고 소멸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제행상은 현상의 상주불변(常住不變)을 부정하는 것이다. 둘째, 제법무아는 ‘모든 것은 아(我)라고 하는 형이상학적 존재는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아(我)’라는 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고립성ㆍ고정성ㆍ절대성을 갖고 있는 자아이다. 따라서 무아는 제법이 상관성과 상대성을 갖고 있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제법 사이의 상관성과 관계성을 보여주는 제법무아 법인은, 연기 공식 중에 차유고피유, 차기고피기를 응용한 것 임 을 알 수 있다. 어떤 것을 인연하여 일어난다고 하는 것은 다른 것과 서로 관계하여 존재한다는 것으로 그 자체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결국 연기설이란 존재의 관계성을 말하는 것이다.
이상의 두 법인은 인간의 윤리적 내지 종교적 가치와 직접 관계가 없기 때문에 일반적 연기 또는 외연기(外緣起)라고 한다. 그리고 일체법인연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세 번째, 일체개고와 네 번째 열반적정은 각각 미혹에 빠진 범부의 세간과, 고에서 벗어난 각자의 이상세계를 보여 주는 법인으로 가치적 연기를 이루고 있다. 즉 일체개고는 유전연기에, 열반적정은 환멸연기에 해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두 법인은 내연기(內緣起) 내지 유정수연기라고도 할 수 있겠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연기는 외연기에 있기 보다는 고를 직접 다루는 내연기에 있다고 하겠다.
4) 십이지 연기
연기의 인과 원리가 적용된 십이지 연기는 너무나 잘 알려져 연기하면 곧 12지 연기를 의미할 정도이다. 12지 연기이외에 오지ㆍ칠지ㆍ십지 등 여러 계열의 연기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12지 연기만 널리 알려진 것은 12지 연기가 가장 완비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십이지 연기가 연기법 그 자체로 여겨질 정도로 중요한 의미를 띠고 있는 것은 위에서 살펴 본 교설과 보다도, 고의 원인을 인간 내면에서 가장 치밀하게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12지 하나하나에 대해서 그리고 전후 연결에 관하여 천착하기 보다는 중요한 것은 고통은 조건 지워진 것이기 때문에 그 조건을 제거하면 고를 없앨 수 있다는 실천적 모습이다.
고통은 절대신과 같은 절대자가 우리에게 준 것도 아니고 원인이 없이 우연히 발생한 것도 아닌 것이다. 일련의 잘못된 인식, 즉 무명(無明)에 의해서 노사라는 고통 야기된다고 가르치는 것이 12지 연기이다. 12지란 무명(無明), 행(行), 식(識), 명색(名色), 육입(六入), 촉(觸), 수(受), 애(愛), 취(取), 유(有), 생(生), 노사(老死)이다. 12개의 연결 고리가 연결된 것이 고통이고 12가지 항목이 해체된 것이 고통으로부터의 해탈이다. 12연기의 근본 목적은 인생의 근원적인 문제인 ‘고(苦)’가 어떻게 해서 생겨나고, 또 어떻게 해서 사라지는가를 밝히는 것이다.
제법은 모두 여러 조건 내지 원인 등이 모여 일어난 것이고 그러한 조건들이 제거되면 제법은 사라진다는 것이 연기 법clr이다. 따라서 고도 여러 조건에 의해 형성된 것이므로 그 원인 내지 조건을 제거하면 고도 사라진다. 이러한 연기의 원리를 인간의 내면에 적용시켜 고통의 근원을 추구한 것이 십이지 연기이다. 고의 원인을 인간의 힘이 미칠 수 없는 신의 또는 숙업에 돌리지 않고 인간의 무명에 두고 주체적 인간의 수행 및 정진에 의해 고가 제거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 12지 연기이다.
현상의 원인과 결과에 대한 규명 방법인 12지 연기를 인식하는 방법은 다시 순관과 역관으로 나누며 유전연기와 환멸연기로 구분되기도 한다. 역관(逆觀)이란 인식의 출발을 현실에 두고 그 이유들을 하나씩 밝혀내는 방법이다. 12지 연기에서 노사(老死)라고 하는 고통의 현실을 놓고 그것의 원인들을 차례로 찾아나가 무명에까지 그 원인을 추적해 가는 방법이 바로 역관이다. 아울러 현실의 고통을 소멸하는 길을 찾는 것도 역관으로써 가능하다. 즉 고통의 현실(생 노사)을 없애려면 번뇌와 종자(유)를 없애야 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죽 거슬러 올라가 잘못된 무명까지 없애야 한다는 인식방법이 역관이다.
반면에 순관(順觀)은 근원에서부터 시작하여 그 원인에 의해 발생하는 현실들을 밝혀내는 방법이다. 무명에서 출발하여, 그 그릇된 인식에 근거한 잘못된 행위와 욕망을 밝히고 그로 인해 생성되는 무수한 고통의 현실 모습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다. 결국 출발점으로서 무명을 없앰으로 해서 행을 없애고, 행이 사라짐으로 해서 식 명색 육입의 촉과 수가 변화되고, 그로 인해 애 취가 사라지고, 유 생 노사의 고뇌까지 소멸된다는 이 순관의 인식방법 역시 고통을 소멸하는 길을 찾는 방법이 된다.
이처럼 역관 순관의 인식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연기는 업을 쌓아나가는 것과 소멸해가는 두 길을 보여줌으로써 우리에게 실천방향을 제시한다. 따라서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김으로 저것이 생긴다’고 하는 유전연기(流轉緣起)의 법칙은 우리의 업을 계속 쌓아가는 행위를 말하며, ‘이것이 없음으로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함으로 저것이 멸한다’는 환멸연기(還滅緣起)의 법칙은 우리의 업을 소멸시키기 위한 실천행으로 나타난다.
12지 연기는, 고통의 원인을 찾아나가는 기본인식의 틀로 구체적인 고통을 소멸시키는데 활용되어야만 그 의미가 있다. 12지 연기라고 하는 하나의 교리는 그 자체만으로는 별다른 가치가 없다. 구체적이고 다양하게 발생하는 고뇌의 보편적인 원인을 바르게 찾아주고, 해결의 길을 옳게 제시해 주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노병사라는 고통의 현상도 그 자체 원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절대적인 신이 만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우연히 발생한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여러 가지 인연이 결합하여 고통이라는 현상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만약 그 원인을 제거하면 당연히 그 고통도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인과관계를 갈대단의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 여기 3개의 갈대가 모여 하나의 갈대단이 서 있다고 하자. 하나라도 제거되면 갈대단은 성립하지 않는다. 세 개의 갈대는 원인이고 갈대단은 결과인 것이다. 원인인 갈대가 적당히 결합할 때 결과인 갈대단이 성립한 것이다.
Ⅳ. 결어
붓다가 증득한 연기법은 무엇보다도 그의 출가 동기와 관련하여 이해되어야 한다. 붓다는 고를 해결하기 위해 불가 수행 하여 연기법을 자증함으로써 고의 원인을 제거할 수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연기법이 단순한 논리 체계가 아니라 고를 해결하려는 실천적인 모습을 간취할 수 있는 것이다. 붓다의 연기론이 나오기 이전의 인도의 종교 및 사상계는 크게 삼종외도로 정리할 수 있었다. 즉, 존우론은 자재신을 숙작인론은 숙업을 내세우고, 무인무연론은 인과응보 그 자체를 부정하여, 인간의 자유 의지를 부정하고 참된 종교 수행과 사회의 윤리를 무시했다. 삼종외도의 이 같은 자유 의지부정에 대하여 붓다의 연기법은 인간의 주체적 노력과 정진을 통하여 고를 제거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연기의 원리는 불교의 주요한 모든 교리 즉, 중도, 사성제, 사법인, 십이연기 등에 모두 내재하고 있다. 이것은 곧, 붓다의 모든 교리가 고에서 벗어나 열반을 지향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러한 교리의 실천적인 특징은 연기법이 지니고 실천적인 모습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고 하겠다.
연기는 존우론, 숙작인론, 우연론 세 입장을 모두 부정한다. 이 세상의 어떠한 존재나 현상도 창조주에 의해 생성된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아무런 원인이나 계기도 없이 자연발생적인 것도 아니며, 숙명적 결정론을 따르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 세상 모든 존재와 현상은 반드시 그것이 있게끔 하는 어떤 원인과 조건이 작용되어 형성된 것이며, 그 원인과 조건이 소멸될 때 그 존재와 현상 또한 없어진다는 관점이 곧 연기이다. 연기의 원리는 우리의 삶이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서 창조적으로 변화해 나가는 것이지 운명적으로 신의 의지나 전생의 업에 의해서 무조건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님을 말해준다.
연기는 보편적인 법칙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단순히 물리적 현상을 설명한 것은 아니며 지금 여기서 인생의 괴로움을 해결하기 위해 설해진 것이다. 연기설은 세계 인생의 일반적인 생멸 변화를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연기가 말하여진 본래의 목적은 단순한 일반적 현상보다도 오히려 인간의 고뇌가 어떠한 조건과 원인에 의해 생겨나고 어떠한 인연 조건에 의해 사라지는가 하는 인생의 고락운명에 관한 것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연기설이 문제되는 현상은 단순한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라 선악업과 그 과보로서의 고락과 같은 윤리 종교적인 가치관계의 현상이다. 연기의 인과관계에는 과거세로부터 현재, 미래세에 이르는 선인선과, 악인악과의 인과업보의 사상도 포함되어 있다.
이런 인과관계는 현상 세계를 관통하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현상은 그 자체 독립해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요소가 결합하여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만약 현상(즉 결과)을 구성하고 있던 요소(즉 원인)가 분해되면 그 현상도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연기는 모든 것이 독립하여 별개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며 또한 우연히 발생했다고 보는 우연론도 부정하고 있다. 연기는 결정론도 아니고 우연론도 아니므로 인간의 자유의지가 부정되지 않는 것이다. 각자 스스로 고통의 원인을 찾아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 연기 교설의 실천적 의의이다.
[출처 : 불교문화연구 Vol.7]
'불교관련'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현대한국의 불교학자 <3> 심재룡 / 조은수 (0) | 2022.03.27 |
---|---|
불교란 무엇인가? (0) | 2022.03.13 |
[연기설]은 인간사의 성패를 해명하는 원리이기도 / 고익진 교수 (0) | 2022.02.27 |
현대한국의 불교학자 <10> 안계현 / 황인규 (0) | 2022.02.27 |
[현대한국 불교학자] <23> 심재열 / 이병욱 (0) | 2022.02.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