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의 진리(법칙성의 존재) 1 인과율
/ 고익진 교수 불교학개론
일체존재는 생멸변화(生滅變化)하고 이합집산(離合集散)하여 항구불변(恒久不變)의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다.
그러나 모든 것이 그렇게 무상변이(無常變易)하고 있지만, 그런 현상이 아무렇게나 멋대로 행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들 속에는 일정한 법칙이 상주(常住)하여 그에 입각해서 그런 현상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무상(無常)하다는 사실도 중요하지만, 무상한 것 속에 상주(常住)하는 이 법칙의 존재야말로 더욱 중요한 사실이다. 따라서 불교의 현실관찰은 삼법인설에 이어서 다시 이 법칙성의 관찰로 전개되고 있다.
인과율
먼저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는 십이처설에 입각해서 주체적 인간(六根)과 객체적 대상(六境) 사이에는 어떤 법칙이 있는가 부터 살펴보자.
십치처설에서 주체적 인간을 의지라는 말로 표현하고, 객체적 대상을 법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음은 앞서 소개한 바와 같다. 인간은 능동적 작용을 일으키는 힘을 갖고 있으며, 그런 작용이 가해지면 대상은 그에 상응한 필연적인 반응을 보이기 때문이다. 인간과 자연물 사이에는 말할 필요도 없지만, 인간과 인간 사이에도 이런 관계가 성립함을 본다. 남이 내게 잘 해주면 나도 그에게 잘 해주지 않을 수가 없고, 남이 내게 나쁘게 대하면 나도 그에게 나쁘게 대해지는 것이 사람의 상정이다.
따라서 주체적 인간과 객체적 대상 사이에는 인과의 법칙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가 있다. 인간의 의지적 작용이 원인(hetu)이 되어, 대상의 필연적 반응이 결과(phala)로서 따르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인간의 그런 의지적 작용을 '업(業, karma)'이라고 부르고, 이에 대한 대상의 필연적 반응을 '보(報, vipaka)'라고 부른다. 인과업보(因果業報)라든가, 업인과보(業因果報)라는 말은 이렇게 해서 성립하게 된다.
연기의 진리(법칙성의 존재) 2 인연화홥
인간과 대상 사이의 역학적 인과관계는 이상과 같거니와, 다음은 생멸변화하는 사물에 있어서 그 '변화(anyatha-bhava)'라는 현상은 어떻게 해서 일어나게 되는가를 살펴보자. 이 문제를 구체적으로 관찰하기 위해 우리는 불교 경전에 자주 나타나는 우유의 변화를 예로 드는 것이 편리하다.
우유를 발효하면 낙(酪)이 되고 낙은 수가 되고 수는 제호가 된다. 요즘말로 하면, 우유가 치즈가 되고 버터가 되는 것과 같다. 이 때 치즈나 버터가 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우유에 발효조건이 갖추어져야 할 것이다. 우유를 냉장고에 넣어 두면 치즈나 버터는 결코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우유에 발효조건을 갖추어 주는 일은 외부에서 가해지는 인위적 작 용이다. 따라서 그것은 앞서 살펴본 주체적 인간의 업인에 해당된다고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역학적 원인만으로는 치즈나 버터가 발생할 충분한 조건이 되지 못한다. 발효 조건은 있지만 우유가 없을 경우를 생각해 봐야 하기 때문이다. 가령 돌이나 물에 아무리 발효 조건을 갖추어 줘도 치즈나 버터는 발생하지 않는 것과 같다. 따라서 치즈나 버터가 발생하는 데는 발효 조건을 갖춰 주는 동력인(動力因) 외에 다시 또 하나의 조건, 즉 우유라는 질료인(質料因)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런 질료인을 불교에서는 '연(緣, pratyaya)'이라고 부른다. 우유에 '연'하여 치즈나 버터가 발생한다는 뜻이다.
사물의 변화에는 이렇게 원인과 연(緣)의 두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 이 두 조건이 갖추어짐을 불교에서는 인(因)과 연(緣)의 화합(和合, samgati)이라고 부른다. 이 중에서 원인은 직접적이고 연(緣)은 간접적이라는 입장에서 '친인소연(親因疏緣)'이라는 말이 있으며, 서구학자들은 원인(原因)을 'primary cause', 연(緣)을 'secondary cause'로 번역하고 있다.
불교의 이런 인연화합설(因緣和合說)은 인간의 성패를 해명하는 원리로도 적용될 수가 있다. 아무리 노력하여도 외연(外緣)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뜻이 이뤄지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아무리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어도 당사자의 자발적인 노력이 없을 때는 성공이 또한 기대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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