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가 조사선 지도자
김태완 무심선원 원장을 만나다
취재 | 전현자 (미주현대불교 한국주재기자)
기자: 인터뷰 허락 고맙습니다. 미주현대불교 독자분들을 대신하여 인사드립니다.
선원장: 예, 반갑습니다.
기자: 부처님의 가르침을 법문으로 인도하여 주신다고 알고 왔습니다.
선원장: 예. 설법을 하죠.
기자: 설법을 하시는 분께서 법을 충분히 이해하셨다, 체득하셨다고 해도 될까요?
선원장: 이해라기보다도 제 경험을 그냥 얘기하는 거죠.
기자: 경험을 말씀해주시면 듣는 분들께서 충분히 만족을 하십니까?
선원장: 만족이라기보다도, 불교를 공부하는 이유가 마음이 편해지려고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여기에 오시는 분들이 그런 뜻을 가지고 찾던 분들이 주로 오시는 거죠. 제가 책도 좀 냈고, 또 인터넷에 무심선원 홈페이지도 있고, 유튜브에 저의 법문도 많이 올려져 있습니다. 그런 걸 보시고 찾아오시는데, 어쨋든 선이란 이름으로 얘기하죠.
기자: “선”은 '참선 선'자이겠습니다.
선원장: 참선이죠.
기자: 선에 대한 것을 선생님께서 직접 참구하시고 가르침을 주시는 겁니까?
선원장: 참구?
기자: 예. 수행을 하셨냐고요?
선원장: 경험을 했죠. 제가 경험한 대로 얘기를 합니다. 원래 저는 대학에 있었어요. 대학에서 학부는 철학을 전공했고 대학원에 가서 불교를 전공하게 되었는데, 석사 때는 불교학을 전공했고 박사 과정에서 선(禪)을 전공했어요, 학문적으로. 그렇게 공부하다가 학문적으로는 해결이 안 될 것 같아서 스승을 찾았죠. 그리하여 스승님을 만나고 그 문하에서 공부를 했는데, 뭐 딴 공부는 없고 그냥 법문을 들었습니다.
기자: 아, 그러셨군요.
선원장: 네. 법문을 계속 들었죠, 몇 년간. 그러다가 체험을 했죠. 해탈 체험이랄까요? 하여튼 굉장히... 보통 선에서 얘기하는 체험입니다.
기자: 선에서 얘기하는 체험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요?
선원장: 불교에서 말하면 그것을 깨달음이라고 할 수도 있겠고, 해탈이라고 할 수도 있겠죠. 열반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고요.
기자: 그러면 깨달음, 해탈을 이루신 그 경험으로 지금 법문으로 하시는 것이군요.
선원장: 그렇죠.
기자: 요약해서 설명해주신다면?
선원장: 사실 말로써 설명할 수는 없는 거죠. 그렇지만 억지로 말한다면, 어쨌든 이렇게 말할 수 있겠죠. 과거의 자기로부터 탈피해서 새로운 사람이 된다고 할까요? 그런 얘기를 할 수 있겠고, 또 과거에는 삶에 꽉 묶여서 살았다면 이제는 그것에서 풀려났다고 할까요?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고, 또 과거에는 마음에 갇혀서 마음이란 장벽을 넘지 못하고 벗어나지 못하여 항상 갇혀 있는 답답함이 있었다면, 이제는 그것에서 풀려났다고 할까요?
기자: 어느 정도 풀려난 것을 해탈이라고 하는가요? 선생님 말씀하시는 것으로는요?
선원장: 마음이라고 할 것을 찾아보면 없다고 할 수 있겠죠.
기자: 그러면 마음이 없다는 걸 체득하셨군요?
선원장: 예, 그렇죠. 말을 하자면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기자: 그러면 지금 무엇이 말씀하십니까?
선원장: 뭐가 말을 하냐고요? 입이 말을 하죠.
기자: 단지 입이 말을 하세요?
선원장: 예, 그렇죠. 말을 뭐가 합니까? 코가 합니까, 눈이 합니까?
기자: 그 때에 입이라는 것은 입만이 아니라 언어로 표현하는 입과 목 혀등도 작용하지 않습니까?
선원장: 우리가 생각을 하면 다 그렇게 알죠. 그런데 그것은 생각이죠. 그런데 그것을 말로써 완벽하게 설명할 순 없어요. 마음이 없다고 말하면, 다들 당연히 그렇게 묻지요. 마음이 없다면 지금 말하고 보고 듣고 느끼는 건 뭐냐? 이렇게 묻겠죠. 그런데 그것을 사람들은 마음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기자: 선생님의 표현으로 하신다면 지금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이고요.
선원장: 보기도 하고 듣기도 하고 말도 하지만, 마음은 없어요.
기자: 아, 마음은 없으세요? 매우 흥미롭네요. 그러면 배우시는 분들께서도 선생님만큼은 아니더라도, 어느 만큼이라도 선생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것을 체득해 가고 있는지요?
선원장: 그렇죠. 경험하는 분들이 많이 있죠.
기자: 그러면 제가 구체적으로 다시 여쭙고 싶습니다. 선생님의 스승님은 어떤 분이셨는지요?
선원장: 아, 제 스승님은 지금은 돌아가셨는데, 그 분도 재가자입니다. 거사 분이고 오랫동안 선을 공부한 분이죠. 그렇지만 이름이 알려진 유명한 분은 아니에요.
기자: 그 분께서도 법문을 하셨습니까?
선원장: 그렇죠.
기자: 법문을 들으시다가 어떤 법문에서 해탈을 경험하셨는지요?
선원장: 어떤 내용을 이해한 건 아닙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 무슨 말씀을 했는지 기억할 순 없어요. 다만 기억나는 것은 여름이었어요. 한여름이어서 문을 활짝 열어놓고 법문을 하셨고, 선풍기를 틀어 놓고 있었죠. 그 당시 상황이 기억나는 거예요. 매미 소리가 시끄럽게 들리고 있었죠. 그런 상황에서 법문을 듣고 앉아 있는데 어느 순간에... 법문이란 게 늘 비슷한 말씀을 하시니까 사실 귀를 기울여서 주의 깊게 듣지는 않고 그냥 편안하게 듣지요. 편안하게 듣고 있는데 어느 순간에 “이게 선이다.”라고 하시면서 방바닥을 탁탁 몇 번 치시더라고요. 그 순간에 뭔가 마치 미사일이 귀에 박힌다고 할까요? 뭐가 귀에 확 들어오더라고요. 확 들어오면서 막혔던 게 쑥 내려간다고 할까요? 그런 비슷한 느낌이었는데, 그 때는 그게 뭔지 몰랐죠. 그런데 법회를 마치고 집에 가는데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요. 마음이 가볍고 옛날과는 내가 좀 달라진 거 같았어요. 그때부터 변화가 시작된 겁니다.
기자: 특별히 귀 기울여 들으실 것이 없으셨는데, 그래도 그 법문의 핵심은 무엇이었습니까? 혹시 기억하시나요?
선원장: 선에서 법문이라는 것은... 우리가 보통 선이라고 하면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고 말하거든요. 모든 선법문은 결국 그 표현 그대로 마음을 바로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설명하는 건 아니에요. 핵심적으로...
기자: 스승님께서도 (손가락을 세우면서) 늘 이렇게 가르키셨습니까? 깨달음을 표현 하실때요?
선원장: 가끔씩 그렇게 하셨죠.
기자: 마음이 가벼워지고 변화가 시작됐다고 하셨는데, 그 때 점차적으로 변화한 내용을 기억하시는 대로 알려 주시면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선원장: 그게 이제 정확한 기억은 안 나지만 대충 얘기를 하자면, 그러고 나서 며칠 뒤에 옛날 선사들의 어록을 보았는데 옛날에는 전혀 그 말들이 무슨 말인지를 몰랐는데, 이제는 알 것 같았어요. 정확하게 이해를 하는 건 아니었지만 알 것 같았어요,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를. 그런 식으로 점차점차 뭔가 그렇게 수용이 되고, 그 다음 그 당시 강렬하게 기억나는 느낌은 우선 첫째로 숨이 막혀서 죽어가던 사람이 다시 숨을 확 쉬면서 살아난 느낌이랄까?
그 전까지 제가 대략 3년 정도 법문을 들은 것 같아요. 처음에 어떤 분의 소개로 법회를 찾아갔지만 앉아 있기가 힘이 들더라구요. 왜냐하면 법회의 분위기가 제가 지금까지 생활해 온 학교의 분위기와는 너무 달랐으니까요. 모두들 단순히 앉아서 1시간, 2시간씩 법문만 듣고 있는데, 그 말씀은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씀이었죠. 왜냐면 저는 학문을 했으니까 웬만한 책은 다 봤기 때문에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거든요. 하지만 자꾸 “이거다.” (법상을 똑! 똑! 두드리면서) 하고 말씀하시는데, 저는 실제 체험이 없었기 때문에 이건 도대체 모르는 거예요. 전혀 와닿지를 않았으니까요.
그 밖에 옛날 선사에 대한 이야기, 일화, 불교 경전에 나오는 이야기들, 이런 것들은 이미 내가 다 아는 얘기에요. 그런 책을 저도 그 전에 많이 봤기 때문에 그런 건 별로 재미가 없었어요.
그래서 그런 이야기는 안 듣는 거지요. 들어도 재미도 없고, 또 내가 전혀 깨달음이 없으니 내 나름대로 이해해서 될 일도 아니었죠. 실제로 체험이 와야 하는데 체험이 안 오니까, 거기에만 계속 막혀 있었던 거죠.
그러니까 처음에 6개월 정도는 정말 재미가 없었어요. 지겨웠죠. 그런데 한 6개월 지나니까 이상하게도 거기 앉아서 법문을 듣는 게 편해지더라고요. 그때는 대학교에서 강사 생활을 할 때거든요. 학교에서 생활하다 법회에 가면 편안하고, 학교로 돌아오면 오히려 복잡하게 느껴졌죠. 그렇게 재미를 붙여서 계속 참석하여 설법을 들었죠. 그렇지만 모르겠더라구요. 아무리 들어도 와닿는 게 아무것도 없었어요.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않는 것 같았어요. 그렇게 시간을 보냈지요.
몇 년이 지났는지 모르겠지만 어느 날 학교에서 수업을 마치고 버스를 타려고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 공부는 내가 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내 힘으로는 안 된다. 불가능하구나.’ 이런 생각이 확 들더라구요. 그러니까 이제 더욱 절망적인 상황이 되었죠. 저는 선을 전공했는데 박사논문을 써야 하지만 아무런 선적 경험도 없고, 그렇다고 책만 갖고 논문을 쓰기엔 너무 마음에 들질 않고. 책에만 의지하여 논문을 쓰는 것은 남의 말만 가지고 쓰는 것이니까 저 스스로에게는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았죠. 그래서 논문을 쓸 수가 없었죠. 그러나 이 선공부도 안되니 어쨌든 굉장히 절망적이었어요, 그 때는.
그래도 법문을 끊을 수는 없어서 계속 법회에 나갔지만, 뭐랄까, 아무 의미도 없는 곳에 아무 노력도 할 수 없으면서 그냥 왔다 갔다 하는 것 같아서, 정말 꼭 무슨 영혼이 없는 사람이 이유도 없이 습관적으로 오고가는 그런 느낌이었어요.
그러다가 갑자기 그런 경험이 확 오고 나니까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느낌이 들고, 또 숨이 꽉 막혀 있다가 다시 숨을 깊이 들이쉴 수 있는 그런 느낌도 들고, 또 마음속에 갇혀서 그 안에서만 계속 맴돌다가 문득 방문을 확 열고 밖으로 나왔는데 끝없이 넓은 세계가 펼쳐져 있는 느낌이랄까, 하여튼 뭐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 그 당시에는.
기자: 그것은 선생님의 경험적 체험이신데, 좁혀 생각하면 단지 생각일 수도 있다고 판단한다면 어리석음인가요?
선원장: 생각은 아니지요. 왜냐면 그거는 내 생각과 관계없이 내면에서 일어나는 변화였기 때문에.
기자: 그런 것이 지금까지 지속됩니까?
선원장: 아니죠. 계속 변화가 있는 거죠.
기자: 어떤 식의 변화가 생겼습니까?
선원장: 그러고 나니까 선사들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 것 같았죠. 아, 이래서 사람들이 공(空)이란 말을 했구나 하고 말이죠. 마음이 허공처럼 넓은 그런 쪽으로 빠져나와서 마음이란 게 한계가 없는 것 같은 그런 느낌도 들었죠. 또 이제 생각이 멈춘다고 할까요? 생각을 하지 않는 건 아닌데, 생각이 없는 것 같아요.
기자: 생각이 없는 것 같은 걸 아는 것은 무엇이 압니까?
선원장: 그런 생각을 안 하죠. 그렇게 따지고 계속 생각을 하면 생각에 메여서 못 벗어나는 겁니다, 그게.
기자: 경전을 읽어보시고 하셨을 때도 거기서 별로 도움이 없고 진리가 없다고, 말씀 하셨는데요!
선원장: 그렇게 경전을 읽고 이해하는 건 다 생각이죠. 그런건 전부 다 이해이고, 생각이고, 머리로 하는 거죠. 그렇게 이해하여 실제 마음의 변화가 있는 건 아니니까요.
기자: 부처님께서 깨달으시고 그 깨달음을 말씀하신 것이 글로 쓰여져 경전이 되었는데요!
선원장: 저는 대학원의 석사과정에서 불교학을 전공하면서 근본불교, 초기불교, 부파불교를 따라 쭉 제 나름으로 불교 교리를 한번 정리했거든요. 그러고 나서 소승의 아함경을 조금 보고, 대승의 중요한 경전과 논서 같은 것들도 대강 읽어 보았어요. 제가 그렇게 경론을 읽으면서 얻은 게 하나 있었어요. 나가르주나의 <중론>을 몇 번 읽었는데, 거기서 얻은 결론이 뭐냐면 ‘우리의 생각을 넘어선 곳에 깨달음이 있구나. 그런 가르침이구나.’ 저는 <중론>에서 그런 결론을 얻었어요. 그러고 나서 교리공부를 그만두고 선으로 전향을 한 거예요. 그 당시에 경론에서 그런 걸 얻었지요.
기자: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이루시고 나서 비구들에게 법문을 하셨고, 그 법문을 듣고서 수다원과를 얻고 그 다음에 아라 한과까지 얻었다고 하는 그런 면을 보면 법문을 통해서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런가 하면 열심히 수행 정진한 뒤에 깨달음을 이룬 경우가 많습니다.
선원장: 통찰이나 직관이 여러 방법으로 있을 수 있겠죠.
기자: 부처님께서 첫 번째 수다원을 이루게 하신 것이 5비구에게 법을 설하신뒤니, 법을 설하시고 그 법을 듣고도 성자의 길에 이르는 사례입니다. 선생님도 법문을 통해서 가르침을 주신다고 하니까, 선생님에 법문을 통하여 가르치실 수 있는 내적 체험과 그 다음에 그것이 어떻게 지금 활용되고 있는가하는 것을 독자분들에게 알려 드리려고 이런 질문들을 하고 있습니다. 말씀하신 해탈의 경지에서 그럼 그것이 해탈의 경지인지를 무엇이 아느냐고 여쭈었을 때에 하신 답변이 좀 애매모호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다시 한번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선원장: 원래 애매모호한 거에요. 왜냐면, 경전에 보면 해탈은 불가사의해탈법문(不可思議解脫法門)이라고 분명히 되어 있거든요.
기자: 어느 경전 어디에요?
선원장: <유마경>에 있죠.
기자: 유마 거사는 부처님이 아니시죠!
선원장: 유마 거사가 한 말이 아니에요. 부처님이 하신 말씀이죠. <유마경>에 부처님이 등장을 하죠. 유마 거사도 있지만 부처님이 등장해 설법을 합니다. 그리고 만약 해탈이 불가사의하지 않고 우리가 분별할 수 있다면, 그것을 해탈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머리로 분별한 건데요.
기자: 저는 분별지를 이야기한 건 아니구요.
선원장: 그러니까요.
기자: 확고하게 그 경지를 경험한 것이라면...
선원장: 그러니까 그거는 머리로써 분별하는 게 아니고 마음이 하는 거죠. 마음이 풀려나고, 마음에서 장애가 없어지고, 마음이 어떤 경계나 무슨 개념이나 견해에 얽매이지 않죠. 굳이 말을 하자면 그런 자유를 얻는 것이지 머리로써 이해하는 건 아니죠.
기자: 머리로 이해된 것이라고 질문 드린 것은 아닙니다.
선원장: 무엇이 압니까? 이렇게 따지면 그건 이해거든요. 왜냐면 이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육하원칙에 따라서 이뤄지거든요. 누가, 언제,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하는가? 그런데 깨달음은 그런 게 아니에요.
기자: 깨달았다는 것은 마음이 안다고 하셨는데, 그러면 그때 그 마음은 무엇입니까?
선원장: 마음이 뭐냐고요?
기자: 네.
선원장: 무엇이라고 하면 안 되죠. 왜냐면 벌써 그건 생각이거든요. 그렇게 되면 마음이 아니라 이해죠.
기자: 법문을 하시며 깨달음의 길로 인도하신다기에...
선원장: 법문을 하죠.
기자: 예. 법문을 하신다면 마음이란 단어가 뭐냐고 물었을 때에 답을 어느 정도라도 말씀하셔야 하지 않을까요? 예를 들면...
선원장: 마음이란 단어를 물을 때 이렇게 답을 할 수 있을 겁니다. 쿵!(탁자를 두드린다)
기자: 선원장과 여기서 공부하시는 분들은 이걸로 모두 소통이 되는가요?
선원장: 알겠어요? (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이것이 무엇인지?
기자: 저요?
선원장: 알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에요?
기자: 아는 거 같아요, 모르는 거 같아요?
선원장: 그러니까 방금 말씀하신 게...
기자: 아는 거 같아요, 모르는 거 같아요?
선원장: 전혀 모르는 거 같습니다.
기자: 부처님께서는 가섭 존자에게 법을 설하시고 가섭은 15일 동안 수행정진을 해서 깨달음을 이루었다라고 <차례경>에 나와있습니다.
선원장: 저는 모르겠습니다.
기자: 모르세요? 그러면 니까야도 모르시고 <차례경>도 모르신다 하더라도, 부처님께서 깨달음에 대한 법문을 하시고 그 다음에 가섭 존자가 수행을 15일간 하셨어요. 그래서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었어요. 이처럼 부처님께서 수행을 가르치셨고, 가섭 존자가 수행을 하셨고, 그 다음에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었다고 공표를 하세요. 그 경에서 핵심은 수행을 했다는 것인데, 여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선원장: 뭐, 거기에 대해서 별 생각은 없어요. 여기서 제가 가르치는 건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 선에서 본래 그랬듯이, 선은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인데, 이걸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 하거든요. 저는 팔만대장경 가운데 소승경전은 아함경을 조금 보았지만 주로 대승 경전을 봤어요. 대승 경전은 지금은 보면 다 납득이 돼요. 왜 그런 얘기를 하고 있는지. 대승 경전에서는 수행을 어떤 식으로 하라는 말은 별로 없어요. 그냥 깨달음의 지혜를 주로 이야기하지요. 다시 말해 불이법문(不二法門)을 얘기해요.
제가 경험한 것이 무슨 수행 방법을 통해서 체험한 건 아닙니다. 저는 제가 경험한 것만 말할 수가 있죠. 누구한테 들은 얘기나 책에서 본 것을 말할 수는 없는 것이죠. 제가 경험한 것은 무슨 수행을 한 게 아니라, 설법을 듣다가 그런 체험을 했던 것이죠. 그 다음에 불이법(不二法)이라고 하는 것, 그게 뭔지 확신이 들더란 말이에요.
기자: 둘임이 무엇이고 둘 아님은 무엇입니까?
선원장: 이렇게 따지고 헤아리는 게 전부 둘이에요. 이걸 벗어나면 둘이 아닌 게 뭔지를 경험할 수 있죠.
기자: 선생님은 저하고 둘이 아니에요?
선원장: 따지면 둘이죠, 당연히.
기자: 그러면 안 따지는 분상에서 체득하셨다니까, 둘이 아니고 하나입니까?
선원장: 둘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둘에 대해서 상대적으로만 말할 수 있지, 둘이 아닌 것은 애초에 분별이 안 되는 거니까 말할 수가 없어요. 둘이라는 분별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둘이 아니라고 말할 수가 있을 뿐이죠.
기자: 선원장님의 특별한 법문을 듣다가 체득이 오는 그런 상황의 사람들이 아니고는 이해하기가 어렵겠습니다. 물론 어떤 사람은 말할 수 없다는 말에서 깨달음이 올 수도 있는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질문 드리는 것을 계속 언어세계로나 이분법적으로나 이성적으로만 질문한다고 판단하지 마시고, 선원장님께서는 체득을 하셨다고 하고 “깨달음의 세계는 불가사의하다”라고. 그것도 언어로 표현된 거 아닙니까?
선원장: 말할 수 없으니까 말할 수 없다고 말할 수는 있죠.
기자: 그래도 말씀을 하신다면 배우는 사람들이 그래도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요? 불가사의라는 말도 없었다면 그렇게 표현 할 수도 없는바 자비심에서라도 지혜로운 말씀으로 말을 할 수가 있지 않느냐는 거죠.
선원장: 그런 말을 제가 설법하는 시간 내내 하는 겁니다. 설법할 때에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거예요. 만약에 말할 수 있다면 많은 말이 필요가 없죠. 그것만 정확하게 말하면 되니까요. 말할 수 없기 때문에 한 시간, 두 시간, 백 시간, 나아가 팔만대장경처럼 수많은 말을 하는 겁니다. 왜? 불법은 말할 수 없기 때문에 불법에 관한 말은 전부 진실한 말이 아니고 방편의 말이기 때문입니다. 방편이란 말 아시잖아요? 부처님의 모든 말씀은 방편이죠. 방편이란 것은 진실이 아니란 뜻이에요. 방편이란 말은 진실과 상대되는 뜻의 말입니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달이라고 하지는 않거든요.
기자: 달을 모르는 사람에겐 달이 떠 있는 곳을 누군가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걸 보아야 달을 볼 수 있잖아요?
선원장: 그러니까 설법을 하죠.
기자: 달을 가르킨다하여 손가락이 달이 아니라는 것은 알지요. 선원장님께서 체득을 하시고 법문을 하셔서 깨달음으로 이끌어 주신다고 하여 질문 드린 것입니다.
선원장: 제가 어떻게 사람들을 이끄느냐 하는 게 궁금하신 거잖아요?
기자: 예.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로 할 수 없다”하시면 말로서 여쭐 것은 없겠지요.
선원장: 그런데 그거 결론이 아니에요. 그것도 하나의 방편의 말이죠.
기자: 선생님의 가르침의 방법에서 결론이라는 거죠.
선원장: 아닙니다, 그게 방법이 아닙니다.
기자: 그럼 뭐가 방법이에요?
선원장: 설법이라니까요.
기자: 그러니까 말할 수 없는 경지를 말로써 하시는 설법이 선원장님께서 진리의 길을 가게 하는 방법이라는 거죠?
선원장: 말할 수 없는 것을 말로써 하지만 듣는 사람이 이해는 안 되죠. 말할 수 없는 거기 때문에요. 말할 수 없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거잖아요? 그런데 말을 한단 말입니다. 말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을 계속 말하면, 사람들이 처음에는 이해할 수 있을 것처럼 들어요.그렇게 듣지만 들어 보면 이해가 안 되거든요. 그러면 이제 더욱 궁금해져요. 도대체 뭘 가리키려 하는지? 들으면 들을수록 더 궁금해지고 더 목이 마르거든요. 분명히 뭔 말을 하긴 하는데,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수가 없단 말이에요. 그렇게 목이 마르고 궁금해지고 꽉 막히거든요. 이것이 선에서 사람들을 이끄는 방편입니다. 제가 뭐소승 쪽은 잘 모릅니다.
기자: 소승이라 하시는데 초기 불교라거나 테라와다불교라고 하심이 어떠실지요.
선원장: 어쨌든 뭐, 예, 그런 수행을 통해서 단계적으로 올라간다는 그 쪽은 제가 경험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저는 거기에 대해서 잘 모르니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우리 선에서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그건 저만 그런 게 아니고 옛날 선사들이 다 그랬으니까요. 선에서는 배우는 사람에게 법이란 걸 보여줍니다. 보여주는데 절대로 이걸 이해하지는 못하게 합니다. 이해를 하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느끼거나 또는 어떤 식으로든 알지는 못하게 해요. 어떻게도 할 수 없게 만들어 버리거든요.
공부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어쨌든 자기는 깨달음이 뭔지 알고 싶어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선지식이 설법으로 가리켜 주니까 분명히 저기에 뭔가가 있겠구나 하는 믿음은 있지만 어떻게도 할 수는 없거든요. 이해할 수도 없고 어떻게 할 수도 없고 어떤 수행방법을 주는 것도 아니고, 그러면 그야말로 꽉 막혀요. 앞이 꽉 막힌다고요. 그걸 우리가 은산철벽(銀山鐵壁)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과 같다는 식으로 표현합니다. 그걸 다른 말로 하면 의단(疑團)이라고도 해요. 의문덩어리라는 말이죠. 왜냐면 아무 것도 알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에 전부 의문밖에 없다는 거죠. 또 금강권(金剛圈) 율극봉(栗棘蓬)이란 말도 씁니다. 금강권이란 금강석으로 만들어 놓은 감옥 속에 있다는 말인데, 전혀 빠져나올 수 없다는 뜻이에요. 율극봉이란 밤송이란 말인데, 목구멍에 걸린 밤송이란 뜻이거든요. 밤송이가 목구멍에 걸리면 아파서 뱉을 수도 없고 삼킬 수도 없어요. 선에서는 사람을 그런 진퇴양난의 정신적인 상황에 빠뜨려요, 기본적으로. 그게 선에서 사람을 이끄는 기본적인 방편입니다. 제가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고 있는 거예요. 저도 그렇게 공부를 했고요. 굳이 설명을 하자면 말이죠. 거기서 그렇게 꽉 막혀 있다 보면 어느 한 순간에 갑자기 변화가 일어나는 거예요. 그건 불가사의한 겁니다.
기자: 매우 고맙습니다. 그리고 반복되는 유사한 질문들에 차분히 설명해 주시어서요. 간화선 수행자들한테 가능하면 좀 더 의단과 의정이 일어나서 참구를 통해서 해탈할 수 있는 어떤 말씀을 요약해서 한 번 더 해주신다면?
선원장: 제가 하고 있는 것은 간화선이 아닙니다.
기자: 그러시면?
선원장: 간화선은 아니고, 제가 하고 있는 것에 굳이 이름을 붙이면 조사선(祖師禪)이라고 하거든요.
기자: 조사선이요.
선원장: 역사적으로 보면 조사선에서 간화선이 파생하여 나온 거죠. 간화선을 만든 사람은 본래 조사선 공부하던 분이었죠. 그 분이 고안해 낸 걸 간화선이라고 하지만 간화선에서도 결국 자기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경험을 해야 하니까 의단(疑團)을 말하죠. 간화선에서도 금강권 율극봉을 말하고, 또 쥐가 쥐덫에 갇힌 것과 같아야 한다고 하거든요. 쥐가 쥐덫에 처음 들어갈 때는 뭔가 먹을 게 있는 줄 알고 들어가지만, 들어가서 보니까 갇혀서 나오지 못하고 죽을 곳이죠. 쥐가 쥐덫에 갇혀 있다가 마침내 죽어야 다시 살아난다고 하는데, 그런 얘기는 우리의 경험과 유사하죠. 그분들의 문제는 화두라는 거를 갖고 어떻게 그런 상황이 만들어질까라는 것인데, 그것에 대해서는 저는 잘 모르겠어요. 제가 간화선 수행을 해 본적이 없기 때문에.
기자: 간화선이 아니라고 하시니까 선생님의 가르침을 통해서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하니까요.
선원장: 원래 중국에서 나타난 선은 조사선이에요.
기자: 중국에서 조사선이 발생해서 간화선 쪽으로 된거니까요. 선생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깨달음의 세계에 좀 더 다가갈 수 있는 가르침을 주신다면?
선원장: 이 공부는 무엇보다 자기가 발심을 해야, 마음을 내서 시작을 해야 합니다. 첫 번째는 우선 불교, 부처님이 깨달으시고 가르치신 진리가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 선을 통해서 역시 동일한 깨달음을 경험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해요. 믿음이 없으면 안 되는 거거든요. 이런 믿음이 있고 직접 그런 공부를 해보고자 한다면, 선지식을 찾아가서 그 가르침을 들어야 하죠. 기본적으로 이 세 가지죠. 다른 건 필요 없습니다.
기자: 조사선을 통해서도 부처님이 깨달으신 온전한 해탈을 이룰 수 있다는, 같은 경지를 경험한다는 것을 확신하고 그걸 믿으라고 하신다는 거죠?
선원장: 만약 그것을 믿지 않는다면 선을 공부할 수 없지요. 어떤 사람들은 선이 중국에서 만들어진 것이니까 불교와 관계없다고 말씀을 하시는 분도 있는데, 그런 사람이라면 선을 공부하지 못하겠죠.
기자: 믿음을 가지고 의단을 참구하라입니까?
선원장: 아니, 참구가 아니고. 믿음이 있으면 선지식을 찾아가서 그 가르침을 들어라.
기자: 믿음과 선지식 찾는 것으로 조사선의 길은 완성되어 간다라고 할 수 있겠네요?
선원장: 자기 생각을 가지고 자기 판단에 의지하여 뭔가를 하려 하지 말고, 반드시 바른 안목을 갖춘 선지식을 찾아서 가르침을 들어야 합니다. 왜냐면 아직 깨닫지도 못한 사람이 자기 생각에 의지하여 자기 판단을 가지고 공부를 하면 바른 길로 갈 수가 없기 때문이죠. 깨달음을 체험하기 전까지는 깨달음이 어떤 것인지 절대로 알 수 없기 때문이죠. 그러므로 이미 그 길을 간 분의 지도를 반드시 받아야 합니다.
기자: 그렇다고 하신다면 선생님께서는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셨습니까?
선원장: 글쎄 그걸 뭐 제가 말할 수는 없죠. 다만 저는 이제 만족은 합니다. 만족은 하죠.
기자: 어떤 만족이신지요?
선원장: 우선 정신적으로 소위 말하는 번뇌가 별로 없죠.
사람들에게 뭘 가르쳐 준다고 말을 하지만, 제가 가르쳐 주는 것은 사실 없어요. 번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각자 스스로 자기 내면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그걸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니까, 이제 그 분의 내면에서 저절로 해결될 수 있도록 밖에서 계속 자극을 해 드린다고 할까요? 제 역할이 아마 그런 걸 겁니다. 그런데 결국에는 스스로 해결하는 거죠.
기자: 선원장님은 누구십니까?
선원장: 나요?
기자: 네.
선원장: 글쎄요. 그것도 두 가지로 답변할 수 있는데 세속적으로 얘기하면 아무개씨입니다. 세속을 벗어난 입장에서 얘기를 하면, 그 누구라고 할 게 없죠. 그런데 실제로 공부를 해보면, 단정적으로 이렇다 저렇다 얘기할 수는 없어요. 불이법문이란 이름을 그렇기 때문에 붙이는 거죠. 물론 분별이 없는 상태로 사는 건 아니에요. 분별을 하긴 하는데 분별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겁니다. 세상 살아가면서 보통 사람들이 하는 거다 하거든요. 다 하는데 항상 아무 것도 없어요. 말하자면 늘 그렇게 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절로 그렇게 되거든요. 달리 말할 수가 없어요. 공(空)이라 한다고 공이 결론이냐? 그런게 아니에요. 텅 비어서 없다고 하지만, 없기만 한 게 아니고 또 모든 것이 다 있어요. 모두가 있는데 또 아무것도 없는 거에요. 그래서 둘이 아니라고 했을 겁니다. 있음과 없음이 둘이 아닌 세계다. 제 입장에서는 그 말이 그렇게 보이거든요. 그렇습니다. 그냥. 그러니까 ‘이게 깨달음이다’거나 ‘이게 해탈이다’라고 정해진 것은 없어요.
일시: 10월 1일, 2pm
장소: 서울 무심선원
*무심선원 www.mindfree.net
무심선원은 부산과 대구에도 있으며, 모든 운영은 신도회에
서 하며, 유튜브에서 동영상으로 법문을 들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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