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불교미술 시대(無佛像時代. B.C 6세기∼A.D 1세기후반)
佛敎美術槪論 / 文明大 저 / 동국대학교부설역경원 / 1980.8.15.
불교미술은 붇다가 35세에 성도(成道)한 후 최초로 건축한 불찰(佛刹)인 기원정사(祇園精舍=Jettavana)나 죽림정사(竹林精舍=Venavana)의 성립과 동시에 발생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부처님이 살아 계실 동안(釋尊在世時)에 불상같은 것이 제작되었다는 전설들도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시원적(始原的)인 또는 전설적인 것에 불과할 뿐이다.
따라서 불교도에 의하여 참다운 조형활동(造形活動)이 시작된 것은 불멸후(佛滅後)였다고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한 견해일 것이다. 그것은 부처님이 돌아가신 직후에 세워진 8탑의 건립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부처님이 쿠시나가라(Kusinagara. 現 Kasia)에서 80세로 열반하자 당시 독실하게 불교를 믿던 8국의 왕들이 서로 사리(舍利)를 가지고 가겠다는 사리분쟁(舍利紛爭)이 일어났는데 어떤 파라문의 현명한 중재로 여덟 나라에 공평하게 나누어 동시에 탑(stupa)을 세우게 한 것이 근본팔탑(根本八塔)이다. 피프라와(piprahwa)나 바이사리(vaisali)의 폐탑지(廢塔址)와 거기서 나온 사리용기(舍利容器)들이 이 팔탑의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는 근본팔탑의 성격을 시사해 주는 것으로 이 탑들은 초기의 불탑인 것만은 틀림없다. 탑은 불교건축에 있어서는 가장 중요하고 필요 불가결한 것이며 따라서 불교에만 있는 건축형식으로, 불탑에 대한 숭배사상은 시대가 지날수록 더욱 성황을 이루어 수 많은 탑을 조성하였다. 아쇼카왕이 84,000탑을 건립했다는 전설은 이러한 상황을 적절히 언급해 주는 것이다. 말하자면 탑탑은 절의 중심이자 불교도의 주 예배대상이고 불교미술의 주류인 것이다.
탑은 원래 벽돌(煉瓦)을 복발(覆鉢)형식으로 쌓은 단순한 구조로 건축적인 의미는 그리 크지 않지만 주위에 난순(欄楯=vedika)을 돌리고 정상에 산개(傘蓋)를 세워 장엄을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난순이나 탑문(塔門=torana. 홍살문)에 여러 가지 조각을 하고 탑체(塔體)에 채색을 하는 등 장식적으로 발달하게 된다. 이러한 장식은 세속적인 내용을 금하는 규정 등이 있어 주로 불교적인 주제를 취급하였다.
장식문양에는 불교적인 상징이나 불교도의 숭배대상 등도 많이 묘사되고 있다. 즉 보리수(菩提樹), 금강보좌(金剛寶座), 법륜(法輪, 또는 輪寶)등이다. 보리수는 pipphala 나무인데 그 밑에서 성도(成道)하였다 하여 신성시 되었으며 금강보좌 역시 성도할 때 앉던 방석으로 성도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법륜은 바로 성도후에 설법한 것을 상징하는 것이며, 불족적(佛足跡) 역시 설법의 상징이며 불(佛), 법(法). 승(僧)의 삼보(三寶)를 표시하는 것으로 삼고(三 )가 사용되었다. 말하자면 탑 이외에 이와 같은 것을 예배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초기의 불교미술의 주제는 모두 장식적이며 상징적인 것이었다. 아무튼 초기의 불교미술은 조형활동상으로 볼 때는 미약했던 것이 사실이며 불교미술이 본격적으로 발전한 것은 아쇼카왕(Asoka=阿育王. 298-232재위)은 마우리아(maurya) 왕조(찬드라굽타가 기원전 322∼1년에 건설, 中村元은 기원전 317년으로 주장)의 제 3세였는데 그는 그의 나라를 확장하여 공전절후(空前絶後)의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후에 불교에 귀의하여 불적을 순례하고 허다한 탑파를 건설하였으며 또한 그의 통치칙령(統治勅令)을 새긴 석주(石柱)를 전국 도처에 세웠다. 특히 그의 석주는 사암(砂岩)으로 된 십 수 미터가 넘는 원주에 주두(柱頭)를 역동감이 풍부한 사자나 수소같은 동물조각으로 장식한 것인데 이것은 역사시대에서는 최초로 나타난 미술품다운 미술이었고, 예술적인 최대의 걸작으로 손꼽히고 있다. 또한 약사(Yaksha)나 약시(Yakshyni)등의 신상(神像)들도 꽤 제작되었는데 디다르간쯔(Didarganj)의 약시왕상같이 왕조미술의 전통에 속하는 균제미있는 조형의 여성상(女性像)이 있는가하면 파르캄(Parkham)의 약사같이 심히 야성적이고 고졸미숙(古拙未熟)한 조법으로 된 토착적인 인도고유미술을 대표하는 것이 있어 당시의 미술경향을 알아볼 수 있다.
아쇼카왕이 사망한 후 마우리아왕조는 급속히 쇠퇴하여 기원전 180년에는 숭가(Sunga)왕조에 의하여 멸망되었다. 그러나 숭가왕조는 간지스일대의 중인도지역만 지배했을 뿐이며 그것도 대 지배세력은 되지 못하였고 데칸고원 서부로부터 남인도는 안드라(Andhra)왕조가 흥기하였다. 중인도나 서남인도의 조형활동은 이 시대에 들어와서 본격적으로 유행하였다. 초기 인도미술양식의 성립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시기였으며 유품(遺品)들도 많이 남아 있는데 대부분 불교미술품이다.
이 시대의 건축으로는 벽돌이나 돌로 쌓은 탑(suupa)과 석조의 난순(vedika) 및 탑문(torana)이 있다. 이 외에 석굴사원(石窟寺院)이 많이 남아있는데 이 시대의 석굴사원을 보통 소승불교석굴사원이라 부르고 있다. 챠이트야(caitya) 즉 예배당(單一窟)과 비하라(vihara)즉 승원(僧院. 複合窟)의 두 형식으로 구성되고 있는데 여기서도 역시 탑을 모셔 예배하고 있으며 불상은 아직 제작되지 않았다. 석굴사원은 건축이며 동시에 거기에는 조각이 있고 또한 회화가 그려져 있는 말하자면 종합예술로 저명한 것이다. 석굴사원들은 불교도들의 수도에 적합하고 신성한 종교적인 장엄도 충족시켜주었기 때문에 비상한 열의로 제작되었으며 이것은 중앙아시아, 중국, 한국 등으로 파급되어 성황을 이루기 시작하였다.
이 시대의 것으로 남아 있는 가장 유명한 걸작들은 바르후트(Bharhut)의 난순과 탑문(기원전 2세기 중엽), 부다가야(Bodhgaya 또는 Buddhagaya, 菩提道場)의 난순(기원전 1세기초), 산치(Sanchi)의 탑 그리고 바자(Bhaja. 기원전 2세기), 피탈코라(Ajanta) 제 10굴(기원전 1세기), 9굴(1세기)의 벽화의 일부 등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초기불교미술시대의 가장 특징적인 것은 불상이 없다는 것이다. 이 시대의 예배중심은 탑(Stupa)이었고, 성수(聖樹, pipphala 나무, sali 나무, arma 나무), 법륜(cakra), 불족적, 불좌(佛座)같은 것도 이 시대 불교의 예배대상이었으며 따라서 초기불교미술을 대표하는 것이다.
탑문, 난순, 기둥 등에 표현된 붓다의 전생설화(前生說話)를 묘사한 본생도(本生圖=Jataka), 붓다의 생애를 묘사한 불화도(佛畵圖)에는 주역인 붇다의 표현은 일체 없고 다만 불좌나 나무같은 것만 있을 뿐이다. 그 이유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로 해석되고 있다. 붇다를 신성시하여 일반 신들과 구별하기 위해 상(像)을 만들지 않았다는 설과 불신을 형상화 내지 감히 어떻게 표현할 능력이 없다는 이유(增一阿含經)등 하여튼 불신형상화(佛身形象化)를 불가능시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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