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기신론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대강

수선님 2022. 5. 8. 12:33

난해한 대승기신론의 핵심을 초보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한 글이 있어 올립니다.

대승기신론을 공부하면서 먼저 읽어보면 큰 도움이 될 것 같아 꼭 읽어보기를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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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대강


1. 대승기신론 소개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또는 {기신론(起信論)}이라고 하는 이 책은 {능가경}이 하고자 했던 일 즉 여래장과 아뢰야식을 결합하는 일을 아주 훌륭하게 완수해 냈다. {기신론}은 화엄종, 천태종, 선종, 정토종, 진언종 등에 아주 큰 영향을 주었다. 그래서 중국불교 이후의 모든 경론 가운데서 가장 주석서를 많이 가지고 있는 책이 바로 {기신론}이다. 현대의 연구를 빼놓고도 중국, 한국, 일본 등에서의 {기신론}에 대한 주석 해설서는 314종이라고 한다. 현재에도 불교를 공부하는 데 필독서로 되어 있다. 그전에는 불교전문강원이라고 하고 지금은 승가대학이라고 하는 곳에서 {기신론}은 스님들이 반드시 공부해야 할 교과과목으로 지정되어 있다.

{기신론}의 저자는 확실하지 않지만 전통적으로 마명보살로 되어 있다. 마명보살은 우리가 읽은 부처님의 일대기를 시로 쓴 {불소행찬}의 저자이다. {기신론}은 범어 원본도 없고 티벳번역본도 없다. 단지 한문번역본만 있다. {기신론}은 한문으로 두 번 번역되었다. 진제삼장과 실차난타에 의해서이다. 그러나 세상의 주목을 받는 번역은 진제삼장(眞諦三藏)의 번역본이다. 우리나라에서 {기신론}하면 의례 진제삼장의 번역본을 의미한다.

{기신론}을 번역한 진제삼장의 일생은 한 편의 드라마와 같다. 중국 양나라의 무제는 인도에 사신을 보내서 불경과 고승을 모셔오게 했다. 진제삼장이 경론을 가지고 2년여에 걸쳐서 고생고생 끝에 남경에 도착해 무제의 환대를 받지만 얼마 되지 않아서 난이 일어나고 진제삼장을 초청한 무제는 죽었다. 왕조가 변화함에 따라 진제삼장은 떠돌이 생활을 하며 살아야 했다. 일반신도의 도움을 받으며 사는 중에서도 64부 278권이나 되는 많은 경론을 번역하였다. 그 중에 {섭대승론(攝大乘論)}은 중국의 섭론종의 소의론전이 되기도 하였다.

{기신론}은 영어, 일어, 한글로도 번역되어 있다. {기신론}의 주석으로 가장 유명한 것으로 세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서 우리 나라 원효대사께서 쓰신 {대승기신론소}와 {대승기신론별기}가 유명하다. 중국 화엄종의 대가인 현수법장대사는 원효대사의 {대승기신론소}와 {대승기신론별기}에 의지해서 별도의 주석서를 만들 정도였다. 원효대사가 우리 나라뿐만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유명한 이유 중에 하나는 주석서에 불교에 통달한 원효대사의 탁견이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2. {대승기신론}의 중심사상

{대승기신론}의 대승이라는 말을 마음과 일치시키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대승이라는 말의 산스크리트어는 마하야나(mahayana), 한문음으로 마하연(摩訶衍)이라고 번역된다. 마하는 크다는 뜻이고 야나는 수레라는 뜻이다. 마하야나는 큰 수레를 의미하기 때문에 큰 대(大)자 수레 승(乘)자를 써서 대승이라고 번역하였다. {대승기신론}은 이 대승이라는 말을 마음 즉 일심(一心)과 동일한 의미로 취급한다. 대승과 마음을 한가지로 보는 데서 {기신론}를 저술한 저자의 교묘한 방편이 엿보인다.

{기신론}은 이 일심을 두 방면으로 나눈다. 한 방면은 진여문(眞如門)이고 다른 한 방면은 생멸문(生滅門)이다. 일심(一心)에서 이문(二門)이 있다고 하는 것은 우리 중생심(衆生心)에 깨달음의 이상세계로 가려는 가능성과 윤회의 타락세계로 갈 가능성이 똑같이 포함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그래서 한 마음이 진여(眞如)의 세계로 갈 가능성을 나타낼 때는 여래장(如來藏)이라고 불리어지고 깨달음의 세계가 펼쳐지는 이유를 설명할 때는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고 불리어진다. 이 중생심(衆生心)이 여래장도 되고 아뢰야식도 된다. 진여(眞如)의 세계로 가서는 별로 할 말이 없다. 진정한 진여는 언어를 떠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신론}의 주안점은 진여문의 설명이 아니라 생멸문의 설명에 주력하고 있다. 왜 생멸문이 벌어지느냐는 것과 어떻게 생멸에서 진여로 되돌아가느냐를 설명한다. 예로부터 {기신론}의 주된 내용을 숫자로 표시하여 정리해 오고 있다. 즉, 일심(一心), 이문(二門), 삼대(三大), 사신(四信), 오행(五行), 육자염불(六字念佛)회향이다.

일심(一心)에 진여문(眞如門)과 생멸문(生滅門)이 있는데 그 일심의 특징은 삼대(三大)로 표시된다. 삼대는 어떤 사물의 본체와 밖으로 드러난 형상과 그 활용성 또는 작용이다. 줄여서 체(體), 상(相), 용(用) 삼대라고 한다. 이 체상용 삼대는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의 세 가지 부처님으로도 표시될 수 있다. 우리 마음의 본체와 겉모양은 부처님의 법신자리와 같고 마음의 활용기능은 부처님의 보신자리와 화신자리와 같다고 불 수 있다.

일심의 상태에서 진여문의 방향으로 가고 있는 한 마음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해서는 네 가지의 기본적인 믿음이 반드시 필요하다. 진여의 마음자리와 불(佛), 법(法), 승(僧) 삼보에 대한 믿음이다. 마음에 아무리 진여의 문과 깨달음이 있다고 해도 수행이 없다면 깨달음은 얻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수행을 해야 하는 당위성이 요청된다.

이러한 수행이 오행인데 이는 육바라밀을 뜻한다. 즉,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지혜(智慧)의 육바라밀 중에서 선정과 지혜를 지관(止觀)으로 묶어서 다섯 가지로 줄인 것이다. 이것이 중국불교와 한국불교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즉, 선정과 지혜를 겸한 수행이어야만 한다는 정혜쌍수(定慧雙修)의 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육자염불회향은 {나무아미타불}을 외우는 염불이다. 이것은 일상생활 속에서 수행할 수 있는 가장 흔한 염불의 예를 들은 것이면서 참선이나 다른 수행으로 대체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미타불에 귀의하고 그 세계에 태어나기를 간절하게 바라는 것은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나, 비록 능력 출중하여 자력적 수행으로 깨달아야 하겠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자라도, 중간 정도의 능력자에게는 매우 중요한 이행도(易行道)의 하나이다. 여기서 염불은 믿음이 돈독하지 못한 수행자에게 믿음의 강화를 통해서 오행을 닦게 할뿐만 아니라 부처님의 가피력에 의존하여 누구나 대승을 완성할 수 있도록 하는 공능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염불수행은 자력과 타력을 결합한 믿음의 실천인 것이다. 그리하여 삼신(三身)의 가피력에 의해서 믿음이 확고해져서 자기의 본래심인 진여성을 확신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불교는 마음에 바탕을 두고 가르치는 것이다. 그 마음은 큰 수레와 같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중생심, 일심에는 두 가지의 문이 있다. 진리로 가는 문과 나고 죽는 고통의 윤회로 가는 문이다. 또 이 마음에 본체와 성스러운 성상과 오묘한 작용의 특징이 있는데 법신, 보신, 화신의 능력과 같다. 생멸문에서 진여문으로 돌아가고 체상용 삼대의 본래 특징을 찾기 위해서는 마음자리의 진여 및 불법승 삼보에 대한 믿음과 오행과 육자염불이 있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1) 여래장. 아뢰야식 그리고 깨달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일상적인 변덕의 마음인 불각(不覺), 또는 무명(無明) 즉 생멸심(生滅心)이라는 것은 여래장을 근거로 해서 전개된다. 여래장(如來藏)이란 번뇌에 의해 뒤덮여진 진여의 마음이다. 고요와 산란, 지혜와 번뇌가 뒤섞인 것이다. 이 여래장을 심리적인 측면에서 파악할 때 아뢰야식이라고 한다. 이 아뢰야식(阿賴耶識)은 모든 사물과 현상을 포함하고 만들어낸다. 아뢰야식은 깨달음과 깨닫지 못한 것이 한 덩어리로 섞여있다. 깨달음이란 것은 우리의 중생이 욕심이나 변덕을 벗어난 진여(眞如)의 본래자리를 회복한 상태와 그곳에 이르는 과정에서 반야의 작용이 확대되어 가는 상태를 말한다. 깨달음의 상태 즉 차별적 망념(妄念)을 벗어난 상태는 모든 사물이 하나의 모양과 같으니 여래와 중생이 평등하게 공유하고 여래와 중생에게 평등하게 통하는 여래의 법신(法身)이다. 이와 같이 깨달음이 여래의 법신이라는 것을 강조할 때 원만구족한 깨달음이라는 말이 사용된다.

{기신론}에서 사용하는 개념들인 여래장(如來藏), 깨달음(覺),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 그리고 진여(眞如)는 기본적으로 같은 방향의 것이지만 처해 있는 상황이 다르다. 여래장은 여래가 중생의 업에 의해 일어나는 번뇌에 덮여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것을 {기신론}에서는 불각(不覺) 즉 무명(無明)의 상태라고 하였다. 이 불각(不覺)을 깨뜨리면 각(覺)이 된다. 무명(無明)이 명(明)이 되는 것이고 무지(無知)를 깨치면 반야지혜가 열리는 것이다. 이것을 깨닫는다고 한다. 이 깨달음은 여래나 진여의 지적인 활동을 뜻한다. 자성청정심은 여래장이 중생에게 있을 때 여래의 성품이 번뇌에 덮여있기는 하지만 중생에게 있는 여래성은 언제나 번뇌에 의해서 소멸되지 않고 청정성을 유지하는 것을 나타낸다. 그리고 진여란 기본적으로 마음에 번뇌가 없는 상태를 가리키지만 진리의 원칙이라는 뉘앙스를 강하게 풍기고 있다.

{기신론}은 우리 중생에게 본래적으로 있는 깨달음을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한다. 한 가지는 번뇌의 세계에 있는 본래적인 깨달음이요, 다른 한 가지는 청정한 성품 그 자체로서의 본래적인 깨달음이다. 먼저 번뇌의 세계에 나타나는 본래의 깨달음을 설명하기 위해서 {기신론}은 불교에서 자주 쓰이는 바람과 파도와 물의 성질을 비유로 이용한다. 바닷물은 바람의 원인으로 파도를 일으키고, 물과 파도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바람이 그치면 파도가 그대로 바닷물이 된다. 마찬가지로 미혹한 무명의 광풍이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서 온갖 번뇌의 세계를 만들지만 그 무명의 바람이 쉬거나 쉬지 않더라도 무명의 바람이 일어나고 쉬는 모습을 여실히 보면 바로 그 자리에 본래의 깨달음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날, 차창 앞 유리의 와이퍼가 완전히 멈춘 다음에야 본각(本覺)이라는 전방을 보는 것이 아니라 와이퍼가 바삐 빗물을 닦아내고 있는 그 상태, 그대로에서 '본래 깨달음'이라는 전방을 본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번뇌 속에서 본래의 깨달음을 본다고 해서 세상의 잘못되는 일을 팔짱을 끼고 구경만 하는 것이 아니다. 잘못되는 것은 잘되게 하고 중생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을 유익하게 하는 행동이 이 번뇌 중에 있는 본래의 깨달음에 포함되어 있다.

청정한 성품으로서의 본래적인 깨달음은 거울의 비유로 설명된다. {기신론}은 거울의 네 가지 상황을 예로 든다. 거울에 먼지도 없고 또 거울 앞에 비출 것도 없는 것과 같은 아무 번뇌망상도 일어나지 않은 그러한 상태가 본각(本覺)의 일면이 된다. 번뇌가 없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진여라는 거울이 사물을 지어서 비추지 않고 있는 그대로 비추는 그러한 본각의 일면도 있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비추는 본각의 거울이 멍한 상태로 반사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전체를 다 밝게 하는 지혜와 일치하게 비추는 본각의 일면도 있고, 우주지혜와 일치하게 비추는 본각의 거울이 그저 지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좋고 유익한 일이 생기게 하는 힘이 나도록 비추는 그러한 본각의 일면도 있다.


2) 불각(不覺)을 각(覺)으로

근본 일심이 흔들려서 망념(妄念)을 일으키고 그 망념으로부터 삼라만상(森羅萬象)이 벌어진다. 이 미혹에 의해 업을 짓고 업에 의해 고통을 받는다. 이 윤회의 과정을 {기신론}은 깨닫지 못하는 불각(不覺)이라고 부른다. 이 불각에 유명한 삼세육추(三細六 )의 9단계가 있다. 망념을 일으켜서 미혹의 길로 가는데 세 가지 미세한 단계와 여섯 가지 거친 단계가 9가지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진여심에서 어긋난 마음(不覺)으로 인해 우선 세 가지 마음 상태가 뒤따른다. 무지로 인해 마음이 출렁거려 업(業)이 시작되는 단계인 무명업상(無明業相), 출렁거린 마음이 '보는 자'로 자리잡는 단계인 능견상(能見相) 또는 전상(轉相), '보는 자'로 인해 '보이는 것들'이 자리잡는 단계인 경계상(境界相) 또는 현상(現相)이 그것이다. 이것이 세 가지 미세한 단계들(三細)이다.

이어 여섯 가지 거친 마음 상태가 꼬리를 문다. 보이는 것들에 대해 마음이 '좋다'든가 '좋지 않다'라는 분별을 일으키는 단계인 지상(智相), 그 분별심으로 인해 좋다고 여긴 것에 대해서는 즐거움을 느끼고 좋지 않다고 여긴 것에 대해서는 괴로움을 느끼는 마음이 이어지는 단계인 상속상(相續相),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에 마음이 달라붙는 단계인 집취상(執取相), 그 집착하는 것 때문에 즐겁거나 괴로움을 주는 것들에 붙여진 이름에 해당하는 그 어떤 불변의 것이 실제로 있다고 여겨 이름을 따라 분별하는 단계인 계명자상(計名字相), 분별된 이름을 좇아나가 이 이름 저 이름에 집착하면서 진실을 등진 갖가지 행위를 일으키는 단계인 기업상(起業相), 그 행위들로 인해 초래된 불안과 혼란과 고통에 휘말려 자유와 평안을 상실한 단계인 업계고상(業繫苦相)이 그것이다.

이러한 삼세육추설이 깨달음의 소식과 관련해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참선하여 깨달음을 연다는 것은 일종의 '인식 혁명'을 이룩하는 측면을 지닌다. 우리 마음에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요리하는 틀 혹은 버릇이 본능처럼 자리잡고 있다.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세계 해석의 틀이나 버릇이 견고하게 자리하고 있다. 더욱이 그 틀이나 버릇은 사물의 진실을 근본적으로 왜곡시켜 그로 인한 후유증으로 인간의 삶을 엉망으로 만들고 있다. 삼세육추는 그 인식의 틀 혹은 버릇의 내용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삼세육추의 근저가 되는 것이 최초의 근본무명이다.

먼저 근본적으로 깨닫지 못했다는 근본불각(根本不覺)에 대한 {기신론}의 설명을 들어보자. 깨닫지 못함이라고 하는 것은 중생심의 진여가 오직 하나이면서도 온 법계 전부임을 여실하게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 상태에서는 깨닫지 못한 마음이 일어나서 그에 따른 비교하는 마음이 생긴다. 이 비교심은 상대적 빈곤감이나 상대적 불행감을 갖게 한다. 그러나 그 망념(妄念)은 본래의 깨달음인 본각(本覺)에 부수되어 있을 뿐이다.

가령 길을 잃은 사람은 갈 곳을 정했기 때문에 길을 잃는다. 가야 할 방향이나 갈 곳을 정하지 않는다면 길을 잃었다는 말이 의미가 없을 것이다. 중생의 마음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그들이 길을 잃는 것은 충족될 수 없는 상대적 목표를 정해 놓기 때문이다. 만약에 상대적 목표가 없다면 실패할 것도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만약 깨닫지 못한 마음에서 벗어난다면 구태여 새삼스럽게 참된 깨달음을 언급할 필요가 없다. 한 마음이 주관과 객관으로 분열해서 온 세계가 벌어졌다는 도리를 모르는 데서 근본적으로 깨닫지 못했다는 불각의 발단이 있다. 그래서 {기신론}은 길을 잃은 사람은 갈 곳을 정했기 때문에 길을 잃는다고 말한다. 마음이 주관과 객관, 세상만사 모든 것임을 안 마당에는 새롭게 깨달음을 찾아 나설 것도 없는 것이다.

삼세육추 즉 세 가지 '미세한 깨닫지 못함'과 여섯 가지 '좀 거친 깨닫지 못함'을 지말불각(枝末不覺)이라고 한다. 미세하다는 것은 우리가 현실적으로 알지 못할 정도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고 거칠다는 것은 우리가 현실적으로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두드러진다는 것이다. 삼세육추의 첫 번째는 미혹무명의 업이 발동하는 것이다. 마음의 본성인 진여를 알지 못하고 홀연히 망념(妄念)을 일으키는 것이 바로 무명(無明)이다. 무명이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는 그 이전의 설명이 없다. 무명이 과거에 있던 어떤 원리로부터 연역되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홀연히 망념이 일어나는 것을 경험적 사실로 인정해서 그곳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무명의 체는 없지만 사물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한 상태에서 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어떤 불자들은 "부처님은 왜 무명이 일어나게 하느냐? 부처님이 무명을 허용한 것은 기독교의 조물주가 사람을 시험하고 죄를 만들고 고통을 주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고 묻는다. 하지만 기독교에서의 선악과 죄, 심판의 이야기와 불교에 있어서의 무명은 그 출발점이 아주 다르다. 기독교의 신은 인격신(人格神)이다. 그래서 신이 사람이 가지는 감정과 기분을 가지고 사람을 시험하고 죄와 벌을 내린다. 불교에서의 무명은 부처님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부처님이 내린 벌도 아니고 부처님이 있게 해서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무명(無明)이란 실제로 있는 것도 아니다. 중생이 사물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지 못할 때 그것을 무명(無明)이라고 한다.

이 무명의 업으로부터 주관과 객관이 갈라진다. 무명의 업(業), 주관, 객관 이 세 가지가 미세한 지말(枝末)적인 모름이다. 이것은 우리가 느낄 수 없으므로 미세하다고 한다. 이 분열된 주관과 객관으로 인해서 안다는 마음이 생기고 그 앎이 지속되어서 굳어진다. 그 앎을 당연시해서 집착하고 그에 의해 새로운 개념과 언어와 가격표 붙이기가 일어난다. 이어서 업을 짓게 되고 그 업의 결과로 과보를 받게 된다. 미혹과 악업과 괴로운 과보의 악순환이 계속 되면서 깨닫지 못하는 불각의 세계 즉 윤회의 세계가 펼쳐지는 것이다. 이것이 여섯 가지 거친 지말(枝末) 불각이다.

이 망념을 없애는 데는 그 반대방향으로부터 시작한다. 밖에서 구하려는 망녕된 생각의 없어짐과 바뀌어짐과 머무름과 생겨남을 차례로 없애는 것이 바로 깨닫지 못함에서 깨달음으로 가는 시각(始覺)의 과정이 된다.


3) 훈습(薰習)을 돌리기

{기신론}에는 훈습(薰習)이 나온다. 꽃밭에 가면 꽃향기가 몸에 배고, 생선가게에 가면 비린내가 몸에 밴다. 우리가 진여(眞如)의 마음으로부터 멀어져서 윤회의 세계로 타락하거나 윤회의 세계로부터 진여의 세계로 올라가는 데는 훈습의 힘이 크게 작용한다. 훈습은 우리 중생에게 무슨 문제를 일으키고 우리가 깨달음의 세계로 되돌아가려면 어떻게 훈습의 원리를 이용해야 하는지 {기신론}의 훈습의 원론부터 들어보자.

훈습(薰習)이라는 것은 사람의 옷이 그 자체로서는 냄새가 없지만 사람이 그 냄새를 오랫동안 배게 하면 냄새를 가지게 되는 것과 같다. 우리 마음에도 이와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 우리 마음의 진여가 원래 물든 것은 아니지만 미혹한 무명이 계속적으로 영향을 주면 그 마음이 망념으로 물들게 된다. 반면에 미혹에 물든 마음이 깨끗하지 않더라도 진여가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면 본래의 깨끗한 기능을 회복하게 된다.

무명(無明)이 진여의 마음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망령된 마음이 생기고 그 망심(妄心)이 무명을 더욱 활발히 움직이도록 부추긴다. 순환적으로 나쁜 영향을 받은 망심(妄心)은 헛된 대상경계를 일으키고 그 망령된 대상경계가 다시 망심을 더욱 기승을 부리도록 한다. 이 과정을 통해서 마음에 집착이 생기게 되고 나쁜 뜻을 품고 나쁜 행동을 해서 마침내 괴로운 과보를 받게 된다.

{기신론}에서는 보다 함축적인 의미를 가진 딱딱한 말로 설명하지만 대중이 다같이 {기신론} 속으로 깊이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에 쉬운 말로 간추려 본다. 무명(無明), 진여(眞如), 망심(妄心), 망경계(妄境界), 집착(執着), 의지(意志), 행동(行動), 고통(苦痛)의 과보(果報)라는 말들을 이어 보면 무명이 진여에 영향을 미쳐서 망심이 생기고 망심이 망경계를 일으킨다. 망심과 망경계 사이에 집착심이 생기고 상속시켜서 잘못된 의지와 행동이 뒤따른다. 결과적으로 나쁜 과보를 받게 된다.

그렇다면 이제 평범한 중생이 고해에 허덕이는 상태에서 진여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훈습을 보자. 깨끗한 진여의 마음이 무명을 훈습하면 이미 있던 망심이 생사를 싫어하고 열반을 구하게 된다. 망심의 이런 자세는 진여가 더욱 활발하게 무명을 훈습하도록 한다. 이 과정 속에서 마음의 진여본성에 대해서 믿음을 가지게 된다.

이제는 눈앞의 경계가 마음의 헛된 움직임이라는 것을 알고 그것을 점점 초월하게 된다. 눈앞의 사물은 객관적으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으로 만들어 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마음은 갖가지 방편을 동원하여 진여로 향한 길을 걸으면서 모든 집착과 망념을 끊어버린다.

이 같은 오랜 훈습의 결과로 무명이 사라지고 무명이 사라짐에 따라 망념이 일어나지 않고 망념이 일어나지 않음에 따라 망경계도 또한 사라진다. 안에서는 진여자체의 힘이 발휘되고 밖에서는 진여가 본래적으로 가지고 있는 불가사의한 성능이 발휘된다. 그래서 마침내 열반에 이르게 된다.

윤회에서 열반으로 되돌아가는 훈습의 과정은 진여의 세계에서 윤회의 세계로 타락되어 가는 과정과 정반대이다. 인간의 겉으로 드러난 본능은 욕망이고 번뇌이고 미혹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인간은 그러한 욕망의 충족만으로 만족하게 되어 있지 않다. 겉으로 드러난 본능 뒤에 본래적인 본능이 있다. 본래적인 본능은 바로 진여의 본능이다. 이것이 깨끗한 마음의 본능이다. 그 본능이 고개를 들고 일어난다는 것이다. 우리 마음을 돌아보면 그 참마음의 본능이 꿈틀거리고 있다. 이것을 양심이라고 해도 좋고, 본분자리라고 해도 좋고, 열반묘심(涅槃妙心)이라고 해도 좋고, 깨달은 마음, 진심(眞心) 혹은 깨끗한 청정한 마음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하여튼 일단 깨끗한 마음, 진리를 구하는 마음, 내 마음의 참얼굴을 보고싶어 하는 마음을 내서 미혹의 마음을 조금씩 물리치기만 하면 거기서부터 열반으로 가는 훈습은 발동이 걸리게 된다. 이것이 바로 발심(發心)이고 발보리심(心)이다. 일단 시동이 걸리고 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하면 거기에 동력의 관성이 붙어서 {기신론}이 말하는 대로 열반에 이르게 될 것이다.


4) 체(體), 상(相), 용(用) 삼대(三大)의 기능

{기신론}은 우리의 마음을 세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한다. 마음의 본체와 마음의 양상과 마음의 작용이다. 이 본체(本體), 양상(樣相), 작용(作用)을 삼대(三大)라고 하는데 세 가지 큰 것이라는 뜻이다. 체상용(體相用)에 큰 대자를 붙인 것은 우리의 마음이 가진 특징과 마음의 작용력이 광대하고 무변한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기신론}은 체상용으로 마음을 분석하면서 유아(有我)와 무아(無我)의 공존을 이해시키고 왜 무아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수행을 하고 우리의 환경, 우리의 국토를 장엄해야 하는가를 설명한다.

진여(眞如)인 본체와 양상이 크다는 점을 설명해 보기로 하자. 진여는 중생에게는 적고 부처님에게는 더 많다거나 그 반대도 아니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있다. 진여의 체와 상은 과거 언젠가 생긴 것도 아니오, 미래 언젠가 없어질 것도 아니다. 끝까지 영원히 있을 것이다. 마음의 진여는 처음부터 본성 속에 온갖 훌륭한 공덕을 갖추고 있다. 진여(眞如)의 체와 상은 온 세계를 비추는 지혜의 빛이기도 하고 참됨과 깨끗함의 원천이기도 하다. 진여의 체와 상은 진정한 상락아정(常樂我淨)이다. 진여의 체와 상은 여래장(如來藏)이라거나 여래(如來)의 법신(法身)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체와 상은 우리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다. 지혜, 진리, 깨끗함, 영원함 등이 그 자체의 본래성품이다. 그래서 마음의 체와 상을 여래장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여래법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여래법신은 부처님의 세 가지 몸인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 중에서 법신(法身)을 말한다. 여기서 법신(法身)은 우주진리 그 자체이고 보신은 중생의 몸으로 수행을 해서 얻은 부처님의 몸이다. 그리고 화신은 법신으로부터 중생의 세계로 내려온 자비를 시현(示現)하시는 부처님이다.

{기신론}이 마음의 본체와 양상을 법신이라고 하는 데 그 묘한 의미가 있다. 이 법신은 이 우주에 꽉 차 있지만 중생이 직접적으로 접촉할 수 있는 부처님이 아니다. 밀교에서는 달리 표현하고 있기는 하지만 일단 중생은 보신과 화신만 볼 수 있다. 법신을 공기처럼 숨쉬고 있으면서도 중생은 알아보지 못한다. 깨달은 이에게만 보이는 것이다. 적어도 혜안(慧眼)과 법안(法眼), 그리고 불안(佛眼)으로만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진여(眞如)의 마음작용이 크다는 점을 설명하겠다. 깨달아서 진여와 일치한 마음은 보통 수행자들과 같이 미혹의 세계에 살면서 바라밀을 행한다. 그 마음은 대자비심과 대원력을 일으켜 모든 중생을 건지고자 한다. 진여에 계합하여 일치한 마음은 중생과 자신을 동일하게 생각하지만 중생과 똑같게 되지는 않는다. 진여와 일치한 마음은 두 가지로 나타나는데 보신(報身)과 응신(應身) 또는 화신(化身)이다.

진여의 마음이 기능이나 작용으로 나타날 때, 아주 위대하게 되는데 그 마음이 바라밀, 즉 중생을 피안으로 인도하는 일을 행하기 때문이다. 이 참마음의 기능은 중생 속에서 중생을 구하고자 하는 원을 발하고 자비심을 낸다. 중생과 같이 바라밀을 행해서 그 과보를 얻는다는 점에서 보신이요, 법신(法身)의 자리로부터 나와 중생을 위해 행한다는 점에서 화신이다.

체상용 삼대에서 중요한 것은 용대(用大)의 기능이다. 내 마음이나 마음의 그림자인 모든 사물은 언제나 일으키기만 하면 나타나게 될 불과 같다. 내 마음은 중립의 상태에 있다. 그 마음의 기능이나 활용을 어떤 방향으로 끌고 가느냐에 따라서 불국토를 장엄하는 사람도 되고 불국토를 부수는 사람도 된다.

{금강경}의 방식대로 삼대를 말한다면 체대(體大)와 상대(相大)는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는 것이고 용대(用大)는 불국토를 장엄하는 것이 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불국토의 장엄은 깨끗한 마음으로 꾸며진 지극히 행복하고 영원한 생명이 너울대는 파라다이스이다. 이 불국토의 장엄은 우리의 더럽혀진 마음에서 깨끗한 본래의 마음상태로 돌아가는 것이고 이것이 본래 갖추어진 여래장에 노니는 {기신론}의 가르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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