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든, 어떤 순간에도 구원 손길 내밀기 위해
관세음보살이 어떤 분인지 잘 설명해주는 경전이 두 가지 있습니다. 앞에서도 몇 번 등장한 〈묘법연화경〉 속의 ‘관세음보살보문품’이 그 하나요, 한국의 불자들이 정성을 다해 지송하는 〈천수경〉이 다른 하나입니다.
‘관세음보살보문품’은 어찌나 유명한지 이 품이 〈묘법연화경〉의 한 부분이란 사실도 모르고 처음부터 ‘보문품’이란 경이 있다고 생각하며 이 이름으로 기억하고 읽는 분도 많습니다. 그만큼 ‘보문품’만 차분히 읽어 봐도 ‘관세음보살’과 관련해 해야 할 이야기들을 다 만날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 하나를 들어볼까요?
‘무진의’라는 이름을 가진 보살이 부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부처님, 관세음보살은 이 사바세계에서 어떻게 노닙니까? 어떻게 중생에게 설법합니까? 중생들에게 어떤 방편으로 대하십니까?”
앞서 ①불의 재난(火難) ②물의 재난(水難) ③바람의 재난(風難) ④무기의 재난(刀杖難) ⑤나찰귀신의 재난(鬼難) ⑥형벌의 재난(枷鎖難) ⑦원수와 도적의 재난(怨賊難)에 직면한 중생이라면, 그리고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는 이룰 수 없는 바람을 품고 있는 중생이라면, 또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휩싸여 괴로워하는 중생이라면 관세음보살님을 떠올리고 이름을 부르기만 해도 다 구제된다는 법문을 부처님에게서 들은 직후입니다. 이 무궁무진하고 무애자재한 관세음보살님의 능력에 그만 말문이 막힌 무진의 보살은 대체 그런 능력을 어떻게 세상에서 부리고 다니는지, 혹시 사바세계 중생을 교화하는 관세음보살만의 특별한 방법이 있는지를 물은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재미있는 단어가 나옵니다. ‘노닌다’라는 말입니다. 한문경전에서는 ‘노닐 유(遊)’를 쓰고 있지요. ‘유람한다’, ‘돌아다닌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말 자체를 놓고 보자면 관세음보살님이 이 중생의 세상을 다니며 교화하는 모습이 진지하고 엄숙하고 간절하기 보다는, 마치 유람하듯 편안한 몸과 마음으로 놀이를 하듯 다니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억지로 무엇을 이루려고 애를 쓰기보다는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대처하는 자유로움이 느껴집니다. 〈반야심경〉에서 지혜제일 사리불 존자에게 공(空)의 이치를 들려주는 관세음보살인 만큼, 도통한 분들이 세상을 대하는 모습은 이렇게 자연스럽고 편안하고 물 흐르듯 자유롭다는 뜻일까요?
이에 대해 천태 대사는 “중생을 교화하여 그들을 이롭게 해주는 방법”(차차석, 〈다시 읽는 법화경〉)이라고 풀어줍니다. 관세음보살이 중생을 교화해서 그들을 이롭게 해주는 방법이란 바로 자유자재로 몸을 바꾸어 나타나는 것입니다. 안성맞춤이 따로 없습니다. 어떤 이를 상대하느냐에 따라 그 상대에게 가장 적절한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그게 바로 서른세 가지 몸이라는 말입니다. 중생의 필요에 따라[應] 모습을 바꾸어[化] 나타난다는 뜻이지요. 저 유명한 33응신(應身)입니다.
서른세 가지는 ①부처 ②벽지불 ③성문 ④범왕 ⑤제석천 ⑥자재천 ⑦대자재천 ⑧천대장군 ⑨비사문 ⑩소왕 ⑪장자 ⑫거사 ⑬재관 ⑭바라문 ⑮비구 ⑯비구니 ⑰우바새 ⑱우바이 ⑲여성 장자 ⑳여성 거사 ㉑여성 재관 ㉒여성 바라문 ㉓남자 아이 ㉔여자 아이 ㉕하늘 ㉖용 ㉗야차 ㉘건달바 ㉙아수라 ㉚가루라 ㉛긴나라 ㉜마후라가 ㉝집금강신 등입니다.
이렇게 관세음보살은 서른세 가지 몸으로 자유자재하게 자신을 변화시킵니다. 이름만 열거했지만 문장을 그대로 옮겨오면 “부처의 몸을 나타내어 제도할 중생에게는 부처의 몸을 나타내어 설법하고 …… 여자 아이의 몸을 나타내어 제도할 중생에게는 여자 아이의 몸을 나타내어 설법하고 …….”입니다.
그러니 언제 어느 때 누가 무엇을 필요로 하느냐에 따라 관세음보살은 척척 제 몸을 바꿔서 그 앞에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어찌 보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도 있는 이 대목을 접할 때면 가슴이 뜁니다. 몇 가지 사항이 담고 있는 의미가 너무나 크기 때문입니다.
먼저, 관세음보살이 부처로도 몸을 바꾼다는 항목입니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어찌 감히 부처님의 몸으로 나타나 설법까지 할 수 있을까요? 이미 부처의 경지에 충분히 이르지 않았다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니 이 내용을 보자면, 관세음보살이 부처보다 낮은 경지인 보살의 차원이 아님을 알 수 있을뿐더러, 어쩌면 이미 부처님이요, 그런 뛰어난 능력을 지녔음에도 더 걸림 없이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부처의 경지마저 사양하고 있는 분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두 번째로 짚어볼 뜻은, 관세음보살의 능력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남자가, 어떤 여자가 관세음보살일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걸핏하면 내게 아무 말이나 마구해대서 나의 인내력을 테스트하는 시누이, 맡기는 일마다 엉망으로 해서 팀원들 전체가 고생하게 만드는 신입사원, 복잡한 지하철에서 그 커다란 백팩으로 나를 사정없이 후려치고는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유유히 가버린 청년……. 이런 사람들을 대할 때면 끓어오르는 분노도 분노지만, 내가 얼마나 감정에 잘 휩쓸리는 사람인지 반성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이 없었다면 내 자신의 민낯을 보기 힘들었을 테지요. 그러니 나를 열 받게 만든, 이런 무례한 불한당 같은 이들 중에 분명히 관세음보살이 계시리라 생각한다면 세상은 즐겁습니다. 관세음보살은 내게 행복한 순경계(順境界)만을 안겨주는 분이 아니라, 역경계(逆境界)를 드러내어 나를 마음공부 시켜주는 선지식이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로는 동물로까지 모습을 바꾸어 나타난다는 말에 담긴 뜻도 짚어봐야 합니다. 앞서 원효 스님에게 따끔한 가르침을 준 파랑새도 관세음보살의 화신이었지요. 그렇다면 지금 우리 주변에 너무나도 많이 있는 동물, 개·고양이·참새·비둘기·개미·코끼리 심지어는 인간이 버린 플라스틱 쓰레기로 인해 죽은 바다생물 등 온갖 동물 중에 관세음보살이 없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작은 생명을 함부로 다루고, 수도 없이 소비하고 낭비하고 쓰레기로 지구를 더럽히는 인간을 일깨우기 위해 죽어가는 동물로 나타나는 관세음보살님…….
이렇게 관세음보살은 우리의 바람을 들어주기 위해 아무리 먼 길이라도 마다하지 않고 한 걸음에 달려와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분이기도 하지만, 지독한 번민과 욕망과 어리석음과 분노에 사로잡혀 악업을 일삼을 때도 등장합니다. 딱 그 사람에게 맞춤한 대상으로 말입니다. 그래야 ‘아차’하는 마음이 들어 자신을 바로 세울 수 있을 테니까요.
네 번째로는 관세음보살의 화신을 이렇게 생각한다면 33이란 숫자를 고집할 필요도 없다는 점입니다. 관련 불교서적에는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33신(身)을 중시하는 것은 3이란 숫자가 지니는 의미 때문이라 말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 3이란 숫자는 완전하고 성스러움을 의미한다. 10이란 숫자도 완전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33이란 숫자는 완전하고 성스러움을 의미하는 숫자가 겹치고 있으며, 그런 점에서 모든 형상, 모든 존재를 통칭하는 개념으로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다시 읽는 법화경〉
“사실 이치대로라면 33응신에만 그치지 않는다. 33응신은 다함이 없다는 뜻을 의미한다. …… 한량없는 수만큼 그 몸을 나타내 보인다는 것이다.” 〈성운대사의 관세음보살 이야기〉
“33이란 수에 대해서 고대인도의 종교인 리그베다 또는 아타르바베다를 살펴보면, 그 속에 33천 …… 이라는 것이 적혀 있다. 이 문헌에 따르면 이들 종교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신격은 33천의 주인인 제석천이다. 33천이란 33신격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 그러므로 관세음보살의 응신을 반드시 33이라는 숫자로 한정하지 않고, 33응화는 물론이고 천만억 가지로 몸을 변화해서 나타낸다.” 〈관세음보살 연구〉
워낙 33이란 숫자에 집착하다보니 이 숫자보다 더하거나 덜하면 행여 ‘틀렸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숫자에 집착하지 말 것을 당부합니다. 이 지구에 있는 생명체 숫자만큼 관세음보살의 변화한 몸도 존재한다는 말이 되며, 대표적으로 예를 든 것이 서른세 가지라는 말입니다.
과연 관세음보살님의 능력은 어디까지일까요? 그 천변만화하는 능력을 부리면서도 느긋하게 노니는 모습이 부럽기만 합니다. 각박하고 짜증나는 세상, 이럴 때 관세음보살님을 떠올리기만 해도 힐링이 절로 됩니다.
이미령
동국대학교에서 불교학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경전번역가이자 불교대학 전임강사, 북 칼럼니스트이다. 현재 BBS불교방송 ‘멋진 오후 이미령입니다’를 진행 중이다. 저서로 <붓다 한 말씀>·<고맙습니다 관세음보살>·<이미령의 명작산책> 등이 있다. 또 <직지>·<대당서역기> 등 많은 번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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